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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이 또 사울을 살려주다
삼상 26:1-12
1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2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3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4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5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6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7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11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삼상 26:1-12 / [사울을 다시 살려 주는 다윗] 십 광야에 사는 몇몇 사람이 기브아에 있는 사울을 찾아와서 다윗이 숨어 있는 곳을 밀고하였다. `다윗은 유다 광야의 남쪽에 있는 하길라산 속에 숨어 있습니다.' 2) 그러자 사울은 즉각 이스라엘에서 특공대원 3천 명을 골라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십 광야를 향하여 출전하였다. 3) 사울은 하길라산 위에 올라가 그곳의 길가에 진을 쳤다. 이때에 다윗은 바로 그 광야에 숨어 있었기 때문에 사울이 출전한 것을 곧 알게 되었다. 4) 그래서 다윗은 정찰대를 보내 사울의 진영을 확인하였다. 5) 그러고는 자신도 직접 나서서 사울의 진영을 둘러보았다. 사울의 부하들은 거대한 원형 꼴로 진을 쳤으며, 그 한가운데서 사울이 자기의 군사령관 아브넬과 함께 누워서 쉬고 있었다. 6) 다윗은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이며 요압의 아우인 아비새에게 이같이 물었다. `여기까지는 너희 두 사람이 나를 따라왔으나, 이제는 한 사람만 나와 함께 저 진지로 잠입해 들어가자! 누가 따라가겠느냐?' 아비새가 나서서 `제가 내려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7) 그들은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산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한밤중이 되자 사울의 진영으로 잠입하였는데 아브넬과 사울은 물론이요, 그의 부하들까지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잠자는 사울의 머리맡에는 창이 땅바닥에 꽂혀 있었다. 8)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같이 속삭였다. `여호와께서 오늘 이 원수를 장군님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제가 원수의 창으로 그를 찔러 땅바닥에 박아놓겠습니다. 한번만 내려꽂으면 그만입니다!' 9) 그러나 다윗이 말렸다. `그에게 함부로 손대지 마라! 그는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네가 그를 죽이는 날에는 벌을 받게 된다' 10) 결국 다윗은 아비새가 그를 해치지 못하도록 일부러 이런 말을 한 것이다. `살아 계신 여호와를 두고 내가 확실히 단언하지만 그는 우리가 손대어 죽일 사람이 아니다. 그에게 형벌을 내리실 분은 오직 여호와뿐이시다. 여호와께서는 그를 나발처럼 쳐죽이시거나 죽을 날이 되어서 죽게 하시거나 전쟁터에 나가서 잡혀 죽게 하실 것이다. 11)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왕에게 내가 손을 들어 쳐죽이는 일은 그분이 직접 막아 주시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어서 빠져 나가자!' 12) 그리고 다윗은 그 두 가지 물건만 가지고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영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그러나 이것을 본 사람도 없고, 잠에서 깬 사람도 없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깊은 잠을 내리셔서, 그들은 모두 갈비뼈를 빼가도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를 맞이하지만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라는 이유로 그를 살려줍니다.
다윗을 죽이러 온 사울 왕(1-5) 십 사람은 지난번에 이어(삼상 23:19) 두 번째로 다윗의 소재를 사울 왕에게 밀고하였습니다. 다윗 일행이 6백 명 가량이었으므로(삼상 23:13) 아무리 요새가 많은 십 광야라도 그들을 안전하게 숨겨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위태한 상황 속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었습니다(삼상 23:11). 사울 왕은 정예군 삼천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다윗을 추적하였습니다. 전시에나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숫자입니다. 목적은 다윗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행동 모티브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정적을 제거하려는 권력욕이었습니다. 대다수의 백성은 사울 왕 편이었을지라도 하나님은 다윗 편이었습니다. 다윗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기보다 하나님을 의지하고 오히려 사울의 진영 내로 진입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만이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수중에 든 사울 왕(6-8) 다윗은 단 두 명의 부하와 함께 사울의 진영 내에 잠입하여 잠에 빠진 사울 왕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사울 왕과 아브넬의 군사들은 다윗이 도망치기 바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방심했을 것입니다. 순간 상황은 역전되었습니다. 다윗이 사울 왕의 수중에 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울 왕이 다윗의 수중에 들었습니다. 다윗의 심장을 향했던 사울의 창(삼상 18:11; 19:9)이 이제는 다윗의 수중에 들어왔습니다. 믿음이 깊지 못한 다윗의 부하 아비새는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이러한 상황을 만들어주셨으므로 사울 왕을 단번에 죽이자고 말하였습니다.
죽이지 말라(9-12) 다윗은 사울 왕을 죽이지 않습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여호와의 주권을 믿었습니다. 세우시는 자도 폐하시는 자도 여호와이시므로 사울 왕을 죽이는 것은 월권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사람의 통치철학을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감정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우선이었고, 자신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그를 심판하시리라고 믿었습니다. 이 상황은 하나님께서 다윗의 믿음을 검증하기 위해 연출하신 장면입니다. 다윗은 육신의 생각을 물리치고 끝까지 하나님 앞에서 순전함을 이루어 신정왕국의 왕으로서 합당한 자격을 갖추어나갔습니다. “여호와께서... 잠들게 하셨으므로”라는 구절은 이번 사건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음을 보여줍니다.
적 용 : 당신은 다윗처럼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있습니까?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겨라’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미운 마음은 물에 새겨 금방 지워져 사라지게 해야 하지만, 감사하는 마음은 돌에 새겨 오래도록 기억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울 왕처럼 반대로 원수는 돌에, 은혜는 물에 새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은혜를 은혜로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않길 바랍니다.
호크마 주석
=====26;1
십 사람이...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 본절 이하에서는, `십 사람'의 밀고 행위가 23:19이하에 이어 두번째 언급된다. 혹자들은 본문과 23:19이하 사건의 여러 유사성을 근거로하여 동일한 사건이 반복 기술되었다고 주장한다(Ewald, De Wette, Thenius) 그러나 우리는 그같은 유사성과 아울러 더 많은 상이점(相異點)이 있음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본절 하단에 나와 있는 24:1-22 사건과 본장 사건의 비교 도표를 참조하라. 십 - `십'(Ziph)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이다. 23:14 주석 참조. 기브아 - 사울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이다. 10;26 주석 참조.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의 장소는 `광야 남편'이었다(23:19). 그러나 여기서 언급된 `광야 앞'은 문자적으로는 `광야의 얼굴'이란 의미로서, `광야의 남편'과는 전혀 다른 `광야의 인접 지역'을 가리킨다(Drinkard, D-river, Klein). 따라서 아비가일과 결혼한 다윗은(25:42) 갈멜을 떠나서 십 사람들의 첫번째 밀고 때에 거주했던 곳보다 약간 북쪽으로 올라간 듯하다. 하길라 산 -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당시에 다윗은 여기처럼 `하길라 산'(the hil l of Hachilah)이 아닌 `하길라 산 수풀 요새'(Horesh, on the hill of Hachilah)에 있었다(23:19). 그런데 `하길라 산 수풀 요새'는 `십 황무지'의 또 다른 부분으로 보아야 한다. 그 같이 보아야할 이유는 여기의 `수풀'(* , Horesh)은 고유명사로서, 별도의 특정한 지점을 가리키는 지명이기 때문이다(23:15).
=====26:2
사울이...다윗을 찾으려고 - `십 사람'들의 1차 밀고 때에 자신에 대한 다윗의 선대(24:4, 10, 11)에 따라 다윗을 축복까지 했던 사울이(24:16-22), 여기서 다시 다윗을 죽이러 찾아나서고 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은 악신의 영향하에 있는(16:14; 18: 10) 그의 지극히 불안정하고 변덕스런 성격 때문이었을 것이다. 즉 사울의 그같은 성격이 결국 잠정적으로 억제됐던 다윗에 대한 증오심을 다시 폭발시키게 한 것이다. 십 황무지 - 23;14 주석 참조.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 이들은 `십 사람'의 1차 밀고 때에도 동원했던 사울의 정예병을 가리킨다. 24:2 주석 참조.
=====26:3
광야 앞 하길라 산 - 1절 주석 참조. 길가에 - 여기에 `길' 은 예루살렘(Jerusalem) 방향에서 네게브(Negeb) 지방의 `아랏'(민 21:1)으로 통하는 대로(大路)를 가리킨다(Smith, Fay).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본절의 `하길라 산'은 십 황무지의 동쪽임이 분명하다. 아하로니(Aharoni)도 그의 `성경지도'(Bible Atlas)에서 이 사실을 지지하고 있다. 다윗이 황무지에 있더니 - 당시 다윗은 사울의 진 서쪽 지점 고지대에 위치했을 것이다. 이는 6절의 `진에 내려가서'란 말에 의해 입증된다. 따라서 다윗은 사울의 동태를 잘 관측할 수 있었을 것이다.
=====26:4
탐정을 보내어...알고 - 여기서 `알다'(* , 야다)란 말은 체험적이리만큼 확실히 깨달아 아는 것을 가리키는 동사이다(2:12; 22:22; 창 4:1; 48:19). 즉 척후병의 보고를 통하여 다윗은 사울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쫓겨 도망하기에만 급급했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오히려 이제 다윗은 사울의 생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입장에 선 것이다. 이처럼 다윗은, 비록 전력에 있어서는 약자의 처지에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 연고로 강자인 사울의 생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실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자는 세상이 감당치 못한다.
=====26:5
넬의 아들...아브넬 - `넬'은 사울의 숙부이다(10:14; 14:50, 51). 따라서 `아브넬'과 `사울'은 사촌 관계이다. `아브넬'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갔었다(17:55-58). 그후 아브넬은 사울의 편에 서서 다윗을 죽이려 쫓아 다니는 위치가 되었다. 그러다가 사울이 죽은 후에는 사울의 아들 이스보셋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앉힌 다음, 자신은 실세(實勢)로서 위치하였다(삼하 2:8-11). 그러나 아브넬은 사울의 첩 `리스바'와 통간한 사건으로 이스보셋과 관계가 악화되자(삼하 3:7-11), 이스보셋의 나라를 다윗에게 넘겨버리고 말았다(삼하 3:17-21). 그렇지만 아브넬은 전쟁의 와중에서 요압의 동생을 죽였던 연고로 인하여 결국 요압에게 억울한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삼하 3;27).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 - 여기의 `진'(* , 마갈)은 `방책'(barricade)을 의미한다(17:20). 그런데 당시 이 `방책'은 병거 및 마차 등으로 이뤄졌을 것이다(Ca lvin, Smith, Keil). 한편 사울이 이같은 위치에서 잠을 잔 가닭은 말할 나위도 없이 자신의 몸을 외부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 이같은 언급은 앞의 `사울이 진 가운데 누웠고'란 언급과 함께 다윗의 용맹성을 강조.시사하려는 저자의 의도를 반영해 준다. 즉 저자는 여기서 당시 사울이 소지하던 창과 물병을 바로 위와 같은 삼엄한 방어망을 뚫고 들어가서 가져갔던 다윗의 확신에 찬 영웅적 행동을(11, 12절) 부각시키려는 것이다(Klein). 한편 여기서 `백성'은 사울의 3천 병사를 의미한다(2절; 14:2; 수 8:1).
=====26:6
헷 사람 아히멜렉 - `헷 사람'(the Hittite)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였다(수 3:10). 이들은 아브라함 시대 때도 이미 팔레스틴 땅에 거주했었으며(창 15:23), 이스라엘의 출 애굽 후 이스라엘에 의하여 정복되었다(삿 1:6; 왕상 9:20). 바로 이같은 헷 조속으로서 다윗을 좇았던 또 다른 유력한 인물이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였다(23 :39; 삼하 11장). 한편 `아히멜렉'(Ahimelech)은 `왕의 형제'란 의미를 갖는 가나안 식의 이름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름을 소유했던 제사장 `아히멜렉'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21:1). 그런데 헷 사람 `아히멜렉'이 다윗의 휘하에 들어오게 된 것은 그당시 이스라엘 임족과 함께 섞여 살던 `헷 족속'에 대하여 사울이 어떤 압박을 가했기 때문일 것이다(Lange; 22:2). 스루야의 아들...아비새 - `스루야'(Zeruiah)는 그녀의 어머니가 다윗의 아버지 이새에게 시집오기 전 `나하스'라는 남자에게서 낳은 딸이다(삼하 17:25). 따라서 다윗의 이부(異父) 누이이다. 한편 `아비새'(Abishai)는 `아버지가 계신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사람은 후에 비록 다윗의 용사 중 최상급인 `세 용사' 그룹에는 끼지 못했지만, 그 다음인 `삼십 용사' 그룹의 두령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삼하 23:18, 19; 대상 11:20, 21). 요압 - 요압은 `여호와는 아버지이시다'라는 뜻이다. 이 사람은 다윗의 군대 장관이 되어 명실 공히 다윗의 제 1 무사(武士)로서 많은 공을 세웠다(삼하 5:6 이하; 8:1 6; 20:23; 대상 11:4 이하; 18:15; 27:34). 누가...내려가서 - 다윗의 일행이 사울의 일행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곳에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그때 사울은 `길 가'(3절)에 있은 반면 다윗은 `산'(1절)에 있었다.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 이것은 `아히멜렉'과 `아비새' 중 `아비새'가 더 용기있는 인물이었음을 말해 준다. 아무튼 본서와 사무엘하의 저자는 `아비새'에 대해서는 다윗을 도왔던 훌륭한 인물로서 계속 말하지만, 본절에서처럼 다윗의 요청에 묵묵부답(默默不答)했던 `아히멜렉'에 대해서는 완전히 침묵한다. 바로 이같은 사실은 아히멜렉이 성경의 무대에서 사라진 것이 그의 위와 같은 침묵과 결코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해 준다(Klein). 여기서 우리는 `아히멜렉'이 `아비새'보다 먼저 먼저 언급되는 등 더 우위에 있었으나, 그 자신의 지나친 소심성 때문에 그 위치를 빼앗겼다는 사실을 주목해야만 할 것이다.
=====26:7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혔고 - 여기서 `창'은 `홀'(笏)과 같이, 사울의 왕권(王權)을 상징한다(Keil, Fay, Smith). 이같이 사울이 자신의 왕권을 상징하는 `창'을 자신의 머리맡에 꽂아 놓은 것은 (1) 왕으로서의 자신의 위엄을 높이며, (2) 또한 왕으로서의 자신이 잠자는 위치를 표시하기 위함이었다.
=====26:8
하나님이...원수를...붙이셨나이다 - 아비새의 이같은 판단은 다윗의 각오 여하에 따라서는 사울이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있다는 사실을 간파한 결과였다(24:4). 즉 그는 이같은 상황 전개를,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적 섭리에 따른 것으로 본 것이다. 단 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 무방비 상태로 누워 자고 있는 사울에 대해서 이같이 하기는 매우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또한 사울의부하들을 깨우지 않고 달아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단 번'에 죽여야 했을 것이다. 그를 두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아비새의 이 말은 당시 사울이 완전 무방비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아마 사울을 비롯한 모든 군사들이 긴 출정으로 인하여 매우 피곤했던 관계로 모두 곯아 떨어진 것 같다.
=====26:9,10
여기서 다윗은 사울을 친히 죽여 복수해서는 안될 이유를 제시한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 그 첫째 이유이다. 즉 여호와께서 택하사 기름 부은 자는 여하한 경우일지라도 그 생명은 전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에 속한 것이다. 그런고로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사람이 침해하면, 곧 그것은 여호와의 주권을 침해하고 모독한 결과가 된다. 따라서 다윗은 이러한 원칙에 철저히 입각하여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인 사울의 생명을 하나님의 뜻에 맡겼던 것이다. 그러므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것은 단순히 다윗의 관대한 성품이다. 혹은 정치적 의도 때문이 아님은 분명하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한 두번째 이유이다(24:12) 즉 이 두번째 이유 역시 첫번재 이유와 마찬가지로 기름 부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에 입각한 것이다. 곧 사람을 택하사 왕으로 기름부어 세운 분이 하나님이시듯, 또한 왕을 폐하고 죽이는 일 역시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역하에 속한 것이라는 사상이다. 다윗은 시종 일관 이러한 사상에 입각하여 사울을 대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사울을 전쟁터에서 블레셋 족속의 손에 붙이심으로써(31:3, 4), 다윗과 사울간에 당신의 주권적인 심판을 행사하셨다.
=====26:11
손을 들어...치는 것을...금하시나니 - 사람이 그 원수에 대하여 친히 복수하는 일을 금하고, 그 모든 선악간의 판결을 공의의 하나님께 온전히 맡기는 것이 성경의 복수관(復讐觀)이다(신 32:35; 롬 12:19; 히 10:30). 그러므로 여기 무방비 상태의 사울을 단번에 처치하자는 아비새(8절)와, 하나님의 기름부은자임을 들어 그것을 만류하는 다윗(9-11절) 사이에서 우리는 신앙의 차원을 느낀다. 즉 전자는 이성에 근거한 인간적 사고의 발로요, 후자는 신앙에 근거한 신본주의적 사고의발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만일 다윗이 아비새의 말대로 했다면, 나중에 그가 경험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참된 승리'(21, 25절; 롬 12:21)를 거두지는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해소하는 조그마한 일로부터 원수 갚은 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인도와 선한 판결을 바라는 자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참된 지혜와 판단력을 허락하신다(롬 12:19, 20). 그의...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 이것은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증할 증거를 삼기 위함이었다(24:4). 머리 곁에 있는 - 이것은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이 사울을 단칼에 죽일 수 있었던 사실을 강력히 시사하기 위한 언급이다. 왜냐하면 `머리'는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서, 이 부분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곧 사울을 단번에 죽일 수 있었음을 가리키기 때문이다(8절).
=====26:12
본절은 사울을 죽이지는 아니하고, 다만 그를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만을 남기려고 한 다윗의 계획을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돕고 계셨음을 보여 준다. 여호와께서...깊이 잠들에 하셨으므로 - 여기서 `깊은 잠'에 해당하는 `타르데마' (* )란 단어는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만들기 위한 갈비뼈를 빼어내기 위해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뜨리시는 광경을 묘사하는 문맥에서 사용되었다(창 2:21). 또한 이 단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동물을 쪼개게 하신 후, 그와의 언약이 비준되었음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그를 깊이 잠들도록 하시는 장면을 다루고 있는 문맥에서도 나타난다(창 15:32). 바로 이같은 사실에서 볼 때, 사울과 그의 일행이 다윗의 접근을 전혀 인식치 못할 정도로 깊이 잠이 든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임이 분명하다.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 사실 이때 다윗은 아비새의 말대로 여호와께서 사울을 자신의 손에 붙이신 것으로 해석하여 사울을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명도 보존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좌에 오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자신의 유익을 구하기에 앞서 기름 부음 받은 자에 대한 하나님의 전적 주권 사상을 더욱 존중함으로써 , 끝까지 모든 일의 판단을 하나님께 맡겼다.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주건을 인정하는 다윗을 기뻐하셨고, 결국 당신의 선하신 계획을 다윗을 위해 베푸셨다. 즉 다윗은 `선으로 악을'이긴 것이다(롬 12:1).
< 설 교 >
하길라 산 사건
삼상 26:1-12
본문은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두 번째 살려준 이야기입니다.
1. 사울의 악의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군사작전을 펼쳤습니다. 이전에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주었을 때 감격하며 울면서 '다윗이 왕이 될 것이라'고 하였던 사울이었는데 마음이 바뀐 것입니다.
본문은 그가 이전에 다윗을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사를 움직였던 때와 너무 비슷합니다. 이전에 사울이 다윗에게 하는 말을 들으면 그가 매우 많이 바뀐 것 같은데 사실은 전혀 안 바뀌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대대적으로 군사를 움직이는 것을 보면 우리는 '사람이 어찌 그럴 수 있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래서 사람이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그렇습니다. 특히 악을 행하는 사람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악을 행하는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사람이 선함이 자라가야 합니다. 그렇게 노력할 때 분명히 선함이 자라갑니다. 그렇다면 악한 사람은 어떨까요? 사람은 타락하여 악합니다. 그래서 악함은 노력할 필요 없이 가만히 두어도 잘 자라갑니다. 결코 그냥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아주 잘 자라갑니다. 다윗의 믿음 때문에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사울이 다시 군사를 동원하였을 때 이번에는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분명히 사울은 군사를 움직이면서 이전에 다윗이 자신의 목숨을 살려 준 것이 기억났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취한 조치가 무엇일까요? '다윗을 만나면 죽이지 마라'고 특별 명령이라도 내렸을까요? 그가 취한 조치는 '자신을 위한 경비 강화'이었습니다. 진영의 한 가운데 자면서 자신을 철저히 보호하였습니다. 다시는 다윗에게 목숨을 잃을 위험에 처하지 않도록 조치를 한 것입니다. 이전에 굴에 들어가 용변을 보면서 혼자가 되었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함께 있었습니다.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쳤더라"(5절) 그러나 그렇게 조치를 취하면 무엇합니까? 사울의 마음이 악의로 가득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시 위험에 처했습니다.
사람의 악의는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 특별히 불신앙의 사람이나 믿음을 적대시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악의를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악의는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다윗의 선의
사울이 다윗을 잡기 위해 다시 대대적인 작전을 펼쳤을 때 다윗의 마음은 어떠하였을까요? 그래도 '조금은 기대하였었는데'라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다윗이 악에 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선이 악에 진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선이 악에 진다는 것은 어떤 결과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 악에 진다는 것은 선이 악으로 변질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처음에 악과 선이 있을 때 악은 시간이 지나고 다른 사건에서도 또 악을 행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이 악의 행동에 화가 나서 이제 더 이상의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조차도 악으로 반응을 한다면 바로 그 때 선이 악에 지는 것입니다. 선이 악을 이기는 것은 무엇입니까? 선으로 인하여 악이 선으로 바뀐다면 가장 좋은 시나리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경우는 아주 적습니다. 선이 악을 이기는데 있어 중요한 것은 악과 마주할 때 악이 악으로 행하여도 선은 끝까지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선이 악을 이기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에 의해 목숨을 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다윗을 죽이고자 하였습니다. 이 때 다윗은 그의 악에 화가 나서 사울을 죽였다면(사울을 죽였다면 그것은 분명히 다윗이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악입니다) 다윗은 악에 진 것이 됩니다. 그러나 다윗은 선으로 악을 이겼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죽일 수 있는 상황에서 살려주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두 번째 살려준 이 사건은 25장의 사건(나발과의 사건)을 겪고 난 이후의 일입니다. 그 사건을 통해 다윗도 자랐습니다. 마치 사울이 악이 자란 것처럼 다윗은 선이 자랐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조금 더 넉넉히 하나님의 뜻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10절)
다윗은 조금 더 분명히 하나님께서 하시는 손길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때까지 더 기다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 나발을 하나님께서 치시기 전에 자신이 죽이려고 했다가 큰일을 겪을 뻔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는 것을 기다리는 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기꺼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더 악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어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더욱더 선해져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악을 선으로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한 번 약속을 어기면 웃어 주지만 두 번 약속을 어기면 더 큰 화가 나서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때 문제는 더 화나게 하는 세상이 아니라 더 참지 못하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서 악을 행하는 세상을 탓하지 말고 그것을 이기지 못하는 자신을 더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믿음을 행하려는 마음이 자란 것처럼 우리도 자라고 있습니까? 자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의 악이 자라는데 우리의 선이 자라지 않으면 우리가 그들의 악에 의해 무너집니다. 선이 악에 의해 무너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하길라 산에서 다시 만난 사울과 다윗은 서로의 내공을 쌓고 만났습니다. 사울은 악의 내공을 쌓았고 다윗은 선의 내공을 쌓았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무너뜨리고자 하였지만 다윗은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다윗처럼 선의 내공을 더 쌓아가야 합니다. 세상의 악한 사람들에 의해 영향 받고 무너지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끝까지 믿음과 선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오늘도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문기태목사(창원침례교회) / 삼상 26:1-12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받고 평생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과 갈등을 겪으며 상처를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럽습니다. 또 어떤 이는 목회자에게 상처를 받아 큰 충격 속에 방황하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스트레스를 감당하기 힘들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인간 관계에서 갈등을 겪으며 힘들어 할 때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아주 가까운 관계, 피할래야 피할 수도 없는 관계 속에서 상처를 받아 힘들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실례로 다윗과 사울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탓에 자주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 왕 앞에서 악기를 연주하여 악신을 쫓아줄 사람을 찾게 되었고 수금을 잘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을 발견하여 추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 왕이 두통에 시달릴 때마다 다윗은 불려가 수금을 타며 찬양을 하여 악신을 쫓아 사울로 하여금 평안을 얻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안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마침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에는 골리앗과 맞서 싸울 장수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의분에 사로잡혀 골리앗과 싸울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사울에게 요청하였고 나가 싸워서 거인 골리앗을 단숨에 쓰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왕의 신임을 받고 이스라엘군대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왕의 사위가 되어 왕궁에서 살며 왕의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요나단 왕자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흥분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전장에 나아가 큰 공을 세워 장수가 되었고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왕자 요나단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전장에서는 승승장구했으며 왕에게 신임을 받고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도 모두 그를 좋아했습니다. 다윗의 앞날에 이제는 탄탄대로가 활짝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데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다윗을 맞이하러 나와서 춤추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 노래를 들은 사울은 크게 질투하고 시기하며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다윗을 죽일 결심을 하고 다윗이 수금을 타며 연주에 집중할 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이 여러 번 죽이려는 시도가 반복되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달아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 왕으로부터 몸을 숨길만한 곳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윗은 의문에 휩싸였습니다. '왕궁에서 호화롭게 지내며 왕의 식탁에서 왕과 함께 음식을 먹으며 왕자 같은 대접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쫓겨나 도망자가 되다니!' 기가 막혔습니다. 습한 동굴에서 박한 음식을 겨우 먹으며 짐승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시중드는 사람도 없고 백성들의 환호도 사라졌습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시집 보내졌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을 부으셨는데.. 오늘까지 믿음을 드러내며 충성을 다했는데 왜 이런 위기가 내게 찾아 온다는 말인가?' 회의가 솟아났습니다.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울의 광기는 더해갔고 다윗을 죽이려고 사울은 최정예 군사 삼천 명을 이끌고 광야를 이 잡듯이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제까지 다윗을 따르던 군사들이 오늘은 다윗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습니다.
사울은 엔게디 광야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의 고삐를 바짝 당겼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다가 뒤를 보려고 홀로 어느 동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다윗이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사울의 겉옷 자락만 살며시 잘랐습니다. 사울이 볼일을 마치고 동굴에서 나가 상당한 거리로 멀어졌을 때 다윗은 사울에게 소리쳤습니다.
(삼상 24:11) “나의 아버지여!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십시오. 내가 왕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이것을 보시면 나의 손에 악이나 죄가 없는 줄을 아실 것입니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반역하거나 잘못한 일이 없나이다.”
사울에게 비교의식이 발동하자 사랑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열등감이 솟아나자 다윗이 충성스런 동역 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원수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순수하게 사울을 따르며 충성을 다했는데 사울은 그런 다윗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미워하며 거부하고 해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을 똑같이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똑같이 원수처럼 여기고 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해하는 사울이 안타까워서 그의 몸을 베지 않고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사랑과 충성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오늘날도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울과 같은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을 위기에서 건져준 다윗을 해치려고까지 하는 사울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오해하고 의심하며 상처를 입히고 원수처럼 여기고 갈등을 만드는 사람이 많습니다.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 사람을 만나면 우리는 크게 상처를 입기 쉽습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위기를 겪게 됩니다.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솟아나고 비난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으며 미워집니다.
이럴 때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진가를 나타낼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미워하면 안됩니다. 보복하려고 가슴에 칼을 품으면 안됩니다. 다윗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악을 선으로 갚는 것입니다. 복수심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손에 원수를 맡겨야 합니다. 나를 미워하는 상대방의 오해를 벗기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당신이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지만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겠다.'하며 그 마음을 능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고 다윗의 선한 마음을 인정했습니다. 사울은 울면서 말합니다. "나는 너를 괴롭혔는데 너는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네가 나보다 의로운 사람이다. 네가 오늘 내게 이렇게 잘 해주었으니 주님께서 너에게 선으로 갚아 주시기 바란다. 너는 틀림없이 왕이 될 것이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굳게 설 것이다." 그리고는 다윗을 잡는 것을 포기하고 군사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이제 사울 왕이 나에 대한 마음을 바꾸시겠지! 내 마음을 확실히 아셨으니 예전처럼 나에게 잘 해 주겠지. 나를 죽이려는 마음을 거두고 나를 다시 신임하고 지위를 회복시켜줄 거야.'하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흘린 눈물이 마르기도 전에 사울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포위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자극할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의 무리가 사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쓸 때 다윗은 얼마나 낙심이 되었을까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충성된 마음을 보였는데 왕은 그런 다윗의 마음을 알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고 또 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부당한 느낌에 얼마나 섭섭하였을까요?
이 정도가 되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복수할 방법을 찾는데 열을 올릴 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충성된 마음을 변치 않습니다. 다윗은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진영에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잠들게 하셨으므로 발각되지 않고 모든 군인들을 통과하여 사울이 잠든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아비새가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28)"
아비새는 다윗이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습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 번 시도했습니다. 지금도 오직 다윗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일찍이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깊이 잠들게 하여 절호의 기회를 주셨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9-11)" 그렇게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왔습니다. 너무나 바보 같지 않습니까?
다윗이 왜 그렇게 한 것입니까? 다윗은 25장에서 나발이 모욕하는 소리를 전해 듣고 크게 분노하며 직접 부하들을 이끌고 가서 선을 악으로 갚는 나발을 심판하려고 했습니다. 보복하려고 가는 길에 아비가일을 만나는데 아비가일이 다윗의 발 앞에 엎드려 만류하기를 "내 주여,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 내 주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세우실 때에 내 주께서 친히 보복하여 피를 흘렸다는 것으로 마음에 걸리는 것이 없기를 바랍니다." 라고 했습니다. 그 말에 다윗은 하나님이 보복을 막으심을 깨닫고 돌아섰는데 열흘 만에 하나님이 치셔서 나발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복수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직접 복수하는 것을 죄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고 직접 복수하려고 하면 함께 망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것은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다윗의 그런 모습을 보며 바보 같다고 비웃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윗이 직접 복수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을 보시며 다윗의 큰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다윗을 아주 높여주셨습니다. 다윗의 하나님은 사울을 심판하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사울의 집은 전쟁터에서 패배하고 망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을 역사의 전면에 이끌어내시고 유대나라의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제가 처음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던 때에 열정을 다하였습니다. 맡겨진 학생들과 청년들을 돌보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 부었습니다. 일년 만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크게 부흥하고 교회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님이 교회의 어떤 자매와 엮어주려고 중매를 섰는데 제 마음에 결혼할 마음이 없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저를 미워하며 트집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게 뜻대로 되지 않으니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생이 몇 달째 사례비를 받지 못하니 얼마나 고생이 막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제직회의에 재정보고를 하는데 모두 지급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직회의가 끝난 후 찾아가 "보고서에는 지출되었는데 저는 받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였더니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썼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담임목사님께 찾아가 전후 사정을 말씀 드렸는데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을 붙잡고 억울한 사정을 말하면 돈은 받을 수 있었겠지만 교회는 큰 시험에 휩쓸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교인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조용히 교회를 사임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손해와 억울함을 몇 배로 다 갚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그 교회보다 몇 배나 큰 교회를 목회하게 복을 주셨습니다. 만약 억울하다고 보복하려고 했다면 하나님께서 저를 외면하셨을 것입니다. 만일 그 집사님과 담임목사님을 원망하며 마음에 칼을 품었다면 더 이상 주의 일을 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손해를 감수하면서 다 용서하고 주님의 손에 다 맡기고 나자 미움도, 섭섭함도, 억울함도, 분노도 나를 지배할 수 없었습니다. 하늘의 복이 심령에 더 넘치게 되었습니다. 다른 방법으로 하나님은 잃은 것보다 훨씬 좋은 것으로 갚아주셨습니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가까운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하는 것을 참 많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참 좋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만나 직접 원수를 갚으려고 몸부림치다가 스스로 무너지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받은 상처가 크면 클수록 견디기 힘듭니다. 미움이 커지고 비난하고 싶고 어떤 형태로든지 복수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람, 여러분을 파멸시키려는 사람에게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갈등을 넘어 관계 회복을 위해 능동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하나님께서 가장 적당한 방법으로 그에게 원수를 갚아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신뢰하여 악을 선으로 갚으며 용서를 앞세우는 여러분에게는 가장 좋은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 원수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용서하며 선하게 대함으로 하나님께 칭찬 듣고 좋은 상을 받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삼상 26:1-12 / 최인근목사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는 수 없는 인간관계, 사업관계 등 바쁜 일생을 보내면서도 주님과의 관계가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성경에 나타난 부자처럼 세상 관계가 끝날 때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 나사로는 세상에서 아무런 인간관계가 없었고 개들이 친구였으나 그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주님과 관계가 없는 인생은 일생을 속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많은 친구와 천명의 여인과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그가 남긴 한 마디는 “헛되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1:2)
전도자가 가로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삶의 성패가 좌우되니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강도도 세리 삭개오도 일곱 귀신 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도 결국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졌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비록 그들의 삶이 이 땅에서 병들고 죄짓고 비참하였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하여 인생의 새로운 역전을 이루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비록 세상 사람들에게는 존경을 받았으나 주님과의 관계에서 그들은 바른 관계를 갖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고 비참한 인종들로 역사 속에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주님과의 바른 관계를 맺지 못한 인생들은 세상이 다 알아준다 하여도 주님이 모른다 할 인생이므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이렇듯 인생이란 관계 속에서 멋들어질 수도 있고 비참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울과 다윗의 인생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똑 같이 왕이 되었고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그 종말은 극과 극이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버리심으로 비참하게 자살하여 생을 마쳤으나 다윗은 하나님과 이웃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함으로 하늘의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그를 통해 예수님을 보내시는 최고의 삶을 살고 갔습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떻게 살고 어떤 관계를 유지해야만 하겠습니까? 바로 배우고 바로 결단하며 짧은 생을 다윗과 같이 축복 받으며 칭찬 받으며 유복하게 살아가는 그런 멋쟁이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인생은 관계입니다. 역사적으로나 성경 속에서 우리는 이와 같은 관계를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그 한 사람의 성공과 실패로 갈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인간관계를 통하여서 덕망과 성공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생은 우리들의 몸과 같이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통하여서 그 생명을 유지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며 칭찬과 존경을 받으며 인생을 살아가는 멋들어진 사람을 만나보기는 이 시대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와 같은 관계, 즉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중심으로 말씀을 상고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두 사람, 사울과 다윗을 관계형성의 두 모델로 삼고 그들의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들여다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인생에 귀한 교훈으로 삼아보고자 합니다. 깊은 깨달음으로 신선한 관계형성에 유익을 만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울 왕의 성공과 실패
우리는 사울이 어떻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하여서 그를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신 계획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삼상9:15-17)
사울의 오기 전 날에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알게 하여 가라사대 내일 이맘 때에 내가 베냐민 땅에서 한 사람을 네게 보내리니 너는 그에게 기름을 부어 내 백성 이스라엘의 지도자를 삼으라 그가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리라 내 백성의 부르짖음이 내게 상달하였으므로 내가 그들을 돌아보았노라 하시더니 사무엘이 사울을 볼 때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이는 내가 네게 말한 사람이니 이가 내 백성을 통할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깊이 가슴에 새겨 두고 말씀을 계속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울이 왜 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분명한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여 자신의 공로 없이 한 나라의 왕이 되었다면 그 은총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부모 없는 오늘 우리들의 존재가 의미 없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을 들여다보면 한결 같이 은혜를 잊어버리고 하루아침에 자기가 잘 나고 성공한 인물이 된 것처럼 경거망덕 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을 너무나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망하고 실패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울이 그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한 나라의 왕으로 세워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결국 그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망하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삼상15:22-23)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는 말씀과 같이 사울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다가 결국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비참하게 그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이렇듯 대신관계에서 실패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삼상31:1-6)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치매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여 길보아 산에서 엎드러져 죽으니라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쫓아 미쳐서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니라 사울이 패전하매 활 쏘는 자가 따라 미치니 사울이 그 활 쏘는 자를 인하여 중상한지라 그가 병기 든 자에게 이르되 네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할례 없는 자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모욕할까 두려워하노라 하나 병기 든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는지라 이에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매 병기 든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자기 칼 위에 엎드러져 그와 함께 죽으니라 사울과 그 세 아들과 병기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한 순간에 사랑하는 아들들의 죽음을 보아야 했으며 왕이 신하보다도 더 비참하게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지경에 이른 사울은 참으로 비참한 인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실패하면 이렇게도 끔찍하게 망하는 것임을 하나님을 사울을 통해 우리들에게 생생하게 보여주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사울은 대인관계에서도 실패하는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만난 것은 天運(천운)이었습니다. 그 어리디 어린 다윗이 온 이스라엘의 용사와 왕까지도 두려워 떠는 블레셋의 골리앗을 쳐 죽였기 때문입니다. 사울 왕이 얼마나 골리앗을 무서워했으면 “저 골리앗을 물리치는 자에게는 나의 딸을 주겠다.”고 까지 공개적으로 인물을 찾았겠습니까? 그러한 골리앗을 어린 다윗이 거짓말처럼 물리쳐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그와 같은 다윗을 큰 장수로 임명하고 전쟁터에 내어 보내어 주변 국가를 평정하였습니다. 이 정도면 다윗은 사울에게 있어 은인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을 보면 사울은 용사 3천을 뽑아 세우고 친히 다윗을 죽이러 나섰으니 인관관계를 잘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삼상26:1-2)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이르러 가로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사울이 일어나 십 황무지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과 함께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라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이렇게도 다윗을 죽이지 못해 혈안이 되었을까요? 그 배경을 살펴보게 되면 사울이 인간관계에 실패자라는 사실을 알 게 됩니다.
(삼상18:6-11)
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그 이튿날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이 사울에게 힘 있게 내리매 그가 집 가운데서 야료하는고로 다윗이 평일과 같이 손으로 수금을 타는데 때에 사울의 손에 창이 있는지라 그가 스스로 이르기를 내가 다윗을 벽에 박으리라 하고 그 창을 던졌으나 다윗이 그 앞에서 두 번 피하였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사울이 왜 다윗을 죽이려고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순박한 여인들이 대적을 무찌르고 돌아오는 사울 왕과 용사들을 환영하면서 “사울을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고 외친 소리 때문에 다윗을 죽이려고 한 것입니다. 이렇듯 옹졸한 질투심으로 목숨을 걸고 왕과 나라를 위해 헌신하는 멋들어진 신하인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했으니 이 얼마나 편협한 사람이요 인간관계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그와 같은 자를 친히 제겨하시고 대신 다윗을 그 왕 위에 올려 세우셨던 것입니다.
다윗의 성공과 승리
우리는 이제 다윗의 성공과 승리에 관한 성경의 증거를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나 지금이나 나라 전체가 미국 50개 주 중에서 가장 작은 매사추세츠 주 만한 작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곳은 특별히 아열대로 무덥고 비가 없으므로 나무가 많지 않습니다. 그러한 민둥산에서 왕이 친히 이끄는 3천 명의 용사들을 피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은 거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우리들은 다윗이 어떻게 그와 같은 극한 상황 속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그 해답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감싸고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삼상26:8-12)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이 말씀에서 우리는 두 가지 소중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는 비록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원수 중의 원수이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세우신 종이니 자신이 죽일 수 없다는 것과 그와 같은 환경을 만들어 다윗이 어떻게 대처하는가를 친히 시험하신 하나님께서 그곳에 계셨다는 사실입니다. 지금도 대통령을 수행하는 경호원들은 자신이 총을 맞아 죽을지언정 대통령을 보호하는 책무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그 어떤 경우에도 주군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보호하는 자들이 바로 경호원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옛날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 왕을 경호해야 하는 용사들이 주변에 둘러 진을 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피곤해서 왕이 잠들었다고 그들도 함께 잠을 잘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을 보면 그들 모두가 왕과 함께 잠이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삼상26:12)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절호의 기회를 마련해 주시고 다윗으로 하여금 어떻게 처신하는가를 시험해 보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의 신하인 아비새가 “이는 하나님께서 원수를 죽일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고 단언하였던 것입니다(8절).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하나님께서 사울을 제거하실지언정 자신이 직접 원수를 갚아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는 분명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삼상26:9-10)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그는 관계에 성공하는 멋들어진 믿음과 철학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대인관계나 대신관계를 완벽하게 이루어 낸 놀라운 다윗만의 신념이었습니다. 비록 그 상대가 자신을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원수 중의 원수였을지라도 그는 직접 자신의 손으로 그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와 같이 처신한 배경에 하늘의 하나님을 두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가슴으로 기억하고 결정적인 순간에 순종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이렇게 다윗은 대인관계와 대신관계를 완벽하게 이루어 하나님의 은총을 입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사울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고도의 인격이요 신앙이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어느 날 자신이 죽이려고 하는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이유 하나로 하루아침에 하나님께서 친히 기름 부어 세우신 제사장들을 무려 85명이나 칼로 죽여 버린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 제사장들의 가족들도 그 제사장에게 속한 짐승들도 심지어는 어린 아이들까지도 잔인하게 칼로 다 죽여 버린 악한이었습니다.
(삼상22:17-19)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이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이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 오인을 죽였고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와 같은 사울과 다윗이 과연 어떻게 다른지를 이와 같은 특별한 기회를 만드시고 다윗에게 주어보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마치 하나님의 이와 같은 속마음을 다 아는 것처럼 아름답게 처신하여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되었고 그로 인해 엄청난 축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행13:21-23)
그 후에 저희가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폐하시고 다윗을 왕으로 세우시고 증거하여 가라사대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씨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는 말씀과 같이 말입니다. 이렇듯 인생은 관계입니다. 사람들과의 관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윗과 같이 원활하게 잘 유지해 나갈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과 같이 자신의 감정 하나를 다스리지 못해 조급하고 잔인하게 관계를 깨드려 나간다면 반드시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오늘 배워야 할 놀라운 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울과 다윗을 거울로 삼고 관계에 승리하는 멋들어진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멋진 인간관계를 유지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유명한 한 철학자의 견해와 다윗 왕이 보여 준 믿음으로 그 모델을 삼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관계에 성공하려면
근세에 유명한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현대인의 인간관계를 세 가지로 진단했습니다. 하나는 '그것과 그것의 관계'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마치 물건처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고 차버립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 입니다. 생명이 없는 무인격의 관계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이 위대한 유대인 철학자 부버는 또 하나의 관계로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물건처럼 이용해도 나는 상대방을 끝까지 인격으로 대할 때, '나와 그것의 관계'가 성립된 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인간관계는 '나와 너의 관계'로 발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를 인격으로 그리고 당신도 나를 인격으로 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끝나면 부버는 그렇게 위대하지 않습니다. 그는 또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당신을 인격으로 믿어 주고 당신이 나를 인격으로 믿어 주어도 우리들 사이에는 언제나 그 인격적인 관계가 깨질 수 있는 긴장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성의 연약함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와 너 사이에는 언제나 이 인간관계를 중매하는 하나의 촉매자가 필요합니다." 부버는 그 촉매자를 '영원한 너'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너'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남편과 아내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인간과 인간으로 부딪칠 때 우리는 상대방에게서 얼마나 많은 단점을 발견합니까? 그러나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 본 내 아내, 또 그리스도를 통해서 바라본 내 남편은 어떻습니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한번 만날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무릎을 꿇을 때에 비로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는 놀라운 관계가 가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대신관계와 대인관계를 서로 떼어 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둘은 하나로 묶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는 세상 사람들보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다른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미국의 이혼율이 50%에 육박하고 있지만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이것만 보아도 예수님을 가슴에 품고 사는 성도들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보다 인간관계를 훨씬 더 잘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인격적으로 만나고 이웃들과 사람들도 그렇게 인격적으로 만날 때 우리는 다윗과 같이 관계에 성공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명령하고 계십니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레위기19:18)고 말입니다. 이것이 관계 형성에 기본이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들이 함께 살펴보았던 다윗의 관계 성공도 바로 이처럼 말씀에 기초를 두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인간적으로는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었지만 그것조차도 모든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맡기고 기다릴 때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것을 그는 체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을 순종하며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의지할 때 하나님은 반드시 역사해 주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맺겠습니다. 우리는 사는 날 동안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아름답고 좋은 관계는 곧 우리들의 삶을 윤택하고 행복하게 해 줍니다. 하지만 잘못 된 관계는 우리들의 삶을 지옥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래서 지혜자는 우리들의 속을 들여다보는 듯 다음과 같은 놀라운 경험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잠17:1)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
(잠21:9)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나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고 말입니다. 그만큼 아름다운 관계가 행복의 조건임을 지혜자는 깨달았던 것입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보물단지를 얻는 것 보다 낫고 사람들과 아름다운 관계를 지속해 가는 것은 지상의 천국을 누리는 것과 같이 행복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곧 관계인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을 거울로 삼고 감정을 초월하는 멋들어진 관계형성으로 하나님으로부터는 축복을 받고 이웃들로부터는 사랑을 받는 그런 멋들어진 우리 모든 빌립보의 권속들이 되시기를 좋으신 우리 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아멘
또 한 번의 기회, 또 한 번의 자비
이준원목사 / 삼상 26장 1~12절
[들어가는 말]
신약성경은 헬라어(그리스어)로 쓰였는데, 문학과 철학에 쓰인 Classical Greek이 아니라 Koine Greek, 그러니까 보통 그리스어로 쓰였습니다. 왜냐하면 고전/정통 헬라어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전 그리스어로 쓰인 고대 그리스 문학 작품들 중에 호머(Homer)의 <오디세이(Odyssey)>가 있습니다. 주인공 오디세이가 바다를 항해하는데 그 바다에는 세이렌 여신들이 있습니다. 사람이 탄 배가 그들이 사는 섬에 가까이 다가오면 그들은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선원들을 유혹하여 바다에 뛰어들게 해서 죽게 하거나 배가 파선하여 죽게 만드는 힘이 있었습니다. 세이렌의 노래는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어서 수많은 남성들이 바다에 뛰어들어 죽고 말았습니다.
오디세이는 그러한 세이렌의 유혹을 이겨내기 위하여 부하들에게 자신의 몸을 돛대에 결박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의 결박을 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하들은 모두 귀마개를 하도록 합니다. 곧 세이렌의 아름다운 노랫소리가 들려오는데, 오디세이는 귀마개를 안 했기 때문에 결박을 풀려고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나 귀마개를 쓴 부하들은 그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를 더욱 단단히 결박합니다. 결국 그가 탄 배의 항해는 계속되고 세이렌의 노랫소리는 점점 약해져서 마침내 세이렌의 유혹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 섬을 지나갈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유명해서 다들 몇 번은 들어본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와 비슷하게 이 세상에는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유혹이 참 많습니다. ‘그까짓 것은 내가 충분히 이겨낼 수 있어.’라고 했는데 넘어가서 무너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유혹으로부터 나는 안전하다고, 나는 괜찮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나중에 보면 다윗도 유혹에 넘어가지 않습니까?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아무리 지금 은혜를 많이 받고 성령 충만해도,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는 유혹에 걸려들 가능성이 아주 높은, 아니 틀림없이 유혹에 넘어갈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할 일은 ‘나는 괜찮다. 나는 할 수 있다.’라고 할 것이 아니라, 오디세이처럼 나보다 더 강한 것이 나를 꽉 붙들도록 해야 합니다. 나보다 강한 능력을 가진 게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잡아매고, 또 나 혼자 있으면 지니까 믿음의 공동체가 나를 꽉 붙들어줄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생명의 삶> 때도 누누이 강조하지만,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 성경 전체를 요약한 것, 십계명의 요약이기도 하고 구약성경의 요약이기도 하고 전체 성경의 요약이기도 한 가장 중요한 계명, 가장 큰 계명이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입니다. 그것은 명령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살 길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부담스러운 명령이 아니라, 그렇게 살 때 우리가 유혹을 이길 수 있고 능력 있게 살 수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을 오늘 본문에서 다윗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12절까지만 읽었는데, 26장 전체를 모두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또 다시 다윗을 추격하는 사울 (1~5절)
지난번 24장에서 다윗이 죽이지 않고 목숨을 살려줌으로 뉘우치며 떠났던 사울은 또 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길을 나섭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를 붙잡아매지 않고 그저 자기 생각대로만,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도 자기가 다윗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그를 죽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스스로도 알았고, 또한 자기는 다윗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니까 또 다시 다윗을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번에도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십(Ziph) 사람들이 기브아에 있던 사울에게 다윗이 어디 숨어 있는지 정보를 알려줍니다.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사울이 일어나 십 광야에서 다윗을 찾으려고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십 광야로 내려가서” (1-2절)
사울은 지난번 엔게디 굴속에서 다윗의 손에 죽을 수도 있었는데 다윗이 살려준 것을 기억하고, 비록 하나님이 자기를 폐위했다고 하셨지만 여전히 자비를 베풀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붙들어 매는 태도를 보였어야 마땅합니다. 그러나 그는 안타깝게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십 사람들이 또 정보를 주니까 또 마음을 바뀌어 다윗을 잡겠다고 나갑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과 함께 갑니다. 또 다시 이스라엘의 최정예부대, 가장 강력한 특수부대를 다윗과 부하 몇 명을 잡겠다고 데리고 갑니다. 블레셋을 대비해야 하는 부대가 다윗을 잡는 데 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리더십이 얼마나 엉망인가 하는 것을 이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약합니다. 바로 얼마 전에 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결단을 했는데 또 잡아 죽이겠다고 쫓아가지 않습니까? 우리도 이렇게 예배를 드리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면서, 부흥회나 수련회나 세미나나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은혜를 받았다고 하고, 결단을 하며 ‘이제 나도 제대로 섬기며 살아야겠다.’라고 다짐합니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만 바뀌면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내가 성경을 열심히 읽어보아야겠다. 한 번도 제대로 읽은 적이 없는데 올해는 꼭 성경을 한 번은 읽어보아야겠다.’라고 하며 1월에 시작을 했는데, 바빠지고 여러 일들이 생기니까 ‘올해만 있나? 내년도 있지. 내년에 해야지.’ 하고 넘어가 버립니다. 기도도 ‘올해는 새벽기도를 좀 해봐야 되겠다.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나가야겠다.’라고 했는데, 조금 피곤하니까 ‘이번 주만 있나? 다음 주도 있지.’라며 자꾸 미룹니다. 뭔가 감동을 받고 결단을 했는데 막상 하려니까 잘 안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므로 큰 결심을 하는 것은 귀한 일이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겁니다. 진정한 믿음생활을 해야 합니다. 한두 번 은혜를 경험하고 기쁨을 누린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계속해야 합니다. 한두 번 은혜 받는 게 아니라, 계속 은혜를 받아야 하고 계속 결단을 하며 계속 실천을 해야 합니다.
오래 전 어떤 분이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을 들었습니다. ‘학창시절까지는 교회를 굉장히 열심히 다녔다. 그런데 내가 그때 교회를 너무 열심히 다녀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회도 졸업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끝까지 해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의 삶> 때 배우는 내용이지만, 구원에서 세 가지 시제(차원)가 있습니다. 그 중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는 지금이 ‘받는 구원’의 과정, ‘혼(인격)의 구원’의 과정, ‘성화’의 과정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끊임없이 해나가야 합니다.
입맛이 너무 좋다고 하루 종일 엄청난 양의 음식을 먹고 ‘야, 정말 배부르다. 이제 평생 안 먹어도 되겠다.’라고 하며 그 다음부터 안 먹는 사람이 있습니까? 만약 있다면 정말 어리석은 사람이고, 금방 죽게 됩니다. 또 아주 경치가 좋은 산에 휴가를 가서 하루 종일 신선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는 ‘와, 좋다! 신선한 공기를 실컷 마셨으니까 이제부터는 숨을 안 쉬고 살아도 되겠다.’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말이 안 되는 이야기입니다.
말씀은 영적 양식이고 기도는 영적 호흡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양식을 한 번에 엄청나게 먹고 나서 그 다음부터 안 먹는 게 아니라 꾸준히 매일 먹습니다. 영적 양식도 꾸준히 매일 먹어야 하는 겁니다. 호흡도 한꺼번에 다 하고 안 하는 게 아니라 계속 해나가는 것입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호흡을 안 하면 죽으니까 영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말씀묵상과 기도와 예배의 자리를 찾아 나아가는 겁니다. 왜 우리가 이렇게 주일예배로 함께 모여서 이 귀한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겁니까? 왜 수요예배나 새벽기도회가 있습니까? 왜 목장 모임으로 모입니까? 또 왜 삶 공부가 있습니까? 바쁜 삶 중에 사람을 더 힘들게 하고 괴롭히고, 또 어떻게든 교회 모임 숫자를 늘리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해나가는 것은 세상을 제대로 살 수 있는 힘을 공급받기 위함입니다.
공 예배는 가장 기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집에서 혼자 예배할 수 있지만, 함께 모여서 예배하는 겁니다. 우리는 스스로 힘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래서 모여 함께 예배를 드립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믿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로 나아가고,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주님 안에서 우리가 사랑을 나누면서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는 자리로 자꾸 나 자신을 이끌어가는 겁니다. 그런 노력을 해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 말씀과 기도와 예배와 사랑의 교제가 없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믿는 사람답게 제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형제자매와 사랑을 나누는 삶이 없으면, 유혹이 올 때 아주 크게 무너지게 되고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꼭 붙어 있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나 자신을 붙들어 매놓아야 유혹이 올 때 이길 수 있습니다.
다윗 입장에서 보면, 얼마 전 사울을 죽일 수 있었지만 살려주었습니다. 그런데 용서해주고 자비를 베풀어주었더니 그때는 뉘우치는 것 같더니 이제 또 자기를 죽이겠다고 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내가 누군가를 용서해주었는데, 감사하다고 가서는 또 배은망덕한 일을 한다면 얼마나 기가 막히고 마음이 아프고 화가 나는 일입니ᄁᆞ?
그런데 그렇게 또 다시 자기를 죽이겠다고 오는 사울이 밉지만, 꼬박꼬박 ‘다윗이 여기 있습니다. 다윗이 저기 있습니다.’라고 자기가 어디 숨어 있다고 사울에게 알려주는 십 사람들은 정말 눈엣가시 같은 존재로 느껴졌을 것입니다.
그들은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섭리를 전혀 모르는 자들입니다. 오직 권력자인 사울 편에 붙어서 이득을 보고자 하는 악한 기회주의자들일 뿐입니다. 그러한 십 사람들의 태도에 대해 지은 시편이 지난번 읽었던 54편입니다.
“무법자들이 일어나 나를 치며, 폭력배들이 내 목숨을 노립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하나님을 안중에도 두지 않는 자들입니다.” (시 54:3, 새번역)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믿지 않는 자들, 생각도 안 하는 자들, 오직 어떻게 하면 이득을 얻을까 하는 자들입니다. 폭력배들입니다. 그래서 시편 54편을 읽어보면, 다윗은 항상 기도하던 사람이었고 특히 절체절명의 순간마다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간절한 기도를 드리던 기도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시편에서 다윗은 자신이 숨어 있는 곳을 사울에게 계속해서 알려주는 십 사람들의 적대적인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해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주실 것을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지금 자기 생명을 취하려고 오는 자들의 발걸음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면서, 그 순간 자신의 목숨을 지켜줄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외칩니다.
다윗은 악인을 심판하실 하나님의 임재를 바라며 다른 데로 피합니다. 이때 십 사람들의 정보를 받고 출동한 사울의 특수부대가 다윗이 숨어 있는 곳 근처까지 접근해옵니다.
“사울이 광야 앞 하길라 산 길 가에 진 치니라 다윗이 광야에 있더니 사울이 자기를 따라 광야로 들어옴을 알고” (3절)
애초에 다윗은 사울이 진짜 마음을 바꾸어서 변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었는데, 사울이 다시 추격해왔다는 소시를 듣습니다. 그래서 먼저 정탐을 보내어 사울이 직접 왔는지 확인합니다.
“이에 다윗이 정탐꾼을 보내어 사울이 과연 이른 줄 알고,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4-5절)
이제 다윗은 가만히 있지 않고 자기가 직접 사울의 진으로 들어갑니다. 과연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군사들이 그를 둘러 진을 치고 있는 것이 눈에 보입니다. 이 장면을 영화에서도 긴박하게 그린 것이 기억납니다. 사울은 자기가 이렇게 가까이 와서 살펴보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누워서 자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지난번처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또 다시 주어진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사울에게 자비를 베푼 다윗 (6~12절)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6-7절)
사울의 진영을 직접 확인한 다윗은 아히멜렉과 아비새와 함께 그 근처까지 온 겁니다. 다 같이 가면 발각되기 쉬우니까 한 명만 내려가 보자고 말합니다. 아마 둘 다 자원했을 텐데 아비새가 더욱 강력하게 자원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과 같이 사울의 진영으로 몰래 들어갑니다.
다윗과 아비새는 한밤중에 사울 진영으로 잠입하여 그를 죽일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접근합니다. 이때 사울의 창은 머리 근처 땅에 꽂혀 있고,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과 다른 군사들은 사울을 둘러 잠을 자고 있습니다. 사울이 왕이니까 보호한다고 그를 둘러서 자고 있는 겁니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또 다시 주신 기회가 아니겠습니까?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8절)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신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그냥 보면 그의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지난번에도 그랬지만 이것이 얼마나 합리적인 말입니까? 하나님이 기회를 주셨다는 겁니다. 지난번에 다윗이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을 죽이면 안 된다고 꺼려했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을 죽이기가 꺼려지면 자기가 죽이겠다고 제안합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다윗이 사울을 죽인 것 때문에 문제가 되고 곤란을 당하게 되면, 다윗 자신은 원하지 않았지만 부하 아비새가 억지로 나서서 죽였다고 하면 된다는 겁니다.
아주 오래 전인 1968년 1월 21일 일어났던 1.21 사태를 혹시 기억하십니까?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 무장공비들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서 청와대를 공격하러 왔다가 모두 사살당하고 김신조만 생포되었던 사건입니다. 그가 나중에 전향하고 목사까지 되었습니다.
나중에 남북대화를 하면서 김일성이 그 일에 대해 사과하면서,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의 과잉충성이 빚어낸 일이라고 하며 박 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만약 그때 성공해서 실제로 암살했다면 ‘내가 한 건 아닌데,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됩니까? 전혀 해결되지 않습니다. 엄청난 문제가 됩니다.
다윗도 그런 식으로 ‘사울을 죽인 것은 내 뜻이 아니었다. 나는 사울을 살려주려고 했다. 그런데 내 부하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사울을 죽였다. 미안하게 되었다.’라고 하면 문제가 해결되겠습니까? 해결이 안 됩니다.
그런데 솔직히 살다 보면 그런 식으로 될 때가 많은 것을 봅니다. 자기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자기가 직접 하지 않고 다른 사람 손으로 일을 저지르고 나서 ‘나는 몰랐다.’라고 발을 빼거나, ‘몰랐는데 그 사람들이 그냥 한 거다.’ 하며 책임을 회피하는 경우가 참 많습니다. 특히 정치인들이나 대기업 경영자들이 그렇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9절)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라고 말합니다. 왜 다윗은 그런 식으로 생각합니까? 다윗이 겁쟁이입니까? 이건 누가 보아도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분명한데 왜 다윗은 그렇게 주저합니까? 이해가 안 갑니다. 그러나 잘 보면 그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이 점에 대해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10-11절)
다윗은 하나님을 정말로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사실 ‘에이, 그냥 해야지.’ 하며 자기 마음대로 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정말로 하나님을 믿고 있고, 정말 하나님의 손에 이것을 맡기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기 때문에 사울을 병들어 죽게 하시든지 아니면 전쟁터에서 죽게 하실 것이므로, 자신은 결코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은 하나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을 사람이 처리하면 안 된다.’라는 믿음이 다윗에게 있습니다.
사실 자기 자신도 이미 사무엘이 와서 기름 부어 세운 차기 왕입니다. 하나님이 세워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 받은 자가 할 일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순종한 자에 대해서는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임을 다윗은 분명하게 믿고 있습니다.
다윗의 부하 아비새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원수를 제거하라고 주신 기회라고 해석했습니다. 누가 봐도 그렇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죽이라고 자기에게 두 번째로 주신 기회가 아니라, 그와는 반대로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을 이토록 사랑하시며 지켜주고 계시다는 증거로 해석합니다.
이처럼 똑같은 상황에 대해서도 사람마다 생각이 얼마나 다른지 모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두 번씩이나 주신 기회를 모두 날려버린 어리석은 사람, 유약한 사람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렇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 사울을 죽이라고 하시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를 눈동자와 같이 사랑하셔서 동행하고 계시며 보호하고 계시다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번씩이나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지금 분명히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며, 저 사울의 손에서 나를 보호하실 것이며, 틀림없이 나를 선한 길로 인도하실 것이다.’라는 믿음을 더욱 갖게 만드는 증거라고 본 것입니다.
같은 상황을 놓고도 사람마다 의견이 완전히 다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 않습니까?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거기에 대한 평가가 다 다릅니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맞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일들을 보면서 살아가는데 어떤 것이 옳은 길입니까? 어떤 것이 옳은 선택입니까? 어느 것이 맞습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든지 ‘하나님은 이것을 어떻게 생각하실까?’라고 보면 틀림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에서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것이 정말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지혜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높은 위치에 올라가며 인정을 받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면 담대히 거절할 수 있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것을 알고 구분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자는 것이 말은 좋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되느냐는 것입니다. 요즘 SNS 같은 데를 보아도, 크리스천이고 목회자라도 의견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도대체 누구의 말이 맞는 겁니까? 다 하나님을 열심히 잘 믿고 섬기는 크리스천이고 목사인데 의견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럼 누가 맞는 겁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시각입니까?
사실 아주 간단합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것만 우리가 잘 기억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라도 다른 사람에게, 설사 그것이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해를 끼치는 일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고 보면 됩니다. 아무리 남들이 괜찮다고 해도, ‘저 사람은 당해도 싸다.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니까 당해도 된다.’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이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일이고 해치는 일이라면, 사람과의 관계를 깨는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이것을 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기회는 언제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세워지고 이웃과의 관계가 세워지는 방향으로 갑니다. 관계를 세우는 방향이라면, 이것이 너무나 힘들어 보이고 실제로 어려워도 옳은 길이기 때문에 그 길로 나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관계를 깨는 방향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아 보이더라도 하나님의 길이 아니기 때문에 거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새로운 직장이나 사업의 기회가 있을 때 이것을 잘 체크해보십시오. 학생들은 학교나 앞으로 직장을 잡을 때, 또 인턴십을 할 때 잘 살펴보십시오.
이 직장이나 사업이 주일에 교회에 나와서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방해하고 막는 것이라면, 또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의 시간인 QT와 기도의 시간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조건이라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당장 나에게 좋은 것 같아도 결국 나에게 독이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형제자매들과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것을 막는 일이 된다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일이라도 물리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당장은 좋아 보여도 결국은 내 인생을 무너뜨리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리 내가 힘들게 되는 일이고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도와주는 일이라면, 그것이 하나님을 더욱 찾게 해주는 일이라면, 그 방향으로 힘들어도 나아가는 겁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덕을 끼치며 관계를 세우는 일이라면 아무리 어려워도 그냥 하는 겁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기준은 항상 관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깨는지 세우는지를 보면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12절)
다윗은 사울을 죽이는 대신 그의 창과 물병만 증거물로 가지고 그곳을 떠납니다. 그래도 다윗이 지혜롭습니다. 자기가 왔다 간 증거를 보여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져갑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사울의 진영 사람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아무도 그것을 보거나 눈치 챈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다윗과 아비새가 특수요원과 같이 날쌔고 소리도 없이 움직여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이것을 보면 다윗이 행한 일에 대해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일이 아니었다면 들켰을 겁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귀하게 여기는 것을 아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사울처럼 악한 사람이 또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배은망덕하고 은혜도 모르고, 자기의 사위이자 나라의 최고 장군을 죽이려 하는 악한 왕이 또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다. 내 손을 대지 않겠다.’라고 하는 다윗의 태도를 하나님이 너무나 기뻐하시고 인정해주신 겁니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을 하나님은 존귀하게 여겨주십니다. 아무리 형편없는 사람이라도, 누가 봐도 악하다고 하는 사람이라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그 사람을 위해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람입니다. 그것을 기억하고 존중해주는 사람을 하나님도 존중해주시고 높여주십니다. 반드시 그렇게 해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하나님을 향한 다윗의 확고한 신뢰 (13~25절)
다윗은 사울의 진영을 떠나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꼭대기에 서서 사울 진영의 군대장관인 아브넬을 향해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13-14). 그리고 뭐라고 합니까?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15-16절)
다윗은 백성 중 한 사람이 진영으로 들어가서 왕을 죽이려 했는데, 군대장관으로서 아브넬은 그것도 몰랐다고 하며 그의 근무 태만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기름 부음 받은 왕을 보호하지 못한 것이기 때문에 죽을죄를 지은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16). 그리고 다윗은 아브넬에게 사울 왕의 머리 곁에 있던 창과 물병이 어디 있는지 점검해보라고 들어 보입니다(16).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17절)
이런 소란의 와중에 사울이 가만히 보니까 저 멀리서 자기편을 향해 소리치는 사람이 다윗이라는 것을 알고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으며 다윗을 향해 외칩니다.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로 너의 목소리냐?”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아들을 왜 죽이려고 쫓아다닙니까? 이때 다윗이 뭐라고 대답합니까? 이 내용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18-20절)
얼마나 간절하게 다윗이 말을 합니까? 그런데 여기서 다윗이 중요한 두 가지 이야기를 합니다.
첫째로, 다윗을 죽이라고 사울을 그렇게 충동질하는 것이 어디서 나왔는지 점검해보라고 합니다. 사울이 자신을 찾아 죽이려는 것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원하는 것인지를 분별하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죽이라고 하셨다면 자기는 기꺼이 희생제물이 되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들이 충동질하는 것이라면 그들이 저주를 받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이것도 굉장히 애매할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사람의 뜻인가? 우리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과 충동을 다 믿으면 안 됩니다. 그 충동의 근원을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생각도 있지만, 그냥 마음속에 일어나는 충동도 있고 옳지 않은 생각들도 있습니다.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도 똑같습니다. 뭡니까? 관계입니다. 늘 우리는 관계를 가지고 판단해야 합니다. 관계를 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일 수가 없습니다. 관계를 세우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는 것이 과연 하나님의 뜻입니까?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평화를 이 땅에 이루는 길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울이 하려는 짓은 불의한 일입니다. 살인은 관계를 깨는 악한 일입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신을 박해하고 이스라엘 국경 밖으로 추방하는 대적들의 행동은 다윗 자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고 다른 신들을 섬기게 하는 위협이며, 결국 다윗이 하나님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하는 악한 행위라고 말합니다(19).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다윗의 마음의 중심에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악한 일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죽이라고 하셨다면 자기가 기꺼이 죽겠지만, 사람들이 자기를 죽이라고 하면서 자기로 하여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을 막고 방해한다면, 하나님과 자기와의 관계를 깨려고 한다면, 그것은 악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이것도 역시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어떤 충동이 일어날 때 가만히 보면 대개 인간의 욕심일 경우가 많습니다. 앞길이 막막할 때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며 시도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그때 일단 마음이 복잡하면 인간적인 생각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배를 드려보면 그것을 더 확실히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각이라면 예배를 통해 기쁨과 감사와 감격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생각이 사람의 충동이나 욕심에서 나온 것이라면, 자꾸 마음에 조급함이 생깁니다. 예배를 드려도 별 기쁨이나 감격이 없이 냉랭하고 무미건조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볼 필요가 있습니다. 특히 내가 예배를 어떻게 드리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제대로 예배를 드리고 있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인도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를 제대로 드리지 못하고, 예배를 드려도 거기에 별 감격이나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다면, 지금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아닐 가능성이 높은 겁니다.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주님은 일단 환경으로 막아주기도 하십니다. 또 예배 가운데 기쁨이 느껴지지 않게 하십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21절)
다윗의 간절한 호소와 간청으로 사울은 일시적으로 마음이 감동됩니다. 이것은 거짓말을 한 것 같지 않습니다. 잠시나마 자신의 죄를 뉘우치며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것이 진심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다윗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은 창을 보소서 한 소년을 보내어 가져가게 하소서.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22-24절)
다시금 다윗은 자신과 사울 사이에 하나님이 직접 판단해주시도록 하나님께 의뢰하고 있습니다. 그는 주님께서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실 것을 확신하면서 자기가 사울 왕을 친히 해치지 않은 이유를 여기서 말하는데, 그것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실 것이라는 이 믿음이야말로 다윗이 사울에게 직접 보복하는 것을 막아준 방패였습니다. 다윗의 말에 감동을 받은 사울은 다시 한 번 다윗을 축복해줍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25절)
사실 사울이 다윗을 축복하는 이 말은 자기모순입니다. 다윗이 행할 큰일을 믿고 있고 더 나아가 다윗이 결국 승리할 것을 믿는다면, 왜 다윗과 즉시 화해할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왜 다윗의 대적이 됩니까? 자기가 다윗의 대적인데 다윗이 승리하면 누가 지는 겁니까? 자기가 지는 것이니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의 말과 행동이 전혀 맞지 않습니다.
사울과 다윗은 화해 없이 헤어집니다. 사울에게 진정성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스스로 왕위에서 물러나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거나 아니면 다윗을 다시는 추격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울의 말이 진심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사울은 그냥 자신의 길을 갑니다. 그 후에도 사울은 여전히 다윗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그를 죽일 기회만 노립니다. 나중에 27장에 보면 또 다윗을 추격하려 했지만 블레셋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포기합니다.
사울은 블레셋을 막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위대한 장군 다윗을 국경 밖으로 나가게 하고 그것도 모자라 그를 죽이려고 집요하게 추격함으로 국력을 분열시키는 중대한 죄를 범한 겁니다. 둘이 힘을 합쳐도 어려운 것이 블레셋과의 싸움인데, 그것을 알면서도 사울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데에만 눈이 먼 나머지,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제대로 다스릴 수 있는 길을 스스로 내팽개치고 망하는 길로 달려가게 된 것입니다. 정말로 안타깝습니다.
믿음의 양심에 따라
양인국목사 / 삼상 26:1-25.
1.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부르셨다. 이것은 우리를 변화의 주체로 부르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변화의 주체로 부르셨다는 것은 가치 중심의 삶을 살도록 부르셨다는 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죄로 인하여 부패한 우리는 가치 중심의 삶을 살지 못하고 소유 중심의 삶으로 왜곡된 삶을 살고 있다. 이와 같은 왜곡된 삶은 우리들의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모든 문제의 근원이 되고 있다. 즉 삶의 여정에서 직면하는 모든 문제는 바로 소유지 중심의 삶으로부터 나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라고 말씀하심으로 소유 중심의 삶에서 돌이켜 가치 중심의 삶을 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렇게 살 때 우리 자신이 복된 삶을 살뿐만 아니라 우리가 속해 있는 공동체f f 복된 곳으로 변화 시킬 수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변화의 주체로 사는 것이고 또한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소유중심의 삶과 가치 중심의 삶이 무엇인지 그리고 각각의 삶을 통하여 맺는 열매가 무엇인지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봄으로 변화의 주체로 살기 위하여 우리에게 요청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2. 본문은 두 종류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는 이해관계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십 사람들과 사울은 이해관계에 따라 사는 사람들이고, 다윗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사는 사람이다. 본문에 언급한 두 종류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그들 각각의 삶을 통하여 맺는 열매를 보고 우리가 믿음의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는 것이 합당하고 복된 삶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기 원한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먼저 십 사람들의 모습을 보기 원한다. 그들은 사울에게 가서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렸다. 그들이 이와 같은 일을 두 번이나 거듭했다(삼상23:19,26:1). 그들이 처음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은 사울의 위협을 피하기 위해 행한 불가피한 일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사울은 다윗의 거처를 알고도 알리지 않는 자들의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울은 다윗에게 호의를 베푼 제사장 아히멜렉과 그의 아들 팔십오인을 한자리에서 죽였다(삼상23:21).
그러나 십 사람들이 두 번째 스스로 사울을 찾아가서 다윗이 있는 곳을 알려준 것은 이해관계로 인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처음 사울에게 다윗의 위치를 알려 주었을 때 사울은 그들의 행위를 칭찬했다.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23:21)” 최고의 권력자로부터 이런 말을 듣는 것은 사울이 왕권을 유지하는 한 그들의 장래도 보장 받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들은 이와 같은 보장을 더욱 확실하게 하고자 자원하여 또 한번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사울에게 알려 준 것이다. 여기 십사람들의 행위는 옳고 그름에 따른 것이 아니었고 이해관계에 따라 행한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무고한 사람을 사울에게 판 것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하나님의 뜻과 역행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다윗은 십 사람들에게 어떤 해도 끼치지 않았고 사울과 이스라엘에게도 잘못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당시 다윗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애매히 사울에게 쫓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 사람들이 고의적으로 다윗을 대적한 것은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무조건 권력자의 편에 속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이기적인 마음으로 인한 것이었다. 그들의 행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하지 못한 것이다. 그들은 오히려 애매히 고난 받고 있는 다윗을 도와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었다. 이처럼 소유중심의 삶을 살 때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인권은 무시되고 삶은 황폐해 가는 것이다.
사울은 다윗으로부터 생명의 빚을 졌음에도 불구하고(24:8-22), 또 다시 다윗을 죽이려고 삼천의 군사를 이끌고 십 황무지로 갔다. 사울 안에 있는 왕권을 지키려는 탐욕은 그의 인간됨을 황폐시켜 버렸고, 탐욕의 노예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스스로를 탐욕에 허용하는 것은 스스로를 노예화 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안다면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다. 여기 족한 줄로 안다는 것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을 때 가치 있는 삶의 살 수 있다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붙잡기 위하여 군사를 이끌고 십 황무지에 이른 줄 알고 정탐꾼을 보내어 그의 행동을 살폈다. 이로 인하여 그는 사울과 그의 군대가 진을 친 장소를 알 수 있었고 또한 사울이 누운 곳도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다윗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사울을 제거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다윗이 사울로 인하여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왔는가? 이것을 생각하면 이와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는 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이 기회를 포기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름부어 택하신 자를 해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다윗이 이해관계에 따라 살지 않고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살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므로 그가 사울과의 싸움에서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은 그를 죽일 뜻이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다윗은 이미 엔게디 황무지에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하였다(24:8-22). 그는 동굴에서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다만 그의 옷자락만 베었다. 이것을 벤 것은 사울에게 자신이 그를 죽이려는 뜻이 없음을 증명해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이로 인하여 사울은 다윗의 진실 된 마음을 확인하고 스스로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다윗의 생명을 찾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또 다시 그를 죽이고자 군사를 이끌고 십 황무지로 온 것이다. 다윗은 또 다시 사울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해 보여주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아비새와 함께 사울에게 갔다. 물론 아비새는 다윗을 위하여 대적 사울을 죽이고자 했고, 그 일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는 자신감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26:8)”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자신의 손으로 죽이지 않겠다는 생각에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비새에게 사울을 죽이는 일을 금하고 대신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가자고 했다. 이처럼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하였고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행하지 않았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은 이와 같이 행한 다윗을 지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렀을 때 피흘림 없이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주셨다. 다윗이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살피고 그뜻에 따라 살았고, 자신의 문제와 장래 등은 모두 하나님께 의탁했다. 그결과 언급한 것처럼 스스로의 힘으로 세울 수 없는 것까지도 하나님께서 세워주셨다. 실제로 다윗이 사울에게 자신이 결백함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취하러 갔을 때 하나님께서 사울과 그의 군사 모두로 하여금 잠들게 하심으로 그 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해 주셨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26:12)”
뿐만 아니라 다윗은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삶으로 인하여 여러 가지 기회를 얻었다. 그 기회 중의 하나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무죄함을 변명하고 입증할 수 있는 기회였다.
다윗이 사울로부터 처음 추격을 받았을 때는 사울만을 상대로 하여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고자 했지만 두 번째는 사울뿐만 아니라 사울의 군사들과 그들의 군대 장관 넬을 상대로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하려 했다. 그가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의 무죄함을 사울뿐만 아니라 사울과 함께 자신을 잡으러 온 모든 군사에게도 알려주기 위함이었다. 다윗은 이렇게 함으로 사울의 군사들 가운데 어떤 사람도 무지(無知)로 인하여 자신을 죄인처럼 대하지 못하게 하려 하였고 또한 후에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에도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할 수 있는 기회를 삼고자 했다. 실제로 다윗의 삶의 여정을 살펴볼 때 이와 같은 시련을 통하여 얻게 된 기회는 그가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졌을 때 이스라엘 모든 지파와 더불어 샬롬을 누릴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우리가 이해관계에 따라 행하지 않고 신앙의 양심에 따라 행할 때 하나님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직면한 문제를 해결해 주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장래를 준비하기 위한 기회까지 주신다.
실제로 다윗은 사울을 향하여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26:18)”라고 물었다. 이것은 사울과 그 군사들 모두에게 묻는 것이었다. 이처럼 다윗은 사울에게 해를 끼치고자 행한 것이 아니고 자신을 대적하는 자들에게 자신의 무죄함만 입증하려 하였다. 그러므로 다윗이 이와 같이 물음으로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 즉 다윗에게 속해 있는 자들이든, 사울에게 속해 있는 자들이든 모두에게 사울의 불의함과 다윗의 무죄함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다윗은 계속하여 사울에게 자신을 쫓는 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제물로 취하여 가시기를 원하지만,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그들이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될 것임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에게 전에 했던 것과 같은 권고를 다시 한 번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주신 것은 무죄한 자를 죽이기 위하여 쫓는 일이 아니고 왕으로서 합당한 일을 행하도록 하려 하심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다윗의 권고를 통하여 우리가 부르심이 무엇인지 알고 부르심에 따라 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이것을 깨닫지 못할 때 삶을 낭비하게 되고 오히려 세워주어야 할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는 걸림돌이 된다. 안타깝게도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할수록 백성들 가운데 그의 권위는 상실 되어 갔고 다윗은 사울로부터 박해를 당할수록 백성들 가운데 권위를 갖게 되었다. 이처럼 하나님은 악인에게는 악을 허용하시고 의인에게는 고통을 허용하시므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가치 중심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 지음 받은 자들이 살아갈 수 있는 삶이라는 것과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또한 의식주가 보장된 오늘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소유중심의 삶을 살아왔기 때문에 가치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빛과 소금으로 그리고 변화의 주체로서 부르심에 따라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이렇게 변회되지 않으면 안된다. 서신의 사족들 모두는 소유중심의 삶으로부터 가치중심의 삶으로 스스로를 변화시켜가는 것을 생의 최대 도전으로 알고 실천해가기 원한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이해관계에 따라 행하지 않게 해 주시고 신앙의양심에 따라 행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고 이렇게 사는 것이 믿음의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삶임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사울을 살려준 다윗
삼상 26장 1~16절 / 변한규목사
사무엘상 18장 11절을 보면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창을 두 번이나 던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울을 떠나시고 다윗과 함께 하심으로 다윗이 사울이 던진 창을 무난히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자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했고 끝까지 다윗을 추적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다윗을 미워했으나 다윗을 사울을 사랑했습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두 번 있었는데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능히 사울의 목을 벨 수 있었던 기회인데도 사무엘상 24장에 보면 다윗은 어떻게 했습니까?
첫째, 머리대신 겉옷 자락만 벰.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 한 굴속에 피신했을 때입니다. 그곳까지 다윗을 추적했던 사울이 마침 용무가 급하여 그 굴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굴 깊은곳에 다윗이 있는 줄도 모르고 사울은 아래옷을 내렸습니다. 얼마나 절호의 기회입니까. 다윗의 부하들이 귓속말로 다윗에게 가만히 말했습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붙이리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바로 이때입니다. 빨리 사울의 머리를 칼로 베소서. 그러나 다윗은 4절에서 사울의 겉옷자락을 가만히 벱니다. 아마 그순간 다윗은 조금만 다윗의 옷자락을 베었을 것입니다. 사울의 머리대신 겉옷자락만 베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대한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기회는 모든 것을 허용하는가? 결코 아닙니다. 어떤 좋은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믿는 사람들은 그 기회를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그렇다 기회는 모든 것을 허용한다. 그 기회를 잡아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를 둘러싼 세상의 철학입니다. 성경에는 말하기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말입니다. '내가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출세만 할 수 있다면, 권력만 쥘 수 있다면, 내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 인기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이러할 경우 어떤 방법도 가능하는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수단과 방법이 성경적이어야 합니다. 사울은 아무 것도 모르고 굴 속에서 빠져나왔습니다. 이어서 다윗도 굴 속에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사울의 등 뒤에서 외쳤습니다. 11절에서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하고 외쳤습니다. 죽일 수도 있었지만 옷자락만을 베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나이다"고 설명한것입니다. 다윗은 원수 사울에 대해서 최대의 경의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6절에 "내 주"와 8절에 "내 주 왕이여", 11절에 "나의 아버지여"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8절에는 멀리서 땅에 엎드려 절을 했습니다. 원수인데 그렇게 했습니다. 11절에 말하기를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헤치려 하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당신은 나를 미워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다윗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나 하나님만 바라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모든 문제를 하나님만 바라보면서 해결했습니다. 위기를 만났을때도 역경을 만났을 때도 그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갔습니다. '하나님 당신이라면 이 위기를 이 역경을 어떻게 하시겠나이까?" 다윗은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리면서 지시한대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것을 본 받아야 할 것입니다. 입술로만 ♬주님 뜻대로 살기로 했네♬ 라고 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주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때를 기다릴 줄 알라는 것입니다. 만사에는 때가 있습니다. 너무 조급하게 때를 앞당기거나 늦추어서도 안 될 것입니다. 금방 왕이 되고 싶어하는 것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욕심을 잠재우고 때를 기다렸습니다. 만일 금방 왕이 되고자 했으면 굴 속에서 겉옷자락을 베지않고 사울의 머리를 베었을 것입니다. 성도들이 인생을 바르게 살려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 하나님의 방법대로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기다림도 하나의 믿음입니다. 믿기 때문에 기다리는 것입니다. 시편 37편 7절에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차마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불평하여 말찌어다"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새 성전을 건축하는 일도 마찬 가지입니다. 때가 있습니다. 못을 박을 때가 있고 벽돌을 쌓아 올릴 때가 있습니다. 3차 공사 시작할 때가 있고 건축을 마무리 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잠잠히 기도하는 성도들의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찌했습니까?
둘째, 창과 물병만 취했습니다.
본문에서 사울은 다윗을 끈질기게 추격했습니다. 마침 정탐군들이 사울에게 전하기를 '지금 다윗이 광야 하길라 산에 숨었나이다'라고 하자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이 군사 3000을 거느리고 진을 쳤습니다. 이제 너는 죽었다는 것입니다. 밤이 되었을 때 사울의 군사 모두가 이상하게도 혼비백산 깊은 잠에 빠져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이 잠은 하나님이 만드신 잠입니다. 본문 12절에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께서 사울의 군사들을 잠의 함정에 빠뜨렸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2번째로 주어진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참모를 데리고 사울의 막사로 달려갔습니다.
군사 모두가 세상 모르고 코를 드르렁 골고 있습니다. 사울도 마찬 가지입니다. 그때 다윗의 참모 아비새가 조용히 말했습니다. "왜 전에 사울의 머리를 베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나이까? 그러나 이제는 결단코 기회를 놓치지 마옵소서. 지금 이 창으로 사울을 단번에 찌르도록 허락 하옵소서. 내가 사울을 죽이리이다." 그러나 다윗은 본문 11절에서 "사울의 머리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다윗은 사울의 신복인 아브넬에게 외쳤습니다.
본문 15절입니다.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중에 너같은 자가 누구냐. 그런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고 외쳤습니다. 16절에 "왕의 창과 왕의 머리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는가 보라" 그러면서 창과 물병을 흔들어 보인 것입니다. 사무엘상 24장 5절에 "사울의 옷자락 벰을 인하여 다윗의 마음이 찔려"라고 했습니다. 왜 사울의 옷자락 하나 벤 것 때문에 다윗의 마음이 괴로웠을까요? 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하고 창과 물병만 취했을까요? 그 답은 사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스리는 살인죄이기 때문이고, 왕의 잘못은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처리하실 것이기 때문이며 사울은 하나님께서 그 머리에 기름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종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울은 사무엘상 24장 17절에 다윗에게 이르되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라고 했습니다. 언뜻보면 사울이 회개한 것 같으나 사울이 다윗을 계속 추격한 것을 보면 회개가 아닙니다. 물론 뉘우치기는 했습니다. 잠간 눈시울을 적셨을 뿐입니다. 많은 성도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나 회개했노라고 말하지만 회만 하지 개는 하지 아니하는 성도가 많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잘못했으니 내 행동을 바꿔야지하고 뉘우치고 가슴을 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미 잘못된 행동을 온전히 바꾸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짓는 잘못된 행동의 변화는 어렵습니다. 참된 회개는 180도의 행동의 전환을 뜻합니다.
'열중셔!나 앞으로 가! 아니고 뒤로 돌아가!' 이것이 회개라는 것입니다. 서울행 열차를 타야 할 사람이 부산행 열차를 탓을 경우 어찌해야 합니까? 아무리 뉘어쳐도 기차는 여전히 부산으로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는 아이 보고 '얘야 과자 먹어라' 자리를 잡지 못한 할머니를 보고 '여기 앉으세요'하고 선한 일을 할지라도 여전히 기차는 부산으로 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음 정거장에서 부산가는 열차에서 내리고 서울행 기차로 갈아타야 합니다. 그래야만 서울로 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들마다 좋은 교회를 원합니다. 그러나 좋은 교회가 따로 없습니다. 건물이 번드르르하면 좋은 교회인가요? 아닙니다. 좋은 성도가 좋은 교회를 만듭니다. 한 성도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먼저 좋은 교회 찾기를 시작했습니다. 등록하고 1년 쯤 지난 어느날 '더 좋은 교회가 있어'라는 속삭이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살짝이 옮겨갔습니다. 정말로 프로그램도 좋고 성도들이 상냥하고 친절했습니다. 그런데 7개월 쯤 지난 어느날 또 귓속말로 '아무개가 좋은 교회야' 하니까 또 옮겨갔습니다. 대채적으로 성도의 귀는 얇은 가 봅니다. 그런데 1년 반쯤 지난 어느날입니다. '저 교회가 좋다고 또 속삭거렸습니다' 그는 20년동안 18번이나 교회를 옮겼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정말로 좋은 교회가 있다고 아무개가 속삭인지라 어떤 교회인가하고 찾아 봤더니 20년전에 맨 처음에 등록했던 교회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좋은 성도 되면 교회는 절로 좋은 교회가 됩니다. 좋은 성도가 좋은 교회를 만들고 나쁜 성도가 나쁜 교회를 만듭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도인 내가 교회의 작은 손가락이요, 교회의 작은 발가락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좋은 교회되기를 염원합니까? 그렇다면 먼저 내가 좋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때문에 내가 먼저 회개해야 합니다. 내가 사울같은 성도되지 아니하고 다윗같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형제를 한번도 미워하지 마십시다. 그리고 형제를 서로서로 사랑하십시다. 우리 서로가 좋은 성도가 되어 좋은 교회를 만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악을 선으로 갚았습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없어서는 소중한 신하였습니다. 사울이 악신 때문에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고 수금을 타서 악신을 물러가게 했습니다. 블레셋 장군 골리앗 앞에서 사울이 위기를 당하고 조롱을 당하고 있을 때 다윗은 물맷돌로 골리앗을 넘어뜨리고 결국은 사울에게 승리가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때 백성들은 외치기를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때에 사울은 다윗을 시기하여 그를 죽이려했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실패하고 실패했으나 계속해서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 하지 않았습니까! 사울은 선을 악으로 갚으려 했습니다. 생각하면 배은망덕한 사울입니다. 하나님은 배은망덕을 싫어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을 떠난 것입니다. 세상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선을 선으로 갚고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사람이요. 또 하나는 선을 악으로 갚으려 하는 사람인데 이는 사울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는 악을 선으로 갚으려는 사람인데 이는 다윗같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는 물어야 합니다. 나는 선을 악으로 갚는 사람인가? 나는 악을 선으로 갚는 사람인가?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원수를 사랑하며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오직 원수를 사랑하라. 그를 위하여 기도하라. 얼마나 귀한 복음입니까! 이는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아마 다윗은 이 말씀을 암송했을는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도 우리의 삶의 밭에다가 미움의 잡초를 뽑아버리고 사랑의 꽃나무를 심어야 할 것입니다. 왜 성경은 우리에게 악을 선을 바꾸라고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갚아 주시기 때문이요 결국은 선이 악을 이기기 때문이며 하나님께서 선행을 기억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사울이 말했습니다. 사무엘상 24장 19절에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 왜 다윗이 사울을 죽이지 아니했습니까? 사울이 왕이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 죄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믿음이 있으면 선을 악으로 갚지 않습니다. 도리어 악을 선으로 갚는다는 말입니다. 사무엘상 2장 3절을 보면 하나님을 설명하신 말씀이 있는데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 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저울에다가 달으시는 분이십니다. 여기서 달아본다는 말은 하나, 둘, 셋 세어본다는 말이요.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다니엘 5장 25절에 보면 바벨론 왕궁에 갑자기 글씨가 나타났습니다.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이라는 글자입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벽에다 쓰신 글자입니다. 바벨론 왕국이 유다를 침공했을 때, 빼앗은 성전 기명들로 술을 담아 마시는 그 벽에 나타낸 글자, 이것은 멸망을 의미하는 하나님의 적보였습니다. 그 뜻을 풀이해보면 '메네 메네'는 '세어보고 또 세어보아도'의 뜻이요 '데겔'은 '저울에 달아보고 또 달아보아도'의 뜻이며 '우바르신'은 '너는 모자라고 또 모자라서 내가 너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겠노라'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 믿음은 자기가 자기를 주의 이름으로 저울에다 달아보는 일입니다. 저울에 달아서 모자람이 없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회인가? 시험인가?
삼상 26장 1~25절 / 한대근목사
다윗은 사울에게 복수할 수 있는 기회에서 사울을 해치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여기에는 사울과는 다른 다윗만의 분명한 행동의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살았습니다. 모든 일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는 함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동이 올바른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하며 행동했습니다. 그 결과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은 기회가 아니라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모든 조건과 환경이 자기 쪽에 유리하고, 하나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 될 그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의 행동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수 있을 것인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일인지를 깊이 생각하며 행동해야 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시험의 순간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법으로만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게 행동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중심의 절대적 가치관(9,10).
다윗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관, 변하지 않는 진리를 붙잡고 살았습니다. ①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에게는 결코 손을 댈 수 없다는 것입니다. ②생명의 주관자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이 사울을 죽이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친히 그를 다루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③결코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기준이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변할 수 없고, 흔들 수 없는 절대 가치관을 품고 살았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더 이상 절대 진리를 신뢰하지 않는 시대에서, 사람들이 정한 헛되고 공허한 기준에 의해서 표류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가치에 따라 신앙이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의 욕망과 편안함에 신앙의 지조를 팔아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계시하는 진리에 관한 한 타협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절대 타협할 수도 없고 또 타협해서는 안 되는,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표준, 절대적인 가치관에 대한 분명한 확신으로 표류하는 세상을 구원해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신뢰(24)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절대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생명을 반드시 지켜주실 것을 믿었기에 사울을 죽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수많은 위기의 순간들을 맞이할 때마다 다윗을 보호하셨고, 다윗은 그 하나님을 철저하게 신뢰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현실 속에서 손쉽게 타협이 이루어지고,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서지 못하는 까닭은 바로 우리 앞에 버티고 서 있는 세상의 권세, 세상의 즐거움, 세상의 유익들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커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기죽게 만드는 세상의 것들에 의해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절대적인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 온 천지를 창조하시고 한치의 오차도 없이 우주의 역사를 운행하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신뢰하고 의지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의 상황을 바꾸어 주시고, 우리의 기도에 능력으로 응답하실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하나님 말씀 중심의 가치관을 품고,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음으로 따르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그 어떤 시험에서 무너지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로 인정받게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두 자아 사이에서
이정선목사(타우랑가한인교회) / 삼상 26:6-12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속내를 비치지 않으면 누구도 알기 어렵다는 뜻이지만, 또 그만큼 인간의 심리라는 것이 복잡하고 난해하다는 의미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여자들에 비하면 남자들은 좀 단순한 편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쓸데없는 오해와 갈등이 많이 생겨나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존재입니다. 인간에게는 자기혐오라는 현상이 발견됩니다. 자기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예요. 자신에게 실망도 합니다. 자기가 선택하고 했던 것을 자기가 싫어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두 개의 자아가 싸우기도 합니다. 마치 한 사람 안에 두 개의 서로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것과 같은 현상입니다. 심지어는 다중인격이라는 정신장애도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복잡한 존재입니다.
사람을 평가할 때 ‘예측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평가처럼 나쁜 평가가 없습니다. 럭비공 같은 사람이지요. 우리가 축구나 족구를 할 때는 공이 어디로 튈지 예상할 수 있기 때문에 그에 맞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종종 바닥이 평평하지 않아서 공이 예상했던 것과 다르게 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책이 없지요. 럭비공은 원래 그런 공입니다. 어디로 튈지 예상 자체가 안 됩니다. 사람이 그런 식으로 행동한다면 그런 사람과 같이 일한다거나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겠어요?
제가 가장 황당하게 생각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은혜를 많이 받았다고 고백하고 간증을 합니다. 눈물을 펑펑 쏟으며 회개도 합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변화된 행동이나 모습이 예상되고 기대되잖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언제 그런 은혜를 체험했나 할 정도로 변한 것이 없어요. 은혜 받은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안에 또 다른 은혜 받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 같아요. 전혀 다른 두 인격이 있는 것 같단 말이에요. 은혜 받은 척하지를 말든가. 도대체 인간이라는 게 어떤 존재란 말입니까? 그래서 저는 그렇게 요란하게 은혜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별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사울에게서 그런 모습을 봅니다. 24장에서 사울이 정예부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러 왔었습니다. 사울의 목적은 다윗을 죽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견 즉시 사살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겠지요. 그런데 오히려 사울의 목숨이 다윗의 손아귀에 들어왔습니다. 다윗으로서는 이 모든 괴로움을 끝낼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는 사울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광야에서 게릴라로 살게 되었습니다.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만으로도 다윗에게는 사울을 죽여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마음 약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정이 많아서 그런 것도 아니에요. 사울을 불쌍히 여긴 것도 아닙니다.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자기 손으로 끝내지 않은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비록 사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지만, 그가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하다가 오히려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는데, 다윗이 그를 살려주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소리를 높여 울면서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 다윗아, 나는 너를 학대하되 너는 나를 선대하니 너는 나보다 의롭도다. 네가 오늘 내게 한 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24:17,19). 오죽하면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안다’(24:20)고까지 말했겠습니까?
다윗에게 죄가 없다는 것은 누구보다 사울 자신이 잘 압니다. 그 죄 없는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한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도 잘 알아요. 그래도 다윗을 죽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자기를 죽일 수 있었지만 그냥 살려주었다는 것을 알고 나니 다윗에게 너무 미안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영이 함께하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할수록 오히려 자기 목숨이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다윗에게 자기 후손을 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까지 했다는 것은 다윗의 승리를 인정했다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더 이상 다윗을 추격하지 않고 돌아갔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했으니 이제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는 일은 다시 일어나지 않을 것 같지요? 만약에 사울이 또 다윗을 죽이겠다고 나서면 인간도 아닙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했다가 오히려 다윗이 살려줘서 살아나온 사람이 어떻게 또 그런 생각을 한단 말입니까? 다윗 앞에서 펑펑 눈물을 쏟으며 죽이려고 해서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하던 사람이 어떻게 또 다윗을 죽이려고 출동한다는 말입니까? 그런데 26장에서 24장과 똑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는 사건인지, 심지어 어떤 학자들은 24장과 26장을 하나의 사건으로 보기까지 합니다. 한 번 일어난 사건인데 성경을 편집한 사람들이 두 번 기록을 한 것이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해가 되겠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사울이 이해가 안 되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십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어 있다는 제보를 받은 사울은 이스라엘의 최정예부대 삼천 명을 이끌고 다윗을 잡으려고 출동합니다. 다윗도 사울이 군대를 거느리고 왔다는 정보를 접하고 사울의 군대가 진을 친 곳에 와보았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잡으러 왔는데, 다윗은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고 오히려 사울의 군대를 구경하러 왔단 말이에요. 이제 더 이상 사울은 두려운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큰 적은 두려움입니다. 개가 큰소리로 짖는 것은 자기가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개 짖는 소리에 겁을 집어먹고 도망을 치면 개가 쫓아옵니다.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도 마찬가지에요. 두려움을 가지고 있으면 마귀가 한없이 무섭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없어지면 마귀는 사실 별것 아니에요.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마귀를 대적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대적하면 마귀는 도망가게 되어 있어요(약 4:7).
다윗이 산 위에서 내려다보니 사울의 군대가 진을 치고 한가운데 사울의 텐트가 있습니다. 사울을 중심으로 삼천 명의 최정예 부대가 둘러싸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의 신변이 이보다 든든하고 안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안심하고 편안하게 잠을 잘 수가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날 밤 사울은 전혀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부하 두 사람에게 말합니다. ‘누가 나와 함께 사울에게 가겠느냐?’ 다윗이 마치 경호원처럼 데리고 다니는 두 사람이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하나는 헷 사람 아히멜렉이고, 또 하나는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입니다. 스루야는 다윗의 누나예요. 그러니까 요압과 아비새는 다윗의 조카들입니다. 요압은 나중에 다윗 정부에서 군대장관이 됩니다. 아비새는 용맹하기로 이름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비새는 다윗의 가장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윗이 데리고 온 또 한 사람이 헷 사람 아히멜렉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도 아비새처럼 다윗의 최측근이라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헷 사람이에요. 다른 민족 출신인 것입니다. 헷 사람은 히타이트 족인데, 최초로 철기문화를 이룩한 사람들입니다. 다윗의 측근 가운데 또 하나의 헷 사람은 우리아입니다. 이민족 출신이 다윗의 군대에서 두 사람이나 중책을 맡고 있었다는 것은 흔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 아히멜렉이 우리아와 동일인물일 것이라고 추정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헷 사람 아히멜렉과 조카 아비새에게 누가 자기와 함께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가운데로 내려가서 사울에게까지 가겠느냐고 묻습니다. 사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목숨을 내놓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아히멜렉과 아비새는 둘 다 다윗과 함께 목숨을 나눌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뜻입니다. 둘 중에서 아비새가 가기로 했습니다. 두 사람이 사울의 삼천 정예부대의 진영 안으로 살그머니 잠입합니다. 삼천 명이 누워 자는 곳을 지나려면 시간도 적지 않게 걸릴 것이고, 걸리적거리는 것도 많을 것입니다. 만약에 중간에 발각이라도 된다면 살아나오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과 아비새는 들키지 않고 마침내 사울이 자는 곳까지 이르렀습니다.
사울이 세상모르고 자고 있습니다. 이제 게임은 끝났습니다. 아비새의 말이 맞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사울은 왕이고 다윗은 도망자입니다. 왕이 도망자를 잡으려고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런데 그 도망자가 내려다보는 앞에서 왕이 아무것도 모르고 자고 있단 말이에요. 사울은 그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고 이 작전을 수행중이겠지요. 이번에는 기어이 이 골치 아픈 다윗을 잡아 죽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왔을 것입니다. 다윗의 목숨은 곧 사울의 손에 들어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사울의 목숨이 또 다윗의 손에 들어왔습니다. 아비새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사울을 다윗에게 넘기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넘기신다는데, 사울의 삼천이나 되는 정예부대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왕을 겹겹이 둘러싸고 진을 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들어왔다가 떠날 때까지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했고, 잠이 깬 사람도 하나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삼천이 아니라 삼천만이 지켜도 하나님이 지키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안전하지 않습니다. 솔로몬도 이런 시를 지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시 127:1).
군대나 권력이나 돈이 우리를 보호하지 못합니다. 그것들을 겹겹이 쌓아 놓고 나는 안전하다고 생각한다면 이 가련한 사울과 같은 사람입니다. 아비새가 말합니다.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왕이라 해도, 최정예부대의 호위를 받는 왕이라 해도, 두 번 찌를 것도 없는 아비새의 창에 찔려 한순간에 땅에 꽂히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에 사울은 무슨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악몽을 꾸고 있었을까요, 행복한 꿈을 꾸고 있었을까요? 어쩌면 어린 시절 고향에서 동무들과 뛰어노는 꿈을 꾸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 인생이 꼭 이와 같지 않아요? 우리 머리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르는 채 우리 인생을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살아갑니다. 한 푼이라도 더 벌려고 악착같이 일하기도 하고,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기도 합니다. 우아하게 모양을 내고 고상한 척 품위를 지키며 인생을 즐기기도 합니다. 예수님은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었다’(마 24:38)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모래성을 멋지게 쌓아도 파도가 밀려오면 한순간에 쓸어버리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렇게 의미 없는 모래성을 쌓는 인생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인생은 그렇게 허무한 모래성 같은 인생입니다. 얼마 전에 애플의 스티브 잡스가 죽었습니다. 정말 대단한 천재인데 아깝게도 56세의 나이로 일찍 죽었어요. 그에게 쏟아지던 찬사와 그가 이룩한 업적들이 그를 구원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아무리 많은 돈을 쌓아놓았어도, 또 아무리 그의 능력이 탁월했어도, 그것들이 그를 보호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암 치료를 위해 자신의 DNA 염기서열까지 파악했습니다. 세계에서 자신의 DNA 염기서열을 아는 사람은 20명밖에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가 가진 모든 재능과 자원을 가지고 죽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성공하지 못했어요. 그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이 땅에서의 모든 성공과 성취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들이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스티브 잡스는 선불교에 심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불교 신앙이 영원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비즈니스를 위한 영감을 얻기 위한 것이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결국 하나님 없는 인생을 살다가 허무하게 죽었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이 단번에 창으로 사울을 땅에 꽂아버리겠다는 아비새의 요청에 다윗은 다시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죽일 수 없다며 만류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사울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지 않았고 교만하게 변하면서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했는데, 끝까지 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갈수록 상태가 더 나빠졌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를 치실 것입니다. 사울은 존경받을 대상이 전혀 못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를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으로 최대한 존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윗의 훌륭한 점입니다. 그만큼 다윗이 하나님을 경외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울을 죽이지 않고 왕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다시 나왔습니다. 그리고 건너편 산 위에 올라가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불러 깨웁니다. ‘네가 용사가 아니냐? 그런데도 왜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누군가가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는데 너는 그것을 막지 못했으니 죽어 마땅하다. 왕의 창과 물병이 어디 있는가 봐라.’ 사울이 듣고 보니 다윗이거든요. 다윗의 말을 듣고 사울이 말합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21절). 이제야 사울이 좀 바른 소리를 하는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해서 다윗을 잡으려는 사울의 두 번째 군사작전도 사울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사울 안에는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는 인격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또한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인격도 있었습니다. 불타는 증오와 분노에 사로잡혀 다윗을 잡으러 왔다가 다윗의 인격과 성품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자기 잘못을 고백합니다. 이 두 인격 사이에서 사울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할 것입니까?
한 늙은 체로키 인디언이 사람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투에 대해 손자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그 전투는 우리 모두 안에 있는 두 늑대들 사이의 전투란다. 한 마리는 악(Evil)이다. 그것은 분노, 질투, 시기, 슬픔, 후회, 탐욕, 오만, 자기 연민, 죄책감, 분노, 열등감, 거짓말, 거짓된 자만, 우월감, 그리고 자아란다. 다른 놈은 선(Good)이다. 그것은 기쁨, 평화, 사랑, 희망, 평온, 겸손, 친절, 자비, 공감, 관대, 진실, 애정, 그리고 믿음이란다.’ 손자가 잠시 생각하더니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어떤 늑대가 이기나요?’ 그 늙은 체로키 인디언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밥을 주는 녀석이지.’
만일 사울이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아에게 밥을 주었더라면 그렇게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하지 않았겠지요. 그러나 그는 다윗을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아에게 밥을 주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 결과 다윗을 사랑하고 아끼는 자아는 늘 굶어서 힘이 없으니 다윗을 시기하는 자아와 싸워서 이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도 서로 다른 자아와 가치가 충돌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어떤 자아와 가치에 우리가 힘을 실어주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고 했습니다. 내 안에서 내가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인격과 삶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실존입니다. 악하고 추한 나의 자아는 날마다 작아지고 거룩한 주님의 마음은 날마다 많아져서, 주님을 닮아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이성우목사(왜관감리교회) / 삼상 26:6~12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단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의 기회를 정말 성공적으로,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왜 모든 사람들이 성공적인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지 못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그런 인생이 될 수 있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인생을 꿈꾸면서도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잘못된 조건과 잘못된 방법을 좇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즈음 사람들이 많이 사용하고 있는 스마트 폰은 아주 다양한 기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스마트 폰의 다양한 기능들을 자신에게 꼭 필요한 대로 정말 잘 사용하기 위해서는 그 폰의 환경설정을 자기 나름대로의 조건으로 설정해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자신이 원하는 최적의 상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네 인생도 성공하는 인생, 행복한 인생이 되려면 거기에 적합한 환경을 설정해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정말로 성공적인 인생,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이고도 가장 중요한 환경은 어떤 조건으로 설정해야 하는 걸까요? 중요한 것은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디에서 찾느냐 하는 것인데,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늘 말씀의 제목처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손에 들려주신 놀라운 은혜의 선물인 성경 66권은 온통 이 하나의 사실을 일깨워 주고 있는 내용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인간들이 이 세상에서 정말 행복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아갈 뿐만 아니라 그런 행복한 인생을 하나님 나라에서까지 영원토록 누릴 수 있기를 원하셔서 그런 삶을 위한 분명한 조건과 방법을 성경 속의 다양한 내용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 해 주고 있음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성경 속에 등장하는 다양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시고자 하시는 삶의 두 가지 모습, 곧 행복한 삶과 불행한 삶을 각각 자신들의 세대 속에서, 그리고 자신들이 처한 다양한 상황 속에서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삶은 그 시대 상황이 다르고, 그들에게 주어진 삶의 상황은 다르지만 계속해서 하나의 반복적인 메시지를 성경을 읽고,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에게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게 되기를 원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성경이 반복적으로 증거하고 있는 하나의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누가 행복한 인생의 주인공이 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과 거기에 대한 답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두 가지 삶의 모습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과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 사실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성경이 바로 시편 1편의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의 ‘시편’은 150편의 ‘신앙고백적인 시’의 형태로 되어 있는 말씀들인데, 이 모든 시편의 말씀들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배경으로 기록된 말씀들입니다. 그 중에서 맨 처음 시작하는 시편 1편의 말씀은 시편 전체의 말씀들을 마치 요약해 놓은 것과 같은 느낌을 느끼게 만들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편 1편은 ‘복 있는 사람’ 곧 행복한 사람과 ‘악인’ 곧 불행한 사람의 삶과 그 삶의 결말을 대조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우선 1절에서 시인은 ‘복 있는 사람의 삶’을 이렇게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쉬운 성경’으로 한번 읽어 보겠습니다. “행복한 사람은 나쁜 사람들의 꼬임에 따라가지 않는 사람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죄인들이 가는 길에 함께 서지 않으며, 빈정대는 사람들과 함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은 과연 어떤 삶일까요? 자신의 삶의 원리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삶을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가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악한 말로 조롱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여 끊임없이 사랑을 고백하며 살아가는 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2절 말씀대로 “여호와의 가르침을 즐거워하고, 밤낮으로 그 가르침을 깊이 생각하는 자”로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면, 하나님은 그의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한 가지 사실을 집요하게 요구하고 계신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이렇습니다. ‘결코 나누어지지 않은 마음과 자신의 의지를 다 담고 할 수 있는 힘을 다 동원하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 예수님은 마태복음 22장 37~38절에서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요한복음 14장 21절 말씀에서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고 말씀하심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무엘상 26장 6~12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다윗의 삶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본문 말씀이 포함되어 있는 사무엘상 26장의 말씀은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다윗에게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사과를 했던 사울 왕이 다시금 십 사람들의 밀고에 따라서 다윗을 죽이려고 재차 추격하는 과정에서 다윗이 또 다시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그를 죽이지 않고 선대하는 내용과 함께 거기에 대한 사울 왕의 두 번째 사과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본장의 표면적인 내용은 앞서 말씀드린 것과 같습니다만 핵심적인 내용은 사울 왕과 다윗 두 사람의 대조적인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삶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의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인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의 삶을 보여주고 있는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한 맹세까지도 우습게 여기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고자 하는 인간적인 욕심에서 자신의 생명을 살려주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름 부은 자인 다윗을 죽이고자 혈안이 되어서 계속해서 발버둥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 왕의 모습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들의 삶의 단면을 찾아볼 수 있게 되는데, 그것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우습게 여기며, 하나님의 영역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묵살하면서 오로지 자신의 욕심에 눈이 어두워져 그것만 좇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속이는 진실함이 없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울 왕의 삶의 결과에 대해서 본장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이런 사울 왕의 종말이 어떠할 것인가는 누구라도 금방 짐작할 수 있도록 본장은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러한 사울 왕의 삶과는 대조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다윗의 삶은 어떤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우선 자신의 생명을 죽이고자 하는 사람의 생명을 살려주는 신앙적인 탁월함을 지니고 있으며,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세상 사람들의 시각으로 보기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순전한 삶, 곧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권한과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겨 드리는 위임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결코 범하지 않으려고 하는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상황에 이끌려서 소위 합리적인 생각이라고 여겨지는 판단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흔들리지 않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울 왕을 죽인다고 해도 누구 하나 다윗을 정죄하지 않을 상황처럼 보이는 상황에서 부하의 말을 듣고 행동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다윗의 믿음을 본문은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감동을 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로서의 삶의 좋은 모범을 보여주고 있는 다윗의 이러한 삶은 어디에 기초하고 있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본장 23절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올바르게 행동하며 하나님께 끝까지 충성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상급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분명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은 세상적인 보상을 바라고 다윗의 은신처를 사울 왕에게 밀고했던 십 사람들처럼 세상적인 보상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급을 최상의 가치로 여기는 신앙고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삶의 결과에 대해서 본장은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고 있지만 이런 다윗의 삶이 어떠했겠는가 하는 것은 누구라도 금방 짐작할 수 있도록 본장은 여운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데, 특히 본문 12절 말씀이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은 사울 왕과 다윗 두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의 삶을 본받아서 그 뒤를 따라가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십니까?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어떤 여건 속에서도 순종하는 것임을 명심하고 이 기준에 따라서 여러분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 맞는지를 스스로가 한번 진단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에게는 소망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왜냐하면 시편 91편 14~16절까지의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증거 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14)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15)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그들이 환난 당할 때에 내가 그와 함께 하여 그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16) 내가 그를 장수하게 함으로 그를 만족하게 하며 나의 구원을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도다.”
다윗의 믿음의 언어
이선영목사 / 삼상 26:7-12
1. 한국 가수 중에 <이적>이라는 분이 “말하는 대로” 라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가 직접 만든 노래입니다. 자신이 말하는 대로, 마음 먹은 대로, 할 수 있다는 그런 노래입니다. 자신이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말하는 노래입니다.
“나 스무살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때면/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걱정을 했지/ 두 눈을 감아도 통 잠은 안 오고/ 가슴은 아프도록 답답할때/ 난 왜 안 되지 왜 난 안 되지 되뇌었지/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다곤 믿지 않았지/ 믿을 수 없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건 거짓말 같았지/ 고개를 저었지/
그러던 어느 날 내 맘에 찾아온/ 작지만 놀라운 깨달음이/ 내일 뭘 할지 내일 뭘 할지 꿈꾸게 했지/ 사실은 한번도 미친 듯 그렇게/ 달려든 적이 없었다는 것을/ 생각해 봤지 일으켜 세웠지 내 자신을/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였지”
내일 뭐하지 하면 내일 할 것이 없어보이지만, 내일 뭘해야지 하면, 그렇게 말한대로 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게 됩니다.
2. 내가 말하는 대로 되어진다는 것은 성경의 원리입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아담을 만드신 후에 제일 처음으로 시킨 일이 각종 짐승과 각종 새들의 이름을 짓게 한 일입니다.
창2:19,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무엇이라고 부르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가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부르는 것이 곧 그 이름이 되었더라.”
아담이 말하는 대로, 마음의 생각대로 이름을 붙인 것이 곧 그들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마치 너는 순하게 생겼으니 ‘순둥이’라 하고, 너는 막내로 태어났으니 ‘말순이’라고 하고, 너는 물이 많으면서 호박처럼 생겼으니 ‘수박’이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즉 하나님은 우리의 말에 그만큼 권능을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말씀하신대로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빛이 있으라 하매 빛이 있었습니다.
3. 성경에는 말을 그렇게 하므로 그 말로 인하여 놀라운 일들이 일어난 사건들이 많이 있습니다.
(1) 백부장은 “내 신하들도 오라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니, 주께서 말씀만 하시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스라엘에서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했다”고 하시면서 “너의 믿음대로 될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2) 베드로가 밤새워 그물을 내렸지만 전혀 고기를 잡지 못하였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깊은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베드로가 “말씀을 그리하시니 내가 따르겠습니다” 하고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렸습니다. 말씀처럼 엄청난 고기를 잡았습니다.
(3) 나중에 예수님께서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었을 때,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라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렇게 말하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놀라운 천복을 내려주십니다. 이것을 알게 한 것은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라” 하였습니다.
너의 이름을 베드로라 부를 것이고,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습니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천국 열쇠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는 고백을 베드로의 신앙고백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신앙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그런 믿음을 그 마음에 담아주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4. 다윗의 이야기를 통하여 좀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다윗은 본격적으로 도망다니게 됩니다. 사울왕이 집요하게 다윗을 잡아 죽이려 합니다. 심지어 군사들을 삼천명씩이나 동원하여 이잡듯이 다윗을 잡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 중에도 오히려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습니다.
(1) 한번은 엔게디 광야 들염소 바위 옆의 동굴에 숨었을 때입니다. 다윗과 일행들이 동굴 깊은 곳에 숨었습니다. 그 때 사울 왕이 더위를 피하고, 또 소대변을 보기 위해 동굴 안으로 들어왔습니다.
안에서는 바깥이 보이지만, 밖에서는 안이 캄캄한 것입니다. 사울 왕은 다윗을 볼 수 없었지만, 다윗과 일행은 동굴 입구에 들어온 자가 사울 왕인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이때 다윗이 일행들이 다윗에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지금이야 말로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너무도 강요하기에 다윗은 하다 못해 사울 왕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벱니다.
그 일로 인하여 다윗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24:5-7, “그리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을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2) 두번째는 다윗이 십광야에 숨었을 때입니다.
사울은 삼천 명의 군사들을 데리고 십광야에 이르러 장기전을 펼치고자 사령부를 꾸렸습니다. 그때 다윗이 신하들과 함께 진영을 염탐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사울이 피곤에 지친 나머지 사령부에 누워있었습니다. 그러자 다윗의 신하 중에 아비새가 밤 중에 사울을 죽일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도 도망자의 삶이 너무도 지겨웠던지, 사울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막상 사울을 죽이지는 못합니다. 신하 아비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삼상 26: 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는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그리고 다윗과 일행이 잠들어 있는 사울의 텐트로 들어가서 머리 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옵니다.
5. 충분히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울을 죽이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다윗의 믿음의 언어입니다. 누구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고, 다윗 만이 이 말을 하였습니다.
모세 오경의 율법에도 없는 말입니다. 오로지 다윗 마음 깊은 곳에서 나오는 신앙의 언어입니다. 다윗은 여러번 이 말을 반복하여 말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삼상 24: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24: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26:9,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26:11, “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하고”
26:23,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다윗의 위대한 신앙 중의 하나가 이것입니다.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이다.” 이 말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오직 다윗의 언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6. 성경은 다윗의 이 말을 왜 이토록 강조하는 것일까요? 분명한 2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1) 하나는 사무엘서의 주제를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사무엘서를 시작하면서 말씀드린 것처럼, 사무엘서의 주제는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를 멸시한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는 것은 그가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릅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으신다는 말을 하므로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다윗이었습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하여 이 말을 계속하여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2) 다윗도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임명 받은 것을 귀하게 여기는 다윗인 것입니다.
다윗이 그의 나이 13살 쯤에 사무엘로부터 차기 지도자로 기름부음을 받았습니다. 사무엘이 다윗의 머리에 올리브기름을 부을 때, 다윗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다윗은 “나를 하나님께서 택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나는 내 맘대로 살아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하는구나”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 내 인생의 주인은 내가 아니고, 하나님이시다”는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으면서, 자신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나를 택하신 분도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죽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믿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 믿음이 사울 왕에게도 적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으신 것입니다. 사울의 생명도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울왕의 권한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사울을 죽일 수가 없습니다. 그를 해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의 마음에 저절로 생겨진 하나님의 신앙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고는 결코 생길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7.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우리 자신의 믿음의 언어를 확립시키자는 것입니다. 그 사람하면 그 사람의 믿음의 언어가 생각나는 것입니다.
(1) 백부장이 그런 신앙의 말을 하였던 것처럼, 베드로가 그러한 신앙고백을 하였던 것처럼, 수로보니게 여인이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라는 말을 하였던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신앙의 언어를 주시는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의 언어가 중요한 것은, 이 말을 할 때, 우리는 나의 삶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말 속에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은 이 말을 통하여 나를 사용하시는 것입니다.
(2) 제가 전에 한참 하나님에게 집중하여 살 때, 제 입에서 이런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하나님 없는 것처럼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고, 하나님 없는 것을 행하지 말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신 것을 느끼게 되니 함부로 생각해서도 안되고 말해서도 안되었던 것입니다.
(3) 또 “하나님은 제 인생의 브레이크와 같으신 분이십니다.”고 말하였습니다. 돌아보니 욕심 맡고, 성취욕에 빠져 있는 저를 곁길로 빠지지 않게 하시고, 브레이크를 밟으시면서 차분하게 목회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나님은 나를 참되게 살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나 중심대로 살았을 것입니다. 욕망을 쫓아 살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중심을 붙잡고 살게 해 주셨습니다.” 라고 말하게 하셨습니다.
분명 제가 하는 말이지만, 그 말을 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신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는 어떤 분의 기도의 언어를 듣기 좋아합니다. 그것은 오직 그분의 기도의 말 속에서만 들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그 말을 하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분은 하나님을 생각하면 눈물이 하염없이 흐른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날마다 주님을 만나듯이 대화를 나눈다고 말합니다.
어떤 분은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으면 그제서야 예수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들은 모두 우리를 이기게 하는 말입니다. 우리를 절망에서 희망으로 이끄는 말입니다.
사람의 말이기는 하지만, 그 말 속에는 희망이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는 보배가 있는 것입니다.
8. 저는 성경의 언어 중에서 이것만큼은 최고의 언어라 할 수 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백한 언어입니다. 함께 읽어보실까요?
롬 8:31-39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세상의 잡다한 말에 마음을 빼앗기지 마시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믿음의 언어를 붙잡고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9. 영화배우 신영균 씨는 “나의 관에 성경책 한 권만 넣어달라” 는 말을 남겼습니다. 신앙의 말을 남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링컨의 어머니는 이렇게 유언을 하였습니다. "성경 속에는 부자가 되는 비결, 정치를 잘 하는 비결, 세상 사는 비결이 다 들어 있단다. 성경을 늘 읽으면서 성경대로 살아라"
세계 최고 부자 록펠러는 그의 어머니의 유언을 간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그의 손을 붙잡고 4가지를 유언하고 돌아가셨다고 했습니다.
"평생 주일을 어기지 마라, 십일조를 반드시 드려라, 예배드릴 때에는 꼭 앞자리에 앉거라, 평생 목사의 협조자가 되라."
이런 말이 결코 그냥 하는 말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와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를 통해서 하시는 말씀이실 수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이 네덜란드를 점령하였습니다.
이때 헬리 그래머 목사가 시무하던 교회 교인들이 밤중에 은밀히 목사관에 모여들었습니다. “목사님, 이럴 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러자 그래머 목사가 대답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질문은 내가 누구인지를 대답하면 자연히 결정됩니다 .”
그래서 모여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고백했습니다.
“나는 크리스천입니다”
그레머 목사는 그렇다면 주님이 기뻐하는 일을 하자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하여 그들은 독립자유 운동을 하였고, 네덜란트를 지킬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10. 항상 내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하시는 언어를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십니다.
내 속에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시는 절기이기를 바랍니다.
관계회복을 힘쓰십시오
삼상 26장 8~12절 / 문기태목사
아버지에게 큰 상처를 받고 평생을 괴로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형제들과 갈등을 겪으며 상처를 받는 것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고통스럽습니다. 또 어떤 이는 목회자에게 상처를 받아 큰 충격속에 방황하기도 합니다. 직장에서 상사와의 심각한 갈등을 겪으며 스트레쓰를 감당하기 힘들어 직장을 그만두어야 하나? 고민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에서 갈등을 겪으며 힘들어하기도 하지만 수직적인 관계 즉 상하관계속에서 상처를 받아 힘들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대표적인 실례로 다윗과 사울왕의 관계를 들 수 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불순종한 탓에 자주 악한 영에게 사로잡혀 큰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사울의 신하들이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왕앞에서 악기를 연주하여 악신을 쫓아줄 사람을 찾게 되었고 수금을 잘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다윗을 발견하여 추천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왕이 두통에 시달릴때마다 다윗은 불려가 수금을 타며 찬양하여 악신을 쫓아 사울로 하여금 평안을 얻게 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후 어느날 다윗은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쟁에 나간 형들에게 먹을 것을 가져다 주고 안부를 살피게 되었습니다. 마침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이 하나님의 군대를 조롱하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에는 골리앗과 맞서 싸울 장수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다윗은 의분에 사로잡혀 골리앗과 싸울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고 사울에게 요청하였고 나가 싸워서 거인 골리앗을 단숨에 거꾸러뜨렸습니다. 그래서 사울의 사위가 되어 이스라엘군대의 장군이 되었습니다. 또한 왕궁에서 살며 왕의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하고 왕자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다윗은 흥분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전장에 나아가 큰 공을 세워 장수가 되었고 왕의 사위가 되었으며 왕자 요나단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전장에서는 승승장구했으며 왕에게 신임을 받고 모든 신하들과 백성들도 모두 그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이 늘 함께하여 이제는 탄탄대로가 그앞에 활짝 열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날 전쟁에서 크게 이기고 돌아오는데 이스라엘의 여인들이 다윗을 맞이하러 나와서 춤추며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그 노래를 들은 사울은 크게 질투하고 격분하며 다윗을 미워했습니다. 다윗을 죽일 결심을 하고 다윗이 수금을 타며 연주에 집중할 때 창을 던져 죽이려고 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왕이 여러 번 죽이려는 시도가 반복되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달아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왕으로부터 몸을 숨길만한 곳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광야로 달아나게 되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 다윗은 의문에 휩싸였을 것입니다. 다윗은 왕궁에서 호화롭게 지내며 왕의 식탁에서 좋은 음식을 먹으며 왕자같은 대접을 받다가 하루 아침에 쫓겨나 도망자가 되었습니다. 습한 동굴에서 박한 음식을 겨우 먹으며 짐승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시중드는 사람도 없고 백성들의 환호도 사라졌습니다. 더구나 그의 아내는 다른 사람에게 강제로 시집보내졌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기름을 부으시고 여기까지 믿음을 드러내며 충성을 다했는데 왜 이런 위기가 온다는 말인가?' 회의가 솟아났을 것입니다.
놉이라는 성읍의 제사장들이 다윗이 사울을 피해 도주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왕명을 수행중인 것으로 여기고 다윗에게 먹을 것과 골리앗의 칼을 내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격분하여 제사장 85명을 죽였습니다. 놉성읍에 거하는 모든 남자와 여자, 아이들과 가축까지 다 죽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자신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되었음에 몹시 고통스러워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습니다. 사울의 광기는 더해갔고 다윗을 죽이려고 최정예 군사 삼천 명을 이끌고 광야를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어제까지 다윗을 따르던 군사들이 오늘은 다윗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찾고 있습니다.
사울은 엔게디 광야에 다윗이 숨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추격의 고삐를 바짝 당겼습니다. 사울이 홀로 어느 동굴에 들어가 휴식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뒤에 다윗이 숨어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죽이지 않고 사울의 겉옷 자락을 잘라서 살며시 자리를 떴습니다. 그리고는 사울과 상당한 거리가 떨어졌을 때 사울에게 소리쳤습니다.
(삼상 24:11) '나의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자락만 베었은즉 나의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다윗은 사울에게 '내 아버지여'라고 불렀습니다. 당신은 나를 원수처럼 여기고 죽이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당신을 아버지처럼 존중한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많은 젊은이들이 자신을 가르쳐주고 사랑해주고 지지해주며 용기를 북돋아 줄 아버지를 찾아 헤멥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아버지라는 존재를 잃어버렸습니다. 사울과 마찬가지로 많은 지도자들이 가정에서 일터에서 그리고 교회에서 그 자녀들에게, 따르는 자들에게 아버지의 사랑을 부어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신의 관심사에만 매달릴 뿐 아버지의 사랑에 목말라하는 어린이, 청소년, 젊은이들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말과 행동으로 해치며 상처를 크게 입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가장 사랑받아야 할 대상에게 외면당하고 버림받으며 큰 상처를 입고 방황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사울도 다윗이 자기에게 위협이 된다고 생각하기 전에는 다윗을 사랑하고 다윗의 성공을 즐거워했습니다. 다윗을 자기곁에 두며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려 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여인들의 노래를 들으며 다윗에게 위협을 느꼈습니다. 사울에게 비교의식이 발동하자 사랑은 사라져버렸습니다. 열등감이 솟아나자 다윗이 충성스런 동역자가 아니라 제거해야 할 원수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다윗은 순수하게 사울을 따르며 충성을 다하고자 했는데 사울은 그런 다윗의 충성심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미워하며 거부하고 해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사울을 똑같이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똑같이 원수처럼 여기고 해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오해하는 사울이 안타까와서 그의 몸을 베지 않고 옷자락만 베었습니다. 그것으로 자신의 사랑과 충성을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우리는 주변에서 아버지에게 또는 지도자에게 거부당하고 상처입은 사람들이 비난하는 말들을 자주 듣게 됩니다. 오늘 우리 시대에는 윗사람에 대하여 원망하는 말들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원수로 갚은 사울과 같은 윗사람이 오늘도 많기 때문일까요? 자신을 위기에서 건져준 다윗을 해치려고까지 하는 사울같은 윗사람을 만났기 때문일까요? 이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기대가 빗나갔기 때문에, 무심코 던진 말 한마디가 거슬리고 상처가 되었기 때문에 원수처럼 여기고 갈등을 빚는 경우도 많습니다.
비난하고 싶고 원망하고 싶으며 미워하고 싶을 때 우리는 다윗의 태도를 본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나를 미워하는 상대방의 오해를 벗기려고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나는 결코 당신을 해칠 마음이 없다.' '당신이 나를 오해하고 미워하지만 나는 당신을 사랑하고 충성을 다하겠다.'하며 그 마음을 능동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갈등을 극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열쇠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자신을 죽일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않은 것을 보고 다윗의 선한 마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래서 군사들을 데리고 왕궁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윗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제 왕은 나에 대한 마음을 바꾸시겠지! 내 마음을 확실히 아셨으니 나를 전처럼 대하게 될거야. 나를 죽이려는 마음을 거두고 나를 다시 신임하고 지위를 회복시켜줄거야.'
하지만 다윗의 생각은 완전히 빗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울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다윗을 쫓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자극할만한 일을 한 것이 없습니다. 다윗의 무리가 사울에게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안간힘을 쓸때 다윗은 얼마나 낙심이 되엇을까요? 자신이 목숨을 걸고 충성된 마음을 보였는데 왕은 그런 다윗의 마음을 알면서도 미워하는 마음을 바꾸지 않고 또 해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거부당한 느낌에 얼마나 섭섭하였을까요?
이정도가 되면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고 사랑이 증오로 바뀌어 복수할 방법을 찾는데 열을 올릴만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다윗은 여전히 충성된 마음을 변치 않습니다. 다윗은 아비새를 데리고 사울의 진영에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두 잠들게 하셨으므로 발각되지 않고 모든 군인들을 통과하여 사울이 잠든 곳까지 다가갔습니다. 아비새가 간청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28)"
아비새는 다윗이 당연히 허락할 줄 알았습니다. 사울왕은 다윗을 죽이려고 여러번 시도했습니다. 지금도 오직 다윗을 죽이려는 목적으로 군대를 이끌고 나온 것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 일찌기 사무엘을 통해 다윗에게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을 부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모두 깊이 잠들게 하여 절호의 기회를 주셨으니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 죽을 날이 이르거나 혹 전장에 들어가서 망하리라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 너는 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 (9-11)" 죽이지 말고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와 다시 해치려는 마음이 없음을 보였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복수하는 것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직접 복수하는 것을 죄라고 믿었습니다. 우리가 상처를 받았다고 직접 복수하려고 하면 함께 망합니다. 다윗이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것은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울을 심판하기 위해 블레셋 사람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블레셋과의 전쟁이 일어나고 사울의 집을 전장터에서 패배하고 망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춤추며 기뻐하지 않았습니다.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가를 지어 불렀습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에게 사울의 죽음을 애도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남은 가족들에게 친절을 베풀었습니다.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에게 왕의 식탁에서 함께 먹으며 지내도록 왕자의 신분을 회복시켜주었습니다.
제가 처음 교육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하던 때에 부흥을 위해 정말 열정을 다하였습니다. 맡겨진 학생들과 청년들을 돌보는 일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습니다. 일년만에 청소년들과 청년들이 크게 부흥하고 교회에 활기가 넘쳤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못마땅한 눈으로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재정을 담당하는 집사님이 교회의 어떤 자매와 엮어주려고 하였는데 제 마음에 결혼할 마음도 없어서 거절하였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눈으로 감시하며 트집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뜻대로 되지 않으니 사례비를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신학생이 몇 달째 사례비를 받지 못하니 얼마나 고생이 막심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날 제직회에 재정보고를 하는데 모두 지급한 것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직회가 끝난 후 찾아가 "보고서에는 지출되었는데 저는 받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된 것입니까?" 하였더니 천연덕스럽게 자기가 썼다는 것입니다. 더 기가 막힌 것은 담임목사님께 찾아가 전후 사정을 말씀드렸는데 아무 조치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교인들을 붙잡고 억울한 사정을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눈물을 흘리며 일년만에 교회를 사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 손해와 억울함을 몇 배로 다 갚아 주셨습니다.
몇년전에 교단 총회에 참석하였더니 바로 그 교회 교인들이 피켓을 들고 총회장에 나타나 교회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시위를 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점점 어려워지며 목사님 사례비를 드릴 형편도 되지 못하여 몇 년간 밀리게 되고 목사님은 빚을 끌어다 생활했으니 그 빚을 갚아 주어야 나가겠다고 버티고 있었습니다. 교회 주변에 아파트 단지가 들어오고 그렇게 발전한 지역에 넓은 대지를 소유했으면서도 주변교회는 모두 급속도로 부흥하는데 그 교회는 계속 갈등하며 유일하게 쇠퇴한 교회로 오명을 남기었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부모님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을 사랑하는 지도자에게 충성하는 것은 쉬운 일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에게 큰 상처를 입힌 사람, 여러분을 파멸시키려는 윗사람에게 복수의 칼을 내려놓고 갈등을 넘어 관계 회복을 위해 능동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여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상으로 갚아 주십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다윗이 품은 아름다운 마음을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또 다시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삼상 26:1-12 / 더온누리교회
만약 내가 다윗이라면… 이 생각이 절로 드는 본문이다. 나는 과연 어땠을까? 벌써 두 번째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가 다윗에게 열렸다. 하나님께서 주신 완벽한 상황이다. 이 기회를 잡으면 오랜 도피생활을 마무리할 수 있다. 그런데 다윗은 24장과 동일한 자세를 유지한다.
엔게디 어느 동굴에서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고마워 했던 사울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3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다윗을 추격하기 시작했다. 참 한심하다. 블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지키기 위한 3천의 군사를 자신의 정적을 해치우기 위해 악용하고 있다.
여전히 사울의 눈치를 보는 사람들도 있다. 십 광야의 사람들은 다윗이 숨은 곳을 사울에게 알리고, 사울은 3천명의 군사로 십 광야로 내려가 수색하기에 이른다(1-2절). 이 사실을 다윗도 알게 되고 정탐꾼을 보내어 동태를 살핀 후 야밤을 틈타 사울의 주둔지에 아비새와 함께 직접 침투한다(3-7절).
진영 한 가운데 사울이 누워있는 곳까지 손쉽게 접근한 다윗에게 아비새가 말했다. “하나님이 오늘, 이 원수를 장군님의 손에 넘겨 주셨습니다. 제가 그를 당장 창으로 찔러 땅바닥에 박아 놓겠습니다. 두 번 찌를 것도 없이, 한 번이면 됩니다.”(새번역_8절) 하지만 다윗은 여전히 아비세에게 타일렀다. “그를 죽여서는 안 된다. 그 어느 누구든지,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자를 죽였다가는 벌을 면하지 못한다.”(새번역_9절)
그리고는 확실한 믿음의 선언을 아비새에게 들려준다. “주님께서 확실히 살아 계심을 두고 말하지만, 주님께서 사울을 치시든지, 죽을 날이 되어서 죽든지, 또는 전쟁에 나갔다가 죽든지 할 것이다. 주님께서 기름부어 세우신 이를 내가 쳐서 죽이는 일은, 주님께서 금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의 머리맡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새번역_10-11절)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하나님은 지켜 보고 계셨다. 그리고 다윗과 아비새를 보호하여 주셨다. “다윗이 사울의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을 들고 아비새와 함께 빠져 나왔으나, 보는 사람도 없고, 눈치채는 사람도 없고, 깨는 사람도 없었다. 주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셔서, 그들이 모두 곤하게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다.”(새번역_12절)
*하나님이 지켜주셨기에 3천명의 진영 한 가운데를 오갈 수 있었다. 반면에 사울은 군사들이 에워싼 한 가운데 자고있어도, 혹시 몰라 자신의 창을 머리맡에 세워 놓았어도 다윗과 아비새의 접근에서 보호받지 못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면 3천의 병사도, 머리맡의 창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의 잠들게 하심 앞에 속수무책이었다.
*사울은 엔게디의 동굴에서의 경험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군사들에게 자신의 주위를 겹겹히 둘러쌓이게 하여 중앙에서 잠들었고, 그래도 혹시 몰라 머리맡에 창까지 두었지만, 3천명의 군사와 창이 자신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했다.
*내가 사울처럼 의지하는 “3천의 군사와 창”이 혹시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준비물을 꼼꼼히 구비하여 가장 합리적이고 안전하다고 여기는 일을 진행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의 이름을 두고 행하고자하는 마음일 수도 있겠고…. 그야말로 내가 인간적으로 의지하는 인간관계일 수도 있겠고, 내 손에 쥐고 있는 물질과 명예, 권력과 권한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사울을 안전히 지키지 못했듯이 나를 안전히 지킬 수 없다는 것이다.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안전케 하여 주시는 은혜가 아니면 불가하다! 하나님께 나의 삶의 평안과 안전이 달려 있다.
*다윗의 무모한 행동… 이 위험천만한 행동을 결행하는 다윗의 마음은 어땠을까? 왜 사울의 진영으로 들어가고자 했을까? 그러면서 “누가 나와 함께 가겠느냐?”라고 물었다. 쟁쟁한 다윗의 호걸들이 옆에 있었다. 헷 사람 아히멜렉, 스루야의 아들 요압, 요압의 동생 아비새…그 중에서 아비세가 다윗과 함께 위험을 무릎쓰고 함께 가겠다고 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가끔 이런 도전이 올 때가 있다. “누가 함께 하겠습니까?”…. 이때 아비세처럼 “위험을 무릎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할 수 있는 마음이 과연 나에게는 있을까?
*역시 천재일우의 기회이다. 다윗에게는 상황이나 환경이 최적화 되게 보일 지라도 상황에 따른 결행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결행하는 것의 시험이 펼쳐졌다. 그리고 다윗은 또 한번 멋지게 시험을 통과하였다. 아! 멋지다! 다윗!!
*상황과 여건이 최적화 되어 절호의 기회다고 여기는 상황에 직면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결정에 추호의 망설임이 없고 아비새에게 이를 이야기할 때 떨림이 없다. 단호하고 담대하게 이야기 했다.
*하나님의 주권에 맡겨 드리는 삶!!! 멋지다!! 나도 그리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그 뜻을 성령을 통해 깨닫게 하실 때, 아무리 상황과 여건은 기막힌 최적의 시간으로 다가오더라도, 그 일이 하나님의 마음과 뜻과 상관 없고, 오히려 다를 때, 상황과 여건이 결정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이 결정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가치로 살아갈 때 반드시 직면 할 수 밖에 없는 경우들이다.
*상황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는 것 보다, 주님의 뜻을 알려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더 하나님의 백성답다. 주님의 뜻을 구했다면, 그 뜻이 나의 삶의 현장(이 땅)에서 이루어 지도록 힘을 달라고 구해야 하리라!
**주님, 다윗처럼 상황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겠습니다.
**주님, 다윗과 같은 리더십이 이 나라의 지도자들에게 필요합니다. 도와 주십시오!
누구의 생각으로 살 것인가?
삼상 26:1-12 /
여러분은 자신을 생각할 때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라고 여겨지십니까? 어쩌면 쉽게 답을 할 수 없는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사실 주변을 돌아볼 때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고 ‘과연 저 사람이 예수를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를 분별하고자 한다면 대개 무엇을 기준하겠습니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보고 예수님을 따르는지의 여부를 판단하겠습니까? 어찌 생각하면 이 문제는 아주 애매하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신약시대처럼 예수님이 실제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활동하셨던 공생에 시기에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분명 12제자라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들은 분명 예수님과 함께 다니며 생활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대해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과연 이것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른 것이라면, 예수님의 생각과 같은 생각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동행이며 따름입니다. 아무리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했다 할지라도 근본적으로 생각이 다르고 예수님의 일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함께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제자들이 진심으로 예수님과 동행했던 시기는 예수님이 하늘로 가시고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하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의 뜻과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생각과 일치된 생각으로 살아갈 때 그것을 동행이라고 말하며, 제자라고 말하며, 예수님을 따른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때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은 항상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배우고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살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는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여겨지십니까?’라는 질문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과 같은 마음,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십니까?’를 묻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예수님을 따르는가에 대한 질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접근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개는 ‘예수님을 따르는가?’의 여부를 교회에 대한 충성도나 착한 행동을 보고 판단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예수님을 따르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각과는 전혀 동떨어진 상태에서도 얼마든지 교회에서 봉사하고 충성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불신자들이 예수님의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신자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할 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가는가?’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어떤 마음과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가를 살피고 배워서 같은 마음과 생각으로 살아갈 때 그를 가리켜서 예수님의 제자라고 칭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교회를 다니고 사람들에게 칭찬을 들을만한 일을 수없이 한다 할지라도 예수님과 다른 마음,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라면 그는 예수님의 제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결국 베드로처럼 예수님의 죽으심을 만류하고, 결정적 순간에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예수를 부인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보면 서로 생각이 다른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다윗이고 한 사람은 아비새입니다. 1절에 보면 사울은 십 사람으로부터 다윗이 하길라 산에 숨었다는 보고를 받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다시 다윗을 잡기 위해 삼천을 군사를 거느리고 십 황무지로 내려가서 하길라 산 길가에 진을 칩니다.
이처럼 예전에 다윗이 굴에서 자신을 죽일 수도 있었는데 살려준 은혜를 잊어버리고 다시 또 다윗을 죽이려고 애를 쓰는 사울을 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도 수시로 잊어버리는 우리의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까? 사실 사울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다윗이 베푼 은혜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은 숨을 쉬면서도 그것이 다윗 덕분임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다윗을 치려고만 할 뿐입니다. 이것이 사울의 배은망덕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 자신들의 배은망덕한 모습이기도 하는 것입니다.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다윗의 인품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시기에 자신은 사울을 죽일 권리가 없음을 알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다윗에 의해 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살게 되었다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다윗을 보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야 하고, 다윗을 치는 것 자체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고 원수 되는 것임을 깊이 생각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에게는 이러한 생각이 없었습니다. 자신을 살려준 다윗을 향해 울면서 ‘너는 남보다 의롭다’는 말까지 하였으나 그때 다윗에 대한 그 마음에 머물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지금 또 다시 다윗을 치기 위해 군사를 끌고 온 것입니다.
6절에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가로되 누가 나로 더불어 진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아비새가 가로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는 구절을 보면 무슨 이유인지 다윗이 사울의 진으로 가서 사울을 만나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홀로 가는 것이 아니라 누가 자신과 동행할 것인가를 아비새에게 묻고 결국 아비새가 동행할 것을 자원함으로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아비새와 함께 사울의 진으로 갔을 때 사울과 그의 군사들은 누워 자고 있었습니다. 엔게디 굴에서처럼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다윗에게 “하나님이 오늘날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나로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8절)라는 말을 합니다. 24장에서 굴에 사울이 들어 왔을 때 다윗의 사람들이 다윗에게 하나님이 원수를 다윗의 손에 붙이셨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에 대해 예전과 같은 태도를 보입니다. 누구든지 사울을 죽인다면 그것은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치는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살아계신 이상 여호와께서 사울을 치실 것이니 사울이 죽을 날이 이르러 죽거나 아니면 전장에 들어가서 망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9,10절). 그리고 사울의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누구의 생각이 옳습니까? 두말할 것 없이 다윗의 생각이 옳지 않습니까?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비록 사울을 죽이고 싶었다 할지라도 다윗은 자기 생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행동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아비새는 달랐습니다. 아비새는 다윗과 함께 동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윗과는 다른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고 현재의 상황을 판단하였지만 아비새는 현재의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한 것입니다. 즉 다윗이 사울을 찾아왔을 때 하필이면 사울과 그의 군사가 잠들어 있다는 것은 분명 하나님이 하신 일이고, 그렇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다윗 편을 들고 계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에 사울을 죽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잠든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이는 12절에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깨든지 이를 보든지 알든지 하는 사람이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로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이었더라”는 구절을 보면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모두 잠이 들고 그러한 상황에 다윗과 아비새가 사울에게 오게 된 것은 하나님이 의도하신 상황임이 분명하지 않습니까? 과연 하나님은 왜 이러한 일을 만들어 내시는 것입니까? 아비새의 말대로 다윗으로 하여금 사울을 죽이게 하기 위해서입니까? 그렇다면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것은 하나님의 뜻을 불순종한 것입니까?
우리는 어떤 일의 상황이 나에게 유리하게 되어지면 하나님이 내 편을 들고 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불리하게 되어지면 내 편이 아니라는 의심을 가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곧 아비새의 생각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본문의 아비새의 모습에게서 우리의 잘못됨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사울의 입장에서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야 하는가를 배워야 합니다. 아비새의 모습에서 생각할 수 있는 잘못됨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생각에 자신의 생각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을 끌어 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러한 잘못을 행하는 경우가 많음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새벽예배 본문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하나님 곧 사람으로 밤중에 노래하게 하시며 우리를 교육하시기를 땅의 짐승에게 하심보다 더하게 하시며 우리에게 지혜 주시기를 공중의 새에게 주심보다 더하시는 이가 어디 계신가 말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구나”(욥 35:10-11).
이 구절은 욥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엘리후의 말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의문을 가졌습니다. 자신은 이런 고난을 받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비록 세 친구가 죄가 있기 때문에 그런 재앙을 받는 것이라고 몰아붙이긴 하였으나 욥은 자신의 고통이 죄의 결과라고 인정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욥에 대해 엘리후가 말했던 것은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 대해 이해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엘리후는 하나님은 우리를 교육하시고 지혜 주시기 위해 일하시는 분임을 말합니다. 그런데 누구도 그런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욥과 그의 친구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을 자신들이 하나님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아야 하고 지혜를 얻어야 하는 존재임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욥은 자신의 고난이 자신을 교육하고 지혜를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에 대해 무지함을 드러내었던 것입니다. 단지 주어진 상황에서 ‘나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에만 마음을 두었던 것입니다. 결국 잘못된 행동을 한 것도 없는데 엄청난 재앙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주어진 상황의 좋고 나쁨을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면 결국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대해 의심하게 되고 이해하지 못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비새의 눈에 다윗이 어떻게 비춰졌겠습니까? 아비새의 생각이 다윗처럼 바뀌지 않는다면 다윗의 행위는 참으로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기회를 놓치는 바보 같은 행위로밖에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아비새가 생각하는 지혜는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놓치지 말고 사울을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고 고난의 삶을 그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분명 아비새나 우리의 생각에는 이것이 가장 유리한 길로 보일 것입니다.
아비새가 다윗과 함께 하긴 했지만 다윗의 생각과 같은 생각을 갖지 못한 것처럼 오늘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하고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면서도 예수님과 다른 생각으로 살아가고 있을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곧 아비새의 모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어진 상황에서만 하나님을 생각하는 좁은 소견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이 어떤 생각으로 사셨는가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각을 배우고 그 생각으로 살려고 하기 보다는 내 생각에 예수님을 맞추려는 시도를 멈추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습에서 바른 신앙을 기대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이제 사울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창과 물병만을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다윗이 가지고 간 창과 물병은 사울의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창과 물병이 귀하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을 가져갔다는 것은 다윗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창과 물병은 사울에게 목숨을 의미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비새의 의견대로 사울을 죽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엔게디 굴에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울은 하나님의 은혜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윗이 하나님을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울은 다윗이 가져간 창과 물병을 볼 때 자신은 죽은 몸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고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목숨을 가져가실 수도 있는데 다만 창과 물병만을 취함으로써 지금 우리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임을 알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십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게 되고 결국 하나님께 감사하는 신자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사울과 그의 군사들이 잠들게 함으로써 다윗의 생각과 아비새의 생각의 서로 다름을 보여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 것이 옳은가를 묻습니다. 여러분, 어떤 생각으로 사는 것이 옳습니까? 우리에게는 오직 그리스도의 생각만이 진리입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사셨던 그 생각으로 이 땅을 사는 것이 신자입니다. 자비와 사랑을 드러내는 다윗의 생각이 곧 예수님의 생각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각으로 살아갑시다.
창과 물병
삼상 26:1~12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삼 천명을 동원하여 다윗을 쫓던 중 잠을 자고 있던 사울에게 오히려 다윗이 그곳에 들어가 왕의 목숨 대신 창과 물병을 갖고 나온다는 이야기입니다. 모두가 자는 가운데 아비새는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것을 제안하지만 다윗은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기름 부은 자라는 것입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십 사람의 고발, 사울의 추격, 아비새의 동행, 창과 물병만 가지고 나오는 다윗 등입니다.
‘십 사람이 기브아에 와서 사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다윗이 광야 앞 하길라 산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매’ - 십의 주민들이 사울 왕궁이 있는 기브아에 와서 다윗의 거처를 알려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밀고는 처음이 아닙니다. 지난번에도 다윗의 은신처를 알리려고 일부러 기브아에까지 온 적이 있습니다. `십'(Ziph)은 헤브론 남동쪽 약 8km, 마온 북쪽 약 10km 지점에 있는 유다의 성읍입니다. 그들은 다윗과 같은 유다 지파의 사람들입니다.
‘헷 사람 아히멜렉’은 다윗을 도와주고 일가족이 학살된 놉의 제사장 아히멜렉이 아닙니다. 이방인 헷 사람으로, 이름이 동명이인일 뿐입니다. 헷 족속은 가나안 일곱 족속 중의 하나로 원래 아브라함 때도 팔레스타인 땅에 거주하였지만, 이스라엘에 의해 정복된 민족입니다.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가 바로 헷 사람입니다. 그들이 다윗의 추종자가 된 것은 사울 왕이 `헷 족속'에 대하여 어떤 압박을 가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 단 한 번에 창으로 사울을 죽이게 해달라는 아비새의 청원입니다.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는 창으로 사울을 찔러 땅에 박겠다는 것으로, 그 이유는 사울의 부하들을 깨우지 않고 탈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단번에 그를 죽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번 찌를 것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만큼 사울은 무방비 상태였다는 말입니다. 당시 병사들은 긴 출정으로 모두 죽은 듯이 잠에 떨어졌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군대 장관마저 보초도 관리하지 않고 잠을 잔 것은 다윗의 질타를 받아도 마땅합니다.
▶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 사울의 죽음에 대한 예고를 여호와의 이름으로 다윗이 맹세했다는 말입니다. 지난번에도 죽일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빼앗지 않습니다. 대신에 증거를 확보하니, 왕의 옷자락입니다. 이번에도 증거를 확보하니 창과 물병입니다. 그것들은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는 부인할 수 없는 증거물입니다. 이는 같은 점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지난번 일은 우연히 벌어진 사건입니다. 하필 다윗과 그 부하들이 숨어 있었던 동굴로 사울 왕이 들어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은 우연이 아니라 다윗이 의도적으로 들어갔다는 점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전의 사건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발언으로, 사울 왕의 죽음을 경고했다는 것입니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전쟁에 나가서 죽을 것이라는 예언 아닌 예언을 한 것이지요. 어떻게 그런 발언을 할 수 있는지, 왜 그런 위험한 일을 자초했는지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지난번과 이번 사이에는 큰일이 한 건 있습니다. 다름 아닌 나발의 사건입니다. 그것으로 인해 실은 다윗은 큰 실수를 할 뻔합니다. 나발과 남자 식구들을 모조리 살해하려고 계획하였지만 현명한 여인 아비가일의 덕으로 살인마의 오점을 남기지 않을 수 있던 사건입니다. 거기서 다윗이 배운 교훈이 있습니다. 원수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으로, 나발을 하나님께서 치셨듯이 사울도 하나님께서 절대로 용서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피를 흘릴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실 것이니까요. 그래서 호랑이 굴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윗은 공격할 수도 있지만 공격하지 않고, 죽일 수도 있지만 죽이지 않습니다. 사울은 자신을 원수로 알고 있지만, 자신은 원수로 삼지 않습니다. 그 증거가 창과 물병입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한다는 선언으로, 그래서 악을 선으로 갚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할 수 있는 것을 맘껏 하는 것이 능력입니다. 하지만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능력입니다. 아닙니다. 더 큰 능력입니다. 왜냐하면, 능력 위에 또 능력으로 곧 능력을 절제할 수 있는 능력이 하나 더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으로 선을 위하여, 하늘의 뜻을 따르기 위하여 능력을 통제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미워할 수 있고,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큰 능력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십자가를 질 수 있는 능력입니다.
그 능력은 세상을 정복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사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는 능력입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능력, 남을 돕고 또 돕는 능력입니다. 이제 우리 것으로 삼고 살아야 할 능력입니다. 악을 선으로 이기고, 육을 영으로 장악하며, 미움을 사랑으로 바꾸는 우리들이 되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