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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서울시민연대 원문보기 글쓴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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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13.08.30 18:04: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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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과 서대문형무소 (출처=다음 지도) *서대문 독립공원 안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 터와 건물들을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
1.
한양도성의 서쪽 바깥으로 큰 길이 있는 데 이 길의 이름은 ‘의주로’(義州路)이다. 본래 이 길은 조선의 9대 간선도로의 하나로서 서울과 의주를 잇는 길이었으나 지금은 분단으로 끊어진 길이 되었다. 조선 때 이 길은 서울과 중국을 잇는 길이었다. 중국의 사신들은 1천리가 조금 넘는 의주로를 지나 무악재를 넘어 영은문(迎恩門, 중국의 은혜를 맞이하는 문, 1897년 서재필 등이 이 문을 허물고 그 앞에 독립문을 세웠다)을 지나 모화관(慕華館, 중국을 사모하는 관, 지금은 그 자리에 독립관을 지었다)에서 쉬고 남대문을 통해 서울로 들어와서 남대문 옆 태평관(太平館, ‘태평로’는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에서 머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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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된 영은문과 신축된 독립문(1898) |
옛 의주로는 끊어진 길로서 사라진 길이 되었다. 그러나 서울에는 여전히 의주로가 남아 있다. 서울역에서 독립문을 지나 홍은동 사거리에 이르는 길이 ‘의주로’이며, 홍은동 사거리에서 진관내동을 지나 임진각에 이르는 길은 ‘통일로’이다. 현재의 의주로는 서울역에서 북쪽으로 가다가 무악재를 넘어서 끝나는 셈이다. 무악재는 안산과 인왕의 사이에 있는 고개이다. 인왕은 서울의 ‘우백호’에 해당되는 중요한 산이고, 안산은 인왕의 서쪽 바깥에 붙어 있는 산이다. 사실 무악은 안산의 바위 봉우리를 뜻한다. 조선 때 무악재는 서울의 서북쪽으로 나아가는, 멀리 중국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고개였다.
일제는 1907년에 무악재 아래에 감옥을 짓기 시작해서 1908년 12월에 서대문 형무소를 개소했다(시텐노가즈마(四天王數馬)의 설계). 당시의 이름은 ‘경성감옥’이었다.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이곳에 갇혀서 온갖 고초를 다 겪었다. 3.1혁명운동의 상징적인 존재인 유관순 열사(1902~1920)도 바로 이곳에서 혹독한 고문을 받고 옥사했다. 해방 뒤에도 수많은 민주화 운동가들이 이곳에서 갇혀서 역시 큰 고초를 겪어야 했다. 이곳은 식민과 독재의 역사를 증언하는 대단히 귀중한 역사적 성소이다. 민족과 민주를 지키기 위해 누구나 이곳을 찾아서 식민과 독재의 역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우리가 식민과 독재의 역사를 올바로 알고 바로잡지 않는다면, 민족과 민주는 언제나 위기 속에 있을 수밖에 없다.
2.
서대문 형무소는 지난 1987년에 80년만에 사용이 중단됐다. 지금 이곳은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으로 바뀌어 역사 교육의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아마도 여기의 건물들은 지금 서울시에 남아 있는 일제 시대의 붉은 벽돌 건물로는 가장 큰 것일 것이다. 본래 여기에는 3만여평의 땅에 100 동의 건물들이 있었으나 ‘서대문 독립공원’을 만들면서 92동을 철거하고 8동의 건물을 남기고 몇 건물을 복원해서 역사관을 만들었다. 그러니까 지금의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은 원래의 서대문 형무소보다 그 터와 건물이 크게 줄어든 것이다. 사실 서대문 형무소는 최대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가둬둘 수 있을 정도로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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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형무소 정문 |
우선 이곳의 위치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일제는 사람들의 왕래가 많았고 조선과 중국의 관계를 대변하는 무악재 아래에 서대문 형무소를 지었다. 이로써 일제는 조선의 패망과 일제의 지배를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고자 했던 것이다. 일제의 지배는 단순히 무력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일제는 그야말로 총력전을 펼쳤는데, 여기에는 역사전, 사상전 등의 문화전도 당연히 포함된다. 일제는 경복궁을 파괴하고 모욕하고, 근대화의 명목으로 한양도성을 파괴하는 식으로 자기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자 했다. 무악재 아래에 서대문 형무소를 지은 것도 이런 문화전의 일부였다.
첫째, 구속의 기능. 구속은 가장 본래적인 기능으로서 강제로 가두어 두는 것이다. 그런데 일제는 이를 위해 가장 효율적인 건축 기법을 실현했다. 바로 ‘판옵티콘’(pan-opticon, 전방위 감시)의 건축이다. 중앙의 건물에서 여러 개의 건물들이 사선으로 뻗어나가는 형태로 건물들을 지어서 중앙에서 사선으로 뻗어나간 건물들의 방들을 쉽게 감시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이다. 서대문 형무소는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통해 많은 인문사회 학도들에게 잘 알려진 제레미 벤담의 ‘판옵티콘’을 확인할 수 있는 국내의 좋은 사례였다. 그러나 구속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사실상 혹독한 고문인 0.7평 독방에 가두는 것이 흔히 행해졌다. 독립 운동가와 민주 운동가들은 이렇게 험악한 구속 상태에서도 최선을 다해 소통하고 저항했다. 억압이 있는 곳에 저항이 있다는 역사의 교훈을 우리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생생히 확인할 수 있다.
둘째, 고문의 기능. 일제는 지하에 고문실과 고문장치들을 갖춰 두고 독립 운동가들을 혹독히 고문했다. 손톱 밑을 대꼬챙이로 쑤시고, 묶어놓고 코에 고추가루 물을 들이붓고, 거꾸로 매달아 놓고 무차별 매질을 하고, 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아주 작은 방에 가둬놓고, 관처럼 생긴 긴 나무 상자 속에 가둬놓고, 드라마 ‘각시탈’에서도 소개되었듯이 안에 쇠꼬챙이들을 박아 놓은 상자 속에 사람을 가뒀다. 유관순 열사는 이런 무참한 고문에 시달리며 지하감옥에 갇혀서 결국 18살의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 더욱 무서운 사실은 이런 고문이 해방 뒤에 독재 정권에 의해서도 자행됐으며 김근태에 의해 그 악랄한 만행이 세상에 드러난 이근안을 제외한 고문자들은 처벌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근안은 자기가 저지른 고문이 예술이었다며 강연을 다니고 있는 세상이다.
셋째, 살인의 기능. 서대문 형무소의 왼쪽 뒷담장 아래에 작은 단층 목조 건물인 사형장이 있다. 사형수들은 여기서 교수형을 당했고, 시체는 사형장 왼쪽 담장의 시구문을 통해 밖으로 나갔다. 시구문은 본래 무려 200m나 되는 긴 지하 통로였다. 일제는 독립 운동가들을 살해하고 조선 사람들의 눈을 피해 그 시체를 몰래 옮겼던 것이다. 사형장 앞쪽에 큰 ‘통곡의 미루나무’가 있다. 일제에 의해 살해될 처지가 된 독립 운동가들이 이 나무를 붙잡고 울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해방 뒤 독재 정권도 이곳에서 살인을 자행했다. 이승만 정권의 조봉암 살인(1958년), 박정희 정권의 도예종 등 8명 살인(1975)이 바로 그것이다. 2011년 1월 대법원은 ‘진보당’ 당수였던 조봉암의 국가변란과 간첩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고, 2007년 1월 서울중앙지법은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활동’으로 사형된 도예종 등 8명에게 대해 무죄를 선고했으며 검찰이 항소하지 않아 무죄가 확정됐다.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을 둘러보는 것은 사실 감정적으로 많이 힘들다. 일제와 독재에 맞서 싸운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 수감되었던 독립 운동가와 민주 운동가들의 수감 기록으로 방 전체를 도배해 놓은 전시실에서는 멍한 기분마저 든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는 헌법 제1조는 그냥 머릿속으로 말싸움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이 분들이 말 그대로 목숨을 바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천천히 건물들을 옮겨 다니며 전시를 보노라면 마음이 무거워지고 자꾸만 복받치게 된다. 잠깐씩 걸음을 멈추고 한숨을 쉬거나 하늘을 올려다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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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 형무소 부근 |
서대문 형무소 부근은 지난 20여 년 사이에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 금화터널 쪽에는 현저동 재개발로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고, 이어서 의주로 건너 인왕산 입구에도 고층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지금 서대문 형무소 부근은 고층 아파트 단지들로 둘러싸인 형국이다. 서대문 형무소 자리에 들어선 서대문 독립공원이 아파트 단지들을 위한 훌륭한 평지 공원으로 구실하고 있다. 사람들을 괴롭히고 억압하기 위해 만들어진 곳이 이제 사람들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곳으로 바뀌었다. 사실 서대문 형무소는 공포의 상징이었다. 그 역사를 잊는다면 비슷한 공포의 상징이 어디서나 다시 나타날 것이다.
3.
서대문 형무소는 안산의 동쪽 아래에 자리잡고 있다. 서대문 형무소를 둘러보고 안산에 올라가 그 꼭대기에서 서울을 둘러보자. 안산의 꼭대기에는 봉수대가 있었다. 최근에 그것을 재현해 놓았는데 그곳이 안산의 전망대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동쪽으로 인왕산과 서울 시내가 보이고, 남쪽으로 남산과 한강이 보인다. 서울 시내 전망은 인왕산보다 못하지만 한강 쪽 전망은 탁 트여서 인왕산보다 낫다. 북쪽으로 홍은동과 불광동 쪽도 잘 보인다. 그 뒤로 북한산의 서남능선도 아주 멋지게 보인다. 그러나 어느 쪽이나 할 것 없이 고층 아파트 단지들이 들어서서 지상의 모습은 답답할 뿐이다.
안산은 의주로 쪽 바위 봉우리인 무악이 조금 험하지만 대체로 아늑한 산이다. 산 속에는 주민들이 모여 운동하는 곳도 있다. 60대 초의 노인들이 단단한 어깨와 팔뚝의 근육을 자랑하며 철봉과 링을 하는 모습을 보며 조금 놀랐다. 안산에서 짧은 산행을 하며 아주 놀라게 되었는데, ‘무장애 산자락 길’이라는 걸 만드는 공사 때문이었다.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를 위한다는 명분을 내걸고 사실은 건강한 사람들이 운동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 산 중턱 부분을 빙 둘러 시멘트 길과 철-나무 데크 길을 만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람들이 갈 수 없었던 산 중턱의 숲이며 바위가 대거 파괴되고 있다.
안산이 사랑받는 이유는 숲이 잘 보전되어 있기 때문이다. 숲은 산의 옷이다. 숲이 망가지면 산은 그냥 흙 무더기가 되고 만다. 숲이 살아 있어야 산은 생명의 장소가 되고, 사람들도 산에서 큰 매력과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산 속에서도 흙을 밟지 못하고 주로 시멘트 길과 철-나무 데크 길을 다녀야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산 중간을 빙 둘러 완전한 인공의 산책길을 만드는 것은 큰 잘못이다. 숲은 존중하고 보호하는 것이 우선이다. ‘강 죽이기’가 ‘산 죽이기’로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녹조 곤죽’이 웅변하는 ‘강 죽이기’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도 그렇다. 그 부지의 바닥을 모두 시멘트로 포장해 놓아서 걷기도 별로 안 좋고 여름에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열기가 굉장하다. 정녕 흙이 살아 있고 풀이 자라는 바닥으로 만들 수 없을까? 관리의 편리를 위해 넓은 부지를 모조리 시멘트로 덮어 버리는 것은 편의주의를 넘어서 반생태성의 문제를 심각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닌가? 서대문 형무소에서 민족과 민중의 해방을 넘어서 자연의 해방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면 어떨까? 사실 민주주의는 결국 정치적 차원을 넘어서 경제적 차원을 지나서 생태적 차원으로 나아가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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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산 숲 속의 시멘트 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