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필로 대접받은 박정희 광화문 앞을 지날 때마다 콩크리트로 지어진 광화문 건축물과 그 정면에 붙어있는 박정희가 쓴'광화문'이란 한글 글씨의 현판을 보게 된다. 광화문은 전통적
우리 궁궐의 목조건물이었고 건물 정면에 부착된 현판은 원래 '光化門'이었다.
일제 항복 이후 반세기하고도 10년을 내년으로 둔 오늘 이 수난의 콩크리트 건물과 그 중앙에 붙은 친일 군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창씨개명 당시에는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였다. 일말의 양심은 있었는지 高靈 박씨의 高자와 朴씨의 木자와 正熙의 正자를 살리고 일본
이름에 많은 雄자를 넣어 '高木正雄'이라 했다가 '조선적 뿌리'가 남았다 해서 굴욕감을 느꼈는지 대동아공영권 실현의 내재된 신념이 불탔던지 다카키 마사오는 이 이름마저 바꿔 골수
일본식 이름인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로 바꾸었다)가 쓴 현판을 바라볼 때 온 몸의 피가 역류하는 것을 누를 길이 없다.
광화문은 오백년을 이어온 조선의 정궁인 경복궁의 정문이다. 대개의 국왕들이 창덕궁에서 정사를 봤으나 초창기부터 정도전이 기획 건설한 조선왕조 창업의 상징물이었고 조선 말기에는 외척의 발호와 탐학을 척결하고 왕권의 위엄을 세
우려는 흥선대원군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조선 왕조의 자존심이었다. 1927년 조선총독부가 경복궁 동문인 건춘문(建春門) 북쪽으로 이전했고, 그 후 6·25전쟁으로 소실된 것을 1969년 2월 박정희 정권때 철근 콘크리트 구조로 복원시했다.
'光化門'(광화문)의
의미는「光天化日(광천화일)」 즉 '光天(광천)은 밝은 태양이란 뜻이고, 化日은 나라가 오래 泰平無事(태평무사)하다는 뜻이므로, 세상이 컴컴하고 어두운 시대나 혹시
사회질서가 문란한 시대와는 서로 對比(대비)된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런 깊은 뜻이 담겨져 있는 「光化門」이란 명칭을 박정희가 漢字 대신 '광화문'으로 새로 고쳐 써 놓았으니 이 建物(건물)을 관람하는 사람들이 무슨 意味(의미)를 느낄 수가 있겠는가
광화문을 쓴 박정희의 글씨는 지금도
전국의 명소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충남 아산 현충사, 제주도 5.16도로, 고리 원자력
발전소, 기념탑 등 수십 곳에 이른다.
한 원로 서예인은 "시절이 시절인 만큼, 드러내 놓고 얘기는 못했지만 눈을 버렸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고 회고했다. 하기야 아마추어의 솜씨가 애교
수준이 아니라, 명필인 것처럼 대접받았으니 얼마나 분통 터질 노릇인가.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손가락을 잘라 충성 맹세한 골수분자 박정희는 문경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다카기 마사오(박정희-1917년 생-러시아 볼세비키 혁명의 해)는 자진해서 만주 신경(新京-괴뢰 만주국 수도. 본래 이름은 창춘:長春)소재 군관학교, 정식명칭은 '만주제국육군군관학교' 생도생으로 스스로 들어갔다. 만주군관학교 2기생으로 자원입학(1940년 4월 4일)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나이 23세였다.
예비일본군 장교 박정희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
나이도, 신원검증도, 사상검증의 장애물을 한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충성혈서는 만주군관학교 사람들을 감
동시켰고 일제를 감동시켜 당시의
언론에(만주일보) 대서 특필 되었다. "盡忠報國 滅私奉公(진충보국 멸사봉공)" 이 글귀가 바로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손가락을 잘라서 쓴 '충성혈서'다.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고 개인을 소멸시켜 공적인 일을 받든다는 말로 몸과 맘 신명 다 한다는 뜻이다. 신경군관학교로 말하면, 그 정식 명칭이 '만주제국육군군관학교'로서 일제의 만주 괴뢰국인 만주 제국의 육군사관학교였다.
당시 그와 함께 입학한 신입생들은 일본인 240명, 만주인 228명, 조선인 12명이었다. 그의 입학 성적은 240명 중 15등이었다(일본인 신입생의 성적은 별도). 하지만 2기 졸업식에서는 240명중 당당히 1등으로 졸업하였다. 당시 같이 입학한 조선인 중에는 나중에 5·16군부 쿠데타 당시 이에 반대한 제1군사령관 이한림(李輪林)도 끼여 있었다.
군관학교를 졸업하고 관례대로 우등생에게 주어지는 일본육사 특전의 혜택을 누리게 되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일본 육사에서도 진지한 학습태도로 모범생이란 평을 받고 3등이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을 했다.
조선인
출신으로는 유일하게 일본 육군 대신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이로써 박정희는 완전한 일본인(高木正雄다카키 마사오-岡本實오카모토 미노루)이 되었다. 입학 당시 23세였던 박정희는 5년제 사범학교를 마친 후 3년간 교사
생활을 한 후에 군관학교에 들어왔기 때문에 3∼4년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곧장 입학한 다른 학생들보다 대여섯 살 많은 편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선배들에게 항상 깍듯이 예절을 지켰고, 졸업 시 수석을 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학교 생활에 매우 열심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는 '다카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페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그는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라고
평가하였다.
1942년 3월 어느 날 만주의 신경군관학교 졸업식장에서 오카모토 미노루(罔本實)라는 한 졸업생이 '어전강연'이란 답사를 하고 있었다. 답사의
내용은 일본 천황과 일제의 만주 괴뢰국 황제 부의(溥儀)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것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선서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카모토 미노루, 그는 그후 20여 년 뒤 5·16군부 쿠데타를 통해
한국의 대통령이 되었던 박정희 바로 그였다. 중국인과 조선인 생도 240명 가운데 수석을
차지했기 때문에 그
대표로서 답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졸업식장에서 그는 우등상으로 만주 괴뢰국 부의 황제로부터 금시계도 받았다.
'조센징 토벌'에 발군의 실력 발휘한 다카키 마사오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되어 있었던 부대는 독립군 토벌에 110여회를 출정하게 되는데 과연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양심의 가책이나 동포를 죽이는 행동 때문에 방아쇠를 당기는 행위에 고민을 하였을까? "조센징 토벌이다. 요오시(좋다)"를 연발하며 출정을 한 사람이다.
일본은 만주 서남부와 중국북부에 투입할 용맹한 부대를 선발하여 특수부대(철석부대)를 만든다. 여기에 조선인 부대인 [간도특설대]에 선발되었는데 그 속에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주일 등이 소속되어 있었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중국북지(열하성 만리장성 남방 평곡-북경 동북방)로 투입되어 항일 세력과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여기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소수민족들의 특수부대는 많았다. 조선인의 간도특설대, 러시아인의 찬야부대, 몽고인의 기야부대, 회교인의 회교부대, 오르치온족의 공작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가
가장 강력했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일본군, 만주군이 못해내는 작전을 간도특설대가 가서는 거뜬히 해치우곤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조선인 공적평가에 인색한 일본인들도 간도특설대에
대해서는 "상승의 조선인부대" 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다카키 마사오(박정희)가 소속한 특수부대(간도특설대) 요원들이 얼마만큼 항일군의 토벌에 커다란 공을 세웠는지를 대변해주는 이야기이다.
조선총독부는 철거했지만 친일파 청산은 안되었다일제는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기 위해 경복궁 궁궐과 누각 및 홍례문 4000여 칸을 허물었다. 1911년 일제가 초선총독부 청사를 신축하기로
결정했을 때 일본 건축가들은 그 부지를
서울 동숭동 옛 서울대 문리대
자리나 지금의 서울 시청 자리 등을 제안했음에도 불구하고 초대 총독 데라우치(寺內)는 이에 반대, 경복궁을 철거할 것을 지시했다.
한국이 영구히 멸망하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를 영구히 받게 되었음을 한국인들과 전
세계에 선언하고 주지시키는 정치적 상징성을 갖도록 하기 위해 경복궁을 철거하고 그 위에 지어야 한다는 것이 데라우치의 명령이 었다. 이렇게 해서 대한제국의 정궁(正宮)이었던 경복궁의
일부가 헐렸다.
김영삼 대통령은 해방 후 중앙청이라 불리던 조선총독부(소위 합방 직후는 남산 통감부의 왜성대였다)건물을 철거했다. 1995년 8월15일 중앙돔 첨탑 상단부 철거를 시작하여 구조선총독부 본관 건물 1만1백25평을 96년 11월13일에 완료했다. 이날 옛 조선총독부 건물이 지상에서 완전 철거됨으로써 민족정기 발현의 걸림돌의
하나였던 오욕(汚辱)의 잔재는 이제 사라졌다.
광화문뿐만 아니라 3.1 운동의 유적지인 파고다공원에도 그의 글씨가 있다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국민연대
광복 51년만에 조선총독부 건물은 「영구히」사라졌지만 건물 하나 허물 었다고「과거 청산」이 완료된 것은 아니다. 총독부 건물 철거가 한 대통령의 통치 업적에 끼워넣기 위한 즉흥적 발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면 한국 역사 에 아직도 굳건하게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친일파들의 망령, 그 족적(足迹)을 걷어냄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 박정희 시절에 철근 콘크리트로 광화문이 지어지고 그 중앙에 박정희의 한글현판이 내 걸렸다. 일제 항복 16년에 불과한 짧은
기간에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총칼로 민주를 짓밟고 이 땅을 18년 간 지배했다. 어찌 이런 사람의 글씨로 쓴 현판을, 그것도 수도 한복판 조선왕조의 정궁 정문인 광화문 한복판에 내 걸 수 있는가? 즉시 바꿔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