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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셋으로 도피한 다윗
삼상 27:1-7
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4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5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7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삼상 27:1-7 / [블레셋 족속에게 망명한 다윗] 다윗은 이제 사울의 의도를 명백히 알고 속으로 생각하였다. `이러다가는 내가 어느 날에든 결국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고 말 것인데, 이제는 블레셋 족속에게로 망명하는 것이 상책이겠다. 내가 이스라엘 땅에 머물러 있는 한 사울은 계속 나를 찾아다니겠지만 적어도 내가 블레셋 땅으로 몸을 피하면 결국 나를 포기하겠지.' 2) 그래서 다윗은 부하 600명을 거느리고 국경선을 넘어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다. 그는 마옥의 아들이었다. 3) 아기스는 그들에게 가드의 성안에 있는 집들을 내주면서 살게 하였는데, 다윗과 그의 부하들은 모두 가족을 거느리고 거기서 살았다. 다윗은 이때에 두 아내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하나는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이고, 또 하나는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인 아비가일이었다. 4) 다윗이 가드로 도망갔다는 사실이 사울에게 전해지자 사울은 이때부터 다윗을 찾아다니는 일을 중단하였다. 5) [블레셋의 영주 다윗] 얼마 지나서 다윗은 아기스에게 이같이 간청하였다. `임금님께서 저를 신임하시고 제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려면, 제게 이 나라의 지방 성읍 중에서 하나를 따로 떼어 주셔서 제가 부하들과 함께 그곳에서 살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제가 어떻게 감히 임금님과 함께 이 왕의 도성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6) 그러자 아기스는 오래 생각해 볼 것도 없이 그날에 유다의 최남단에 있는 성읍 시글락을 다윗의 소유로 내주었다. 그래서 시글락은 오늘날까지 유다 왕실의 영지가 되었다. 7) 그러나 다윗이 블레셋 족속의 땅에 거주한 기간은 모두 1년 4개월에 불과하였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 유다를 떠나 블레셋으로 이주합니다.
다윗의 이주(1-2) 다윗은 갑자기 유다 땅을 벗어나 블레셋 지경으로 들어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사울 왕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윗을 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다윗은 사울 왕을 믿지 않았고, 또 사울 왕에 대한 그의 판단은 옳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다음 왕으로 예정된 사람이 아니던가요? 또한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 한 때마다 하나님께서 그를 보호하셨고 사울 왕의 손에서 구출해주지 않았던가요? 맞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였습니다(26:24). 하지만 사울 왕의 추적을 따돌리는 일도 한 두 번이지 이제는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인내의 한계점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다윗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곁에는 두 아내와 자녀들이 있었고, 그를 따르는 육백 명의 부하들과 가족들이 있었습니다. 이제 그는 모두의 살림을 책임져야 할 지도자로서 그들을 안전하게 인도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고심 끝에 다윗은 블레셋 지경으로 향했고, 가드 왕 아기스 밑에서 용병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지만 사울 왕의 추적을 따돌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시글락에 정착함(5-7)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이주하여 사울 왕의 추적은 완전히 따돌렸지만 새로운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에 다윗은 아기스 왕 앞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려고 미친 척한 적이 있습니다(삼상 21:10-15). 다윗은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죽인 블레셋 민족의 공적이었습니다. 다행히 아기스 왕의 신임을 받고 블레셋의 용병이 되었지만, 다윗은 블레셋 민족으로부터 항상 감시받는 요주의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로운 활동을 위해 다윗은 왕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 성읍을 달라고 아기스 왕에게 요청하였고, 아기스 왕은 흔쾌히 그에게 시글락을 내어주었습니다. 시글락은 다윗 일행이 거주하기에 안성맞춤이었습니다. 시글락은 본래 시므온 지파에게 할당된 기업이었으나(수 19:5; 대상 4:30) 그곳을 취하지 않음으로써 여전히 블레셋에게 속해 있었고, 아무도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도적들, 특히 아말렉 족속의 노략질이 자주 발생했던 곳입니다. 아마도 아기스 왕은 다윗을 그곳에 보냄으로써 많은 전리품을 얻고자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곳도 다윗에게는 안전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 다윗과 그 일행은 시글락에서 엄청난 재난을 겪게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 어디에서도 하나님의 돌보심만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성도가 가장 안전하게 거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하나님의 품속입니다.
적 용 : 식솔들을 책임져야 하는 가장의 부담이 너무나도 큽니다. 사건과 사고가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가장은 어떻게 식솔들을 인도해야 할까요? 다윗의 경우를 생각해 보고 말해 보세요.
첫 번째 실패했을 때 세상을 다 잃은 것 같은 깊은 좌절에 빠집니다. 두 번째 실패했을 때 헤어 나오기 힘들 정도의 슬픔을 느끼지만, 처음보단 낫습니다. 세 번째 실패했을 때 견디긴 어렵지만, 조금만 더 해보겠다는 오기도 조금 생깁니다. 그렇게 네 번, 다섯 번… 그러다 보면 어느새 성공 앞에 성큼 다가와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입니다. 아무리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더라도 항상 또 다른 기회가 있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실패라 부르는 것은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추락한 채로 있는 것입니다. 실패가 있어야 무너지지 않을 단단한 성공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호크마 주석
=====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망하리니 - 본절과 같은 다윗의 생각과 판단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사실 사울은 다윗을 해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굳게 맹세하고서도(24:16-22) 그 약속을 스스로 뒤엎는 등,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사울을 믿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었다. 따라서 다시는 다윗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던 십(Ziph) 진(陳) 사건(26:6-12) 직후의 사울의 약속(26;21, 25) 또한 다윗으로서는 믿을 수 없었다. 더구나 사울의 주변에는 사우로 하여금 다윗을 죽이도록 부추기는 인물들이 있었으며(24:9; 26:19), 특히 다윗의 은신처 주변에는 다윗의 행동을 밀고하는 `십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23:19; 24:19), 특히 다윗의 은신처 주변에는 다윗의 행동을 밀고하는 `십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23:19; 24:1; 26:1). 따라서 600명의 군사와 그에 딸린 남녀 가족들을 거느린 다윗으로서는 언제까지나 불안정한 도피 생활을 할수가 없었기에, 당시 사울의 추격권으로부터 가장 안전한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결정하기에 이른 것이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 당시 다윗이 자신에게 우호적인 모압(22;3, 4) 보다 블레셋으로의 도피를 상책(上策)으로 생각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자신과 600명의 군사 및 그에 딸린 가족들의 보다 안전한 도피 생활을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보다 약소국인 모압 보다는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블레셋이 더 좋다고 판단되었으며, (2) 또한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엘과 더 인접한 곳에 블레셋이 모압보다 이스라에로가 더 인접한 곳에 있는 관계로, 유사시의 사건에 대비하는데 더 좋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J.P. Lagn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아무튼 이방의 땅인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들어 가는 것'은 다윗이 최악의 경우 취하려고 했던 선택이었다(26:19, 20). 사울이...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 바로 이러한 목적을 위하여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려고 했다. 따라서 그때 다윗은 블레셋 땅에서 오래 머물 생각은 전혀 없었음이 분명하다.
=====27:2
일어나(* , 야캄) - 성경 용례상 이 표현은 종종 결정적인 그리고 중대한 의지적 결단이 이루어지는 문맥에서 사용되는 단어이다. 함께 있는 육백 인 - 다윗의 휘하 추종 병력으로, 여기의 이 숫자는 앞에서와동일할(23;13; 25:13). 한편, 600명이란 숫자는 분명 20세 이상으로 싸움에 출전할 만한 성인 남자들만을 계수한 수효일 것이다(민 1:3). 따라서 600명의 병력에 딸린 가족들의수효까지 모두 계산하면, 다윗이 거느린 일행의 총수효는 대략 2,500~3,000명 가량 되었을 것이다. 가드 왕...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 비록 블레셋은 이스라엘과는 적대국이었지만 , 그들은 자신들에게 막대한 타격을 가했던 사울 왕에 대해서 특별히 강한 증오심을 가졌던 관계로, 당시 사울의 강력한 경재 자상대이자 증오의 대상인 다윗에 대해서는 오히려 호감을 가졌던 것이다. 바로 이같은 사실을 기대하고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피해 들어간 것이다. 한편 여기서 `가드'(Gath)는 블레셋의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로서(5:8; 수 11:22; 13:3 주석 참조), 그 위치는 당시 다윗과 그의 일행이 피신하고 있던 `십 황무지'에서 북서쪽으로 약 37km 지점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가드 왕'은 블레셋의 5대 방백 중의 한 사람임이 분명하다(5:8 주석 참조). 또한 `아기스'(Achis h)에 대한 자세한 해석은 21:10 주석을 참조하라. 그런데 이때 다윗이, 전에 `아기스'로 부터 도망나온 일이 있었으면서도(21:10-22:1) 다시 그에게로 도피한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이미 오랜 시간이 지나갔으며, (2) 다윗이 아기스의 대적인 사울로부터 계속해서 핍박을 받고 있었음이 그에게까지 틀림없이 알려졌을 것이며, (3) 또한 아기스는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옥의 아들 - 여기서 `마옥'(Maoch)은 왕상 2:39에 나타나는 `마아가'(Maachah)와 동일한 인물인 듯하다(Keil, Smith, Fay). 그렇다면 아기스가 솔로몬이 즉위한 직후까지 블레셋의 가드왕으로서 계속 살아 있었겠느냐 하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아기스가 다윗의 즉위(B.C. 1010년) 직전부터 솔로몬의 즉위(B.C. 970년)직후까지 약 50여년간 왕위에 있었다면 이 문제는 넉넉히 해결될 수 있다(Keil & Delitzsch,Vol. II-ii. p. 255).
=====27: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각기 가족을 거느리고 - 이것은 단지 몇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블레셋 땅에 들어갔던 21장의 경우와는 완전히 상이하다. 다윗과 그의 추종자들이 이처럼 가족까지 모두 데리고 블레셋으로 간 것은 가족들의 안전과 정착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아히노암...아비가일 - 다윗의 최초 아내는 사울의 딸 `미갈'이었으나, 그녀는 사울에 의해 다른 남자에게 다시 시집보내졌기 때문에 다윗 아내의 명단 중에서 빠져있다(25:44).
=====27:4
사울이...수색하지 아니하니라 - 본절의 내용은 다윗이 블레셋으로 도망가기 직전에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11절). 다윗의 도피 생활 - `엔겐디'동굴 사건 후 사울과 일시 화해한 다윗은 사무엘 사후 또다시 위험을 느끼고 `바란 광야'로 내려갔다. 이후 다윗은 다시 `십 황무지'로 돌아왔으나, 십 사람들의 밀고 행위로 다시금 사울의 추격을 당한다. 그러나 십 진(陳)사건으로 또다시 사울의 목숨을 해할 기회가 있었으나 다윗은 사울을 히하지 않았다. 이에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반성했으나, 다윗은 더이상 사울의 변덕스런 마음을 신뢰할 수 없어, 결국 블레셋 땅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로 도피한다. 그리고 아기스 왕으로부터 식읍(食邑) `시글락'을 얻어 그곳에서 1년 4개월 동안 정착 생활을 하게 된다. 이후 다윗의 목숨을 채던 사울은 길보아 전투에서 전사하게 되고, 다윗은 오랜 도피 생활을 마감하고 조국 땅으로 들어오게 된다(24:1-27:12).
=====27:5
내가 당신께 은혜를 받았거든 - 문자적으로는 `내가 당신의 눈에서 호의를 발견했거든'(If I have found favor in your eyes, NIV, RSV)이란 뜻이다. 따라서 이것은 결국 다윗이 `아기스'와 용병(傭兵) 관계를 형성한 것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즉 다윗은 아기스와 용병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필요에 따라 그에게 적절한 요구를 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과 바로 이같은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신의 정치.군사적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을 것이다. 당신의 종이 어찌...왕도에 거하리이까 - 당시 다윗의 군사가 약 육백 명이었다면( 2절). 그의 가족까지의 숫자를 모두 합칠 경우 거의 삼천 명은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많은 숫자는 `왕도'(王都) 가드의 시민들과 갈등을 일으킬 소지가 항상 있었다. 바로 이같은 점을 내세워서 다윗은 왕도 `가드'를 떠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이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표면적 이유에 불과하였다. 즉 다윗이 지방 성읍의 독립된 거주지를 요구한 진정한 이유는 (1)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가드에서 가주할 경우 자신의 백성들이 이교적(異敎的) 혼합주의에 빠져들 우려가 충분히 있었고(5:8, 9; 26:19), (2) 다윗이 아기스의 궁전에 자주 출입할 경우 아기스의 신하들에게 시기의 대상이 될 우려가 또한 있었으며(21:11; 29:4, 5), (3) 그리고 다윗이 가드를 떠날 경우 아기스의 정치적 영향권으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워질 수 있다는 이점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7:6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주었으므로 - 아기스 왕에 대한 다윗의 간청이 즉각적으로 받아들여졌음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곧 아기스가 다윗과 자신을 호혜적( 互惠的) 관계로 인식하고 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드 왕 아기스가 망명객 다윗을 영접하고 그에게 식읍(食邑)으로서 `시글락'을 수여하는 등 다윗을 환대한 것은, 사울과 분명한 적대 관계에 있는 다윗과 그의 무리들을 자신의 신복(臣僕) 내지는 용병(傭兵)으로 포섭하여 자신의 군사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정치적 계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12절). 한편 여기 `시글락'(Ziklaq)은 가나안 정복 후 원래 유다 지파에게 할당되었다가(수 15:31), 그후 다시 시므온 지파에게로 넘어간 성읍이었다(수 19:5; 대상 4:30). 그러나 시므온 지파는 사사시대에 그 땅을 블레셋에게 다시 빼앗겼던 것 같고, 그 이후 그 성읍에는 사람이 거주치 않은 것 같다(Keil, Fay). 그 위치는 가사(Gaza) 동남쪽 약 24km 지점으로, 그때 다윗이 머물고 있었던 가드(Gath) 남서쪽 약 40km 지점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같은 가드로부터의 먼 거리는 가드를 떠나려고 했던 다윗의 진정한 목적(5절 주석 참조)을 넉넉히 충족시켜 줄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이같은 다윗의 목적과는 달리 아기스는 아기스대로 다윗을 그곳에 주둔시킴으로써, 자신의 영토의 남쪽 변경을 다른 민족들이 공격해 들어오지 못하게 방어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을 것이다(Klein). 시글락이...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 여기의 `왕'(* , 말키)은 복수(plural)이다. 따라서 `유다 왕'은, 정확히 하자면 `유다 왕들'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 `유다 왕들'이란 표현은 북왕국 `이스라엘의 왕들'에 대한 상대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 사실은 본서가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할된 후(B.C. 930년)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아울러 본서 전체를 면밀히 고찰할 때 본서에는 북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에 대한 암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러 부수주의 학자들은 본서(사무엘서)의 저작 시기를 분열 왕국 직후(B.C. 930년)로 부터 북 왕국 이스라엘의 멸망(B.C. 722년)사이의 어간으로 본다(Steinmueller, Moeller, Young, Fay) 오늘까지 - 즉 본서가 기록된 때까지를 가리킨다(서론, 3 `기록 연대' 참조).
=====27:7
블레셋 사람의 지방 - 여기서 `지방'(* , 사데)은 사람이 별로 살지 않는 `빈들'을 언급할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6:1; 창 2;5; 왕상 11:29). 따라서 이것은 다윗의 독립된 거주지 시글락이 변방에 위치했음을 시사해 준다. 거한 날 수는 일 년 넉달 - 여기서 `일 년'(* , 야밈)은 문자적으로는 `날들'(days)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사실로 인하여 요세푸스와 칠십인역은 다만 `넉 달'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여기의 `야밈'은 (1) 성경에서 `매년'의 의미로 사용되기도 하며(1:3; 2:19), (2) 또한 `일 년'을 뜻하는 관용적 표현이라는 점에서(Klein; 삿 17:10; 삼하 14:26), 개역 성경의 번역대로 `일 년'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한편 다윗은 바로 이 기간이 지난 후 헤브론으로 돌아가 유다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았다(삼하 2:1-4).
< 설 교 >
인생의 늪
삼상 27:1-7
여러분, 혹시 밀림의 왕자「타잔」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TV에서「타잔」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시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타잔은 문자 그대로 밀림의 왕자입니다. 늘 승리합니다. 그런데 타잔도 이따금 늪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밀림의 왕자라도 꼼짝 못합니다. 움직일수록 늪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게다가 악어 떼까지 등장하면 정말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죠.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되죠? 치타가 와서 도와줍니다. 로프를 던져주면 가까스로 늪에서 빠져나와서 승리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치 밀림과 같습니다. 무서운 늪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한번 빠지면 스스로 헤치고 나오기 힘든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이지만, 잘못해서 늪에 빠지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꼭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겁니다. 죽는 겁니다.
본문 성경에 보니까, 인생의 늪에 빠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죠? 뜻밖에도 다윗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고 이러지리 쫓겨 다녔지만 믿음을 지키고 늘 승리합니다. 그러던 다윗이 안타깝게도 늪에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생각할수록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 삐끗하면 인생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다윗의 이야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최대한 늪에 빠지지 말고, 만의 하나라도 늪에 빠지면 다윗처럼 늪에서 속히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밀림처럼 위험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사무엘상 27장이지만, 31장까지의 내용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27장부터 31장까지 통독해 보시면 좋을 겁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다윗이 빠진 늪 : 죄와 고난의 늪
본문을 보니까 다윗이 늪에 빠지게 되는데, 이 일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기억하기 싫은 몇 가지 오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그동안 신앙을 잘 지켜왔는데, 그만 죄와 고난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십분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혼자 몸도 아니고, 부하가 6백 명에다 그 가족들까지 합하면 이래저래 식솔이 3천명쯤 됐을 텐데, 도망 다니는 게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하도 어렵다 보니까 순간적으로 오판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쉬운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서는 사울 왕에게 늘 쫓겨 다니니까 국경을 넘어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더 큰 고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의 인생은 그대로 끝장났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 아무리 힘들어도 타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은 고난을 피하는 것 같지만, 더 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어쨌든 다윗이 이렇게 해서 늪에 빠지게 됐는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살펴봅니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습니다. 개와 원숭이처럼 항상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는데, 다윗이 국경을 넘어 원수의 나라에 망명한 겁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며 도피 생활을 한 기간은 대략 10년쯤 되는데(B.C. 1020~1010)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본문의 상황은 그 중에 8년쯤 지났을 때(B.C. 1012년경)의 일입니다. 그는 더 이상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블레셋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투항합니다.
본문 2절~3절을 보면 한 마디로 말해서 ‘적과의 동침’입니다. 아마 아기스 왕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 다윗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사울 왕에게 핍박받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잘 이용하면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게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굽니까? 과거 블레셋 군대를 쳐부순 장군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앞에 차기 왕으로 선택되어 이미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선택이 당장에는 괜찮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4절 보시죠.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 하니라” 다윗이 계산한 대로 사울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처음에 수도에 머물었는데, 아기스 왕에게 넌지시 별도의 거주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시글락(6절)을 얻어 부하들을 이끌고 그곳에 정착합니다. 이제는 안전 문제는 물론이고, 먹고 사는 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 셈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더 깊은 고난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제 다윗은 귀순한 사람이므로 아기스 왕에게 잘 보여야 됩니다. 그런데 아기스는 불신자인데다가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 죄를 짓게 됩니다. 코가 꿴 셈이죠. 삼상27:8~12을 보면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가끔 외족을 정벌하러 출정하는데, 대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다 남방을 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스 왕이 쾌재를 부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아주 원수가 되려고 작정을 했다고 판단하고 그를 영원히 자기 신하로 묶어 둘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갑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출정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참전을 요청합니다(삼상 28:1~2, 29:1~2).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이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장차 왕이 될 사람이 동족을 향해 칼을 들이댄다면 얼마나 기기 막힌 일입니까?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이제 그의 장래는 끝장날 판국입니다. 사울 왕에게 핍박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삼상29:2 보면, 마지못해 전쟁터로 끌려가는 다윗의 모습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그 꼬락서니가 가관입니다. 정말 한심합니다. 그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 승리한다고 해도 큰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심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이번에 사울 왕이 전사한다면 다윗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러면 쿠데타를 일으킨 게 됩니다. 왕이 될 수도 없고, 설사 왕이 된다 하더라도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블레셋 장수들이 반대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참전이 취소됩니다(삼상 29:3~11 참조). 장수들이 왕에게 항의합니다. 도대체 무얼 믿고 다윗의 군대를 데리고 가느냐 이겁니다. 한참 싸우다가 이스라엘 군대와 한 패가 되면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에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철군을 명령합니다. 안 그런 척 했지만,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가는 다윗의 쓸쓸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다윗 일행이 시글락에 돌아갑니다. 자리를 비운 게 겨우 3일인데, 그 사이에 큰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노한 겁니다(삼상 30:1~6 참조). 성읍을 불태우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그 참상이 삼상30:3~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망명 생활이 서럽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너무 기가 막혀 넋을 놓고 웁니다. 심지어는 부하들이 돌변해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려고 타협하고 말씀을 어기면 더 큰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수록 오히려 원칙을 지키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가면 시스티나 성당이 있는데, 그 천장화를 미켈란젤로가 그렸습니다. 높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그 큰 그림을 그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주변에 지인들이 염려가 되어 충고했습니다. 그 꼭대기에 그린 그림 누가 자세히 보느냐 이겁니다. 시력이 좋아도 잘 보이지 않으니 대충 그리라는 겁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누가 보기는요? 내가 보죠!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죠!”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렸습니다. 그의 판단이 옳았죠. 요즘 사진 기술이 얼마나 정교합니까? 대충 그렸다면 큰일 날 뻔한 겁니다.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는 없었겠죠.
그러므로 여러분, 함부로 말씀을 어김으로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큰일납니다!
2. 다윗이 늪에 빠진 이유 : 불신앙, 인본주의
다윗이 늪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불신앙, 그리고 인본주의적 태도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죠.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 ”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계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친 채 인간적인 판단을 한 겁니다.
① 불신앙 : 다윗은 지금까지 도피 생활 중에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신앙을 잘 지켜왔습니다. 심지어 사울을 결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그 중에 삼상26:24을 보면, 사울을 살려주고 난 후 그가 한 말이 나옵니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그의 멋진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시선을 놓치면 이렇게 됩니다. 작은 고난에도 흔들립니다. 낙심합니다. 그래서 불신앙으로 떨어집니다.
사 40:27~31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
신앙은 시선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스스로 낙심하고, 마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참담하게 느낍니다. 현실의 문제를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보느냐 이것이 곧 불신앙과 신앙의 차이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태양 등지고 있으면 그림자만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태양이 나를 왜 비춰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죠.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는 저절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있으면서 참담해집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② 인본주의 : 신앙이 흔들리고 불신앙 가운데 빠지면 인간적인 계산만 하게 됩니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잔꾀가 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에는 인간적인 생각이 통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망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삼상 22:5 /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수년 전에 그가 국경을 넘어 블레셋에 피신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갓 선지자를 통해 국경 안으로 들어갈 것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국경을 넘고 말았습니다. 국경을 넘은 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이동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곧 말씀의 선을 넘어간 겁니다. 힘들다고 말씀을 어겼는데, 이게 탈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말씀의 선 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고전4:6 “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 ” 말씀의 선을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내 생각에는 잘 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망하게 됩니다. 잠 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마치 이런 겁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선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한 마디로 아웃(out)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선 밖으로 나가면 우리 인생에서 아웃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지만 다윗처럼 실수를 함으로 늪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고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기다려도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않자 그는 여종 하갈을 첩으로 취합니다. 좀 더 기다려야 했는데, 인간적으로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 후 어떻게 됐나요? 아내 사라와 첩 하갈 사이에 다툼이 생깁니다. 나중에 태어난 적자 이삭과 먼저 태어난 서자 이스마엘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지금까지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으로 남아 있습니다. 말씀의 선을 넘어가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에는 무조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힘들어도 말씀을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게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고난 아닙니까? 힘들다고 피해 가면 더 큰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니다가 군대에 갔답니다. 훈련 받는 것도 힘들지만 내무 검사 받을 때 참 힘듭니다. 지급된 물품이 없어지면 옆의 중대에 가서 훔쳐서라도 채워놓고 내무검사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본인의 물품이 없어진 겁니다. 채워 놓으려면 남의 것을 훔쳐 와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계속 지적당하고 나중에는 욕설은 물론이고 발길질까지 당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중대장이 호출합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습니다. 전도사를 하다 군대에 왔는데 제대 후 학업을 마치면 목사가 될 사람으로, 자기 것을 도난당했더라도 남의 것을 훔치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중대장은 그 후로부터 전적으로 인정해 주었고, 남은 기간 내내 편하게 지냈다는 이야기 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승리한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의로운 고난이요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당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말씀 지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3. 다윗이 늪에서 빠져나온 비결 : 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회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악한 세상을 살다 보면 다윗처럼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함으로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요?
① 하나님의 은혜 : 일단 늪에 빠지면 스스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블레셋 장수들의 반대로 참전이 취소된 겁니다.(삼상29:3~11)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비상 섭리를 행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일입니다. 인간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구원과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글락이 아말렉 족속에게 노략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삼상 30:1~6). 극한 시험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포되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살아남아 있었기에 나중에 안전하게 구출될 수 있었건 것입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 덕분에 살아갑니다.
② 신앙의 회복 :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려운 시험에서 건져 주지만, 우리 편에서는 신앙을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윗은 부하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했나요?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삼상 30:6) 그는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삼상 30:8 /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갔던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승리합니다. 아말렉을 쳐부수고 포로로 끌려간 부녀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물건까지 전부 되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세상이 내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가 자칫 잘못하면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늪에 빠졌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의 어두운 시절
삼상 27장 1~12절 / 이정선목사(타우랑가한인교회)
제가 어렸을 때 선생님들은 위인전을 많이 읽어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물론 독서는 폭넓게 해야겠지요. 셰익스피어도 읽어야 하고, 칸트와 루소도 읽어야 하고, 그리스 로마 신화와 플루타르크 영웅전도 읽어야 하고, 파브르 곤충기나 시튼의 동물기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소월과 윤동주도 물론 읽어야지요. 그렇지만 자라나는 아이들이 꿈을 키우고 또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는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의 모범처럼 좋은 것이 없다는 의미에서 위인전을 많이 읽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이순신 장군이나 링컨 대통령, 퀴리 부인 같은 소위 위인들의 전기가 위인전이라는 카테고리를 형성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유명한 사람들의 자서전이 많이 출판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도 스티브 잡스가 죽자마자 그의 전기가 출판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다 만들어놓고 그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출판한 것입니다. 고전적인 위인전은 위대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을 세상이 객관적으로 평가한 것이라고 한다면, 요즘 출판되는 자서전은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자신을 선전하기 위하여 내놓는 것입니다. 아직 살아 있는 유명하다는 사람들 중에 자서전 내놓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습니까? 특히 대통령 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자서전을 내놓지 않습니까? 물론 자서전은 본인의 직접적인 진술이라는 점에서 가장 정확한 자료가 될 수도 있지만, 자신을 미화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라는 점에서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는 약점도 있습니다.
오늘 읽은 이 사무엘상 27장은 다윗이 자서전을 썼더라면 절대로 이렇게 쓰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예 이 부분을 송두리째 삭제했거나 또는 각색을 해서 전혀 다른 의미로 읽혀지도록 했어야 할 내용입니다. 이 부분은 다윗의 비겁하고 추악한 행동이 담겨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서 가장 어둡고 부끄러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다윗처럼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을 가진 사람이 없음을 잘 압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문에 나오는 다윗의 행적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비겁하고 추악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존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실수하고 넘어지는 법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초가삼간을 태운 것은 의도하지 않은 실수입니다. 그러나 사울은 빈대를 잡으려고 일부러 초가삼간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잡아 죽이기 위해서라면 온 나라를 쑥대밭으로 만드는 한이 있더라도 주저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만큼 사울의 집착은 강했습니다. 다윗을 잡으려다가 오히려 두 번씩이나 자기가 다윗에게 죽임을 당할 뻔했으면서도 그는 다윗 잡으려는 일을 결코 멈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죽기 전에는 결코 포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윗의 자비에 의해 목숨을 건졌으면서도, 그래서 다시는 다윗을 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으면서도, 사울은 돌아서면 다시 다윗을 잡아 죽일 궁리를 했습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자기 손으로 사울을 죽이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언젠가는 다윗이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 뻔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다윗으로 하여금 심한 두려움과 조급함에 빠지게 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그런 생각은 다윗으로 하여금 심한 좌절과 무력감에 빠지게 했습니다. ‘내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잡혀 죽게 될 거야.’ 다윗이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서부터 그의 행동은 전과 같을 수 없게 됩니다. 그의 모든 판단과 결정은 자기가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죽으리라는 결론에 근거해서 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전쟁은 시작하기 전에 승패가 결정되는 수가 많습니다. 반드시 이길 것을 믿고 싸우는 것과 싸워봤자 뻔히 질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싸우는 것의 결과가 같겠습니까?
언젠가는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하들을 이끌고 광야에서 투쟁하는 것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 될 것이고, 공연히 죄 없는 부하들만 고생시킨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부하들의 수가 600명까지 늘었지만, 그 이상 늘어나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이 다윗 편으로 구름떼처럼 몰려들어야 사울과 대항을 하든지 나라를 얻든지 할 텐데, 그럴 조짐이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의 동족들이 다윗을 배신하고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는 일들이 반복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고생하며 온 유다 지역을 배회하였지만, 자신의 근거지로 삼을 만한 손바닥만한 땅도 얻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도망만 다니다가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되니 살아남기 위해서는 사울의 권력이 미치지 않는 이스라엘 영토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하들을 이끌고 블레셋의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이 아기스는 다윗이 도피 초창기 때 찾아갔다가 미친 사람 행세를 하고서야 겨우 살아나왔던 그 아기스입니다. 결국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다윗은 적국 블레셋 왕의 수하로 들어간 것입니다.
이러한 결정을 내리기까지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는 힌트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윗이 지금까지 이렇게 살아온 것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소년 시절에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지하여 적장 골리앗을 때려눕히는 공도 세웠고, 지금 억울하게 사울로부터 핍박을 받고 있는 것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토록 집요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살아남은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 때문인 것입니다. 두 번씩이나 사울의 목숨을 손아귀에 넣었던 것이 단순히 우연에 의한 일이었겠습니까? 아니면 다윗이 뛰어난 예지력을 가졌기 때문입니까? 그것은 아무리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고 해도 오히려 사울의 목숨이 다윗의 손에 달렸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표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런 하나님의 싸인은 보지 못하고 추격해오는 사울의 집요함에 그만 두려움에 빠져 아주 잘못된 결론과 결정에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했더라면 과연 블레셋 왕의 수하로 들어갔을까요?
전에 다윗이 아기스에게 갔다가 쫓겨난 후 아둘람 굴에서 세력을 규합하여 모압으로 갔었습니다. 그때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유다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삼상 22:4-5). 사울에게 쫓기더라도 유다에 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사울에게 잡혀 죽을 것이 두려워 블레셋으로 가겠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유다에 머무는 것이라는 것을 다윗도 잘 알 것입니다. 어쩌면 그래서 선지자에게 묻거나 에봇을 두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릇 행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알면서도 나의 고집과 탐욕을 따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께 기도가 안 나오겠지요. 기도하면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실 것이 뻔하니까요. 기도를 하더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보다 자기주장을 하는 기도를 하게 될 것입니다.
다윗의 부하들이 600명이었으니까 그들의 가족들을 다 합하면 2,3천 명은 족히 되었을 것입니다.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이 이끌고 온 그 대부대를 받아줍니다. 그리고 다윗의 요청에 의해서 시글락이라는 성읍을 내줍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여기 와서 한숨을 돌리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권력이 미치는 이스라엘 땅을 벗어났으니 더 이상 위험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적국 블레셋에 왔으니 여기가 더 위험한 곳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블레셋에서 성읍까지 하나 얻어서 성주 노릇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참 묘한 상황이 되었군요.
가드 왕 아기스는 매우 실용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에게는 명분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적국 이스라엘에서 차세대 지도자로 주목받던 다윗이 찾아왔을 때, 그의 신하들은 죽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다윗은 자기들의 영웅 골리앗을 죽인 원수니까요. 그리고 다윗을 죽이는 것이 후환을 없애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는 두 번째 찾아온 다윗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여 사울을 치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사울이 눈에 불을 켜고 다윗을 죽이려고 하기 때문에, 다윗은 당연히 사울과 싸우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적의 적은 친구가 된다는 싸움판의 논리를 따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에게 성읍까지 내주면서 자기편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사실 그 정도면 아기스로서는 최선을 다했고, 또 스스로는 다윗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럴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이스라엘에서 쫓겨났다 할지라도 이스라엘을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을 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스의 환대에 적당하게 반응하면서 철저하게 아기스를 농락합니다. 마치 아기스에게 협력하겠다는 식으로 완전히 아기스를 속이고 있습니다. 비록 적이긴 하지만,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는 사람을 배신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기스가 좀 어리숙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다윗은 뻔뻔한 정치꾼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에게서 더 이상 정직하고 고결한 성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처음 단추를 잘못 꿰니까 그 다음의 행동도 잘못되어 나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기보다 자신이 처한 위험에 집중하면서 그는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결정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거짓말을 하고 자신에 대한 신뢰를 배반하면서 가드 왕 아기스를 농락합니다. 블레셋으로 간 것도 잘못이지만, 가서도 그는 음험하고 능청스러운 정치꾼으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쫓기면서 고달프게 살더라도 고결한 성품을 잃지 않는 것을 선택해야 할 것 아닙니까? 편안하게 살면서 거짓말을 하고 신뢰를 배신하며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해야 할 일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본래 자신의 모습을 잃어버리고 거짓된 자아로 포장되어 사는 다윗이 어떤 행동을 하게 되는지 더 봅시다. 시글락에 자리를 잡은 다윗이 부하들을 이끌고 군사작전을 나갑니다. 목표는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의 마을들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사람들의 마을을 침공하면 남녀를 무론하고 하나도 살려두지 않고 죽였습니다. 이것은 매우 악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아말렉 족속과 싸울 때 아무도 살려두지 말고 죽이라고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15:2-3). 그것은 하나님의 전쟁이었고 사울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다윗은 하나님의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 자신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전쟁에서 남녀를 무론하고 다 죽이는 것은 아주 잔혹한 인간들이나 하던 일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 짓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이 왜 그렇게 변해버렸을까요?
그 다음에 보면 다윗이 왜 남녀를 다 죽였는지 이유가 나옵니다. 그 마을들을 습격해서 노략한 다음에 아기스에게 갑니다. 그것은 노략물 중에서 아기스에게 공물을 바치기 위해서입니다. 아기스가 묻습니다. ‘오늘은 어느 마을을 노략하였느냐?’ 그러면 다윗이 대답합니다.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네겝은 유다의 남쪽 지역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네겝에 있는 유다 마을과 여라무엘 족속의 마을, 겐 족속의 마을을 노략했다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여라무엘 족속은 유다 지파의 한 씨족입니다. 겐 족속은 원래 모세의 장인 이드로의 족속인데, 유다 족속 중에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삿 1:16). 그러니까 다윗이 하는 말은 유다 족속의 마을들을 노략했다는 것이지요.
그 말을 듣고 아기스는 자기 뜻대로 되어간다고 생각해서 매우 기뻐했습니다. 다윗이 자기 동족 마을을 습격해서 죽이고 노략질을 했으니 이제는 다시 자기 동족에게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고, 영영 자기 수하가 되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다윗이 노린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얻는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이 아기스의 신임을 얻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그저 자기 목숨을 보전하려는 것 외에는 말입니다. 아기스의 신임을 잃으면 거기서 죽임을 당하거나 또는 쫓겨나야 할 테니까요. 그런데 아기스에게 보고한 것처럼 유다 마을들을 침략한 것이 아니라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의 마을들을 침략한 것이거든요. 이 사실이 아기스의 귀에 들어가면 다윗은 끝장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침략한 마을 사람들을 남녀를 불문하고 하나도 남김없이 죽여버린 것입니다.
전쟁을 해서 이기면 재산은 노략하고 사람들은 잡아서 노예로 삼는 것이 당시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죽이는 끔찍한 짓을 자행했던 것입니다. 그토록 고결한 성품을 지녔던 다윗이 이렇게 망가져버렸다는 것이 너무 기가 막힙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애초에 발단이 뭐예요? 사울의 손에 죽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에서 어떻게든 살아야겠다고 자기 목숨을 구하는 일에 전념하다 보니 다른 사람의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생각하는 데까지 이른 것입니다. 자기가 살겠다고 다른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이고 뻔뻔하게 거짓말을 일삼은 다윗이 너무 실망스럽습니다.
그렇게 다윗이 1년 4개월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기쁘나 슬프나, 좋은 일에나 나쁜 일에나 시를 썼던 시인입니다. 그 시들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감사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는 시를 통해서 하나님과 대화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글락에 있던 1년 4개월 동안, 그는 단 한 편의 시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과의 교제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글락에 있던 이 1년 4개월을 그의 생애에서 암흑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나님 없이 살았던 날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의지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칼과 속임수로 연명했던 비참한 시절이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이었다는 평가에 비해 이 시글락에서의 기간은 정말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윗의 좋은 평판을 유지하기 위해 성경은 이 시절의 이야기를 각색하거나 생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은 자서전을 쓰기 원하십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들의 객관적인 평가에 여러분의 삶을 내맡기시렵니까? 그 두 권의 책이 발간된다면 내용이 대동소이할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서로 다를까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서전을 써서 하나님 앞에 제출하게 된다면, 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서전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시편에서 말한 것처럼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시 7:9) 앞에 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어두운 시절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서 자신의 목숨을 위하여 사는 인생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비록 가난하고 고생을 하더라도, 고결하고 아름다운 성품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생애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삶이 어렵고 마음이 낙심될 때
송기성목사 / 삼상 27:1~7
“아 하나님의 은혜로”
제임스 존슨은 “영웅의 참으로 위대한 점은 낙심하지 않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사실 인생의 위기와 절망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렇습니다. 영웅도 낙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웅의 위대한 점은 낙심에 굴하지 않고 용기 있게 극복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생애에는 파란만장한 시련이 참으로 많았습니다. 그는 민족의 영웅이며, 영적인 영웅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도 인간인지라 낙심천만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현실도피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유감스럽고 후회스러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도 그런 실망스러운 모습이 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얼마든지 새롭게 될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해주십니다. 삶이 어렵고 마음이 낙심될 때 깨닫는 신앙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의 체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영적인 사람은 희망과 용기를 갖고 역경과 낙심을 능히 감당하고 극복해 나갈 수 있는 줄 믿습니다.
1.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해결은 하나님께 피하고 맡김에 있다.
사무엘상 26장을 보면 다윗은 자기를 죽이려고 추격해온 사울을 죽일 수 있었음에도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는 것을 여호와께서 금하시나니’(삼상 26:11)라며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그의 신복 아비새에게 진영에 누워 자고 있는 사울의 창과 물병만 가지고 가자고 하였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사울은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되었도다”(삼상 26:21)라고 고백하며 다윗의 안전을 보장하였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블레셋 땅으로 도피했습니다. 그는 사울이 언젠가는 자기를 붙잡아 죽일텐데 그를 피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은 성격이 매우 변덕스러운 자였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 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켜 다윗을 죽이려고 했었습니다. 이런 불안하고 두려운 상황에서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블레셋 땅으로 도피한 것은 불가피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그렇게 하는 것이 자기를 위한 최상책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The best thing for me to do is to escape to Philistia). 그러나 그것은 불안과 두려움에 대한 인위적이고 세상적인 임시방편일 뿐 영적이고 신앙적인 대응이 아니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 땅으로 도피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사울을 피해 기브아를 떠나 놉 땅을 거쳐 그곳으로 간 적이 있었습니다.
이방 땅에서 궁지에 몰린 다윗은 자기 생명을 보존하기 위해서 블레셋 왕 아기스 앞에서 미친 체하고 침을 수염에 흘리며 미치광이로 취급당한 적이 있었습니다(삼상 21:10-15). 다윗은 사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을 면하고자 블레셋으로 도피하였지만 블레셋이 그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진 못했습니다. 도리어 그는 블레셋에서 또 다른 두려움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시행착오를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결국 모든 불안과 두려움의 해결은 하나님께 피하고 맡김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환경을 바꾸고 사람에게 피하는 것이 불안과 두려움을 해소하는 데 약간의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더 큰 불안과 두려움을 초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에게 피하기보다 하나님께 피하고 맡기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불안과 두려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1820년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태어난 조셉 스크라이븐(Joseph Scriven, 1820~1886)의 이야기입니다. 대학 졸업 후 교직에 몸을 담은 그는 1843년 자기 인생의 큰 비극을 겪었습니다. 결혼식 전 날, 약혼녀가 강 위 다리를 말 타고 건너던 중 말에서 떨어져 익사하고 말았습니다. 이 일로 그는 신앙공동체에 자신을 깊이 위탁하게 되었습니다. 그후 아일랜드에서 캐나다로 이주한 그는 1859년 또 다시 불행한 일을 겪게 되었습니다. 약혼녀 캐서린이 결혼하기 전 몹시 추운 날 침례를 받았는데 폐렴에 걸려 4개월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두 약혼녀를 잃은 스크라이븐은 독신으로 살면서 목회자요 전도자가 되어 가난한 사람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섬기는 일에 헌신했습니다. 그런데 아들을 뒷바라지 하던 어머니가 어느 날 중병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상의 어머니를 위로하고 자신의 용기를 북돋고자 시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시편 55편 22절의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라는 말씀에 위로를 받고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What a Friend We Have in Jesus, 찬송가 369장) 찬송시를 썼습니다. 10년 가까이 그는 병든 어머니를 돌보며 이 찬송을 불렀으며, 주변의 사람들도 즐겨 불렀는데 자신들이 존경하는 조셉 스크라이븐의 작품인 줄 몰랐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28에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삶이 힘들고 마음이 낙심될 때에 어디서 위로를 얻고 안식과 새 힘을 얻으시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하신 주님께 피하고 맡김으로써 모든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와 평안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짐을 맡기는 자를 붙들어 주시고 영원히 요동하지 않게 해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내는 계속된다.
다윗이 일어나 그를 따르는 부하 육백 명과 더불어 그리고 그들의 가족들까지 거느리고 블레셋 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갔습니다. 그가 아기스의 수도 가드로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다시는 다윗을 수색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지리적으로 그가 수색할 수 있는 영역 밖으로 다윗이 도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선민이 이방 땅으로 도피하였다는 것은 그 민족에 대한 배신이며,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울은 다윗이 백성들에게 이스라엘의 반역자로 낙인 찍혀 결코 이스라엘의 왕좌를 차지하지 못하게 되리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사실 당시 육백 명의 부하와 그들의 가족들까지 합쳐 약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들을 거느린 다윗이 사울의 추격권으로부터 벗어나는 가장 안전한 길은 블레셋으로의 도피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것을 최상책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대한 영적이고 신앙적인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그는 인생의 위기를 당하였을 때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지 않고 도리어 할례 받지 않은 이방 왕 아기스에게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살게 하소서’(삼상 27:5)라며 간청하였습니다.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시글락을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일년 사 개월을 살았습니다. 그 동안에 그는 이방 왕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주변 족속들을 침략하여 남녀를 살려두지 않았으며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 등 그들의 소유를 약탈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말렉 등을 살육하고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아기스 왕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다윗이 블레셋 땅에 도피해 있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고 기록하였습니다(삼상 27:10, 11). 그것이 알려질까봐 그는 남녀를 다 살려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블렛셋에 있는 동안 내내 범죄하고 타락한 다윗의 모습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다윗은 자신이 블레셋 땅에서 안전을 누리고자 행하였던 비신앙적이고 비양심적인 행위를 매우 수치스럽게 여겼을 것입니다. 다윗의 이와 같은 실망스러운 모습을 통해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진정 하나님의 보호와 인내는 계속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사람은 인간적인 수단과 방법을 다 씁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성공을 거두고 안전하게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런 삶에는 교만과 탐욕 그리고 위선과 거짓의 범죄와 타락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내는 계속되며, 그 은혜로 우리는 위기를 극복하며 인생의 변화를 이루게 되는 줄 믿습니다.
신화가 된 여성, 오프라 윈프리(Oprah Gail Winfrey, 1954. 1~ ), 그녀는 ‘오프라 윈프리 쇼’로 세계 1억 4,000만 명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는 우리 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방송인입니다. ‘토크쇼의 여왕’으로 우뚝 선 그녀는 세계에서 유일한 흑인 억만장자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녀가 이토록 위대한 성공신화의 인물이 된 것은 결코 남달리 좋은 환경과 배경을 가졌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과거는 어두웠습니다. 미시시피 주 산골에서 가난한 흑인 사생아로 태어난 그녀는 9살에 사촌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했으며 문란한 성생활로 14살에 미혼모가 되었고, 그녀의 아들이 2주 후에 죽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마약으로 소녀감호원까지 가기도 했습니다.
오프라 윈프리,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비판과 무시를 받을 만큼 어두운 과거를 가지고 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매주 예배를 드리고 매일 성경과 함께 하는 독실한 크리스천으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그녀는 그녀의 자서전에서 “어려운 지난 날 속에서 나에게 힘이 된 것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었다”라면서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나는 높은 곳에 계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따라 인도 받아요. 그것은 어떤 목소리가 아니고 느낌이에요. 제대로 느낌이 전달되지 않으면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아요. 기분이 언짢을 때는 성경책을 손에 꼭 쥐고 아레사 프랭클린의 어메이징 그레이스(찬송가 305장)를 들어요. 그리하여 마음이 정돈되면 마치 산 위로 날아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아요.” 아멘!
베드로후서 3:9에 사도 베드로는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삶이 힘들고 마음이 낙심될 때에 자칫 잘못하면 하나님을 떠나 세상을 가까이 하며 범죄하고 타락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내는 계속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삶이 힘들고 마음이 낙심될 때 일수록 힘이 되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과 영광을 돌리시기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상처 없이 진주조개가 만들어질 수 없듯이, 고난 없는 그리스도인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보배로운 진주가 상처를 통해 만들어지듯이 보배로운 성도 역시 고난을 통해 만들어집니다. 삶이 어렵고 마음이 낙심될 때에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이 힘들고 마음이 낙심될 때 일수록 하나님께 피하고 맡김으로써 모든 불안과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하나님의 위안과 평안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인간의 범죄와 타락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내는 계속된다는 것을 기억하며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기를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다윗의 망명생활-인생의 한계
곽창대목사 / 삼상 27:1-12
전문
다시 다윗의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10년가량 도망을 다녀야만 했는데 다윗의 도피생활을 3기로 나눌 수 있습니다.
* 1기(삼상 21:1-22:23, 주전 1020-1018년): 놉 - 가드(블레셋) - 아둘람 굴 - 모압(요새) - 헤렛 수풀
* 2기(삼상 23:1-26:25, 주전 1017-1015년): 그일라 - 십 - 엔게디 - 마온 - 갈멜 (광야생활)
* 3기(삼상 27:1-삼하 2:1, 주전 1015-1010년): 가드 - 시글락 - 헤브론 (블레셋으로 망명했다가 유다로 복귀함)
오늘은 다윗의 마지막 도피기간인 제3기 가운데 다윗이 식솔들을 데리고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7절을 보면 거기서 적어도 1년 4개월을 지냈습니다.
왜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들 수 있을 것입니다.
1) 사울 왕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1절).
사울이 다윗을 추격하다가 뒤를 보러 (대변을 보려고) 엔게디 동굴에 들어갔는데 그 동굴에 숨어 있던 다윗이 자기를 죽이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사울은 다윗의 호의에 크게 감사하며 다시는 다윗을 추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24장). 그런데 얼마 후에 사울은 변심하여 다윗을 다시 추격했습니다(26장).
그래서 다윗은 생각했습니다. 1절입니다.
(삼상 27:1)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2)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600여명의 군사들과 그에 딸린 가족들의 생계와 안전을 책임져야 할 자는 다윗이었습니다. 그 동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거친 광야를 전전했습니다. 십 광야, 마온 광야, 엔게디 광야, 바란 광야 등 유다의 남방(네겝)지역의 협곡과 바위산과 굴들을 피난처로 삼아 유랑생활을 했습니다. 다윗 혼자였다면 그래도 괜찮았을 것입니다. 600여명의 군사들과 그에 딸린 아내와 자녀들을 포함하면 2천명쯤 되었을 것인데 그 가운데 부녀자들은 장기간의 광야생활에 무척 지쳤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지친 식솔들에게 당분간 좀 편안하고 안전한 곳을 마련하여 거하게 하는 것, 지도자인 다윗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3) 다윗은 그 당시 가장 안전한 곳이 블레셋의 가드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블레셋은 다섯 성읍의 방백들이 다스리는 도시연합 국가였습니다. 다섯 성읍은 가드,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이었는데 그 중에서 아기스가 다스리는 가드가 가장 강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가드를 망명지로 선택했습니다. 다윗이 가드로 망명한 것을 사울 왕이 알면 더 이상 자기를 추격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한 것입니다(1절 하반절). 그리고 여차하면 유다 땅으로 쉽게 복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블레셋의 주요 성읍들 가운데 가드가 유다 지파의 땅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한 것,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블레셋 가드에서 제법 잘 지냈다고 보도합니다. 3절에서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했다고 하는데 이는 가드의 아기스 왕이 다윗과 그의 일행을 흔쾌히 맞아주었기 때문입니다.
6-7년 전에도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하여 도피생활을 시작할 때 먼저 블레셋의 아기스 왕에게로 피했지만 그때에는 상황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미치광이 흉내를 하며 거기서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크게 달라졌습니다. 그때는 다윗 홀로 망명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그에 딸린 식솔들이 꽤 되었습니다. 그때는 가드가 자랑하는 골리앗이 다윗이 던진 물맷돌을 맞아 수치스럽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습니다. 그러니 가드의 사람들이 다윗을 좋아할 리 없었습니다. 지금은 다윗이 사울의 대적이 되어 유랑생활을 하고 있는 것을 가드의 주민들이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아기스 왕은 다윗이 망명함으로써 다윗의 군사들 600여명이 자기의 군사가 된 것, 아주 마음에 들었을 것입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이기려면 최소한 다윗이 이스라엘에 있어서는 안 된다고 아기스는 생각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사울 왕의 정적인 다윗이 자기편이 되면 이스라엘을 침공할 때 승산이 더 클 것으로 계산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칠 때 다윗의 부하들을 용병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기에 아기스는 천군만마를 얻은 셈입니다.
4절: 다윗이 예상한 대로 사울의 추격은 중단되었습니다.
5절: 다윗이 아기스에게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자기 일행들에게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렇게 요청한 이유를 세 가지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1) 다윗의 일행이 블레셋 주민들과 장기간 동거하는 것이 편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부살이를 하면 눈칫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블레셋의 우상숭배 문화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3)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자기의 사람들을 아기스가 아니라 자신이 책임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가 건강하게 형성될 것입니다.
6절: 아기스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글락을 줍니다. 시글락은 가드에서 남서쪽으로 40km쯤에 위치한 성읍으로 본래 유다 땅이었는데 블레셋이 점령했습니다. 그 시글락을 다윗이 받음으로써 시글락이 유다 땅으로 회복된 것입니다. 이 이후로 시글락은 유다 왕의 땅이 되었습니다. 왕실의 소유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7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글락에서 1년 4개월을 지냈습니다. 꽤 긴 세월입니다. 다윗의 사람들이 수년 만에 충분히 안식의 시간을 가졌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8-12절: 다윗은 부근에 있는 이방민족들을 침노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자기 사람들의 생계를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방민족들이 유다 땅에 들어와 자주 약탈을 일삼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이 유다 백성들의 원수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않았지만 가축들과 의복은 전리품으로 수거했습니다. 그리고 귀환하는 길에 전쟁의 결과를 보고하기 위하여 아기스에게로 갔습니다.
10절: 아기스가 다윗에게 오늘은 어디를 침노했는지 질문합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유다의 남방(네겝)을 침노했다고 허위보고를 합니다. 아기스로부터 시글락을 받은 다윗이 답례로 아기스에게 충성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기스로부터 신뢰를 받으려고 허위보고를 한 것입니다.
11절: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들을 포로로 끌어와 종으로 부리는 것이 그 당시의 관례였지만 다윗은 남녀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허위보고가 탄로 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염려는 판단착오를 일으키고 이어 거짓말을 낳고 마침내 두려움으로 발전합니다. 몸은 편안했지만 다윗의 마음은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12절; 다행스럽게 아기스가 속아 넘어갔습니다. 아기스는 생각했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영원히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나의 부하가 될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다윗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저는 다윗의 처신이 이해가 갑니다. 사무엘서의 기자도 다윗의 잘못을 크게 부각하지는 않습니다. 다윗도 우리와 같은 사람입니다. 신앙의 부침이 있기 마련입니다. 영적인 상승기가 있고 또 침체기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성경학자들은 다윗이 블레셋에서 망명생활을 한 16개월의 기간을 영적인 침체기라고 평가하는데 그리 틀린 말은 아닙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다윗이 다르게 처신했다면 어땠을까?”라고 아쉬운 생각이 듭니다. 아쉬운 점을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겠습니다.
1)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것, 왜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을까?
블레셋으로의 망명은 섣불리 결정해야 할 사안이 아니었습니다. 중대한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망명의 여부를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에봇이 있었으므로 에봇에 있는 우림과 둠밈으로 하나님의 뜻을 물었어야 했는데 이미 우리가 살펴본 대로 다윗이 가드로 망명해도 좋은지 하나님께 물어본 흔적이 없습니다.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겼습니다(1, 11절).
1절: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11절: 그의 생각에
물론 오랜 기간 고달픈 나날을 보내느라 일행들이 크게 지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더 이상 버티기에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해는 할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의 생각 그 자체는 잘못이 아닙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다윗의 생각이 하나님과 무관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은 생각, 자기 마음에만 머무는 생각은 인생의 한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쉽다는 것입니다.
2) 다윗이 유다 땅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
다윗 일행이 유다 땅에 머물렀다면 사울 왕이 또 다윗을 추격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지켜주셨던 하나님께서 방패와 산성과 피난처가 되어주셨을 것입니다.
수년 전에 다윗과 그의 일행들이 모압에 잠시 체류했을 때 선지자 갓이 유다 땅으로 돌아가라고 해서 그 말에 순종하여 유다 땅으로 복귀한 적이 있었습니다(22:4-5). 그 후로 다윗은 사울 왕의 추격을 받아 수년 간 유다 광야를 전전하며 험난한 세월을 동지들과 함께 잘 견뎠습니다. 물론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간은 왕업을 훈련하는 기간이었고 그로써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들과 견실한 공동체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랬는데 지금은 왜 뒤로 물러났는지, 아쉽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백성들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 다윗이 돌보아야 할 백성은 일차적으로는 자신과 함께하고 있는 600여명의 부하들과 그에 딸린 가족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입니다. 그 백성들이 지금 사울의 불의한 정권 하에서 고통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적어도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살고 있는 현장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더라면 자기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윗은 하나님의 강력하고 섬세한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아쉽다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시글락에서 제법 평온하게 지내던 다윗의 공동체에 최고의 위기가 닥쳤습니다(28:1-2). 진퇴양난의 큰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습니다. 그 위기가 하나님의 징계일까요? 그로써 다윗과 그의 공동체가 깨달은 것이 무엇일까요? 다음주일에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설교 부제를 “인생의 한계”로 정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직면한 시련과 그로써 경험하게 되는 인생의 한계는 상대적입니다. 지금 내가 당한 시련이 다른 사람들의 시련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별 심각하지 않다고 주변의 사람들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뭐 그걸 가지고 유난을 떠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련을 당한 당사자는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시련을 돌아볼 여유가 생기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오히려 자기가 당한 시련에 매여 버립니다. 그렇게 되는 것, 어쩔 수 없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렇습니다. 크고 작은 시련들이 개인과 가정과 일터와 나라와 세계에 찾아듭니다. 크든 작든 시련은 우리에게 버겁고 무겁습니다. 그로써 인생의 한계를 절감합니다. 성도와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이런저런 시련으로 힘겹게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네 인생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세상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을 향하여 몸부림쳐야 합니다. 시련에 직면하여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앞이 막막할 때, 인생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우적거릴 때,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저는 오늘의 설교를 정리하면서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 우리가 사용해야 할 성경의 지혜 5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5가지는 늘 들었던 말씀입니다. 늘 들었던 말씀이기에 특별한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말씀입니다. 신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 우리는 신앙의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한계를 딛고 일어설 수 있습니다. 어두운 오늘을 헤치고 밝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물어라!
앞서 말씀드린 대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묻기보다는 자기의 생각만으로 블레셋으로의 망명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의 생각, 우리의 경험과 상식을 따르는 것에 길들여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반복하여 말씀합니다. 대표적인 말씀 한 군데만으로도 충분합니다.
(엡 5:15-17) 『[15]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러분, 매사에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의 뜻을 묻는 자가 지혜로운 자입니다. 특히 시련을 당할 때, 인생의 한계를 느낄 때, 그냥 주님께 물어보면 됩니다. “주님, 이 시련에 담긴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렇게 묻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겸손이요 참된 지혜입니다.
2)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그렇게 물어도 하나님께서 속 시원하게 답하지 않으실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뜻을 물으면 우리 속에 내주하고 계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시든지 이미 새기진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은 어김없이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인데 그 약속의 말씀을 붙잡으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시련의 때에 발휘해야 할 믿음입니다.
우리가 붙잡아야 할 약속의 말씀은 성경에 무수히 많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약속의 책입니다. 구약성경은 옛 언약의 말씀이고 신약성경은 새 언약의 말씀입니다. 옛 언약이든지 새 언약이든지 모두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됩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무수한 약속 가운데 두 가지만 소개합니다. 우리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말씀입니다.
(롬 8:28-32)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여러분, 인생의 한계를 절감하고 계십니까? 그러하기에 한계가 없으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 닥쳐도 하나님께서 결국 승리하게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이것이 시련 중에서 붙잡아야 할 성경의 지혜입니다.
3)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하라!
미래로 나아가는 길목에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금방 말씀드린 대로 진지하게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그때 빼놓지 말고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내게 베푸셨던 은혜를 헤아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은 후 지금 블레셋으로 망명하려고 하는 시점까지 7-8년을 지내는 동안 어려운 일도 많이 겪었지만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도 넉넉히 경험했습니다. 다윗이 그 은혜들을 헤아려보는 시간을 잠깐이라도 가졌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예비해두신 더 좋은 길을 내다볼 수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과거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크고 풍성한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 때 미래를 향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수록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4)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맡기라! (기도하라!)
다윗은 지금 2천여 명의 식솔들의 생활과 안전을 책임져야 합니다. 정말 버겁고 무거운 짐입니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이미 기름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과 늘 함께하신다는 증표입니다. 실제로 다윗의 심령에 성령님께서 내주하신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다윗의 심령에 내주하시는 목적 가운데 하나는 다윗의 무거운 짐을 함께 지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다윗은 그 무거운 짐을 자신이 홀로 지려고 했습니다. 성령님께서 그 짐을 지시려고 다윗과 함께 하셨는데 다윗은 성령님께 그 짐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그 짐이 버겁고 무거워서 다윗은 아기스 왕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그 짐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
(시 55:22) 『네 짐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가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원히 허락하지 아니하시리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도 살벌한 세상, 전쟁터 같은 세상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인생들에게, 수고하고 무거운 짐 때문에 고통하고 있는 인생들에게 안식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그런데 인생들이 지고 있는 짐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
(히 12:1-2)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의 인생경주를 실패하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올바른 목표를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목을 얽어매는 것이 죄입니다. 그 자리에서 주저앉게 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죄의 짐보다 무거운 짐은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죄입니까?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지만 짐과 관련하여 생각하면,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 그 무거운 짐을 혼자서 지겠다고 우기는 것이 죄입니다. 그 무거운 짐을 세상의 방식으로 처리하겠다는 것이 죄입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교만에서 파생된 죄의 양상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 무거운 인생의 짐을 홀로 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그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이 인생과 하나님을 제대로 아는 참된 지혜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는 것일까요? 그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이때 드리는 기도는 회개와 간구입니다. 회개는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지 않고 자기 홀로 지겠다고 우겼던 교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간구는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나님의 도움을 겸손히 간청하는 것입니다.
간구할 때 가져야 할 태도는 기도응답의 약속을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도응답의 약속은 두 가지입니다. “내가 기도한 것보다 더 좋은 것 주신다. 가장 적절할 때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기도응답의 약속을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즉시 마음속에 평강이 자리 잡습니다.
(빌 4:6-7)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러분, 여러분이 지고 있는 무거운 짐 때문에 인생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 그 짐을 맡기십시오! 솔직하고 겸손하게 여러분의 사정을 아뢰십시오! 자기 혼자 그 짐을 지려고 애썼다면 회개부터 하시기 바랍니다. 기도하지 않는 것이 교만입니다. 교만보다 큰 죄는 없습니다. 인생의 무거운 짐을 하나님께 내려놓고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5)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헌신하라!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백성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다윗이 지금 해야 할 일차적인 사명은 2천여 명의 식솔들을 책임지는 것이지만 그것으로 마물러서는 안 됩니다.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언제나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머물러야 할 곳은 가드가 아닙니다. 블레셋의 가드가 아무리 안전하다고 해도 이스라엘의 왕이 가드로 망명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의 학정으로 신음하고 있는 자기 백성들 속에서 함께 고난을 감내해야만 이스라엘의 참된 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께 받은 사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잠시 자신의 사명을 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
(빌 4:8-9) 『[8]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 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이 말씀을 간단히 요약하면,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거룩한 뜻과 사명에 헌신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는 것을 생생하게 체험하게 될 것이다. 즉 성령님으로 충만하게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 11:29-30)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멍에를 메라! 예수님께서도 너와 함께 그 멍에를 메실 것이다. 그러면 너는 예수님의 성품을 닮게 될 것이다. 예수님처럼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될 것이며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이다. 즉 예수님의 성숙한 제자가 될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시련에 직면할 때, 그래서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추천하는 다섯 가지의 지혜를 소개했습니다.
1) 하나님의 뜻을 물어라!
2)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라!
3)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하라!
4)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맡기라! (기도하라!)
5)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헌신하라!
이 다섯 가지의 성경적 지혜는 모두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하기에 다섯 가지의 지혜를 한꺼번에 사용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 중에서 한두 가지만을 사용해도 현재를 헤쳐 나갈 적절한 지혜와 넉넉한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한주간도 성경적인 지혜를 사용함으로써 인생의 한계를 헤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끝) 찬송 217장
요약
다윗이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하여 10년가량 도망 다니다가 자신의 식솔들을 데리고 블레셋으로 망명합니다. 왜냐하면 사울 왕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1절). 엔게디 동굴에서 다윗의 호의로 살아나온 사울 왕이 다윗을 추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지만 얼마 후에 변심하여 다윗을 다시 추격했습니다. 망명한 다른 이유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군사들과 가족들의 생계와 안전을 책임져야 하는 다윗이 거친 광야를 전전하며 유량생활을 하는 게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망명한 또 다른 이유는 그 당시 가장 안전한 곳이 블레셋의 가드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로 망명한 것은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가드에서 제법 잘 지냈고(2~3절), 사울의 추격은 중단되었습니다(4절). 이후 다윗은 가드 왕 아기스에게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자기 일행들에게 달라고 요청했고(5절), 아기스가 다윗의 요청을 받아들여 본래 유다 땅이었던 시글락을 내어줍니다(6절). 이 이후로 시글락은 유다 왕의 땅이 되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시글락에서 1년 4개월을 지냈습니다(7절). 지내면서 부근에 있는 이방민족들을 침노했는데, 그들의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않았지만 가축들과 의복은 전리품으로 수거했습니다(8~9절). 아기스가 다윗에게 오늘은 어디를 침노했는지 질문하자 다윗은 아기스에게 유다의 남방을 침노했다고 허위보고를 합니다(10절). 전쟁에서 승리하면 사람들을 포로로 끌어와 종으로 부리는 것이 그 당시 관례였지만 다윗은 남녀를 모조리 죽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허위보고가 탄로 날 것이 두려웠기 때문입니다(11절). 다행히 아기스가 속아 넘어갔습니다(12절).
이러한 다윗의 처신에 아쉬움이 남습니다. 다윗은 왜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것을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았을까요?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결정하고 행동에 옮겼습니다(1, 11절). 다윗의 처지에서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 이해는 되지만, 그 결정은 하나님과 무관했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유다 땅에 머물렀다면 어땠을까요? 그러면 사울 왕이 또 다윗을 추격했을 수도 있지만 지금까지 지켜주셨던 하나님께서 피난처가 되어주셨을 것입니다. 다윗이 돌보아야 할 백성은 궁극적으로는 사울의 불의한 정권 아래에서 고통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입니다. 그들과 함께 있었더라면 자기 백성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더 깊이 헤아릴 수 있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체험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우리도 다윗처럼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크고 작은 시련들이 개인과 가정과 일터와 나라와 세계에 찾아듭니다. 이렇게 시련에 직면하여 어떻게 헤쳐가야 할지 앞이 막막할 때, 인생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허우적거릴 때,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 성경이 가르쳐주는 지혜를 사용해야 합니다.
인생의 한계를 절감할 때 우리가 사용해야 할 성경의 지혜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물어야 합니다. 다윗은 자기의 생각만으로 망명을 택했습니다. 우리도 우리의 생각과 경험과 상식을 따르는 것에 길들여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엡 5:15~17). 시련을 당할 때 이 시련에 담긴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물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약속을 믿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물으면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시든지 이미 새기진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그 말씀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것이 바로 시련의 때에 발휘해야 할 믿음입니다(롬 8:28~32; 고전 10:13).
셋째, 하나님께서 베푸셨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과거가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거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베푸셨던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 때 미래를 향한 선택의 갈림길에서 올바른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헤아려 감사할수록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넷째, 하나님께 무거운 짐을 맡겨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그 짐을 자기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십니다(마 11:28). 그런데 인생들이 지고 있는 짐 가운데 가장 무거운 짐은 죄의 짐입니다(히 12:1~2). 우리는 무거운 인생의 짐을 홀로 질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때 드리는 기도는 회개와 간구입니다. 회개는 무거운 짐을 자기 홀로 지겠다고 우겼던 교만을 회개하는 것입니다. 간구는 하나님 아니면 안 된다고, 하나님의 도움을 겸손히 간청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이루어주실 줄 믿고 감사함으로 기도하면 즉시 마음속에 평강이 자리 잡습니다(빌 4:6~7).
다섯째, 하나님께 받은 사명에 헌신해야 합니다. 그 사명을 성취하기 위하여 항상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합니다(빌 4:8~9).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의 멍에를 메면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멍에를 메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이 되며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마 11:29~30).
이 다섯 가지 중에서 한두 가지만을 사용해도 현재를 헤쳐 나갈 적절한 지혜와 넉넉한 용기를 하나님께서 주실 것입니다. 성경적인 지혜를 사용함으로써 인생의 한계를 헤쳐 나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블레셋 망명생활 중에도 돌보시는 주님
삼상 27장 1~12절 / 이준원목사
[들어가는 말]
얼마 전 <오징어게임>이라는 한국 드라마가 전 세계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래서 이 동네 사는 아이들도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하며 노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국 드라마가 인기를 끌었는데, 실제로는 1990년대부터 그러한 한류 열풍이 시작되어 2000년대에 들어서는 본격적으로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습니다.
십여 년 전 한국 단기 선교팀이 이란을 방문했을 때 그들이 볼 때는 동아시아 사람들이 다 비슷해 보이니까 한국 사람인지 일본 사람인지 중국 사람인지 궁금했던 이란 사람들은 근처에 와서 어슬렁거리다가 한국 사람인지를 알아보는 방법으로 이렇게 했다고 합니다. “오나라, 오나라!”
그 당시 이란에서 2007년 <대장금> 드라마가 방영되었을 때 시청률이 90%를 넘을 정도로 엄청난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러니까 한국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한국 사람들을 보니까 반가운데 한국 사람인지 확인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겁니다. 제가 2010년 우즈베키스탄을 방문했을 때 시장을 지나가는데 거기서 장사하던 상인들 중 하나가 저를 보더니 “주몽, 주몽!” 하고 외쳤던 기억도 납니다.
<대장금>이나 <주몽>을 비롯해서, 대부분의 드라마나 영화들에는 주인공이 나오고, 또 주인공 곁에서 주인공을 위해주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또 주인공과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나옵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 주인공은 착하고 좋은 일만 합니다. 굉장히 올바른 사람입니다. 주인공은 항상 잘 생기고 예쁘고 좋은 사람입니다. 가끔 실수하는 장면이 나오지만, 주인공이 악하게 나오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악당이 주인공인 경우는 없습니다. 실제 역사의 인물들을 다루는 사극들도 많지만, 주인공은 대부분 선하게 나옵니다.
사실 그렇기 때문에 드라마이고 영화입니다. 실제 인간은 100% 항상 착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악하지도 않고 항상 착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러한 사실만 보아도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주인공이라고 해서 그 삶을 미화하거나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성경을 읽다 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는가 할 정도의 일들이 주인공을 통해서도 벌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난 2월 26일 세상을 떠나신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라 불렸던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이 88세로 돌아가셨는데, 74세에 예수님을 믿으셨습니다. 그분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된 다음에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성경의 이야기 구성이 엉성해서 믿습니다. 만약 저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쓰라고 하면 사람들이 믿을 수 있게 잘 쓸 수 있어요. 만약 사람들을 속일 목적으로 가짜로 쓴다면 저는 더 잘 쓸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럴듯하지가 않습니다. 정말 성한 정신으로 보면 도저히 납득이 안 돼요. 내용이 온통 의심 가는 것들 투성이입니다. 그런데 형사가 용의자를 잡아놓고 심문할 때 알리바이를 완벽하게 대는 사람은 진짜 범인입니다. 보통 사람은 알리바이를 대라고 하면 잘 못 댑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의 부활 알리바이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그것을 직접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일반 신화 같으면 그럴듯하고 폼 나는 알리바이를 꾸몄겠죠. 그러나 성경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저는 성경을 믿습니다.”
굉장히 맞는 말씀이 아닙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보고 있는 다윗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윗은 어떻게 보면 두 얼굴을 가진 사나이입니다. 사울을 두 번씩이나 살려준 다윗은 아주 훌륭하고 선한 성자이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신앙인입니다. 하지만 25장에 나오는 나발에 대한 그의 태도나 또 오늘 27장에서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면, 믿음의 사람이라기보다는 현실주의자인 정치인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제가 성경을 쓴다면 다윗을 신앙적, 도덕적, 윤리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으로 그릴 것 같습니다. 정말 영웅으로 그릴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윗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줍니다. 심지어 나중에는 밧세바라는 우리아의 아내와 간음하는 사건까지 그대로 보여줍니다. 미화하려면 그런 것을 왜 씁니까?
성경에는 순백색의 영웅이 없습니다. 어느 정도 다 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다윗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는 아름다운 신앙인이고, 심지어 그의 후손을 통해 메시야(그리스도)가 나오다는 약속까지 받은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욕망의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조심스럽게 묻는 사람이면서도 자신의 욕망을 따라가기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27장에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이었으면서도, 생존을 위해 자기 나라의 최대 적국인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도망간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서도 그저 생존을 추구하는 사람, 어떻게 보면 비열한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러한 그의 삶을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붙들어주시고 여전히 돌보아주시는 것을 또한 우리가 발견하게 됩니다.
1. 다윗의 블레셋 망명 사건 (1-4절)
다윗은 젊은 나이에 20대의 10년 동안 사울 때문에 늘 도망 다녀야 하는 힘든 시기를 보냈습니다. 그때 인간의 노력만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아남았습니다. 그러한 체험은 다윗에게 정말 중요한 믿음의 확신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시로 노래했고 그 시들이 아직 우리에게 시편으로 많이 남아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가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었다면, 앞으로 어떤 어려움이 오더라도 이겨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반드시 자신을 보호해주신다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다윗이 그런 죽음의 위기가 닥쳤을 때는 믿음으로 승리했지만, 위기를 벗어난 다음에는 믿음의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만 것이 문제입니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사울이 이스라엘 온 영토 내에서 다시 나를 찾다가 단념하리니 내가 그의 손에서 벗어나리라 하고,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1-2절)
지난 23장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그일라를 쳤다는 것을 들었을 때, 다윗은 자기도 살아가기 힘든 도피생활 중이었지만 마음에 영적 부담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가서 블레셋 사람들을 쳐야 하는지 하나님께 여쭤보았습니다(23:2).
그때 하나님은 가서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자기 부하들이 말도 안 된다고 반대하니까,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나아가 여쭈어보았습니다. 그때도 하나님이 가서 치라 하시며 승리를 주겠다고 하시니까 가서 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렇게 신실한 모습으로 하나님께 여쭈어보던 다윗의 자세가 지금은 어디로 갔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1절을 다시 잘 보시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바로 이것이 문제의 출발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자기 생각으로 했다는 겁니다.
다윗은 그 동안 아슬아슬한 위기, 절체절명의 위협 속에서 사울에게 벗어난 것이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순간 약간 편안해지니까 그것을 잊어버린 채 자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전에는 사울을 두 번 살려주고 사울이 물러나 쫓기지 않아도 되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아니라 자기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해가 잘 안 갑니다. 다윗은 그토록 사울에게 쫓길 때도 믿음으로 잘 이겨냈는데, 어떻게 해서 어려움을 벗어난 후에는 오히려 믿음으로 나아가지를 않느냐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인간입니다. 어쩔 수 없습니다. 여기서 보여주는 것은 다윗이 잘했다는 게 아니라, 다윗 같이 훌륭한 믿음의 사람도 조금 편안해지면 이렇게 인간적인 생각을 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성경은 그대로 보여줍니다. 다윗이 결코 영웅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서 인간적인 생각이 파고든 것을 말합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면서 죽음의 위협을 당하는 동안 다윗은 자신을 돌아보며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사울이 잡으려고 쫓아오니까, 그것도 특수부대가 막 쫓아오니까 얼마나 급박합니까? ‘주여, 살려주세요.’라고 하는 것밖에는 없었습니다. 그저 살아남기에 급급했습니다. 그때마다 간절히 하나님을 찾고 의지했으며, 그때마다 하나님은 그를 지켜주시고 보호해주셨습니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에게 잡혀서 죽기 직전의 상황까지 몰렸을 때 갑자기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가지고 온 전령이 하필 그때 도착하여 사울의 군대가 떠날 수밖에 없는 기적이 일어나서 살아났고, 또 두 번씩이나 사울을 죽일 수도 있는 상황도 벌어졌습니다.
그런 일들을 보면서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를 정말 보호해주시는 것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러니까 ‘오직 나는 하나님만 의지하겠다.’라고 하며 나아가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주님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한 다음에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나아간 것이 아니라, 조금 괜찮아지고 추격이 잠시 멈추니까 ‘내가 언젠가 사울의 손에 붙잡혀 죽임을 당할지 모르겠다.’ 하고 두려워하면서 블레셋으로 도망치는 겁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것이 하나님의 사람들의 현실적 어려움인 겁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다윗 정도는 아니더라도, 상황이 정말 어렵고 다급해지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이겨냅니다. 또 기도를 부탁하고, 중보기도실에 기도카드도 써내서 기도해달라고 하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새벽에도 기도하고 집에서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며 ‘하나님, 도와주십시오.’라고 합니다.
그런데 조금 일이 풀리면서 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됩니까? 새벽에도 기도하고 집에서도 기도하고 밤에도 기도하던 것이 사라지고, ‘뭐, 괜찮은가 보다.’라고 하면서 인간적인 생각이 파고 들어와 그 순간 침체되는 겁니다. 왜 그렇습니까?
급해서 하나님만 의지할 때는 하나님의 눈으로 어려운 상황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고 말씀을 붙들게 되면 이 상황을 하나님은 어떻게 보시는지 생각하며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었는데, 마음에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하나님의 눈이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언젠가는 망하겠다.’라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결국 우리 삶의 관건은 끊임없이 나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결정에도 그렇지만, 평소에 작은 일이라도, 별 것 아닌 일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하기를 원하시는가, 저렇게 하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하는 겁니다. 내가 좋은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뭘 좋아하실까 자꾸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되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그런 훈련을 하는 곳이 바로 목장입니다. 우리가 목장에서 감사제목을 나누는 게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내 삶을 보는 것을 자꾸 내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려는 시도가 바로 나눔의 시간입니다.
예를 들어, 계절이 바뀌면서 새싹이 돋아나는데, 보통 시각으로 보면 꽃이 하나 나올 때 ‘에이 씨, 잡초가 또 나왔네.’라고 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면 ‘야, 이 지구가 생명력이 있구나. 다 죽은 것 같았는데 또 나오는구나.’ 하며 다르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감사합니다.’가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감사제목을 자꾸 나누는 게 참 중요합니다. 감사를 생활화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시각으로 이 세상을 바라보는 훈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 모여서 그것을 나누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쉽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것을 반복합니다. 아주 기복이 심합니다.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폭이 좁은 것을 말하지, 그런 게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게 없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약하다는 사람들은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폭이 너무 크고, 믿음이 성숙하다는 사람들은 그 폭이 작은 그 차이지, 누구나 다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의 기복을 최대로 줄일 수 있는 길이 바로 하나님의 시각을 갖고 사는 것, 하나님의 말씀 중심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늘 나 자신을 하나님의 말씀에, 기도에, 예배에 붙들어 매놓고, 또 형제자매 사랑에 붙들어 매놓으며 자꾸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도 함께 나와 예배하고 교제하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필요하고 QT와 말씀묵상이 필요하고 기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하는 것입니다. 예배와 말씀묵상과 기도와 말씀 공부는 결코 나를 옭아매는 족쇄가 아닙니다. 많은 분들이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면서 ‘이제 좋은 시절은 다 끝났네. 이제는 놀 수가 없겠네.’라고 하는데 완전한 착각입니다. 그것은 나를 옭아매는 족쇄이거나 이제는 따분한 삶이 되는 게 아니라,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여러분, 재미있는 길, 세상의 좋아 보이는 길은 사실 죽음의 길, 멸망의 길입니다. 그리로 계속 가면 떨어져 죽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를 옭아매는 길이 아니라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을 것을 잡아주고 살려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나를 살리는 길입니다.
이렇게 모여서 드리는 주일예배, 또 주중에 드리는 수요예배나 새벽기도는 어떻게든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려는 노력입니다. 특히 혼자서 하기는 힘이 드니까 믿음의 형제자매들과 모여서 함께 해나가며 힘을 얻으라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함께 모여서 예배드리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고 귀찮아합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기 생각대로 살게 되면 반드시 오는 것이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상황을 보게 되니까 삶에 대한 걱정이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염려, 노후에 대한 염려, 자녀교육에 대한 염려, 건강에 대한 염려 등, 자기 생각대로 사니까 계속 불안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생각대로 살아야 합니다. 지금 다윗은 자기를 잡으러 쫓아오는 사울을 두 번이나 죽일 기회가 있었는데도 살려주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말합니까? 하나님은 앞으로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얼마든지 사울을 물리치게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고 몇 번을 쫓아오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은 자기를 보호해주시고 인도해주시겠다는 표시가 됩니다.
그런데도 다윗은 이상하게 블레셋으로 도망갑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기 인생의 중요한 결정을 하나님의 말씀 없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고 따른다면 앞으로도 이스라엘 안에서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불안한 생활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데, 더 이상 그것을 버틸 자신이 없었던 겁니다.
사실 우리 삶이 그런 식으로 막다른 골목에 몰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 좋다는 것은 다 압니다. 신앙인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은 다 압니다. 기도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하고 예배해야 한다는 것도 다 압니다. 왜 모르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것이 힘들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더 쉬운 길을 선택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을 택한 것도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미 선지자 갓을 통하여 유다 땅으로 가라고 말씀을 받았지만(22:5), 그럼에도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길을 선택합니다(2). 그 당시에는 전쟁이 많았기 때문에 나라마다 용병이 많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고대 왕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 명의 용사라도 더 데리고 있으려 했기 때문에 이전에는 적이었던 사람이라도 받아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드 왕 아기스도 부하 600명을 데리고 망명을 요청하는 다윗을 거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다윗이 그의 두 아내 이스르엘 여자 아히노암과 나발의 아내였던 갈멜 여자 아비가일과 함께 하였더니” (3절)
도피생활 초기에 다윗은 바로 이 가드 왕 아기스에게 온 적이 있었습니다(21장). 그때도 망명을 하려고 했지만, 그때는 골리앗과 싸워 이긴지 얼마 안 되었을 때였기 때문에 누군가가 자신들의 용사 골리앗을 죽인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미친 척하면서 아기스 앞을 간신히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이스라엘 왕 사울이 다윗을 원수로 생각하고 죽이려 한다는 사실이 다 알려져 있습니다. 또 600명의 부하들까지 데리고 와서 자기 신하가 되겠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스는 이 상황이 자기에게 이득이 될 것을 계산하고 기꺼이 다윗을 받아준 것입니다.
아기스는 결코 바보가 아닙니다. 그가 아무 생각 없이 다윗을 그냥 받아준 것이 아닙니다. 아무 이득도 없는데 그런 게 아닙니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계산이 다 깔려 있습니다. 어떤 것이 자기에게 유리한지 머리를 굴려서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하는 것입니다.
요즘도 정치를 보면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대로 결정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생각하며 계산을 합니다. 그런 것을 소위 ‘정치공학’이라고 부르는데, 거기서 조금 더 나아가면 그게 ‘정치공작’이 됩니다. 그런 것들을 지금도 많이 보지 않습니까?
옛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블레셋과 이스라엘은 서로 원수인데, 이스라엘 왕 사울의 강력한 라이벌인 다윗을 받아주고 도와줌으로써 이스라엘이 분열되도록 조장하려는 것입니다. 또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여 그들을 용병으로 이용함으로써, 자기 힘을 들이지 않고도 이스라엘 국경 마을들을 공격하려는 계산을 한 것입니다.
그렇게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로 건너가자 비로소 다윗은 그 지긋지긋한 사울의 추격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하니라” (4절)
이제 다윗은 도피생활을 마치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에서의 삶은 몸은 편했어도 영적으로는 전혀 유익이 없는 기간이었습니다. 다윗이 그 동안 많은 시를 썼지만, 블레셋에 있는 동안에는 시를 쓴 것이 없습니다. 육체적으로는 편했을지 몰라도, 영적으로는 깊이 잠든 상태였다는 겁니다.
만약 다윗이 어려운 중에도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으면서 고생을 했더라면 어땠겠습니까? 굉장히 힘들었겠지만 매순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감격 속에서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블레셋 땅에 갔을 때 몸은 편했지만 영적으로는 침체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상태가 되면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몸이 힘들어도 마음에 은혜와 감격이 있는 것이 나은지, 아니면 영적 침체에 빠져도 그냥 몸이 편한 것이 나은지를 물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몸이 편한 쪽으로 선택을 합니다. 저를 비롯해서 우리와 사람들 대부분은 몸이 편한 쪽으로 선택합니다.
새벽기도도 조금만 더 자자고 하다가 못 나갑니다. 주일예배는 의무감에 나가지만, 수요예배 같은 경우는 일하고 몸도 피곤한데 괜히 나가면 더 피곤해질 것 같으니까 안 나갑니다. 요즘은 온라인예배도 있으니까 온라인으로 하자고 합니다. 집중해서 하면 좋지만 사실 집중해서 하지도 못합니다. 목장 모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식으로 살면 어떤 결과가 오겠습니까? 편안하긴 편안하지만, 너무 편안해서 영적으로 깊이 잠들게 되는 겁니다. 가끔은 코도(?) 곱니다. 이상한 말과 행동을 하는 겁니다. 잠이 들어 있으니까 편안합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이 편안하면 그게 이상한 겁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의 인생은 그 자체로 영적 전쟁입니다.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렇습니다. 전쟁터에서 편안하게 누워 자면 비정상입니다.
또 신앙생활은 마치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도 같습니다. 가끔 보면, 연어가 바다로 나갔다가 자기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는데, 물살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과도 같은데, 물속에서 편안하게 가만히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떠내려 가거나 물에 빠져 죽습니다.
가끔 드는 예 중에 ‘주전자 속의 개구리’(Frog in the cattle) 이야기를 합니다. 개구리를 물에 넣고 천천히 데우면 편안하게 자다가 삶아진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몇 년 전 실제로 누군가가 실험을 해보았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개구리가 물이 따뜻하게 데워지면서 노곤하게 잠이 드는 게 아니라 뜨거워서 튀어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물을 데워서 뜨거워지는데도 개구리가 가만히 있다면, 물이 따뜻해서 기분이 좋고 편안하여 잠을 자는 게 아니라, 이미 깊은 잠에 들어 있는 것이거나 죽어버린 개구리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게 갈등이 없고 너무 편안하다면, 그것은 이미 영적으로 깊이 잠든 상태라 그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연히 편안한 삶을 원하지만, 삶이 너무 편안하고 안정적이면 오히려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합니다.
‘내가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편안하고 안정적인 삶이 왔을 때 목장에서의 감사 나눔처럼 ‘하나님, 너무 감사합니다.’라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며 나아간다면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 편안하다고 마냥 좋아하면서 계속 편안하게만 지낸다면, ‘내가 정말 제대로 살고 있는 건가?’ 하고 물어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편안한 그 자체가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삶이 편안해지면 기도도 하지 않게 되고 말씀에 대한 간절함도 사라지며 예배도 소홀해집니다. 그러니까 편안한 것이 곧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가 너무나 편안하게 되는 것을 경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일부러 불편하게 자꾸 자기를 움직여야 합니다.
자기 몸을 자꾸 사용해서 편안할수록 예배에 더 나오고, 기도도 더 하고, 말씀도 더 읽고, 더 묵상하고, 삶 공부도 하고, 목장도 더 열심히 나가고, 또 뭔가 봉사할 게 없나 찾아보며 자꾸만 자기를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거기에 기쁨이 있습니다. 편안하게 가만히 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기쁨을 느끼게 됩니다.
오래 전 중국 지하 가정교회 지도자들과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한국교회는 중국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 핍박이 없어지도록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랬더니 중국 지하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서 핍박이 사라지기를 기도하지 말아주십시오. 우리가 염려하는 것은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근심은 중국 내에서 점차 핍박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핍박이 없어지면 나태해지고 게을러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점점 크리스천들에 대한 공격이 많아지고 있는데, 우리가 잘못해서 공격을 받으면 안 되지만, 잘하고 있는데도 비판을 듣고 공격을 받으면 그것은 오히려 좋은 일이라는 겁니다.
2. 다윗의 시글락 생활 (5-12절)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다윗을 도와주십니다. 먼저 아기스로 하여금 다윗에게 독립된 성을 하나 차지하게 해주십니다.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바라건대 내가 당신께 은혜를 입었다면 지방 성읍 가운데 한 곳을 내게 주어 내가 살게 하소서 당신의 종이 어찌 당신과 함께 왕도에 살리이까 하니, 아기스가 그 날에 시글락을 그에게 주었으므로 시글락이 오늘까지 유다 왕에게 속하니라.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산 날 수는 일 년 사 개월이었더라” (5-7절)
다윗은 아기스에게 왕도 가드가 아니라 지방 성읍 중 한 곳에서 살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왕도인 가드에 살면 어떻게 됩니까? 아무래도 다윗 자신의 생활이 블레셋 사람들에게 훤히 보여서 활동하는 데 제약이 따르게 됩니다. 그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아기스가 내준 시글락은 유다와 블레셋 사이에 있는 변방 마을로서, 사막 가운데 있는 일종의 오아시스입니다. 이곳은 가드 왕 아기스로부터는 멀리 떨어진 변방입니다.
사실 아기스는 정치적인 계산을 하고 다윗에게 이곳을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과 접경한 곳에 있는 시글락을 내어줌으로써, 다윗이 자신의 동족인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유도한 겁니다. 그렇게 되면 영원히 자기 부하로 남게 되든지, 최소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아니면 전사할 수 있다는 것을 계산하여 준 겁니다. 그 시글락에서 1년 4개월을 사는 동안 다윗은 어떤 삶을 삽니까?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8-9절)
사실 이것을 그냥 보면 다윗이 아기스에게 완전히 사기를 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다음도 보십시오.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10절)
다윗이 시글락에 있으면서 전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용병으로 받아주고 한 도시인 시글락을 맡겨준 것이고, 블레셋의 지방 도시를 맡은 장군은 반드시 주변 민족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전쟁을 해야 했는데, 시글락에서 전쟁을 하게 되면 그것은 이스라엘 남부와의 전쟁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스라엘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역 유목민들과 싸웁니다. 유목민들은 선량한 사람들이 아니라 아주 악한 자들입니다. 다윗은 그들을 가드로 절대 데려가지 않고 전리품만 보냅니다.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1절)
다윗은 아기스 앞에서 조국을 저버린 배신자 행세를 하면서 이스라엘 마을들을 노략하는 척하지만, 실제로는 이스라엘의 오랜 적인 남방의 악한 부족들을 습격하여 약탈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빼앗은 물건들을 아기스 왕과 나누었는데, 왕은 그것이 이스라엘에서 빼앗아 온 약탈품인 줄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윗이 확실한 자기 부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12절)
여기에 ‘생각하니라’라고 되어 있지만 의미로 따지면 ‘착각하니라’입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뭐라고 합니까? ‘왕착각’(?)입니다. 왕이 한 착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다윗이 아기스를 속였는데, 이 일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저 위대한 믿음의 사람 다윗도 슬쩍슬쩍 거짓말을 했으니까 우리도 거짓말을 해도 된다는 겁니까?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윗이 아무리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해도, 성경은 결코 다윗을 미화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줍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주인공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야곱도, 요셉도, 모세도, 그 어떤 훌륭한 성경의 인물도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럼 누가 주인공입니까? 하나님이십니다.
다윗은 블레셋으로 가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묻고 행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과정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뜻은 결국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지금 겉으로 드러나 있지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지만, 하나님의 다스리심이라는 물결이 잔잔히 흐르고 있습니다.
요즘 우리 눈으로 볼 때는 전쟁도 벌어지고 있고 얼마나 끔찍합니까? 또 한국에서 대통령 선거가 있었는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다 자기 의견이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겉으로 볼 때 너무나 악한 일이 벌어진다고 해도 결국은 하나님의 선한 뜻이 이긴다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보면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어디에 있어도, 심지어 잘못 판단해서 블레셋 가드에 들어가 있어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고 계시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비록 다윗이 실수하고 하나님을 찾지 않은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이 주는 메시지는 다윗이 도덕적으로 실패한 이야기도 아니고, 영리하게 머리를 굴리며 남을 속여도 된다는 이야기도 아니고, 하나님의 돌보심입니다. 다윗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돌보아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다윗이 그렇게 한 것이 옳다는 것이 아니라, 그는 그저 그렇게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가 무슨 드라마 주인공처럼 언제나 도덕적으로 옳게 살았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보호해주시고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신다는 것, 하나님은 블레셋의 악한 환경 속에서도 다윗을 지켜주신다는 것, 그리고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여러분, 오늘 다윗의 이야기는 우리가 세상 문화에 푹 젖어서 편안하게 살아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슬쩍슬쩍 속이더라도 하나님이 눈감아 주시고 무조건 돌봐주신다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에는 구별된 백성, 거룩한 백성으로 살라는 명령이 여러 번 반복되며, 성경은 여러 구절들에서 우리에게 세상 문화의 흐름에 맞서서 살라고 가르칩니다.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거대한 세상의 힘에 압도되어서 나름대로 자기 생각대로 판단하며 살아갈 때, 그래서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일하시며, 우리가 어쩔 줄 모르며 스스로 하지 못하는 일을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를 위해 그렇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처럼 은혜와 자비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우리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 삶 속에서 완벽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십니다. 심지어 우리가 뭔가를 하려고 움직이면 그것이 도리어 아기스를 돕는 것이 되는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은 신실하게 우리를 인도해주십니다.
당장의 현실을 보면 다윗이 블레셋 가드 왕 아기스에게 속해 버린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도 세상 가운데 있고 세상의 죄악 가운데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사모하는 마음이 있는 한, 우리는 결코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잘못을 하나도 안 한 데 있지 않습니다. 그는 수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엄청난 죄도 지었습니다. 다윗이 훌륭한 것은 자기가 잘못했을 때 바로 깨닫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회개하고 계속 하나님을 붙들며 나아갔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우리도 얼마나 실수가 많은 사람들입니까? 얼마나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만한 방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바로 깨닫고 마음을 돌이켜 회개하며 다시 하나님을 붙들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신실하게 보호해주시고 지켜주시고 인도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바로 그런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삶을 매일 보호하시며 인도하셔서, 하나님의 선한 뜻이 우리를 통해 이루어지는 그러한 삶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믿음이 아닌 것
삼상 27장 1~12절 / 양인국목사
1.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는 삶을 살 때에도 항상 믿음으로 살았고, 하나님은 그를 위기때마다 구원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블레셋으로 갔다.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믿음으로 행한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은 다윗이 사울로부터 추격을 당하고 있을지라도 이스라엘 가운데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삶의 여정에서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우리의 생각에 따라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주시는 말씀을 듣고자 한다.
2. 다윗은 이스라엘 땅에 있는 한 언제나 사울에게 쫓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자신을 따르는 자들을 이끌고 블레셋으로 갔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다윗이 이렇게 한 것은 믿음으로 행한 일이기보다는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가 이스라엘 가운데 있었을 때 사울에게 쫓기고는 있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머물도록 허락해 주신 곳에서도 추격하는 자가 있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안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은 하나님께서 머물도록 허락해 주신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실제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광야에서 사십년을 거했지만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그들을 지켜 주시고 인도해 주셨기 때문에 그들은 안전했다. 이처럼 환경이 어떠하든지 하나님께서 허락해주신 곳에 거한다면 그곳은 우리에게 안전하다. 즉 우리의 안전은 환경에 의존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의존 되어 있다는 의미다. 다윗이 이와 같은 사실을 잊지 않았더라면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불레셋으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당시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고 있는 현실만 봄으로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구원의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현실만을 바라볼 때 다윗처럼 자기의 생각에 따라 행하게 되는 것이다.
다윗은 전에 사울의 추격을 피하기 위하여 아기스를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때 아기스의 신하들이 다윗을 사울보다 더 자신들에게 위협적인 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되는 자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윗은 스스로 미친체함으로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피할 수 있었다(21:10-15). 그런데 지금 그는 또 다시 아기스를 찾아갔고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주었다. 아기스가 지금 다윗을 받아 준 것은 그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적대 관계에 있었음으로 다윗을 자기 편으로 받아주는 것이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다(27:12).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준 것이다. 물론 다윗도 블레셋의 아기스에게 피함으로 더 이상 사울의 추격을 받지 않았다. 이처럼 다윗이 믿음으 떠나 자신의 생각에 따라 행했을 때 모든 것이 형통한 듯 보였다. 그러나 언급한 것처럼 다윗의 이와 같은 행동은 믿음이 아니었고 다만 현실에 따랐을 뿐이다.
우리는 다윗이 블레셋에 거하는 동안 직면하게 된 어려움들을 통하여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현실에 따라 행할 때 얼마나 큰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지 교훈을 받을 수 있다. 만일 그가 사울에게 쫓기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 거하였더라면 사울로부터 쫓기는 것 외에는 어떤 어려움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의 요청에 따라 아기스에게 피했고 이로 인하여 스스로의 능력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어려움들을 당해야 했다.
다윗이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현실의 요청에 따라 행했을 때 직면하게 된 어려움들 가운데 하나는 이중적인 삶을 살아야하는 고통이었다. 그는 곁으로는 아기스에게 충성스런 신하로서 살아야했지만 내적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선민으로서 살아야했다. 우리는 다윗의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을 아기스의 호의로 얻은 시글락 성읍에서 살고 있던 삶의 모습을 통하여 볼 수 있다. 다윗은 시글락에 살고 있을 때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략하여 그들 모두를 죽이고 그들의 소유를 탈취했는데, 이것은 그들이 이스라엘을 침략하여 노략질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을 징계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일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은 아기스로부터 의심을 살만한 일이었다. 그래서 다윗은 이를 숨기기 위하여 그들을 침략할 때마다 그곳 사람들을 모두 죽이고 그들의 소유만을 탈취하여 아기스에게로 간 것이다(27:11). 일반적으로 전쟁에서 승리한 자들은 사람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다윗이 이렇게 하지 않은 것은 살려준 자들로 인하여 자신의 행위가 아기스에게 알려져서 그로부터 의심을 받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다윗이 외적으로는 아기스의 신하로 살아야했고 내적으로는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살아야 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스라엘 가운데 거했더라면 이와 같은 고통스런 삶은 살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다윗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현실에 따라 행하였을 때 직면하게 된 어려움 가운데 다른 하나는 자기 민족 이스라엘과 싸워야 할 위기에 직면한 일이다(28장). 다윗이 블레셋의 아기스에게 갔을 때,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치고자 했다. 이때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 전쟁에 참여할 것을 요청했다. 다윗이 이전쟁에 참여한다는 것은 자기 민족 이스라엘과 싸워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어떻게 이스라엘과 싸울 수 있겠는가? 그러나 다윗은 지금 아기스에게 자신을 의탁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요청을 거절 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지금 다윗은 진퇴양란의 어려움 가운데 처하게 된 것이다. 만일 다윗이 이스라엘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이와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윗은 스스로의 힘으로 벗어날 수 없는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해 주셨다. 하나님은 블레셋의 장관들로 하여금 다윗이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반대하도록 하셨다.
이로 인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전쟁에서 배제시킬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기스는 다윗이 자신을 신뢰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이와 같은 자신의 행위가 다윗에게 상처를 줄 것이라고 염려하여 다윗을 이해시키려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윗에게 구원의 기회였다. 하나님은 자신을 신뢰하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지 않으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었다면 다윗은 자기 민족과 싸우든지 아니면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어 준 아기스를 배반하든지 했을 것이고 이것은 일생 동안 치유할 수없는 큰 상처가 되었을 것이다.
다윗은 믿음으로 행하지 않고 현실에 따라 행하였을 때 직면하게 된 어려움 가운데 또 다른 하나는 자신과 함께 한 자들에 의해 생명을 위협 받은 일이다(30장). 다윗과 그의 군대가 블레셋 왕 아기스의 요청에 따라 전쟁을 위하여 시글락을 비운 사이 아말렉의 침략을 받아 그 성읍에 남아 있던 그들의 가족과 물건 등 모든 것을 노략 당했다. 다윗과 그의 군대가 시글락에 돌아왔을 때, 불에 탄 성읍과 노략 당한 가족들로 인하여 크게 낙담하여 울 기력조차 없었다. 다윗을 따르던 자들은 이 불행한 일이 일어난 책임이 모두 다윗에게 있다고 생각하여 그를 돌로 쳐 죽이고자 했다. 다윗은 이처럼 위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힘을 얻어 문제를 수습해 나갔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보다 더 안전한 곳을 찾아 블레셋으로 왔지만 이곳에서 직면한 위기는 오히려 사울의 위협이 있는 이스라엘 땅에서 보다 더 컸다. 물론 그들은 블레셋에 온 후 더 이상 사울로부터 쫓기지 않았고, 또한 아기스의 호의로 한 성읍에 정착해 살 수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샬롬이 보장 된 곳은 아니었다. 그들은 아기스가 베푼 호의의 대가로 그의 용병이 되어 전쟁에 참여해야 했고, 이로 인하여 지금과 같이 불행한 일을 당해야 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약속의 땅에 문제가 있다고 하여 그 땅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할지라도 여전히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런 문제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해결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낙담할 수밖에 없는 환경에서 그리고 자신이 신뢰했던 자들에 의하여 생명의 위협을 받고 있던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함으로 용기를 얻었다(30:6). 이것은 믿음이야말로 환경을 초월하여 문제 해결의 길이 된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윗은 이와 같은 믿음으로 인하여 그들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해 나갈 수 있었다. 다윗은 이와 같이 행함으로 포로로 잡혀갔던 가족들 모두와 탈취당한 재산 모두를 되찾아왔다.
본문이 주는 중요한 교훈이 있다. 우리가 현실에서 직면한 어려움을 피하기 위하여 믿음이 아닌 것을 따라 행할 때 더 큰 어려움에 직면하게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실은 믿음의 여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일이고 또한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3. 함께 기도하자. 하나님, 우리로 하여금 믿음의 여정에서 어려움을 만났을 때도 변함없이 믿음에 따라 행하게 해 주옵소서. 이렇게 선택하는 것이 우리에게 가장 안전한 길임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해 주옵소서. 아멘.
영적인 힘을 회복하라
삼상 27장 1~2절 / 박지온목사
진실한 성도가 맞고 또 양심이 있는 성도라면 한번쯤 고민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 생활를 잘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믿음의 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이런 고민들은 아마도 한번쯤은 여러분들이 해 보셨을 겁니다. 그런 말을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 앞에서 한번 떳떳하게 살아보고 싶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한번 멋지게 살아보고 싶다!' 주로 그런 고백들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잘 해보고 싶은 것이 모든 성도들의 한결같은 바램이요, 소망이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들이 마음먹은 데로 이 신앙생활, 믿음의 생활이 잘되고 있습니까? 잘되고 있다면 그 보다 더 좋은 일이 없겠죠. 그런데 생각보다는 우리가 마음먹은 데로, 우리가 생각했던 데로, 이 신앙생활이 잘 안 된다는데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보통 연초에 보시면, 결단도 하시고 결심을 하시죠. '내가 지난해에는 참 믿음대로 제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이번 한해에는 내가 멋지게 살아보겠다! 한번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신앙생활을 한번 해보겠다!' 그런 결단과 결심들을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점점 지나면서 내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세상 적으로, 육신 적으로 또 그렇게 흘러갑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왜 이런 자리에 있느냐? 참 내가 그때는 그렇게 결심하고 결단했는데, 왜 지금 내 모습이 이러냐?' 또 후회가 되는 거죠. 심지어는 그렇게 뜨겁던 신앙에 사람들이 어느 날 보면 전혀 불신자처럼, 불신자 비슷하게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보고 우리가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잘 믿던 성도가 어느 날 갑자기 신앙이 떨어지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기고 막히는 이런 사건들을 보고 우리는 무엇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영적인 침체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왜 우리 성도들이 이런 영적인 침체가 오느냐? 더 나아가서는 이런 영적인 침체현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여기에 대한 말씀을 좀 드리려고 합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습니다 만은, 지금 않아 계신 이 자리에서 떠나가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의 자리에서 절대로 떠나지 마십시오. 서울로 이사를 가신다거나, 아니면 저 멀리 외국으로 이사를 가신다면 그것은 괜찮습니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는 경우에는 절대로 이 자리에서 떠나가지 마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한번씩 충격 되는 일이 있습니다. 평소에 그렇게 믿음이 좋던 분들이 갑자기 보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심방을 가서, '왜, 이렇게 보이지 않습니까? 무슨 일이 있습니까?' 이렇게 쭉 확인을 해 보면, 물론 그분 나름대로는 이유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이 들어봤을 때는 참 별것도 아닌데, 아무것도 아닌 일에 상처를 받고 마음이 낙심되어 가지고, 그래서 전혀 교회를 나오지 않는 그런 성도들이 간혹 있습니다. 그분에게 신앙에 문제가 왔다는 말이죠.
여러분 영적인 침체가 무엇입니까? 영적인 침체! '침'이라는 말은 한자말로 가라앉았다는 말이죠. 배가 침몰되었다는 말은 배가 가라앉았다는 말입니다. 또 '체'라는 말은 막혔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들이 음식을 잡수시다가 중간에 딱 막히는 현상을 보고 뭐라고 하죠. 체했다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교통들이 쭉 흐름을 타지 못하고 딱 막히는 현상을 보고, 교통체증이 일어났다는 말을 하죠. 그래서 '체'라는 말은 막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영적인 침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히고 가라앉았다는 말이죠. 이것처럼 심각한 위기가 없다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 무엇입니까? 물론 여러분의 직장에서 어려움을 당하는 것,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자녀들에게 문제가 생기는 것, 엄청난 고통이겠죠. 또 여러분들의 사업이 무너지는 것 참 괴롭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사업이 무너지고, 직장에서 쫓겨나고, 여러분들의 자녀들에게 문제가 오는 것보다도 훨씬 더 큰 고통이 있습니다. 그 고통이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막혀지는 것입니다.
다윗을 보십시오. 이 다윗이 평소에는 참 믿음이 좋았습니다. 순간,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향해서 기도했고, 심지어는 고난이 찾아왔을 때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에게 문제가 왔습니다. 밧세바와 범죄를 했습니다. 간통사건이 일어났죠. 그 간통사건을 계기로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무너졌습니다. 그때부터 이 다윗은 처절한 삶 속에 들어갑니다. 얼마나 고통스러웠던지, 얼마나 괴로웠던지!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다른 건 몰라도 차라리 재앙을 받고 징계를 받는 것은 괜찮은데, 그런데 이 다윗에게 있어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얼마나 괴로웠던지 침상이 젖도록 기도를 합니다.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그만큼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졌을 때에 고통스러웠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고통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고 '영적인 침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면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큰 슬럼프에 그렇게 빠져들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운동선수들을 보면 이런 슬럼프에 빠지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습니다. 이 컨디션이 참 좋을 때는 골도 잘 들어갑니다. 안타도 잘 칩니다. 그리고 홈런도 날립니다. 이 컨디션이 좋을 때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컨디션이 떨어지고 슬럼프에 빠져드는 그런 운동선수들을 보면 자꾸만 헛발질을 합니다. 헛 방망이질을 하는 거죠. 그래서 상당히 선수 생활에 위기가 오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이승엽이라는 야구선수가 있습니다. 지금 일본으로 진출해서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일어나는 현상이 뭐냐하면, 이 이승엽 선수에게 슬럼프가 왔습니다. 심지어는 2군으로 강등되는 그런 수모까지 겪고 있습니다. 제가 신문을 보니까 이 이승엽 선수가 국내에서 활동할 때는 한번도 2군으로 강등되는 일이 없었답니다. 계속해서 차고 올라갔고, 그러면서 한국 최고의 타자가 되어졌습니다. 그런데 이런 선수에게 극심한 슬럼프가 왔습니다. 그러면서 아무리 쳐도 되지 않고, 스트라이크 아웃을 당하고, 심지어는 밀려나고 결국에는 2군으로 떨어지는 이런 수모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걸 보고 우리는 슬럼프라고 하죠.
여러분 육체적 슬럼프가 와도 힘들고 괴롭습니다. 여러분들이 감기만 조금 들어보십시오. 조금 육체적인 질병만 와 보십시오. 극심한 슬럼프에 빠져듭니다. 하물며 영적인 슬럼프가 왔다! 영적인 침체현상이 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저와 여러분들에게 있어서 이것처럼 고통스러운 일들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영적인 침체 현상이 옵니까? 이런 현상이 오지 않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 찬송가사처럼 '올라가, 올라가 독수리 같이...' 저와 여러분들의 신앙이 늘 창공을 향해서 치솟아 올라간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때로는 한번씩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 신앙의 삶 속에 이런 슬럼프가 찾아온다는 것이죠.
그러면 왜, 이런 침체현상이 찾아오느냐는 것입니다. 첫째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들이 저와 여러분들을 영적인 침체 현상으로 몰아갈 수가 있습니다. 어려운 환경들입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십시오. 거기 보시면 모든 환경이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야를 고통 속으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아합 왕을 위시해서 이세벨 왕후,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들, 더 나아가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이스라엘 선지자를 죽음 속으로 몰아 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 속에서 엘리야 자신도 얼마나 괴로웠던지 하나님께 엎드려서 죽기를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9장 4절에 보십시오. "스스로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행하고 한 로뎀나무 아래 앉아서 죽기를 구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취하옵소서 나는 내 열조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얼마나, 얼마나 하나님께 엎드려 죽기를 간구하는 이런 엘리야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 엘리야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에 하늘에서 비가 멎었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에 하늘에서 비가 내렸습니다. 그리고 죽었던 사람을 살려냈습니다. 엄청난 기적과 능력을 행했던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엘리야에게 극심한 영적인 침체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이 엘리야는 하나님께 엎드려서 '하나님, 죽여주옵소서! 나는 내 열조 보다 못하니이다!' 심각한 현상에 그가 빠져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에게는 이런 현상이 없습니까? 여러분 직장에서 내몰릴 그런 현상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지금 여러분들의 불신 가정에 식구들이 자꾸만 여러분들을 공격하지 않습니까? 모임에 들어가면 여러분들을 무시하고, 여러분들을 그렇게 왕따 시키고, 매장시키는 일들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이 지금 조용히 앉아 계셔도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 이런 영적으로 크게 힘들고, 어려운 문제들이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칫하면 이런 영적인 침체 현상에 걸려서 내 자신의 정체성조차도 놓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위기가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여러 가지 어려운 환경을 통해서 우리가 영적인 침체현상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뭐냐하면, 인간관계속에서도 얼마든지 이런 현상들이 찾아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십시오. 오늘 이 본문에 내용이 뭐냐하면, 다윗이 사울 왕의 눈을 피해서 어디까지 도망을 가느냐 하면, 원수나라였던 블레셋 나라까지 도망을 갑니다. 27장 1절에 보십시오.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에 수많은 백성들의 입에서 칭송의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그런데 백성들의 이 말 한마디가 사울 왕과 다윗의 모든 사이를 급격하게 어렵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결국에는 이 사울 왕이 다윗을 죽이려고 이제 솔선수범하고, 다윗은 죽지 않으려고 도망을 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다윗이 어디까지 도망을 갔습니까? 오늘 본문에 나타난 데로 블레셋 나라, 원수나라였던 블레셋까지 도망을 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이 블레셋까지 들어갔다는 말은, 더 이상 갈 때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여기에 들어갑니까?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데로 이 블레셋 나라는 골리앗의 고향입니다. 원수나라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도망가다가 더 이상 갈 때가 없으니까, 심지어는 이 블레셋 나라까지 치고 들어갔다는 것이죠. 이런 와중에서 그의 심신은 지치고 고단해졌습니다. 큰 위기 속에 직면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쫓겨다니는 것처럼 불안한 일이 없고, 도망 다니는 일처럼 위험스러운 일들이 없습니다. 얼마나 도망할 때가 없었으면 원수나라인 블레셋까지 도망갔겠느냐? 여러분 그때 그 상황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이런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인데 시집을 가려고 이렇게 저렇게 많이 시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 전부다 관계가 다 막히고 결국에는 체념하는 상태에 들어갑니다. 그때에 어떤 분이, '결혼 안 합니까?' 물어봤습니다. 그때에 이 여자 분이 하는 말이, '이제 뭐 혼자 살아야 되겠죠!' 그런데 그 혼자 살아야 되겠다는 말속에는 진짜로 혼자 살고 싶어서 그런 것입니까? 사실은 그게 아니고 하다가하다가 안되니까, 이제는 체념하는 마음으로, '혼자 살아야 되겠죠!' 그 말을 합니다. 오늘 본문에 정황이 바로 그 상황입니다.
지금 이 다윗이 어디까지 차고 들어갑니까? 사실은 그 블레셋이 좋아서 들어갔습니까? 더 이상 도망갈 때가 없으니까! 더 이상 사울의 눈을 피할 때가 없으니까 그래서 블레셋까지 들어갑니다. 그런데 블레셋까지 들어가는 정도가 아니고 8절, 9절에 보시면, "(삼상 27:8)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로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거민이라 (삼상 27:9)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약대와 의복을 취하고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여러분 이 상황이 어떤 상황이죠. 다윗이 블레셋까지 숨어든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어떤 행동을 하느냐 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도륙합니다. 쉽게 말하면 사람들을 죽이고, 더 나아가서는 양과 소와 약대, 의복 이런 모든 것을 다 빼앗습니다.
어찌된 일입니까? 다윗같이 성실하고, 믿음이 좋은 사람! 이런 다윗이 왜 이렇게 사람을 죽이고, 노략을 하고 그렇게 자기의 엉뚱한 모습들이 그렇게 터져 나옵니까? 원래 다윗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잘 신뢰하는 믿음의 사람이죠. 그런데 사람까지 죽이는 이런 자리까지 왔다는 것이죠. 한마디로 살아남기 위해서! 더 이상 길이 없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엉뚱한 행동까지 그가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다윗의 신앙상태가 완전히 지쳤다는 것입니다. 더 이상 떨어지려야 떨어질 수 없는 그런 막다른 골목까지 내어 몰렸다는 것이죠. 이게 영적인 침체 현상으로 나타나는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은 무엇에 쫓기고 있습니까? 어떤 분들은 물질에 쫓깁니다. 먹고살아야 되는데, 제대로 벌여 지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자녀 교육을 시켜야 되는데, 그렇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늘 물질에 쫓기는 분들! 어떤 분들은 자리나 위치에 쫓깁니다. 그 자리를 좀 지켜야 되겠는데, 오랜 동안 좀 머물러 있어야 되는데, 밑에서는 차고 올라오죠, 더 이상 차고 올라갈 때는 없죠. 그래서 늘 자리나 위치에서 내어쫓기는 그런 분들도 계십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에게 쫓깁니다. 그래서 너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지난주에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험이 계속해서 몰아 닥치면 정신을 차릴 수 없죠. 마찬가지로 여러분의 삶에 자꾸만 내어쫓기다 보면, 더 이상 일어설 자리와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너무 큰 고통이 우리의 삶 속에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게 큰 위기죠.
그리고 세 번째입니다. 무엇 때문에 영적인 침체가 옵니까? 자신의 영적 문제와 상처를 극복하지 못할 때에, 반드시 영적인 침체 현상이 오게 되어있습니다. 여러분 유독 영적인 침체에 잘 빠져드는 그런 체질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상처가 와도 잘 극복할 수가 없습니다. 주로 이런 분들이 하는 말이 뭐냐하면, '나는 왜 이렇게 안 되느냐?' 심지어는 '나는 죽어도 안 된다!' 심각한 열등감, 자격지심에 늘 시달리는 이런 분들이 계십니다.
한번씩 좀 화가 날 때가 있더라 구요. 언제냐 하면, 어려운 일을 당한 어떤 분이 계시는데 찾아가서 예배도 드리고, 찬송도 하고, 기도도 하고, 실컷 그렇게 위로를 했습니다. 일어서는데 그분 하는 말씀이, '목사님 나는 안됩니다!' 실컷 위로하고, 같이 기도하자고 약속을 했고 은혜도 받았습니다. 말씀을 들을 때는 고개도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실컷 하고 일어서는데, '그래도 목사님, 나는 안됩니다!' 여러분 이런 체질이 아니십니까? 그런 사람들이 있더라 구요. 실컷 은혜 받아도 돌아서면 안되고, 돌아서면 죽고 싶고, 이런 분들이 상당히 많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은 영적인 침체 현상이 오면 잘 벗어나지 못합니다. 아예 체질적으로, 심지어는 기도하면서 염려하시는 분들! 상당히 이런 분들이 많다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입니다. 왜 영적인 침체가 옵니까? 하나님 앞에 범죄 할 때에, 여러분 죄라고 했을 때에 우리는 보통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죄를 말하고 있습니다. 사기를 쳤다든지, 간음을 했다든지, 거짓말을 했다든지! 물론 맞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말하는 이 죄는 바로 하나님을 떠난 근원적인 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죄가 제일 무서운 것이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단절이 이루어졌다는 것이죠. 이게 가장 고통스러운 사건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을 보십시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여기서 말하는 이 죄는 어떤 죄를 말합니까?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떠난 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이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에,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 자체가 완전히 막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심각한 고통이 찾아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아담과 하와가 범죄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기 위해서! 그런데 그 범죄를 통해서 나타났던 중요한 결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졌다는 것이죠. 첫째는 육체적 단절이 왔습니다. 둘째는 영적인 단절이 왔습니다.
육체적 단절이 왔다는 말은 에덴동산에서 내어 쫓겼다는 말입니다. 영적인 단절이 왔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모든 교통, 영교가 끊어졌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보다 무서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보다 더 무서운 일이 있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많은 돈을 벌지라도, 아무리 좋은 자리에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성도, 그 인생은 반드시 무너지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서두에서 잠깐 말씀들 드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진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얼마나 괴로웠던지 밤새도록 웁니다. 침상이 젖도록 울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주의 성신을 내게서 거두지 마옵소서!' 다른 것은 내가 다 참겠는데, 심지어는 '내게 재앙이 찾아와도 하나님 감사히 참겠습니다! 그러나 주의 성령만은 거두지 마옵소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그만큼 고통스러웠다는 말입니다. 어쨌든 영적인 침체 현상이 이런 저런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때로는 환경을 통해서, 때로는 인간 관계를 통해서, 때로는 여러분 자신들의 영적 문제를 통해서,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통해서 엄청난 고통들이 저와 여러분 속에 밀려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러한 영적인 침체가 오면 중요한 결과들이 있습니다. 침체현상이 끝난다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반드시 그에 따르는 결과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하면, 구원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기쁘고, 그렇게 평안하고, 그렇게 좋았던 여러분들의 마음들 속에 얼마나 불안한 마음과, 답답하고 힘들고 어려운 고통이 찾아오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구원의 감격이 사라집니다. 여러분들의 상황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심지어는 물질적으로, 여러 가지로 내몰려도, 그런 속에서도 '나는 하나님이 자녀다! 나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언약에 백성이다!' 이 사실만 여러분 속에 중심으로 딱 붙잡고 있으면, 아무리 어려움이 와도 괜찮습니다. 왜?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데요. 하나님께서 내 삶을 완전히 책임지시게 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따르는 확신도 있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여러분 속에 이런 영적인 침체 현상이 오면, 제일 먼저 사라지는 것이 뭡니까? 구원의 감격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때부터는 저 밑에 수렁을 향해서 계속해서 떨어지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보십시오. 이런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나면 제일 먼저 안 되는 것이 뭐냐하면, 절대로 예배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구원의 감격을 가지고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하고, 구원의 감격이 전혀 없이 그냥 맹숭맹숭하게 이 자리에 앉아 계신 것하고 차이가 무엇입니까? 제일 중요한 것은, '예배가 되느냐? 안 되느냐?' 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여러분들이 진정으로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가지고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까? 그러면 이 예배 자체가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구원의 감격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된 확신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맹숭맹숭하게 앉아 계셔보십시오. 얼마나 지겹습니다. 설교자가 그날따라 5분, 10분 정도 더 길어지면 그때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오릅니다. '무슨 설교를 저렇게 오래 하느냐? 좀 빨리 마치지, 빨리 가야되는데...' 절대로 예배가 될 수 없죠.
예배가 안 된다는 말은 그와 동시에 찬송도 안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찬송을 부르실 때에 얼마나 벅찬 감격을 가지고 하나님께 찬송을 드렸습니까? 구원의 감격이 있는 성도는 그 입술에서, 그 마음의 중심에서 진정한 찬송이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찬송을 오래 불러도 그 속에 참 기쁨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여러분 속에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고 나면, 찬송 한 장, 한 장 부르는 것이 그렇게 또 지겹습니다.
저의 동기 목사님 중에서 중국에 선교사 한 분이 계십니다. 이번에 그런 이야기를 해요. 지금도 중국에서는 마음대로 예배를 드릴 수 없습니다. 어쩌다가 같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잖아요. 그러면 3시간, 4시간, 5시간... 계속해서 찬송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듣는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한번 찬송을 부르면 어느 정도까지 부르느냐 하면, 찬송 한 곡이 100절까지 있답니다. 100절까지! 그리고 그 100절까지 다 부르면 1시간이 지나간답니다. 그래도 그분들이 그렇게 뜨거운 감격으로 하나님께 찬송을 합니다. 그러면 사회자가 하는 말이, '한번 더 부릅시다!' 그런 답니다. 그러면 2시간입니다. 저도 이 자리에서 100절까지 있는 곡을 두 번 부르고 나면 아무도 앉아 계시지 않을 겁니다.
여러분 속에 구원의 감격이 있습니까? 진정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오셨습니까? 여러분 예배 속에 여러분 자신들을 한번 세워 보십시오. 우리 성도들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축복이 뭡니까?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과의 모든 관계는 예배를 통해서, 지금 드리고 있는 이 예배를 통해서 모든 관계가 회복되어 진다는 겁니다. 그래서 구원의 감격이 사라지면 예배도 안됩니다. 찬송도 사라집니다. 더군다나 기도는 됩니까? 아무리 기도하려고 애를 써도 영적인 침체 현상이 일어나면 기도도 제대로 나오지 않습니다. 여기다가 감사는 사라지고 결국에는 영적인 마비 현상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런 영적인 침체 현상이오면 이런 저런 여러 가지 결과들이 찾아오는데, 그러면 이런 속에서 결국에는 저와 여러분들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운동선수들은 그들에게 슬럼프가 오면 그 슬럼프를 벗어나기 위해서 열심히 훈련합니다. 뛰기도 하고, 몸을 단련하기도 하고, 밤에 잠을 자지도 않고, 어쨌든 이런 슬럼프를 극복하기 위해서 열심히 훈련을 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영적인 슬럼프, 영적인 침체가 오면 노력해서도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여러분들이 이빨을 깨물고 열심히 수고하고 노력한들 이런 영적인 침체가 물러갑니까? 그렇다면 이런 영적인 침체 현상이 왔을 때에 과연 어떻게 해야 됩니까? 간혹 저희들에게 이런 영적인 문제가 왔을 때에, 심각한 문제가 왔을 때에, 빨리 이 영적 침체에서 일어나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영적인 침체에서 일어나기 위해서는 우리가 과연 어떻게 해야 되느냐? 시편 42편 5절입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아멘.
보십시오. 지금 시편 기자가 얼마나 영적으로 침체되어 있습니다.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심지어 그 앞에 4절에 보시면, '내 마음이 상했다!'고 했습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이 시편 기자는 완전히 영적으로 침체가 되어서 낙심도 되고, 불안하기도 하고, 심각하게 지금 마음이 상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상태 속에 하나님께서 시편기자에게 말씀을 합니다. 뭐라고 했습니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렇습니다. 여러분 다른 길이 없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심각한 영적인 문제가 왔을 때에, 심각한 이런 침체 현상이 왔을 때에, 과연 내가 거기에서 살아나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언약에 주인이신 그리스도, 우리의 영원한 인생에 주인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여기에 모든 영적인 침체 현상이 떠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낙심과 절망과 한숨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런 분들은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이사야 40장 31절에 "오직 여호와를 앙망 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힘들고 어려우십니까? 답답한 일을 만났습니까? 여러분들의 영적 상태가 지금 저 밑으로 치닫고 있습니까? 그 속에서도 하나님 바라 보십시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때에 진정한 찬송과 기쁨과 축복의 역사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찾아오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왜, 영적인 침체 현상이 찾아옵니까? 한마디로 말씀드리면, 저와 여러분들이 은혜 받지 못하고 이 하나님의 은혜가 지속되지 못하면, 반드시 세상으로, 육신으로 빠져갑니다. 그 결과로 영적인 침체 현상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여러분들에게 중요한 한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영적인 침체에서 일어나느냐? 오늘 본문에 제목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힘을 회복하라!" 어떻게 하면 영적인 힘을 회복할 수 있습니까? 은혜 받으십시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아무리 좋은 곳에 합격을 해도 이것은 잠시 지나가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살아나는 가장 중요한 그 회복의 길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하면,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느냐? 고린도후서 6장 2절에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히브리서 4장 16절에 보십시오. 거기에 보시면,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히 나오라!'고 했습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실제적으로 체험하느냐? 여기에 여러분의 모든 영역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두 가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느냐? 이번 한 주간 꼭 이 두 가지를 잡고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어떻게 하면 영적인 힘을 회복하느냐?'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느냐?' 첫째입니다. 교회 건축의 현장에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한번 다 싫어보십시오. 물론 지금까지도 교회 건축을 위해 기도해 오셨고 헌신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칫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하면, 이 교회 건축을 하면 내가 뭔가 헌신을 해야 되고, 내가 뭔가 해야 되는 걸로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잘 기억하십시오. 교회 건축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입니다.
여러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내가 교회 건축을 하고 싶다고 되어집니까? 또 내가 아무리 많이 드리고 싶어도 없으면 드릴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온 교회 속에, 또 저와 여러분 속에 교회 건축이라는 이런 모든 축복을 은혜로 허락하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기에 모든 중심을 담고 함께 기도하실 때에, 여기에 진정한 응답들이 일어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은혜를 체험하는 길이 있습니다. 특별새벽기도회! 여러분 교회가 방향을 정하고 중요한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 속으로 다 들어오십시오. 다 함께 참석하셔서, 여러분들의 진정한 소원들이 있습니까?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마음을 여러분들이 아십니다. 그러면 이런 중요한 기도 제목을 두고 여러분의 마음을 싫고 한번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가 어떻게 임하는지를 여러분들이 실제적으로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건축은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신 최고의 은혜다! 두 번째는 우리가 특별 새벽기도 속으로 들어갈 때에, 여기에 진정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잡고 이번 한 주간 기도해 보십시오. 얼마나 큰 축복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는지를 새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 한 주간 영적으로 침체된 내 자신을 다시 세우십시오.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의 사명으로 완전히 무장하십시오. 최고의 은혜를 누리시고 이번 한 주간 승리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인생의 늪
삼상 27장 1~7절 / 홍문수목사
여러분, 혹시 밀림의 왕자「타잔」을 기억하십니까? 아마 기억하실 겁니다. 저도 어린 시절 TV에서「타잔」영화를 아주 재미있게 시청했던 기억이 납니다. 타잔은 문자 그대로 밀림의 왕자입니다. 늘 승리합니다. 그런데 타잔도 이따금 늪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리 밀림의 왕자라도 꼼짝 못합니다. 움직일수록 늪 속으로 깊이깊이 빠져 들어갑니다. 게다가 악어 떼까지 등장하면 정말 스릴과 서스펜스가 넘치죠. 결정적인 순간에 어떻게 되죠? 치타가 와서 도와줍니다. 로프를 던져주면 가까스로 늪에서 빠져나와서 승리합니다.
우리 인생도 마치 밀림과 같습니다. 무서운 늪이 곳곳에 숨겨져 있습니다. 한번 빠지면 스스로 헤치고 나오기 힘든 큰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제일 좋은 것은 늪에 빠지지 않는 것이지만, 잘못해서 늪에 빠지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 꼭 빠져나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망하는 겁니다. 죽는 겁니다.
오늘 본문 성경에 보니까, 인생의 늪에 빠진 사람이 등장합니다. 누구죠? 뜻밖에도 다윗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는 훌륭한 신앙인입니다. 정말 대단하죠. 사울 왕에게 핍박을 받고 이러지리 쫓겨 다녔지만 믿음을 지키고 늘 승리합니다. 그러던 다윗이 안타깝게도 늪에 빠져버립니다. 그리고 점점 깊이 빠져들어 갑니다. 다행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모면했지만, 생각할수록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다가도 어느 순간 삐끗하면 인생의 늪에 빠질 수 있습니다. 항상 조심해야 됩니다. 오늘 말씀에 나타난 다윗의 이야기를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최대한 늪에 빠지지 말고, 만의 하나라도 늪에 빠지면 다윗처럼 늪에서 속히 빠져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밀림처럼 위험 많은 이 세상에서 늘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사무엘상 27장이지만, 31장까지의 내용을 알아야 이해가 됩니다. 나중에 개인적으로 27장부터 31장까지 통독해 보시면 좋을 겁니다.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1] 다윗이 빠진 늪 : 죄와 고난의 늪
본문을 보니까 다윗이 늪에 빠지게 되는데, 이 일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기억하기 싫은 몇 가지 오점 중 하나였습니다. 그는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면서 그동안 신앙을 잘 지켜왔는데, 그만 죄와 고난의 늪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는 십분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혼자 몸도 아니고, 부하가 6백 명에다 그 가족들까지 합하면 이래저래 식솔이 3천명쯤 됐을 텐데, 도망 다니는 게 얼마나 힘겨웠겠습니까? 하도 어렵다 보니까 순간적으로 오판을 했습니다. 인간적으로 쉬운 쪽을 선택했습니다. 이스라엘의 국경 안에서는 사울 왕에게 늘 쫓겨 다니니까 국경을 넘어 블레셋 땅으로 망명한 겁니다.
그러나 그것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선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더 큰 고난에 봉착하게 됩니다.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다윗의 인생은 그대로 끝장났을 겁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잖아요. “늑대 피하려다 호랑이 만난다.” 아무리 힘들어도 타협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은 고난을 피하는 것 같지만, 더 큰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어쨌든 다윗이 이렇게 해서 늪에 빠지게 됐는데, 그게 얼마나 무서운 것이었는지 살펴봅니다.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그 당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관계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견원지간(犬猿之間)이었습니다. 개와 원숭이처럼 항상 으르렁거리는 사이였는데, 다윗이 국경을 넘어 원수의 나라에 망명한 겁니다.
다윗이 사울 왕에게 쫓기며 도피 생활을 한 기간은 대략 10년쯤 되는데(B.C. 1020~1010)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이 됩니다. 본문의 상황은 그 중에 8년쯤 지났을 때(B.C. 1012년경)의 일입니다. 그는 더 이상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블레셋 ‘가드’의 ‘아기스’ 왕에게 투항합니다.
본문 2절~3절을 보시죠. “2 다윗이 일어나 함께 있는 사람 육백 명과 더불어 가드 왕 마옥의 아들 아기스에게로 건너가니라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저마다 가족을 거느리고 가드에서 아기스와 동거하였는데 ... ” 한 마디로 말해서 ‘적과의 동침’입니다. 아마 아기스 왕은 나름대로 계산이 있어서 다윗을 받아들였을 겁니다. 사울 왕에게 핍박받는 다윗과 그의 부하들을 잘 이용하면 이스라엘을 견제하는 데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게 문제였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누굽니까? 과거 블레셋 군대를 쳐부순 장군입니다. 게다가 하나님 앞에 차기 왕으로 선택되어 이미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어떻게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의 선택이 당장에는 괜찮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4절 보시죠. “다윗이 가드에 도망한 것을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매 사울이 다시는 그를 수색하지 아니 하니라” 다윗이 계산한 대로 사울이 더 이상 추적하지 못합니다. 다윗은 처음에 수도에 머물었는데, 아기스 왕에게 넌지시 별도의 거주지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시글락(6절)을 얻어 부하들을 이끌고 그곳에 정착합니다. 이제는 안전 문제는 물론이고, 먹고 사는 문제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 셈입니다.
그러나 사태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골치 아픈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마치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더 깊은 고난 속으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이제 다윗은 귀순한 사람이므로 아기스 왕에게 잘 보여야 됩니다. 그런데 아기스는 불신자인데다가 이스라엘의 원수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 죄를 짓게 됩니다. 코가 꿴 셈이죠. 삼상27:8~12을 보면 아기스의 신임을 얻기 위해 거짓말을 합니다. 가끔 외족을 정벌하러 출정하는데, 대개 이스라엘의 원수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유다 남방을 치는 것처럼 거짓말을 합니다. 그러니까 아기스 왕이 쾌재를 부릅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아주 원수가 되려고 작정을 했다고 판단하고 그를 영원히 자기 신하로 묶어 둘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상황은 더욱 더 악화되어 갑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출정을 결정합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은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참전을 요청합니다.(삼상28:1~2, 29:1~2)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다윗이 심적으로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장차 왕이 될 사람이 동족을 향해 칼을 들이댄다면 얼마나 기기 막힌 일입니까? 고통스러운 것은 물론이고, 이제 그의 장래는 끝장날 판국입니다. 사울 왕에게 핍박받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고통이 찾아온 것입니다. 삼상29:2 보면, 마지못해 전쟁터로 끌려가는 다윗의 모습이 나옵니다. “블레셋 사람들의 수령들은 수백 명씩 수천 명씩 인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그 꼬락서니가 가관입니다. 정말 한심합니다. 그 전쟁에서 죽을 수도 있지만, 승리한다고 해도 큰일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심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혹시라도 이번에 사울 왕이 전사한다면 다윗이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게 됩니다. 그러면 쿠데타를 일으킨 게 됩니다. 왕이 될 수도 없고, 설사 왕이 된다 하더라도 정통성을 인정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다행히 블레셋 장수들이 반대합니다. 그래서 다윗의 참전이 취소됩니다.(삼상29:3~11 참조) 장수들이 왕에게 항의합니다. 도대체 무얼 믿고 다윗의 군대를 데리고 가느냐 이겁니다. 한참 싸우다가 이스라엘 군대와 한 패가 되면 큰 곤경에 처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에 아기스 왕은 다윗에게 철군을 명령합니다. 안 그런 척 했지만, 가슴을 쓸어내리며 돌아가는 다윗의 쓸쓸한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다윗 일행이 시글락에 돌아갑니다. 자리를 비운 게 겨우 3일인데, 그 사이에 큰 일이 터지고 말았습니다. 아말렉 족속이 ‘시글락’을 침노한 겁니다.(삼상30:1~6 참조) 성읍을 불태우고 아녀자들과 아이들을 붙잡아 갔습니다. 그 참상이 삼상30:3~4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3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성읍에 이르러 본즉 성읍이 불탔고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들이 사로잡혔는지라 4 다윗과 그와 함께 한 백성이 울 기력이 없도록 소리를 높여 울었더라” 정말 기가 막힌 일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망명 생활이 서럽고 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 겨우 빠져나왔는데, 너무 기가 막혀 넋을 놓고 웁니다. 심지어는 부하들이 돌변해서 다윗을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고난을 피하려고 타협하고 말씀을 어기면 더 큰 고난을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당할수록 오히려 원칙을 지키고 말씀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 이야기입니다. 로마의 바티칸에 가면 시스티나 성당이 있는데, 그 천장화를 미켈란젤로가 그렸습니다. 높은 천장에 거꾸로 매달려서 그 큰 그림을 그렸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주변에 지인들이 염려가 되어 충고했습니다. 그 꼭대기에 그린 그림 누가 자세히 보느냐 이겁니다. 시력이 좋아도 잘 보이지 않으니 대충 그리라는 겁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누가 보기는요? 내가 보죠!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죠!” 그는 끝까지 최선을 다해 그렸습니다. 그의 판단이 옳았죠. 요즘 사진 기술이 얼마나 정교합니까? 대충 그렸다면 큰일 날 뻔한 겁니다. ‘위대한 화가 미켈란젤로’는 없었겠죠.
그러므로 여러분, 함부로 말씀을 어김으로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큰일납니다!
[2] 다윗이 늪에 빠진 이유 : 불신앙, 인본주의
다윗이 늪에 빠진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의 불신앙, 그리고 인본주의적 태도 때문입니다. 본문 1절을 보시죠.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붙잡히리니 블레셋 사람들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좋으리로다 ... ” 다윗은 자기 생각대로 계산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선을 놓친 채 인간적인 판단을 한 겁니다.
① 불신앙 :
다윗은 지금까지 도피 생활 중에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신앙을 잘 지켜왔습니다. 심지어 사울을 결정적으로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번이나 살려주었습니다. 그 중에 삼상26:24을 보면, 사울을 살려주고 난 후 그가 한 말이 나옵니다. “오늘 왕의 생명을 내가 중히 여긴 것 같이 내 생명을 여호와께서 중히 여기셔서 모든 환난에서 나를 구하여 내시기를 바라나이다” 그의 멋진 신앙의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하는 그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늪에 빠져서 허우적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신앙이 좋은 사람이라도 순간 하나님을 바라보는 영적 시선을 놓치면 이렇게 됩니다. 작은 고난에도 흔들립니다. 낙심합니다. 그래서 불신앙으로 떨어집니다. 사40:27~31 “27 야곱아 어찌하여 네가 말하며 이스라엘아 네가 이르기를 내 길은 여호와께 숨겨졌으며 내 송사는 내 하나님에게서 벗어난다 하느냐 ... 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 하리로다” 신앙은 시선 싸움입니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으면 스스로 낙심하고, 마치 하나님이 도와주지 않는 것처럼 참담하게 느낍니다. 현실의 문제를 보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보느냐 이것이 곧 불신앙과 신앙의 차이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태양 등지고 있으면 그림자만 보입니다. 그런 가운데 태양이 나를 왜 비춰주지 않느냐고 불평하면 정말 어리석은 일이죠. 태양을 바라보면 그림자는 저절로 사라지는 법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들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등지고 있으면서 참담해집니다.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됩니다.
② 인본주의 :
신앙이 흔들리고 불신앙 가운데 빠지면 인간적인 계산만 하게 됩니다. 이게 인본주의입니다. 하나님을 배제한 채 생각하고 판단하는 겁니다. 세상에서는 잔꾀가 통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통하지 않습니다. 잠시 동안에는 인간적인 생각이 통할지 모르지만, 나중에는 반드시 망합니다.
일찍이 하나님이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삼상22:5 “선지자 갓이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이 요새에 있지 말고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가라 다윗이 떠나 헤렛 수풀에 이르니라” 수년 전에 그가 국경을 넘어 블레셋에 피신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갓 선지자를 통해 국경 안으로 들어갈 것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얼른 순종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국경을 넘고 말았습니다. 국경을 넘은 것은 단순히 지리적으로 이동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곧 말씀의 선을 넘어간 겁니다. 힘들다고 말씀을 어겼는데, 이게 탈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라도 말씀의 선 안에서 머물러야 합니다. 고전4:6 “ ...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 ” 말씀의 선을 넘어가면 곤란합니다. 내 생각에는 잘 될 것 같은데, 나중에 보면 망하게 됩니다. 잠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마치 이런 겁니다. 운동 경기를 할 때 선 밖으로 나가면 어떻게 됩니까? 한 마디로 아웃(out)입니다. 우리가 말씀이 선 밖으로 나가면 우리 인생에서 아웃이 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지만 다윗처럼 실수를 함으로 늪에 빠진 적이 있었습니다. 그에게 자식이 없을 때 하나님께서 자식을 주시고 장차 큰 민족을 이루게 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오래도록 기다려도 그 약속이 이뤄지지 않자 그는 여종 하갈을 첩으로 취합니다. 좀 더 기다려야 했는데, 인간적으로 잘못 생각한 겁니다. 그 후 어떻게 됐나요? 아내 사라와 첩 하갈 사이에 다툼이 생깁니다. 나중에 태어난 적자 이삭과 먼저 태어난 서자 이스마엘 사이에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갈등이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 지금까지 유대인과 아랍인의 갈등으로 남아 있습니다. 말씀의 선을 넘어가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말씀에는 무조건 “아멘!” 하시기 바랍니다. 힘들어도 말씀을 꼭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십니다! 그게 우리에게 요구되는 신앙의 고난 아닙니까? 힘들다고 피해 가면 더 큰 고난을 만나게 됩니다.
어느 목사님의 간증입니다. 오래 전 신학교에 다니다가 군대에 갔답니다. 훈련 받는 것도 힘들지만 내무 검사 받을 때 참 힘듭니다. 지급된 물품이 없어지면 옆의 중대에 가서 훔쳐서라도 채워놓고 내무검사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했는데, 본인의 물품이 없어진 겁니다. 채워 놓으려면 남의 것을 훔쳐 와야 하는데, 도저히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계속 지적당하고 나중에는 욕설은 물론이고 발길질까지 당했습니다. 그래도 계속 그런 일이 반복되니까 중대장이 호출합니다. 그때 눈물을 흘리면서 고백했습니다. 전도사를 하다 군대에 왔는데 제대 후 학업을 마치면 목사가 될 사람으로, 자기 것을 도난당했더라도 남의 것을 훔치면 그 사람에게 고통을 주는데, 그런 짓은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감동을 받은 중대장은 그 후로부터 전적으로 인정해 주었고, 남은 기간 내내 편하게 지냈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고난을 당했지만 결국 승리한 겁니다. 그리고 그런 고난은 의로운 고난이요 크리스천으로서 마땅히 당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말씀 지키면 하나님이 나를 지켜 주십니다. 그런데 이게 참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늘 기도해야 합니다.
[3] 다윗이 늪에서 빠져나온 비결 : 하나님의 은혜, 신앙의 회복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악한 세상을 살다 보면 다윗처럼 때때로 실수하고 범죄함으로 늪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요?
① 하나님의 은혜 :
일단 늪에 빠지면 스스로 헤어나기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에 참전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했을 때 하나님이 극적으로 개입하십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였습니다. 블레셋 장수들의 반대로 참전이 취소된 겁니다.(삼상29:3~11)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비상 섭리를 행하신 것입니다. 안타깝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한 일입니다. 인간은 실수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지 않기 위해 하나님께서 역사하십니다. 이래서 우리가 구원과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글락이 아말렉 족속에게 노략을 당했을 때도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습니다.(삼상30:1~6) 극한 시험 가운데서 건져 주셨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고 생포되었는데,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살아남아 있었기에 나중에 안전하게 구출될 수 있었건 것입니다. 이 모든 게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 덕분에 살아갑니다.
② 신앙의 회복 :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려운 시험에서 건져 주지만, 우리 편에서는 신앙을 회복하는 게 중요합니다. 다윗은 부하들이 돌을 들어 죽이려고 하는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어떻게 했나요? 삼상30:6 “백성들이 자녀들 때문에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그는 다급한 상황에서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돌아옵니다. 삼상30:8 “다윗이 여호와께 묻자와 이르되 내가 이 군대를 추격하면 따라잡겠나이까 하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대답하시되 그를 쫓아가라 네가 반드시 따라잡고 도로 찾으리라”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갔던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승리합니다. 아말렉을 쳐부수고 포로로 끌려간 부녀자들과 아이들, 그리고 물건까지 전부 되찾아옵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무릎 꿇으면 세상이 내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우리가 인생 살다가 자칫 잘못하면 늪에 빠지기 쉽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늪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늪에 빠졌다면 다윗처럼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무릎을 꿇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반드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