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꿈을 기록한 글 중에는 간혹 신령스럽게 떠오르거나 은연중 생각 난 것들로, 과장되고 허황되어 진실함이 없는 내용도 많다. 마음과 기운이 허약하거나 순수한 경우도 있으며, 정신 또한 어두워지거나 밝았던 경우도 있었으나 모두 덮어두지 않고 다 기록하였다. 그밖에 기이하고 훌륭한 경치를 만난 경우는 특별히 기록을 하고 또 그림도 그렸다. |
말씀의 요지는 아무리 허튼 꿈이라도 어느 하나 버리지 않는 다는 거다. 모두 다 기록하였다가 나이 들어 기동력이 떨어질 때 와유臥遊하고자 하는 뜻인 것 같다. 어쨌거나 꾼 꿈을 낱낱이 기록한다는 그 실행과 정신이 놀라울 뿐이다.
몽화서夢畵序, 몽화서는 1쪽 정도다.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림을 그려 두고 한가로이 보고자 한 것은 흥이 일어나서이다. 지역에 있는 이름난 산수 중에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곳을 그렸고, 발길이나 눈길이 한두 번 이르렀지만 항상 가볼 수 없는 곳을 그렸다. 상상 속에서 가끔 특별한 경관을 만들어 내면 그려 두고서 누워 노닐며 맑게 감상하는 자료로 삼았다. |
「옥소」는 실제 우리 금수강산을 안 가본데 없이 여행한 사람이다. 나는 그를 조선 여행가의 선구자라고 불러본다. 그런 「옥소」가 보고 듣고 경험한 것들이 은연중에 꿈으로 재현됐다고 볼 수 있겠다. 이 모든 것들을 스스로 기록하고 그리게 했다. 또한 상상 속의 경관도 함께 그려 놓고 감상한다고 했다. 신문도 라디오도 텔레비전도 없었던 때라, 무료한 노년을 보내기 위해 명산의 경관을 그려놓고, 느낌과 시를 지어 감상하려는 것은, 어쩌면 옥소에 있어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하겠다.
나는 어려서부터 자연과 더불어 살았으며 자연의 꿈을 자주 꾸어 일생의 꿈과 현실이 다 자연 속에 있었는데도, 무슨 일로 그림까지 그리게 되었을까. 내가 늙어 두 다리에 힘이 빠지고 몸은 병들어 한 걸음조차 문 밖으로 옮겨 놓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정신은 쇠잔해지고 꿈도 맑은 때가 매우 드물어 못 다한 인연을 저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림을 그린 연유를 밝히고 있다. 못 다한 인연을 저버린다는 것은, 병들고 쇠잔한 정신으로 더 이상 산천유람이나 꿈을 형상화하는 그림이나 시를 짓지 못하게 된 것을 말하는 것 같다.
끝으로 이렇게 말한다.
지팡이를 짚고 거닐다가 어느 정도 좋은 경치를 만나서 그림으로 다 그리지 못하게 되면, 궤 속에 넣어 두었던 ‘꿈을 기록한 글’ 들을 꺼낸 다음, 중군仲君을 불러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짚어주고 면전에서 일러 주어 종이에 그림을 그리도록 하여 한 권을 이루게 되었다. |
「옥소」는 꿈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일상생활 모두가 꿈과 연관된 사람 같이 보인다. 금은보화를 비축하는 사람은 있어도 꿈을 모아 놓은 사람은 오직 「옥소」뿐이다. 「옥소」 같은 사람은 극히 드물다. 끝. 2020.7.17.금.
2020.7.22.수요일에 찾아뵙겠습니다.
* 옥소 「권섭」은 어떤 인물인가.
옥소 「권섭」은 특이한 경력을 가진 인물이다. 「옥소玉所」는 문경 땅 성주봉 아래 화지동花枝洞(현, 당포리)에 터를 잡고 오랫동안 거주하였고, 화지구곡花枝九曲을 경영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는 보통 인물이 아니었다. 「옥소」에 대해 개략적으로 나마 좀 더 알아보자.
* 옥소 「권섭」은 어떤 인물인가. 그는 태생부터 달랐다. 기호 노론의 명문가의 귀공자로 태어났다. 「옥소」 나이 14살에 그의 아버지 「권상명」은 33세로 세상을 하직했다. 그의 성장에는 당대 기호 성리학계의 거두인 백부 한수재寒水齋「권상하權尙夏」의 보살핌이 컸다.
아무리 백부가 뒤를 돌봐 주었다 해도, 한창 아버지를 동경하고, 본받고, 아버지란 절대적인 대상을 받아들일 나이에, 일찍 여의였다는 것은 소년의 마음에 큰 상처와 상실감을 주었을 것이다. 남아에게 아버지의 존재란 하늘이다.
* 「옥소」는 정실 두 분에 부실이 한 분이다. 정실인 이 씨 부인은 백사白沙「이항복」의 증손이자 이조참판을 한 「이세필」의 따님이고, 재취인 조 씨 부인은 「조경창」의 따님이다. 부실 이 씨 부인은 중종의 5대 손으로, 중의대부 대원군帶原君 「이광윤」의 따님이다. 또한 모친은 용인 이 씨이고 좌의정을 지낸 「이세백李世白」의 따님이다.
「옥소」는 본가, 처가, 외가 등 명문가의 친인척에 싸여 있었다. 조명을 집중적으로 받는 인물이 되었고, 요절한 「옥소」의 아버지에 대한 친척들의 애틋한 사랑이 온통 「옥소」에게 옮겨졌다. 「옥소」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였지만, 인복 하나는 타고난 인물이었다.
* 그런 「옥소」의 일상과 여행 경력을 살펴보자. 조선 시대 이렇게 여행을 많이 한 사람은 「옥소」 외에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조선 여행가의 선구자였다.
- 16세에 혼인, 외조부 「이세백」이 평양감사로 있어 평양과 관서 일대를 구경하였다.
- 18세에, 「이세백」의 임지 경주와 장인 「이세필」의 임지 삭녕朔寧 지역을 두루 여행하였다.
- 19세에 ‘기사환국1689’, 숙종의 세자 책봉으로 「송시열」이 사사, 「옥소」는 현실 정치에 환멸을 느낀다.
- 21세에 재산을 정리해 제천 문암동에 선산을 정하였다.
- 24세, 과거 공부를 다시 시작하였으나 끝내 체념하였다.
- 25세, 초취인 이 씨 부인과 사별하고,
- 30, 31세 때 장인 「이세필」의 임지인 상주를 비롯하여 영남 우도를 여행하였다.
- 32세 때, 가장 친한 시우 「정재문鄭載文」이 죽어 비통해 하였고,
- 33세에 한성 주위의 도봉산과 수원 일대의 산수를 구경하였다.
- 34세에 장인 「이세필」의 임지인 삼척을 찾아 동해 일대와 태백산, 영남좌도, 소백산 등을 두루 여행하고,
- 35세에 계부 「권상유」의 임지인 전주감영과 호남좌도, 서해 일대를 둘러보고 영월 주위를 구경하였다.
- 39세에 영동팔경과 동해백리를 거쳐 두타산, 천축산, 금강산, 청평산 등을 구경하였고,
- 40세에 외숙 「이의현」의 임지인 이천의 고달산과 광복산, 계부 「권상유」의 임지인 송도 유적, 화장산, 천마산, 성거산聖居山, 송악산 등을 둘러보았다.
- 42세에 외숙 「이의현」의 임지인 영남감영과 낙동강 일대, 상가산上架山, 팔공산, 통영, 한산도, 촉석루, 영남루 등을 구경하였다. 이 때 모친상을 당한다.
- 44세, 모친 삼년상을 마치고 충청도 청풍으로 이사하여 향촌생활을 시작한다.
- 47세 충청도 강경의 북촌으로 이거하였고
- 52세 전라도 고산의 옥포역촌으로 이사하였다.
- 53세에 ‘신임사화1722’에 노론 4대신이 사사되고, 백부 「권상하」의 관작이 추탈되며, 계부 「권상유」외 외숙 「이의현」 등이 삭직, 심한 충격을 받는다.
- 55세에 장남인 「권진성」이 옥새 위조 사건으로 사사된다. 황강으로 이사, 이후 청풍, 황강, 제천 일대와, 부실 이 씨 부인이 살고 있는 문경의 ‘화지동花枝洞’으로 이사한다.
- 78세에 가사 ‘도통가’를 지었다.
- 영조 35년 1759년에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단양의 장회리長淮里 옥소산玉所山에 묻혔다.
「옥소」의 삶을 보면, 중년 이후 주유천하로 점철했다. 이러한 경험은 꿈으로 나타나기도 하였고, 시문 창작으로 발현되기도 했다. 「옥소」는 시서화에 관심이 많아 2,000여수의 한시를 지었고, 2편의 한글 가사와 75수의 시조, 소설을 번역한 작품, 그림 등 여러 방면에 적지 않은 작품을 남겼다. 끝. 2020.7.17.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