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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 지고..
53.
수십 년 전, 조선의 궁궐은 바람은 숱하게 불었다. 지금도 여전히 조정을 아니, 궁궐 안을 뒤 흔드는 바람은 한 차례 미풍이 불면, 그 다음에는 폭풍이 궁궐을 휩쓸고 지나갔다.
창휘군, 이소는 숙원 양씨의 소생이었다. 미천한 어미의 출신이 늘 그 양 어깨를 짓누르고 쫓았지만, 그럼에도 이소는 늘 웃었다. 보는 눈이 없을 때조차, 홀로 남아 자신을 비웃는 자들의 눈을 한 번 쯤 노려볼 수도 있었을 테지만, 그의 눈가는 늘 미소로 주름져 있었다.
그리고 이향, 그는 조선의 세자였다. 대통을 이을 조선의 적통대군이었다. 그럼에도 이소를 대하는 이향의 태도는 다른 세자들과는 달랐다. 금상이 세자시절이었을 때도, 금상의 태상왕이 세자시절이었을 때도, 이향처럼 하지 않았다.
이향은 이소를 늘 떠받들었다. 그의 품행에 반했고, 그의 학식에 웃음을 지었다. 그의 총명함에 박수를 쳤고, 그의 날렵함에 환호했다.
이소는 이향의 총애를 받았고, 이향의 총애는 나날이 높아져만 갔다.
그들은 후원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즐겨했다. 선인들의 사상에 비판을 하고 논쟁을 벌이는 것을 좋아했고 시문을 쓰고 읊는 것을 즐겨했다.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늘 조심스러운 궁궐생활에서도 이향은 이소를 진정한 벗으로 삼았고, 한 배에서 태어난 아우로 보았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이향은 이소의 또 다른 눈을 보았다. 나라를 이끌어갈 진정한 재목은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군주의 눈이 자신의 앞에 보였다.
“혹...세자가 되고 싶지 않느냐.”
그 날도 잔잔한 바람이 불어오는 후원에 자리 잡은 이향은 하얀 한지 위해 수묵화를 담고 있는 이소에게 언뜻 말을 내비추었다. 그러자, 붓을 잡고 있던 이소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서는 이향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소신...저하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였습니까...?”
당황한 이향이 서둘러 이소의 양 어깨를 붙들고 그를 일으켜 세웠다.
“어찌 이러는 것이냐.”
“저하께오서 입에 담으시면 안 되는 말씀을 올리시니...소신...두렵사옵니다.”
이소의 말에 이향이 입 꼬리를 살짝 올려 웃음을 지었다.
“내 앞에 진정한 군주가 보이는데, 내가 용포를 입고 있는 것이 더욱 두려운 일이다.”
이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소가 다시 황급히 그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저하! 당치 않는 말씀이시옵니다!”
“당치 않다니...이 조선을 위한 군주는 너인 것 같구나.”
“저하!”
이소가 고개를 쳐들고 이향을 바라보았다. 혹시라도 그 곳에 다른 이가 있는 지 황급히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변을 살피던 이소가 다시 이향에게 눈을 돌렸다.
“절대로, 어느 누구에게도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옵소서.”
두려움이 가득한 이소를 바라보던 이향이 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부왕께...”
“저하! 진정 반역을 저지르실 것이옵니까? 그리하신다면 저하뿐만 아니라 소신 역시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이미 부왕께서도 나에 대한 실망이 가득하실 것이다.”
“저하!”
이내 이소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더니, 뚝 소리를 내며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죽을 것입니다. 분명, 주상전하께오서는 소신을 죽이실 것입니다.”
이향은 이소의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내 깊은 한숨을 쉬었다.
이소는 그 어미의 출신마저 천하여서 용상 근처에 발도 디딜 수 없었다. 그런 이소의 재능을 늙은 금상 역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적통대군을 뛰어넘을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금상은 이소를 경계하였다.
갑작스러운 금상의 양위가 선포되었다. 금상은 늙고 지쳐있었고, 그의 눈빛에는 젊었던 시절의 반짝이는 빛은 사라졌다. 사그라져버린 눈이 이향의 눈에 비쳐졌다. 늙어버린 금상의 앞에서 할 수 없다고 소리치며 울었지만, 소용이 없었고 이향은 원하지 않던 왕명을 받들었다.
그렇게 이향은 조선의 또 다른 왕이 되었다. 나라의 앞날을 제 손에 쥔 이향은 두려움에 떨었다. 낮에는 편전에서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을 찌르고 있는 대신들의 얼굴에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고, 밤이 되면 꿈속을 헤집고 다니는 악몽으로 두려움을 떨치지 못했다.
어느 날 무기력한 새로운 왕 앞에 이소는 무릎을 꿇었다.
“주상전하.”
늘 웃음을 머금은 아우, 그의 얼굴빛과 어우러진 관복 빛깔이 유난히 더 빛났다.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자신을 부르는 아우의 모습을 보자, 왕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굳게 성심을 다잡으시옵소서.”
이소가 간청하였고, 이향의 얼굴이 약간 틀어졌다. 이향이 어느 누구에게 할 수 없었던 근심들은 이소에게 만큼은 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이향은 그에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나는 할 수 없다.”
“주상전하!”
이소는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애걸복걸하였다. 늘 웃음을 짓고 있던 눈가는 일그러져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흐느낌 속에서 통촉하는 말만 되풀이 하였다.
끝끝내 왕, 이향은 그의 충언에 손을 잡았다. 그리고 이소는 새로이 군주가 된 이향을 곁에서 성심성의껏 보필하였다. 그의 마음이 약해지면 이소는 그 마음을 굳혀주었고, 이향의 갈피를 잡지 못하면 이소는 그 방향을 이끌어주었다.
“주상전하, 이제 곧 청나라로 떠날 것이옵니다. 이것이 마지막 문안인사이옵니다.”
이향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안 된다! 과인이 승낙하지 아니하였거늘!!”
“주상전하, 통촉하여주시옵소서...”
이향은 자신의 앞에 무릎 꿇고 있는 아우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이소가 들어오지 못하는 조회에서는 조정대신들의 악독한 비판이 내리치고 있었다. 늘 곁에서 정사를 돌보고 있는 이소의 존재를 그들은 탐탁치 않아했다.
‘베갯머리송사가 아니라...붓대가리송사라고 하지?’
조정에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졌다. 그들은 이제 이소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이소는 그 견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도망질을 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향은 그대로 그를 떠나보낼 수 없었다.
이소가 곁에 없다면...조정대신들이...희번덕거리며 틈새를 노리고 있는 그들에게 물어뜯으라고 목을 내어주는 것 같아서 두려웠다. 곁에서 자신을 보필해왔던 이소의 부재로 눈앞에 닥쳐올 일들이 막막해져가기만 했다.
“과인은 허하지 않는다.”
“주상전하께오서 허하지 않으신다면...더 큰 일이 닥쳐올 것입니다.”
“과인이 그대를 지킬 것이다. 아니 내가 아우를 꼭 지켜낼 것이란 말이다!”
이소의 경고에도 이향은 그 경고를 무시했다. 그리고 그가 단언하였던 목소리의 울림이 멎기도 전, 조정에 강한 바람을 동반한 태풍이 들이닥쳤다. 조정의 모든 일은 멈춰졌다. 하물며 내의원에 약재를 자르는 소리마저 숨을 죽였다.
“철저히 조사해라!”
“이미 모든 조사는 끝났사옵니다!”
조정에 모인 백관들이 입을 모아 소리쳤다. 뒷방으로 물러난 상왕마저도 이소를 비판하였다. 이향을 꼭두각시로 내세워 자신의 욕망을 갈구하는 이소에게 분개하였다.
상왕에게 더 이상 이소는 자신의 피를 이어받은 아들이 아니었다. 상왕 앞에 무릎 꿇은 이소를 날카로운 눈과 말로 할퀴었다.
“역적죄인 창휘군을 처결하시옵소서!”
친국을 진행하는 동안 이소는 이향을 바라보지 않았다. 그의 입에서는 잘못했다는 말도, 거짓이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오직 침묵으로 그곳에서 자신의 형제를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머지않아 이향의 입에서 유형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 이소가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조정대신들, 아니 노론들은 잠시 잠잠해졌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그들은 이소에게 사약을 내려달라며 소리쳐댈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그들이 소리치지 않았다. 아니 소리칠 수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강화도의 비바람이 불어치던 날, 이소는 비바람에 자신의 몸을 맡겼다.
보기에도 아찔한 절벽 위에서 그는 작은 한 마리의 새라도 된 냥 바람에 몸을 맡겨 훨훨 날아갔다.
[전하께오서, 소신에게 주신 우애지정(友愛之情)을 어찌 말로 할 수 있겠사옵니까. 노여워 마시옵소서. 슬퍼하지 마시옵소서. 소신은 꿈에 그리던 경섭을 떠날 것이옵니다. 바다 끝에 무엇이 있는지, 꼭 소신의 눈에 담아오겠사옵니다. 부디, 아둔한 아우의 꿈을 헤아려주시옵소서.]
수 만 번을 들쳐보고 문질러 보았던 것인지 색이 바란 낡은 종이가 이렬의 앞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군데군데 물에 번진 먹 자국이 들어진 서찰이 이렬의 눈에 들어왔다.
“이소를 닮았다. 그가 가졌던 학식이며, 성품, 능력이며....지혜마저도 이소와 같다.”
“주상전하...”
“그리고 왕이 될 수 없는 것마저도 이소와 같다.”
눈물로 얼룩 진 이렬이 얼굴을 들어 왕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과인은 군주가 아닌, 아비가 될 것이다.”
고개를 든 이렬의 얼굴이 다시 푹 꺼졌다. 그리고 그 어깨가 들썩거리며 작은 흐느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왕 역시, 자신의 앞에서 서글프게 울고 있는 아들이 모습을 보며, 그리고 애달피 떠나버린 아우의 얼굴을 그리며, 눈물을 흘렸다.
한 송이의 눈이 류현의 갓 위에 떨어지는 가 싶더니 이내 녹아버렸다. 한 송이, 한 송이 흩어져 내리던 눈이 어느 새 작은 조약돌 크기만큼이나 커졌고, 그 눈발이 굵어졌다. 순식간에 도성에 눈발에 휩싸였다.
“나리...”
재민의 방 앞에 얼마나 서 있었던 것인지 류현의 갓 위에 눈이 쌓여있는 것을 본 함 서방이 류현을 불렀다.
“어르신께서는...”
“이제 막 기침하셨습니다.”
류현이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함 서방이 류현의 어깨에 쌓여있는 눈을 털어주었다.
“날이 추운데 어찌 그리 밖에 서 계셨습니까...”
함 서방의 물음에 류현이 갓을 벗어서 그 위에 쌓인 눈을 털었다. 그리고 다시 갓을 바르게 쓰고는 방문 앞에 섰다.
“어르신... 들어가겠습니다.”
안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류현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갔다. 아궁이에서는 계속 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류현이 방안으로 들어가자 얼었던 몸이 따끔 거렸다. 재민이 누워있는 곳, 곁으로 가서 류현이 무릎을 꿇고 그 앞에 앉았다.
“괜찮으십니까...?”
류현의 목소리에 자리에 누워있던 재민이 힘겹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몸이 불편한 것인지 일어나는 것을 힘겨워하는 재민을 본 류현이 그에게로 다가가서 부축하려했지만 재민은 그의 손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그의 모습에 류현은 당황하지 않았다. 재민의 반응을 예상했었기에 류현은 손을 조심스럽게 거두었다. 자리에 앉은 재민이 류현을 바라보았다. 재민은 류현을 바라보고 있었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류현은 고개를 숙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서로가 가슴 속에 담고 있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한참 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조용한 재민의 목소리가, 숨이 차는 듯 목소리가 힘겹게 들려왔다.
“당분간...얼굴을 보고 싶지 않구나.”
이렬과 마찬가지로 재민의 분노 또한 류현을 향해있었다. 재민이 속으로 아무리 류현은 죄가 없다고 그를 보듬었지만, 가슴에서 몰아치고 있는 화는 어쩔 수 없이 류현을 향하고 있었다.
침묵을 깬 재민의 말에 류현이 고개를 낮게 숙였다.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죄송합니다...”
그제야 류현 또한 제 마음 속에 품고 있던 말을 꺼낼 수 있었다. 류현의 말을 들은 재민은 고개를 돌려 더 이상 류현을 바라보지 않았다. 류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섰다.
그리고 한 걸음 내딛을 때 마다 소리를 내는 눈밭을 가로 질러 지윤이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류현은 천천히 걸으며 집을 둘러보았다. 자신의 집보다 따뜻했던 이 곳, 자신의 집보다 더 좋아했던 이 곳...천천히 이곳저곳을 눈에 담았다.
지윤의 방 앞에서 선 류현이 그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제 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들어간 류현인 이곳저곳에 흐트러져있는 자신의 흔적을 하나 둘 씩 지우기 시작했다.
하나도 남김없이 서랍이며, 옷장이며 자신의 물건을 끄집어냈다. 차분했던 류현의 손길이 어느새 빨라지더니 서안 위에 있던 필통을 방 한가운데에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진 필통을 노여워하며 바라보던 류현의 눈길이 문에 닿았다.
“도련님...”
어지럽혀져 있는 방안을 바라보고 있던 이화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고 입을 벌리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가거라.”
이화가 방 안으로 한 발을 들여 놓았다.
“무슨 일이 있으신 것 입니까?”
류현이 이화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입으로 말해야하는 것인지...류현의 슬픈 눈으로 이화를 바라보았다. 또 다시 류현에게서 슬픔을 느낀 이화가 그 때처럼 류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왜 이러시는 것입니까...?”
어느 새 류현의 앞에 와 닿은 이화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류현은 이화의 눈을 피했다.
“도련님...”
“이제 나는 내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류현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이화가 의아한 눈으로 류현을 바라보았다.
“네...?”
“너와는 이제...끝이다.”
류현의 입에서 힘겹게 이별을 말했다. 가슴이 먹먹해져와 내뱉지 못할 것 같았던 그 말이 류현의 입에서 나왔다. 영원히 자신의 귀에 들리지 않을 것 같았던 말이 이화의 귓속에 흘러들어왔다. 류현, 종잡을 수 없는 류현이 이화에게 이별을 말했다.
“도련님...?”
“처음부터...너를 원해서는 아니 될 사람이었다. 그것을 이제야 알아챈 나를 원망하여라.”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나가라 하지 않았느냐!"
류현의 외침에 금세 이화의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큰 눈망울에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 눈물을 눈에 담은 류현의 마음속에는 이미 눈물이 흐르고 또 흐르고 있었다.
이윽고 이화의 눈에 가득 차오른 눈물이 툭 하고 이화의 고름에 떨어졌다. 이화가 눈물을 흘리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누구든 이상해진 류현을 말려주길 바라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화가 떠난 방에서 류현은 계속 자신의 짐을 챙겼다. 속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떨리는 손으로 옷가지를 집어 들었다.
밖으로 뛰쳐나온 이화는 맨발로 마당을 누볐다. 하지만 이곳에는 자신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자리에 누워있는 지윤과 재민에게 말할 수가 없었던 이화가 이렬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화가 버선발로 대문간으로 뛰쳐나갔다.
어서 빨리 류현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이렬을 데려와야 했다. 이화의 마음이 더욱 더 조급해져 버선이 젖는 줄도 모르고 뛰었다.
미친 듯이 뛰고 또 뛰었다. 눈발이 휘날리는 거리를 뛰었다. 그리고 이내 이화의 눈에 이렬의 집이 들어왔다. 대문간에서서 이화가 소리치며 대문을 두들겼다.
“대군나리!! 문 좀 열어주세요!!”
이윽고 최 서방이 밖으로 나와 만신창이가 된 이화의 모습을 보며 놀라서는 황급히 이화를 사랑채로 안내했다.
“대군나리! 저를 좀 도와주십시오.”
이화가 이렬을 보고 소리쳤다. 눈물범벅이 된 이화의 모습을 본 이렬의 눈이 어두워졌다.
“도련님께서...강 도련님께서...나가신다고 하시는데...원래 자리로 돌아가신다는데...저는 모르겠습니다....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화야...”
“어서 대군나리께서 말려주십시오...오라버니가 저리 되셨는데...어째서 도련님께서...오라버니에게 도련님이 필요합니다. 아직은 이리 떠나시면 아니되십니다...”
이화가 눈물을 흘리면서 이렬에게 애원하였다. 이화의 애원에 이렬이 손을 올려 이화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이화야...그냥...두어라.”
류현을 붙잡아 줄 주 알았던 이렬이 자신이 원하는 답을 하지 않자, 이화가 서글픈 눈으로 이렬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대군나리...제발...저 또한 도련님이 안 계시면... ”
이화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울음소리가 들려오자, 이렬이 안타까움에 한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너의 아비와 오라비를 그리 만든 자...그 자가...”
이화는 기다렸다. 이렬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몰랐기에 기다렸다.
이렬이 운을 떼고는 머뭇거렸다. 그 것이 이화를 아프게 할 것임을 알고 있었고, 그 것을 제 입으로 내뱉는 순간, 이렬은 정말로 류현의 손을 완전히 놓아버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망설였다.
머뭇거리던 이렬이 이내 마음을 굳혔다. 이미...류현은 적이었다.
“그 자가 선휼의 아비이다. 강류현...그 자의 아비 강윤식이 너의 아비와 오라비...그리고 너를 이렇게 만든 자이다.”
이화가 충격에 빠진 듯 이렬을 바라보았다. 그럴 일이 없다며 이화가 고개를 저었다. 세차게 고개를 젓던 이화가 말했다.
“거짓말....거짓말 마십시오....”
“거짓이 아니다! 모든 것이...그 자의 아비와 그 무리들이 꾸민 일이다.”
이렬이 거칠게 이화의 양 어깨를 잡았다.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한 이화가 애써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웃음을 지었다. 이화의 눈에 또 다시 가득히 차올랐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거짓...거짓이시죠...”
그러던 이화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차가운 눈이 쌓여있는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이화야...”
“거짓이지요...”
짐을 챙긴 류현이 지윤의 방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을 지키고 있던 철이 아범은 별 지시가 없었음에도 자리를 피해주었다.
“윤아...”
류현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누워있던 지윤이 움찔거렸다.
“괜찮으냐...”
“괜찮다...”
지윤의 목소리가 들리자, 류현이 울컥했는지 제 입을 막았다. 지윤이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류현을 그리며, 류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살짝 비스듬히 어긋나 잘 보이지 않는 지윤의 얼굴을 바라보던 류현이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무엇이...미안하다는 것이냐.”
류현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자, 자신의 앞에 앉아있는 지윤의 모습이 희미해졌다.
“모든 것이...모든 것이 다 미안하다...”
지윤의 손이 다시 류현의 손을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리고 류현의 손을 찾은 지윤의 손이 그 손을 잡아주었다.
“자책하지 말거라. 너로 인하여 이리 된 것이 아닌데 어찌 자책하는 것이냐.”
눈물이 흘러나왔다. 류현의 눈에서도...지윤의 마음에서도 눈물이 흘러나왔다.
“아비를...버리고... 벗을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했었다.”
“...”
“내 벗을 버리지 못하듯...내 아비 또한 버릴 수 가 없구나...”
“아니 된다...”
류현의 손을 잡고 있는 지윤이 그 손을 놓치지 않으려고 힘을 주었다. 두 손으로 류현의 손을 붙잡았다. 류현이 떠날 것을 알아챈 지윤이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말거라...”
지윤이 그에게 사정하였다. 하지만 류현이 자신을 옥죄고 있는 지윤의 손을 떼어내려고 했다. 류현에 떼어내려고 할수록 지윤의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윤아...놔라...”
“어찌 네 마음을 네 손으로 할퀴려 하는 것이냐...?”
지윤은 끝까지 손을 놓지 않고 버티었다. 이렬이 이미 놓아버린 그 손을 지윤이 힘겹게 잡고 있었다.
“.......”
“그럴 수 없다...어느 누구도 너를 원망하지 않으니...제발...가지 말거라.”
류현의 입에서 울음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지윤의 입에서도 울음이 터져 나왔다. 상해버린 지윤의 눈가에서 벌건 눈물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류현이 지윤을 안았다.
“다음 생에...꼭...다음 생에는 여인으로 태어나라...”
지윤의 서글픈 울음소리가 울렸고, 류현은 지윤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생에...이화가 없다면...내가...너를 꼭 찾아가겠다...”
“무, 무슨 말을 하는 것이냐....”
“윤아...더 이상...아프지 말거라.”
류현의 얼굴에서 흘러나온 눈물이 두 사람의 손에 연신 떨어졌다. 류현의 목소리가 지윤의 귀에 들려왔다. 류현이 자신의 마음을,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음에 놀란 지윤이 부여잡고 있던 류현의 손목을 놓아버렸다.
류현이 재빠르게 두 손을 숨겼다. 지윤이 허공에 손짓을 하여 류현을 잡으려고 하였다. 하지만 뒷걸음질한 류현은 잡히질 않았다.
“제발...가지 말거라...”
그리고 류현은 자리를 떠났다. 류현이 걸어가는 소리를 들은 지윤이 그를 붙잡으려고 손짓을 해댔지만, 류현은 그를 뒤로하고 방에서 나왔다.
"이화를 어찌 두고 가려고 하는 것이냐!!!"
방 안에서 울부짖는 지윤의 울음소리에 밖으로 나온 류현이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소매 자락으로 눈물을 닦아낸 류현은 대청마루에 놓아두었던 짐을 들었다. 그리고 작은 사랑채 마당 나서 대문간으로 향하던 류현의 앞에 이화가 터벅거리며 새하얀 눈길 위에 발자국을 남기며 다가왔다.
그녀의 버선은 이미 흙투성이가 되었고, 치맛단은 눈에 젖어있었다. 그리고 늘 단아했던 그녀의 얼굴에는 추위로 인해 하얗게 질려있었다. 그 모습에 류현이 애써 멈췄던 눈물이 다시 나오려고 하였다. 하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이화에게서 눈을 떼었다.
“도련님.”
차가운 눈 줄기와 같은 이화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랑을 머금고 있던 눈빛은 온데간데없이 노여움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화가 모든 사실을 알았다. 류현이 체념하였다. 그녀에게 자신이 직접 말하지 않은 것이 안심되었다. 자신의 입으로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것보다는 나았다.
“도련님.”
이화가 또다시 류현을 불렀다. 류현이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가려는 찰나, 이화가 말했다.
“정말...그게...사실입니까...?”
이화가 류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류현이 이화를 바라보았다. 서로를 향해 얼굴을 맞대고 서로에게 눈빛을 주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는 애틋함, 노여움 뒤에 감춰진 애틋함이 보였다. 하지만 두 사람 다 그 애틋함을 애써 무시했다.
“그래, 사실이다. 네가 들은 그대로이다.”
류현의 목소리가 시렸다. 그 목소리가 들리는 귀가 차가워 얼어버릴 것 같았다.
“그런데...어떻게...”
“지금이라도 알았으니 다행이지 않느냐!”
류현이 소리쳤다. 그를 바라보는 이화의 눈에서 원망이 쏟아져 나왔다.
“묻으려고 했다. 그러나 묻히지 않았으니, 어쩔 수 없구나. 그래 맞다. 내 아비가...너를 이리 만들었다. 모든 것들이 내 아비의 손에서 일어난 것이다!”
“저를 속이셨습니다! 오라버니를 속이고! 대감마님을 속이셨습니다!”
“그뿐이겠느냐! 좌상 또한 속였고, 대군도 속였다. 그리고 이 나라 군주까지도 속였다! 그런 내가 너를 속이는 것이 어려울 것 같았느냐!”
쏟아 붓던 말들을 멈추고 다시 또 서로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이화가 한 걸음 류현의 곁으로 다가갔다.
“무엇이...도련님의 원래 모습이십니까....? 진정...제가 알던 도련님이 맞으십니까....”
“네가 알았던 그 자는 거짓이었다.”
“...”
“원망이라면 실컷 하여라.”
이화의 손이 떨렸다. 그리곤 차갑게 얼어버린 이화의 손이 류현의 뺨을 할퀴었다. 차갑게 얼어버린 류현의 뺨에 닿은 손길로 인하여 산산조각이라도 날 것 같았지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가슴에서 무엇인가 잘게 부셔져버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 이화의 손길이 닿은 감촉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본래 모습을 알았으니...다행이네요.”
이화가 류현을 지나쳐 걸어갔고, 류현 또한 앞으로 계속 걸어갔다. 두 사람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져갔다.
류현은 대문간을 나서 밖으로 나가자, 힘없이 대문간 벽에 몸을 기대었다. 북촌에서 보내 온 수복이 류현에게 다가왔다.
류현과 헤어지고 아무렇지 않은 듯 걸음을 걷던 이화는 작은 사랑채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눈 쌓인 마당에 주저앉았다.
눈이 내렸다. 차가운 눈이 온 세상을 얼려버렸다. 따뜻했던 마음마저도 차갑게 얼려버렸다.
마당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던 이화의 귓가에 또 다른 이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정신을 다잡은 이화가 서둘러 지윤이 있을 그곳으로 달려갔다. 역시나, 지윤의 곁으로 다가갈수록 그 울음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오라버니!”
방안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지윤이 서글피 울부짖었다. 그리고 이화의 목소리를 들은 지윤은 말했다.
“이화야, 어서 가서 선휼을 잡거라.”
하지만 이화는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다.
“너라면, 그 자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 것이다.”
지윤이 이화의 양 팔을 움켜잡았다.
“오라버니...”
어린 아이가 된 것 마냥 이화의 양팔을 붙잡고 보채던 지윤이, 미동조차하지 않는 이화의 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팔을 잡고 있던 손이 맥없이 떨어졌다.
“그...손을 놓았구나...”
“......”
지윤은 가만히 앉아있었다. 멍하게 앉아있었다.
“차라리...안 된다고 말려주시지요...”
이화가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여있었지만, 참았다.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저에게는 너무...제가 견뎌내기에는 너무...큰...”
말을 이어가던 이화의 목소리가 떨려오더니 이내 말문이 닫혀버렸다.
그들은 한참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이내 이화가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와 약조...지키지 않았다고 뭐라 하지 마세요...저는 오라버니를 원망하지 않아요...”
이화가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다. 밖에서는 철이 아범과 금난이 심난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다. 지윤을 홀로 남겨두고 이화가 밖으로 나오자, 금난은 이화를 챙겼고 철이 아범은 황급히 방안으로 들어갔다.
“아씨...”
“금난아...쉬고 싶구나.”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