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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I Love Soccer (축구동영상) 원문보기 글쓴이: 대성불패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
이정훈, 이강돈, 유승안, 장종훈, 강정길, 전대영, 황대연을 중심으로한
다이너마이트 타선을 갖춘 빙그레 팬들에게는 공포스런 두 선수가 있었습니다.
해태의 선동렬과 한대화.
<빙그레가 만년 준우승팀이 된 이유에는 선동렬의 영향이 컸다. 단기전에서의
국보급 투수의 전천후 활약은 빙그레의 다이너마인트 타선의 기까지 눌러버렸다.
-사진출처: 오센>
그 때가 경북 상주에서 누에를 치시다가 단돈 5만원을 들고
우리 부모님이 대전으로 이사온지 10년이 되던 때였습니다
고향팀이라는 이유로 만년 응원팀이었던 삼성을 버리고
빙그레로 갈아탄 친 형들이 야구 얘기하면서 항상 했던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동렬..ㅅㅂ.. 우리도 이제 일년만 기다리면 돼."
당시, 한화에는 140을 넘기는 간판 에이스가 없었던 터라,
(140을 넘기는 투수가 이동석과 송진우, 정민철이 있었지만
선동렬의 대항마로는 다들 약간 임팩트가 부족했지요.)
형들은 그토록 93년을 기다렸습니다.
바로, 구대성의 입단을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요.
우리 형제들에게 구대성은 그런 존재였습니다.
평생 라이벌팀으로 경쟁할 줄 알았던 해태의 선동렬의 대항마.
한양대 시절부터 워낙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유명했고
당시 조금 과장된 소문으로는 왼손에다가 150을 찍는다는 얘기가 있었으니
구대성이라면 충분히 선동렬을 잡을 수 있겠다 싶은 거였죠
그랬던 그 선수가 올해 특유의 충청도 미소를 띄우고는
은퇴를 해버렸습니다.
막상 글을 올리려 하니, 제가 직접 만난 적도 없고 지나가다 들은 풍월로
한 선수의 야구 인생을 적으려다보니 부족한 부분도 많이 있을 것 같아 두렵군요.
혹여나 잘못된 부분이 있으시면 한화 올드팬들의 수정도 부탁드립니다.
양신 은퇴에 맞춰, 부족하지만 양신에 관한 추억 글을 올렸었는데
대성불패 은퇴 때는 속상한 일도 있고 해서 그냥 지나쳤더랬습니다.
우리 식구 못챙긴 것 같은 허전함이 있었는데,
글 쓸 수 있도록 용기를 주신 허부대공님과 몇몇 유저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아무래도 감상에 젖어 쓰는 스타일이다보니, 두서 없이 글이 길어질 것 같습니다. <구대성(43)/시드니 블루삭스>
1.출생:1969.8.9
2.신체:183cm/85kg
3.출신:신흥초-충남중-대전고-한양대-빙그레/한화-오릭스-뉴욕메츠-한화-시드니
4.포지션:투수
양해부탁드립니다.
1. '찜푸'를 즐기던 촌놈, 야구부에 가입하다
우리가 자라던 시절에는 한 동네에서 야구배트나 글러브가 참 귀한 시절이었죠.
그 때 당시 주로 하던 놀이가 나이먹기나 불났냐, 오징어 등 그냥 땅에다가
그림만 그릴 수 있으면 손쉽게 할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동네에 돈 좀 있는 친구가 있으면
축구공이나 야구공으로 좀 조직적인 운동을 했던 것 같고,
그게 안되면 테니스공 하나로 주먹으로 치고 받고 하던 주먹 야구를 했었지요.
그걸 대전에서는 '찜푸'라고 불렀던 것 같은데,
구대성이 야구를 처음 접하게된 계기가 됐던 것 같습니다.
동네에서 찜푸좀 한다는 소릴 듣고 초등학교 3학년 때인가
우연히 친구의 글러브를 빌려 캐치볼을 해봤는데,
그 때 느낀 재미가 현재의 구대성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이듬해인 4학년 시절, 신흥초 야구부에 가입.
당시에는 그냥 재미있고 해서 취미로 했다던데
학년이 올라갈 수록 구대성은 그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충남중 시절부터는 동년배 친구들을 모두 초토화 시키기 시작했다는.
구대성의 전설은 지금부터 시작됩니다.
2. 어렸을 때부터 깨달은 진리, 야구는 배짱으로 하는 거여!!
이제는 너무 유명한 일화가 되어 식상해지기기까지한 일화.
충남중 3학년 시절 대전고로 스카웃된 구대성은 고1 올라가던 년초에
당시 강호였던 신일고와의 연습 경기를 갖게 됩니다.
선발로 나서게된 구대성은 1회초 첫 세타자를 연속 볼넷을 내준 뒤,
다음 4-5-6번을 차례로 삼진처리 해 코칭스텝을 당황하게 만들었는데요.
경기가 끝나고 감독이 물어봤답니다.
"첫 게임이라 많이 긴장됐어? 아니면 어디가 아픈거냐?"
코칭스텝마다 다 물어봤다고 하더군요.
뭐가 저렇게 궁금할까하며 귀찮아하던 구대성이 말했답니다.
"그냥 저를 테스트해본겁니다. 이제 전국대회에 나갈 텐데,
그런 큰 경기의 박빙의 상황에서제가 통하는지 안통하는지."
이때부터 구대성은 자기 공에 대한 확신을 얻었다고 스스로 밝히기도 했었죠.
"뭐, 연습경기였으니까 그런 일이 가능했겠지. 분명한 건 그런 테스트를 통해
내 공에 대한 자신감이 더 확실해졌다는 거다-구대성(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칠테면 쳐봐'하는 구대성 특유의 근자감 투구의 시작!
그 해, 구대성은 고1의 나이로 동대문야구장에서 열린 청룡기 대회에서
대전고를 우승으로 이끕니다.
3. 나는 돈 때문에 야구하는 놈 아니다.
구대성이 고3이었던 88년.
선동렬의 유일한 충청도 대항마라고 생각했던 구대성 때문에
우리 형제들이 가슴 졸이던 해였기도 했죠.
당시, 현장에서는 이미 유명해져있던 구대성을 영입하기 위해
빙그레와 한양대 사이에 미묘한 신경전이 있었던 때였습니다.
어느 날,
빙그레이글스 운영팀장은 구대성을 설득하기 위해 3천만원의 계약금을 가지고
구대성의 집으로 찾아옵니다.
대학으로 가지말고, 바로 프로에 오라고.
프로에 바로오면 그만큼 일찍 성공하고, 돈도 많이 벌 수 있다고.
솔직히, 당시 모두들 구대성의 집은 부유한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당연히 빙그레이글스로 입단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었는데,
구대성의 선택은 달랐습니다.
친구들이 같이 묶여있던 것 것인지,
아니면 대학을 꼭 가고 싶어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그 때 구대성이 빙그레이글스 운영팀장에게 했던 말은 유명합니다.
"저 돈 때문에 야구하는 놈 아닙니다."
한번 결정하면 돌이키지 않는 그 성격이 그 때도 있었나봅니다.
그 이후에, 빙그레 운영팀장은 구대성 곁에 얼씬도 못했다고 하네요.
"대학 졸업하고서 프로에 가도 빙그레에서 처음 제시한 돈 정도는 받겠다 싶었다.
어쨌거나 여러모로 대학 진학이 훨씬 낫다는 판단 아래 한양대에 입학했다.
-구대성(박동희 기자의 인터뷰 중)"
IMF한파가 몰아치던 90년대 후반.
IMF는 모기업 중심의 운영을 하던 한국프로야구판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습니다.
유독 투자에 인색하기로 유명한 한화 구단이야 뭐 더할 나위 있나요.
그 때 당시, 선수들과의 연봉 협상에도 진통이 예상됐었는데,
한화는 구대성에게 9천 8백을 제시했고,
구대성은 구단내 최고대우를 요구합니다.
1차 협상에 결렬되고, 2차 협상에 들어갔는데.
이 자리에서 한화 구단은 구대성에게 IMF로 인한 모기업 자금 사정을
속 시원히 얘기합니다.
그러고 난 후, 얼마 있다가 구대성은 흔쾌히 계약서에 사인합니다.
그런데, 금액에서 많이들 놀랐지요.
금액은 구단에서 제시한 9천 8백이 아니라, 9천 3백이었기 때문입니다.
9천 3백은 그 해와 동결된 연봉이었습니다.
한화는 최고 마무리 구대성의 자존심을 조금이라도 살려주고 싶은 생각에
9천8백에 사인하라고 계속 권유했지만,
구대성이 스스로 자기 연봉을 동결시켰다고 하네요.
구단은 9천 8백 받으라 하고,
선수는 한사코 9천 3백만 받는다하고.
이건 무슨 시츄에이션?ㅋ
참 요즘 같이 시장 논리가 명백해진 시각으로 보면
이 시츄에이션은 한국 야구 역사에 황당한 상황으로 기록되어질겁니다.ㅋ
<"뭐, 돈 때문에 야구하는 거 아니지 않나. 구단에서는 재정 보충을 할 수 있어서 좋고,
나는 팬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어서 좋다. -구대성(사진 출처: 여울이의 세상 구경)">
3. 우민태-좌대성을 넘어 '일본 킬러!' 거룩한 계보를 잇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한양대에 입학하게 된 구대성.
구대성과 정민태의 입단으로 한양대는 아마야구에서 굉장한 역사의 발자취를 남깁니다.
바로 우민태-좌대성의 탄생이었지요.
게다가, 당시 LG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었던 최고의 포수 김동수가
한양대 주전 포수였죠.
아마야구 역사 상, 최고의 배터리 조합이 아니었을지..ㅎ
<한양대 시절 구대성(왼)과 정민태(오)>-사진 출처: 박동희 스포츠 춘추
1991년.
우민태-좌대성은 김동수와 함께 대학야구 금자탑을 쌓습니다.
바로, 봄-가을로 열리는 대학야구연맹대회를 모두 우승하는 쾌거!
이것은, 1997년 신일고의 그랜드슬램(황금사자기/청룡기/봉황기)과 함께
아마야구 팬들 사이에서도 종종 회자되는 이야기입니다^^
구대성 또한,
한양대 시절 볼이 제일 좋았다고 스스로 추억하기도 했었죠.
그래서였을까요.
좌완에다가 150 가까이 찍는 빠른 볼을 가지고 있었던 구대성은
국제대회 차출과 연이은 등판으로 어깨에 무리가 오기 시작합니다.
대학 시절 우민태-좌대성 만큼이나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바로 89년 한양대 1학년 시절, 대륙간컵에서 구대성입니다.
당시 구대성은 일본 전에 선발로 나와 1회부터 10회까지 160개 이상의 볼을 뿌렸는데
1회부터 9회까지 정교한 일본 타자들에게 내준 점수가 고작 2점.
지금에야 한국야구가 많이 올라왔지만, 그 때야 뭐.
그 때 구대성은 일본 투수 한명에게 매력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4회부터 나와 10회까지 한국팀 타선을 관광시킨 이 투수는
좀 특이한 폼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리를 들어올려 몸 뒤로 꺾은 뒤, 공에 체중을 실어 던지는 투수였는데
이 투수가 바로, 노모 히데오였습니다.
결국, 구대성의 10회 쐐기 안타를 맞으며 3-2로 한국팀이 패했지만,
지금도 한-일 아마야구의 명승부 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이 대회에서 구대성은 우수투수상과 평균자책상을 받습니다.
구대성이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일본 킬러의 명성을 완성시키지만,
그 시작은 바로 이 대륙간컵대회였습니다.
이선희 투수 이후, 일본 킬러의 거룩한 계보를 이을 차세대 좌완이 나타난 것이지요.
비록 게임은 3-2로 패했지만, 구대성은 대륙간컵으로 인해
자신의 야구 인생에서 한획을 그을 만한 사건을 만납니다.
바로, 노모 히데오의 투구폼을 만나게 된 것인데,
그 대회 이후에 노모의 투구폼에서 영감을 얻어
현재의 구대성 메커니즘이 탄생하게 되었지요.
<얼핏 보기엔 부상의 위험이 높아보이지만, 유연성과 밸런스를 바탕으로
몸과 다리를 뒤로 비틀어 던져 볼을 최대한 감추고, 볼에 무게를 싣는 노모의
투구폼은 구대성 메커니즘의 시초였다.>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구대성은 마쓰자카와의 대결에서
1회부터 9회까지 156개의 공을 뿌리며, 일본 타선을 틀어막았습니다.
역시 일본킬러라는 명성은 명불허전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세계 야구에 증명했죠.
"나는 일본을 1점차로 이길 때가 제일 짜릿하다. 일본에게 3점 이내로만 주면
우리가 일본을 이길 확률은 높아진다."-구대성.
4. 나보다는 팀이 우선 아닌가
1993년.
빙그레는 꿈에 그리던 구대성을 품에 안습니다.
하지만, 대학시절 혹사로 인해 구대성의 어깨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습니다.
빙그레에 입단하자마자, 연습 도중 어깨 통증이 발병했고,
결국 93년 첫해에는 고작 2승에 그치고 맙니다.
<150을 뿌리는 공포의 좌완이라는 언론의 호들갑 속에 입단한 구대성.
하지만, 그의 어깨는 이미 지칠대로 지쳐 있었다.>-사진 출처: etc team
일반 라이트팬들은 화려한 플래쉬를 받고 입단한 구대성에게
약간의 실망감도 드러내기도 했지만, 구대성은 재활에 힘썼고,
결국 그 이듬해인 94년에는 7승 8패 방어율 2.60이라는 가능성을 보입니다.
그러다, 프로야구에 있어 구대성의 가장 전성기라 할 수 있는 96년에는
4관왕(다승-18승, 구원-24세이브, 평균자책-1.88, 승률-0.857)을 차지합니다.
그 때 당시 기자들을 통해 '대성불패'라는 별명을 얻었고,
구대성이 불펜에서 몸만 풀어도 상대팀 타자들은 급해진다는 얘기가 있었습니다.
솔직히 다승왕과 구원왕을 동시에 차지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으로 보면 얼마나 이 선수가 혹사당했을까하는 염려부터 드는게 사실이지요.
이때 구대성은 5회부터 나와 게임을 마무리할 때도 많았고,
어떤 때는 마무리로 던지다가 며칠 후 선발로 다시 올라가곤 했습니다.
구원광과 다승왕을 동시에 거머쥔 선수가 한국 프로야구 역사상 세명인데,
그 중 두명이 송진우와 구대성인 것을 보면, 한화 팬으로써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팀 선수 관리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 같아
씁슬한 면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뭐, 구대성 말마따나 그 땐 그랬으니까요. 그게 당연한 것이었으니까.
"당시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혹사당한다’는. 하지만, 혹사에 정답은 없는 것 같다. 꼭 많이 던진다고 ‘혹사당했다’고 단정하기도 그렇다. 나보다 더 많이 던지고 혹사당했는데도 더 좋은 성적과 더 오래 야구를 한 선배들도 있다. 사실 나도 많이 던진 투수로 알려졌지만, 40살 넘을 때까지 현역에서 뛰었다. 적게 투구해 50살까지 현역생활한다면야 ‘보호’를 해줘야겠지만(웃음).-구대성(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중)"
항상 감독이 나가라고 할 때, 나갈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
그게 프로 선수의 당연한 의무이고, 팬들에 대한 예의라는 것.
현장에서 혹자는 그럽니다.
구대성이 만일 한 포지션만 계속 뛰었다면?
혹사에 항명이라도 하고, 자기 관리를 했었더라면?
활약에 비해 타이틀 홀더가 아닌 그로서는,
만일 그렇게 했다면, 지금 쯤 한국프로야구 역사에 그의 이름이 많을 것이라고.
그러면서 분명한 것은, 구대성은 선발이나 마무리나 어떤 보직을 맡겼어도
한국야구 역사에 한 획을 그었을 것이라고.
선발이나 마무리 어떤 보직을 해도 성공했을 투수는 세명입니다.
선동렬, 이상훈, 그리고 구대성.
2006 삼성과의 한국시리즈 때의 일입니다.
기아와의 준플레이오프부터 치르고 올라온 한화는
류현진, 문동환의 원투펀치의 배터리 방전과
불펜 투수진의 체력 고갈로 삼성과의 게임에서 힘든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마무리 보직을 맡았던 구대성은 3차전에서 마무리로 올라왔다가
다음날 선발로 다시 내보내달라고 코칭스텝에게 조르기 시작합니다.
물론, 당시 한용덕 코치가 허락하지 않아 선발 출전은 불발됐지만,
밤새 김인식 감독과 한용덕 코치에게 졸랐다고 하네요.
자기가 4차전에 선발로 올라가면, 한화가 우승할 수 있다고요.
결국 4차전에서도 문동환이 체력의 한계를 이기지 못하고
4:2로 삼성에게 내줍니다.
2000 시드니 올림픽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팔이 올라가지 않을 정도로 담에 걸렸던 구대성.
김응용 감독과 김인식 투수 코치는 일본 전 선발로 구대성을 무조건 낙점하고
"팔이 올라가게 만들어놔"라는 특명을 줍니다.
3-4위 결정전이었던 일본 전이 있던 전 날.
구대성과 트레이너는 주사도 맞고, 팔에 피도 빼고 해서
팔이 간신히 올라가게는 만들어놨는데.
글쎄 그 팔로 일본 전에서 9회 156개의 공으로 완투하며
대한민국에 동메달과 군면제라는 두가지 선물을 안겨줍니다.
요즘 후배들은 너무 나약하다고 말하는 구대성.
이런 팀 중심의 사고의 일화를 찬찬히 들춰보면
왜 그렇게 후배들에게 다그치는지 그의 마음을 좀 알것 같긴 하군요.
"선수마다 다르겠지만 난 부상을 겁내는 성격이 아니다. 나 스스로 완전히 완쾌됐다고 생각하면, 그리고 일단 공을 던져보고 다 나았다 싶으면 내 몸을 모두 써서 온 힘을 다해 투구하는 스타일이다. ‘또 아프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은 일절 해본 적이 없다. 어쩌면 그런 부정적인 생각을 하지 않았기에 팔이 괜찮았던 것 같다. 후배들에게도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겁을 낼 시간에 야구를 좀 더 열심히 하라’는 것이다. 정말 큰 도움이 될 거다."-구대성(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나보고 혹사를 극복했다고 하는데 그건 나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나에게 어울리는 말은 혹사를 수용했다는 말이 더 어울린다."-구대성
5. 후배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은 그의 야구 철학, 당연히 '배짱'!
구대성이 최고의 마무리로 기억될 수 있는 이유,
바로 그만의 특유한 '배짱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야구를 하면서 ‘내 공이 최고고, 내 공은 타자들이 절대 못 친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다"-구대성(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중)
노모 히데오의 투구폼을 보고 영감을 얻어서일까요?
구대성은 자신의 기술을 후배들에게 전수해주는데 아주 쿨했다고 합니다.
원래는 송진우 선수가 신사답고 그래서 기술 전수를 잘해줄 것 같은데,
그렇지 않다고 하네요. 송진우는 워낙 조용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선수라
후배들을 일일 따라다니면서 너는 어떻고 할 성격이 아니랍니다.
하지만, 구대성은 후배들에게 굉장히 엄한 선배이면서도 장난도 잘치고,
틈틈이 그동완 봐왔던 후배들의 장점과 단점에 대해서도
툭툭 잘 이야기해준다고 합니다.
<구대성이 팀 후배 황재규에게 볼을 잡아채는 법을 알려주고 있다.>
구대성이 주목했던 후배 한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배는 고교시절부터, 정면 승부를 즐기는 두둑한 배짱으로 유명했고,
그 담력 때문에 프로에서도 충분히 통할 것이라는 기대를 한몸에 받았습니다.
하지만, 프로에와서 피장타율이 높고
자신의 공이 쭉쭉 맞아나가는 것을 보고는
특유의 자신감을 잃어버렸다고 하네요.
소문(?)에 의하면 구대성은 가끔 후배 투수들에게 담력을 키워주기 위해
특별한(?) 주문을 한다고 합니다.
WBC에서도 배영수에게 은근히 했던 주문.
한국야구는 일본야구를 따라올려면 30년이 걸린다는 망언을 한 이치로에게
멋지게 하나 주라는거지요..ㅋ
1군 무대를 밟은 그 후배에게 구대성은 또 특별한 주문을 합니다.
지금 서 있는 타자에게 하나 주라는거지요.ㅋ
그것도 한양대 선배이자, 한국 프로야구에서 대 선배인 김동수에게요.
<김동수는 빈볼 시비가 있은 후, 안영명에게 달려가 주먹으로 헤드샷을 날렸다.
몇년 후에 안영명은 그 때의 빈볼 사인은 벤치에서 나왔다고 이야기했는데,
현장 소문에는 구대성이라는 이야기가 있다.-사진출처: 비비디바비디부 블로그>
야구는 기싸움이기 때문에, 기에 절대 눌려서는 안된다는 것이지요.
안영명 빈볼 사건 때, 신기한 장면을 하나 목격했는데, 바로 송진우의 이단 날라차기.ㅋ
평소 신사다워서 전혀 그러지 않을 것 같았던 송진우는
가장 먼저 달려와 김동수에게 이단 날라차기를 선사합니다.
"다른 데였으면 참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먹이 얼굴로 갔다. 어떤 언론에서는
나보고 품의없다고 하던데, 후배가 얼굴에 주먹으로 맞고 있는데 가만 있는 것이
선배로서의 품의인지는 잘 모르겠다."-송진우
박찬호의 이단옆차기와 비슷한 경우일 겁니다.
그 때 이후, LA다저스의 팀 동료들은 박찬호에 대해 더욱 호감을 가졌다지요.
결국 빈볼은 때로는 팀을 하나로 만들고, 당사자들의 기를 키워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메이져 감독들 같은 경우는 경기 흐름을 바꿀 때, 빈볼을 종종 이용하기도 하죠.
안영명에게 사인을 낸게 구대성이 맞다면,
구대성이 가르쳐 주려고 했던 것은 싸움의 기술이 아니고
투수로서 기죽지 말아야하는 배짱이었을 겁니다.
아무리 어리다해도, 마운드에 서는 순간.
투수는 그 팀의 캡틴이니까요.
구대성이 항상 후배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주었던 이유.
그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로 인한 자신감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후배들에게 내 기술을 모두 전수해주고 싶다. 그럴 수록 나도 더 열심히해야하니깐.
그러나 기술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기술을 통해 얻는 자신감, 그게 투수의 재산이다."
-구대성
현진이라는 선물을 남겨두고 가신 대성불패.
그저 항상 감사할 따름이죠.
6. 야구는 즐기는 것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두산의 김현수가 한창 좋을 때, 한 기자가 타석에서의 비법을 물어보니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친다는 게 대답이었다죠.
그래서, 탄생한 게 김현수의 무심타법.
아마, 투수에서 찾으라면 구대성일겁니다.
"가능한 거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다만, 관중석 소리는 많이 듣는 편이다.
오히려 난 그런 소릴 들으며 즐기면서 투구했다. 승부야 타자와 투수인 나와의 싸움이라,
‘이거 던질까, 저거 던질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난 관중석의 작은 소음을 듣고 그걸 즐기면서 던지는 게 훨씬 집중하는 데 도움이 됐다."-구대성(박동희 기자와의 인터뷰 중)
오히려 타자에 너무 집중하면 자기 생각에 도리어 말릴 수 있는게 야구.
그냥 타자와의 승부에서 최대한 마음을 비움으로 더 큰 집중력을 이끌어 낸 것입니다.
2008년 롯데와의 대전 경기 였나요?
롯데와 한화는 한점차 승부로 결국 9회까지 오게 되는데,
롯데 마지막 공격 2사 2루에서 타석에는 손용석 선수가 들어섭니다.
그 때 구대성은 마운드를 보면서 무언가 잠시 골똘히 생각했는데,
그 이후에 투구를 시작합니다.
결국 동점 안타로 구대성은 블론을 기록하지요.
경기가 있은 며칠 후, 기자가 물었답니다.
뭐 생각했냐고. 볼배합?
"언제? 아, 그거~. 그냥 경기 끝나고 뭐 먹을까 생각한건데."
"....."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999년 한국시리즈 5차전.
상황은 4-3 스코어, 9회말 투아웃 2루.
구대성은 한국시리즈 3차전에서 박현승에게 블론 결승타를 맞고
결국 롯데에게 경기를 내줍니다.
5차전 박빙의 이 상황 속에서 들어선 타자가 하필이면 3일 전,
자신에게 블론을 안겨준 롯데의 1번타자 박현승.
트라우마가 있을 법도 한데, 구대성은 특유의 무심투구로
박현승을 2루 땅볼로 잡아내고 한국시리즈 우승을 달성합니다.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직후. 구대성이 최고의 마무리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빠른 볼과 제구력이 겸비된 멘털 투수였기 때문이다.>-사진 출처: 포토로닷컴
무슨 일에서나 즐기는 사람보다 무서운 사람은 없지요.
이런 마인트 컨트롤이 있었기 때문에 150을 던지는 투수가 즐비한 메이져리그에서도
140이 갖 넘는 속구로 빅리그 타자들을 삼진을 잡아내는 투수가 된 것 같습니다.
7. 뚝심과 정을 겸비한 충청도 사나이
1988년 대전고를 다니던 한 칡팬의 사연입니다.
그 팬은 키가 작고 몸도 많이 말랐다고 하네요.
그 당시 대전고는 식당이 좁아서 좀처럼 자리를 잡을 수 없었는데
그 옆에는 선수들이 먹는 자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일반 학생들과 선수들은 반찬이 달랐는데, 아무래도 선수들의 반찬이 더 풍부했겠지요.
어느 날은 이 팬이 식당에 늦게 들어와 밥을 먹는데,
야구 선수 한명이 자기 밥에 선수들 반찬을 올려주고 가더랍니다.
아무 표정 없이 등을 보이면 터벅 터벅 걸어간 사람은 구대성 선배.
잘 모르던 사이였지만, 키도 작고 몸이 마른 이 학생이 불쌍해 보였나봅니다.ㅋ
그 팬은 지금 사십이 됐는데, 아직도 그 사건을 잊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아마시절부터 구대성을 쫓아다니며 응원했다는.ㅎ
한국인, 특히 충청도 사람들은 마음을 잘 드러내질 않죠.
그래서 속정 깊은 사람들이 많고, 특유의 해학과 유머가 있는 동네가 충청도입니다.
구대성을 보면 뭐랄까.
진짜 충청도 사나이 다운 기개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2000년 시즌이 끝나고 한국 야구는 하나의 사건을 맞이합니다.
송진우, 양준혁을 필두로 선수들이 권리를 요구하면서 선수협 구성에 나선 것인데요.
이 때 선수협의 모든 활동비는 선수들 사재를 털어 했기 때문에
운영비가 넉넉치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결국, 초대회장 송진우는 일본으로 건너가 협상 중인 구대성에게 SOS를 쳤고,
구대성은 다음날 말없이 천만원을 송금해왔습니다.
송진우의 "후배들을 위해 뭐라도 남기고 싶은 마음 없냐"는 한마디에요.ㅋ
600만 시대를 연 프로야구.
선수협 구성 또한 자그마한 일조를 했다는 게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현재까지도 롯데팬들에게는 한가지 한이 있지요.
바로, 롯데 팬들이 그렇게 아끼던 공격형 포수 '임수혁 선수'인데요.
2003년 잠시 귀국한 구대성은 한화이글스 사무실에 들릅니다.
그리고는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내가 시키는데로만 해달라"고 하면서
2000만원을 내놓는데, 임수혁 선수 후원금으로 전달해달라고 한거지요.
워낙 구대성 선수의 성격이 그런지라 언론에다가는 많이 알리지는 않았지만,
후원금 전달한 한화이글스 홍보팀장의 마음은 참 훈훈했을겁니다.
나서야할 때는 나서고, 알리지 말아야할 것은 알리지 않으면서
한화 마운드 위에서는 뚝심으로 지켜준 구대성 선수에게 얼마나 고마운지요.
구대성을 보면 참, 충청도 사람도 이렇게 그 맛이 있구나하는 생각이 듭니다.
구대성 선수를 보고 그 누가 우유부단하다는 얘기를 할 수 있겠습니까.
8. '대성불패'에서 '대성불멸'로........
2010년 호주에서는 메이져리그 사무국의 기획으로
10년만에 다시 프로리그가 설립됐습니다.
이미 7월부터 은퇴를 결심한 구대성은 미국과 호주를 찾아다니면서
여생을 보낼 만한 팀을 물색한 것 같은데요,
결국 결정된 팀이 호주의 시드니 블루삭스.
구대성은 호주리그 개막전에 마무리투수로 나서
호주프로리그 최초의 세이브 주인공이 됩니다.
12월 11일 현재까지의 성적이 9경기/1패 8세이브/평균자책점 1.64.
대한민국에서 화려한 레전드로 기억되는 그는
이제 새로운 곳으로 가서 또다른 레전드가 되고 있습니다.
<구대성의 호주 이적. 구단에서 마련해주는 코치 연수를 떠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구대성 그는, 야구 불모지에 가서 새로운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
-사진출처: 제네즈 블로그
야구 선수는 은퇴할 때, 비로소 레전드가 되는 것 같습니다.
그가 남기고 간 발자취, 기록들은 후배들에게 또다른 목표요 롤 모델이 될 것입니다.
<구대성의 기록들>
-국제 야구연맹회장배 야구대회 최우수선수상 (1989년)
-백호기 춘계/추계리그 최우수 투수상 및 체육훈장 기린상 (1989년)
-푸에르토리코 대륙간컵 최우수투수상 및 평균자책상(1989년)
-IBA대회 최우수선수 (1990년)
-아시아선수권대회 금메달 (1990년)
-춘계, 추계리그 최우수투수상 (1991년)
-스페인 대륙간배 국제 야구대회 최우수투수상,승률상 (1991년)
-대통령배 야구대회 최우수투수상 (1992년)
-한국 프로 야구 정규 리그 최우수선수 (1996년)
-한국 프로 야구 평균자책점, 구원, 승률, 다승 1위 4관왕 달성 (1996년)
-한국 프로 야구 평균자책점 1위 (2000년, 2.77)
-총 569경기 등판, 67승 71패, 214세이브, 평균자책점 2.85
-역대 최소경기 200세이브 기록 달성(기존 기록 김용수-539경기)
-역대 최연소경기 200세이브 기록 달성
저번에도 말씀드렸었는데, 우리 한화팬들은 자부심이 있습니다.
장종훈-정민철-송진우-구대성이라는, 다른 팬분들도 인정해주시는 레전드들과
탁구장 소리 듣는 한밭야구장 한켠에 있는 영구 결번들.
그리고, 언제나 경기장에서 그 이름을 연호할 수 있는 선수들의 계보.
장종훈에서..구대성에서..이제 류현진까지.
"장종훈! 장종훈! 장종훈!" /90년대 초반
"구대성! 구대성! 구대성!" /90년대 중반-2000년대 초
"류현진! 류현진! 류현진!" /2000년대 후반
이제 조금 있으면 이 전설들을 한 덕아웃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 또한 오랜 기간 팀을 응원하는 팬들에게는 하나의 즐거움 아닐까요?
"나는 우리팀이 진다고 생각한 적이 한번도 없다.
왜냐면, 진 경기는 모두 잊어버리니까."-구대성(사진출처/스포츠2.0)
<내용 출처>
-박동희 기자의 구대성 인터뷰 '행복한 파이어볼러'
-레지나의 그깟 공놀이 블로그
-한화만 20년 블로그
-제네즈 블로그
-우재의 한의 야구
-여울이의 세상구경 블로그 등
첫댓글 쿠옹이 너무 보고싶어서 퍼왔습니다..
아 구대성선수 아직 은퇴하신게 아니였군요 ㅎ
약간 빗겨쓴모자 심중을 알수없는 귀찮은듯한표정 뒤에서부터나오는 멋진폼 팬은아니었지만 야구만화에서나 나오는 그런아우라가 있었던 선수로 기억합니다.
대성불패!!! 그리고 이글스 다이나마이트 타선에 고원부는 꼭 추가시켜주고 싶네요...ㅠ.ㅠ
안영명.....ㅠㅠ
한화 팬은 아니지만 정말 좋은글입니다. 단한가지 선동열은 단기전에서 정규시즌만큼이나 그렇게 위력적인 투수는 아니었던것 같습니다. 어쩌면 정규시즌의 괴물같은 활약으로 단기전의 활약마져 과대평가된듯 싶습니다. 해태와 선동열하면 이를 갈았던 저도 포스트시즌에서는 선동열은 별로 무서웠던 기억이 없고, 실질적으로도 90년 플옵에서 선동열은 삼성에게 완전히 관광을 당했더군요. 오히려 선동열보다도 송유석, 이강철, 조계현같은 투수들같은 두꺼운 선수층을 자랑하는 팀해태의 투수진이 가장 짜증나게 만들었었습니다.
살면서 선씨한테 사기라도 당하셨나...이제는 구대성글에서 까지 뜬금없이 선동렬을 또 까고있네요...참 근성이 대단도 하심
롯데가 세컨 페이보릿팀인 사람으로써 선동열 하면 이를 갈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이미 은퇴한지 15년가까이 된선수를 설마 아직까지 싫어하겠습니까?다만 본문에 나온 글중 지적하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 사실을 있는그대로 썻을뿐 개인적인 감정이 있어서 까려고 쓴글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히 다른 분들도 알고 계실지 알았는데, 님의 이러한 댓글은 좀 당황스럽군요.
아니 롯데가 세컨이고 말고 관싱도없구요...지금 이글에 뜬금없이 선감독 까는글이 웃긴겁니다..당황은 님이 할말이 아니고 이 댓글 본 제가 하고싶거든요..이건 뭐 선자만 나오면 그놈의 이는 만날 가시니 안따깝습니다
이 게시판 아니 이 카페 전체를 봐도 어디 종목불문 특정선수를 상대로 님처럼 이가 갈린다는 극단적 표현을 수차례 상습적 반 복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있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더군다나 그 선수가 범법행위도 아니고 최선을 다해 이겼다는 이유만으로 말입니다
선동렬은 정규시즌 보다 포스트시즌 성적이 더 안좋았던것은 사실이죠. 하지만 정규시즌에 비해서 안좋았던것 뿐, 그래도 포스트시즌 성적 역시 최고 수준이었습니다.
음 가만히 님의 세번째 댓글을 읽어보니 제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 표현이 동갑내기짱님이 말씀하신것처럼 보는 분들에 따라서 극단적인 표현의 반복사용으로 비추어질 오해의 여지가 있을수도 있겠군요. 그렇다면 앞으로 그 부분은 제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겠습니다.
님 첫번째 팀은 어딥니까???전에 무슨 팀이라고 했는데 알고는 있으나 말은 안하겠습니다....어서 님글검색해서 답변다세요
한화는 이제 회장님에 쿠옹 까지 스탭으로 돌아오시면...투수 양성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네요 정말....
아...쿠옹;; ㅠㅠ "장종훈-정민철-송진우-구대성이라는, 다른 팬분들도 인정해주시는 레전드들과 탁구장 소리 듣는 한밭야구장 한켠에 있는 영구 결번들." 이문구가 이글스 광팬으로써 심금을 울리네요..ㅠㅠ 대성불패도 영구결번 시켜주면 어디 덧나나? 에효;; ㅠㅠ 암튼 아직도 우승했을때의 쿠옹 모습이 선하네요.....ㅠㅠ
제일 좋아하는 야구선수는? 이라는 질문을 받으면 참 고민됩니다. 송진우? 장종훈? 이정훈? 한용덕? 정민철? 류현진? 구대성..? 레전드로 행복한 한화팬입니다...올해는 꼴찌에서 벗어나길 ㅠㅠ
좋은 글 잘봤습니다. 쿠옹이 초등학교 선배님이셨네요 ㅠㅠ
제 마음속의 우상이고, 한화팬들의 자존심입니다.
영원한 이글스 팬들의 형님이시죠. 언제나 믿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분.
돌아오시는 날을 조용히 기다릴 따름입니다.
대성불멸 정말 잘어울리는 이름이네요...쿠옹이야 이글스의 상징이자 한국야구의 상징이죠
정말 멋있네요.. 사족으로 선발 마무리 둘다 성공할 투수 선,구,야생마에 이강철님도 추가하고 싶네요. 구옹 못지않은 배짱이셨죠.
아...한화 21년팬으로써 너무 뿌듯합니다...이정훈-이강돈-장종훈-정민철-송진우-한용덕-이상군-쿠옹...ㄷㄷㄷ 레전드의 천국 한화죠~!! 한화도 은근히 팬층이 두껍다는걸 문학이나 잠실 목동가면 느낍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이글스 팬으로써 너무 뿌듯하군요^^
약물 본즈도 안 거르실 분...
그리고 왠지 안 맞으실 분
삼진 하고도 쿨하게 넘기실 분...
이래서 이글스를 버릴 수 없습니다ㅠ 저 빙그레 유니폼이 너무나 그립지만....
대성불패 은퇴하는날 참석못해 죄책감 까지 들었습니다. 영원불멸 대성불패 !!
전 그때 군인이었습니다..ㅠㅠ
울컥하네요. 아직도 롯데와의 한국시리즈에서 삐딱하게 모자 쓰고 무표정으로 상대 타자를 박살내던 장면들이 기억나네요. 정말 너무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우리 한화엔 인성 좋으신 선수들이 좀 많지요. 이젠 다 은퇴했나? ㅎㅎ
현진이가 남아있잖아요~ㅋㅋㅋ
대성불패 ㅎㅎㅎ 멋져용
제가 제일 좋아했던 선수가 장종훈이고 구대성입니다! 정말 멋진 선수들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