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아이 예수 (눅 2:41-50)
41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42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44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45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46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47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이 시간에 “잃어버린 아이 예수”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혹시 예수님을 잃어버렸습니까? 어떤 분이 “예수 없는 예수교회”라는 책을 저술하였습니다. 예수 없는 기독교! 상상조차하기 끔찍합니다만 교리나 형식이나 건물로서의 교회에 머물고 삶이 없는 현실에 일침을 가한 듯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대단히 슬픈 일입니다.
요일5:12에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했고, 고후13:5에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 했습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예수님이 계신 그 여부는 우리의 영원을 좌우할 만큼 대단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아주 잃어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 임재의 행복을 잃거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아이 예수님을 잃은 사건이 나타납니다. 당시 유대법에는 남자 아이가 12살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정식으로 등록하는 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정식회원이 되면 일 년에 세 번씩 유월절과 오순절과 초막절에 올라가 각인의 능력에 따라 소나 양, 혹은 비둘기를 가져다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예수님도 12살이 되셨기에 요셉과 마리아는 아이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유월절을 마치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고향인 나사렛으로 돌아오던 요셉과 마리아는 하룻 만에 소년 예수님이 없는 것을 발견하고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던 것을 알지 못하고 자기와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당시 유월절에는 유대 전국에서 예배하러 모여든 순례객들만 해도 5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예수님을 잃어버렸으니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전화가 있겠습니까? 뭐가 있겠습니까? 그래서 사흘을 찾다가 성전에 올라가니 거기서 소년 예수님이 랍비들과 함께 앉아서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며 듣는 자들이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라워했습니다. 우려곡절 끝에 소년 예수님을 찾았습니다. 우리도 신앙생활하다가 예수를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1. 어떻게 예수님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요?
관례적인 신앙생활 때문입니다. 41-43절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여기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이라는 말씀과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라고 했듯이 그 부모들은 당시 사람들이 그랬던 것처럼 관례에 따라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형식이나 관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형식과 관례 속에 진실을 담으면 그보다 안전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일을 꼭꼭 성수하고 예배와 봉사와 헌신을 드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영적 생명을 유지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의 부모 역시 경건한 신앙에 비추어 진실된 마음으로 유월절 예배에 참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형식과 관례가 아무리 진지하다 할지라도 부족합니다. 예수님은 그 형식 속에만 머문 것이 아닙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행사나 자신의 일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 소년 예수님은 어디론가 사라지셨습니다. 그럼에도 그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신앙생활하지만 주님이 온전히 함께 하심을 느끼지 못한면 관례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생활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과 같이 주님과 동거 동행 동역하며 은혜 가운데 살아가려면 더 풍성해지시기 바랍니다.
우리도 아이를 몇 번을 잃어버렸다가 찾은 적이 있어서 그 마음 잘 압니다. 길을 잃고 파출소에서 찾아오지 않았나, 호기심이 많아서 왜 그리 돌아다니는지 신신당부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이를 잃지 않으려면 더 많이 신경 써야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가 제사하는 일이 바쁘고 여행 중에 챙겨야 할 일이 많아도 더 신경 써야 했습니다.
이처럼 관례 이상으로 예수를 더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생활 속에서도 늘 경배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사랑한다든지 예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은혜생활하려면 예수가 우리 인생에서 제일이어야 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3:19-20에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하셨습니다.
이만하면 신앙생활 잘하는 거겠지, 할지 모르지만 그 열매만은 속일 수 없습니다. 열매가 없다면 잘못한 것입니다. 삭개오처럼 주님을 기쁨으로 모시고 날마다 예배로서 잔치하지 않으면 주님의 임재를 잃어버리고 능력을 잃어버리고 행복을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십니다.
2. 그럼 어떻게 예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
44-47절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으사 그들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기더라”
성전에서 만났습니다. 12살 난 소년이 성전에 있으리라고는 예상도 못하고 최후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니 거기서 당대의 위대한 랍비들의 말씀을 듣기도 하고 묻기도 하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년 예수님의 말씀이 얼마나 놀라운지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이처럼 잃었던 예수를 찾으려면 성전에서 찾아야 합니다. 성전에 가면 속죄양의 피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성령의 깊은 체험을 하고 날마다 주님과 함께 하는 그 복된 은혜를 잃어 버리고 회복하기 위해 수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수십 년이 걸리기도 합니다. 그 방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보혈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열심히 해도 회복이 안 되는 사람들은 대개 양심의 정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서입니다. 피를 믿지만 회개한 후에야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회개하느라 언제 피를 믿고 양심의 자유를 시간이 없습니다. 우리가 아버지 사랑을 믿고 담대히 나아가듯이 회개하기 전에도 보혈, 하면서도 한 후에도 보혈입니다. 양심의 자유를 누리는 보혈의 기초가 없으면 회복할 수 없습니다.
다음은 성전에는 말씀이 있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랍비들의 말씀이 있었듯 말씀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그런데 소년 예수님의 말씀이 누구의 말보다 위대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이 바로 복음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중심에 모시면 나의 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예수와 함께 죽고 예수와 함께 살고 높이 되신 예수와 함께 승리자가 되어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탄과 저주를 이기며 왕 노릇합니다.
요1:1-3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이 말씀 자체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를 믿고 사랑함으로 중심에 모시면 우리 마음을 온전히 창조하십니다.
3. 주님의 관심에도 귀를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48-50절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과 그 부모의 생각의 차이를 발견합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진짜 아버지가 누구실까요? 하나님 아버지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드려지는 제물을 보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장차 자신이 저 제물처럼 되셔서 온 세상의 죄인을 구원하는 그 생각을 하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그 마음을 부모가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예수님의 탄생이 신비했던 것은 알지, 가슴을 찌르는 듯하리라 하신 것처럼,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처럼 진정 주님을 사랑한다면 그 분의 관심에도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 사랑이 곧 주님의 계명입니다. 요14:21에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사랑하다가 주님을 만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꿈과 이상이 같아야 함께 할 수 있는 것처럼 진실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관심에도 관심 가지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라도 예수님을 잃어버렸거나 그 감격을 체험해 본적이 없다면 속히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믿어 구원 받은 성도일지라도 관례적인 신앙으로는 부족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세상을 사랑하지 말고 더 열심히 몸과 마음을 바쳐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 관심인 이웃을 사랑함으로 그 아름답던 주님과의 그 행복을 다시 찾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