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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 네 님이 만들어주셨습니다.
04. 희미하게 남아있는 촛불처럼.
같은 시간. 여느 때와 같이 차분히 앉아 시나리오 작업에 집중하던 재하도, 문득 느껴지는 진동에 노트북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던 휴대폰을 바라본다. 누구지? 길게 잘 빠진 손가락을 뻗어 휴대폰의 화면을 두 번 톡톡 두드리자 액정 가득히 눈이 내려 쌓이고 있다. 잠금 화면에 날씨를 알려주는 앱이라며, 꽤 유용할 걸? 이라는 말과 함께 예홍이 깔아놓은 탓에 그의 휴대폰에 한가득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것이었다. 밖에 눈 오나? 재하는 머그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리고는 베란다 쪽으로 느긋이 몸을 옮긴다. 글에 집중하느라 눈 오는 지도 몰랐네. 그러고 보니 맞다. 오늘이 크리스마스였지, 싶은 재하다. 아직 누구에서 온 진동인지 확인하지 않았던 그는 허브티를 한 모금 마시고는 액정을 쭉 밀어낸다.
[째하와 찐홍이가 듣는 제야의 종소리♡ 일주일 남았습니다.]
문자가 아니라 알람이었다. 상단바에 깜박이고 있는 20XX년 1월 1일 AM 12:00. 이 숫자가 특히 그의 눈을 이끈다. 나한테 뜬 걸 보면 진예홍한테도 떴겠군. 그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와 함께 소복하게 쌓여가는 함박눈을 바라본다.
* * *
“방송 내내 어디 있었어?”
“그냥 휴게실.”
“휴게실?”
“응.”
거의 방송이 끝날 무렵 즈음에 다시 스튜디오로 복귀한 예홍을 뾰로통한 얼굴을 한 희가 맞이한다. 자기는 일하는 동안 신나게 자유 시간을 누리고 온 친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희야! 얼른 준비 하고 나와. 바로 가평으로 가야 돼.”
“네, 네~ 나 가야겠다.”
“촬영?”
“내가 촬영 아니면 거기까지 갈 일이 뭐가 있으리오.”
“너도 참… 크리스마스에도 즐기질 못하는 구나.”
“우리 직업이 그렇지 뭐. 그럼 나 간다!”
매니저의 재촉이 어지간히도 피곤했던지 희가 예홍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스튜디오를 빠져나간다. 덩그러니 혼자 남게 된 예홍은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는 종이들을 모아 한 곳에 탁탁 정리한다. 남의 크리스마스를 걱정할 때가 아니구나, 진예홍. 문득 제 자신도 오늘 같은 날 할 일이 없다는 건 매한가지인 듯 헛웃음을 짓는다.
퇴근을 하기 위해 목도리를 아무렇게나 칭칭 감아대고 패딩을 목 끝까지 올려 잠근 예홍이, 뒤뚱대며 눈길을 아장아장 재촉해 걸어간다. 역시나. 누가 크리스마스 아니랄까봐, 거리는 한껏 멋을 뽐내며 ‘오늘이 바로 그 크리스마스요!’라며 티를 내고 있다. 혼자 있는 사람들만 괜히 더 외롭네. 그녀는 그런 삐뚤어진 생각과 함께, 얼어버린 눈길을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 하면서도 빨리 들어가고 싶은 마음에 속도를 내 걸어간다. 열심히 걸음을 재촉한 보람이 있었는지, 10분 거리나 되는 정류장에 5분도 안 되어 도착한 예홍이다. 솔로 크리스마스가 외롭긴 해도, 하늘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은 모양인지 어쩜 버스도 딱 타이밍 좋게 제 앞에 선다.
버스에 올라타 단말기에 휴대폰을 찍자 ‘감사합니다.’라는 소리가 ‘퇴근을 축하합니다.’라고 들려, 괜히 웃음이 나는 예홍이다. 이윽고 버스 가장 구석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그녀가 갑갑한지 목도리를 풀러 무릎에 올려놓는다. “역시 대중교통만한 게 없지.” 예홍은 마치 너 따위가 내 출퇴근을 돕지 않아도 나는 하나도 힘들지 않다! 라는 것을 알려주기라도 하려는 듯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지이이잉. 창밖으로 지나다니는 풍경들을 보며 꿀잠에 청하려던 예홍을, 주머니 속 휴대폰 진동이 깨운다. 희 아니면 은겸이겠거니, 집에 가서 확인하려던 그녀는 꼭 지금 확인해야 할 것만 같은 이상한 기분에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낸다.
[몇 년 만에 맞는 솔로 크리스마스에 설마 청승 떨고 있는 거 아니지? -희한한 희]
“꼭 확인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은 무슨…!”
[청승이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하다. 난 누구보다도 행복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으니까 신경 끄시죠.]
문자를 확인한 예홍이 잔뜩 성이 난 표정으로 빠르게 답장을 쳐 내려간다. 그리고는 상큼하게 전송하기를 누르고, 문자가 전송된 것을 확인하자마자 탁 소리가 나게 플립을 닫는다. 다시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고 잠을 청하고자 눈을 감는데, 다시 한 번 진동이 그녀를 깨운다. 이 웬수…! 잠이 다 달아나버린 예홍이 큰 눈을, 더 크게 뜨고는 휴대폰을 신경질적이게 꺼내든다.
[뉘예 뉘예 -희한한 희]
괴상한 캐릭터가 입술을 삐죽 내밀고 굽신대고 있는 이모티콘까지 함께 보낸 희였다. 지이이잉. 답장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던 차에, 연달아 문자가 한 통 더 날라 온다. 개인적으로 데이터를 켜야 하는 메신저 어플 보다는 문자를 좋아하는 예홍의 취향을 파악한 사람이라면 희, 은겸, 재하 이 셋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일단 재하는 아닐 테니… 은겸오빠겠구나. 예홍이 그렇게 생각하고는 상단바에 반짝이고 있는 문자 메시지를 꾸욱 누른다.
[메리 크리스마스. -천하의 썩을 놈]
당연히 아니겠거니 배제 했지만, 어쩌면 마음속으로는 성탄 인사를 가장 받고 싶어 했을 그에게서 온 문자였다.
“메리 크리스마스!”
문이 열리자마자 환하게 웃고 있는 예홍의 모습이 재하의 눈에 들어온다. 누가 크리스마스 아니랄까봐 코에는 루돌프의 코를 연상시키는 빨간 공과, 머리에는 앙증맞은 산타 모자까지 뒤집어 쓴 채 양 손 가득히 먹을 것을 들고 있는 그녀였다. 반갑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한 재하가 현관 손잡이를 붙잡고 어정쩡하게 서있자, “추워! 얼른 들어가자!” 라며 예홍이 그를 밀고 집으로 들어온다.
“뭐야?”
뭐긴? 들어오자마자 양 손 가득 들고 있던 봉지들을 식탁 위에 내려놓던 예홍이 재하의 말에 뒤를 돌아보며 표정으로 대답한다. ‘보면 몰라? 먹을 거잖아.’ 이렇게 말이다.
“누가 지금 그거 물어봐?”
그가 열려 있던 현관문을 마저 닫고 그녀가 서 있는 쪽으로 다가와 선다. 보통 때와 같으면 전혀 이상하지 않을 광경이었지만 오늘 만큼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재하와 예홍이 이별을 선언한 채 꼬박 3일 째, 서로는 이미 스물여덟 시간 째 연락 두절인 상태였었기 때문이다.
“됐고! 접시 좀 가져와 봐. 내가 오늘 오빠가 좋아하는 초밥 먹이겠다고 4인 가족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군분투 했는지 알아?”
찡긋 웃으며 초밥 포장을 뜯던 예홍이 말하다 말고 ‘와우!’ 라며 탄성을 내지른다. 초밥? 그 말에 무게를 잡고 서 있던 재하도 슬그머니 그녀의 옆에 다가선다.
“일단 하나 먹어볼래? 아, 해봐.”
옆에 선 그에게 예홍이 가장 빛깔이 좋은 연어초밥을 하나 꺼내들어 그의 입 쪽으로 갖다 댄다. 자존심을 챙기려는 것인지, 재하가 고개를 살짝 돌리자 그녀의 콧잔등에 잔뜩 주름이 진다. “어허! 냉큼 얼굴을 돌리시오!” 예홍의 불호령에 그가 마지못해 입을 연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입 속으로 쏘옥 들어간 초밥을 우물우물 맛있게도 먹는다.
“맛있지? 오빠 이 집 초밥 좋아하잖아~”
“뭐, 맛은 있네.”
“좋아할 줄 알았어! 사 온 보람이 있네!”
예홍도 작은 입으로 열심히 재잘대더니, 얼른 입 속에 계란말이 초밥을 하나 집어넣고는 “아, 맛있어!” 라는 말을 연발하며 찬장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빛깔 좋은 초밥들을 바라보며 볼이 터지게 먹고 있던 재하가, 그녀의 움직임을 보고 얼른 찬장 쪽으로 뒤따라간다.
“됐어, 내가 할게. 가서 앉아있어.”
그도 예홍의 치고 들어오는 애교들을 보고 있자니, 경계가 조금 허물어졌는지 그녀를 식탁 쪽으로 보내고 접시들을 꺼내어 온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절대 풀리지 않을 거 같던 예홍의 화가 알아서 풀어졌다면 오히려 재하 쪽에서는 감사할 따름이었다. 분홍색 꽃잎이 그려진 접시를 식탁에 놓고 잔도 두 잔 준비해 함께 올려놓는다. 아까 예홍의 손에 들려있던 봉지들 틈에서 언뜻 와인을 본 것 같아서였다.
“오오, 역시 남재하. 센스 쟁이.”
그리고는 거실 찬장에 있는 캔들을 꺼내오더니 라이터로 심지에 불을 붙인다. 아른아른하게 촛불이 흔들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제 자리를 잡고 꼿꼿하고 은은하게 불을 낸다.
“라벤더?”
“응. 네가 저번에 사온 거.”
“이거 도로 찾아가야 하나 고민했는데, 헤헤. 여기서 쓰면 안 가져가도 되겠네?”
헤실헤실 웃으며 장난도 치는 걸 보니, 어느새 예홍은 둘 사이가 3일 째 냉전 중이라는 것을 까먹은 것 같다. 거실 불을 끄고 식탁에 자리를 잡고 앉은 재하가, 그녀에게 젓가락을 챙겨준다. 무심한 듯 다정한 그의 매너에 예홍이 미소를 짓는다.
“아, 맛있겠다! 먹자, 오빠!”
아까부터 줄곧 재하의 얼굴만 바라보던 예홍이, 재하를 생각해서인지 그에게 식사를 권한다. 그도 배고팠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너도 먹어.”라며 젓가락을 든다. 라벤더 향이 그들의 코를 간질이며 크리스마스의 달달한 저녁식사가 시작 되었다. 그렇게 몇 번 정도의 젓가락질이 오간 뒤, 재하가 캔들을 바라보며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넨다.
“갑자기 화는 왜 풀렸어? 갈피를 못 잡겠네.”
연신 웃는 표정으로 입을 오물거리던 예홍이 재하의 질문에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는 그의 시선이 머물고 있는 캔들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화 풀린 거 아니야.”
“그럼?”
예홍의 모순적인 말에 재하가 그녀 쪽으로 시선을 옮긴다. 그러자, 그의 시선을 따라 그녀도 재하의 눈과 눈을 맞춘다.
“화 난 것 보다 오빠 보고 싶어서.”
촛불이 울렁이듯, 재하의 눈도 예홍의 말에 살짝 찰랑거린다.
“남재하랑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더 없이 행복해서, 나 좋으라구 온 거야.”
그들의 3일 간의 싸움은 그 말 한마디로 흐지부지 넘어갔다.
* * *
재하에게서 문자가 온 후, 6일 정도가 흘렀다. ‘째하와 찐홍이가 듣는 제야의 종소리’의 당일이 된 것이다. 그 날 문자를 받은 후 답장을 할까 망설이던 예홍은 결국 보내지 않았다. 별 뜻 없이 보냈을 재하의 문자에 괜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느 연인이 헤어지고 나서 그렇듯 꼭 한 번씩은 찾아온다던 후폭풍인가도 싶었다.
“사랑에는 이유가 없고 그리움에는 마침표가 없다는 말이 있죠. 이제 올해의 마지막이 3시간 앞으로 다가왔네요. 이 라디오를 듣고 계신 많은 분들 중에서, 사랑하고 있는 분들도 있고 사랑을 기다리는 분도 있을 것 같아요 …, 그렇다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척, 기다리고 있는 분께 작은 메시지 한 통을 띄어 보내는 건 어떨까요? 나는 너를 기다리고 있다고…. 오늘도 꽃 드림의 구 희였습니다. 한 해의 마무리 즐겁게 하시길 바라며, 울라라세션의 ‘애타는 마음’ 띄어드리겠습니다.”
희의 엔딩 멘트를 끝으로 스튜디오가 가득히 선곡한 노래로 채워진다. 오늘도 수고 했다는 제스처와 함께 PD와 예홍이 엄지손가락을 들자, 희도 뿌듯한 표정으로 헤드셋을 벗고는 녹음실 부스에서 빠져나온다.
“올해도 수고 했다네, 친구.”
“성질 죽이고 한 해 동안 감성 넘치는 척 대본 쓰느라 너도 수고 했다네, 친구.”
사이좋게 덕담을 주고받은 희와 예홍이 저들끼리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하하호호 웃음을 짓는다. 마지막 방송 마무리까지 끝마친 PD가 제자리에서 일어나자 부스 안에 빨갛게 켜져 있던 온에어라는 LED등의 불빛이 꺼진다.
“우리도 연말인데 굿바이 20XX, 같은 올해를 보내는 송년회 해야하지 않겠어?”
PD가 스텝들에게 말하자 여기저기서 그럼 PD님이 쏘시는 거에요? 라는 말로 금세 주위가 소란스러워진다. “기분이다!”라는 말과 함께 PD가 정리 끝나면 로비에서 모두 모이기로 하자고 말을 마치자 스텝들의 몸짓들이 갑자기 분주하다.
“예홍이랑 희도 갈 거지?”
“전 촬영 때문에 바로 또 내려가야 돼요.”
“아이고… 고생하네. 너는?”
“예홍이야 뭐, 솔로 되고 한가하죠.”
예홍이 대답할 새도 없이 희가 대신 답을 낚아채자, 그녀의 표정이 살짝 찌그러진다. 왜 네가 대신 대답해! 예홍은 슬그머니 손을 희의 어깨 뒤 쪽으로 옮겨 꾸욱 꼬집는다. 아야! 하는 희의 외침에, PD가 “왜그래?”라며 걱정스레 묻자, 희는 어색하게 웃으며 “아, 아니에요… 하핫.” 이라고 대답한다.
“그럼 예홍이도 정리하고 밑으로 내려오는 걸로 하….”
“아, 저도 약속이..”
“뭐야, 둘 다 못 와?”
“미안해요. 선배.”
“어쩔 수 없지, 뭐.”
PD가 아쉽다는 듯 예홍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자, 그러면 시간 되는 사람들만 로비로 집합!” 이라는 말을 남기고 스튜디오를 나선다. 나란히 서서 남겨진 희가 바로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한껏 격양 된 목소리로 쏘아댄다.
“뭐야? 약속? 무슨 약속?”
“그냥. 약속 있어.”
“뭔데? 나한텐 말 못하는 약속도 있어? 누구 만나? 남자 생겼어?”
“아니, 남자는 무슨!”
“그럼 네가 어딜 가?”
“어머, 웃겨. 나는 뭐, 남재하 없으면 사람도 아냐?”
“적어도 내 눈엔?”
“야!”
“어쨌든…, 아. 시간 봐. 나 가야겠다. 문자로 할게!”
신나게 혼자서 떠들어대던 희가, 문 틈 사이로 보이는 매니저의 머리카락이라도 발견했는지 갑자기 서두르며 급하게 코트를 챙겨 입고는 스튜디오를 나간다. 덕분에 얼떨결에 혼자 남겨지게 된 예홍은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짓는다.
“어휴, 정신 없어.”
그리고는 그녀도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고는 얼른 겉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선다.
* * *
북적이는 인파로 가득한 거리에 왠지 동떨어진 느낌을 갖고 서 있는 한 여자 덕분에 재하는 손쉽게 자신이 찾고자 하는 사람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찾는 사람은 다름 아닌, 은은하게 불빛을 내며 환하게 거리를 비추고 있는 캔들 전문 가게 앞에 멍하게 서 있는 예홍이었다. 충분히 고개를 돌리면 알아볼 수 있겠지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캔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는 그녀를, 그는 멀찍이서 지켜만 보고 서 있다. 그도 ‘째하와 찐홍이가 듣는 제야의 종소리’가 못내 신경 쓰여 하루 온종일 고민하던 차에 나온 것이었다.
“휴….”
생각을 다 마쳤는지, 예홍은 갑자기 깊은 한숨을 쉬더니 재하가 서 있는 반대편으로 걸음을 돌려 천천히 인파 속을 헤치고 걷기 시작한다. 혹여나 놓칠세라, 그도 얼른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다.
“아!”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인지 몇 발자국 걸음을 떼던 예홍은 웬 여자와 부딪히고 만다. 그리 세게 부딪힌 것도 아닌 것 같은데 상대방 쪽 여자의 어깨가 너무 튼실했던 것인지, 순간 예홍이 휘청거리다가 넘어지고 말았다. 부딪힌 여자가 당황했는지 바로 예홍 쪽으로 허리를 숙여 그녀를 일으켜 세우며 “괜찮으세요?” 라고 묻는다. 그러자 예홍은 아픈 것보다 창피하다는 생각에 “아, 네… 괜찮아요.” 라는 대답과 함께 털장갑을 낀 손으로 팔과 다리 주변을 두어 번 털어낸다.
“죄송해요. 어디 다치신 데는 없으세요?”
많이 미안한 모양인지 귀엽게 생긴 여자가 예홍에게 묻는다.
“아, 네. 괜찮아요.”
쌓인 눈 위로 살짝 넘어진 터라 크게 다치지도 않아서, 예홍도 역시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그래도 넘어지면서 미처 피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손을 밟혔는지 장갑을 벗은 그녀의 손은 빨갛게 부어있었다.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이시는데…. 놀란 여자가 예홍의 손을 잡더니 “일단 저기로 가요.”라며 다시 그녀를 캔들 가게 쪽으로 이끈다.
“아, 저 괜찮은데..”
괜찮다며 손을 빼보려고 했지만 여자는 들리지 않는 듯 아랑곳 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때, 뒤쪽에서 웬 남자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것도 굉장히 화가 나 흥분 되어 있는 목소리로. 남자는 예홍을 마치 잘 아는 사람인 듯, 일행 아닌 일행 같은 뉘앙스로 여자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며 다가왔다.
“뭐야, 많이 다쳤어? 당신 뭐하는 여자야?”
“네, 네?”
저 옆모습은 필시!…, 아니나 다를까. 재하였다. 좀처럼 큰 소리 내는 것을 싫어하는 그임에도 지금 그는, 제 앞에서 부어진 손목을 보며 여자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가만, 어디 있다가 나온 거지? 당황한 예홍이 이제 와서 이 곳 저 곳을 두리번거린다. 설마 나 따라 다녔던 거야? 그녀의 눈은 재하에게 그렇게 묻고 있었다.
“혹시 아는 사람…?”
여자가 예홍에게 작은 목소리로 되묻자, 그녀는 고개를 내저으며 절대 아니라는 듯 완강한 행동을 취한다. 그녀의 행동이 무색하게 그러면 그럴수록 재하는 더 얼굴을 붉히며 열을 내고 있다.
“봐봐, 다쳤어? 그러게 앞 똑바로 보고 다니랬잖아. 하여간 맨날 넘어지고.”
이제는 여자가 잡고 있던 예홍의 손을 재하가 뺏어가기까지 한다. 그리고는 부어오른 손등을 보고는 여자를 타박한다. 아니,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와가지고는 정신 사납게 난리야? 예홍은 어이가 없는지 웃음이 나올 뿐이다. 세상 오래 살고 보니 이 남자가 내 걱정을 얼굴 붉히면서도 하네.
“천하의 남재하가 내 걱정을 다하네. 살짝 넘어진 거야.”
“살짝 넘어진 게 이거야? 다른 데 다친 데는 없어?”
아까부터 연신 어깨를 붙잡고 흔들며 여기 저기 훑어보던 재하의 과잉 보호가 귀찮아진 예홍이 “아 쫌!” 이라는 말과 함께 재하를 탁 쳐낸다. 그 모습이 어딘가에 연상이랃 되는 듯 지켜보고 서 있던 여자가 “풉” 하며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죄송해요. 이 모르는 남자가 갑자기 화 내셔서 당황하셨죠?”
“뭐? 모르는 남자? 야, 진예홍!”
“신경 쓰지 마시구, 저는 괜찮으니까 걱정 안하셔도 돼요. 그쪽도 많이 놀라셨을 텐데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손하게 재하의 몫까지 여자에게 사과를 한 예홍은, 고개를 돌려 신경질적이게 재하를 째려본다. 그리고는 부어오른 손등을 그의 얼굴 쪽으로 불끈 쥐고 내밀며,
“따라오면 죽어!”
라고 외친다.
몇 분을, 아니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따라다니는지도 모르게 재하는 귀신처럼 존재감 없이 그녀를 쫓아다니는 중이다. 이제 갔겠지… 싶어 주위를 두리번 거리면 그가 서 있고, 또 서 있고. 반복이었다. 슬슬 그의 스토킹(?)에 지친 예홍이 고개를 홱 돌려 그와 눈을 마주친다. 그리고는 꽤 멀찍이 서 있는 그에게 검지를 까딱이며 가까이 오라는 신호를 보낸다.
“왜 자꾸 쫓아다녀?”
“뭐가?”
“뭐가아?”
“나도 내 갈 길 가는 것뿐인데.”
“허!”
그걸 지금 말이라고…! 어이가 없는 예홍이 크게 코웃음을 한 번 친다. 그러자 재하도 제 변명이 꽤나 설득력 없다는 것에 동조하는 지 머쓱하게 뒷머리를 한 번 긁적인다.
“용건이 뭐야?”
“뭐.”
“나 자꾸 따라다니는 용건! 있을 것 아냐.”
“없는데?”
“그걸 지금 나보고 믿으라고?”
“어차피 안 믿을 거면서 왜 물어?”
재하의 영양가 없는 대꾸에, 예홍은 더 이상 말을 이어봤자 소용이 없다고 느꼈는지 다시 걸음을 돌려 가던 길을 재촉한다. 그러면 역시나. 재하는 그 뒤를 소리 없이 쫓아온다.
“아, 쫌!”
뒤에도 눈이 달렸는지, 그새 그걸 느낀 예홍이 다시 몸을 돌려 언성을 높인다. 아까는 그래도 꽤 멀리 서 있었는데, 재하의 다리가 길긴 한 모양인지 어느새 그녀의 바로 코앞에까지 와서 서있다.
“그만 튕겨. 너도 문자 보고 온 거잖아.”
“무, 문자라니?”
“이거.”
예홍의 더듬거리는 말투에, 재하가 씨익 하고 시원한 웃음을 한 번 지어보이더니 휴대폰을 꺼내 보여준다.
[째하와 찐홍이가 듣는 제야의 종소리♡]
일주일 전에 갑작스럽게 그녀의 마음에 날아들었던 문자였다.
“아, 아닌데?”
“말 더듬지 마. 이미 다 들켰으니까.”
휴대폰을 도로 코트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재하가 그녀의 말을 받아친다. 그래, 그의 말이 맞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그녀는 그 문자를 보고, 회식도 거절한 채 이 곳에 나와 있는 게 맞았다.
“그래서 뭐? 어쩌라구. 그냥 난 내 추억을 즐기고 싶어서 나온 것뿐이야.”
“아, 그래?”
“응.”
“그래. 그럼 우리 다시 시작하자.”
재하가 갑자기 던진 말에 예홍은 할 말을 잃고 만다. 크리스마스는 돌아섰던 사람의 마음까지 되돌리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8년 동안 요지부동이던 그의 입에서 “다시”라는 말이 나오다니 말이다.
“무, 뭐?”
“다시 시작하자고.”
“내가 왜?”
“그냥.”
“그냥?”
다시 시작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치고는 너무 성의 없다는 게 함정이라면 함정이겠지. 그녀의 얼굴에 씁쓸한 기운의 미소가 퍼진다. 기대 했던 내가 바보다 … 뭐 이런 의미가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서로의 눈만 바라보며 서 있다가 예홍은 별로 대답을 하고 싶지 않은 모양인지 그를 지나쳐 다시 걸음을 뗀다.
“어디가?”
“말 섞고 싶지 않아서 도피.”
그렇게 한 20 미터 정도 그녀가 앞서 가자, 다시 그도 걸음을 떼고 그녀의 뒤를 쫓기 시작한다. 재하가 따라오고 있다는 것을 그녀도 아는지 한참을 그렇게 인파를 헤치고 걷더니 아까 서 있던 캔들 앞에 멈춰 선다.
“아까도 여기 서 있더니.”
어느새 옆에 다가와 선 재하의 말에 예홍이 고개를 들어 그를 올려다본다. 아까…?
“아까 넘어지기 전에도 여기 서 있었잖아. 양초에 빠졌어? 되게 멍하게 서 있더라.”
캔들을 바라보며 아무렇지도 않게 ‘양초에 빠졌어?’라는 말을 내뱉는 재하의 말에, 예홍은 멍하게 그의 미운 입을 바라만 보고 서 있는다. 양초에 빠졌다라…. 나는 추억에 빠져 있었던 건데, 그 추억은 나 혼자의 추억이었구나.
“정말… 혼자였구나.”
“응?”
예홍의 조용한 속삭임 비슷한 혼잣말에, 캔들에 있던 시선을 거두고 재하가 그녀를 바라본다.
“오빠.”
일주일 만인가? 예홍에게 ‘오빠’라는 말을 듣는 게. 재하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한다.
“나랑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지?”
“응.”
“보여?”
예홍이 갑자기 제 지갑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어 보여준다. 재하의 전역 날 기념으로 찍은 스티커 사진이었다. 환하게 웃고 있는 예홍과 재하의 얼굴이 굉장히 앳되어 보인다. 사진을 보니 옛 생각이 난 건지 그의 얼굴에 웃음이 번진다.
“이 사진이랑 오빠가 다른 점이 뭔 줄 알아?”
그런 그의 표정은 안중에도 없는지, 추워서 코끝까지 빨개진 예홍이 뽀얀 입김을 내며 입을 연다.
“오빤 움직이고 사진은 멈춰있어.”
“……”
“근데 왜 나는 늘 오빠랑 있으면 이 멈춰 있는 사진이랑 있는 것처럼 외로울까?”
그녀의 슬픈 말에 웃고 있던 재하의 얼굴이 어두워진다.
“잘 봐.”
그렇게 표정이 굳은 채 아무 대답 없는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예홍은, 길에 예쁘게 진열 되어있는 촛불에 사진을 가까이 댄다. 찰나의 순간, 말리고자 재하가 한 걸음 다가섰지만 이미 불이 붙은 후였다.
“야, 진예홍!”
화륵, 사진 끄트머리에 작은 불꽃이 붙자 그 짧은 새에 벌써 사진 속 재하의 몸이 검게 그을려지고 있다. 잿더미 속으로 사라져가는 추억들을 차마 볼 수 없었던지, 재하가 빠르게 사진을 낚아채 후후 불어대며 흔들어댄다. 다행히 큰 불꽃이 아니어서인지 금방 꺼졌다. 탄 부분을 탁탁 털어내며 깊게 한숨을 내쉰 그가, 예홍에게로 고개를 돌린다. 그러자 어딘가 혼이 나간 것처럼 보이는 그녀가 서 있었다.
“봤어?”
“너….”
“이렇게 다 탔어, 우리 관계는.”
“……”
예홍의 말에 호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타다 만 사진의 그을진 부분의 잿가루가 하얗게 쌓인 눈 아래로 떨어져 눈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래서 잿가루만 남았어.”
“표현하지 않으면 몰라? 바보야? 애야? 말로 하는 사랑만이 진짜 사랑이야? 네가 하는 사랑은 그런 거야?”
“……”
“그러냐고 묻잖아. 대답해.”
“…말하지 않는데 어떻게 알아?”
“뭐?”
“오빠도 지금 답답해서 나한테 물었잖아. 대답하라고.”‘
“……”
“나도 몰라. 나도 말해줘야 알아. 근데 내가 이상한 거야? 30년을 같이 산 우리 부모님도 싸우고 70년을 함께 산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도 싸우셔. 날 태어나면서부터 쭉 지켜본 우리 엄마랑 나도 서로를 몰라서 싸운다구. 그런데 10년도 안 만난 내가 오빨 어떻게 다 알아?”
“……”
“오빠 넌 내 마음을 그렇게 잘 알아서 날 혼자 뒀니?”
말할수록 목소리가 흐느껴 울듯이 떨리던 예홍은 마침내 감정에 복받쳤는지 제자리에 주저 앉아 큰소리로 울기 시작한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워낙 시끄러운 거리인 탓에 그녀의 울음소리를 귀담아 듣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몇 분 정도 울었을까. 우는 걸 물끄러미 내려다보고만 있던 재하는, 예홍의 흐느낌이 조금 잦아드는 걸 느꼈는지 그녀에게로 한 걸음 다가선다.
“일어나….”
당연히 대답할 턱이 없는 예홍은 고개를 숙이고 일어날 생각을 않는다.
“내가 잘못했어. 일어나.”
결국 재하가 손까지 내밀어 보지만 예홍은 고개를 들어 그 손을 흘끗 쳐다보기만 할 뿐, 훌쩍이며 눈물을 훔친다. “5! 4!” 한참 소란스럽던 주위가 카운트다운으로 동결 되어 둘의 귓가를 때린다. 곧 있으면 ‘째하와 찐홍이가 듣는 제야의 종소리’가 울리려는 모양이다. 주위를 빠르게 둘러본 그가 예홍을 더 이상 맨 바닥에 쭈구려 앉아있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그녀 바로 앞에 서서 무릎을 굽히고 앉는다.
“외롭게 해서 미안해.”
한 마음 한 뜻으로 카운트 하는 사람들 덕에 잘 들리지 않을 법도 했지만, 꽤 가까이 들리는 재하의 목소리에 예홍이 고개를 든다. 아니나 다를까, 자신과 눈높이를 맞추고 앉아있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정말 다시 시작하자.”
곧이어 들린 재하의 말 위로, 힘찬 신년의 종소리가 덮였다. 어쨌거나 둘이 함께 듣는 종소리였다.
이사는 무사히 마쳤습니다!
모두들 걱정 해주신 덕분에요. :)
비축분이 없는 탓에 정신 없이 쓰느라 오타나 문맥이 이상한 것도 고치지 못하고 업댓 하네요..
내일 일어나서 조금 다듬어야겠어요. 하핫. :)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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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락~~~~
작가님 얼마만인가요 방가와서 눙물이~~^^
기다렸어요
이사잘했다니 추운데 고생했겠어요
짐정리라는게 노동이라서 ^^
재네들처럼 우리도 다시 시작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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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감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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