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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 누가복음 6:17-26
"17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오사 평지에 서시니 그 제자의 많은 무리와 예수의 말씀도 듣고 병 고침을 받으려고 유대 사방과 예루살렘과 두로와 시돈의 해안으로부터 온 많은 백성도 있더라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19 온 무리가 예수를 만지려고 힘쓰니 이는 능력이 예수께로부터 나와서 모든 사람을 낫게 함이러라 20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이르시되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21 지금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지금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22 인자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도다 23 그 날에 기뻐하고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24 그러나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너희는 너희의 위로를 이미 받았도다 25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26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그들의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
내용분해 : A. 한 평지에서의 무리들의 운집 및 치유 사역 (17-19절)
1. 예수님께서 산에서 내려와 한 평지에 계실 때였음(17a절)
2. 그때 제자들 뿐만 아니라 유대, 예루살렘,
두로와 시돈의 해안 지역 등 각처에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병고침도 얻기 위해 몰려옮 (17b절)
3. 더러운 귀신에게 고통받던 자들이 고침을 얻음 (18절)
4. 병고침의 능력이 예수님과 함께하자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과 접촉하고자 애씀 (19절)
B. 복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언(20-23절)
1.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하여 가난한 자에게 복을 선언하시며
천국이 그들의 것이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심 (20절)
2. 주린 자에게 복을 선언하시며
그들이 배부르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심 (21a절)
3. 현재 우는 자에게 복을 선언하시며
그들이 장차 웃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심 (21b절)
4. 예수님으로 인해 핍박받는 자에게 복을 선언하심 (22-23절)
- 예수님께서 자신 때문에 미움받고, 소외당하고, 욕먹고,
버림당하면 오히려 복이 있다 하심 (22절)
- 그 이유는 하늘에서 상이 클 것이기 때문이라 하심 (23a절)
- 또 과거 유대인들이 선지자들을 똑같이 핍박했음을 지적하심 (23b절)
C. 화 있는 사람들에 대한 선언(24-26절)
1. 부요한 자에게 화를 선언하시며 이는 저희가
이미 위로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심 (24절)
2. 현재 배부른 자에게 화를 선언하시며
저희가 주리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심 (25a절)
3. 현재 웃는 자에게 화를 선언하시며
저희가 애통하며 울게 될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심 (25b절)
4.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에게 화를 선언하시며
과거에 거짓 선지자들도 같은 대우를 받았음을 예시하심 (26 절)
오늘도 행복한 주일 아침입니다. 오늘도 우리에게 복 있다 말씀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까지도 우리를 복 있다하시며, 우리가 소외당하고 욕먹고, 버림당한다 하더라도 실망하거나 낙담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선지자들도 동일한 핍박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요, 우리의 방패 되시는 하나님을 우리 한마음으로 찬양하십시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 사랑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아멘!!!
오늘 아침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은 누가복음 6:17-26절 말씀으로 평지 수훈의 서두 및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복과 화의 선언의 말씀입니다. 본 문단에서 시작하여 6:49 에 이르는 네 문단은 소위 평지 수훈 (Sermon on the Plain) 으로 알려진 내용입니다. 예수님의 갈릴리 사역은 열두 제자의 전도 파송을 전후한 시점을 기준으로 하여 4:14-8:56까지가 전기 사역, 9:1-50까지가 후기 사역으로 구분됩니다. 그런데 갈릴리 전기 사역은 열두 사도의 임명을 기준으로 그 이전을 1차 갈릴리 사역, 그 이후를 2차 갈릴리 사역으로 좀더 세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6:17-49까지에 기록된 평지 수훈은 1차 갈릴리 사역의 종결을 알리면서, 예수님께서 1차 갈릴리 사역 기간에 주로 베푸셨던 핵심적인 교훈들을 집약하여 제시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선 그 내용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첫 문단인 6:17-26 에서는 평지 수훈의 서두 및 두 종류의 사람들에 대한 복과 화를 선언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자, 주린 자, 우는 자, 예수님으로 인해 미움과 소외와 핍박을 당하는 자들에게 복이 있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부요한 자, 배부른 자,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는 자들에게는 화를 선언하심 으로써, 세상의 통념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복(福)과 화(福)의 개념을 제시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어 6:27-36은 하나님 나라의 시민에게 요구되는 절대적 사랑과 자비의 실천 윤리를 제시하고 계시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윤리와 세상의 일반적 윤리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고 계십니다. 곧 세상의 일반적 윤리는 자기를 사랑하고 선대하는 자만을 사랑하고 선대하며, 또 남에게 꾸어 줄 때도 다시 되받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꾸어 주지만(32-34절).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그들과 달리 원수를 사랑하며, 자신을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남에게 무언가를 줄 때에는 돌려줄 것을 요구하지 말고 주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27-31절).
이어 6:37-42 에서는 타인에 대한 비판 금지 및 용서와 관용의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 (38절)고 하심으로 남에 대한 판단이 마치 부메랑(Boomerang) 처럼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게 된다는 것을 제시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이웃 뿐 아니라 자기 자신도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판단을 받을 것을 인식하고서, 남의 사소한 잘못에 쉽게 정죄의 판단을 내리는 세상 사람들과 달리 용서와 관용의 시각으로 타인을 대해야 함을 교훈하시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6:43-49은 평지 수훈을 종결하는 부분으로서, 나무와 열매의 비유 및 집과 주초의 두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 두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백성들은 가르침을 단지 듣고 아는 것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한편, 본 평지 수훈(平地垂訓) 은 마태복음 5-7 장에 기록되어 있는 산상 수훈(山上垂訓 )과 내용 및 구성면에서 상당한 공통점을 지니는데, 우선 평지 수훈과 산상 수훈은 다같이 복 있는 자들에 대한 선언으로 시작되며, 건축자의 비유로 종결되는 구성상의 통일성을 보여 줍니다. 또 내용면에서도 평지 수훈에 수록된 교훈의 대부분이 산상 수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차이점도 발견되는데, 그것은 우선 분량면에서 누가복음의 평지 수훈이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의 양보다 훨씬 적다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을 포함하여 기도에 관한 교훈이나 등불의 비유, 탐심 및 염려에 관한 교훈 등이 마태복음에서는 모두 갈릴리 사역 도중에 행하신 산상 수훈에 포함되어 있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유대 사역을 보도하고 있는 부분인 11-12장에 분산되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공통점 혹은 차이점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평지 수훈 같은 대설교 집회를 몇 차례 가지셨으며, 산상수훈에 기록된 여러 교훈들을 비단 갈릴리 사역 기간 뿐 아니라, 기회 있을 때마다 거듭 강조하셨기 때문이라고 간주합니다. 마태는 이러한 예수님의 교훈을 한곳에 모아 기록한 반면, 연대기 순서를 중시하여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그 핵심적인 내용들을 각기 그것이 주어졌던 때나 각 문맥에 따라 분산 배치한 까닮으로 봅니다.
한편,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설교하신 장소를 ‘산’ 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며(마 5:1), 본문에서는 ‘평지’ 라고 소개하고 있는데(6:17), 이 때문에 마태복음의 설교를 산상 수훈으로, 누가복음의 설교를 평지 수훈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차이를 가지고 성급하게 산상 수훈과 평지수훈이 별개의 셜교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산이라고 하는 것은 산악 지대를 의미할 수도 있으며, 또한 평지는 산 아래의 평원이 아니라 산 위의 평평한 지역을 일컬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구성상의 통일성이나 내용의 유사성을 고려할 때, 산상 수훈과 평지 수훈은 동일한 설교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즉 마태나 누가는 모두 예수님께서 갈릴리의 특정 지역에서 행하신, 대설교 집회에서의 핵심적인 교훈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며, 단 주제별 전개 방식을 따라 복음서를 기록한 마태는 예수님의 교훈을 한 곳에 집약시켜 기록하고 있으며, 연대기적 전개 방식을 따라 복음서를 기록한 누가는 핵심 교훈을 본문에 기록하되, 필요에 따라 분산하여 기록하기도 한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공관복음서를 보면 동일한 사건이나 교훈을 기록하는 대목에 있어서 유사점이 많이 있는 반면에 차이점 또한 발견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유사점(Similarity )은 각기 다른 저자들이 동일한 사건 및 교훈을 보도하는데 따른 필연적 결과이며, 차이점은 비록 동일한 사건 및 교훈을 보도하더라도 저자에 따라 보는 관점 및 시각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복음서들의 차이점을 주목하면, 각 복음서의 저자가 어떤 관점에서 어떤 요소를 강조하고 있는지 저자의 신학적 입장 (Theological View of the Author) 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본문의 평지 수훈은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과 약간의 차이점이 발견되는데, 이 차이점이 곧 누가의 신학적 주제들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제공하는 요소인 것입니다.
먼저 마태복음의 산상 수훈에서는 복 있는 자에 대한 선언이 ‘심령이 가난한 자’로부터 출발 하지만, 누가복음의 평지 수훈에서는 그냥 ‘가난한 자’로 출발합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복 있는 자로 선언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그냥 ‘주리는 자’가 복 있는 자로 선언됩니다. 더욱이 마태복음에서는 복 있는 자들에 대한 선언으로 끝나지만, 누가복음에서는 ‘배부자, 웃는 자, 모든 사람에게 칭찬 듣는 자’ 들에 대한 화(福)가 선언되고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살인, 간음, 이혼, 맹세, 보복법 등 구약 율법의 조항들을 예로 들며, 그것이 내면의 차원에서도 지켜져야 함을 제시하고 있지만(마 5:21-40), 누가복음에서는 이 대목이 생략되어 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자기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는 것을 세리나 이방인들도 그렇게 하고 있다고 사랑을 행하는 수준을 이방인과 비교하고 있지만(5:47), 누가복음에서는 ‘죄인들도 이렇게 하느니라’ (6:34) 고 함으로써 이방인과 비교하는 부분을 생략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복잡하고 어려운 것 같지만 마태복음이 유대인을 일차 대상으로 한 복음서이며, 누가복음은 이방인을 일차 대상으로 한 복음서라는 것을 고려하면 의외로 이해가 분명해집니다. 즉 마태는 산상 수훈에서 의(義)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위가 아니라 내면(內面)의 영역과 관계된 것임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율법적 사고에 익숙한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진정한 의는 율법을 단지 행위로 지키는 수준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이 내면화(In ternalized) 되었을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마태는 천국 시민의 윤리가 율법을 행위로만 이해하는 서기관 및 바리새인들의 의의 수준보다 탁월하다는 것(마5:20)을 율법과의 관계를 조명함으로써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본서에서는 천국 시민의 윤리를 가르치기 위해 구태여 율법과의 관계를 조명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누가복음은 로마 제국 내의 이방 출신 기독교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기에, 누가는 본서에서 하나님 나라는 힘과 권력에 의해 유지되는 로마 제국과 다른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세상 나라의 기준으로는 부유하고 웃으며 칭찬 듣는 자가 복된 자이지만, 오히려 그들은 바로 그들이 현세(現世)에서 누리는 그것 때문에,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거부할 가능성이 높은 ‘화’ 있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로마라고 하는 세상 제국에서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핍박받고 소외받는 그리스도인들을 누가는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가난하고, 이제 울며, 이제 주리고, 예수님 때문에 핍박과 미움과 소외를 받아야 하는 자들을 향해, 복 있는 자들이라고 선언하며, 격려하고 있는 것은 계급주의적(階級主義的)인 편견 때문이 결코 아니라, 누가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때문에 실제적으로 로마라고 하는 세상나라 속에서 가난하고 슬퍼하며 핍박받고 있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격려하며,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시민은 세상에 속한 로마 제국의 시민들과는 다른 차원의 윤리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함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을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무엇일까요?
그건 "축복은 완전한 자가 아니라 부족함을 더 많이 깨닫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17절부터 19절까지에는 평지에 내려오신 주님을 향해, 수많은 무리들이 몰려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주님께로 몰려왔던 사람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들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특정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에게는 질병이나 더러운 귀신들로 인한 고통 등, 한결같이 그 어떤 문제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그 어떤 말 못할 고통으로 인해 어찌 하든지 주님을 만짐으로써 고통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그들의 모습은, 주님으로부터 그 어떤 교훈이나 은혜를 받으려고 애쓰기는 커녕, 오히려 주님을 책잡으려던 바리새인들과는 완전히 대조적인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11절). 그렇다면 이러한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여러분, 오늘날 심리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인간이 행동하게 되는 근본적인 동기는 바로 '결핍'이라고 합니다. 즉 인간은 아무 부족함을 느끼지 못할 때에는 결코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 반면, 그 무엇인가 결핍을 느낄 때 그것을 채우고자 비로소 움직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영적인 차원에서도 한치의 어김 없이 적용되는 진리로서, 바로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스스로 완전한 의인이라고 자부하며 주님을 책잡으려던 바리새인들과 자신의 문제로 인해 고통을 겪으며 어찌하든 주님께 가까이 나아오려던 수많은 사람들의 예가 바로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이러한 사실은 성경의 진리와 세상 종교를 가장 분명하게 구분해 주는 척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혼히 불교나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혼합주의 종교에서는 자신이 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는 첩경이라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완전하다고 자부하는 자에게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던져졌던 것과 같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먼저 자신의 의로움이나 완전함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추함과 부족함을 더 깊이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자신의 완전함과 의로움을 내세우며 교만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아파하며 가슴을 치던 세리와 같은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분명히 이르시기를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눅18:14). 따라서 성도 여러분께서는 이와 같은 주님의 역설적인 말씀을 기억하면서, 언제나 스스로의 부족함을 절감하며 자신을 낮춤으로써 오히려 하나님으로부터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함께 기도드리시겠습니다.
<참고 문헌>
"손에 잡히는 구약개론"IVP
"성경개관 구약편" 부흥과개혁사
"ESV스터디바이블" 부흥과개혁사
"위드바이블" 바이블넷
"옥스퍼드 원어 성경대전" 제자원 바이블네트
"구약개론"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구약총론" 생명의말씀사
"두란노How주석시리즈"두란노아카데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