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트르 대제 시절에 러시아의 북쪽에는 숲과 호수의 나라인 스웨덴이 북유럽의 최강자를 자랑하면서 위치해 있었다. 발트해 최남단 해안으로부터 북극을 건너 수천마일까지 스칸디나비아 반도가 뻗쳐 있으며, 눈과 얼음과 9만 6천개의 섬과 호수가 있고 사철 자작나무 숲이 육지를 덮고 있었다. 이곳은 러시아 북쪽과 마찬가지로 여름은 짧고 시원하며 얼음은 11월에 얼고 4월에 녹으며 서리가 없는 기간은 5개월간 뿐으로 춥고 아름다웠으며 불평을 모르는 강인한 종족이 살고 있는 곳이다.
17세기에 걸쳐 이러한 넓은 지역에 150만명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대부분이 농민들로서 단조로운 통나무 집에서 수세기동안 그들이 살아 온 방식대로 직접 옷을 만들어 입기도 하고 나무 쟁기로 농사를 지었다. 농장과 농장간에, 작은 도시와 작은 도시와 읍들간에 도로가 발달되지 못해서 교통편은 느리기가 한없고 불편했으며,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호수 위를 썰매로 통행하곤 했다. 이러한 계절이면 스웨덴 농부들은 뼈를 얼어붙게 하는 추위를 피하기 위하여 주로 난로가에서 한겨울을 보낸다.
스웨덴의 주산물은 은, 구리, 철등의 광물들이면 당시 스웨덴은 전 세계 구리의 70 퍼센트 가량을 생산했다. 모든 무역은 1697년 약 6만 명의 인구를 보유한 수도 스톡홀름을 통해 이루어 졌다.
17세기 당시 독일과 영국 상인들은 철과 구리를 실어가기 위하여 이 항구에 몰려 들었으며, 부두 시설을 갖추게 됨에 따라 정박소, 시장, 은행들이 들어서고 도시는 다른 섬에까지 확장되었다. 부유해지기 시작한 이 도시는 귀족들의 저택이나 궁전과 교회의 지붕에까지 구리로 장식하여 반짝였고, 암스테르담과 영국산 고급 가구, 프랑스산 안락의자, 독일과 이탈리아의 유리, 금색 벽종이, 카페트, 은장구류, 테이블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17세기는 스웨덴의 전성기로서 1611년 구스타부스 아돌푸스에서 시작해 1718년 카를 12세가 사망하기전까지 역사상 북유럽의 강대국으로 군림하였다. 스웨덴 제국은 발트해 북쪽 전부와 남쪽 해안을 따라 중요한 지역을 다 포함했으며, 핀란드와 카렐리아, 에스토니아, 잉그리아, 리보니아를 포함하고 보스니아만과 핀란드만을 완전히 감싼 영역이었다.
이처럼 넓은 지역에 150만명을 흔들림없이 지탱시켜준 왕권은 스웨덴의 훌륭한 지휘관들과 강한 군사들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방의 사자로 불린 구스타부스 아돌푸스는 신교도들의 구원자로 평가받는 위대한 인물이었다. 아돌푸스가 38세로 전사하자 그의 사후에도 계속된 30년 전쟁은 스웨덴의 노력으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맺어 막을 내리게 되었다. 스웨덴은 베세르, 엘베 및 오데르강 입구를 통제할 수 있는 독일 지방을 얻었으며, 보다 중요한 수확은 스웨덴 군사들이 유럽 어디에서나 활보하고 다닐 수 있게 된 점이었다.
대북방 전쟁의 불씨는 역사 및 경제적인 측면은 물론 표트르의 바다에 대한 애착심에서도 기인했다. 러시아와 스웨덴간에 핀란드만 해안 내륙 소유 문제를 놓고 옥신각신 했던 것이 벌써 수세기 동안이나 계속 되어왔고 스웨덴은 모스크바나 노브고로드 공국같은 도시 국가와 13세기부터 적대적인 관계였다. 네바강 남쪽과 북쪽의 카렐리아와 인그리아는 옛 러시아 영토였으며 러시아의 영웅 알렉산드르는 1240년 네바강에서 스웨덴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네브스키의 명칭을 얻었다. 폭군 이반 황제가 서거한 후에는 노브고로드까지 스웨덴이 장악했으나, 1616년에 스웨덴은 노브고로드를 포기한 대신 바다로부터 고립된 리가, 나르바, 라도가 호수, 뇌테보르크와 같은 전 해안선을 장악했다.
러시아의 알렉세이 황제는 이 영토를 다시 찾으려 했지만 포기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유는 폴란드와의 전쟁시 폴란드와 스웨덴을 동시에 공격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스웨덴의 영토임을 재확인한 사건이 1664년 카라디스의 스웨덴 평화 협정으로 이루어졌다.
카를 12세
표트르 1세
표트르는 러시아의 영토였던 이곳에서 스웨덴이 무거운 세금과 착취로서 배를 채우는 것에 분노를 느꼈다. 표트르는 단독으로 오스만 제국과 전쟁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흑해로의 접근이 봉쇄된 것도 알고 있었으나 러시아 국경으로부터 불과 몇 마일 밖에 떨어지지 않은 폴란드, 영국, 그리고 서쪽으로 직접 갈수 있는 발트해가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표트르는 덴마크와 폴란드와 연합하여 이 지역을 다시 되찾기 위해 스웨덴의 나이 어린 왕과 전쟁을 치루겠다는 억제할 수 없는 충동을 느꼈다.
그런 이유로 핀란드의 공용어가 핀란드어와 함께 스웨덴어였군요.. 듣기로는 스웨덴어는 북유럽 5개국에서는 아무데서나 가도 다 통한다고 하더군요. 물론 스웨덴 핀란드 이외의 나라에서 공용어의 레벨까지는 안되지만.. 정신적으로는 핀란드하고 스웨덴하고 아주 가까운 유대관계를 지닌다고 하더군요. 국경에 수비대가 없다고 들은 것 같음(아니면 단순히 아파트 경비원 레벨이라고 들은것 같은데)-_-;; 골프장 사이로 국경이 지나간다고 하니 말 다한거죠 ㅋㅋㅋ
대북방 전쟁 당시 초반의 승리에 고무된 스웨덴 군대는 러시아 영토 내로 깊숙히 진격했다가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로로 인한 식량과 물자 부족, 살인적인 추위에 의한 인명 손실에 시달리다가 결정적인 러시아 군대의 타격을 받고 와해되어 버리면 카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가 버리게됩니다. 나폴레옹 침공 때도 그렇고 대조국 전쟁때도 그렇고 일단 러시아 영토내로 들어온 외국 군대는 초반에 승승장구하다가도 보급 문제와 추위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게 일반적인 패턴이었지요.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무기, 군사 제도, 선박 제조술, 건축 양식, 의복 등은 열심히 모방하고 도입했지만 종교나 자유주의 사상같은 이념적인 측면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이번 기회에 표트르 대제를 개종시켜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으며, 러시아의 농노제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유지되어서 결국 농민들의 비참한 삶에 분개한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같은 사건도 일어나게 됩니다.
첫댓글 Peter the Giant!!!
그런 이유로 핀란드의 공용어가 핀란드어와 함께 스웨덴어였군요.. 듣기로는 스웨덴어는 북유럽 5개국에서는 아무데서나 가도 다 통한다고 하더군요. 물론 스웨덴 핀란드 이외의 나라에서 공용어의 레벨까지는 안되지만.. 정신적으로는 핀란드하고 스웨덴하고 아주 가까운 유대관계를 지닌다고 하더군요. 국경에 수비대가 없다고 들은 것 같음(아니면 단순히 아파트 경비원 레벨이라고 들은것 같은데)-_-;; 골프장 사이로 국경이 지나간다고 하니 말 다한거죠 ㅋㅋㅋ
대북방 전쟁 당시 초반의 승리에 고무된 스웨덴 군대는 러시아 영토 내로 깊숙히 진격했다가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로로 인한 식량과 물자 부족, 살인적인 추위에 의한 인명 손실에 시달리다가 결정적인 러시아 군대의 타격을 받고 와해되어 버리면 카를 12세는 오스만 제국으로 도망가 버리게됩니다. 나폴레옹 침공 때도 그렇고 대조국 전쟁때도 그렇고 일단 러시아 영토내로 들어온 외국 군대는 초반에 승승장구하다가도 보급 문제와 추위 때문에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되는게 일반적인 패턴이었지요.
영국과 일본같은 섬나라가 바다를 천연 장벽으로 삼고있다면 러시아의 방어막은 끝도 없는 광활한 대지와 영하 40도에 이르는 혹독한 추위라고 볼 수 있습니다.
표트르 대제는 서유럽의 무기, 군사 제도, 선박 제조술, 건축 양식, 의복 등은 열심히 모방하고 도입했지만 종교나 자유주의 사상같은 이념적인 측면에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카톨릭이나 프로테스탄트 성직자들은 이번 기회에 표트르 대제를 개종시켜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으며, 러시아의 농노제는 19세기 중반까지도 유지되어서 결국 농민들의 비참한 삶에 분개한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데카브리스트의 반란 같은 사건도 일어나게 됩니다.
하드웨어가 제 기능을 발휘하려면 그에 걸맞는 소프트웨어가 중요하다... 로군요.
왕마귀님, 혹시 이 전투로 인해 카를12세가 터키로 튀게 되면서 옴부즈만 제도가 시행되었나요?
클라우제비츠도 나폴레옹의 예를 들어 러시아는 정상적인 방법으론 이길수 없는나라라고 햇죠. 일본도 한때 러일 전쟁당시 러시아 본토 깊숙히 공격하려는 계획을 세웠엇는데... 보급, 살인적인추위때문에 포기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