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오니드 코간 (Leonid Kogan 1924~1982)
레오니드 보리소비치 코간은 1924년 우크라이나의 소읍인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의 유태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모는 사진기사였다. 레오니드의 부친은 슬라브계 유태인이 흔히 그렇듯 취미로 바이올린을 즐겼다. 어릴 적의 레오니드는 아버지의 바이올린 소리를 매우 좋아해서, 아버지의 바이올린을 곁에 놓지 않고서는 잠을 자지 않겠다고 고집할 정도였다. 레오니드가 다섯 살이 되자 부모는 ‘아이에게 맞는 크기의 바이올린을 사주고 제대로 배워보게 하자’는 데 뜻을 모았다. 첫 번째 스승은 저명한 바이올리니스트 아우어의 제자였던 필립 얌폴스키였다. 어린 레오니드는 두 번 레슨을 받고는 참을성이 바닥나 그만 둘 뻔 했지만 매일 몇 분씩 마음을 풀고 바이올린을 잡은 결과 다시 ‘바이올린이 좋아’라는 느낌이 되살아나게 됐다.
이 무렵 레오니드는 처음 청중을 대면한 연주를 갖게 되는데, 이 연주가 매우 인상적이었는지 스승과 가족들은 그가 모스크바로 옮겨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게 된다. 레오니드가 열 살 때 가족은 모스크바로 이주했고, 필립 얌폴스키와 마찬가지로 아우어의 문하생이었지만 훨씬 명망높던 아브람 얌폴스키로부터 수업을 받게 된다(‘필립’ 얌폴스키와 새 스승 ‘아브람’ 얌폴스키는 아무런 인척관계도 아니었다). 레오니드가 열두 살 때 그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가 찾아온다. 당대의 대 현악 거장 자크 티보가 모스크바를 방문한 것이다. 티보는 코간의 연주를 듣고 감명받은 나머지 “이 아이는 훌륭한 연주가가 될 것으로 확신합니다”라는 예언을 남긴다. 그렇지 않아도 레오니드의 빠른 성장을 눈여겨보고 있던 얌폴스키는 티보의 확언에 고무돼 이 제자를 키우는 데 전력을 쏟기로 마음먹고 자기 집에 유숙시킨다. 얌폴스키는 당연히 기존의 정규적 과정 외에 과외 시간을 들여 레오니드를 가르쳤고, 눈부신 성장이 뒤따랐다.
“나는 매일 스케일을 연습했습니다. 어린 나에게는 그것이 먹고 자고 이닦는 것만큼이나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죠”라고 그는 훗날 회상한다. 한 시간을 연습한다고 하면 그는 30분은 스케일 연습에, 나머지 30분은 연습곡을 익히는 데 보낼 만큼 그의 스케일 연습에는 유별난 데가 있었다. “항상 4옥타브의 넓은 스케일을 연습했죠. 왜냐하면 마지막 네 번째 옥타브야말로 바이올리니스트가 높은 성부에서 손가락을 자유롭게 놀릴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입니다. 지판(指板)에서 가장 높은 포지션을 흠없이 연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는 후일에도 높은 음역에서의 옥타브 연습을 강조했다. 그가 스케일 연습을 중요하게 평가한 이유는 그런 연습이 최고음부터 최저음까지를 균등하게, 끊어지는 느낌 없이 연주할 수 있도록 해주기 때문이었다. 쓸고 닦아낸 듯 정교하다고 평가되는 그의 왼손 기교는 이런 끊임없는 스케일 연습에 힘입은 바 컸다. 이런 정교함은 나아가 프레이징의 자연스러움, 박자와 강약배분의 절묘함으로 이어졌다. 이 때문에 훗날 그가 동서를 막론한 바이올린 계의 최고 테크니션 중 하나로 우뚝 서게 된 것이다. 장성해서 그의 코스는 당연히 모스크바 중앙음악학교를 거쳐 모스크바 음악원이었다. 오로지 음악영재를 위한 중앙음악학교의 교육과정은 전반적으로 모자람 없는 전인교육에다 집중적인 음악교육을 더한 꽤 부담스러울 만한 것이었다.
오이스트라흐의 따뜻함, 코간의 차가움, 둘의 만남
청년 바이올리니스트 레오니드 코간의 첫 연주회는 17세 때 열렸다. 그는 모스크바 음악원의 대공연장인 모스크바 필하모닉 홀에서 브람스의 협주곡을 협연했다. 이 연주회의 성공에 따라 학생 신분으로 드넓은 소련 제국을 순회연주하는 영예까지 누렸지만, 그의 부모는 연주회수 제한을 고집함으로써 아들이 계속해서 기교를 닦을 수 있는 시간을 보장했다. 연주여행 대신 소비에트의 국가시책에 따라 콩쿠르 파견이 계속됐다. 첫 영예는 프라하 세계 청년축전에서의 1등상으로 찾아왔다. 그 다음번의 영예는 파급효과가 훨씬 컸다.
1951년, 27세 때 ‘콩쿠르 중의 콩쿠르’로 불리는 벨기에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대상을 차지한 것이다. 그가 연주한 파가니니의 협주곡 1번은 심사위원과 청중들에게 경이롭게 받아들여졌다. 놀라운 기교적 성취 외에 고전적인 열정이 연주회장을 휘어잡았다. 코간 보다 16년 연상으로 심사위원에 포함돼 있던 다비드 오이스트라흐는 결과 발표에 앞서 자국의 기자들 앞에서 이렇게 기세를 올렸다. “음악계에서 우리 위치는 확고합니다. 보시다시피 우리 나라의 젊은 연주가들이 뛰어난 연주를 펼쳤습니다. 누구보다도 레오니아(레오니드의 애칭)가 으뜸이었고, 그 다음에 미샤(바이올리니스트 미하일 와이먼)를 꼽아야 하겠죠. 이 두 사람은 적수가 없는 연주를 펼쳤습니다. 이 두 사람이 1, 2등 상을 휩쓸 것으로 확신합니다.” 그의 예상은 정확했다.
곧 이어 오이스트라흐와 코간은 러시아의 유태계 바이올린 연주를 대표하는 양대 거장으로 자리잡게 된다. 그럼에도 요즘 유행하는 말처럼 ‘작은 차이가 큰 차이를’ 만들게 됐다. 오이스트라흐의 이름은 소비에트의 권부에 의해 유용한 선전문안으로 자리잡았다. 서방세계에 자국 예술의 우수성을 선전하는 데 있어서 오이스트라흐의 이름은 항상 맨 앞에 꼽혔다. 반면 코간은 그의 활동상 만큼 자주 ‘선전에 이용되지 않았다. ‘단순 반복’을 최우선으로 하는 선전술의 기법상 바이올린 한 분야에 여러 사람의 이름을 거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코간 자체가 여러 사람의 앞에 나서기를 꺼리는 성격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두 인물의 관계에 질투심이라던가 적의의 빛은 찾아볼 수 없다. 두 사람은 평생 절친한 친구였으며 코간 자신이 오이스트라흐의 수업을 찾아가거나 공연을 관람하기도 했다.
반면 오이스트라흐는 반 세대가 넘는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코간을 동등한 동료로 대우해주었다. 코간이 ‘따스함과 정열’로 상징되는 오이스트라흐의 연주를 주저없이 찬양했음은 물론이다. 코간이 찬양했던 또 한 명의 바이올리니스트는 하이페츠였다. 하이페츠의 연주를 회상할 때 코간은 “나는 그의 연주회를 빠짐없이 들었고 그의 한 음 한 음을 정확히 회상할 수 있다. 그는 내게 연주가의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고 말했다. 요제프 시게티 역시 그에게 큰 영감을 준 바이올리니스트였다. 시게티의 연주회를 관람한 뒤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신의 한 걸음 한 걸음을 지금부터 뒤쫓아가기로 결심했습니다. 정말로 어려운 일이겠지만….” 하이페츠와 시게티. 코간이 주저없이 찬양한 이 둘의 바이올리니즘에서 그의 연주를 이해하는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