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르코 칸나보 신부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
연중 제29주일
[복음]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마태 22,15-21)
15 그때에 바리사이들은 물러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님을 말로 올가미를 씌울까 궁리하였다.
16 그러고는 자기들의 제자들을 헤로데 당원들과 함께 예수님께 보내어 이렇게 묻게 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께서 진실하시고 하느님의 길을 참되게 가르치시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과연 스승님은 사람을 결코 겉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17 그러니 스승님의 의견을 말씀해 주십시오.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
18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악의를 아시고 말씀하셨다. “위선자들아, 어찌하여 나를 시험하느냐?
19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2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21 그들이 “황제의 것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피조물 안에 새겨진 우리 모상의 생명이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우리는 우리의 거룩한 뜻을 유산으로 건네주어, 우리가 처음 창조했을 때의 모습 그대로 그 모상을 간직하게 하였다.”
2026년 10월 15일
지극히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피앗(Fiat)!
이번 주일 복음(마태 22,15-21)은 예수님과 그분을 반대하는 자들 사이에 벌어진 또 한 번의 맞대면을 보여 줍니다. 다루어지는 주제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던 팔레스타인에서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합당한지 그렇지 않은지를 둘러싼 매우 “까다로운” 문제였습니다. 이에 대한 입장들은 첨예하게 갈려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리사이들이 스승이신 예수님께 던진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17절)라는 물음은 스승님을 옭아매려는 덫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대답하시든 로마를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자로 고발당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번에도 평온하게 응답하시며, 편 가르기와 논쟁을 훌쩍 뛰어넘어 그 악의어린 물음을 중대한 가르침을 베푸는 기회로 삼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에게 이르십니다.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 그들이 데나리온 한 닢을 가져오자, 예수님께서는 그 동전을 살펴보시며 물으십니다.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 바리사이들은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라.”(19-21절)
한편으로는 황제에게 속한 것을 황제에게 돌려주라고 명하시며 세금을 내는 행위가 우상 숭배가 아니라 세속 권위에 마땅히 바쳐야 할 의무임을 밝히셨고, 다른 한편으로는—바로 여기서 예수님의 탁월한 혜안이 드러납니다—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상기시키시며 인간 생명과 역사의 주재자이신 하느님께 마땅히 속한 몫을 그분께 돌려드리라고 요구하십니다.
동전에 새겨진 황제의 초상은 우리가 권리와 의무를 온전히 지닌 국가의 시민임을 자각하는 것이 정당함을 말해 줍니다. 그러나 이는 상징적으로 모든 인간 안에 뚜렷이 아로새겨져 있는 또 다른 모상, 곧 ‘하느님의 모상’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만유의 주님이시며,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들이 던진 질문으로부터 우리 각자를 향한 훨씬 더 근원적이고 생명과 직결된 물음을 이끌어 내시며, 우리 스스로 이렇게 묻게 하십니다.
‘나는 과연 누구에게 속해 있는가?
가족인가, 도시인가, 벗들인가, 학교인가, 일터인가, 정치인가, 국가인가?’
물론 그렇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먼저—예수님께서 상기시켜 주시듯—그대는 하느님께 속해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소속입니다. 지금의 그대라는 존재와 그대가 지닌 모든 것을 베풀어 주신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우리의 이러한 근원적인 소속을 겸손히 깨닫고 인정하며, 우리 각자를 유일무이하게 창조하시되 언제나 당신의 사랑하시는 아드님 예수님의 모상을 따라 빚어내신 아버지께 마음 깊이 감사드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1926년 11월 20일, 예수님께서는 루이사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피조물을 창조하실 때, 창조의 손길로 피조물을 빚어 만드시며 하느님께서는 당신 품에서 기쁨과 흡족함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셨습니다. 그 피조물은 이 땅 위에서 하느님의 기쁨을 보존하고 하느님께 끊임없는 잔치(축제)가 되어드리도록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피조물의 발을 빚으시며, 그 발이 당신의 입맞춤을 받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 발은 당신의 발걸음을 품어 안고 함께 즐거움을 나누는 만남의 통로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손을 빚으시며, 그 손이 당신의 입맞춤과 포옹을 받는 자리가 되어 하느님께서 손수 이루신 업적들을 사로잡아 기쁨을 누리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입과 마음을 빚으시며, 그것들이 당신 말씀과 사랑의 메아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숨결로 피조물에게 생명을 불어넣으신 후, 그 생명이 하느님에게서 나온 온전히 당신 자신의 생명임을 보시고는, 당신 작품과 사랑을 확증하시듯 그를 품에 꼭 껴안고 입을 맞추셨습니다.
나아가 피조물이 자신의 발걸음과 행위, 말씀과 사랑의 메아리, 그리고 자신 안에 새겨진 하느님 모상의 생명 안에서 흠 없이 온전하게 보존되도록,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거룩하신 뜻(Divin Volere)을 유산으로 건네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처음 지어내신 그대로 피조물이 그 모상을 간직하여, 당신 손으로 빚으신 작품과 함께 사랑어린 놀이와 다정한 입맞춤, 그리고 감미로운 대화를 끊임없이 이어 가시기 위함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피조물 안에서 당신의 뜻을 보실 때, 그 안에서 당신 자신의 발걸음과 행위, 사랑과 말씀, 기억과 지성을 바라보십니다. 지고하신 뜻은 거룩한 신적 요소가 아닌 것은 결코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마치 당신 자신의 것인 양 모든 것을 아낌없이 베풀어 주십니다. 곧 입맞춤과 어루만짐, 온갖 호의와 사랑, 그리고 부성애 이상의 지극한 다정함을 쏟아부어 주십니다. 또한 그 피조물과 단 한 걸음의 거리도 떨어져 있고 싶어 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작은 거리조차 끊임없는 사랑의 친교를 나누거나 입맞춤을 주고받으며, 가장 은밀하고 깊은 기쁨을 함께 나누는 데 방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 보이지 않는 영혼 안에서 하느님께서는 사랑의 친교를 나누실 수 없습니다. 당신의 것이라 할 만한 것을 그 안에서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영혼 안에서는 발걸음과 행위, 말씀과 사랑에 있어 너무나 큰 부조화와 괴리감이 느껴지기에, 영혼 스스로 창조주로부터 멀리 떨어져 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가로놓인 무한한 간격을 잊게 만드는 ‘당신 뜻’이라는 강력한 자석이 존재하지 않는 영혼을 보실 때, 그 영혼과 친교를 나누며 입맞춤과 은혜를 가득 부어 주시는 일을 잊으십니다.
인간이 하느님의 거룩하신 뜻에서 벗어남으로써 신적 친교를 깨뜨리고 창조 사업을 이루시며 품으셨던 하느님의 원대한 계획을 허물어 버린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지고하신 피앗(Fiat Supremo)”이 다스리시고 그분의 나라가 온전히 세워질 때에만, 하느님의 계획이 온전히 실현되고 이 땅 위에서 주님의 거룩한 친교가 다시금 온전히 회복될 것입니다.
- 마르코 신부(don Marco)
이탈리아 밀라노 대교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