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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의 호소
삼상 26:13-20
13 이에 다윗이 건너편으로 가서 멀리 산 꼭대기에 서니 거리가 멀더라
14 다윗이 백성과 넬의 아들 아브넬을 대하여 외쳐 이르되 아브넬아 너는 대답하지 아니하느냐 하니 아브넬이 대답하여 이르되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하더라
15 다윗이 아브넬에게 이르되 네가 용사가 아니냐 이스라엘 가운데에 너 같은 자가 누구냐 그러한데 네가 어찌하여 네 주 왕을 보호하지 아니하느냐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네 주 왕을 죽이려고 들어갔었느니라
16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18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19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20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삼상 26:13-20 / 다윗은 골짜기를 건너서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사울의 진지에서 안전할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에 멈추어 섰다. 14) 다윗은 골짜기 건너편 산 위에 있는 사울의 진지를 향하여 크게 외쳤다. `아브넬아 네가 거기 있느냐? 너는 대답도 못하느냐?' 아브넬이 대답을 하였다. `임금님께서 주무시는데, 어느 놈이 감히 소리를 지르느냐?' 15) 다윗이 아브넬에게 호통을 치기 시작하였다. `너는 그래도 용사가 아니더냐? 도대체 이스라엘에서 너처럼 용감한 사람이 또 있더냐? 그런 네가 어째서 네 주 왕을 똑바로 지키지 못하였더냐? 방금 네 왕을 죽이려고 그 진지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람이 있다. 16) 너는 아주 수치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신 너희의 주를 똑바로 지키지 못하였으니, 이제 너는 죽어 마땅한 자이다. 왕의 머리맡에 있던 창과 물병이 없어졌을 것이니 어서 찾아보아라!' 17) 사울이 다윗의 목소리를 알아 듣고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정말로 네 목소리냐?' 하고 외쳤다. 다윗이 `정말로 그렇습니다! 내 주 임금님!' 하고 대답하였다. 18) 다윗은 사울을 향하여 날카로운 항의를 해댔다. `임금님께서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를 사냥하듯이 계속 쫓고 계십니까? 도대체 제가 임금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습니까? 제 손으로 지은 죄가 무엇입니까? 19) 임금님이시여, 이제 이 종의 말에 귀기울여 주십시오. 만일 여호와께서 임금님의 마음을 충동해서 저를 원수로 여기고 쫓아다니게 하신다면, 저는 기꺼이 여호와께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되어 죽겠습니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이 임금님의 마음을 자극시켜서 죄도 없는 저를 잡아 죽이게 한다면, 여호와께서 그들을 벌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여호와께서 유업으로 주신 이 땅에서 나를 내쫓아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쫓겨나게 하고, 저 낯선 세상에서 헛된 신들이나 섬기도록 나를 몰아붙이는 자들이기 때문에, 여호와께서 오히려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실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임금님, 제가 여호와 곁에서 멀리 떠난 이 타향에서 죽는 일이 없도록 도와주십시오. 한 나라의 임금님께서 무엇 때문에 꿩 한 마리를 잡으려고 온 산을 헤매는 사냥꾼처럼 행동하십니까? 이러다가는 이스라엘의 임금님께서 벼룩 한 마리를 잡기 위해서도 출동하시는 날이 오겠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아끼는 진실한 마음으로 그의 마음을 녹입니다.
아브넬을 책망한 다윗(13-16) 다윗은 건너 편 산 꼭대기로 올라가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후 군대장관 아브넬을 불렀습니다. 사울 왕을 보호하지 못한 책임을 그에게 묻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브넬은 전투 경험이 많은 용사였고, 3천 명의 정예군대를 이끄는 지휘관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외부인이 진영을 뚫고 왕에게 접근하였다는 것은 죽어 마땅한 그의 큰 잘못이었습니다. 다윗은 아브넬에게 사울 왕의 창과 물병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얼마나 큰 잘못을 범했는지 알게 하였습니다. 이때에 다윗은 자신의 정적을 살려줄 뿐만 아니라 그의 안전을 염려할 만큼 여유로웠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창과 물병을 보여준 진짜 이유는 사울 왕을 위하는 그의 진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였습니다.
다윗의 음성(17-18) 이번에도 다윗의 진실한 음성이 사울 왕의 완고한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다윗의 음성은 단순히 목소리 톤만을 의미하지 않고 사울 왕의 안전을 염려하는 진심을 포함합니다. 이전에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데도 살려준 일이 있었는데, 그때에도 다윗은 사울 왕을 아끼는 자신의 진심을 표현함으로써 사울 왕의 마음을 감동시킨 바 있습니다(삼상 24:10). 다윗의 음성에 힘이 있었던 것은 그의 말이 진실이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왕을 “내 주”라고, 자신을 사울의 종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러한 표현으로써 다윗은 사울 왕을 해할 마음이 조금도 없고 도리어 왕을 위하는 마음뿐임을 나타내었습니다. 진실은 원수의 마음도 녹입니다.
다윗의 간언(19-20) 다윗은 충성된 신하로서 왕에게 간언합니다. 먼저 사울 왕이 자신을 죽이려한 것이 여호와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라면 자신은 기꺼이 제물이 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다윗의 손에 들린 사울 왕의 창과 물병이 그것을 말해줍니다. 이제 사람들의 충동으로 사울 왕이 자신을 추적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신을 쫒아내기 위한 모함이라고 다윗은 말합니다. 이로 인해 다윗은 언약의 땅에서 우상이 지배하는 이방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호소합니다. 다윗은 오로지 왕의 신하로서 여호와의 기업을 위해 봉사하려는 자신의 진심을 전합니다. 다윗은 자신을 벼룩에다 비유하여 자신이 왕의 충성된 신하라는 사실을 전하였습니다.
적 용 : 다윗은 사울 왕을 향한 진심을 표현하였기에 원수 사울의 마음을 녹였습니다. 오늘날에도 진심이 인간사회에서 통할 수 있을까요?
상대방을 대하는 데 있어 진심을 담은 것과 담지 않은 것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진심을 담아 이야기하면 같은 상황에서도 전혀 다른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진심을 담아 호소하는 다윗의 모습을 본 사울 왕은 결국 비록 일시적일 뿐이었지만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게 됩니다. 혹시 지금 누군가에게 사과하고 싶은 일이 있는 분이 있다면 용기 내어 말해보세요. 진심은 반드시 통합니다.
호크마 주석
=====26:13
건너편...산꼭대기에 서니 - 다윗과 아비새는 이때 계곡 하나를 건너 맞은편 언덕, 즉 하길라 산 정상으로 올라간 듯하다. 그리고 여기의 이 `산 꼭대기'는 사울의 동정을 살필 목적으로 `탐정'(4절)이 정탐하던 곳이었을 것이다. 상거가 멀더라 - 다윗이 이처럼 사울로부터 먼 거리에서 사울의 군대장관 아브넬을 깨우고, 또한 사울과 대화를 하려고(14-25절) 한 까닭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사울에게서 도망갈 안전 거리를 확보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다윗이 사울의 변덕스런 감정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6:14,15,16
여기서 다윗은 사울의 경호 책임을 맡고 있던 군대 장관 아브넬(14;50)의 직무유기를 비난함으로써 (1) 사울로 하여금 그가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상황에 처해 있었음을 절감케 하며, (2) 그리고 다윗 자기 자신은 사울을 죽일 의사가 전혀 없었고 또한 없을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 아브넬아 - `아브넬'(Abner)은 골리앗과 싸워 이긴 다윗을 사울에게 데려가는등 이미 다윗과 친교가 있었다(17:55-58; 20:25). 더구나 `아브넬'은 사울과 사천간이며(1 4:50, 51) 다윗은 사울의 사위였다는(18:27; 25:44) 점에서 본다면, 다윗과 아브넬이 상호 친분 관계를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왕을 부르는 너는 누구냐 - 이 말은 여자적(如字的) 의미로 이해되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다윗은 사울이 아닌 아브넬을 불렀기 때문이다(14절). 따라서 우리는 이 말을, 다윗이 아브넬을 큰 소리로 불러 소란케 함으로써 잠자던 사울을 깨웠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Keil & Lange). 네가 용사가 아니냐 - 이것은 아브넬이 왕을 경호하는 그 자신의 직책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한편 여기의 `용사'(* , 이쉬)는 `여자'(* , 잇솨)와 대조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이다(창 2:23). 따라서 여기서 이 말은 `남자다운 남자'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Klein). 네 주...네 주 - 여기서 `네 주'라는 말이 반복 기술된 것은 아브넬이 자신의 상전인 사울에 대한 경호 책임을 게을리했음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즉 아브넬은 자신의 `주'사울을 보호해야 했어야만 했다. 여호와께서 사시거니와 - 25:26 주석 참조.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 아니하였으니 - 이것은 아비새가 사울을 죽이려 했던(8절) 가로막았던 다윗의 행동과 잘 대조된다. 즉 다윗은 이같은 언급을 통하여 아브넬의 직무 유기와 자신의 선행(24:17, 18)을 대조적으로 강조한다. 나아가 다윗의 이 말은 진정 사울을 지키고 보호해 줄 자로서 아브넬보다 자신이 더욱 적격자라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따라서 자신은 사울을 해하고자 하는 의도는 추호도 없으며, 오해려 사울을 주(主)로 모시고 충성된 신하로서 지키고 보호해 줄 자라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변하고 있는 것이다.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니라 - 문자적으로는 `너희는 죽음의 아들이니라'(20:31)란 뜻이다. 다윗이 여기서 아브넬과 병사들에 대하여 `죽음의 아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하나님께로부터 기름
=====26: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 이때는 캄캄한 밤 또는 동트기 전의 새벽녘이었을 것이므로, 사울은 음성을 통해서만 다윗이 자신과 가까운 곳에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내 아들 다윗아 - 사울의 이같은 반응은, 다윗이 자신을 충분히 죽일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던 사실을 인식한 결과였다(24:16). 아마도 이때 변덕스런 사울은 다윗을 아브넬보다 더 나은 호위병으로(16:21) 생각했을 것이다.
=====26:18
어찌하여...쫓으시나이까 - 사울은 엔게디 동굴에서의 사건(24:2-7)으로 다윗과 화해를 했었다(24;16-22). 바로 이같은 이유 때문에 사울이 자신을 또다시 추격하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26:19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 이같은 표현은 주로 악행을 선행으로 전환할 도 한번의 기회를 줄 때 사용되었다(15:1). 즉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이행치 않았던 사울에게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할 기회를 주면서 이와같은 표현을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언급된 다윗의 이 말은 최후 통첩의 성격을 띠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종 다윗의 이 최후 통첩을 무시하고 또다시 다윗을 죽이려 했던 사울에게(27:1-4) 하나님께서 결국 엄중한 심판을 내리셨다는 사실이다(10절; 31:4-6). 만일 왕을 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만유(萬有)의 근원이 되신다는 사상(대상 29:11; 시 103:19)에 근거하여 하나님을 선(善) 뿐만 아니라 악(惡)도 주관하시는 분으로 인정하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다윗은,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하여 사울을 격동시킬 수도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사울이 비록 다윗을 징계하는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됐다고 하더라도, 사울의 행위가 정당자화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악이 나왔다고 함은 하나님께서 그 악을 교사(敎唆)했다는 뜻이 아니라, 단지 악인이 그 소욕대로 저지르는 악을 묵허(默許)했음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악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한 방편이며, 따라서 악한 행동 자체에 대한 책임은 항상 본인이 져야 하는 것이다. 아무튼 다윗은 하나님께서 악한 자까지도 친히 주관하신다는 사상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압살롬의 난(亂)을 피하여 도망을 가는 자신을 향하여 온갖 모욕적 언사를 아끼지 않았던 시므이(Shimei)도, 자신을 징계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되는 것으로 보고 그를 해하지 아니하였다(삼하 16;10, 11).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 다윗의 이 말에 대해서 학자들 간에 다양한 해석이 제시되었다. 즉 (1) 다윗 자신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달게 죽겠다는 뜻(Hertzberg, Klein), (2) 사울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제물을 바쳐주기를 원한다는 뜻(Keil)등이 있다. 그런데 첫째, 여기의 `제물'(* , 민하)은 하나님의 진노를 달래기 위하여(창 8:21) 그분 앞에서 태워지는 소제 제물의 향기를 가리키며 둘재, 사울이 격도오딘 것이 하나님에 의한 것이 아니라 만일 `인자(人子)들'에 의한 것이라면 다윗이 아닌 그들이 저주를 받을 것이라는 본절의 언급에서
절(節)을 이끄는 접속사이다. 따라서 이 접속사 이하는 사우을 격동시킨 사람들이 저주를 받아야 될 이유를 말해준다.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는 땅, 그리고 하나님의 언약이 있는 땅인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이방신을 섬기는 이방인들과 함께 사는 것을 뜻한다. 물론 사울을 격동시킨 자들이 이같은 말을 직접, 구체적으로 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사울을 격동시켜 그로 하여금 다윗을 추격케 함은 곧 다윗에게 이스라엘 땅을 떠나서 살라고 하는 말과 동일한 것이다(Calvin). 그런데 다윗의 이같은 염려는 실제로 현실화되고 말았다. 즉 다윗은 사울로부터 다가오는 생명의 위협을 피하여 결국 이스라엘 땅을 떠나 블레셋 땅으로 들어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27:1, 2). 여호와의 기업에 붙지 못하게 함이니이다 - 여기서 `여호와의 기업'은 하나님의 백성 곧 이스라엘을 가리킨다(출 19;5). 그리고 `붙지'(* , 하스타페아흐)는 `연합하다', `모이다'라는 의미의 동사 `사파흐'(* )의 재귀적 사역형이다. 결국 이 말은 이스라엘이라는 언약 공동체의 유기체적 구성원이 됨을 가리킨다. 따라서 `붙지 못하게 한다'라는 말은 그 언약 공동체에서 강제로 추방시킴을 가리킨다.
=====26:20
본절에서 다윗은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 도망가 결국 이방 땅에서 객사하게 되는 그러한 비극이 없게 해달라고 사울에게 간청한다. 그러면서 다윗은 만일 자신이 타국 땅으로 도망간다면 그것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고자 쫓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 여호와 앞 - 이 말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인 성막이 있으며, 따라서 그분께 제사와 경배를 드릴 수 있는 장소 곧 `이스라엘 땅'을 뜻한다(Hertzberg). 물론 하나님이 온 세상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특별히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땅만을 특별한 약속의 땅으로 지정하셨음도 사실이었다(신 12;5). 그래서 모압 출신의 룻은 자신의 고향 모압 땅을 떠나 유다의 베들레헴으로 들어가면서 `여호와의날개' 아래로 들어간다고 말하였다(룻 2:12). 먼 이곳에서(* , 아르차 미네게드) - 직역하면 `~(앞)으로부터 떨어진 (그) 땅에서'(to the earth away from ~, RSV; to the ground far from~, NIV)란 의미이다. 나의 피로...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 다윗은 이 말을 자신이 타국 땅으로 쫓겨가게 될 경우 나타날 결과로서 말한다. 따라서 다윗은 그러한 비극적인 결과가 나타나지 않도록 사울로 하여금 자신을 추격하는 일을 중지해 줄 것을 호소한다. 아울러 다윗은 여기의이 언급을 통하여 만일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이방 땅에서 죽게 될 경우 사울은 다윗 자신의 그 피에 대하여 결코 무관치 않으며, 그러므로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에 합당한 보수를 받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즉, 만일 다윗 자신이 이방 땅으로 도망가 그곳 우상의 땅에서 죽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사울의 추격으로 말미암은 것이므로 사울은 다윗 자신의 피를 흘리게 한 장본인이 되며, 그럴 경우 아벧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했던 가인처럼(창 4:10) 사울 역시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 이것은 다윗을 잡아 죽이려고 추격하는 사울의 행동이 매우 어리석은 일임을 강조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메추라기'는 `산'이 아닌 광야에 많기 때문이다(출 16:13, 14; 민 11:31). 따라서 메추라기를 사냥하기 위해서는 메추라기가 떼지어 다니는 광야의 들로 나가는 것이 현명한 일이다. 그러나 사울은 어쩌다 산에 한 마리있는 메추라기를 잡으려고 설치는 사냥꾼 같이 무가치하고 어리석은 일을 지금 하고 있다는 의미이다(Winer).
< 설 교 >
사울과 다윗의 마지막 대화
삼상 26:13-20
본문은 다윗을 잡으러 왔다가 오히려 죽임을 당할뻔 하였던 사울과 다윗의 마지막 대화입니다.
1. 다윗의 말
다윗은 사울과 깊은 인연을 맺었습니다. 어릴적에 사울의 집에 가서 악기를 연주하며 가까이에 있었습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긴 이후에는 사울의 가장 가까운 장수였습니다. 사울의 사위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깊은 인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불신앙과 시기심으로 말미암아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에게는 사울을 향한 정이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사울이 마지막으로 만난 이야기입니다. 또한 마지막 대화이기도 합니다. 이후에는 다윗과 사울이 만난 기록이 없습니다. 마지막 대화이기에 다윗은 이후에도 이 대화가 많이 생각났을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죽이기 위해 다시 쫓아온 사울을 향해 말합니다.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19절) 사울이 다윗을 쫓아온 것은 '사울을 충동하는 신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마 둘 다가 맞을 겁니다. 사울도 그런 마음을 가졌고 신하도 그렇게 충동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가지 가능성에서 다윗은 신하의 이야기만 함으로 사울을 배려하며 자존심을 지켜주었습니다. 이것은 진실을 피해가는 거짓이 아니라 왕에 대한 배려하는 마음에서 나온 작은 기술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피해가지는 않았습니다. 사울왕을 지칭하지는 않으면서 진실을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23절) 여호와께서는 자신에게나 사울에게나 공의와 신실을 따라 응답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울의 거짓과 신실하지 못함을 스스로 깨닫도록 말하고 있습니다. 상대방을 깊숙히 찌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도록 어느 정도까지만 던지는 것이 대화에서 지켜야 하는 선입니다. 선을 넘어 너무 깊이 들어가면 대화가 아니라 비난이 됩니다. 사울이 많이 악한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사울을 판단하지 않고 사울이 스스로 자신을 판단할 수 있도록 하고 있습니다. 악한 사람을 향해서도 끝까지 상대방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아름다운 대화입니다.
다윗의 말은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으면서도 스스로가 생각하게 함으로 진실을 비켜가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수 많은 악한 사람을 볼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때로 말로 그 사람의 악함에 동참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사람의 악함을 비난하는 말은 오히려 그 사람의 악함에 동참하는 것이 되기 쉽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아니 때로는 그 악함보다 더 큰 죄가 되기도 합니다. 말은 과장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2. 사울의 말
사울은 두 번째 자신을 살펴준 다윗으로 인하여 또 다시 감복하였습니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21절) 사울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였습니다. '다시 돌아오라'고 말하면서 화해도 청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용히 그 청을 마치 못 들은척 하였습니다. 사울이 그렇게 말하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일시적 회개요 지극히 순간적인 화해이기 때문입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시적인 회개를 회개라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회개는 결코 참다운 회개가 아닙니다. 아무리 진실하게 말하였어도 그 말에 신실함이 없다면 결코 진실한 것이 아닙니다.
사울은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다윗을 향하여 크게 축복하였습니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25절) 사울은 다윗의 적입니다. 그런데 다윗을 향해 사울이 마지막으로 한 말은 그를 향하여 '복을 빌고, 승리를 예견'하였습니다. 우리의 대화가 그래야 합니다. 혹 원수라 할지라도 대화속에서 축복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이 혹 뒤돌아서서는 다른 말을 할지라도 앞에서만이라도 축복을 말하고 우리는 그것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원수에게까지 축복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최소한의 예의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막말하지 마십시오. 조롱하지 마십시오. 상대를 존중하고 끝까지 배려하십시오. 다윗을 죽이려고 그렇게 쫓아다니던 사울이 다윗을 향해 한 마지막 말은 칭찬과 축복이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나를 축복하고 있을까요? 나의 맞은편에 서 있는 그 사람이 나를 축복할까요? 촉복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되십시오.
사울과 다윗의 마지막 대화를 보았습니다. 두 명의 기름 부음 받은 사람입니다. 왕위를 놓고 싸울 수 밖에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대화는 배려와 축복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다윗이 하나님의 사람의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원수인 사울을 감동시킬 정도로 옳은 길을 갔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까지도 감동시킬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대화는 항상 상대방을 배려해야 합니다. 대화에는 진실이 담기돼 항상 사랑이 녹아 있어야 합니다. 대화에서 선을 넘으면 자신의 교만이 담기게 됩니다. 겸손히 '상대방의 인생이라는 선'을 넘지 않고 존중하면서 대화할 때 진실과 아름다움이 담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갚아 주십니다
삼상 26장 18~25절 / 문기태목사
인생을 살아가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경제적인 어려움도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을 안겨 주는 질병도 아닙니다. 아마도 그것은 인간관계일 것입니다. 물론 우리 주변에는 좋은 사람들도 많아서 도움을 주려고 애쓰는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날 때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공연히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거나 별 이유 없이 해를 입히려고 덤벼드는 사람을 만나면 얼마나 괴로운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사람을 가정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학교에서 만날 수도 있습니다. 직장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이웃에서 만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런 사람을 교회에서 만나는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도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습니까? 그런 괴로움을 겪어 보셨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온 힘을 집중해서 맞서 싸우십니까? 피하여 도망가십니까? 힘으로 당할 수 없으니까 마음으로만 미워하고 펑펑 울어 버립니까? '두고보자'하며 보복을 기회를 기다립니까? 이런 상황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우리에게 뭐라고 말씀하실까요?
다윗도 여러분과 똑같은 고통을 당한 적이 있습니다. 다윗은 여러분보다 몇 배나 심하게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다윗은 아직 어린 소년이었을 때에 사무엘 선지자가 집에 찾아와서는 머리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나 아무 것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집에서 무시당하는 막내였습니다. 몇 마리 양떼들과 함께 지내는 목자였습니다. 그에게 아무도 왕관도 왕좌도 왕복도 가져다 주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왕이 누리는 특별한 혜택을 누리고 왕궁을 차지하기는커녕 오랜 세월을 방랑자로 비참한 생활을 하며 지내야 했습니다. 오히려 사울 왕으로부터 목숨의 위협을 받으며 온갖 고통을 감수하며 숨어서 살아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맡기시기에 앞서 왕의 자질을 길러 주시고자 사울 이라는 사람을 사용하여 그를 다듬고 계셨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키가 크고 아주 잘 생긴 사람입니다. 그는 순수한 마음을 가졌고 겸손했습니다. 좋은 가문 출신입니다. 용기도 대단했으며 하나님을 사랑한 사람입니다. 조국의 위기에 앞장서 나가서 나라를 구한 영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기뻐하셔서 기름을 부으시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연합하여 나라를 아름답게 세웠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전쟁에서 적을 쳐부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혀 예언도 해 본 경험도 있습니다. 이만한 사람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울 은 어느 날 여인들이 부르는 '사울 이 죽인 자는 천천 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 이라' 는 노래를 듣고 그만 질투에 사로잡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점차 어둠의 영에 사로잡혀 악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살인의 충동을 받아 다윗을 죽이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살인마로 변합니다. 사울은 자신을 위해 수금을 타며 찬양을 하여 악신을 쫓아 주는 다윗에게 창을 던져 벽에 박아 버리려고 합니다. 적진에 보내어 적의 손에 죽게 만들려고 계교를 쓰기도 합니다. 다윗이 병들었다는 소문을 듣고 다윗의 집에 신하들을 보내 죽이려하기도 합니다. 들에 숨어 있는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군대를 이끌고 수색하기도 여러 번 합니다. 그러면서 사울은 점점 본래의 아름다운 모습을 잃어버리고 추하고 무서운 얼굴을 가진 마귀의 모습으로 변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존경받을만한 왕의 권위도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사울에게는 이제 성령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고 악령의 역사만 함께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서 점차 멀어지셨습니다. 사울에게는 본래의 선한 목표도 사라졌고 오로지 다윗의 제거만을 생각하는 좁은 왕이 되었습니다. 그는 점차 불행하고 초라한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왜 그렇게 변질되었을까요? 자신의 감정에 이끌려 행동하였기 때문입니다. 미운 감정이 생기면 미워하고, 질투의 감정이 생기면 시기하고, 화가 나면 손에 잡히는 대로 창도 집어 던졌으며, 죽이고 싶은 마음이 생기면 살인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살다보니 점점 악신이 사울을 사로잡아 부하처럼 부렸습니다. 사울은 왕의 지위에 있었지만 하나님께 버림받고 아주 불행한 인생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 자신의 감정을 무조건 부정하고 살아서도 안되지만 감정에 충실하다가 사단에게 속아서도 안되겠습니다. 사단은 죄로 오염된 우리의 자아를 이용합니다. 우리의 자아를 통해 감정을 지배하고 감정을 통해 우리의 신앙과 인격을 지배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때로 미운 감정이 앞설 때도 있고 섭섭한 감정이 솟구칠 때도 있지만 우리의 믿음이 감정을 다스릴 수 있도록 굴복시켜야 합니다. 주님의 말슴이 감정을 통제하고 주관할 수 있도록 주님과 말슴앞에 엎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성령 충만하게 하셔서 감정에 지배받지 않고 감정을 조절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날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참으로 이상한 사람입니다. 사울이 그처럼 그를 죽이려고 하는데도 단 한번도 사울과 맞서지 않았습니다. 다윗이 원하면 얼마든지 사울을 해칠 수도 있었습니다. 다윗을 벽에 박으려고 사울이 던진 창을 주워 다시 사울에게 던질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창을 사울을 향해 던지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마음 안에서 '너도 사울을 향해 창을 던져버려라.'하는 소리가 들렸을 것입니다. 만약 그때 다윗이 창을 사울에게 던졌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역시 사울 왕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불행한 왕으로 살다가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을 것입니다. 주변에 사람들도 모두 "사울을 죽이고 당신이 왕이 되시오."라고 말했습니다. 다윗이 사울을 죽인다 해도 정당방위로 얼마든지 변명할 수 있었습니다. 직접 죽이지 않고 자원하는 다른 사람이 사울을 죽이도록 가만히 있을 수도 있었지만 다윗은 적극 사람들을 만류하며 원수인 사울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피하기만 하였습니다. 사울만 없애버리면 편안한 생활이 시작될 것입니다. 사울만 없으면 자신이 왕이 될 수 잇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죽이지 않습니다. 보복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어찌 보면 다윗은 바보입니다. 무기력한 사람입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하는데 다윗은 벨도 없고 쓸개도 없고 그저 무능해 보이는 연약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말씀하기를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롬12:19)
오늘 본문에도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부하들을 이끌고 십 황무지를 샅샅이 뒤지는 사울 왕을 만났습니다. 마침 사울왕은 다윗을 찾다가 밤이 되자 지쳐 진에 쓰러져 잠들었습니다. 그런데 장수와 사병들이 모두 왕의 곁에서 쓰러져 깊이 잠들었습니다. 다윗이 아비새 라는 신하와 함께 사울의 진에 들어 가보니 세상모르고 다 자고 있었습니다. 복수를 할 절호의 기회가 온 것입니다. '역시 하나님께서 내 편이시다. 이렇게 좋은 기회가 찾아오다니.. 이 창을 들어 내리 꽂기만 하면 모든 고생이 끝이 되겠구나..'하는 생각이 간절하였을 것입니다. 게다가 아비새는 "하나님께서 오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나로 단번에 그를 없애버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얼마나 듣기 좋은 말입니까? 그러나 다윗은 아비새에게 넘어가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아비새가 보복하지 못하도록 그를 가로막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다윗이 인격을 많이 수양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그가 마음이 좋아서 보복하지 못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에게 복수할만한 힘이 부족해서 할 수 없이 참은 것입니까? 아닙니다. 다윗에게는 사람에게 시달린 모든 것들을 하나님이 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악을 선으로 갚은 것을 하나님이 아시고 선으로 갚아 주실 것을 의심치 않았습니다.
다윗은 삼상24:15에서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판결하사..'하고 말합니다. 그러자 사울도 19절에서 '여호와께서 네게 선으로 갚으시기를 원하노라'합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며 재판장이 되셔서 공의롭게 판결하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내가 억울하게 당하고 화가 나고 괴로와도 그대로 보복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선으로 갚아 주신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결국 다윗의 원수사랑은 놀라운 결과를 가져옵니다. 그를 죽이려고 하던 사울이 자기의 죄를 깨닫고 고백합니다. 21절에 사울이 가로되 '내가 범죄 하였도다....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왕이 도망자에게 이렇게 말한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원수 사랑은 사울도 감동케 하고 죄를 뉘우치게 하였습니다.
또한 사울로 하여금 다윗을 축복하게 합니다. 25절에 사울이 다윗에게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으리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로다' 하였습니다.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던 사울입니다. 그런 그가 그토록 미워한 다윗을 축복합니다. '네게 복이 있으리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로다' '하나님께서 너를 사랑하시고 기뻐하셔서 너와 함께 하시며 결국 나라를 네가 차지할 것이며 너를 대적하는 이들은 다 망할지어다.' 하는 기도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그 축복은 다윗의 대적인 사울 자신에게는 저주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의 악을 선으로 갚는 모습은 사울로 하여금 잠시나마 크게 변화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래야 합니다. 우리를 괴롭히는 대적을 감동시키고 대적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정도가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겠습니까? 얼마나 놀라운 승리를 맛보며 복음이 진보되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미움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에서 공격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사단이 지금껏 죄를 통하여 지배하던 세상을 예수를 믿는 백성들로 인하여 빼앗길 위기를 느끼기 때문에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그리스도인을 공격합니다. 그러나 사단보다 크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당연히 승리합니다. 따라서 당황하지 말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끝까지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본에서 창간된 한 잡지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었습니다. 그것은 잡지의 표지때문이었습니다. 그 표지에는 평범하게 보이는 회색나비 한 마리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표지에 사람의 손이 닿아 그 사람의 체온이 전달되면 순식간에 회색나비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나비로 변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기존에 있던 사랑의 관념을 깨뜨리셨습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던 사랑의 범위는 가족과 이웃, 친구와 국가에 한정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랑은 하나님 나라 확장의 새로운 도구로 쓰여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은 원수에게까지도 베풀어야 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5:44)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그렇게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단순히 준다고 받아들여지는 것도 아닙니다. 거기에는 철저한 자기부인과 희생이 필요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십자가를 질 때, 회색으로 음산했던 세계는 총천연색의 아름다운 세계로 변합니다. 이 세상이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십자가의 온기가 필요합니다.
믿지 않는 가족으로부터 핍박을 받을 때 미워하지 말고 더욱 사랑을 나타내야 승리합니다. 학교나 직장에서 믿지 않는 이들로부터 억울하게 비난을 받고 괴롭힘을 받을 수 잇습니다. 그렇지만 저들이 던진 창을 집어서 저들에게 던져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애매히 고난을 받고 괴롭힘을 당하지만 보복하려는 마음을 품고 기회를 잡으려 해서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이 '이제는 꼼짝없이 되받겠구나!' 할 상황에서 악을 선으로 갚아 주면 성령께서 그 사람 안에서 역사하기 시작합니다. 그가 감동 받아 눈물을 흘릴 것입니다. 그가 창을 내려놓을 것입니다. 그가 여러분을 존경하고 축복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누군가가 여러분을 보이지 않는 창으로 찌르려고 덤벼들지도 모릅니다. 잘 피하세요. 그러나 맞받아 던지지는 마세요. 목청을 높여 싸우거나 돌아다니며 그를 비난하지는 마세요. 그가 위기에 처하였을 때 '옳다 기회가 왔다' 하고 선으로 갚아 주세요. 그를 칭찬하고 그를 위로하며 오히려 보호해 주세요. 그러면 자신의 죄를 발견할지도 모릅니다. 뉘우치고 변화될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진실한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십니다. 여러분이 사랑의 열매를 훌륭하게 맺은 것이며 주님의 큰 칭찬과 상급이 기다릴 것입니다.
사과나무 곁에 장미 덩굴이 같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장미 덩굴이 사과나무를 보고 자랑했습니다. "나는 너 보다 더 높이 자랐고, 사람들은 나의 아름다움과 향기에 심취하여 나를 찬양하고 있잖아. 그런데 너는 무엇을 자랑하고 싶니?"
그때 사과나무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비록 네가 나보다 더 높게 뻗어 나가고 향기도 좋고 아름답기도 하지만 사람들이 너를 원해서 꽃을 가지려고 하면 너는 가시로 먼저 그들을 찌르잖아. 그런데 나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에게 맛있는 과일을 편리하게 주기도 하고 심지어 나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에게도 나는 과일을 준단 말이야."
우리 안에는 누구에게나 사울과 다윗이 살아 있습니다. 우리는 사울의 인생을 살 수 도 있고 다윗의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감정의 사람이 되면 여러분 안에 있는 사울이 나타날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은 사울을 닮아갈 것입니다. 평안을 잃어 버린채 평생을 사람을 죽이는 창을 던지며 황무지를 방황하며 비참하게 살다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복을 누리지도 못한 채 불행하게 살다가 최후를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갚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이 크게 쓰시고자 다듬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순복 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면 여러분 안에 숨어 잇는 다윗이 나타날 것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찬양이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에는 넘치는 사랑으로 인해 항상 빛날 것입니다. 사람들의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확신을 품고 전진할 것입니다. 여러분 주위에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모여들 것입니다. 여러분을 위해 대적들도 축복하며 존경을 아끼지 않게 될 것입니다.
순간의 감정에 자신을 맡기시겠습니까? 만유보다 크신 예수님께 자신을 맡기시겠습니까?
감동하며 결심은 하지만
삼상 26장 13~25절 / 조약돌묵상
오늘 본문은 창과 물병을 보이며 다윗이 이스라엘의 군대 장관을 책망하자 사울 왕이 다윗의 정당함을 인정하며 추격을 포기하고 철수하는 이야기로, 공식적으로 사울과 다윗의 마지막 만남의 기사입니다. 사울은 자기 목숨을 해치지 않은 다윗을 향하여 자기 잘못을 수용하며 다시는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고 장담합니다. 다윗은 여호와가 자기 생명을 귀하게 여겨 주시기를 바라고, 사울은 다윗의 승리를 기원합니다. 본문은 크게 네 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곧 아브넬을 호출하는 다윗, 응답하는 사울, 추격을 멈출 것을 호소하는 다윗, 사울의 승낙과 축복 등입니다.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 다윗이 사울에게 한 항의로, 자신의 무고함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말입니다. 다윗은 전에 엔게디 동굴 사건에서도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것은 왕의 측근에 있는 간악한 자들의 꾀임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사울 왕의 이기심과 질투 그리고 증오심과 적개심 때문입니다. 다윗이 그렇게 말한 것은 예의상 왕인 사울을 직접 지목하지 않고 우회로 표현한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사울 왕 주변에 중상모략하는 간신들이 없던 것은 아닙니다. 다윗은 시편 7편에서 베냐민 사람 ‘구시’ 같은 자를 직접 지목한 바도 있습니다. 그들은 사울 왕의 증오심을 더욱 부추긴 자로, 사악한 자들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자신을 죽이려는 이유를 두 가지로 설정합니다. 곧 여호와와 사람들입니다. 만약 하나님이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면 기꺼이 죽겠지만, 사람들의 충동에 의해서라면 용납할 수 없고 그들은 저주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제 여호와를 재판장으로 하여 종교적인 차원으로 호소하고 있습니다.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 더이상 어리석은 추격을 하지 말아 달라는 다윗의 간청입니다. 자신은 사울의 왕국을 위협할 수 없는 한낱 메추라기와 벼룩 같은 존재에 불과한데 어찌 왕은 삼 천명이나 되든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였느냐는 말입니다. 메추라기는 광야나 들에 있는 날 짐승입니다. 그것을 잡기 위해서 산에 간다면 현명한 일이 아닙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쩌다 산에 있는 한 마리 메추라기를 잡으러 산에 오르는 것은 미련한 짓이라는 것입니다. 매우 무의미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벼룩으로 비유합니다. 그렇게 하므로 다윗은 그 일이 매우 어리석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 다윗의 합당한 어필에 사울이 전적으로 수긍하는 내용으로, 자신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으니 다시는 해치지 않겠다는 말로 자신이 너무 어리석고 잘못이 크다는 고백입니다. ‘범죄하였도다’는 말은 자신의 실수를 적극적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더 나아가 종교적으로도 잘못했다는 말입니다. 다윗의 성숙한 행동에 사울은 더는 추격의 명분을 세울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때뿐입니다. 다시 추격자로 돌아섭니다.
지난번에도 사울은 다윗에게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릅니다. 동굴에서 옷자락을 잘리고 난 직후입니다.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에게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라고 말합니다. 자신의 창과 물병이 사라지고 난 직후입니다. 앞에서도 그는 다윗에게 ‘나는 너를 학대하였으나 너는 나를 선대하였으니 의롭도다’라고 합니다. 지금도 그는 다윗에게 ‘내가 범죄하였도다 어리석은 일을 하였다’라고 말합니다. 그때에도 그는 다윗에게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이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이다’라며 복을 빌어 줍니다. 이때도 ‘네가 큰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을 것이다’라며 축복해 줍니다.
지난번이나 이번에나 별로 다른 게 없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신기하기까지 합니다. 그는 변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감동만 할 뿐입니다. 그것으로 결심만 할 뿐입니다. 행동으로는 나타나지는 않았으니, 결코 뉘우침이 없는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어쩌면 그를 통해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찬양하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감동하지만, 설교를 들으며 그렇게 굳게 결심하지만, 여전히 실생활에서 예전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 말입니다.
인간의 약한 본성 때문일까요? 분명히 찔림이 있는데요. 우리도 누군가에게 지적을 받을 수 있습니다. 스스로 자책하여 회개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확실한 반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돌이킴이 없는 사울과 다름이 없습니다.
다윗처럼 축복의 말을 듣는 삶
삼상 26:13~25 / 우리평화교회 이약로목사
다윗과 아비새는 사울왕을 죽이지 않고 머리 곁에 있는 창과 물병만 가지고 돌아온다. 죽일 수 있는데도 죽이지 않았다는 증거물이다. 다윗은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고 군대장관 아브넬을 부른다. 기름부음 받은 왕을 제대로 호위하지 않았음을 책망한다. 다윗과 아브넬의 대화에 잠을 깬 사울왕이 다윗을 부른다.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말고 종의 말을 들으라고 다윗은 간곡하게 요청한다. 사람들은 기회가 자주 온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붙잡아야 한다. 사울왕은 이렇게 두 번이나 다윗이 살려주며 기회를 주었지만 다윗을 잡으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결국 전쟁터에서 비참하게 죽임당하고 말았다(26:10).
◈ 다윗은 자신을 메추라기와 벼룩 같은 존재하고 표현한다. 왕이 자신을 수색하러 다니는 것은 어리석고 무가치한 일이라는 뜻이다. 이에 사울왕은 자신이 범죄했고 어리석으며 잘못했다고 인정한다. 하지만 진정한 회개는 아니다. 금방 마음이 바뀌기 때문이다. 어쨌든 이 일을 통해 다윗은 사울왕을 죽일 의도가 없음을 분명히 증명했다. 다윗의 진심을 본 사울왕은 더욱 다윗을 축복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확신한다는 뜻이다. 우리가 살면서 원수 같은 사람을 만난다. 상대방과 똑같이 행동한다면 우린 축복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용서하고 불쌍히 여길 때 다윗처럼 축복의 말을 듣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사람을 보여주는 믿음이 사람이 된다. 우리 힘으로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겸손의 끝판왕, 다윗
삼상 26:13~20 / by lasilin
다윗은 산꼭대기에서 사울의 군대장관이면서도 사울 왕을 지키지 못한 아브넬을 책망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목소리를 알아챈 사울을 '내 주'라고 부르며 자신을 낮추고 사울을 높입니다.
네가 용사가 아니냐(15절) 용사 아브넬의 경호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죽음의 위기에 처함. 이는 하나님께서 지키시지 않으면 파수꾼의 수고가 헛됨을 보여 줌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20절) 매우 어리석은 자를 의미함. 메추라기는 산이 아닌 광야에서 잡을 수 있는 새임
Watching
1. 다윗은 사울을 보호하지 못한 아브넬을 어떤 말로 꾸짖나요?(16절)
16. 네가 행한 이 일이 옳지 못하도다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너희 주를 보호하지아니하였으니 너희는 마땅히 죽을 자이니라 이제 왕의 창과 왕의 머리 곁에 있던 물병이 어디 있나 보라 하니
다윗은 사울 왕을 보호하지 못한 아브넬에게 "마땅히 죽을 자"라고 꾸짖습니다. 왕을 경호하던 군대장관이 자신의 일을 소흘히 하여 왕을 곤경에 빠지게 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브넬이 잠을 자느라 왕을 경호하지 못한 것은 12절 말씀에 하나님께서 아브넬과 모든 군사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지켜주시지 않으면 아무리 용맹한 군대장관이라도 잠들게 하셔서 지키는 것을 헛되게 하십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은혜 베푸실 것을 기도하는 우리 친구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2.다윗은 사울을 어떤 호칭으로 부르나요?(17~18절)
17.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 듣고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 하는지라 다윗이 이르되 내 주 왕이여 내 음성이니이다 하고
18. 또 이르되 내 주는 어찌하여 주의 종을 쫓으시나이까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손에 무슨 악이 있나이까
다윗은 사울을 "내 주"라고 표현합니다. 나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종으로, 사울을 주인으로 표현함으로써 사울을 극존대합니다.
3.다윗은 왜 사울을 높이고 자신은 종과 벼룩으로 표현할까요?
20. 그런즉 청하건대 여호와 앞에서 먼 이 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말게 하옵소서 이는 산에서 메추라기를 사냥하는 자와 같이 이스라엘 왕이 한 벼룩을 수색하러 나오셨음이니이다.
다윗이 이렇게 자신을 벼룩이라고 낮추고 사울을 극존대하는 것은 비록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이지만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음을 인정했기 때문에 자신을 그렇게 겸손하게 낮추는 것입니다.
우리 친구들도 다윗의 겸손함을 배우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 앞에서도 겸손했던 다윗처럼 우리도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소중하게 여기고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Thinking
다윗은 사울의 진영에서 창과 물병을 갖고 나온 후, 산꼭대기로 가서 아브넬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잘못을 지적합니다. 아브넬은 용사로서 사울을 보호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큰 위험에 빠뜨렸기 때문입니다. 이때 사울이 다윗을 부르자, 다윗은 사울을 향해 ‘내 주'라고 부르며 그를 높이고 자신은 종과 벼룩에 비유하며 낮춥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세우셨고, 자신은 그의 종이라는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겸손하게 자신을 낮춥니다. 겸손한 말과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을따르는 주님의 제자가 됩시다.
Feeling
사울을 높이고 자신은 낮추는 다윗을 보며 무엇을 느끼나요?
다윗의 겸손은 하나님을 인정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정하는 다윗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인 사울을 자신의 "주"라고 표현하며 인정합니다. 이러한 겸손함은 하나님께을 인정하는 것에서 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나도 겸손한 말과 행동을 하기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들을 인정해야 합니다.
나를 돌보시는 부모님도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이고, 학교 선생님도 나를 가르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이고, 교회에 목사님도 나를 신앙으로 가르치고 내 영혼을 돌보게 하시기 위해 세운 사람입니다.
내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곁에 있게 하신 소중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에게든지 겸손한 사람이 되는 주님의 제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Acting
관계 안에서 겸손한 자세를 지니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 등교 전 거울을 보며 겸손과 선행 다짐하기
- SNS에 연연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기
- 어른들에게(부모님) 존대말 쓰기 / 겸손을 위하여 기도하기 / 하나님을 인정하며 살기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그 말과 행동을 통해서 자연스럽게 표현이 됩니다. 자신을 높이기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소중한 사람들을 높이고 존중하는 사람되기를 바랍니다.
여호와께서 공의와 신실로 갚으시리니
삼상 26:13~25절 / 꾸준함의 능력
오늘 묵상은 어제 말씀에 이어져 있습니다. 밤중에 사울의 진영에 침투하여 사울을 죽일 있는 기회가 있었지만, 다윗은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거나 전장에서 망하게 될 것이라는 신앙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 후에 다윗은 건너편 산꼭대기 거리가 먼 곳에 서서 말합니다.
가장 먼저 사울의 군대 장관 아브넬을 책망하는 일로 시작합니다. 네가 용사이면서 사울의 군대 장관으로 네 주 왕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책망입니다. 내가 침투해서 왕을 죽일 수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왕의 창과 물병이 어디 있는지 찾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사울이 다윗의 음성을 알아듣고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라고 묻습니다. 기막힌 일입니다. 사실 이 말은 다소 뻔뻔한 말입니다. 사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어둠 속에서 다윗을 알 수 있는 길은 그의 음성뿐이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사울의 진영에 침투했다가 나온 시간이 동트기 전이나 아직 밤이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울이 '내 아들 다윗아'라고 부른 것은 사울의 변덕스러운 마음을 보여 주는 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주고서도(삼상 25:44) 다윗을 '내 아들'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약속도 어기고 열심히 쫓아와서 죽이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쉽고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입니다.
그런 사울에게 다윗은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첫째 18절은 내게 무슨 악이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왜 나를 쫓느냐는 호소입니다. 내가 무엇을 하고 무슨 악을 행했느냐는 억울함의 호소입니다.
두 번째 나를 추격해서 멸하도록 부추기는 이가 여호와시라면 여호와는 다윗 자신을 제물로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충동하는 것이라면 그들은 저주를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 번째 내 피를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흘리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뭐하러 벼룩 같은 자를 죽이러 이렇게 국고를 낭비하느냐는 것입니다. 사울이 다윗을 해치려는 것이 여호와께서 원하시는 일이라면 기꺼이 순종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입니다. 다윗은 여호와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모든 것을 주관하신다는 신앙 고백으로 사울의 집요한 추적도 하나님의 허용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만약 여호와께서 자신을 징계키 위해 사울의 마음을 격동시켰다면, 자신을 제물로 받으시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같이 다윗은 하나님의 뜻이라면 자기 목숨의 회생까지도 감수하겠다는 하나님 주권에 대한 절대 순종의 자세를 가진 성숙한 신앙의 면모를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럴 가능성은 지극히 적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이야기가 나오는 것입니다. 다윗을 해치라고 말하는 자가 인간들이라면 저주를 면치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반복되는 표현으로 아무래도 사울 주변에 다윗을 모함하는 세력들이 있었던 듯이 보입니다. 이런 이간질은 본래 사탄이 즐겨 하는 방법입니다. 간신들의 충동을 받은 사울 왕의 이런 추적은 결국 다윗이 약속의 땅인 이스라엘을 떠나 이방 신들이 숭배되고 있는 곳인 블레셋 땅으로 쫓아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20절에서 여호와 앞에서 먼 이곳에서 이제 나의 피가 땅에 흐르지 않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타국 땅으로 도망함으로써 이국땅에서 죽게 하는 비극이 없게 해달라고 간청하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믿음이 하는 일에 주목해야 합니다. 쉽게 가려는 기회가 있을 때 죽였으면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느라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호소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그냥 죽였으면 아쉬운 소리 할 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에 물병과 창만 가지고 나오고 또 이렇게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의 말을 듣고 또다시 감동했습니다. 아브넬을 책망하는 말, 자신이 죽임 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항변하는 말, 자신은 왕이 추격하여 죽일 만한 위협적인 존재가 하니라는 말을 듣고 감동한 것입니다. 그러고는 또다시 다윗을 쫓아 죽이려 한 것을 뉘우치고 다시는 죽이려 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감동은 이렇습니다. 궁극적인 삶을 바꿔야 합니다. 일시적인 감동으로 신앙생활을 꾸려가려고 하지 마십시오. 단단한 식물로 무장되어 강동보다도 더 크고 단단한 원리로 무장하십시오. 그래서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행동해야 한다는 성경적인 원리를 세우십시오. 할렐루야!
사울의 뉘우치는 말은 들은 다윗은 "여호와께서 각 사람에게 그 의와 신실을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날 왕을 내 손에 붙이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치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날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24~25절)“고 했습니다. 사울은 그렇게 되기를 축복하고 자기 길로 갔습니다.
이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 갖는 기대입니다.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는 기대! 그래서 인간적인 방법으로 보복하거나 인간적인 방법으로 재빠르게 왕이 되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변하는 것입니다. 복음 앞에서 인격과 삶이 변하는 것입니다. 또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황 앞에 복음의 원리를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분명한 복음의 원리만이 세상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인으로 승리하게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야곱이 변화되는데 걸렸던 시간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쩌면 우리의 변화는 평생을 걸리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오늘 우리는 변화를 향한 걸음을 또 옮겨 놓아야 하는 것입니다. 더 나누고 더 베풀고 더 섬기는 삶을 위해서 말입니다. 복음은 그런 삶을 통해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거룩한 주일에 이런 삶을 실천하는 은혜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반드시 승리하리라
이충섭목사 / 의정부승리교회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 가라고 하지 말씀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산까지 가라 광주까지 가라 말씀하시지 않으신다. 그렇게 부르시는 대로 가면 된다. 그러다 보면 부산도 가고 광주에도 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먼 앞길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지는 않으시지만 중간 중간 늘 확인하여 주신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나만 바라보아라” “내 안에 거해라” 하시면서 우리가 잘 가고 있음을 확인시켜 주시며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해주신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많은 병사들을 거느리고 쫓아 다녔던 것을 회개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면서 다윗을 축복하고 인정하는 말씀이다.
다윗은 사울을 죽일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도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다.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살려 주었기에 승리했다. 남편이 화를 내도 아내가 구두를 닭아줌으로 승리하는 것이다. 한 줄의 소망밖에 없어도 낙심하지않고 끝까지 소망의 줄을 붙잡고 승리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은 사울이 다윗을 축복하는 장면이다. 사울이 다윗을 인정하고 축복할 수밖에 없었다.<내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찌로다 내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1. 네게 복이 있으리로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를 함부러 죽이려고 하지 안았다는 것이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생명도 하나님께서 모든 환난에서 구하여 내시기를 바랬다. 생명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이 복이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 목적은 구원받기 위해서 이다. 축복받기 위해서이다.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고 천국가는 믿음이 있어야 한다. 전도하다가 정말 천국이 있냐? 가봤냐?라고 질문을 받아요. 천국이 있으니까 이렇게 추운데도 나와서 전도하는 것이지라고 대답한다.
복을 받았다는 것을 이삭을 보면 알수 있다. 다른 사람들은 잘 되지 않았는데 이삭은 그 땅에서 농사하여 그해에 백배나 얻었고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그 사람이 창대하고 왕성하여 마침내 거부가 되었다고 했다.
이삭이 복 받은 비결은 창세기 26장 25절에 <이삭이 그곳에 제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 거기에 장막을 쳤더니 이삭의 종들이 거기서도 우물을 팠더라>라고 했다.
우리는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면 된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한다. 아비멜렉과 그 사람들이 하는 말이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으므로>라고 한다. 사람이 어디에 있는냐가 중요하지 않다. 사람이 누구와 함께 하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이 너와 함께 함이라고 인정받는 것이다. 다윗이 복받는 비결이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하여 가니라>(삼하5:10)고 하였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복이다. 복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2. 네가 큰일을 행하리라
다윗은 사울의 말대로 큰일을 한 사람이었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기록하고 있다.
다윗은 골리앗을 이겼다. 사울이 죽인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내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고 증거했다. 다윗이 큰일을 할 수 있었던 능력은 무엇일까요? 권력이나 물질이나 명예의 힘이 아니었다. 하나님을 감동시킨 큰일은 하나님께 회개할 줄 아는 모습이다. 다윗이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일이나,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은 인구조사를 한 후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그는 하나님 앞에 침상을 눈물로 적시기까지 회개하는 눈물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겸손한 자들을 통해 큰일을 하게 하신다.
회개할줄아는 사람이 큰 일을 할수 있다. 회개란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이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지만 오랫동안 고난을 받게 되었다. 고난을 통과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여 져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큰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시편 46편 1절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 힘이시니 환난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오래된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하게 이루어갈수 있는 믿음으로 성장했다.모니해도 다윗의 큰 일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준비했다.
역대상 29장 2-3절에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예비하였나니 곧 기구를 만들 금과 은과 놋과 철과 나무며 또 마노와 박을 보석과 꾸밀 보석과 채석과 다른 보석들과 화반석이 매우 많으며 성전을 위하여 예비한 이 모든 것외에도 나의 사유의 금, 은으로 내 하나님의 전을 위하여 드렸노니>고 했다.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을 짓고자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금, 은을 하나님의 전에 받쳤다. 헌금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한다. 기쁨으로 믿음으로 드려진 것만 하나님께 열랍된다. 하나님은 즐겨내는자를 기뻐하신다.
회개하는 것이 큰일이다. 고난을 견디는 것이 큰일을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전을 짓도록 준비하는 것이 큰일을 행하는 것이다.
3.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사울은 지금 다윗과 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다윗이 반드시 승리하리라는 것은 자기는 패할 것이라는 말이다. 다윗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 승리한다.
은과 금은 없으나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
예수의 이름에 권세와 능력이 있다. 예수의 이름은 죄에서 구원한다. 가난을 물리친다. 질병도 고친다. 열등감도 치료한다. 부족함을 만족함으로 채우신다.
우리 앞에는 싸워서 승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있다.
우리는 영적 싸움에서 승리해야 한다. 에베소서 6장 12절에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고 말씀하면서 13절에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세상은 변화하고 있다. 변화하는 물결에 따라 마귀의 전략도 바뀌었다. 마귀는 모든 사람들에게 열심히 교회에 출석하라고 격려한다. 열심히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절대로 예수는 믿지 말라고 한다.
마귀도 예수의 이름의 권세를 알고 있다.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예배 못드리도록 방해한다. 기도 모하도록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영적인 세계에 무감각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눈앞에 당장 있는 현실문제만 바라보고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생각이 없도록하고 있다.
신앙 생활을 교양적으로 취미 생활로 전환시키려고 한다. 십자가의 보혈은 생각하지 말고 십자가를 장식용으로 사용하라고 한다. 교인은 많아도 좋다. 그리스도인은 증가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결의한다.
안디옥교회가 최초로 그리스도인라 일컬음을 받기까지 주예수를 전파했다. 굳은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었다.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있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했다.
주의 손이 우리와 함께해야 한다.
주의 손은 치료의 손, 사랑의 손, 능력의 손이다. 주님이여 이 손을 꼭잡고 가소서!!!
수돗물이 얼지 말라고 수도 한방울씩 떨어지는데 그 다음에 보면 양동이에 가득 차고 넘치는 것을 본다. 한방울을 무시하면 안된다. 하나님과 함께 하겠다고 결심하는 한사람,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겠다는 한사람, 교회성전을 지어야 하겠다는 한사람, 어떤 고난도 이기며 마귀의 유혹을 이기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로 승리하겠다는 한사람을 절대로 무시할 수 없다. 그 사람으로 인하여 차고 넘치는 부흥이 온다. 그 한 사람이 되십시오.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다. 반드시 큰일을 할 것이다.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갈림길
전승문 목사 / 삼상 26:23~25
성도에게는 두 가지 자아가 존재합니다. 육신의 자아와 영혼의 자아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육신의 자아만 있지만 성도는 영적인 자아가 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도에게는 항상 두 가지 생각이 존재합니다. 육신도 원하는 것이 있고 영혼도 원하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로마서 8:5~6)”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사망입니다. 육신의 생각대로 살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영의 생각대로 살면 영원한 생명을 얻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겁니다. 따라서 성도는 언제나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로마서 8:7~8)” 그렇습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성도는 반드시 영의 생각을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도 육적인 사람과 영적인 사람이 있지만 세상도 영적인 세계와 육적인 세계가 있습니다. 영적인 세계는 영적인 안목이 있어야만 보이는 세계입니다. 이른바 영안이 열려야 비로소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그러나 육적인 세계는 누구에게나 보이는 세계입니다. 바로 눈에 보이는 이 세상입니다. 눈에 보이는 육적인 세상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세상은 많은 점이 다릅니다. 가장 크게 다른 점은 육적인 세상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이 있으나 영적인 세상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것입니다. 육적인 세상에 사는 사람은 시간도 공간도 극복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그저 오늘이지 결코 어제도 내일도 될 수 없습니다. 한국은 한국이지 결코 이스라엘이 될 수 없습니다. 성경이 아무리 과거의 은총을 기록하고 또 내일의 소망을 예언해도 육적인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건 그저 지나가버린 성경속의 이야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시간에 있어서도 공간에 있어서도 그저 한 점에 불과한 오늘 그 중에서도 지금 이 찰나의 현실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다릅니다. 아브라함이 과거의 사람이 아니라 오늘을 함께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도 과거에 지나간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사건이며 내일을 보장해주는 사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사람에게는 오늘보다 중요한 것이 내일이고 내일보다 중요한 것이 영원입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는 시간과 공간이 문제가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이냐 한국이냐도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문제가 안 됩니다. 영적인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 영원하신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영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육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눈에는 영원한 세상이 보였지만 사울에게는 육적인 세상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는 하나님이 보였지만 그래서 그 말씀이 믿어졌지만 사울에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광야에서 살아도 평안했지만 사울은 왕궁에서 살아도 불안했습니다. 다윗은 앞날에 대한 소망이 있었지만 사울은 앞날이 항상 염려되고 걱정되었습니다. 불안하십니까? 앞날이 염려되고 걱정되십니까? 믿음의 눈을 뜨십시오. 영의 눈을 뜨십시오. 그래서 창세전부터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 지금도 앞으로도 영원히 함께하실 하나님! 그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의 약속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십시오 :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립보 4:6~7)“ 이 믿음이 내 믿음, 이 신앙이 내 신앙이 되게 하십시오. 그래서 다윗처럼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늘의 평안을 누리며 사십시오.
사해 주변의 엔게디 광야에 있는 한 동굴에서 다윗이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다윗과 부하들이 숨어있는 동굴에 사울이 홀로 들어온 겁니다. 부하들은 사울을 죽이자고 했지만 다윗은 왕의 옷자락만 잘랐습니다. 사울은 어쨌든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하나님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이 눈물을 흘리며 통곡했습니다. 그렇게 왕궁으로 돌아간 사울이 한동안은 다윗을 쫓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안심할 수 없었습니다. 사울은 이미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이라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지금은 사무엘마저 천국에 갔습니다. 나라를 위해 기도하던 위대한 기도의 영웅이 하늘나라로 돌아간 겁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다윗이 바란 광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다 상황을 살핀 후에 이스라엘의 최남단인 마온 성 근처 갈멜로 돌아왔습니다. 그곳에서 나발에게 수모를 당했지만 아비가일의 충고로 큰 시험을 이겨냈습니다. 그러자 다윗이 아비가일을 불러 아내로 삼았습니다. 사실 다윗에게는 사울의 딸 미갈이 정실부인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이 다윗이 떠난 후 미갈을 발디라는 사람에게 보내버렸습니다. 그렇게 아내를 빼앗긴 다윗은 아히노암이라는 여인을 새로운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그 여인이 바로 다윗의 맏아들 암논의 어머니이다. 그리고 두 번째 아내로 아비가일을 맞이한 겁니다. 다윗은 아비가일에게서 길르압이라는 둘째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렇게 얼마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잠시나마 다윗도 평화를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사울이 또다시 다윗을 잡으려고 군사를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있는 곳을 알게 된 사울이 또다시 군사 3천명과 함께 쳐들어온 겁니다. 하지만 다윗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사울이 머지않아 다시 쳐들어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던 겁니다.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더구나 악령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절대로 믿어서는 안 되는 사람입니다. 아무튼 사울의 추격을 예상한 다윗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사울이 진을 치고 있는 곳을 알아내고는 담대하게 찾아갔습니다 : ”다윗이 일어나 사울이 진 친 곳에 이르러 사울과 넬의 아들 군사령관 아브넬이 머무는 곳을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에 누웠고 백성은 그를 둘러 진 쳤더라 (5절)“ 다윗이 가서 보니까 사울이 부하들과 함께 깊이 잠들어 있었다는 겁니다. 기가 막힌 모습입니다. 전쟁에 나간 병사들이 보초도 세우지 않고 다 잠들어버린 겁니다. 3천명이나 되는 병사들 중에 깨어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던 겁니다.
이것이 육적인 세상에 사는 육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다 깊은 잠에 빠져있는 겁니다. 영적으로 보면 깨어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겁니다. 안 됩니다. 이러면 절대로 안 됩니다. 깨어있어야 합니다. 반드시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병사들은 단 한 명도 깨어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러면 망합니다. 이러면 절대로 오래가지 못합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윗이 아예 적진 한 복판까지 들어가 보기로 작정했습니다. 모두가 다 잠들어 있으니 그렇게 해도 괜찮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의 부하를 불러 말했습니다 : ”이에 다윗이 헷 사람 아히멜렉과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에게 물어 이르되 누가 나와 더불어 진영에 내려가서 사울에게 이르겠느냐 하니 아비새가 이르되 내가 함께 가겠나이다 (6절)“ 다윗은 많은 부하들 중에 딱 두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헷 사람 아히멜렉과 요압의 아우 아비새입니다. 그런데 아비새만 같이 가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아히멜렉은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중요한 장면입니다. 이 날 다윗과 함께한 아비새는 다윗의 충신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왕이 된 후에도 계속해서 나라를 위해 충성한 위대한 장군이 된 겁니다. 그러나 헷 사람 아히멜렉은 이 장면 이후부터 종적을 감추고 맙니다. 더 이상은 성경에 언급되지 않는 사람이 되고 만 겁니다.
성도는 부르심 앞에서 주저하면 안 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즉각적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부르심은 기회입니다. 인생이 바뀔 수 있는 중요한 기회입니다. 사실 다윗의 부름은 대단히 위험천만한 부름이었습니다. 아무리 다 잠들었다고 해도 3천명이나 되는 군사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오는 부름이었습니다. 그 3천 명 중에 한 사람이라도 깨어나면 꼼짝없이 죽을 수밖에 없는 위험한 부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다윗과 함께하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 다윗과 함께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아비새가 응답한 겁니다. 그래서 아비새는 다윗을 따른 겁니다. 그러나 아히멜렉은 망설였습니다. 다윗의 부름 앞에서 망설인 겁니다. 그 결과 그는 잊혀진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망설이지 마십시오. 언제나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그래야 하나님이 들어 쓰시는 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그렇게 다윗과 아비새가 적진 한 가운데로 들어갔습니다. 가보니 사울을 가운데 두고 다 잠들어 있었습니다 : ”다윗과 아비새가 밤에 그 백성에게 나아가 본즉 사울이 진영 가운데 누워 자고 창은 머리 곁 땅에 꽂혀 있고 아브넬과 백성들은 그를 둘러 누웠는지라 (7절)“ 참담한 모습입니다. 다윗과 아비새가 중심에 다다를 때까지 아무도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이 모습이 바로 사울의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입니다. 겉으로는 임금이요 3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을 이끌고 있지만 사실은 다 잠든 사람들인 겁니다. 영적으로는 모두가 다 깜깜한 사람들인 겁니다. 잠든 사울을 바라보며 아비새가 말했습니다 : ”아비새가 다윗에게 이르되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그러므로 청하오니 내가 창으로 그를 찔러서 단번에 땅에 꽂게 하소서 내가 그를 두 번 찌를 것이 없으리이다 하니 (8절)“ 하나님이 오늘 당신의 원수를 당신의 손에 넘기셨나이다! 벌써 두 번째 똑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 이 정도면 이건 하나님이 넘겨주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럴까요? 정말 이 정도면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일까요? 아닙니다. 이번에도 시험입니다. 이번에도 역시 마귀가 시험하는 겁니다. 마귀는 절대로 한 번에 물러가지 않습니다. 40일을 금식하신 예수님께도 세 번이나 연거푸 찾아와 시험한 것이 마귀입니다. 그러니 같은 일이 반복된다고 흔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변함이 없는 분입니다. 한 번 아니셨으면 끝까지 아니신 분입니다.
다윗이 아비새에게 대답했습니다 : ”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9절~10절)“ 그렇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을 수 없는 겁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직접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다윗의 눈에는, 영적인 사람 다윗의 눈에는, 사울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 더 이상 가망이 없는 겁니다. 이미 사울을 위해 기도하던 사무엘마저 하늘나라로 돌아가고 없었습니다. 그러면 본인이라도 기도해야 하는데 본인은 물론이고 주변의 어느 누구도 깨어있지 않았습니다. 이러면 가망이 없습니다. 이러면 기도하는 사람이 없으면 가망이 없는 겁니다.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러분은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 맞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희망이 남아있는 사람이 맞습니까? 기도 안 하면 안 됩니다. 기도 안 하면 희망이 없습니다. 기도 안 하면 환난을 이겨낼 가망이 없는 겁니다. 깨어 기도하십시오. 말세지말 대환난의 시대입니다. 반드시 깨어 기도하십시오. 적어도 한 집에 한 사람만이라도 깨어 기도하십시오. 사울에게 그런 사람이 한 사람만 있었어도 희망이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울에게는 깨어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3천명이나 있었지만 깨어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던 겁니다. 성경은 그들을 하나님이 깊이 잠들게 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영적인 잠에 빠져있었다는 뜻입니다 : ”다윗이 사울의 머리 곁에서 창과 물병을 가지고 떠나가되 아무도 보거나 눈치 채지 못하고 깨어 있는 사람도 없었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으므로 그들이 다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더라 (12절)“
다윗은 그곳에서 사울의 창과 물병을 가지고 나왔습니다. 그 창은 사울이 항상 붙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은 다윗이 수금을 연주할 때도 그 창을 들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다윗에게 두 번이나 집어던진 바로 그 창입니다. 그러니까 그 창은 사울이 가장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붙잡고 있어야 안심이 되는 아주 중요한 물건이었던 겁니다. 하지만 사울은 이제 그것조차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정말로 사울의 끝이 가까이 온 겁니다. 다윗이 그곳에서 빠져나와 멀찍이 서서 그들을 깨웠습니다. 이미 자신이 다녀갔음을 알리며 창과 물병이 있는지 살펴보라고 했습니다. 이번에도 사울은 다윗의 음성을 듣고 정신을 차렸습니다. 사실 사울에게는 이런 일이 여러 번 있었습니다. 사무엘을 통해 두 번이나 성령체험을 했었습니다. 또한 다윗을 통해서도 두 번이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던 겁니다. 이번에도 제정신을 차린 사울이 다윗에게 말했습니다 :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 하는지라 (21절)“ 사울이 이제는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합니다. 이제 와서 자신이 잘못했다고 어리석은 일을 했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영적인 사람, 영안이 열린 사람, 다윗이 보기에는 사울이 이미 너무 늦어버린 겁니다.
이렇게 다윗이 두 번째로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엔게디 동굴에서 그리고 하길라산 길가에서 두 번이나 살려준 겁니다. 다윗은 영안이 열린 영적인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영안이 열린 사람이라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님이 보시는 앞에서 사울을 두 번이나 살려준 겁니다. 그래서 말합니다 : ”여호와께서 사람에게 그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으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오늘 왕을 내 손에 넘기셨으되 나는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음이니이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하니라 (23절~24절)“ 이것이 다윗의 믿음입니다. 이것이 다윗이 바라보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의 세상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반드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세상인 겁니다.
오늘 본문은 다윗과 사울이 마지막으로 만나는 장면입니다. 그 마지막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25절 하반절)“ 이렇게 이 두 사람은 헤어졌습니다. 영원히 헤어졌습니다. 영적인 사람과 육적인 사람은 결국 이렇게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래서 갈림길입니다. 어떤 인생을 사느냐에 따라 필연적으로 갈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다윗은 영적인 사람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앞에서 산 사람입니다. 영적인 세계는 시간도 공간도 다 초월하는 세계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육적인 사람입니다. 육신이 전부인 사람, 눈에 보이는 세상, 눈에 보이는 사람만이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사울의 세계는 시간도 공간도 한정된 세계입니다. 시간도 끝이 있고 공간도 끝이 있는 제한된 세계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지금도 살아있습니다. 영안이 열린 영적인 사람에게는 다윗은 살아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