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백련암에
지난해 가을에 해인사를 찾았다. 그때 낙엽으로 뒤덮인 오솔길로 백련암을 찾아가는 젊은 부부를 만났다. 우리도 따르고 싶었지만, 그날의 일정아 빡빡하여 다음으로 미루었다. 이제 겨울도 지났고, 꽃이 온 산천을 뒤덮고 있으니, 백련암을 찾아가기에 딱 좋은 절기이다.
바로 오늘이다. 절기가 조금 당겨져서 산 아래 마을에는 벚꽃은 이미 지고 있다. 어제는 동촌 유원지를 한 바퀴 돌았다. 벚꽃이 진 자리는 약간 붉은 색을 띄어 나무 전체가 붉으스레 하다. 봄이 더 멀리 가버리기 전에------, 우리 부부는 해인사 백련암을 다녀오기로 했다.
서부 정류장은 이제 익숙하다. 10시 40분에 해인사로 출발하는 버스에 올랐다. 창 밖에는 형형색색의 꽃들이 눈을 즐겁게 해준다. 영국 시인 워즈워드는 무지게를 보면 가슴이 띈다고 했지만 나는 꽃이 핀 봄 풍경에 젖으면 가슴이 띈다. 지금은 아득하기만 한 옛 노래 가사 ‘먼산에 아지랑이 품 안에 잠자고’가 떠오르지만 이제는 그 가사를 기억하는 사람도 만나기 어렵다. 내가 살아 온 세월의 저 너머는 ‘먼 산의 아지랑이’처럼 아물아물 하다.
창너머에서 꽃이 핀 둔덕 아래로 흐르는 냇물을 보면 어릴 때에 고향의 개울에서 놀았던 일들이 펼쳐지면서 가슴을 뛰게 한다. 해인사로 가는 국도에서는 고속도로로 달리는 것과는 다르게 시골길의 정감이 느껴진다. 내일이면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우리 산야의 아름다움을 즐기면서 다닐 수 있음을 고맙게 생각한다.
인터넷 검색에서 백련암까지는 걸어서 30분 쯤의 거리이고, 차가 다니도록 길을 잘 닦아두었다고 했다. 염불암도 다녀 왔는데 그 정도의 길이라면, 나는 아내에게도 30분 거리란다를 강조했다.
집사람은 성소 박물관에 들리자고 한다. 나는 지난 번에 들렸다고 싫은 내색을 하였으나, 큰 절에 들리면 박물관을 찾는 아내의 고집을 꺾지 못한다. 해인사 성소박물관에는 절의 역사와 유물도 있지만, 전반적인 불교 이야기를 많이 전시해 놓았다. 다른 절보다는 자료들이 알차다.
백련암으로 오르는 갈림길 가까이서 비구니 스님을 만났다. 길을 물으니 대뜸 하는 말이 ‘먼데요’ 이다. 우리는 일부러 걷기를 하련다고 하였더니 세세히 기르쳐주었다.
쉬엄쉬엄 걸었기는 했지만 30분 거리라는 안내는 잘못 된 듯하다. 아니면 젊은 사람의 걸음이었는데 내가 우리 노인의 시간으로 잘못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이 길은 거리가 문제가 아니고, 경사도 이다. 경사가 심하다 보니 노인의 심장으로는 힘이 부대낀다. 정말 천천히, 쉬엄쉬엄 걸었다. 염불암 가는 길보다 더 힘이 든다.
곁길로 400미터 쯤 가면 지족암이라는 안내판이 나온다. 집사람은 그곳도 들리자고 하여서, 내려오는 길엘 들리자고 하였다. 집사람은 예전에 차를 가지고 찾아 간 일이 있다면서 꼭 들리고 싶어 했다. 내 말을 따라 허리를 약간 앞으로 구부리고 뚜벅뚜벅 올라갔다.
산길을 오르는 차를, 그리고 내려오는 차를 자주 만났다. 그러나 우리 부부처럼 힘들여서 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길이 가파라서 인가 보다. 그래서 비구니 스님이 ‘먼데요’ 했나 보다. 마음 속으로 내가 젊은 날에는 힘들이지 않고 다녀올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길은 몇 번이나 굽이를 쳤다. 아마도 차가 오를 수 있도록 길을 닦다 보니 그렇게 굽이진 길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저 굽이만 돌면 ------, 올라가보면 또 저 멀리로 뻗어 있다. 해인사 암자 중에 제일 높은 곳이라지 않는가.
올려다 보이던 산의 능선이 바로 눈 앞까지 내려와 있다. 저 능선을 넘어려나 면서 굽이를 돌아가니 조금 위에 차가 두어 대 서 있는 주차장이다. 후우 하고 긴 숨을 내쉬었다. 나는 주차장 입구 쯤의 바위 위에 걸터 앉았다; 뒤 따라 오던 집사람도 내 곁에 와서 앉는다.
40대 쯤으로 보이는 부부가 우리를 보더니, ‘걸어서 올라 오십니까’ 한다. 그렇다고 하니 ‘대단하십니다. 대단하십니다.’라고 연신 말한다. 나는 ‘3000배를 안 해도 되니 산길 오르는 고행은 감내해야지요.’라고 했다. 일부러 걸어서 온다는 뜻을 전하려는 거다. 아내는 ‘우린 차가 없어서요.’ 한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갑자기 가난뱅이가 된 기분이다.
친절한 그 부부는 먹을 것이라면서 쪼코렛이 박혀 있는 쿠키를 한 움쿰 주었다. ‘성불하십시오’라고 인사했다. 절집을 찾아다니다 보면 간혹 부처님같은 마음씨를 가진 분을 만난다. 지난번 겨울날에 하양 환성사에 갔다가 눈길로 조심조심하면서 내려오는데, 지나가던 차가 멈춰서더니 타라고 했다. 산 아래까지 태워다 주었다.
80미터 쯤만 걸으면 된다는 젊은 부부의 말을 따라 또 걸었다. 백련암의 절집들이 눈앞에 나타났다. 절 바로 아래의 주차장에도 여러 대의 차가 세워져 있다. 백련암 현판이 달린 문으로는 제법 긴 돌계단 길이다. 계단을 따라 올랐다. 울퉁불퉁한 돌 계단이다 보니 늙은이가 몸의 균형잡기가 더 힘이 든다. 저 멀리 앞산의 능선들이 눈 높이로 보인다. 해인사의 암자 중에는 가장 높은 곳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암자라고 하지만 웬만한 절집 보다 더 큰 규모다. 성철 스님의 그늘이 그만큼 넓다는 것일게다.
성철스님은 백련암에 머무시면서 많은 전설을 만드셨다. 가장 유명한 전설은 성철스님은 3000배를 올린 사람만 접견하였다. 특히 나 같은 중생은 꿈도 꿀 수 없는 관문이다. 3000배를 마친 분이 성철스님에게 좌우명을 달라고 하였더니 ‘속이지 말그레이’라고 한 말도 전설이 되어서 전해온다.
성철스님의 생애를 요약해보자면
1912년에 산청에서 태어나셔서, 1938년에 보살계를 받고 스님이 되셨다. 일본 강점기 때 한국 불교는 일본의 영향으로 대처승들이 유명한 사찰 곳곳을 차지하고 있었다. 광복 이후에 불교 정화운동을 펴면서 대처승을 사찰에서 몰아내는 개혁을 하여 조계종의 법통을 바로 세웠다.
1966년부터 이곳 백련암에 머물면서 해인총림의 초대 방장이 되었다. 전두환이 통치하던 1981년에는 7대 조계종 종정에 추대되었으나 추대식에 나아가지 않고,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유명한 법어를 남겼다.
주차장에 차도 몇 대 주차되어 있고, 간간이 사람도 보이지만 절은 조용하다. 산 아래에는 벌써 저버린 목련이 아직도 가지에 달려있다. 나는 다리가 아파서 바위 위에 앉아 쉬었다. 집사람은 여뉘 때처럼 절집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고, 법당에 들어가서 절을 올린다. 고심당(古心堂)에는 성철스님의 조상을 만들어서 가운데에 모셔 두었더라고 했다. 부처님을 모시듯이 하였나 보다. 성철스님은 입적 후에 이런 예우를 받으시기를 바라셨을까.
아내와 더불어 산길을 내려왔다. 오를 때는 내가 앞서지만 내려올 때는 아내가 훨씬 더 빠르다. 젊은 날부터 언제나 그랬었다. 오늘도 집사람이 저 만치 앞서서 내려간다.
내려오는 길에는 나빈존자가 수행했다는 회랑대에도 들렸다. 나빈존자는 중국 분인데 여기에 와서 수행을 하셨다구? 믿는체 하자.
조금 더 내려오니 지족암까지 400미터라는 현판이 나온다. 집사람이 들려보고 싶어 하던 암자이니 들리기로 했다. 길에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걷고 계시는 노스님을 만났다. 아마도 산책인 듯하다. 합장하고 인사를 드렸다. 스님이 천천히 걸으면서 지나간 뒷자리에 등애 까만 줄을 한 노란 다람쥐가 뒷발로 서서 주위를 두리번 거린다. 아하, 이넘 봐라.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네. 지난번 경주 남산 용장사터를 찾았을 때도 만났었다. 그때는 사진을 찍으려 폰을 꺼냈더니 부리나케 도망을 가버렸다. 등산객이 많이 다니는 곳에서 사는 다람쥐와 산책하는 노 스님이나 만나는 다람쥐는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른가 보다.
지족암의 지족이란 말은 도솔천이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지족암은 찾아오는 사람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백련암보다 훨씬 더 적막하고, 고요롭다. 부처님이 사시는 곳은 극락의 땅이다. 극락이란 인적이 드물고, 노 스님이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거닐며, 등에 검을 줄을 단 다람쥐가 뛰노는 곳인가 보다.
절 분위기는 이래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종교의 성지가 중생을 계도하는 곳이라면 너무 적막한 분위기가 중생의 아픔을 얼마니 치유해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내리막길을 서둘러 걷는다면 대구로 가는 4시 버스를 탈 수 있을 듯하다.
서둘렀다. 마음이 조급하니 다리가 아픈 것도 피곤함도 느껴지 않는다. 그래서 세상사 모든 일이 마음먹기라고 하는가.
4시 버스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