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투석
서 휴
이란투석以卵投石이라는 말이 있다.
써 이以. 알 란卵. 던질 투投. 돌 석石으로
연약한 달걀로 돌을 때린다. 는 뜻으로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없다는 말이리라.
이란투석以卵投石은
묵자墨子의 귀의貴義에서 찾을 수가 있다.
묵가墨家는 춘추시대春秋時代 말부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활약하던 제자백가諸子百家의 한 학파學派로
기원전 470년에서 391년까지 살았던 묵자墨子를
시조로 하는 학파學派를 묵가墨家라 불렀다.
묵자墨子는 전국시대 초기의 사상가로서 그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는 형벌을 받아 검은 얼굴이라 말하기도 하며
검다고 묵墨이라 부르며 그것이 학파의 이름이 되었다 한다.
묵자墨子는 노魯나라에서 태어나 공자孔子의 유학儒學을
배웠으나 유가儒家의 예악주의禮樂主義를 혐오하여
독자적으로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자는
겸애주의兼愛主義 사상을 펼치게 된다.
유가儒家가 주장하는 위계질서에 의한 인仁의 사랑을
별애別愛 또는 차별애差別愛라 부르며 배척하였으며
평등하면서도 차별이 없는 겸애兼愛를 주장하였다.
상과 복을 주는 천제天帝와 귀신鬼神의 존재를 믿으며
하늘의 뜻인 천지天志를 받드는 일종의
종교적 계급 정치를 이상으로 삼았다.
혈통에 의한 공족과 귀족의 정치 지배를
인정하지 않으며 배척하였으며
빈부귀천에 관계없이 도덕적으로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
사회의 지배적인 지위에 앉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은
모두 유해하다고 하였으며 근로와 절약을 강조하고
호화로운 장례식이나 화려한 음악을 부정하였다.
이에 유가儒家에서는 묵자墨子는 실용성을
중시한 나머지 장식성을 망각하였다 하였으며
겸애주의兼愛主義는 부모와 조상을 무시하는
금수禽獸 와도 같은 짐승의 사상이라고 비난하였다.
그러나 유가儒家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귀족들의
세습제와 부패 정치에 대한 비판과 함께
유가儒家의 예악禮樂 존중이나 비행동성에 대한
비판이 사회 하층민의 지지를 받게 되며
묵자墨子의 신봉자가 급격히 늘어나게 됨으로써
유가儒家에 대항하는 유력한 세력으로 성장하게 된다.
묵자墨子는 단순히 이상을 설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철저한 실천을 중시하였으며 때로는 제자 300명을
거느리고 대국의 잘못된 침략을 막으려
봉기하며 일어서 대항하기도 하였다.
그 전투적인 평화주의는 오늘날까지도
중국에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진시황秦始皇이 통일함으로써 전국시대의
종말과 함께 묵가墨家의 활동은 급격히 쇠퇴하고
한漢나라에 이르러 유교儒敎가 국교로 확립되자
사상계에서 완전히 사라지며 말살되고 말았다.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는 전쟁이 심하여
살아가기 어려운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해법과 희망을 설파하는 사상가들인
제자백가諸子百家가 나타났던 것이다.
제자백가 諸子百家의 주요 네 철학 학파는
유가儒家. 묵가墨家. 도가道家. 법가法家였다.
묵가墨家는 유가儒家. 도가道家와 동시대에
출현하여 이 시기의 유가儒家와 경쟁하는 상대였다.
묵자墨子는 유가儒家의 충효사상을 떠나
겸애설兼愛說을 설파說破 하였는데
겸애兼愛는 조건 없이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서로를 이롭게 하여야 한다는 사상이다.
하늘의 뜻이 바로 겸애兼愛이고
하느님은 겸애兼愛의 화신化身이다.
묵자墨子는 전쟁을 반대하였으며
체험을 근본으로 사물의 본질을 찾아내자는
논리적인 사고를 펴며 중국에서 처음으로
겸애사상兼愛思想을 주창한 인물이라 할 수가 있다.
묵자墨子는 서로를 이롭게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뜻에서 근면한 노동으로 물자를 생산할 것과
아껴 쓰는 절용節用과 검약儉約 등을 주장하였다.
이미 묵가墨家는 철학적인 사상에서 사라졌지만
사회주의를 추종하는 단체나 사람들은
묵가墨家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다.
전국시대에 묵가墨家는 유가儒家와 나란히
유력하게 들어난 현학顯學 학파였으며
전국시대까지 현학顯學 학파로 자칭하면서
집단적으로 활동하였던 학파는
유가儒家와 묵가墨家 뿐이었다고 한다.
맹자孟子는 충효사상忠孝思想이 바로서야 하는데
그 당시 묵가墨家의 묵자墨子와 도가道家 학파의
선구자인 양주楊朱의 사상이 천하에 가득 찼다고
탄식을 하였다고 한다.
이란투석以卵投石은
맹자孟子의 등문공滕文公 하편에서도 나오며
한비자韓非子도 세상의 현학顯學은
유儒와 묵墨이다. 라고 하였으며
한漢나라 시대까지 유묵儒墨이라며 같이 불리었다.
등문공滕文公은 전국시대의 등滕 나라의 군주이며
태자로 있을 때 송宋 나라의 맹자孟子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은 바 있으며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등滕 나라의 명군名君 이었다고 한다.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에는
국가끼리 서로 치열하게 싸웠으므로 유세遊說로써
먹고 사는 묵가墨家가 존립할 수 있었으나
진시황秦始皇이 중국 천하를 통일을 하자
통일국가가 되면서 절대군주가 등장하게 되니
그들의 사상이 시대에 걸맞지 않게 되자
사람들이 따르지 않게 되므로 써
탄압이 없었음에도 소리 없이 사라지게 된다.
묵가墨家는 한漢나라 때 이미 잊혔으나
다만 위진시대魏晉時代에 도교道敎가 생겨나
도교道敎가 불교佛敎의 대장경大藏經에 맞서서
도장경道藏經을 만들면서 거기에
묵자墨子를 끼워 넣어 오늘까지 나타난다고 한다.
첫댓글 찬찬히, 찬찬히 읽었습니다.
앞부분이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유가사상과 묵가사상의 중심인
인의 사랑과 겸애주의.
글을 읽는 동안 저는
유가보다는 묵가쪽에 더 가까운 것 같습니다.
실용주의 정신도 그러하구요.
유가와 묵가의 좋은 점을 따서
새로운 사상이 있었으면 참 좋았으련만.....
잘 읽었습니다.
본문을 욧점정리한 보충설명을 듣는 듯하여
이해하기에 많은 도움이 됩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의 어리석은 행위가 만용임을 자각하지 못하고
함부로 날 뛰며 자신의 주제파악을 못하는 행위로 인해 분란이 끊이질 않습니다..제 자신 되돌아 보며 반성합니다.
저가 난독증 증세가 있어
동문서답의 댓글일지라도 양해해 주십시요~ㅎ
가장 이상적인 사회 구현은 덕망(德網)에 있을 것 이지요
이를 실현 하기위한 것이 어쩌면 법망(法網)인지 모른다.
하여 법망의 그물 역시 평등하게 사용해야 옳지요
특히 권력에 굴종하지 않고 당당해야 한다
.
그런데 작금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고
권력을 견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권력에 봉사하고 있는모습
참으로 수치로운지 알기나 한 것 인지
글 잘 읽었습니다
유학과 묵자의 사상이 잘 조화된 그런 사회가 올수 있을까요 ?
아무리 번성했던 위대한 종교와 사상도 권력자의 지지가 사라지고 탄압이 시작되면
그 사상이나 종교도 사그라 들고 말았지요.
살아 있는 것들은 살아 남는 것이 우선이니까요.
어쩌면 종교도 사상도 일종의 인간 유희라고 해야 될것 같습니다.
좋은글 잘 일고 갑니다.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