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자 앵베르 주교와 싱가포르 착한목자 성당

앵베르 라우렌시오 (1796~1839) 주교는 조선교구의 제2대 교구장이었다. 聖人으로 한국명은 범세형, 초대 교구장이었던 브위기에르가 조선입국을 앞두고 갑자기 선종하자 로마 교황청이 중국의 사천성에서 선교 중이던 앵베르를 조선 교구 제2대 교구장으로 임명을 한 것이다.
1837년 5월 14일 조선교구의 주교로 서품 되는 성성 식을 마친 다음 임지인 조선으로 향했다. 그때 그의 나이 42세였다. 1796년 4월 15일 프랑스에서 태어나 1819년 12월 외방전교회의 신부가 되었다. 그는 중국대륙을 횡단하여 1837년 12월 17일에 봉황성 변문에 다다랐고 이튿날에 조선 입국에 성공 했다. 이로서 조선교구는 교구 설정 6년 만에 모든 조직을 갖추게 되었다. 앵베르는 먼저 입국한 모방, 샤스땅 신부와 힘을 합쳐 전교에 힘을 썼다. 이로서 1839년에는 신자수가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미 모방신부에게 발탁된 신학생 김대건 최양업 등을 유학시켰다. 또한 정하상, 이승훈의 손자인 이신규 등 네 사람의 성인(成人)을 뽑아서 라틴어와 신학을 가르쳐 빠른 시일 안에 신부로 만들게 했다.
그러나 이런 계획은 1839년의 기해년 박해로(2차 박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1839년 주교는 지방교우들을 돌아보고 있었는데 주교의 입국사실이 발각이 되자 하는 수 없이 수원에서 가까운 바닷가 교우 집에 몸을 숨겼다. 그는 모방신부와 샤스땅 신부를 중국으로 피신하게 했으나 그들이 함께 있기를 원하자 몸조심을 당부하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 배교자의 밀고로 스스로 포졸들에게 자수를 했고 이어서 두 신부 역시 자수를 했다. 한국 땅을 최초로 밟은 프랑스 선교사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세 신부는 결국 한강이 인접한 새남터에서 9월 21일 목이 베어져 순교했다. 망나니들의 칼춤과 북소리가 을씨년스러운 형장에서 효수 후 장대에 매달려 새남터를 내려다 보았을 머리와 백사장에서 나뒹굴었을 시신, 그때 엥베르 라우렌시오 나이 43세였다.
그의 시신은 처형 된지 20일 만에 교우들에 의해서 옮겨져 마포의 노고산에 매장이 되었다가 1843년 경기도 과천 지금의 삼성산에 묻혀진 것을 1901년에 명동대성당 지하 순교자 묘역에 모시게 되었다.
현재 서울 대교구 명동대성당 지하 순교자 묘역에 모셔져 있는 성인 및 치명자의 유해는 기해박해(1839년)시 순교하시고 1984년 시성되신 성 엥베르(Laurent Imbert) 주교, 성 샤스탕(Chastan) 신부, 성 모방(Maubant) 신부, 성 김성우(안토니오), 성 최경환(프란치스코) 등 다섯 분의 성인과
병인박해(1866년)시 순교하신 파리외방전교회 Pourthie J. Antoine 신부, Petitnicolas M. Alexandre 신부 등 2분과 무명 치명자 2분등 총 9분의 유해를 모시고 있다.
***기해박해 : 조선 시대, 1839(헌종 5)년에 일어난 천주교 박해 사건. 프랑스 신부 모방, 샤스탕, 앵베르를 비롯하여 70여 명의 교도가 처형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헌종은 척사윤음(斥邪綸音)을 내리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강화하여 가톨릭교를 탄압하였다
싱가포르 주교좌 성당인 Good Shepherd (착한목자) 성당은 우리 한인 공동체와 인연이 깊은 곳입니다
앵베르 성인이 서품후 프랑스를 떠나 임지인 중국으로 가기 전 당시 신자 몇 가정이 살던 싱가폴에 들러 싱가폴 최초로 가톨릭 미사를 집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순교하기 얼마전 싱가폴의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착한 목자는 자기 양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라는 성경귀절을 인용한 적이 있습니다성인의 순교후 유해의 일부(치아부분)가 이곳으로 모셔졌고, 주교좌 성당의 이름이 그분을 기려 "The Cathedral of the Good Shepherd"가 된 것입니다.
성당내 왼쪽 앞문 옆에 한국 교회를 위하여 순교하신 앵베르 성인의 유해 일부(치아 부분)가 안치되어 있으며
이를 기리는 기념비를 우리 공동체 손으로 제작하여 지난 1986년 6월에 헌정미사를 가진 바가 있습니다
싱가폴 국적의 싱가폴 시민인 발헤체 신부님(ROBERT P. BALHETCHET)은 앵베르 성인에게 깊은 존경심을 갖고 있으며, 그분의 뒤를이어 한국신자들을 돌보신 것에 큰 의미를 두고 계신 듯하며 초대 주임사제인 김 광근 도미니꼬 신부님 부임 전까지(1997년 9월 23일) 한국신 자들을 위해 한인미사를 14년 동안 집전해 주셨습니다. 그 후임으로 유진 바스(Very Rev. Msgr. Eugene Vaz) 신부님을 거쳐 현재는 아드리안 안토니(Rev.Fr. Adrian Anthony)신부님께서 주교좌 성당의 주임사제로 계십니다.
성당 안에 제대를 바라보며 왼쪽편 성가대석쪽 앞에 붉은 액자 모양이
엥베르 주교님 유해 일부(치아 부분)을 모신 곳이다.

성당 정문 왼쪽에 세워진 예수님 상


박해 사건을 조사하다 찾은 사진입니다

우리가 미사 드리는 이곳이 얼마나 역사 깊은 곳인지 알아가면서
이 자리의 소중함을 더욱 깨닫게 되고
이 터전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얼마나 많은 성인들께서 피를 흘리며 자신의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셨는지
감사하는 마음과 그동안 너무나 편하게 미사 볼 수 있던 이 성당과의 인연이
올 크리스마스 미사를 마지막으로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가슴 아프지만 "우리 공동체의" 단합된 기도와 정성을 모은다면
주님께서 새로운 보금자리를 주시리라
믿습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제 블로그에 모셔갑니다~행복한나날되소서^^
보아라님의 댓글에 감사드립니다.
일년 내내 찜통처럼 더운 나라인데
에어컨은 없고 선풍기만 돌아갑니다.
사제복 입고 땀 뻘뻘 흘리시며 미사드리시는
우리 신분님 정말 고생이 많으십니다.
그래도 비록 우리 건물은 아니지만 미사드릴
성소가 있어서 행복했는데 지금 미사드리는
성소를 보수공사하거나 아니면 아예 폐쇄한다하니
마음이 아픕니다
기도 많이 부탁드립니다
모레 싱가폴에 갈 일이 있는데 본 글을 되새기며 잘 참고하겠습니다.
소중히 모셔갑니다. 감사합니다.
혹시 주일에도 싱가폴에 계신가요


개인적으로는 목요일 밤에 탈출기 성경공부하러
성당에 가고 주일에 레지오 모임과 미사 있습니다
싱가폴 오시면 연락주세요
성당 바로 앞에 SMU 대학 근처에 있는
꼬삐띠암에서 (로컬푸드코트) 싱가폴 음식이라도 함께
나누고싶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