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자를 앞세우는 날들이 잦아졌다
캄캄한 지층으로 몰려가는 가랑잎들
골목엔 눈자위 검은 등불 하나 켜진다
잎 다 지운 느티나무 그 밑둥에 기대면
쓸쓸히 저물어간 이번 생의 전언이듯
어둔 밤 몸 뒤척이는 강물소리 들린다
몸 아픈 것들이 짚더미에 불 지피며
뚜렷이 드러난 제 갈비뼈 만져볼 때
맨발로 걷는 하늘엔 그믐달이 돋는다
젖 물릴 듯 다가오는 이 무형의 느낌은
흰 손으로 덥석 안아 날 데려갈 그것은
아마도, 오기로 하면 이맘쯤일 것이다.
-『내외일보/최형심의 시 읽는 아침』2024.08.31. -
가을을 노래한 염창권 시인의 시조들은 참 아름답습니다. 가을 시냇물처럼 차고 맑은 문장과 행간에 스며든 고요는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기품을 느끼게 합니다. 그 특별함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보니 그의 시조에는 “무형의 느낌”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이 존재합니다. 그것은 단풍 물든 “가랑잎들”과 맑은 “하늘”과 시린 “강물” 같은 아름다운 것들 사이사이로 만물이 가진 것을 하나씩 버리고 마침내 “맨발로” 서게 되는 과정을 아프게 대비시키는 그만의 목소리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그림자를 앞세우는 날들이” 많아지고 “쓸쓸히 저물어간” 것들에 눈길이 가는 계절, 보름이 아니라 “그믐”에 가까운 계절이 이제 성큼 우리 앞으로 다가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