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 제50칙 운문의 진진삼매(塵塵三昧)
“티끌 하나 하나에도 우주가 들어있다”
〈벽암록〉제50칙은 운문화상에게 진진삼매(塵塵三昧)의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질문했다. “무엇이 진진(塵塵) 삼매입니까?”
운문화상이 대답했다. “발우 속에는 밥이 있고, 물통 안에는 물이 있지.”
擧. 僧問雲門, 如何是塵塵三昧. 門云, 鉢裏飯, 桶裏水.
발우속에 밥이 들어있는 것 처럼
있는 그대로가 ‘진진삼매 경지’
운문문언화상은 〈벽암록〉 제6칙의 ‘날마다 좋은 날’이 되도록 법문을 하고 있는 것처럼, 많이 등장하고 있다. 본칙의 공안은 〈운문광록〉상권에 수록하고 있는데, 어떤 스님이 운문화상에게 “진진(塵塵) 삼매란 어떤 경지입니까”하고 질문하고 있다.
진진삼매(塵塵三昧)란 〈화엄경〉 14권 현수품 게송에 “일체가 모두 자유 자재한 것은 부처의 화엄삼매 힘이다. 한 티끌(微塵) 가운데 삼매에 들어가 일체의 티끌(微塵)의 선정을 성취한다. 그러나 그 티끌(微塵)은 또한 늘어나지도 않고 하나로서 널리 생각할 수 없는 많은 국토를 나툰다”라고 읊고 있는 말에 의거한 질문이다. 〈화엄경〉 45권에 ‘한 티끌 가운데 일체가 있다’라는 말이나 ‘한 티끌(一塵) 법계를 다한다’, ‘한 티끌 가운데 무량의 국토를 나툰다’라고 설하고 있는 것처럼,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이사무애법계(理事無碍法界)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碍法界)의 사상을 토대로 질문하고 있다.
의상스님의 〈법성게〉에도 이러한 화엄사상을 ‘한 티끌 그 가운데 시방세계 포용하고, 일체의 모든 티끌 하나하나도 낱낱이 또한 같다(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라고 읊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일미진(一微塵)은 지극히 미세한 티끌을 말하며, 진진(塵塵)은 미세한 티끌 하나하나를 말한다.
따라서 진진(塵塵) 삼매나 개개(個個)삼매 혹은 개별삼매(個別三昧)라고도 할 수 있는데, 한 티끌 가운데 우주 일체를 포섭시키고 있는 삼매라는 말이다. 이와 비슷한 말로 진진일념(塵塵一念)이란 말이 있는데, 일체의 모든 사물 하나하나가 한 생각의 움직임(작용)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이 질문은 화엄사상에서 주장하는 장단(長短)과 대소(大小)의 차별을 초월한 화엄법계의 연기의 이치와 도리를 확실히 체득한 입장이 아니면 질문 할 수도 없고, 또한 대답 할 수도 없다. 말하자면 화엄철학에서 설하는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이치를 선사는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가를 질문하고 있는 것이다.
화엄법계의 사사무애(事事無碍)는 만물의 근본은 일체라는 원리와 만물이 서로 상관관계라는 이치를 토대로 주장하고 있다. 만물은 일심(一心)의 법계로 나타낸 것이며 마음 밖에 법이 없다(心外無法). 따라서 ‘일체는 오직 마음의 조작이다(一切唯心造)’라고 주장한다. 책을 읽는 마음이나 글씨를 쓰는 것, 한 손가락 움직이는 것이 곧 법계와 함께하는 것이기 때문에 법계를 움직이는 것이며, 인간의 마음 씀이 곧 일체의 법계와 서로 서로 관계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만물이 일체라는 주장도 지금 내가 사용하고 있는 연필이 나무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나무는 땅에서 자란 것이며, 땅은 흙과 물과 바람과 공기 등 많은 사물과 함께 성장된 것처럼, 자신의 마음과 하나 된 경지에서 사용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모든 존재와 사물이 서로 서로 상관관계 속에서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화엄철학에서는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고 한다. 상즉(相卽)은 파도와 물과 같이 서로 받아들이는 것처럼, 만물이 동체(同體)인 관계를 말하며, 상입(相入)은 두 거울이 서로 마주 비추는 것처럼, 만물의 상관관계를 말한다. 화엄철학에서는 십현문(十玄門)이라는 열 가지 법계를 관찰하는 방법으로 제시하고 있으며, 일체의 모든 법이 무애자재하게 상즉상입하는 사실을 설하고 있다. 또한 육상(六相)이 원융(圓融)한 화엄철학으로 일체의 모든 모양이 무애자재하게 서로서로 즉입하는 관계를 제시하고도 있다.
그리고 삼매(三昧)는 ‘samadhi’의 음역으로 정수(正受)라고도 번역하는 것처럼, 올바르게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거울은 어떤 사물이나 무심하게 그대로 받아들여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나의 마음이 무심의 경지에서 일체의 만물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자기 자신(주관)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여 자기와 사물과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하며, 독서삼매라고 할 때 책을 읽는 자신과 책과 하나가 되고, 일을 할 때는 지금 여기서 자신이 하는 일과 혼연 일체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경지를 말한다.
따라서 진진삼매는 미세한 하나하나의 티끌 가운데 능히 무량 광대한 세계와 하나가 되고, 한 생각 한 생각에 무량 법계와 하나가 된 깨달음의 경지를 말한다. 스님은 운문화상에게 “어떤 것이 화엄에서 말하는 사사무애 법계의 사는 경지입니까”라고 질문한 것이다.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진진삼매나 사사무애법계의 법문은 자기와는 별개의 법문이며, 자기 밖에서 그러한 법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원오선사가 “천하의 납승들이 모두 여기에 안주할 소굴을 만든다”라고 착어한 것은 질문한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선승들이 이렇게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즉 경전에서 주장하는 언어 문자의 함정과 미혹함의 괴로움에 빠져 있으면서 진진삼매란 특별한 법문인 것처럼 생각하고 있다. 마치 물속에서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불법의 진실과 깨달음을 마음 밖에서 추구하는 어리석음을 비판하고 있다.
깊고 미묘한 화엄사상의 진수를 진진삼매라는 한마디로 요약하여 질문하자, 운문화상은 “발우 속에는 밥이 있고, 물통 안에는 물이 있지”라고 대답하고 있다. 진진삼매 말인가. 발우에는 밥이 있고, 물통에는 물이 담겨 있는 이것이 화엄에서 주장하는 진진삼매이며 사사무애한 화엄법계이다. 운문은 발우와 물통이라는 일상생활의 도구로서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대답하고 있다. 선어에서 ‘버들은 푸르고, 꽃은 붉다’고 말하는 것처럼, 사물 하나하나의 참된 모습은 지극히 당연한 그대로의 사실이기 때문에 진실이며, 제법의 실상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이 그대로 진진삼매이며 사사(事事)가 무애(無碍)한 법계의 이치인 것이다.
원오선사는 “포대 속에 송곳을 넣어 두었군!”이라고 착어하고 있다. 운문의 기봉(機鋒. 지혜작용)은 송곳이 포대 밖으로 나온 것으로 비유하여 지혜의 안목이 뛰어남을 칭찬하고 있다.
설두화상은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읊었다. “발우 속에는 밥이, 물통에는 물.” 운문의 대답을 다시 인용하여 진진삼매의 경지를 감춤이 없이 그대로 모두 들어낸 것이라고 읊고 있다. ‘“말 많은 스님도 입을 열기 어렵네.” 불법을 잘 알고 변재가 뛰어난 사람이나 삼세의 제불도 운문화상의 이 한마디에는 무엇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북두성과 남극성의 위치는 본래 그 자리에 있는데” 북극성의 별은 언제나 북쪽에, 남극성의 별은 언제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일체의 모든 사물은 반드시 있어야 할 그 곳에 있는 그대로가 진진삼매이며 사사가 무애한 경지이다. 운문이 “발우에는 밥, 물통에는 물이 있다”고 대답한 것과 같다. “하늘까지 넘실거리는 흰 물결은 평지에서 일어난다.” 운문화상의 말은 원융무애하고 변화가 자유자재하여 바다에 있어야 할 성난 파도가 하늘에까지 미친다고 읊고 있다. “마음으로 생각하려 해도 생각하지 못하고, 마음으로 그만두려고 해도 그만두지 못하네.”
운문선사의 대답은 지극히 당연한 사실을 말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인가, 저것인가 비교해서 사량분별하거나 생각해서 알 수 있는 경지도 아니다. 그렇게 미혹한 마음으로 사량분별하는 모습은 마치 〈법화경〉 신해품에 나오는 거지로 천하를 떠돌아다니며 고생하는 장자의 어리석은 아들에 비유하여 “모두가 속옷도 없는 장자의 아들이로다”고 했다. “속옷도 없다”라는 말은 〈한산시〉에 의거한 표현인데, 사바세계의 미혹한 중생은 모두 가난하여 속옷도 없다고 읊었다.
성본 스님/ 동국대 교수
[출처] [벽암록] 제50칙 운문의 진진삼매(塵塵三昧