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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를 푸는 다윗
삼상 25:32-38
32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3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34 나를 막아 너를 해하지 않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라
35 다윗이 그가 가져온 것을 그의 손에서 받고 그에게 이르되 네 집으로 평안히 올라가라 내가 네 말을 듣고 네 청을 허락하노라
36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와 같은 잔치를 그의 집에 배설하고 크게 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하다가
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38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삼상 25:32-38 / [아비가일의 선물을 받는 다윗] 다윗은 이미 노기가 풀려 아비가일에게 이와 같이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토록 위급한 때에 그대를 보내주셨으니 그분께 찬양을 드립니다! 33) 그리고 이토록 슬기롭고 신중하게 행동하여 나의 큰 허물을 미리 막아준 그대의 슬기에 찬양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내가 직접 원수를 갚느라고 수많은 사람을 죽일 뻔하였습니다. 그랬더라면 내가 얼마나 무서운 죄를 지었겠습니까! 34) 그대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못하도록 나를 미리 막아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걸고 확실히 말하지만, 그대가 이렇게 급히 와서 나를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나발의 집안에서는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살아남을 자가 하나도 없었을 것입니다.' 35) 또한 다윗은 아비가일의 선물을 받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대가 내게 요청한 것은 내가 모두 들어주었으니 안심하고 집으로 돌아가시오!' 36) [나발의 죽음] 아비가일이 집에 돌아와보니, 나발이 자기의 일꾼들과 술잔치를 벌이고 앉아 있었는데, 그는 자신이 마치 왕이라도 된 것처럼 호화로운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그는 기분이 무척 좋아보였으나 너무 취해서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날이 밝을 때까지 나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37) 다음날 아침이 되어 나발이 술에서 깨어나자, 아비가일이 그동안에 있었던 일을 그에게 이야기하였다. 나발은 그 이야기를 듣다가 갑자기 실신하여 더 이상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돌처럼 굳어졌다. 38) 열흘이 지났을 때 주께서 그를 치자 그는 죽고 말았다.
다윗은 자신으로 피 흘려 친히 보복할 것을 막은 아비가일의 지혜를 칭찬합니다. 한편 무지한 나발은 다윗의 일을 전해 듣고는 놀라서 앓다가 죽게 됩니다.
아비가일을 축복하는 다윗(32-35) 아비가일의 발 빠른 움직임과 그녀의 신앙적인 고백과 복을 선언하는 내용을 들은 다윗은 아비가일이 외모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지혜롭고 분별력 있는 여인임을 알게 됩니다. 다윗 역시 아비가일에게 복을 선언합니다. 다윗은 특별히 33-34절에서 아비가일이 복수하는 것을 막았다고 말합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아침까지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두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피 흘리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현명한 여인 아비가일을 통해서 다윗이 저지를 분노의 결과를 미리 막으신 겁니다. 창세기 20장 6절을 보면 “하나님이 꿈에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온전한 마음으로 이렇게 한 줄을 나도 알았으므로 너를 막아 내게 범죄하지 아니하게 하였나니 여인에게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함이 이 때문이니라”고 함으로써 하나님은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를 취하지 못하도록 도움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아비가일은 분노로 가득 차서 복수의 칼을 차고 달려오는 다윗을 만나 다윗에게 은혜를 입었습니다. 자칫 큰 살상이 있었을 법한 상황을 축복의 상황으로 바꿨습니다.
나발의 죽음(36-38) 아비가일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 술에 취해 정신없이 즐거워하는 남편을 보게 됩니다. 다윗의 진노와 복수의 칼에 죽임을 당할 뻔 한 사건을 뒤에서 마무리하고 아무런 사고 없이 해결한 아비가일은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술에 취해 있는 남편에게 지금 말하기 보다는 다음날 아침 나발이 술에서 깰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침이 되어 어제 있었던 일을 듣게 된 나발은 심히 낙담했습니다. 낙담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와야마트 리뽀’로 ‘마음이 죽었다’라는 뜻입니다. 아내가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었으니 고맙고 감사하게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나발은 죽을 수도 있었던 상황 때문에 너무 놀랐을 겁니다. 마음이 죽은 것과 다를 바 없게 되자 몸이 돌과 같이 굳었습니다. 그리고 열흘 후에 죽게 됩니다. 좋은 소식은 사람의 마음을 생기 있게 하지만 나쁜 소식은 사람의 마음을 낙담하게 합니다. 본문은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이 나발을 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은혜 베풀기를 잘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았던 다윗이 범죄하지 않도록 하나님이 도우셨습니다.
적 용 : 우리는 살다 보면 여러 가지 위험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셔서 위험한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하신 경험이 있습니까? 또 지금 어떤 일을 통해 이런 소망을 갖게 됩니까?
매일 새벽마다 호수에서 배를 타며 명상을 즐기는 수도승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명상 중에 어떤 배가 쿵 부딪혔습니다. 수도승이 화가 나 고개를 돌려 보았더니 빈 배였습니다. 아무도 타지 않았던 배가 그냥 떠내려 오면서 부딪힌 것입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화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많은 감정들 중에서 분노라는 감정은 인간이 가장 많이 느끼는 감정입니다. 화나게 하는 그 상대가 어떤 사정이 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면, 화가 가라앉거나 없어질 수도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화를 키우거나 만들어내는 분노는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호크마 주석
=====25:32
본 절에서 다윗은 아비가일이 자신을 만나러 온 것을, 그녀의 남편 나발의 구명(救命)이라는 사사로운 차원이 아닌, 보다 고차원적인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으로 인식한다(Klein, Fay).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 - 이 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서 당신의 계약적 의무를 신실하게 이행하신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명칭이다(20:12). 찬송할지로다 - 이같은 언급은 하나님의 오묘한 주권적 섭리에 따라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신 놀랍고 위대한 일을 찬양하는 문맥에서 종종 나타난다(왕상 1:48; 5:7; 8:15, 56; 10:9; 눅 1:68; 엡 1:3).
=====25:33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 여기서 `칭찬할지며'(* , 바라크)는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동일한 단어이다. 그런데 이 단어는 항상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 속에서 사용된다는 점에서, 여기의 이 `칭찬'은 말할 나위 없이 아비가일에게 그같은 `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여기의 `지혜'(* , 타암)는 신중한 행동을 동반하는 분별력 혹은 판단력을 가리킨다(욥 12;20; 시 119:66; 잠 26:16).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될 바는, 위와같은 `지혜'를 소유한 여자만이 진정 아름다운 여인으로 인정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3절; 잠 11:22).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 , 바라크)도 32절의 `찬송할지로다'와 앞의 `칭찬할지며'와 그 기본형이 동일한 단어이다. 따라서 여기의 이 단어는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복이 있기를 하나님께 비는 일종의 기도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삼하 14:22; 19:39). 바로 이같은 점에서 여기의 `복이 있을지로다'와 같은 성경적 축복 행위는, 복을 주는 주체자에 대한 분명한 인식도 없이 의례적으로 하는 우리나라 전래의 `복 받으세요'라는 축복적 인사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25:34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 맹세의 불변성과 신실성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는 관용적 술어이다. 남자(* , 마쉐틴 베키르) - 문자적으로 `벽을 향해 오줌을 누는 자'(one who urinates against the wall)란 뜻으로서, `남자'(man)를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인 `이쉬'(* )의 속어(俗語)이다. 22절 주석 참조.
=====25:35
네 청을 허락하노나 - 여기서 `허락 하노라'(* , 나사 파님)는 문자적으로 `얼굴을 들게 해주다'란 의미이다(창 19:21; 32:20, 21). 그런데 히브리인들이 `청원을 허락하다'란 의미를 이같이 표현한 까닭은, 청원의 당사자는 겸손한 자세를 취한 나머지 항상 얼굴을 들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일 것이다.
=====25:36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배설하고 - 나발의 이같은 행동은 자신에게 유익을 주었던(7, 15, 16절) 다윗의 자그마한 요구(8절)를 모욕적으로 거절했던 사실(10, 11절)과는 극명하게 대조된다. 즉 나발은 자신이 욕심껏 먹고 마시는 데는 아낄 줄 몰랐지만 , 대의(大義)를 위해 자신의 몫을 조금 나눠주는 데에는 인색하기 그지없는 실로 `미련한 자'였다(25절). 대취하여 - 양털을 깎는 잔치 때에 술에 취하는 것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는 보편적이었던 것 같다(삼하 13:23-28). 그러므로 나발이 그 당시의 풍습에 따라 이같이 취했다고 할지라도, 아무튼 술에 취하는 일 재는 경건 생활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정죄되어 마땅하다(롬 13;13; 고전 5:11; 6:10). 따라서 성경은 `술취하는 일'을 어리석은 자의 한 특징으로 말하고 있다(잠 20:1; 23:21; 26:9; 눅 21:34). 마음에 기뻐하므로 - 만취로 인해 정신을 잃을 정도로 방종의 상태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킨다. 후에 다윗의 아들 압살롬은 자신의 여동생 다말을 겁탈했던 자신의 이복 형제 암논을 야털 깎는 잔치에 초대한 후, 그가 바로 위와 같은 상태에 빠지면 그를 살해하려고 했었다(삼하 13:28).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 여기서 `다소간의 말'이란 다윗이 나발의 모욕적인 응답(10, 11절)에 격분한 나머지, 그를 죽이러 병사들을 데리고 쫓아왔던 사실을 가리킨다(13절). 그런데 아비가일이 여기서 이같이 행동한 까닭은 (1) 나발이 술에 취한 그때는 잘잘못을 따질 상황이 아니었으며 (2) 술에 취한 나발에게 다윗이 그를 죽이려 했다는 말을 할 경우, 그는 정신적 충격을 크게 받을 것이 뻔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같은 점에서, 아비가일은 가히 `총명한 여인'이라 할 수 있다(3절).
=====25:37
이 일 - 이것은 91) 다윗이 나발을 죽이러 갈멜로 향했었다는 사실(13절). (2) 아비가일이 다윗의 분노를 진정시키기 위하여 많은 음식을 다윗에게 가져다 주었으며, 또한 다윗에 대한 나발의 냉대(10, 11절)를 그의 어리석음 탓으로 돌렸다는 사실(Kle- in, Keil, Lange; 25절) 등으로 이해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의 `이 일'(* , 하데바림 하엘레)이 복수(複數)라는 점에서, 위의 (1) (2) 모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발에게 더 큰 충격을 준 `일'은 (1)의 사실일 것이다. 낙담하여 - 문자적으로는 `그의 마음이 그 사람 안에서 죽었다'(his heart died within him, KJV)란 뜻이다. 즉 나발의 `기뻐하던 마음'(36절)이 이제 `죽어버린 마음'이 되어버린 것을 뜻한다(Klein).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 `돌과 같이 되었더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돌이 되었더니'란 뜻으로, 즉 강한 충력(shock)에 의하여 어떤 심인성(心因性)질환에 걸린 것을 말한다.
=====25:38
한 열흘 후 - 여기서 `열흘'은 나발이 병고로 고생하던 기간이다. 아마도 나발은 어떤 충격 내지는 고혈압 등으로 인한 전신 마비의 중풍(中風)에 걸렸던 듯하다.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 여기의 `치시매'(* , 나가프)는 `상처내다', `쳐부수다'란 의미로서, 신적(神的) 징벌 행위를 가리키는 단어이다(삼하 12;15; 슥 14:18). 결국 나발의 죽음은 그의 어리석음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임이 분명하다(29절). 그가 죽으니라 - 나발은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다윗에게 자기 소유물 중 일부를 공급해 주어야 할 의무를 지니고 있었다. (1) 공적인면에서 다윗은 나발이 속한 민족 이스라엘의 구원자였다(17:41-51; 18:5, 30; 19:8; 23:1-5). (2) 개인적인 면에서 다윗은 나발의 양떼와 소유를 보호해 준 은인(恩人)이었다(7절). (3) 이 외에도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신 10:18, 19)을 생각한다면, 나발이 다윗 일행을 접대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나발은 예의를 갖춘 다윗의 정당한 요구(4-9절)를 교만한 말로써 일축하였다(10, 11절). 나발의 이 악한 행동은 스스로가 자기 무덤을 판 격이 되고 말았다. 즉 나발은 그의 행동에 격분한 다윗(12, 13절)에게 복수당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공의의 하나님에 의해 병으로 죽게됨으로써 보응을 받았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사건은 재물과 돈을 생의 최고 목표로 추구하는 자의 말로(末路)는 파멸이라(딤전 6:9, 10)는 엄숙한 경고와 교훈을 제공하고 있다.
< 설 교 >
변치않는 마음의 바탕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하였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그대를 보내어 이렇게 만나게 하여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오. 내가 오늘 사람을 죽이거나 나의 손으로 직접 원수를 갚지 않도록, 그대가 나를 지켜 주었으니, 슬기롭게 권면하여 준 그대에게도 감사하오. 하나님이 그대에게 복을 베풀어 주시기를 바라오. 그대에게 아무런 해도 입히지 못하도록 나를 막아주신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대가 급히 와서 이렇게 나를 맞이하지 않았더라면, 나발의 집안에는 내일 아침이 밝을 때까지 남자는 하나도 살아남지 못할 뻔하였소.”
그리고 다윗은 그 여인이 자기에게 가져온 것들을 받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평안히 집으로 돌아가시오. 내가 그대의 말대로 할 터이니, 걱정하지 마시오.” 아비가일이 나발에게 돌아와 보니, 그는 자기 집에서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대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비가일은 다음날 아침이 밝을 때까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나발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침이 되어 나발이 술에서 깨었을 때에, 그의 아내는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그에게 말하였다. 그러자 그는 갑자기 심장이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다. 열흘쯤 지났을 때에, 주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다.]
• 다윗의 낭인 시절
사울과 다윗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사무엘기를 읽다가 ‘한결같다’는 말을 떠올리게 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처음부터 끝까지 꼭 같다’는 뜻이지만, ‘결’이라는 단어가 들어있어 여러 가지 느낌을 자아내는 단어입니다. ‘결’의 사전적 정의는 “나뭇결 돌결들처럼 굳고 무른 조직의 부분이 모여 이룬 바탕의 모양”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물론 “마음씨, 성격”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결국 ‘바탕’입니다. 한결같다는 것을 저는 마음 바탕이 그대로 유지된다는 말로 받아들입니다.
세월이 지나가면 사람은 변하게 마련입니다. 모습도 변하고, 취미도, 가치관도 달라집니다. 하지만 ‘바탕’조차 변하면 곤란합니다. 제게는 오래된 벗들이 있습니다. 그들과의 우정이 지속된 까닭도 어쩌면 세월이 변해도 여전한 마음결, 삶의 태도, 혹은 지향하는 바가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왕이 되기 전, 사울은 참 매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운다는 전갈을 받았을 때 그는 펄쩍 뛰며 자신은 그럴만한 사람이 못된다고 말했습니다. 제비를 뽑아 왕을 뽑는 자리에 부득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행여 남의 눈에 띌세라 짐짝 뒤에 숨어 있었습니다. 왕으로 뽑혔으면서도 집으로 돌아가 여전히 소를 몰고 밭에 나가 일하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하던가요? 왕이 된 사울은 변했습니다. 서른 살에 왕이 되어 42년을 권좌에 있는 동안 그는 점차 권력을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사람으로 전락했습니다. 민중들의 마음이 젊은 다윗에게 기울고 있음을 직감하면서부터 질투심에 눈이 멀어 버렸습니다. 새 사람이 되게 하는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혔던 사울은, 어느덧 광기에 사로잡힌 사람이 된 것입니다. 이런 전락을 매개한 것은 다름 아닌 ‘권력에 대한 집착’이었습니다. 집착은 부자유입니다. 부자유에서 불안이 나오고, 불안은 다른 이들에 대한 의심과 폭력으로 변하게 마련입니다.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물리치면서 이스라엘 역사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던 다윗은 사울의 적의의 표적이 되어 망명길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권력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소용돌이를 그는 일찌감치 맛본 셈입니다. 그는 구명도생을 위해 블레셋으로 달아납니다만,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사람들을 속이려고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척 하기도 했습니다. 성문 문짝 위에 아무렇게나 글자를 긁적거리기도 하고, 수염에 침을 질질 흘리기도 했습니다. 위험을 직감한 그는 블레셋을 떠나 광야에 있는 아둘람 굴에 피신처를 마련하고 재기의 날을 기다렸습니다.
다윗이 그곳에 있다는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몰려들었습니다. 대개는 압제를 받는 사람들, 빚에 시달리는 사람들, 원통하고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예기치 않게 그는 역사의 주변부로 내몰린 이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인식론적 특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그는 세상의 주변부로 밀려난 사람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나중에 그의 통치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 정치적 판단
식구들이 불어나면서 그 집단을 먹이고, 재우고, 보호하는 일은 다윗이 감당해야 할 큰 문제였습니다. 오늘 본문은 이런 정황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바란 광야에서 삶터를 일구고 있던 마온 사람 나발은 대부호였습니다. 그는 갈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가 가진 가축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였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그런 재산을 일군 것을 보면 그는 선대로부터 많은 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사업 수완이 뛰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가 ‘고집이 세고 행실이 포악하였다’고 전합니다. 그의 이름 ‘나발’은 ‘바보’ 혹은 ‘어리석다’는 뜻입니다. 물론 이 이름은 사무엘기를 기록한 사람의 작명일 가능성이 큽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을 통해 성서기자는 그가 재산을 일구고 유지하는 일에는 탁월했지만, 정작 알아야 할 것은 알지 못하는 사람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지요.
어느 날 다윗은 갈멜에서 나발의 양털깎이 축제가 열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다윗은 부하들을 나발에게 보냅니다. 자기들이 나발의 재산에 손해를 끼친 적이 없고, 오히려 그들의 보호자 노릇을 했던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적절한 보상을 요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말은 정중하지만 그의 요구는 단호합니다. 목초지를 찾아 이리저리 떠돌며 살던 유목민들은 생존을 위해 벌이는 약탈을 정당한 행위로 간주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다윗의 요구가 무리한 것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발은 다윗의 정중한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오히려 다윗을 모욕합니다.
“도대체 다윗이란 자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냐? 요즈음은 종들이 모두 저마다 주인에게서 뛰쳐나가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내가 어찌, 빵이나 물이나, 양털 깎는 일꾼들에게 주려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겠느냐?”(25:10-11)
나발의 말은 협박자와는 거래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선언입니다. 게다가 그는 다윗을 주인을 버리고 뛰쳐나온 종놈이라는 말로 자극합니다. 대자산가 나발의 눈에는 다윗과 그 일행이 일하기 싫어서 빈둥거리는 건달패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불의한 사회체제의 변두리로 어쩔 수 없이 내몰리는 이들의 아픔과 한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쓰레기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나발은 다윗의 존재를 알았을 겁니다.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다윗을 도움으로써 사울을 적으로 만들 생각이 없습니다. 권력의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사울이었으니 말입니다. 부하들의 보고를 들은 다윗은 대노했습니다. 그는 나발에게 보복을 다짐하며 부하들을 무장시킵니다. 바야흐로 피바람이 불어오려는 찰나였습니다. 다윗은 내일 아침 날이 밝아오기 전에 나발의 집안 남자들을 다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께 무슨 벌이라도 받겠다고 말합니다. 냉철하고, 강인하던 다윗은 간 데 없고, 자기 분에 못 이겨 펄펄 뛰는 다윗의 모습이 낯섭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약하고, 이기적이고, 쉽사리 어긋난 길로 갈 수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라는 ‘덮개’가 하늘을 가려 그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여유가 없습니다.
• 頂門一鍼의 한 마디
성서 기자는 이 급박한 상황에서 장면을 전환하고 있습니다. 일꾼 가운데 한 사람이 나발의 아내인 아비가일에게 달려가 자초지종을 다 알립니다. 성경은 이 여인이 ‘이해심도 많고 용모도 아름다웠다’고 전합니다. 일꾼의 말을 들은 아비가일은 자기들에게 닥쳐오는 재앙의 쓰나미를 직감합니다. 남편과 이 문제를 상의할 시간이 없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일꾼들에게 서둘러 다윗에게 바칠 선물을 준비하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빵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부대와 이미 요리하여 놓은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뭉치 백 개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지고 길을 떠납니다. 빵과 포도주와 요리된 양은 아비가일이 다윗을 일꾼이 아니라 보호자로 여긴다는 뜻이고, 저장식품인 볶은 곡식과 건포도, 무화과는 다윗의 처지를 배려한 음식이었습니다.
다윗 일행과 마주치자 아비가일은 황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립니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스스로를 종으로 지칭하며 애원합니다. 부디 사리분별을 하지 못하는 나발에게 마음을 쓰지 말고 자기의 말을 들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준비한 선물을 받아달라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나발의 무지와 무례를 징계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느닷없는 사태 앞에서 말을 잊은 다윗에게 아비가일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상기시킵니다.
비록 지금은 곤란한 지경에 있지만 주님의 전쟁을 수행해온 다윗을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도우시고, 세워주실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당장의 곤란함을 모면하기 위해 하는 미끈한 아첨이 아니었습니다. 누군가의 가슴에 가닿는 것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말하는 이의 진정성입니다. 진정이 담긴 아비가일은 말은 곤고한 날을 보내면서 쪼그라들고, 격분으로 거칠어진 다윗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애무였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다윗의 시선을 가리고 있던 절망과 분노의 ‘덮개’를 벗겨내고, 푸른 하늘을 그에게 열어주었습니다.
침묵하고 있었지만 다윗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의 귀 기울임이 그 증거입니다. 마음 하나 지키지 못해 인생에 실패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의 지혜자는 “그 무엇보다도 너는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잠4:23)라고 말했던 것이지요. 아비가일은 사납게 날뛰고 있던 다윗의 마음의 고삐를 잡아 다윗의 손에 돌려주었습니다. 이제 아비가일은 다윗의 마음에 頂門一鍼의 한 마디를 던집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될 분이 사소한 격분을 못 이겨 몸소 원수를 갚는다면, 이 일은 두고두고 부끄러운 기억으로 남을 거라는 것이었습니다. 부드럽지만 따끔한 충고였습니다.
다윗은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오늘 그대를 보내어 이렇게 만나게 하여 주셨으니, 주님께 찬양을 드리오”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지켜준 아비가일에게도 감사한다고 말합니다.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지요? 살다보면 곁길로 나가기도 하고, 함정에 빠지기도 하는 게 인생입니다. 아름다운 만남이란 우리를 마땅히 서야 할 자리로 되돌려 놓는 만남일 겁니다.
• 나르시스적 인물의 운명
집으로 돌아간 아비가일은 기가 막힌 광경에 아연했을 겁니다. 나발은 자기 집에서 왕이나 차릴 만한 술잔치를 베풀고, 취할 대로 취하여서, 흥겨운 기분이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의 배고픈 사정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으면서, 자족적인 기쁨에 취해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술에 취했지만, 어쩌면 자아에 도취해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는 나발에게서 연못에 비친 자기 모습에 매혹되었던 나르시스의 모습을 봅니다. 그는 다른 이들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홀로 자족할 뿐, 타인의 눈물과 슬픔에 반응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고 느끼는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이 그를 ‘바보’라고 하는 것은 그 때문일 겁니다.
아무 말도 않던 아비가일은 다음 날 아침 나발이 술에서 깨자 그 동안에 있었던 일을 모두 알렸습니다. 그러자 나발의 심장이 갑자기 멎고, 몸이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이 대목에서 성서기자의 서술은 마치 판결문처럼 건조하게 바뀝니다. “열흘쯤 지났을 때에, 주님께서 나발을 치시니, 그가 죽었다.” 이것은 홀로 자족한 자의 운명에 대한 성경의 암시입니다. 나발의 잔치는 끝났습니다. 그가 왕의 식탁처럼 차려놓고, 흥겨운 취기 속에서 홀로 만족했던 것이 하나님의 눈 밖에 났습니다.
오늘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혹시 남에게 돌아갈 몫이 아닌가 돌아보아야 합니다. 풍요로운 삶은 육체를 가진 인간의 자연스런 소망이지만, 그런 마음들이 이루어내는 세상은 어둡기 이를 데 없습니다. 넉넉지는 않더라도 함께 나누어 가지면서 따뜻한 우정을 맛볼 때 영혼은 고양되게 마련입니다. 석유 문명의 종언을 예고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들려옵니다. 에너지 과다 소비에 바탕을 둔 문명은 이제 지속 불가능합니다. 에너지를 순전히 사람의 노동력으로 계산한다면 오늘날 미국인 한 사람은 하루 종일 150명의 노예를 부리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석탄과 석유는 수많은 생명체의 압축이요 결정체입니다. 그런데 석유 1리터가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적어도 25톤 이상의 생명체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지금 우리 문명은 지구가 장구한 세월 동안 축적해온 것들에 대한 폭력적 낭비를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은 바야흐로 나발의 잔치가 끝나가는 시대입니다. 시급히 절제하는 삶으로 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두려운 아침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베 피에르 신부의 말이 천둥처럼 제게 다가옵니다. 그는 신자와 비신자 사이에는 근본적인 구분이 없다고 말합니다. 오직 ‘자신을 숭배하는 자’와 ‘타인과 공감하는 자’, 타인의 고통 앞에서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과 타인들을 고통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 간의 구분이 있다는 것입니다. 굳이 구분하자면 아비가일은 공감하는 사람이었고 나발은 자신을 숭배하는 자였습니다.
나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나발의 잔칫상을 떠나 아비가일의 자리에 서기를 바랍니다. 立冬을 지나 이제 점점 추워질 것입니다. 하지만 사랑하고 돌보고 나누려는 우리 마음의 온기는 점점 높아지기를 소망합니다. 좋으신 주님의 은총이 숨결 거친 사람들을 향해 사랑과 우정을 가지고 나아가는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분노를 멋지게 다스리기
삼상 25장 32~33절 / 김학중목사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상 25장 32절에서 33절 말씀입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아멘.
일본에서 지난 6월 28일 쓰시마라고 하는 사람의 재판이 열렸습니다. 이 사람 무슨 혐의로 재판을 받았느냐. 2021년 8월에 일본의 한 지하철에서 일면식도 없는 많은 여성들을 상대로 묻지마 범죄를 저지른 사람입니다. 당시에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10명이 피해를 당하게 되고 많은 사상자가 났는데, 이 쓰시마라는 사람이 왜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고 재판을 받은 거냐. 그가 법정에서 이렇게 진술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만나고 사귀었던 여성들은 다 나를 무시했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고 내가 만나는 여자들은 나를 다 깔봤다. 그래서 나를 무시하는 여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도 지하철에서 여자들이 내 앞에 보이는데 누군지는 모르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내 안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견딜 수 없어서 그들에게 보복하는 마음으로 홧김에 그런 일을 저질렀다." 어처구니없고 무서운 얘기지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2019년도에 한 은행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우리나라 사람들이 스트레스 때문에, 다시 말하면 홧김에 즉흥적으로 소비하는 비용이 한 달에 얼마나 될까 그랬더니, 내가 화가 나고 기분이 안 좋으면 소비를 할 때 나타나는 비용이 한 달에 20만 7천 원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은 조금 더 될 것 같아요. 한 달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5월 달에 한 초등학생이 부모님께 야단을 맞고 홧김에 건물에다가 불을 질러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지금 제가 소개하는 이 사건들의 본질 속에 들어있는 건 뭐냐. 어린아이들로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분노에 휘둘리는 우리 사회를 보여주는 사건들이죠.
우리 안에는 감정이라는 게 있습니다. 슬픔의 감정, 기쁨의 감정, 뭐 다양한 감정들이 존재하는데 그중의 하나가 분노하는 감정. 이게 시간이 가면 갈수록 우리 사회에서 굉장히 많이 대두가 되고 있고, 이 분노의 감정 때문에 인생을 망치는 사람도 있고 이걸 잘 조절해서 결국 사람들에게 칭찬도 받고 성공하는 인생도 있습니다. 이 분노의 문제를 사람들이 대충 생각하는데, 이걸 잘 알고 대처하지 못하면 훌륭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분노라고 하는 감정은 우리 안에 있는 거잖아요, 각자 자기 안에. 근데 이게 상한 감정이거든요, 지금 상처 난 감정. 어쨌든 간에 지금 분노가 일어났다는 것은 내 안에 상한 감정의 상태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거를 사람들이 치료하지 않아요, 해결하지 않아요. 아주 어릴 때 부모로부터 학대를 당했거나 부당한 대우 때문에 어릴 적에 분노라는 감정을 가지고 어른이 되고 결혼해서 자식을 낳고 사회인이 되면 그 감정이 해결이 안 되는 거죠. 여전히 자기 안에 그 상처가 있으니까 몸은 컸고 세상은 변했지만 불쑥불쑥 그 상처가 표현되어서 애꿎은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심지어 자식들에게, 배우자에게 끊임없는 고통을 안겨주는 사람들. 그러니까 이 상한 감정, 다시 말하면 나를 분노케 하는 아픈 이 감정을 어떻게 치료하고 다독이고 내가 이것을 직면할 것이냐. 이건 오늘 교회를 다니는 우리들에게도 대단히 중요한 문제예요. 그래서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이 분노를, 화를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느냐를 오늘 성경이 주는 지혜로 우리가 한번 맞이해 보려고 합니다.
사무엘상 25장에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윗은 너무 잘 아는 사람 아닙니까? 이스라엘의 참 위대한 왕이지요. 이 다윗은 베들레헴의 유지인 이새의 막내아들로 태어나요. 그러다가 어느 날 전쟁에서 골리앗을 한 번에 이기면서 정말 세상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전쟁의 영웅이 되고 이스라엘 영웅이 되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은 이 영웅이 남은 인생은 탄탄대로를 달릴 줄 알았어요. 근데 웬걸, 그의 현실은 당시의 왕이었던 사울 왕의 질투로 다윗은 그때부터 살기 위해 도망치는 도망자가 되고, 사울은 끊임없이 그를 쫓아다니는 추격전이 벌어집니다. 오늘 성경도 바로 그 대목의 일환이에요. 사울을 피해 끝없이 도망 다니던 다윗이 자기 부하들과 함께 마온이라고 하는 마을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 마온이라고 하는 마을은 어떤 특징이 있냐면, 사울 왕이 과거에 전쟁에서 이기고 자신의 그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기념비를 세우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이 마온 사람들은 사울 왕을 되게 좋아하는 성향을 가진 사람들, 쉽게 말하면 "우리의 왕은 사울밖에 없어. 지금 사울과 다윗이 경쟁하고 있는데 우리가 인정하는 왕은 사울이야. 우리를 지켜주고 보호하고 우리가 세금 내고 인정하는 왕은 사울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에요. 그런데 그곳에 다윗 일행이 지금 들어가는 거예요.
자, 거기서 어떤 일이 있었느냐. 이 마온 지역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아주 대표적인 부자 한 사람이 오늘 성경에 소개가 돼요. 이름이 나발이에요. 이름이 좀 거시기하죠? 노발대발도 아니고 나발. 이름에서 벌써 이 사람 좀 약간 그렇잖아요. 이름 잘 지어야 돼요. 학중, 이런 이름을... 제일 부자예요. 얼마나 부자였냐면 그 당시에 양 3천 마리를 키우고 염소 천 마리, 이건 상상할 수 없는 부유한 사람이에요. 근데 이렇게 엄청난 가축들을 키우면서 아주 거부로 살던 나발이라는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봄가을에 1년에 두 번씩 양의 털을 깎는 날을 지정합니다. 이날은 완전히 축제예요. 그래서 집안 사람들 다 초대하고 마을 사람들 다 초대해 가지고 잔치를 벌이면서 축제처럼 양의 털을 깎으면서 즐기는 시간이에요. 사람들이 이걸 기다리는 거예요.
때마침 양의 털을 깎는 그날이 온 거예요. 그래서 다윗이 자기가 데리고 다니는 부하들이 당시 한 600명 정도가 됐는데, 리더의 고충이라는 게 그런 거 아닙니까? "나 혼자 먹고 사는 문제가 아니라 나를 따라다니는 사람들을 어떻게 잘 살게 해줄 거냐." 이게 리더의 고충이죠. 이들에게 먹을 것, 잠자리 이런 것들을 제공해야 되는 다윗으로서는 '아, 때마침 마을의 축제가 벌어지고 사람들이 다 이웃들을 초대하는 날이니까 이것을 기념해서 양식을 좀 얻어야 되겠다' 이렇게 생각해서 자기 부하들을 몇 명 나발에게 보냅니다. "이렇게 좋은 날 우리 장군께서 우리 군인들이 먹을 수 있는 양식 좀 주실 수 있으면 저희가 감사히 받겠습니다." 아주 정중하게 다윗이 양식을 요청해요.
그런데 이 나발이라고 하는 부자가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 10절, 11절에 보니까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즘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아주 모욕적인, 그리고 상대를 아주 얕보는, 그래서 상대가 자존심 상하고 굉장히 마음이 상할 수 있는 얘기를 하면서 단호하게 거절을 해요. 앞에서 말한 것처럼 마온 사람들은 사울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거예요. 지금 그런 점에서 사울과 적대 관계에 있던 다윗을 곱게 볼 리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서적으로 다윗을 인정하지 않는 데다가 완전히 다윗을 무시해도 그냥 세상 말로 멍멍이 무시를 하는 거죠. 개무시를 하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거절도 예의가 있어야 돼요. 충고도 예의가 있어야 돼요. 근데 지금 이 나발이라는 사람은 다윗의 집안도 거론하면서 아버지도 끌어들이면서 형편없는 사람으로 그를 전락시키면서 모욕을 주는 거예요.
부하들에게 이 소식을 들은 다윗이 듣자마자 눈이 돌아가고 뚜껑이 열립니다. 분노가 자기를 지배하는 거예요. 이걸 주체를 못 해요. 그리고 "더도 볼 것도 없다" 부하들 400명을 이끌고 직접 나발의 집으로 출정을 합니다. 자기 부하가 600명이었는데 당시 3분의 2를 동원할 만큼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거예요. "그 집안을 완전히 싹 쓸어버리겠다." 그래서 400명의 무장한 군인들을 데리고서 나발의 집으로 가는 거예요.
자, 여러분, 이 다윗이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다윗이 이전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냐면 "내 마음에 드는 자라" 칭찬을 받았던 사람이에요. 하나님께서 직접 이스라엘의 사울 왕을 내리고 다윗을 왕으로 세워야겠다고 하나님께서 낙점할 만큼 하나님이 직접 마음에 들었던 하나님의 계획 속에 있는 그런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런 다윗이 지금 분별력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분노에 붙잡혀 가지고 무차별하게 한 가문을 몰살시키겠다고 군인들을 출정시켜서 가고 있지 않아요?
사람들이 되게 분노할 때 가만히 보면 자기를 잃어버리는 거예요. 사실은 분노라는 게 외부에서 들어오는 타인과 환경과 나와의 싸움인데 나를 놓치는 거죠. 내 생각을 잃어버리는 거고 내 인생의 목표와 내 계획을 잃어버린 채 남에 의해서 내가 끌려가는 게 분노하는 거예요. 다윗은 지금 하나님께서 그에게 거룩한 사명을 주셨거든요. 아주 큰 목표를 주셨어요. 굉장히 세상적으로 말하면 아주 거룩한 꿈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지금 분노라고 하는 아주 작은 사건 하나 때문에 그 아주 자기 인생에 너무 중요한 꿈과 비전과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완전히 망각한 채, "내가 이 사람한테 복수하고 내가 당한 모욕을 되갚아 주는 것 외에는 지금 아무런 관심이 없는 거예요."
우리가 살면서 분노라는 감정이 안 생길 수는 없지요. 그러나 그런 상황이 올 때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지혜 중의 하나는 뭐냐면, 사람이 좀 화가 날 때마다 냉정하게 "내가 원래 삶에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목표가 뭐냐? 하나님이 나에게 허락하신 사명이 뭐냐? 지금 내가 이루려고 하는 꿈이 뭐냐?" 이런 거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사소한 감정에 내 인생 전체의 나의 삶의 계획과 목표를 상실하지 말고, 내가 원래 가려고 했던 길에 그런 나를 가로막는 돌뿌리나 장애물들이 있을지라도, 그 분노라는 장애물들이 나를 가로막을지라도 내가 원래 이루려고 하는 꿈을 생각하면 그런 감정들을 쉽게 내가 동의하지 않고 이겨낼 수 있다는 거예요.
어떤 상황이든 간에 좀 경지에 오른 사람들을 보면 다 이걸 잘하는 사람들이에요. 농구의 황제 마이클 조던이 자기의 책 속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에서 활동할 때 워낙 대단한 선수죠. 선수들 한두 명이, 세 명이 막아도 못 막는 거예요. 상대 팀은 항상 마이클 조던 때문에 지는 거예요. 상대 팀이 이 마이클 조던 팀과 경기를 할 때는 "이 조던만 막으면 된다" 그래서 모든 작전을 다 동원하는데 매번 지는 거예요. 그래서 종종 이런 작전을 들고 나오는데, 이 마이클 조던의 멘탈을 무너뜨리는 작전을 가지고 나와요. 그래서 경기를 하다 보면 이 농구라는 게 막 몸을 부딪치고 격한 운동이잖아요. 그러면 선수들끼리 이 막심한 말을 주고받게 한답니다, 의도적으로. 어떤 말을 하느냐. "흑인 주제에", "네 아버지가 흑인이니까 너도 흑인이지, 네 자식도 흑인이지" 막 그러면서 가족사를 들먹이면서 완전히 사람이 흥분할 수밖에 없도록. 여러분, 우리가 딱 어떤 그 얘기를 하면 누구든지 분노하는 주제가 있잖아요. 그 상황이 되면 분노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잖아요. 우리 다 그런 게 있어. 이걸 건들면 사람이 막 일어나는 게 있는데, 마이클 조던의 그런 가족 이야기 이런 걸 딱 건드는 거예요. 그러면 당연히 웬만한 선수 같으면 그 순간 그걸 못 참고요 "너 뭐라 그랬어?" 그러고 농구공 다 팽개치고, 경기고 뭐고 막 가서 쥐어박고 그러면서 퇴장당하고 경기는 끝나는 거죠. 이게 적들의, 상대편의 작전인 거예요. 실제로 그렇게 해서 경기를 망치는 스포츠 선수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근데 조던은 달랐어요. 그런 심한 모욕을 듣고 멘탈을 무너뜨릴 도전이 올 때마다 오히려 조던은 그때부터 더 경기력이 높아지면서 평상시보다 점수를 더 많이 내 가지고 경기를 이겨 버립니다. 왜 그랬느냐? 조던의 비결이라는 거예요. 상대가 그렇게 가족까지 건들고 부모, 아이까지 아내까지 건들면 자기도 사람이니까 평정심을 잃는다는 거예요. 이걸 복수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때 자기가 선택하는 거죠. "내 이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내가 진정한 복수는 여기서 흥분해서 치고받고 한 대 쥐어박고 이렇게 해서 내 분풀이를 하는 것이 복수가 아니라, 경기를 이김으로 인해서 저들을 이 경기에서 패자로 만들어서 초라하게 만드는 게 진짜 복수라고 생각하는 거야." 그래서 그 정말 자신에게 치욕적인 언행을 하는 상대 팀 선수들을 보면서 그 순간 자기는 경기로, 점수로, 내 기량으로 너희들이 굴복하게 망신당하게 만들겠다... 그래서 더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이 오기가 생겨서 더 열심히 뛰고 더 슛을 많이 던져서 점수를 많이 따서 결국 자기 팀이 이겨서 팀원들, 자기를 응원하는 팬들 모두에게 승리를 안겨 준다는 거예요. 전문가들이 이런 얘기 합니다. 마이클 조던의 위대함은 그의 현란한 드리블이나 농구의 기술이 아니라 그의 멘탈이었다!
이게 어느 특정 분야에만 적용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가정에서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도 이거 잘하면 되는 거고요, 세상에서 직장 생활이나 비즈니스 잘하고 우리가 정말 누군가와의 일대일의 만남 속에서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은 이 감정이라는 것을 어떻게 활용하느냐, 이거 어떻게 컨트롤 하느냐 이게 좋은 사람, 행복한 사람의 기준이 된다는 거야. 그러려면 우리는 이 조던처럼 정말 내가 해야 될 인생의 경기가 뭐냐, 내가 정말 걸어가야 될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사명이 뭐고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존재하는 건데 이 사소함 때문에 이 큰 인생길의 목표에 해가 되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예요.
요즘 현대인들이 왜 이렇게 몸 만드는 거 되게 열풍이잖아요. SNS 보면 말 근육 같은 거 만들어 가지고... 나도 야, 나 한번 내 인생 뭐 하기 전에 내가 꼭 한번 몸 한번 만들어 봐야지 나도 막 그런 생각이 드는데 한 번도 안 돼요 그게. 근데 남자들이 몸을 너무 멋있게 만든 그런 사람도 있고요, 근육이죠 근육. 근데 사실은 이 근육은 전문가들 얘기는 나이가 먹어서 다 퇴화해도 근육은 퇴화하지 않는데요. 그래서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근력 운동을 하면 근육은 계속 생기는 거고, 이 근력이 유지돼야만 이게 힘을 쓸 수 있고 자기에게 오는 것들을 저항할 수 있는 거죠.
또 어떤 사람은 지식의 근육이라고 해서 지적 근육이죠. 전문 분야에서 공부를 해가지고 학위를 따고 자격증을 따고 그래서 그 사람에게는 아주 그 지적 근육이 많은 사람, 그런 것도 대단히 훌륭한 거야. 근데 저도 한때는 '아 사람이 외모가 경쟁력이라고 말하는 것도 맞고, 또 지적으로 똑똑하고 많이 알고 공부하는 것도 경쟁력이라는 것'도 인정하지만, 제가 최근에 와서 이 나이쯤 되니까 깨닫는 것 중의 하나가 뭐냐면, 사람은 결국은 똑똑한 것보다 외모가 잘난 것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의 근육, 감정의 근육이 얼마나 있느냐!
감정에 근력이 없는 사람은요, 내게 부딪쳐 오는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내가 저항할 힘이 없는 거예요. 내 안에 감정의 근육이 없으니까 조금만 내게 부딪쳐오는 무거운 문제가 생기면 내 감정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쉽게 슬퍼하고, 조그만 말에 쉽게 분노하고, 조그만 거에 쉽게 좌절하는 사람들 보면 자기 감정의 근육이 없는 거예요. 이런 거죠. 예를 들면 누가 나한테 불친절하게 대하는 거야. 근데 이 감정의 근육이 없는 사람은 그걸 못 견뎌 합니다. "나를 무시해?" 그리고 거기에 막 같이 대응하려고 하고 막 따지고 들고 하나를 가지고 막 그러죠. 이게 왜 그러냐. 자기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예요. 감정의 여유가 없는 거예요. 좀 근력이 있는 사람은요 상대가 그러면 "저 사람 뭐 오늘 기분 안 좋은 일이 있나? 뭐 그럴 수 있지." 그리고 그냥 내가 여유가 있으니까 상대가 나를 좀 불쾌하게 대했어도 감정의 근육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이겨내요.
내 어떤 부탁을 상대가 거절했을 때 그 거절을 못 참는 사람은요 감정의 근육이 없는 거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거예요. "아니, 감히 내가 이렇게 어렵게 말을 꺼내는데 이렇게 거절을 해? 내가 이런 상처를 받아? 모욕을 당해?" 이렇게 막 그걸 그대로 받아들여 가지고 자기 안에 뭐 별 생각을 다하고 이걸 어떻게 표현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사람은 다 뭐예요? 자기 안에 감정의 근육이 없는 거지요. 무거운 걸 못 드는 거예요. 근데 이 감정의 근육이 있는 사람은 내가 뭘 부탁했는데 거절을 당해도 여유가 있으니까 "그래 뭐 상대가 거절하면 내가 또 다른 방법을 할 수 있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서 그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의 근육을 이용해서 좀 더 감정을 다른 곳으로 활용하게 만드는 거죠. 근육이 있어야 무거운 걸 드는 것처럼 이 감정과 마음도 근육이 있어야 그런 생각을 품을 수 있다는 얘기예요.
자, 결혼해서 한 10년 이상 되신 분만 대답해 봐, 여자분들. 남자랑 살아보니까 똑똑하고 정말 좋은 대학 나오고 공부 잘하는 그런 남편, 또 정말 몸에 막 조각상처럼 근육 만들어 가지고 딱 폼 나는 그런 외모를 가진 남편... 이런 남편이 좋아요, 아니면 다른 건 없어도 좀 부족해도 마음의 여유가 있고 감정의 흔들림이 없고 그저 이 감정의 근육이 좀 있어 가지고 어떤 것들을 웬만큼 수용할 수 있는 그런 남자가 좋아요? 어떤 남자가 좋아요? (중략) 말 근육이 좋다고? 아 그렇죠, 이제 뭐 결혼할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좀 헷갈리는 대답이 나오지만 사실 좀 인생을 살아본 사람들은 어떤 남자가 좋은지 다 알지요. 아무리 멋있으면 뭐 해, 똑똑하고 좋은 대학 나오고 박사 학위 가지면 뭐 해, 성격이 더럽고 자기 감정이 컨트롤이 안 돼 가지고 자기 멋대로인데 그게 뭐 할 거야? 돈 많이 벌어오고 좀 능력 있으면 뭐 해, 아무 소용없는 거예요. 다른 거 부족해도요, 사람이 그 마음의 여백이 좀 있고 그 감정의 요동치는 것을 자기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성숙함이 있는 그런 남자가 진짜 좋은 남자라는 거 여러분 살아보니까 알잖아.
그러면 남자만 그렇겠어요? 여자분들도... 똑똑한 여자가 좋아요 아니면 정말 날씬하고 외모가 좋은 여자가 좋아요? 이렇게 물어보면 남자들은 "이쁜 여자가 좋아요" (웃음) 여자도 마찬가지죠. 이런 감정의 근육이 있는 사람... 외모가 뭐 아름답고 뭐 그래도 정말 요동치는 감정, 이랬다저랬다 막 그러고 마치 무슨 조울증 환자처럼 감당이 안 되면요 못 삽니다. "난 그래도 그런 여자가 좋다"라는 사람 살아봐... 여러분 사람은 누구나 다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어디서 나오느냐. 똑똑해서가 아니에요, 외모가 좋아서가 아니에요. 좋은 사람이라고 뒷모습에 평가를 받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 마음의 근육이 풍성한 사람이에요.
지금 다윗은 이게 없는 거죠. 그래서 분노를 주체 못하고 지금 흥분해서 한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겠다고 혈압이 올라가는 거 아닙니까? 여러분 생각해서 저와 여러분 모두 다 성인 아닙니까? 성인 정도 되면 사실 그 분노라는 감정이 내 안에 있는 거잖아요, 여러분 안에 있는 거잖아요. 밖에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남의 마음속에 있는 건 내가 통제를 못 하지만, 내 안에 있는 거면 여러분 어떻게 해야 돼요? 수도꼭지를 잠그듯 잠글 수도 있어야 되고 필요하면 열 수도 있어야지. 내가 내 마음의 감정을 컨트롤을 못 한다? 아니, 내 건데 내 안에 있는 건데 그걸 내가 통제를 못 해?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남이 생각하는 나가 다르면 안 돼요. 이 갭이 좁혀져야 돼요. 내가 생각할 때 나는 굉장히 "나는 한 번 아니면 아니고 나는 뒤끝 없어, 그래서 나는 그렇게 사는 게 멋있는 거라고 생각해"라고 얘기하는 자기의 기준이 있는 사람... 남들도 그렇게 생각할까?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남이 생각하는 나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좁혀져야만 인생을 잘 사는 거래요. 내가 생각하는 나와 하나님이 생각하는 내가 좁혀져야만 신앙생활 잘하는 거래요.
여러분 우리가 그걸 컨트롤할 수 있어야 돼요. 내 안에 있는 내 감정을 컨트롤을 못 해서 그냥 걔가 나를 마음대로 끌고 다니고, 마치 나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처럼 분노하고 한번 뚜껑 열리면 감당이 안 되는 사람이 된다는 거... 여러분 그게 뭐예요? 나잇값 못하는 거죠. 그 아버지로서 엄마로서 자격 없는 거지요.
이걸 어떻게 다스려야 돼요? 어떻게 해요? "내가 걸어가는 인생의 꿈이,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사명이 이런 길인데 내가 이런 걸로 내 목표를 망각하고 저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해야 돼요. 제가 존경하는 저희 선배 목사님한테 이 문제를 가지고 한번 이렇게 대화를 나눈 적이 있어요. "선배님 선배님 어떻게 화가 나고 분노할 때 그 어떻게 다스립니까?"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분노할 것도 많고 사람에 대해서 분노할 것도 많고 내 생각과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얘기를 들으면 분노가 일어나고 얼마나 분노할 일이 많습니까 목회자에게도. 그랬더니 이 선배님이 자기는 그런 상황이 생기면 일단 물 한 병을 딱 들고 방으로 들어간대요. 화가 나면. 그리고 책상에 앉아 가지고 종이 한 장을 놓고 펜 하나를 딱 놓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대요 일단은. 그리고 성경 잠언서를 무조건 펼친대요. 그리고 잠언을 읽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오나? 안 들어오죠. 아무리 잠언 말씀이 성경 말씀이고 지혜로운 말씀일지라도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목사님이 어떻게 하느냐. 다시 물을 또 한 모금 마시고 또 성경을 본대요. 근데 또 눈에 안 들어와. 화가 나고 자기도 너무너무 분노한 일이 생기니까. 그러면 또 물을 마시고 또 그냥 그 성경을 이렇게 보고 있는데... 그러면 어느 순간 조금 처음보다는 분노의 감정이 가라앉으면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그러다가 그 잠언의 문장이 이렇게 보일 때가 있대요. 신기하게 그 잠언의 글자 문장이 보일 때쯤이면 하나님께서 어김없이 그 잠언의 말씀을 통해서 자기에게 삶의 지혜를 주신다는 거예요. 그럼 그때 자기가 비로소 펜을 딱 들고 그 잠언을 읽고 묵상한 내용들을 그 종이에 적다 보면, 언제 자기가 그렇게 마음이 상하고 분노했는지 전혀 알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평안이 임하더라... 이걸 한번 두 번 하다 보니까 이게 자기의 노하우가 돼서 자기는 평생 그렇게 한다... 내가 그 얘기 듣고 곧바로 해봤잖아요? 안 돼 안 돼 안 돼, 전 안 되더라고요. (웃음)
근데 오늘 우리의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지혜가 뭐예요? 참 이거 좋은 얘기거든요. 우리가 정말 우리가 생각하는 거룩하고 아주 귀한 목표와 꿈을 위해서라면 지금 좀 참고 이런 것 정도는 내가 문제 되지 않게 해야지라는 생각. 옛날보다 지금은 투명한 사회가 돼가지고 공직자가 되려고 하거나 아니면 무슨 정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지금부터 자기의 삶의 스펙 관리가 안 되는 사람은 절대 그런 거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꿈이 있으면 우리 사회가 앞으로는 뭔가의 시비에 걸리지 않는 삶을 어릴 때부터 살아오지 않는 한 그런 꿈을 이룰 수 없는 구조로 간다는 거, 그게 바로 이미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거라는 거예요.
여러분 이런 거예요. 우리가 피아노 도라는 음을 눌렀어요. 그러면 이 피아노 건반이 계속 '도-' 하고 소리가 나는 게 아니에요. 누르면 처음엔 더 나지만 이 음이 시간이 지나면 점점점 작아지고 없어져요. 분노라는 감정이 내 안에 처음에는 '확' 하고 일어났다가도 조금만 견디면 그게 없어지는 거예요. 근데 그걸 못 참는 거죠 사실. 우리가 추운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는 걸 알고 있듯이, 우리가 그때만 조금 이걸 잡고 있으면, 이걸 내가 그때만 통제할 수만 있으면 사실 누구든지 그 분노의 감정에 지배당하지 않을 수 있는데, 즉각적으로 내가 이걸 붙잡고 통제하고 기다리는 것을 못 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분노에 끌려다닙니다. 여러분, 내가 더 큰 행복과 더 큰 인생의 꿈을 위해서 분노 따위한테는 지지 않겠다 이런 마음으로 승리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자, 분노에 지배당한 다윗이 400명의 부하를 이끌고 지금 나발에게 가고 있잖아요.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나발 집에 있는 종 하나가 이 사실을 알고 놀래가지고 집으로 뛰어 들어가요. 그리고 이 소식을 누구에게 제일 먼저 전하느냐. 나발이 아니고 나발의 부인인 아비가일이라고 하는 안주인에게 이 소식을 먼저 전해요. 자, 이 종이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자기 주인에게 이 얘기를 안 하고 아비가일에게 왜 이 얘기를 먼저 했을까? 뒤에 나오겠지만 아비가일이라는 여자는 굉장히 지혜롭고 현명한 여인이에요. 고로 "집안은 남자가 조금 부족해도 여자가 잘하면 된다, 여자가 지혜로우면 집안이 일어난다" 그러니까 절대로 여성분들 포기하지 말고 정신 바짝 차리면 우리는 살 수 있다 그런 생각을 가지셔야 돼. 남자들은 나이 먹을수록 무조건 하자는 대로 해... 하여튼 이거는 아주 불변의 진리야 하자는 대로 해. (웃음)
이 아비가일이라는 아내가 이 소식을 딱 듣자마자 지금 너무 급박한 상황이라는 걸 알고서 뭘 하느냐. 남편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가 종들에게 빨리 집 안에 있는 음식들, 곡식들을 나귀에 실어서 다윗에게 가라, 그리고 자기도 급하게 쫓아가요. 이 종이 아비가일에게 어떤 얘기를 하냐면, 사실은 다윗이 왜 지금 분노해서 우리 집안을 멸하려고 오는지에 대한 그 모욕을 당한 이야기도 전해주지만, 어떤 얘기를 해주냐면 그동안 다윗 군대가 주둔함으로 인해서 우리가 목동들이 양을 키울 때 광야의 강도 같은 사람들이 양을 훔쳐 가거나 약탈하는 게 굉장히 많았었는데 다윗 군대가 주둔하니까 그런 불량배들이나 강도들이 출몰을 못 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실 다윗이 들어온 이후에는 양들을 이 광야의 약탈자들에게 빼앗긴 적이 없이 정말 시너지가 난 거죠. 그래서 혜택을 본의 아니게 많이 본 거예요. 이런 이야기를 이 종이 들려줘요. "사실 우리가 많은 은혜를 입었는데 주인이 곡식을 요청한 거에 이렇게 대답하는 바람에 사건이 이렇게 된 겁니다"라는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아비가일이 급하게 달려오는 다윗에게로 가다가 길에서 딱 만났어요. 이때 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얼마나 지혜로우냐. 다윗을 만나자마자 아무 얘기 안 하고 무조건 가서 엎드려요, 그냥 납작. 그리고 다윗에게 선물부터 줘요 자기가 준비한 엄청난 양의 선물을 내놓고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께서 느끼셨을 분노와 불쾌함과 모욕감에 대해서 나는 100% 공감합니다. 당신이 얼마나 화가 나고 얼마나 마음이 상하고 얼마나 불쾌했을지 내가 당신의 마음을 너무 잘 압니다"라고 공감해 줘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상대가 화가 났는데, 상대가 아파하는데, 상대가 지금 상해 있는데 이것을 공감해 주지 않으면 해결이 안 돼요. 지혜로운 사람은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 상대 아픔과 상대의 분노에 대해서 공감을 해줘야 돼요. "아 그렇구나 당신도 화날 만 하네,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래 그래..." 이 사람이 좀 공감해줘야만 내 편이 되어 준다고 생각했을 때 통제가 되기 시작하는 거거든요. 아비가일이 그걸 너무 잘한 거예요.
공감해 주는 거예요. "당신의 아픔과 그 모욕감에 대해, 수치에 대해서 내가 공감합니다." 그리고 두 번째 뭐 하느냐. "다 제 잘못입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희 남편이 그렇게 말한 거 그거 다 저희 집안의 잘못이고 그건 저의 잘못입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사과를 해요. 자기는 여종으로 자신의 신분을 한없이 낮추고 이 다윗을 높은 장군으로 높이면서 잘못을 시인한 것으로부터 상대의 분노의 감정을 어루만져 주는 거예요. 여러분, 사람이 왜 우리 흔한 말로 '지고 이긴다' 그러잖아요. 이게 우리가 뭐 흔히 자존심이라는 것 때문에 "난 죽어도 난 못해, 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못해, 난 재판 가서 내가 뭘 해도 못해" 이러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 성경이 말하는 미련한 사람이에요.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진정한 승리자는 잘못한 것을 인정하고 상대에게 용서를 구할 줄 알아야 돼요. 아비가일은 그걸 너무 잘하는 거예요. 공감해주고 잘못을 시인하는 것으로부터 상대의 그 막 불같이 일어나는 분노의 감정에 브레이크를 거는 거예요.
그러면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아비가일이 30절, 31절에 보면 "곧 주님께서 장군님을 이스라엘의 영도자로 세워 주실 터인데 지금 공연히 사람을 죽이신다든지 하여 왕이 되실 때 후회하시거나 마음에 걸리는 일이 없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당신이 얼마나 존귀한 분이고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하는 분인데, 당신 같은 사람이 사소한 감정에 손에 피를 묻히거나 별것도 아닌 사람을 죽여서 훗날 오점을 남기시면 얼마나 수치스러우시겠습니까? 당신이 장차 왕이 되실 분이니 홧김에 그런 일을 저지르면 안 됩니다"라는 메시지를 주는 거예요. 여기에 완전히 다윗이 KO 당하는 거예요. 이 말에. 그래서 뭐라고 대답하느냐. 32절, 33절에 보니까 "오늘 너를 보내신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도다!" "아, 하나님이 나에게 당신을 보낸 거군요. 듣고 보니 당신 말이 맞습니다." 그 말이 들리는 순간 다윗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던 분노가 힘을 잃고, 다윗이 다시 평정심을 되찾아서 발걸음을 되돌려서 일촉즉발의 상황이 끝나요.
자, 그 뒤에 어떻게 되느냐. 그렇게 해서 이제 정리가 됐어요. 이 아비가일의 지혜로움 때문에... 아비가일이 집에 딱 갔더니 이 나발은 술에 취해 가지고 완전히 고꾸라져 가지고 정신을 못 차리는 거야. 그러니까 술 취한 남자한테 뭐라고 얘기해봤자 아무 소용없잖아요. 아비가일이 기다려요, 다음 날 술을 깰 때까지. 그리고 맨정신이 됐을 때 어제 일촉즉발의 상황들을 다 설명합니다. "당신 정말 아무 생각 없이 그랬다가 얼마나 큰일을 당할 뻔한 줄 아느냐, 이러이러한 상황이 있어서 이런 일이 있었으니 앞으로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얘기를 다 설명합니다. 이때 성경이 뭐라고 표현하느냐. 이 이야기를 다 들은 이 나발이 그런 일이 있는 줄 모르고 있다가,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듣고 두려움에 온몸이 돌처럼 굳는다 성경에 그렇게 표현해요. 충격을 받는 거죠. 그리고 결국은 열흘 만에 이 사람이, 나발이 죽습니다.
더 재밌는 거 뭔 줄 알아요? 아비가일이 혼자가 되잖아요. 다윗이 너무 마음에 드는 거야. 그래서 둘이 결혼했어요. 나발의 엄청난 재산은 아비가일의 것이 됐고, 지금 떠돌이면서 아직 왕권을 갖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경제적인 힘이 필요했던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서 새 아내를 통해 엄청난 재력을 갖추고 왕이 되는 것까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죠. 그게 이제 성경이에요. 자, 다른 거 다 잊어버리고 뒷얘기만 관심 있는 사람이 있어 "아 다윗은 운도 좋아, 야 나도 어디 살다가 그런 사람 안 걸리나" 뭐 온통 관심이 거기 있는 사람이 있어요. (웃음)
자, 제가 드리고 싶은 얘기예요. 다윗이 그 분노를 멈추게 된 게 뭐예요? 그 여인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는 거죠. 근데 당시에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여성은 절대로 이런 걸 협상할 위치에 있지도 않고요, 상대들은 여성을 대화의 파트너나 자기가 들을 만한 상대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그 당시에는 원래 율법에는 남편에게 이런 사실을 알리지 않고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나러 간 자체만으로도 큰 죄가 돼요. 그만큼 여성의 인권이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때예요. 그게 사회적인 보편적인 기준인데, 다윗은 그 한없이 보잘것없는 여인의 작은 소리에 귀를 기울여 들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분노를 다스릴 수 있었다는 거예요.
우리가 분노할 때 꼭 기억해야 될 것, 화가 나면 의도적으로 뭘 해야 되느냐. 들어야 돼! 분노하는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는 남의 말을 안 들어요. 옆에서 조근조근 자기를 위해 하는 얘기를 안 들어. 그러면 망하는 거예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들어야 돼. 이걸 이기고 싶으면, 내 감정을 내가 어떻게 하든지 통제하고 다스리고 싶잖아요? 그러면 여러분 뭘 해야 되느냐. 다른 거 하지 말고 "그래 지금은 듣자" 말을 하지 말고 들어요. "내가 이래서 화가 나고 난 한번 뚜껑 열리면 난 눈에 뵈는 게 없어" 이렇게 말하지 말고 그냥 입을 다물고 들어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아주 미천한 작은 자를 통해서라도 나에게 내 마음의 평화를 줄 소리를 주신다니까요.
하찮은 여인이지만 그 여인이 하는 얘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장차 이 나라의 왕으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실 당신이, "이 개인의 사사로운 복수로 사람을 죽이고 피를 흘리면 되겠습니까?" 그 말을 들으면서 다윗이 "내가 지금 뭔가에 씌었구나, 내가 뭔가 지금 잘못됐구나"라는 그 이야기를 들음으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이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시잖아요. 그러니까 우리에게 누구를 통해 말씀하실지 몰라요. 보세요, 집에서 가정에서 부부가 막 싸우고 있는데 저쪽에서 한쪽에서 아기가, 갓난아기가 막 애타게 우는 거예요. 그러면 그 싸우는 부부에게 하나님은 그 애타는 어린 아기의 울음소리를 통해서 "너희들 그러면 되느냐" 그 메시지를 주시는 거죠. 그 아기의 울음소리를 통해서... 우리가 분노를 견딜 수 없을 때 그냥 자연 앞에 나가서 그 노을 지는 석양을 보면서, 그 노을이 주는 메시지가 있잖아요. 이 바람이 시원하게 이렇게 불어오면서 내 이마에 스쳐 갈 때 주는 메시지가 있잖아요. 빨간 꽃, 파란 꽃, 초록색 이런 자연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메시지가 안 들려요? 이 다양한 자연을 보면서 "내 마음이 이런데 너도 이러면 안 되겠니?"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말씀하세요. 여러분의 어린아이를 통해서, 아니 여러분이 집에서 기르는 반려견을 통해서라도 여러분 하나님은 누구를 통해서라도 우리에게 끊임없이 평화의 메시지, 기쁨의 메시지를 주신다는 거예요. 이걸 들으면 살아요! 들으면 산다니까요.
그런데 분노가 일어나면 안 들리거든요. 안 들으려고 하거든요. 근데 이 훈련을 해야 돼요. 작은 거라도 하나님의 뜻을 알면 "아 저런 걸 통해 하나님의 뜻이 무언가를 내게 말씀하시는구나"라고 깨달으면 자신의 그 분노의 문제를 다스릴 수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여러분 주변에 이번 주부터 늘 살펴보세요. 하나님이 정말 여기 시냇물을 통해서, 나뭇가지에 바람 소리를 통해서, 뭐를 통해서 내게 말씀하실까 그런 걸 한번 훈련해 봐요. 그리고 느껴봐요. "아 정말 하나님이 이렇게 정말 오묘하시구나, 이런 모든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그때그때마다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이렇게 공급하시는구나." 그래서 그 음성이 내게 있는 사람은 그런 분노의 상황이 오더라도 그걸 다스리고 이겨내는 인생이 될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분노를 멋지게 다스리는 사람이 인생을 이기는 거예요. 다른 걸로 이기지 말고 이 감정을 다스림으로 진짜 세상의 왕처럼 사는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풍성한 영성을 누리는 만남
삼상 25장 32~35절 / 박근호목사
지구상의 인구가 70억이라 하고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해서 태어나고 있지만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만이 살고 있습니다. 수평적 차원에서 볼 때 하나는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인간'이고 하나는 '자신에게 세상을 맞추는 인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두 부류의 인간상 중에 후자에 속하는 자들입니다. 세상에 자신을 맞추어 사는 자가 아니라 자신에게 세상을 맞추어 사는 사람들입니다. 어그러지고 거스른 이 세태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악한 이 세대를 본받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안에서 자기 자리를 확립하고 중심고인 삶을 살아가는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수직적 차원에서는 이렇게 달리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며 사는 자'가 있고 '자신에게 하나님을 맞추며 사는 자'가 있다..." 수평적 차원과 수직적 차원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장로는 말하기를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원수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자신에게 하나님을 맞추는 인생'은 결국 '세상에 자기를 맞추는 인생'이 되고,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는 인생'은 결국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4천만이든 7천만이든, 70억이든, 100억이든 인간은 이 두 부류 중의 하나로 분류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 자신을 맞추는 인생'이지 '자신에게 하나님을 맞추는 인생'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지 않고 하나님께 맞추는 자요, 세상에 맞추고 하나님께 맞추지 않는 자가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불신자와의 교제를 경고하고 또 우려합니다. '악인의 꾀를 좇지 말고 죄인의 자리에 서지 않고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라'는 시인의 권면은 우리가 어떤 사람을 만나 교제하며 사느냐가 우리 일생에 참으로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람직한 교제, 아름다운 사귐이 이루어져야 거기에 반듯한 인격과 올바른 신앙과 건강한 삶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고 세상에 맞추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만나 교제하며 사느냐, 아니면 '자신을 세상에 맞추고 하나님께 맞추지 않고 사는 사람'을 만나 교제하며 사느냐에 따라 그 인생의 성패가 결정되는 겁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어떤 사람을 만나 교제하며 사느냐 하는 것은 이렇게 중요한 삶의 과제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다윗이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을 향해 감사와 칭찬과 축복을 아끼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다윗이 아비가일을 왜 이렇게 칭찬하고 고마워하고 축복하는 것일까요? 계속해서 다윗은 33절 이하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그녀로 인하여 다윗이 복수의 칼을 휘둘러 피를 흘리는 것을 멈추고 피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 자초지종을 한번 살펴보십시다. 다윗은 사울왕의 칼날을 피해 도피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언제 사울이 군대를 보내 저를 죽일지 모르는 상황에서 도망자로 사는 다윗의 신세가 얼마나 고달프고 긴장된 생활의 연속이었겠는지를 우리는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다윗은 그런 곤비한 생활 속에서도 영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신앙의 중심을 흐트러뜨리지 아니하고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예를 든다면 다윗이 사울을 피해 광야로 쫓겨다니던 중 한번은 엔게디 광야 굴에서 역으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맞게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에게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건 바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은 자를 내가 감히 어떻게 죽일 수 있으랴...' 그는 말씀을 자신에게 맞추지 않고 자신을 말씀에 맞춤으로서 사울의 목 대신 옷자락을 살짝 벰으로 사울을 감동시켜서 돌려보내고 맙니다.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은혜를 잊고 곧 다윗을 향한 적의를 다시 드러냅니다. 얼마 후 또 한번 다윗은 절호의 기회를 맞습니다. 십광야 하길라 산에 다윗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다윗을 잡으러 온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는 기회를 만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잠든 사울은 죽이자는 부하들의 채근에 이렇게 답합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여호와께서 살아계시니 그분이 알아서 그를 치시리라. 여호와께서 금하신 일을 하지 말고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그러니까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서 첫 번째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살려 돌려보내는 사건이 삼상 24장에 나오고 두 번째 십광야 하길라 산에서 저를 살려 돌려보내는 사건이 삼상26장에 나옵니다. 그의 영성은 여전합니다. 그런데 이 두 사건이 일어났던 24장과 26장 사이에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25장은 다윗의 영성이 어떻게 그렇게 한결같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산 기록입니다.
어쩌면 24장에서는 다윗이 사울을 살려보냈지만 26장에서는 살려보내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은혜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늙은이입니다. 저만 없애면 임금자리는 따놓은 당상입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을 또 다시 살려보냅니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러한 행동은 다윗이 선심이나 전시효과로 행동하는 자가 아니라 영성으로 행동하는 자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한 다윗의 풍성한 영성이 유지된 비결이 바로 이 25장에 숨어있습니다. 어떻게 다윗은 그런 영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까요? 다윗의 아비가일을 향한 칭찬은 다윗이 그런 영성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그 중심역할을 아비가일이 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비가일이 무언가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녀와의 만남이 다윗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그런 영성을 누리게 했던 것입니다.
사울의 핍박으로 인한 다윗의 피신생활은 단지 도피에만 초점이 맞춰진 생활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광야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선한 일들을 도모했습니다. 광야에서는 무엇보다 산적과 같은 강도떼들의 빈번한 출몰이 문제였습니다. 저들은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약탈을 하고 또 양떼를 빼앗아 가곤 했습니다. 그때마다 다윗과 그 일행들은 자치치안대처럼 불법을 행하거나 약탈하는 자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입은 양떼들 중에 나발의 양떼가 있었습니다. 나발의 목동들은 다윗 일행이 늘 주위에서 저들을 지켜주었기에 16절 말씀처럼 밤낮으로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저들이 안전하게 양을 치며 안심할 수가 있었습니다. 다윗 일행은 그렇게 저들을 돌보아줌으로서 드디어 양털 깎는 시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건 농사에 비하면 추수철로서 큰 잔치를 베푸는 축제였습니다. 많은 음식들이 준비되고 모처럼 모든 사람들이 한데 어루러져 흥겨워하며 잔치하는 때가 바로 이때였습니다.
다윗은 그 풍성한 시기에 나발에게 소년들을 보내 안부를 전하면서 음식과 포도주를 좀 나누어 달라고 청합니다. 광야생활을 하며 어렵게 지내는 동료와 부하들을 생각하면서 저들이 나발의 양떼를 돌보기 위해 애썼던 것을 생각하며 더불어 나누기를 원했던 겁니다. 사실 다윗이 사람을 보내어 청하기 전에 먼저 나발이 음식을 챙겨 보냈어야 마땅한 국면입니다. 그만큼 큰 은혜를 입어 오늘을 맞은 겁니다.
그런데 다윗의 생각은 오산이었습니다. 10절에 보면 나발은 다윗이 보낸 소년들 앞에서 저를 종살이하다 뛰쳐나온 도둑 떼 취급을 합니다. 나발은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요즈음 도망치는 종놈들이 많다는데 내가 어찌 출신도 알지 못하는 자에게 내 집사람들에게 줄 떡과 물을 주겠느냐'며 저들은 문전박대합니다. 정말 21절의 다윗의 외침처럼 나발은 '악으로 선을 갚는 것'이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빈손으로 돌아온 사환들을 통해 들은 다윗의 심사가 어떠했겠습니까? 다윗은 피가 거꾸로 솟는 듯 했습니다. 아무리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광야 생활을 한다지만 이런 모욕은 참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선을 악으로 갚는 나발에 대한 분노를 삭일 수가 없어 22절에 보면 이렇게 다짐합니다. "내일 아침까지 그에게 속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 남자가 한 명이라도 남는다면 내가 하나님께 무슨 벌을 받아도 좋다..." 그리고 무장한 400명을 출동시킵니다. 이제 나발의 목숨은 끊어진 거나 다름없고 그의 집은 풍지박산 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나 그렇겠지만 다윗은 지금 이성을 잃었습니다. 영성으로 대처할 일이 아니라 혈기로, 공분으로, 광기로 대처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이 치달을 길을 가로 막아서는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었습니다. 나발의 아내인 이 여인은 자기 종들에게서 전후 사정을 들은 후 사태의 긴박함을 파악하고 급히 음식을 준비해서는 광야 유벽한 곳의 다윗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녀는 급하게 나귀에서 내려서는 다윗 앞에 엎드려 이렇게 간곡히 말합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참아 주십시오. 나발이라고 하는 인생은 그 이름처럼 미련한 인생입니다. 당신이 상대할 그런 가치 있는 인생이 못됩니다. 그를 처치한다는 것 얼마든지 하실 수 있는 일이겠지만 그것은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이 되실 분이 하실만한 일이 못됩니다. 당신이 누구십니까? 그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입은 자인 것을 잊지 마십시오. 원한을 풀기 위해서 사람을 죽이는 그런 더러움을 입지 마십시오. 당신의 원수는 하나님이 처치하실 것입니다. 여태 그런 영성으로 살아오시지 않으셨습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위해 싸우셔야지 이런 일로 싸우는 것은 합당하지 않습니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설득입니까? 그러면서 아비가일을 29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목숨은 하나님이 생명싸개 속에 안전히 싸놓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져버리실 것입니다..." 기분에 따라 일희일비할 것이 아니라 영성으로 대처하라는 겁니다. 친히 나서서 혈기를 따라 설치지 말고 하나님께 모두 맡겨버리고 하나님의 사람같이 처신하라는 겁니다.
바로 이 아비가일의 말에 다윗은 감동을 먹습니다. 다윗은 지금 어리석은 자와의 전투를 준비하고 달려가는 중이었습니다. 분하고 억울한 것은 사실이지만, 또 충분히 그럴 수밖에 없는 정황이었지만 그러나 엔게디 광야에서 그가 가졌던 그 거룩한 영성은 잃고 있었습니다. 다윗이 사울과 다른 점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나발을 제 손으로 죽이겠다고 간다면 자기가 사울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렇다면 다윗은 '제2의 사울'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아비가일은 다윗의 흥분과 혈기를 가라앉힙니다. 잃어버린 영성을 회복시킵니다. 개와 사람이 싸워 사람이 이겼다고 사람이 위대해지는 건 아니지 않느냐면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달려가는 길을 멈추게 합니다. 개같은 나발을 상대하지 말고 그로 인하여 당신을 어지럽게 하지 말라는 겁니다. 당신은 당신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약속과 일들을 생각하라는 겁니다. 사울에게 가졌던 그 영성,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을 따른 아름다운 모양을 닮아갈지언정 악한 나발 때문에 악한 자의 모습을 함께 갖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알지 않느냐는 겁니다. 어느 때나 어느 곳에서나 그분이 당신을 보호해 주시지 않았느냐 겁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손을 쓰기 전에 항상 당신의 원수를 물매로 던져버리듯 그렇게 멀리 날려버리지 않았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왜 어리석은 자를 죽여 손에 피를 묻혀 똑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려하느냐는 겁니다.
이렇게 아비가일은 나발로 인해 이글거리는 분노로 영성을 소멸해 가는 다윗에게 전심으로 권면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 마음이 나발에게 향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합니다. 어리석은 자를 따라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는 겁니다.
다윗은 이 아비가일의 말에 귀를 기울입니다. 정말 듣고보니 그녀의 말이 옳았습니다. 자기의 힘은 적을 무찌르면서 길러진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온전하심을 따르는데서 생겨난 힘이었습니다. 자기가 비록 광야에 피해 있어도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하셨고 지켜주셨습니다. 다윗은 그 영성을 잘 간수해왔었습니다. 그런데 잠깐의 분노와 혈기로 인해 자기 안에 담긴 하나님의 그 거룩함을 잃어버릴 뻔했습니다. 인간적 혈기로 은혜를 쏟을 뻔했습니다. 그런데 아비가일이 다시금 하나님의 성품을 바라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권면은 다윗 생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만약 다윗이 달려가 나발을 죽였다고 한다면 26장에서 다윗에게 다시 기회가 왔을 때 그는 더 이상 못 참고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한번 피를 묻히기가 어렵지 한번 하면 계속 하는 게 인간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말씀을 따라 삽니다.
그가 아들 압살롬에게 쫓길 때 그를 따라오며 저주하던 시므이를 어떻게 대합니까? 혈기가 아닌 영성으로 대합니다. 그는 분명 아비가일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녀가 회복케 해 준 영성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깟 녀석 말 한마디면 목을 잘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러운 것으로 자신이 더럽히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분이 나거나 속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더러운 일을 행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가 자기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피를 보았다면 그는 그 후에 성군의 자질을 잃고 말았을 것입니다.
다윗은 추하게 살지 않습니다. 3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나발을 심판하자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발에게 당한 나의 욕을 신설하사 종으로 악한 일을 하지 않게 하신 여호와를 찬송할찌로다..." 아비가일은 이렇게 다윗으로 하여금 영성을 풍성하게 누리도록 한 지혜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녀를 못잊어하며 결국 자기 아내로 맞아 평생을 함께 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세상에는 어리석은 자가 많이 있습니다. 화나게 하고 분노하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남일 수도 있지만 또 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화풀이하며 삽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영성이 아니라는 생각을 합니다. 나발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 다윗의 영성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자를 상대해서 싸우는 것은 똑같이 어리석은 자가 될 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속좁은 복수심에 매달려서 아름다운 삶, 풍요로운 영성을 상실하고 삽니다. 그래서 그 순간에 누릴 수 있는 많은 것들을 잃고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며 삽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을 다윗은 교훈합니다. 영성이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탁하는 것입니다.
나발을 향한 다윗의 행동은 동기도, 명분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영성의 사람 다윗은 멈춥니다. 다윗이 자기를 죽이려고 좇아 다니던 사울을 죽일 기회를 만난 것도 어찌보면 정말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기회인 것처럼 절묘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을 분별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원수를 갚지 않고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탁합니다. 자신이 가진 복수의 정당성보다 말씀의 권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기름부름을 존귀히 여길 때 하나님은 점점 더 다윗을 높이 드셨던 겁니다.
갈등이 왜 생깁니까? 마찰이 왜 일어납니까? 내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게 명분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정당하고 저가 불의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대결구도에서는 오히려 우리의 영성이 망가집니다. 보십시오. 억울한 일을 만날 때, 손해보는 일을 경험할 때 두 눈 부릅뜨고 함께 맞서 싸우라는 성경의 가르침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원수갚는 것은 네 하나님께 맡기고 너는 오히려 선으로 악을 갚아 숯불이 머리 위에 놓여 얼굴이 벌개지듯이 그렇게 그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라...' 이게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영성입니다.
교회든, 가정이든, 직장이든 비판이 강하면 강할수록 메마르게 됩니다. 그 비판으로 누가 잘못했는지는 가려질지 모릅니다. 그래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영성의 풍요'가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마음에 분노와 복수심이 일 때 그 대상을 생각하면 우리는 점점 커다란 분노와 복수심에 빠져들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마음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볼 때 우리의 영성을 깊어지고 삶의 전망을 넓어집니다. 다윗은 나발을 죽이지 않음으로서 더 깊은 하나님의 섭리와 세계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걸 깨우쳐 준 자가 바로 아비가일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번 휴가철에는 이런 다윗의 경험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윗이 누렸던 그 영성입니다. 이 영성의 회복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백과 여유가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이번 휴가철에는 여러분이 아비가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각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좀 이런 영성을 회복하게 하는 역할을 하시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멋진 사람입니까? 이런 사람이 되시고 또 이런 사람들과 만남도 많이 가지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우리의 이번 휴가는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분주히 세상을 살아가면서 만나는 수많은 변수들이 우리의 감정과 행동을 격하게 만들고, 떨게 만들고, 힘겹게 합니다. 그래서 원망이 생기고, 복수심이 생기고, 감정이 고조되면서 벼르게 되고, 사나운 기회들을 엿보게 됩니다.
나발은 다윗에게만 있는 자가 아닙니다. 나발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스치는 존재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우리의 영성을 훼손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인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겠습니까?...
나발로 인해 자신의 영성을 더럽혀서는 안될 것입니다. 무엇이 나의 영성을 좀 먹는지를 간파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땅이 요동하든지, 물결이 뛰놀든지, 우리의 영성이 날마다 풍요로워지고 하나님 앞에 더욱 깊어져 가야 할 것입니다.
이 여름에, 이 휴가철에 우리 영락의 모든 믿음의 권속들에게 그 무엇보다도 이러한 영성의 회복이 이루어지는 은총이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이 아비가일 같은 자가 되시고 또 아비가일 같은 존재를 만나셔서 풍성한 영성을 누리며 사는 하반기를 맞을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윗의 아내가 된 아비가일
삼상 25장 32~42절 / 박기완목사
사무엘상 25:1절에 보면 사무엘 선지자가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이 죽자 온 이스라엘이 애곡하였고 라마에서 그를 장사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에게 있어서 정신적인 지주였고 영적으로 하나님처럼 의지했던 사람인데 이 영적인 지도자 사무엘이 죽고 나자... 다윗은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바란 광야는 다윗이 피난을 간 중에 제일 멀리 도망간 셈이 됩니다.
당시에 사울 왕은 다윗을 시기하여 기회만 있으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 사무엘이 늘 걸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가 죽었으니... 다윗은 사울의 핍박이 더 심해지리라는 생각에서... 아무래도 안전한 곳으로 피하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을 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충격적인 사건은... 골리앗을 무찌른 사람에게 사울 왕은 자기의 공주 미갈을 아내로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는데.... 다윗이 골리앗을 무찌르자 미갈을 아내로 주어 결혼을 시켰지만... 다윗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자 이를 시기한 사울은 공주 미갈을 다른 남자에게 재혼을 시키고 말았던 것입니다. 아내까지 빼앗긴 다윗의 신세는 참으로 더할 나위 없이 처량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가장 우울하고 좌절감에 빠져있었던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13절 말씀에 보면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이 600명 가량 되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여자들과 가족들까지 포함하면 아마 상당한 숫자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대단한 숫자의 식솔들을 이끌고 다니게 되므로 재정적인 어려움도 많았을 것입니다.
매일 매일 끼니마다 밥 걱정을 해야되고... 많은 사람들을 책임지고 있는 다윗으로서는 걱정이 되는게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방법을 통해서든지 재정적으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있다면 서슴치 않고 그 길을 택해야만 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무엇이냐 하면.... 나발에 대한 계획이었습니다.
2절 이하에 보면, 나발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소개가 나옵니다.
나발은 당시에 아주 부자였습니다. 양이 3천이요 염소가 1천이라면 상당한 부자입니다.
우리나라 성경에는 그가 '갈멜 족속'이라고 되어 있는데 원어를 보면 '갈렙'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나발은 갈렙의 후손으로... 조상의 재산을 상속받아 부자로 살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수15:54, 55; 14:14).
그러나 그는 그의 조상 갈렙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여러분... 갈렙이 누구입니까?... 12명의 정탐꾼들이 가나안을 정탐했을 때... 오직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가나안 땅에 들어 갈 수 있다고 긍정적인 보고를 했던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조상 갈렙의 용기와 담대한 신앙의 열정은 본받지 못했습니다. 그는 집안의 명예를 훼손하였으며, 자신에게도 명예가 되지 못했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의 뜻은 '어리석다'는 뜻인데... 그의 이름처럼 그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한 사람이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17절에도 보면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그랬는데... 나발은 불량한 사람...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나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아비가일'이라는 사람인데 그 이름의 뜻은 '기쁨을 주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는 총명하고 용모도 아름다웠는데... 그의 이름과 같이 지혜롭고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두 부부는 얼마나 안 맞는 부부인가를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주석가는 말하기를 "만일 성경이 이혼을 허락했다면 이 부부가 제일 먼저 헤어졌을 것이다" 그랬습니다. 그 정도로 잘 어울리지 않는 부부라는 것이죠...
좌우간... 다윗의 지금 처지는 사울 왕에게 쫓기는 신세요,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입니다.
그래서 그 근방에 부자로 살고 있는 나발의 양떼와 염소들을 잘 돌보아 주면... 그로부터 음식과 필요한 일용품들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더욱이 인근에 있는 블레셋 사람들이 몰래 쳐들어와서 수많은 양떼와 가축들을 자주 약탈해 갔습니다.
그래서 나발의 많은 재산들을 누군가가 지켜줄 보호자가 필요한데.... 다윗이 자원하여 군사를 이끌고 나발의 양떼와 염소를 지켜준다고 하였으니... 나발에게는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다윗은 군사들을 보내어 나발의 양떼와 염소 떼들을 매일 매일 안전하게 보호해주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나발이 양털을 깎는다는 말을 듣고 다윗은 이 경사스러운 날을 이용해서 사람을 보내어 도움을 청하기로 했습니다.
목축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털 깎는 날은... 잔치하는 날로 정하고 일종의 축제 무드 속에서 양털을 깎았습니다.
마치 농사를 짓는 사람들의 추수하는 날과도 같습니다. 이런 경사스런 날은 음식도 넉넉히 하고 지나가는 나그네까지 불러서 함께 식사를 하는 법입니다.
그래서 그 날에 다윗은 부하들을 보내어 재정적으로 어려운 형편을 이야기하고 도움을 받기로 한 것인데.... 그러나 나발은 그동안의 은혜를 무시하고 다윗의 청을 거절했습니다.
거절했을 뿐만이 아니라 다윗을 모욕하는 말을 퍼부으며 다윗의 병사를 쫓아냈습니다.
11절 이하에 그 내용이 나옵니다.
"도대체 다윗이 누구냐? 이새의 아들이란 자가 누구냐? 요즈음은 종놈들이 저마다 우두머리가 되고자 주인에게서 떠나는 세상이거늘.... 내가 어찌 털을 깎느라고 수고하는 내 일꾼들에게 주려고 마련한 떡과 술과 고기를... 어디서 굴러왔는지도 모르는 놈들에게 주겠느냐?" 그러면서 저주와 모욕의 말을 서슴치 않고 해댔습니다(삼상25:11).
"다윗이 누구며 이새의 아들이 누구뇨?" 라는 말은... 몰라서 그러는게 아닙니다. 아는데도 아주 업신여기는 말투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근일에 억지로 자기 주인에게서 떠나는 종이 많도다" 그랬는데, 이 말은 주인 밑에서 충성할 생각은 않고 주인을 떠나서 도망 다니는 놈들이 많은데 그 중에 한 놈이 다윗이다 그런 말입니다.
사울 왕을 떠나 제 멋대로 나돌아다니는 배신자요, 망나니로 표현한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다윗과 그의 일행들을 아주 업신여기는 말이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다윗은 분개하여... 부하 사백 명에게 칼을 차게 하고 자신도 무장을 하고는 나발의 집을 향해 갔습니다.
22절 말씀에 보면, 다윗이 결심하기를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 중 한 남자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그러면서.. 나발의 집을 완전히 멸하겠다고 다짐한 것입니다. 참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입니다.
바로 그때.... 이 모든 상황을 알게 된 한 충성스런 일꾼이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이 말을 전해 듣고 아비가일은 즉시 지혜롭게 대처하였습니다.
그는 떡 이백 개, 술 두 부대, 요리한 양 다섯 마리, 볶은 밀 열 말, 건포도 백 뭉치, 말린 무화과 과자 이백 개를 서둘러 마련하여... 나귀에 실려 남편 몰래 시종들을 시켜서 다윗에게 보내고 자신은 조금 뒤쳐져서 다윗을 정식으로 마중하고자 길을 떠났습니다.
아비가일은 곧,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겠다고 벼르고 오는 다윗과 마주쳤습니다. 그러자 아비가일이 나귀에게 급히 내려 땅바닥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리고는 겸손하게 탄원했습니다.
25절에 보면 "죄는 저에게 있습니다. 나리께서 보내신 사람을 제가 만나지 못해서 그리 된 것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나리께서 직접 피를 보며 원수를 갚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나리의 원수들이 모두 나발처럼 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고 나리께서 살아 계신 것 처럼 확실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리의 집안을 정녕 튼튼히 세워주실 것입니다. 나리께서는 한 평생 어떤 재난도 겪지 않으실 것입니다. 나리를 쫓아다니며 죽이려는 사람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나리의 목숨을 생명싸개로 감싸주시고 그대신 원수의 목숨은 팽개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온갖 복된 일을 이루시어 나리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실 터인데, 이런 실수를 해서 두고두고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손수 원수를 갚느라고 공연히 피 흘리는 일을 만들지 마세요!"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다윗이 반박할 수 없는 신앙적인 논리를 가지고... 듣는 자들의 마음을 감동하게 만들었습니다(삼상25:24-26).
그러면, 아비가일이 다윗 앞에 엎드려서 전한... 그 말의 요지가 무엇입니까?
먼저는.... 남편이 어리석은 짓을 했다는 것을 시인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직접 원수를 갚는다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를 보냈다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다윗의 장래를 얘기하면서.... 다윗은 절대로 망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이 끝까지 보호하실 것임을 전했습니다. 이런 말들은 다윗이 반드시 왕이 된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비가일이 이렇게 조리있게 말을 함으로서.... 다윗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러면서 아비가일은 말하기를 "여기 여종이 가져온 선물이 있습니다. 나리의 병사들에게 먹이십시오. 그리고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리의 운을 터 주시는 날, 이 여종을 잊지 말아 주십시오!" 그러면서 가지고 온 음식을 전하며 청원했습니다(삼상25:27).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에 감동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그대를 만나게 해 주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할 뿐이오, 그대는 사리를 참으로 잘 판단하였소... 하마터면 내 손에 피를 묻힐 뻔했는데 오늘 이렇게 말려 주어서 정말 고맙소. 그대가 말리지 않았다면 나발의 집안에 있는 모든 남자들이 내일 아침까지 죽었을 것이오!" 하고 말했습니다(삼상25:32-34).
이렇게 해서.... 아비가일은 온 가문이 몰살당할 위기에서 지혜롭게 처신하여 다윗의 분노를 진정케 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몇 가지 교훈을 얻습니다.
첫째로, 분노라고 하는 것은.... 어떤 사람도 일으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윗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기로 애를 쓰는 사람도.... 이렇게 분노로 인하여 큰 실수를 저지를 뻔했다면... 오늘 우리도 얼마나 많이.... 분노로 인하여 실수하기 쉬운가를 알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분노라고 하는 것은 다른 것과 달라서 굉장한 파괴력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분노는 사람을 죽일 수 있습니다. 한 사람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뉴욕 타임스 지에.... 보통 사람에 비해서 화를 잘 내는 사람들의 사망률이 20% 가량 높다는 듀크 의대 팀의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또 화를 내는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도 큰 타격을 주는데, 권투선수의 강한 펀치를 맞는 것과 같은 심한 타격을 받는다는 보고도 있었습니다.
한 저명한 의사가 '분노와 수명의 상관관계'를 연구했습니다.
그는 오랜 연구를 통해서 중요한 결론을 내리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분노는 사람의 생명을 앗아가는 극약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화나게 하는 것은 곧 그를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랬습니다.
그는 이러한 사실을 의학협회에 보고할 기회를 얻어서.... 자신만만한 태도로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논문에 대해서 신랄한 비난을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자신을 비난하는 그 사람을 향해서 고함을 질러대며 맞섰습니다. 그리고 그 분노를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쓰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분노가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자기 자신이 증명한 셈입니다.
옛날 징기스칸이 사냥을 할 때면 반드시 총명한 매 한 마리를 데리고 다녔다고 합니다.
하루종일 숲을 헤매던 징기스칸은 심한 갈증을 느꼈는데, 마침 머리 위의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똑똑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잔으로 물방울을 받아 마시려고 했습니다. 그 순간 매가 날아와 주둥이로 물 잔을 치는 것입니다. 징기스칸은 다시 물을 담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매가 쏜살같이 날아와 물을 엎질렀습니다. 징기스칸은 화를 삭이며 다시 물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매가 다리로 물 잔을 내리쳐 그만 잔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징기스칸은 극도로 화가 나서 칼로 매를 베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물을 마시기 위해 물줄기를 따라 위로 올라갔습니다. 그곳에는 조그마한 웅덩이가 하나 있었는데, 놀랍게도 거기에는 커다란 독사가 죽어 있었습니다.
징기스칸은 그제서야 매가 독물을 못 마시게 하려고 물 잔을 엎지른 것을 깨닫고 슬피 울며 말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어떤 결정도 홧김에 내리지 않겠노라!"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노라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을 낳습니다.
에베소서 4::26∼27절 말씀에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말씀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분노나 화를 발해서도 안되겠지만... 나발처럼 남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아비가일처럼... 남의 분을 가라앉히는 평화의 중재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마음을 진정케 한 후.... 36절에 있는 대로 남편에게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나발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은 날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윗과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술에 취해 있는 사람에게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 될 것입니다.
아마 아비가일이 술에 취한 남편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이야기했다면 술김에 다윗을 더 저주하고 악담했을지도 모릅니다.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몰라요...
혹시 남편이 술에 취해서 들어오실 때... 믿는 부인들은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술 취한 사람 붙들고 당장에 무슨 일을 끝장내려고 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술에 취한 사람은.... 깨고 나면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 것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때를 따라 말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해요... 모든 일에 사리 판단을 잘하며 지혜롭게 대처해야 합니다.
유명한 희랍의 철학자 '플라톤'은 무지를 가리켜서 '지혜의 상실이다' 그랬습니다.
그는 '국가론'에서 가장 이상적인 국가를 설명하면서 사람의 몸으로 비유했는데.... 즉, 몸을 나누어 머리와 가슴과 배의 부분으로 열거하면서..... 머리 부분은 통치계급이고 가슴은 무사계급, 그리고 배 부분은 서민으로 분류했습니다.
그러면서 플라톤은... 특히 머리부분에 있는 통치자들에게는 반드시 덕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그 덕을 가리켜 '지혜'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지혜'라고 하는 말과 '지식'이라고 하는 말을 어떤 때는 같은 뜻으로 사용된 경우가 더러 있지만... 그러나 본래 이 두 가지 말은 뜻이 좀 다릅니다.
'지식'이라고 하는 말은 아는 것의 총칭을 가리킨 말이고, '지혜'라고 하는 말은 아는 지식을 바로 쓸 수 있는 지력(智力)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식이 많다고 해서 지혜가 많은 것은 아닙니다. 지식은 많아도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비가일의 남편 나발은 그 다음날 아침이 되어서야 겨우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는 어제.... 그가 얼마나 위험했었는가를... 또 그의 어리석음 때문에 그의 가족들과 식솔들이 얼마나 위험했던가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죽음을 막기 위해서 자기가 얼마나 애를 썼는가.... 하는 것도 전해 주었습니다.
나발은 부인을 통하여 다윗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서 400명이 군사를 이끌고 왔었다는 사실을 들은 이후에.... 그때부터 그는 겁에 질려서 부들부들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하면서.... 그로부터 열흘동안 시름시름 앓더니...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38절을 보면 그 이유를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하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를 치셨다고 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내가 너에게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주었지만 너는 그것들을 누릴 자격이 없구나!"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의 영혼을 부르신 것입니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면... 나발처럼 움켜쥐고만 있으면 안돼요... 진정한 부자는 필요할 때는 손을 펼 줄도 알아야 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받은 복을 누릴 수가 있는 겁니다.
다윗이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자기 손으로 죽이지 않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윗의 일을 하나님이 대신 행하셨으며, 자기의 명예를 높여 주셨고, 자기를 모욕한 자를 그대로 내버려두시지 않으신 것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한 것입니다.
이로써 다윗의 세력은 다시 한번 견고해 졌고, 그를 따르는 모든 자들이 "다윗은 하나님께서 대신 싸워 주시는 사람이라!" 그러면서 그를 믿고 따를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한 다윗은 이로써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음을 감사하였습니다.
이제 그들은... 어떠한 위험과 고난을 만날지라도... 그 문제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해결하여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아름다운 인품과 그녀의 남다른 태도... 그리고 지혜로운 말솜씨에 매력을 느꼈기 때문에 나발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그녀를 자기 아내로 삼고자 사환을 보냈습니다.
다윗은 그녀가 나발과 같은 남편 밑에서도 훌륭한 아내의 자질을 보여 주었으니... 자기의 아내가 된다면 더욱 훌륭한 아내가 되리라고 믿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이 자기를 존경하며, 자기가 장차 왕위에 오르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눈여겨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의 청혼을 전해들은 아비가일은.... 도저히 자기는 그런 명예를 받아들일 수 없는 몸이라고 말했하면서.... 동시에 그는 다른 종들의 발을 씻어주는 한 여종이 되겠노라고 말하고는 겸손히 다윗의 청혼을 수락하였습니다.
참으로 자신을 낮추고 스스로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높이 들리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줄 믿습니다.
다윗에게는 본래 아내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울 왕의 딸인 미갈이었습니다. 그러나 미갈은 다윗을 존경하거나 사랑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만일 미갈이 다윗을 여전히 사랑하였다면 다윗도 여전히 그를 사랑했을 것입니다.
사울 왕도 역시.... 다윗과는 이제 장인과 사위의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고 말았던 것입니다.
본문 42절에 있는 대로... 아비가일은 다윗의 청혼을 받아들여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제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불 경건하고 완고하고 교만하고 탐욕에 사로잡힌 나발의 아내가 아니라.... 이제 어엿한 다윗의 아내가 되었던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될 뿐만 아니라... 훗날 모든 백성으로부터 존경을 받는 국모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도 아비가일과 같은 지혜와 겸손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배웠다고, 가진 것이 있다고.... 권력과 명예가 있다고 자만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엎드리며 남을 섬길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하나에도 지혜가 필요해요...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과 같이... 섬김과 순종을 통하여.... 가정이 살고 믿음이 살고 교회가 성장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칭찬 받을 만한 지혜
삼상 25장 33절 / 장경준목사
오늘 읽은 본문은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날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보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했습니다.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다윗에게 들은 말입니다. 아비가일이란 여인은 칭한 받을 만한 지혜를 가짐으로 자신과 가문에 닥칠 재난과 고통을 막았습니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복된 미래를 이루어낸 아비가일의 지혜는 무엇일까요?
1. 주는 지혜입니다.
다윗이 사백여명의 추종자를 데리고 사울 왕에게 쫓겨 광야 지대를 지나게 되었습니다. 먹을 것과 마실 것이 없었습니다. 그 광야 지대에는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많은 짐승들을 목축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사람을 보내어 먹을 음식을 구하였으난 오히려 수모를 당하고 거절 당했습니다. 다윗은 당한 수모에 보복하려고 칼을 뽑아 나발의 집안을 치러 갑니다. 이 때에 나발의 한 종이 이 사실을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전합니다. 이 아비가일은 예쁠 뿐 아니라 지혜로운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의 마음에 즉시 한 지혜가 또 올랐습니다. 삼상 25:18을 보면 “아비가일이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 준비한 양 다섯과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을 취하여 나귀들에게 싣고”라고 했습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결핍한 음식들을 남편 모르게 창고에서 꺼내어 다윗에게 주려했습니다.
아비가일의 주는 마음이 지혜입니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거두어 자신의 소유를 삼는 것을 삶의 기준과 행복으로 살아 갑니다. 많은 것을 빼앗는 능력이 세상의 능력이요 그 결과가 축복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상과 가치와 윤리는 지혜로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도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한 하나님의 최고의 지혜는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온 몸과 생명을 주심으로 우리를 죄악에서 건지셨습니다. 이웃의 결핍을 보고 자신의 유여한 것을 나누어 줌으로 공생하는 지혜가 이 시대의 지혜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남을 높이는 지혜입니다.
많은 음식을 준비한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러 갑니다. 이런 아비가일의 행위는 정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칼을 들고 죽이러 오는 사람을 피하지 않고 오히려 만나러 가는 아비가일의 행위는 자살 행위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비가일의 지혜입니다. 우리는 흔히 어떤 문제를 만났을 때에 그 문제를 피합니다. 피하고 관망하고 변명하며 그 문제로 말미암은 고통을 남의 탓으로 넘기며 삽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문제를 향해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문제를 정면으로 대하는 당당함이 지혜 입니다.
아비가일은 비록 자신 때문에 야기되지 않은 문제는 아니였지만 자신과 함께 하는 사람들에게 닥칠 미래의 문제에 대해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비가일은 남편 되는 나발의 어리석음과 악함으로 인한 재난을 자신이 감당하였습니다. 이것이 책임 정신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대통령의 탄핵 문제로 온 국가가 어지럽습니다. 이 책임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우리 모두의 책임으로 알고 국민 각자가 자신가 국가의 미래를 자신의 것으로 알고 지난 과오를 반성하는 지혜를 모두어야 할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만나자 최고로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삼상 25:23을 보면 “아비가일이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앞에 엎드려 그 얼굴을 땅에 대니라”했습니다. 알지 못하는 남자에게 얼굴을 땅에 대기까지하는 행위를 보인 것은 최고의 겸손, 순종, 생명 위임을 표한 것입니다. 또한 삼상 25:28을 보면 “주의 여종의 허물을 사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했습니다. 이는 다윗을 장차 왕이 될 사람으로 인정한 것으로서 다윗을 왕같이 대한 것입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은 최고로 낮아지고 상대방은 왕 같이 높이는 섬김의 지혜를 가졌습니다.
3. 미래의 꿈이 현실을 이끄는 지혜입니다.
아비가일은 미래를 생각할 줄 아는 여인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선한 미래를 꿈 꾸었습니다. 흔히 많은 사람들이 닥친 현실만 생각하며 현실의 문제를 풀려고 합니다. 현실에 급급하면 더욱 엉킬 뿐 아니라 잘 못된 선택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어떻게 현실의 문제를 풀어 갔습니까? 삼상 25:30-31을 보면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신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수하셨다든지 함을 인하여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신 때에 원컨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라고 했습니다. 다윗이 후에 왕이 되었을 때를 염두에 두고 미래에 마음 걸릴 일을 피하도록 권했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는 지금 대통령 탄핵이란 정변 속에 소요하고 있습니다. 이 소요가 민족의 위기로 갈 수도 있고 민족이 발전하는 도약의 기회로 삼을 수도 있습니다. 아비가일은 피 흘릴 상황을 막은 지혜를 가졌습니다. 그 지혜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복을 누리게 했습니다. 이 시대가 아비가일의 지혜를 요구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것을 나눔으로 남의 결핍을 해결해 주며 더불어 함께 사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자신은 낮아지고 남은 왕 같이 높힘으로 함께 잘 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미래의 선한 꿈이 현실을 이끌어 가는 미래 지향적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이러한 지혜를 일컬어 칭찬할 만한 지혜라고 합니다. 칭찬 받을 만한 지혜가 대통령과 국회의원들 그리고 온 백성에게 함으로 고통이 없는 복된 미래를 이루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두 가지 죽음
전승문 목사 / 삼상 25:36~38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은 정말 열심히 공부합니다. 아마 전세계에서 우리나라 고등학생들이 제일 열심히 공부할 겁니다. 그런데 모두가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안 하는 학생들은 안 합니다. 우리 시절에는 그런 학생들을 노는 애들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노는 애들은 자율학습도 안 하고 수업시간에도 엎드려 자곤 했습니다. 왜냐면 그들은 대학진학을 포기했기 때문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도 포기하고 노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엇을 포기했을까요? 천국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에는 천국을 포기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제멋대로 살 듯 천국을 포기한 인생들 역시 제 맘대로 삽니다.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삽니다.
학창시절 어떤 학생들은 밤을 새워 공부하는데 노는 애들은 밤을 새워 놉니다. 어떤 학생들은 점수 하나 때문에 애를 써도 노는 애들은 성적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밤을 새워 기도하지만 천국을 포기한 사람들은 밤을 새워 놀려고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은 작은 죄 하나 때문에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 하지만 천국을 포기한 사람들은 죄라는 것 자체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걸리지만 않으면 문제되지만 않으면 무슨 짓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왜 같은 인생을 사는데 이토록 다르게 사는 것일까요? 천국을 소망하는 사람과 천국을 포기한 사람은 인생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은 기회입니다. 천국에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기회 그것이 인생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하지만 천국을 포기하면 그 목적이 사라지고 맙니다. 천국을 포기하면 그저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즐기는 것이 전부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다 먹자고 하는 일이라고 하고 인생은 즐기는 거라고 합니다. 안 됩니다. 인생은 잘 살아야 합니다. 인생은 단 한 번의 기회, 유일한 기회,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인생을 참 잘 살다 가신 분이 있습니다. 사무엘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무엘은 인생을 정말 정말 잘 사신 분입니다. 오늘 성경에 그 사무엘의 마지막 장면이 나옵니다 :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 다윗이 일어나 바란 광야로 내려가니라 (1절)”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나라를 구한 위대한 영웅 사무엘이 죽었습니다. 그러자 온 이스라엘 무리가 함께 모여 그 죽음을 슬퍼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딱 한 번 사는 인생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죽음은 두 가지 큰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첫째는 사울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이 죽은 다음부터 사울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사람! 기도하기를 쉬는 걸 죄로 여기는 사람! 사무엘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동안 사울이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건 사울의 능력이 아니었던 겁니다. 사무엘이 사울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기 때문인 겁니다. 사무엘이 나라를 위해 왕을 위해 기도했기 때문이었던 겁니다. 그런 사무엘이 죽자, 사울을 위해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무엘이 죽자, 사울이 급격하게 무너지기 시작한 겁니다.
또 한 사람 크게 흔들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다윗도 역시 사무엘의 기도 덕분에 그동안 견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무엘이 죽자 다윗마저 흔들리기 시작한 겁니다. 이래서 기도하는 사람이 중요한 겁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가정이 흔들리지 않고 교회가 흔들리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있어야, 기도하는 교회가 있어야, 나라가 든든하게 설 수 있습니다. 기도하십시오. 가정을 위해 교회를 위해 그리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십시오. 기도해야 삽니다. 기도해야 가정이 살고 교회가 살고 나라가 삽니다. 적어도 한 집에 한 사람은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정이 이 말세지말 대환난의 시대를 이겨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죽자 다윗이 바란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사울의 주변에서 멀리 떨어진 겁니다. 바란 광야는 이스라엘 남쪽 먼 곳에 있는 죽음의 땅입니다. 일찍이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도망쳤던 곳이 바로 바란 광야입니다. 다윗도 그곳으로 도망친 겁니다. 사무엘이 죽자 두려움에 사로잡혀 도망친 겁니다. 광야에 있으면 사울의 추격을 피할 수 있습니다. 광야는 아주 넓고 너무 더워서 사울도 쫓아올 수 없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광야는 그만큼 힘든 곳입니다. 그늘도 없고 물도 없고 도무지 살아갈 방법이 없는 곳입니다. 다윗이 그런 곳으로 도망친 겁니다. 그러니 다윗도 그곳에서 굉장히 궁핍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광야 위쪽에 마온이라는 성읍이 있었습니다. 광야가 시작되는 지역에 있는 작은 성읍입니다. 또한 그 근처에 갈멜이라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갈멜이라는 지역이 두 군데가 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을 처단한 갈멜산입니다. 이스라엘 북쪽 갈릴리 가는 곳에 있는 비옥한 산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갈멜은 그 갈멜산이 아닙니다. 이 갈멜은 네게브 광야 근처의 마온 성읍에 있는 한적한 지역입니다.
그 지역에 나발(נָבָל)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발은 부자였습니다. 양이 3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나 있는 큰 부자였습니다. 하지만 심히 미련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발이라는 이름 자체가 미련한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나발은 아마도 본명이 아니고 별명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얼마나 미련한 사람이었는지 본명이 아니라 별명으로 성경에 기록된 인물입니다. 성경은 그가 완고하고 행실이 악한 사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 “마온에 한 사람이 있는데 그의 생업이 갈멜에 있고 심히 부하여 양이 삼천 마리요 염소가 천 마리이므로 그가 갈멜에서 그의 양 털을 깎고 있었으니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실이 악하며 그는 갈렙 족속이었더라 (2절~3절)” 다행스러운 것은 미련한 나발에게 현명한 아내가 있었다는 겁니다.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אֲבִיגַיִל)입니다.
다윗이 그곳에 머무는 동안 알게 모르게 나발의 식솔들과 왕래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 지역은 워낙 변두리라 외적의 침입이 빈번한 곳이었습니다. 광야에 사는 베두인 족이 수시로 침범하여 약탈을 일삼는 곳이었던 겁니다. 그런 곳에 다윗이 있었으니 다윗이 그들을 지켜주곤 했습니다. 그래서 나발의 하인들은 다윗의 도움을 상당히 받았던 모양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발이 양털을 깎는 날이 되었습니다. 3천 마리나 되는 많은 양들의 털을 깎는 날이 된 겁니다. 유목민들에게 양털을 깎는 날은 큰 잔치가 벌어지는 날이었습니다. 나발도 그 날 큰 잔치를 벌였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부하들을 보내 음식을 청하였습니다.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로 돕고 살았으니 좋은 날을 축하하며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다윗이 많이 궁핍했기 때문입니다. 600명의 부하와 그 식솔들까지 수천 명을 거느리며 살아가기가 몹시 힘들었던 겁니다. 더구나 지금은 광야지역에 있다 보니 더더욱 힘들어진 겁니다.
다윗은 예를 갖춰 정중하게 청했습니다. 10명의 부하들을 보내며 정중하게 도움을 요청한 겁니다. 그런데 나발이 뜻밖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다윗의 부하들을 모욕하며 다윗을 비웃은 겁니다 :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10절~11절)” 나발이 도움을 거절하는 것도 모자라 다윗을 모욕한 겁니다. 다윗을 도망친 노예로 비하하며 비웃은 겁니다.
다윗이 그 말을 듣자 불같이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화가 났는지 나발과 그 식솔들을 다 죽이겠다고 직접 칼을 들고 나섰습니다. 안 됩니다. 이러면 절대로 안 됩니다. 나발이 어리석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 사람을 죽이고 그 식솔들까지 학살한다면 이는 사울과 다를 바가 없는 겁니다. 사울도 놉의 제사장들과 그 식솔들을 죽이는 바람에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지금 다윗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겁니다. 같은 마귀가 역사하는 겁니다. 힘들고 지친 다윗에게 큰 마귀가 혈기 마귀가 역사하는 겁니다.
인빈지단(人貧智短)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심보감에 나오는 말인데 너무 궁핍하게 살다보면 생각이 짧아진다는 뜻입니다. 가난에 너무 시달리게 되면 정상적인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작은 일에도 크게 화를 내고 별 일 아닌 것에도 크게 낙심하게 되는 겁니다. 다윗도 그랬습니다. 다윗도 벌써 여러 해째 도망자로 지내다보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더구나 메마른 광야지역에서 지내다보니 마음도 생각도 다 메말라지고 만 겁니다. 아무튼 크게 화가 난 다윗이 부하를 400명이나 데리고 나발을 향해 출발했습니다. 그대로 두면 나발은 물론이고 그 식솔 전부가 몰살당할 위기에 처한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다윗의 앞날에 큰 먹구름이 끼게 될 겁니다. 하나님께서도 진노하실 거고 백성들도 다윗을 인정하지 않게 될 겁니다. 분노 조심해야 합니다. 인생을 살면서 분노처럼 잘 관리해야 하는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지금 분노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나발을 통해 역사하는 마귀의 충동질에 넘어져 큰 실수를 저지르고 있는 겁니다.
참 다행스러운 것은 그곳에 아비가일이라는 여인이 있었다는 겁니다. 아비가일은 나발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남편과 달리 굉장히 총명한 여인이었습니다. 나발의 하인 중 하나가 아비가일에게 찾아갔습니다 : “하인들 가운데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우리 주인에게 문안하러 광야에서 전령들을 보냈거늘 주인이 그들을 모욕하였나이다 우리가 들에 있어 그들과 상종할 동안에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 그런즉 이제 당신은 어떻게 할지를 알아 생각하실지니 이는 다윗이 우리 주인과 주인의 온 집을 해하기로 결정하였음이니이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이다 하는지라 (14절~17절)” 기가 막힌 말입니다. 하인이 그 주인마님에게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주인은 불량한 사람이라! 더불어 말할 수 없나입니다!” 인생 이렇게 살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불량한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에게 더불어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나발은 그렇게 산 겁니다. 심지어 그 아내조차 그 말을 듣고 인정할 정도로 어리석은 삶을 산 겁니다.
하지만 성도는 이런 사람 때문에 분노하면 안 됩니다. 이런 사람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런 사람과 다투면 똑같이 어리석어질 뿐이기 때문입니다. 아비가일은 하인의 말을 듣자마자 서둘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장 준비할 수 있는 음식들을 챙겨 서둘러 길을 나선 겁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가일이 다윗의 일행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도 다윗은 분노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 앞에 아비가일이 엎드렸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 “그가 다윗의 발에 엎드려 이르되 내 주여 원하건대 이 죄악을 나 곧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에게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입니다 여종은 내 주께서 보내신 소년들을 보지 못하였나이다 (24절~25절)” 다 자기 잘못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그 자리에 없어서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 “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 (28절~29절)” 중요한 말입니다. 다윗이 지금 왜 이렇게 분노하고 있는 것일까요? 물론 표면적으로는 나발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다윗이 낙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긴 도망자 생활에 너무나도 지치고 힘들어 낙심해 있는 겁니다. 인빈지단! 그래서 그 생각이 짧아진 겁니다. 더구나 사무엘이 죽자 모든 희망을 잃어버린 겁니다. 자신을 인정하고 자신의 머리에 기름 부은 사무엘이 죽자 절망에 빠지고 만 겁니다.
그런 다윗을 아비가일이 위로해준 겁니다.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싸움을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또한 다윗은 아무 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는 겁니다. 다윗이 가장 듣고 싶어 하던 말을 아비가일이 해준 겁니다. 당신은 억울하다고 당신은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인정해준 겁니다. 뿐만 아니라 사울이 아무리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죽일 수 없을 거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의 생명을 확실하게 지켜주실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승리하게 될 거라고 했습니다. 다윗을 위로하고 다윗에게 용기를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 “여호와께서 내 주에 대하여 하신 말씀대로 모든 선을 내 주에게 행하사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무죄한 피를 흘리셨다든지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셨다든지 함으로 말미암아 슬퍼하실 것도 없고 내 주의 마음에 걸리는 것도 없으시리니 다만 여호와께서 내 주를 후대하실 때에 원하건대 내 주의 여종을 생각하소서 하니라 (30절~31절)” 화근을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나발 때문에 후회할 일을 만들지 말라는 겁니다.
아비가일의 말을 듣자 다윗의 마음이 진정되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이르되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32절)” 그렇습니다.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다윗이 그것을 알아봤다는 겁니다. 이것이 다윗의 탁월한 점입니다. 다윗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하는 사람이었던 겁니다. 이렇게 다윗이 돌아갔습니다. 분노를 다스리고 다시 은혜 충만해져서 돌아간 겁니다.
놀라운 것은 그러고 나자 하나님이 나발을 심판하셨다는 겁니다. 다음 날 아비가일이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말하자 나발이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에서 깬 후에 그의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말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 (37절~38절)” 이런 사람이 나발입니다. 술 취해서는 큰 소리를 치지만 술이 깨면 겁쟁이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열흘 만에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 때문에 화를 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나발이 죽은 후에 다윗이 아비가일을 불렀습니다. 현명한 그녀를 아내로 삼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두 사람의 죽음이 나옵니다. 한 사람은 사무엘이고 또 한 사람은 나발입니다. 똑같이 한 세상을 살다간 사람인데 이 둘은 달라도 너무 달랐습니다. 사무엘은 기도하는 분입니다. 사무엘의 기도 덕분에 나라도 임금도 굳건히 설 수 있었습니다. 또한 사무엘의 기도 덕분에 다윗도 훌륭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발은 어떤 인생인가요? 그 아내도 그 하인들도 고개를 돌리는 어리석은 인생입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집안이 몰락할 뻔했던 참으로 미련한 인생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인생 잘 살아야 합니다. 천국을 소망하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기도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무엘처럼 천국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네가 막았느니라
삼상 25장 32~33절 / 고신일목사(기둥교회)
<목회기도>
예배하라 하시고 예배를 받으시는 하나님!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허물과 죄를 사하시고 자녀 삼으신 은혜를 누리게 하심 감사합니다.
오늘, 단지 교회에 들렸다가 사람만 만나고 가지 않도록 성령으로 인도하옵소서.
우리 모두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려는 가슴 뜀으로 살기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열정과 열심을 가지고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게 하시고,
무엇을 하든지 다 주께 하듯 하여 세상에도 감동을 전하며 살게 도와주옵소서.
졸지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돌보심이 기둥교회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에 있기를 구합니다.
어려운 일을 만나도 함께 하심 믿고 믿음 잃지 않는 승리를 주옵소서.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있지 못하고 외국에, 객지에, 군대에 가있는 기둥교회 성도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함께 하여 주옵소서.
특별히 병상의 환자들에게 집에서 병마와 싸우는 이들에게 …
치료의 광선을 비춰주시옵소서.
세계 곳곳에서 인터넷과 휴대 전화로 예배에 동참하는 이들에게도 우리와 동일한 예배의 은총을 내려 주옵소서.
부족한 종이 말씀을 전합니다.
가슴 뜨거움과 치료/회복/감사의 시간이 되도록 성령으로 역사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평안하십니까?
전날 숙면을 하지 못했더라도 아침에 ‘잘 잤다’라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더 기운이 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습니다.
수면에도 ‘플라시보 효과’(위약효과)가 적용된다는 뜻입니다.
‘플라시보 효과’란 의학 성분이 없는 가짜 약일지라도 환자가 치료 효과에 대한 믿음이 있을 때 실제로 효과가 나타나는 현상을 말합니다.
실제로 전날 잠을 잘 잤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숙면을 취했다고 믿은 그룹의 사람들이 기억력과 주의력을 측정하는 시험에서 더 좋은 결과를 냈다고 합니다.
<파이낸셜뉴스, 2014. 01. 24. 기사 참조.>
‘잘 잤다는 생각만으로도 아침에 덜 피곤하다’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나는 잘 될 것이다,
행복하다, 힘들고 어렵지만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것이다’라는 마음을 가지면 더 큰 역사가 임할 줄로 믿습니다.
오늘도 여러분 잘 오셨습니다.
‘잘 왔다’는 생각만으로도 은혜가 될 것입니다.
성경을 높이 들고 우리의 믿음을 표현합니다.
저는 예수 믿어 구원받았습니다(요3:16).
저는 예수 믿어 하나님 자녀 되었습니다(요1:12).
저는 예수 믿어 천국 백성 되었습니다(빌3:20).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오늘(시118:24),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습니다(딤후3:14~17).
눈을 열어 주의 법 안에 있는 놀라운 진리를 보고 깨닫게 하소서(시119:18).
"아멘"으로 순종하여(고후1:20)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 되게 하소서(마5:16).
아멘.
그런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온에 사는 나발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 그를 장사한지라”(삼상 25:1)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행13:20)로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선지자였습니다.
사무엘은 다윗의 머리에 기름을 부은 영적인 아버지였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광야에서 떠돌던 다윗에게 사무엘의 죽음 소식은 큰 슬픔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다윗은 영적으로 크게 침체되어 있어서 큰 오점을 남길 뻔했습니다. 분노한 다윗이 나발을 죽이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마온에 사는 나발은 갈멜에 목장을 가지고 있었고, 아주 잘 사는 큰 부자였습니다.(삼상 25:2)
그가 가진 가축은 양 떼가 삼천 마리, 염소 떼가 천 마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고집이 세고(완고하고) 행실이 악하였습니다.(3절)
그런 나발과는 어울리지 않게 지혜롭고 용모도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아비가일’이었습니다.(삼상 25:3)
어느 날 다윗은 나발이 자기 양들의 털을 깎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5~9절을 <쉬운성경>으로 보면 아래와 같습니다.
[삼상] 25:5 그래서 다윗은 젊은 사람 열 명을 나발에게 보내며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갈멜로 가서 나발을 만나라. 그에게 내 이름으로 인사하여라.
[삼상] 25:6 그리고 이렇게 말하여라. '당신과 당신 집안이 잘 되기를 빕니다.
그리고 당신에게 딸린 모든 것도 잘 되기를 빕니다.
[삼상] 25:7 당신이 양털을 깎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당신의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을 때에 우리는 그들을 조금도 해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목자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도둑맞지 않았습니다.
[삼상] 25:8 당신의 종들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러면 그들이 그 사실을 이야기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 좋은 날에 왔으니, 제발 당신의 종과 같은 다윗과 그의 종들에게 친절을 베풀어 먹을 것을 좀 주십시오.'"
[삼상] 25:9 다윗의 부하들은 나발에게 가서 다윗의 말을 전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광야에서 살았기 때문에 … 또한 사울로부터 도망 다니는 처지였기 때문에 … 제대로 먹지 못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발에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대가를 요구했고 강제로 달라는 것이 아니라 정중하게 부탁했습니다.
사실 광야에서 양을 기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광야는 자연재해가 많을 뿐 아니라 범죄발생률도 대단히 높은 지역입니다.
강도들이 자주 출몰해서 여행자들을 약탈하곤 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처럼 강도만난 사람이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조되었던 장소도 광야였습니다.
[ 유진 피터슨 저, 이종태 역,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p.102.]
나발의 가축을 돌보던 목자들은 강도들에게 많은 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고 담이 되어 주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15~16절에 보면 “… 그 사람들이 우리를 매우 선대하였으므로 우리가 다치거나 잃은 것이 없었으니 우리가 양을 지키는 동안에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낮 우리에게 담이 되었음이라”(삼상 25:15~16) 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 양털 깎는 날은 잔칫날과 마찬가지였습니다.
농사로 말하면 추수 때와 같은 것입니다.
공들여 키운 양에서 털을 거두는 시기이므로 신나고 흥겨운 잔치였습니다. (삼하 13:23, 창38:13 참조)
나발이 양털을 얻을 수 있게 된 것은 다윗의 도움도 컸습니다.
그리고 잔치 때 먹을 음식을 좀 나누어 달라는 요청은 무리한 부탁도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다윗을 모른 척 했고, 다윗의 부하들을 외면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모욕했습니다.
사무엘상 25장 10~11절을 봅니다.
“그러나 나발은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다윗이 누구요? 이새의 아들이란 자가 도대체 누구요?
요즘은 자기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놈들이 많다던데, 내가 어찌 빵과 물 그리고 양털 깎는 내 종에게 주려고 잡은 짐승의 고기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줄 수 있겠소!”(삼상 25:10~11, 쉬운성경)
나발이 다윗을 몰랐을 리 없었습니다.
‘요즈음에 … 주인에게서 도망치는 종이 많다’고 한 것으로 보아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나발이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회와 신학 편집부, <사무엘상, 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두란노, p.411. 참조]
나발은 감사할 줄 몰랐습니다. 은혜를 베푼 다윗을 강도처럼 생각했습니다.
다윗의 분노
말을 전해들은 다윗은 부하들에게 “칼을 차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400명 가량을 데리고 나발을 잡으러 나섰습니다.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이성을 잃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려고 하던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주었던 사람입니다.
그때 사울을 죽였더라면 더 이상 도망 다니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랬던 다윗이 나발의 모욕은 참지 못했고 인내심을 잃었습니다.
나발을 죽이기 위해 양털 깎는 잔치가 벌어지는 들판으로 향했습니다.
아무리 신앙 좋은 사람이라도, 아무리 인격이 좋은 사람이라도 언제나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자신을 믿어 주던 사무엘이 죽어 심적으로 크게 동요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광야에서 궁핍하게 살며, 참을 수 없는 모욕까지 당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인내심도 무너졌습니다.
분노로 살인을 저지를 지경에까지 이른 것입니다.
[ 김서택, 『순종하는 자의 형통, 불순종하는 자의 파멸』, 솔로몬, p. 415. 참조. ]
분노는 ‘분하여 몹시 성을 내는 것’을 말합니다.
분노는 히브리어로 ‘아프’이며, 코 또는 콧구멍이라는 뜻입니다.
히브리어에서는 ‘노를 발했다’는 말을 ‘코가 불타올랐다’라고 표현하며,
이는 하나님과 인간에 대해 모두 사용되었습니다.(창30:2,출4:4)
사람 사이의 분노는 - 과격한 말이나(잠15:1)
- 급한 성격(전7:9)
- 사랑이 없기 때문에(고전 13:4-5)
- 외식적인 신앙(창4:5) 등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여러분도 왜 화를 내는지 생각해보세요.
여러분, 세계 평화를 위해서 화를 내보셨나요?
복음 전파를 위해서 화를 내보셨나요?
대부분의 분노는 굉장히 사소한 문제로부터 시작됩니다.
밥 안준다고 싸우고, 설거지 안한다고 싸우고 자잘한 일상의 일들로 싸웁니다.
부부싸움하는 원인을 찾아보세요.
세계 평화를 위해 부부싸움 하십니까?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분노하는 사람은 악하고(시37:8) 어리석은 일을 행하게 되며(잠14:17) 다툼을 일으킨다고 했습니다다.(잠29:22;30:33) 그리고 그들은 결국 벌을 받으며(잠19:19)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고(약1:20) 하나님의 나라도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됩니다.(갈5:20-21)<비전성경사전>
그래서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는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엡 4:26)하였습니다.
살다보면 분을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고,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분을 내어도 어둠과 연결되지 않도록 해가 지기 전에 화를 풀라는 것입니다.
화가 난다고 내가 어떻게 해보려고 하는 것은 사실 교만한 행동입니다.
예수님은 죄도 짓지 아니하셨고, 거짓도 없으셨지만 (벧전 2:22)
어려움을 당할 때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인내하셨습니다.
베드로전서 2장 23절을 <쉬운성경>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모욕을 당해도 욕하지 않으시고, 고난을 받을 때도 위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는 모든 것을 공정하게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자신을 맡기셨습니다.”(쉬운성경, 벧전 2:23)
아무리 억울한 일이 있어도 분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다윗은 사울 앞에서는 잘 참아냈지만 나발 앞에서는 혈기를 보였습니다.
이 이야기는 어떤 사람도 완벽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은혜가 그를 지탱해주지 않는다면 올바르게 계속해서 서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성도는 홀로 걷는 법을 배운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영원하신 팔(신33:27)”에 기댈 필요가 있음을 크게 느끼는 사람입니다.
참으로 탁월한 성도는 더 이상 육체의 정욕에 의해 시험을 당하거나 사탄의 공격으로 인해 고통당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열매를 거둘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입니다.
[ 아더핑크 저, 김광남 옮김, <다윗의 생애 1>, 뉴라이프, 2008, p. 254-255. 참조 ]
사실 다윗이 나발과 같은 사람과 싸우는 것은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이 될 뿐이었습니다.
성경을 계속 읽어 보면 후에 나발은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나서서 끝내려 하기보다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리며 화를 다스려야 했습니다.
분을 내면 그 분을 낸 것의 결과를 수습하는데 많은 노력과 시간이 듭니다.
그만큼 분노에는 파괴적인 힘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순간순간 분노를 이기며 살아야 합니다.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
다윗은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은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삼상 25:22) 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은 “급히 떡 이백 덩이와 포도주 두 가죽 부대와 잡아서 요리한 양 다섯 마리와 볶은 곡식 다섯 세아와 건포도 백 송이와 무화과 뭉치 이백 개를 가져다가 나귀들에게 싣고”(삼상 25:18) 다윗에게 향했습니다.
그리고 “… 다윗을 보고 급히 나귀에서 내려 다윗 앞에 엎드려 그의 얼굴을 땅에 대니라”(삼상 25:23) 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통해 다윗이 죄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신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분노하여 그대로 행동하였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살인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비가일을 통해 다윗의 범죄를 막아주셨습니다.
아비가일에게는 화가 머리끝까지 난 사람에게 말로만 해선 안된다는 지혜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화난 사람에게 그냥 ‘죄송하다’고 말하는 것보다 쥬스라도 들고 가서 ‘죄송합니다’라고 하는 것이 화를 풀게 하는 방법일 것입니다.
요즘의 저는 예전보다 많이 착해지고 부드러워졌습니다.
그런데 예전에는 한번 화나면 정말 불같았습니다.
우리교회에서 교육전도사를 하다가 지금은 목사가 된 어떤 전도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전도사가 잘못을 저질러서 제가 크게 혼내려고 마음을 먹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전도사가 제게 쵸콜릿을 내밀며 ‘목사님, 이것을 드시면 화가 좀 가라앉을 것입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전도사를 들었다 놨다 하려고 마음먹었다가 그 쵸콜릿 때문에 웃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가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후에 들리는 말이 쵸콜릿 하나로 끝냈다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지혜로운 방법이었습니다.
아비가일은 굶주렸던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많은 음식을 제공하여 다윗의 마음을 진정시켰습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림으로 나발의 잘못을 인정하였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은 물론 자기편, 특히 자기 식구의 잘못을 인정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자기 남편이라고 해서 잘못을 감싸려 하지 않았습니다.
잘못을 인정했습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것입니다.
무엇보다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했습니다.
“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삼상 25:29)
아비가일은 하나님이 다윗을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증언하였습니다.
특별히 ‘물매로 던지듯 … 여호와께서 … 던지시리이다’는 표현은 다윗의 기억을 자극하였을 것입니다.
오래 전 엘라 골짜기에서 다윗이 골리앗을 무너뜨렸던 그 사건을 생각나게 했을 것입니다.
아비가일의 말은 이런 뜻입니다.
『다윗이여, 원수를 갚는 것은 당신이 할 일이 아닙니다.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이 하실 일이고, 당신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당신이 여기 광야에 있는 이유는 하나님은 무슨 일을 하시며 …
하나님 앞에서 당신은 누구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입니다.
광야는 당신이 스스로를 시험해보며 자신이 얼마나 강인한지 알아보는 시험장이 아닙니다.
광야는 당신의 삶 속에서 그리고 당신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능력을 발견하는 곳입니다.
나발은 어리석은 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당신도 어리석은 자가 되렵니까?
여기서 어리석은 자는 하나로 족합니다.”』
[ 유진 피터슨 저, 이종태 역,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IVP, p.105. 참조 ]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듣고 분노를 그쳤습니다.
무기를 든 다윗 앞에서 아비가일은 다윗의 분노를 수그러들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 …
네가 급히 와서 나를 영접하지 아니하였더면 밝는 아침에는 과연 나발에게 한 남자도 남겨 두지 아니하였으리라” (삼상 25:33~34)
아비가일의 지혜는 다윗의 분노를 막았습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습니다.
‘한 열흘 후에 여호와께서 나발을 치시매 그가 죽으니라(삼상 25:38)’
아비가일처럼 우리도 다툼을 막고 화해를 만드는 사람이어야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아비가일처럼 분쟁이 있는 곳에서 화해를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아비가일처럼 평화를 만들며 살아야 합니다.
잠언 14장 1절에 “지혜로운 여인은 자기 집을 세우되 미련한 여인은 자기 손으로 그것을 허느니라”(잠 14:1) 하였고, 잠언 31장 10절에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잠 31:10) 했습니다.
여자만이 아비가일처럼 지혜로워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마찬가지입니다.
부부생활에서도, 부모자녀의 관계에서도, 그 밖의 많은 대인관계, 교회 안에서도 꼭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아비가일처럼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다툼과 분쟁, 싸움을 막아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5장 9절 말씀처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라”
오늘 예배드리는 여러분, 말씀을 듣는 여러분 모두 가는 곳마다 다툼을 막고, 분쟁을 막아 ‘네가 막았다, 너 때문에 분쟁을 막았다’는 말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교회에서 … 이 세상 어디서든지 하나님의 평화를 만들어내 다툼을 막아냈던 아비가일처럼 ‘네가 막았느니라’하는 말을 듣는 주인공이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