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초대
욥기의 마지막 부분에서 주님께서는 욥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신다.
욥은 자신의 한계를 깊이 체험한 뒤에 비로소 주님을 만난다(제1독서).
바오로 사도는 믿음 안에서 사는 삶에 대하여 말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셨음을 믿는 이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제2독서).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이끄는 데 있다.
믿음이 있다면 거친 풍랑 속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복음).
제1독서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 욥기의 말씀입니다.
38,1.8-11
1 주님께서 욥에게 폭풍 속에서 말씀하셨다.
8 “누가 문을 닫아 바다를 가두었느냐?
그것이 모태에서 솟구쳐 나올 때,
9 내가 구름을 그 옷으로, 먹구름을 그 포대기로 삼을 때,
10 내가 그 위에다 경계를 긋고 빗장과 대문을 세우며
11 ‘여기까지는 와도 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너의 도도한 파도는 여기에서 멈추어야 한다.’ 할 때에 말이다.”
제2독서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 사도 바오로의 코린토 2서 말씀입니다.
5,14-17
형제 여러분,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다그칩니다.
한 분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고
그리하여 결국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 우리가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15 그분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살아 있는 이들이 이제는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위하여 돌아가셨다가 되살아나신 분을 위하여
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16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부터 아무도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속된 기준으로 이해하였을지라도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이해하지 않습니다.
17 그래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옛것은 지나갔습니다. 보십시오, 새것이 되었습니다.
복음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4,35-41
35 그날 저녁이 되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호수 저쪽으로 건너가자.” 하고 말씀하셨다.
36 그래서 그들이 군중을 남겨 둔 채,
배에 타고 계신 예수님을 그대로 모시고 갔는데, 다른 배들도 그분을 뒤따랐다.
37 그때에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다.
38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깨우며,
“스승님, 저희가 죽게 되었는데도 걱정되지 않으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39 그러자 예수님께서 깨어나시어 바람을 꾸짖으시고 호수더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니 바람이 멎고 아주 고요해졌다.
4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왜 겁을 내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 하고 말씀하셨다.
41 그들은 큰 두려움에 사로잡혀 서로 말하였다.
“도대체 이분이 누구시기에 바람과 호수까지 복종하는가?”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의 묵상
삶의 여정에서 큰 어려움이 온다고 해도,
예수님 때문에 그 어려움을 잘 극복하였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품어 봅니다.
그런데 막상 그 순간이 오면 신앙으로 극복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머리로는 성숙한 신앙인을 지향하지만,
현실적으로 몸은 그렇게 움직이지 않습니다.
너무 좌절하지 마십시오.
오늘 복음은 이러한 우리에게 위로와 희망을 전해 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악령을 몰아내시고, 병자들을 고쳐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하였습니다.
그런데 돌풍을 마주한 순간,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하고 있음이
어떤 의미인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한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떠하였습니까? 겁을 내며 우왕좌왕 하였습니다.
예수님과 물리적으로 함께 있다고 해서,
눈앞에 펼쳐지는 돌풍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과 ‘함께’하던 제자들도 어려움과 두려움이 생기면,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으로 대응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니 괜찮다고 하며 돌풍에 초연한 모습을 보이지 못합니다.
우리가 성체성사를 통해서 예수님을 우리 안에 모시고 그분께 기도하지만,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두려움이 앞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라고 복음서가 우리에게 위안을 전하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희망적인 부분은,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알고
그분을 흔들어 깨우기만 한다면,
그분께서 눈앞의 돌풍을 향하여
“잠잠해져라, 조용히 하여라!” 하시면서
우리의 일상을 다시 고요하게 만들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살아가지만 우리의 삶은 나아진 것이 별로 없어 보입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다가온 어려움 앞에서 무력하게만 여겨집니다.
그러나 우리 신앙인은 지상 여정이라는 배 안에서,
거센 돌풍은 물론 작은 파도에도 “나를 깨워라!” 하시며 기다리시는
예수님께서 계심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박형순 바오로 신부)-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3년 봄,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KBS 라디오의 방송작가가 건 전화였습니다. 라디오 프로에 나와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고민에 빠졌습니다. 제가 그렇게 말을 잘하지 못하고, 혹시라도 교회에 누가 되는 말을 실수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걱정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주님을 알리는 선교의 한 방법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허락했습니다.
방송 녹음을 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오후 2시에 라디오 홀에서 녹음하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생각만 하면 긴장되었습니다. 미리 방송국에 가서 대기하는데도 이 긴장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담당 피디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신부님은 믿음이 있으니까 처음으로 하는 방송이어도 떨지 않으시겠어요.”
아침부터 긴장하고 초조해하며 떨었는데…. 피디의 말을 들으면서 제가 왜 이렇게 긴장하고 초조해하고 떨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맞습니다. 주님께 온전히 저를 맡기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믿는다고 하면서도 함께하지 않으니 떨지 않아도 될 상황에서도 그렇게 긴장하며 떨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뒤, 긴장하게 될 때 주님께 대한 믿음을 되새겨 봅니다. 주님만 믿는다면 긴장하지 않게 됩니다. 그래서 과거 순교자들이 죽음 앞에서 그토록 의연했나 봅니다.
예수님께서 배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계십니다. 지친 이들에게 편안한 안식을 주시는 분께서 오히려 지치셨습니다. 그만큼 전교여행의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시지만 동시에 인간이기에 지치시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지쳐 주무시고 계시는데, 거센 돌풍이 일어 물결이 배 안으로 들이쳐서 물이 배에 거의 가득 차게 되었지요. 이때 제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바로 스승인 예수님을 깨웁니다.
그토록 예수님과 함께하면서 놀라운 표징을 봐왔지만, 그들은 여전히 겁을 내며 믿음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 제자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일 것입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고 하면서도, 자그마한 일에도 두려움을 갖고 얼마나 힘들어했습니까?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나약함으로 믿음 없는 모습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자들의 방법을 우리도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 안에서 주무시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주님을 부르면서 간절하게 매달려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놀라운 힘으로 우리의 모든 어려움을 말끔히 지워주실 것입니다.
생각하는 것이 인생의 소금이라면 희망과 꿈은 인생의 사탕이다. 꿈이 없다면 인생은 쓰다(바론 리튼).
갈릴리 바다의 풍랑 속 예수(렘브란트)
주님을 바라보세요.
2021년 지난 봄에 갑곶성지는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산수유, 목련을 시작으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복숭아꽃 등 각종 꽃으로 화려한 아름다움이 가득했습니다. 그런데 2020년 작년의 기억이 떠오르지 않는 것입니다. 분명 작년에도 갑곶성지를 지키고 있었는데 꽃을 전혀 보지 못한 것처럼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왜일까요?
작년 4월 15일. 제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 가셨습니다. 병 중에 계실 때, 그리고 돌아가신 뒤에도 제 마음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이 만발했어도 전혀 보지 못한 것입니다.
꽃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 데 매우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난민 수용소에서 배고픔으로 힘든 난민에게 음식이 제일 중요할 것 같지만, 가장 먼저 꽃밭을 만든다고 합니다. 마음의 안정이 먼저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부재로 힘들어했을 때, 주님께서는 분명 아름다운 꽃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를 보지 않고 있었던 저였습니다.
고통과 시련만을 주시는 주님일까요? 이길 힘도 분명히 주십니다. 그런데 주님을 보지 않기에 고통과 시련만 보였던 것입니다.
풍랑 속에서의 제자들 모습을 묵상해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