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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6주간 화요일 2007/7/24
말씀의 초대
제1독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복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가리키시며 이르셨다.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오늘의 묵상
Someone told him, “Your mother and your brothers are standing outside, asking to speak with you.” But he said in reply to the one who told him, “Who is my mother? Who are my brothers?” (Mt.12.47-48) 신부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판단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학교에서 많은 학생들이 신부가 되지 못하고 중도 탈락하게 되는데, 그때의 사유 대부분이 바로 ‘판단력 부족’입니다. 제가 얼마 전 신학교 교수 신부님으로부터 판단력이 부족한 신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신학생이 그 교수 신부님께 전화를 걸었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더래요. “신부님, 제가 이번에 재시험 통지를 받았습니다. 제가 이 기간 동안 **단체에서 봉사를 하기로 했거든요. 따라서 재시험을 미리 좀 보면 안 될까요?” 신부님께서는 조금 어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봉사는 땀 흘리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청년들의 모임 연수의 도우미 정도의 역할로 굳이 신학생이 봉사할 필요가 없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신학교의 성적은 자신의 성소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도 가장 우선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이 없어도 될 봉사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그 모습을 보면서 이 신부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네요. “그럼 너 신학교 그만두고 평생 그 봉사나 해.” 사실 살아오면서 우리들은 많은 판단의 기로에 서곤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선택해야 할까요? 내가 좋아하는 것만을 선택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올바른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 성모님과 친척들이 찾아오십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예수님께 말씀드리지요. “보십시오.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스승님과 이야기하려고 밖에 서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아주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그리고는 제자들을 가리키면서 “이들이 내 어머니고 내 형제들이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너무 하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갑게 맞이해야 하는 것이 당연할 것 같은데, 어떻게 자신을 찾아온 어머니와 친척들에게 그렇게 야박한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할 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즉, 세속적인 인연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이다 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우리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실행하는 것보다 세상의 법칙에 선택의 기준을 둘 때가 얼마나 많았습니까? 이제 내 판단의 기준이 어디에 있었는지 다시금 반성해 보세요. 판단력 부족으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헬스클럽에 등록하고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트레이너의 권유로 고가의 단백질 보충제까지 먹어 가면서, 매일매일 거르지 않고 하루 한 시간씩 운동을 하는데도 이상하게도 가슴이 나오거나 팔다리가 굵어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보충제 때문에 영양 과다가 됐는지 ET처럼 배만 뽈록 나왔다. 운동 방법이 잘못됐나? 아니다. 수첩까지 들고 다니며니서 정해진 무게를 열 번씩 들었다 놓았다 하기를 거르지 않았는데 뭐가 잘못이란 말인가? '이러다 보면 몸이 만들어지는 거겠지.'하는 마음으로 계속 운동하기를 두 달여, 그런데도 깡마른 몸은 여전했다. 그렇다고 전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운동을 하다 보니 헬스클럽의 아저씨나 형님들과 꽤 친해진 것이다. "너 그렇게 운동하면 안 돼. 그러니 몸이 안 불지." 여느 때처럼 운동을 하고 있는데, 보디빌더처럼 몸을 가꾼 형님이 다가와 충고했다. "몸은 항상 원상태를 유지하려고 해. 네가 역기를 열 번 들 수 있으면 네 몸은 그 수준에 맞는 근육만 만들어 낸단 말이야.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열 번을 넘겨서 역기를 들어 봐. 지금 근육 상태로는 도저히 들 수 없을 것 같은 열한 번째를 드는 순간, 네 몸은 드디어 고집을 꺾고 새 근육을 만들어 내는 거야. 역기를 열 번 드는 건, 열한 번째를 들기 위해서야. 열번까지만 들고 마지막 한 번을 하지 않으면 그 열번이 아무 의미가 없는거지." 나에게 근육을 만들어 주는 건 내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열 번'이 아니라, 한계를 극복하고 들어 올린 '열한 번'째였다는 것! 너무 힘이 들어서 무언가를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되새겨 보는 교훈이다. 나는 최선을 다하고 있는가? 내 한계 안에서 하는 게 아니라 한계를 넘어 아주 조그마한 노력이라도 더 보태는 것, 그게 바로 최선이다. 지금은 꽤나 불록해져서 티셔츠를 꽈 채운 팔뚝을 만지며 그때 그 형님의 충고를 떠올려 본다.
For whoever does the will of my heavenly Father
◆저는 세례를 받을 무렵 도서관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일요일에 근무를 하고 월요일에 쉬기 때문에 주일미사에 빠지지 않고 가는 사람들이 부러웠습니다. 도서관을 그만두고 가장 기뻤던 일은 주일마다 가족과 함께 미사참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인자(도박중독센터 `희망을 찾는 사람들` 사무국장)
< 코러스의 감동 >
지난 2004년에 개봉된 프랑스 영화 ‘코러스’를 혹시 보셨나요? 함께 본 형제들, 다들 ‘오랜만에 보는 수작(秀作)이다’, ‘왕 감동이었다.’, ‘꼭 우리들 영화’라며 좋아들 하더군요.
성장 통을 겪고 있는 자녀들을 두신 부모님들, 문제성 많은 아이들 때문에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신 선생님들께서도 꼭 한번 보셨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직후, 문제아들만 모아놓은 프랑스 마르세이유의 작은 기숙학교가 영화의 무대입니다. 다들 날개 다친 참새같이 불쌍한 아이들뿐입니다. 토요일마다 하염없이 아빠를 기다리는 전쟁고아 페피노, 엄마의 관심을 끌기 위해 말썽을 일으키는 모항주, 돌아갈 곳 없이 쓸쓸한 여름방학을 보내는 아이들의 학교에 미완성의 악보를 든 마티유가 사감선생으로 부임해옵니다. (R) 기숙학교는 군대가 따로 없습니다. 안 그래도 부모사랑을 못 받아 삐쩍 마른 아이들을 교장은 병사 다루듯이 다룹니다. 잘못한 아이들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밥 먹듯이 아이들을 독방에 가둡니다. 마티유 선생은 출세지향적인 교장, 아이들을 위한 마음은 눈꼽만큼도 없는 교장, 그래서 폭력적이고 강압적인 교장에 온 몸으로 맞섭니다. 마티유 선생은 아이들의 닫힌 마음을 열기 위해 팽개쳤던 악보를 다시 손에 듭니다. 합창단을 만들고 아이들에게 노래를 가르칩니다. 노래를 통해 아이들에게 일종의 ‘해방구’를 만들어줍니다. 주인공인 사감선생 배역을 너무 잘 골랐더군요. 인자한 아버지 같은 선생님, 머리가 시원하게 벗어졌지만, 그로 인해 더욱 편안한 분위기, 대머리라는 아이들의 놀림도 개의치 않습니다. 그것으로 인해 아이들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면 아무 문제없습니다. 지옥 같은 분위기의 기숙학교,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음울한 학교에 마티유 선생은 생기를 불어넣습니다. 따뜻한 마음과, 용서하는 마음을 통해서, 연민과 측은지심을 통해서. 잘못한 아이들에게 만회할 기회를 줍니다. 아이들 한명 한명을 소중히 여깁니다. 아이들 편에서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음울하던 아이들 얼굴에 환한 미소가 깃들게 만듭니다. 마티유 선생 한명의 헌신으로 인해 어두웠던 학교 전체가 밝아지기 시작합니다. 아이들 역시 그로부터 받은 사랑과 꿈과 희망을 마음 깊숙이 간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평생을 살아갑니다. 결국 아이들 때문에 학교를 쫓겨나는 마티유 선생, 그러나 교장 선생의 지시로 인해 아이들은 작별인사도 배웅도 못합니다. 어쩔 수 없었던 아이들은 마음이 담긴 편지를 써서 떠나가는 마티유 선생 뒤로 날립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코러스’를 창공으로 날려 보냅니다. 오다가다 만난 아이들이지만 혈육 이상의 정으로 대하는 마티유 선생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 어머니와 내 형제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이 사람들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었습니다. 보다 큰 사랑, 보다 진실한 사랑을 실천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혈연이나 학연, 지연을 초월할 수 있습니다. 참 사랑은 모든 아이들을 내 친 자식처럼 여기게 만듭니다. 참 사랑은 모든 노인들을 내 어버이로 변화시킵니다. 참 사랑은 모든 가슴 아픈 사람들을 내 가족, 내 혈육으로 바꿉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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