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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을 신임하는 아기스
삼상 27:8-28:2
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
9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양과 소와 나귀와 낙타와 의복을 빼앗아 가지고 돌아와 아기스에게 이르매
10 아기스가 이르되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이니이다 하였더라
11 다윗이 그 남녀를 살려서 가드로 데려가지 아니한 것은 그의 생각에 그들이 우리에게 대하여 이르기를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하여 블레셋 사람들의 지방에 거주하는 동안에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28:1 그 때에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함께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2 다윗이 아기스에게 이르되 그러면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하니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하니라
삼상 27:8-28:2 / [다윗의 이중 술책] 다윗은 부하들을 거느리고 시글락으로 올라가서는 블레셋 족속과 친근한 소수 민족들을 은밀히 정벌하였다. 그들은 주로 유다 남쪽에 사는 이웃 민족들로서, 들라임에서부터 술 광야와 애굽 국경선에 이르는 전지역에 거주하는 그술 족속과 기르스 족속과 아말렉 족속이었다. 다윗은 그들을 정벌하기 위하여 시글락에서 끊임없이 출전하였다. 9) 다윗은 어느 곳으로 정벌을 나가든지 남녀를 가리지 않고 전부 몰살시켰다. 그러나 양이나 소나 나귀나 낙타 같은 짐승과 의복은 전부 약탈해서 아기스에게 전리품으로 가져다 주었다. 10) 그럴 때마다 아기스는 항상 다윗에게 이같이 물었다. `너희가 오늘은 또 어디로 가서 약탈을 하였느냐?' 그러면 다윗이 언제나 모호하게 대답하기를 `유다 남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또는 `여라무엘 족속의 남쪽으로 들어갔습니다!' 또는 `겐 족속의 남쪽으로 들어갔습니다!' 하고 얼버무렸다. 11) 그 당시 가드에는 노예 시장이 있었으나 다윗은 사람을 포로로 잡아오거나 살려둔 일이 없었다. 혹시 그들이 가드에 오면, 다윗이 실제로 행한 일을 아기스왕에게 알려줄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윗은 블레셋 족속의 지역에 거주하는 동안 언제나 그와 같이 정벌한 지역의 사람은 모조리 죽이고 짐승과 물건만 약탈해 가지고 돌아왔다. 12) 아기스는 이런 줄도 모르고 다윗이야말로 신임할 만한 사람이라고 속단하였다. 그는 이렇게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다윗이 그토록 자기 동족을 약탈하여 미움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영 내 종이 될 수밖에 없다.' 28:1) 그 즈음에 블레셋 족속이 또다시 모든 군대를 모아 이스라엘을 공격하려고 하였다. 아기스는 다윗에게도 공격에 가담할 것을 명하였다. `그대가 이번에 부하들을 거느리고 나와 함께 출전하여, 우리 편에서 싸워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2) 다윗이 서슴없이 대답하였다. `물론입니다! 제가 임금님을 얼마나 충성스럽게 섬기는가를 이제야 비로소 보시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기스는 `내가 그대를 이번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 내 머리를 지키는 자로 삼겠소.' 하고 다윗을 그 자리에서 자신의 경호대장으로 임명하였다.
다윗은 블레셋 아기스 왕의 용병으로 유다 남방 지역을 정벌하던 중에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전쟁이라는 진퇴양난의 딜레마에 빠집니다.
다윗의 침노(8-12) 다윗은 남방 지역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유다 사람들을 약탈하던 도적의 무리들을 소탕하였습니다. 그리고 아기스 왕에게는 유다 남방 지역인 네겝을 쳤다고 보고하였습니다. 다윗은 아기스 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신뢰하게 만들려고 도적들을 쳤으면서도 유다 민족을 쳤다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또한 다윗이 유다 민족이 아니라 다른 민족을 침노했다는 사실을 철저하게 감추기 위해 침노한 땅의 남녀를 하나도 살리지 않고 죽여야만 했습니다. 행여 다윗이 한 일이 살아남은 사람들을 통해 아기스 왕에게까지 알려질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다윗은 피를 심히 많이 흘린 냉혹한 전사로 기록되었습니다(대상 22:8; 28:3). 아마도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성전건축을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진실하기보다 거짓을 꾸미기가 훨씬 더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 다윗의 잔인한 행동으로 인해 시글락에 거주하던 다윗의 식솔들이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큰 보복을 당하게 됩니다(삼상 30장).
곤경에 처하는 다윗(1-2) 블레셋과 이스라엘이 전쟁을 하는 상황이 되자 다윗은 딜레마에 빠집니다. 아기스 왕은 이스라엘과의 전투에서 용병으로 참전하라고 다윗에게 통보하였고, 이번 전쟁에서 이기면 장차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겠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블레셋의 용병으로서 자기 민족 이스라엘 백성을 공격해야 하는 기가 막힌 처지가 된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은 다윗이 자기 백성을 공격하다니 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전쟁터에서 돌이켜 블레셋 군대를 공격한다면 이는 다윗과 그 일행이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또한 지금 이 순간 시글락을 떠나 유다 땅으로 들어간다면 이 역시 사울 왕이 쳐놓은 그물에 걸려드는 꼴이 될 것입니다. 다윗은 그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유일하게 믿는 데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공의와 신실을 따라 갚아주시는 여호와의 보호하심입니다(삼상 26:23-24). 성도가 딜레마에 빠지면, 아무것도 하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출 14:14).
적 용 : 진퇴양난에 빠진 다윗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하나님만 바라볼 뿐이었습니다. 당신도 다윗처럼 해결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적이 있었습니까?
영국의 조지왕은 도자기 공장에 방문하여 나란히 놓인 두 개의 꽃병을 보게 되었습니다. 모양도 무늬도 같은 꽃병이었지만, 하나는 윤기가 흐르고 생동감이 넘쳐났는데, 또 하나는 윤기도 흐르지 않고, 볼품없어 보였습니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조지 왕이 관리인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같은 듯 같지 않은 두 개의 꽃병을 나란히 둔 것이오?” 그러자 관리인이 대답했습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는 불에 구워졌고, 다른 하나는 구워지지 않은 것입니다.” 시련을 이겨내고 어려움을 극복해 낼수록 내면은 더욱 단단하고 아름답게 변할 것입니다.
호크마 주석
=====27:8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 여기서 `올라가서'(* , 알라)는 보통 저지대에서 고재대로 오르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당시 다윗이 침노한 족속들이 시글락보다 고지대인 바란 광야의 북동쪽 산악 지대에 거주했음을 시사한다(Keil, Smith, Fay). 또한 이 표현은 성전(聖戰)에 있어서 이스라엘 군대가 이방의 군대를 공격하는 것을 가리킬 때에도 사용되는 단어이다(수 4:19; 6:5; 8:11). 따라서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같은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다윗이 비록 타국 땅에 도망나가 있기는 했지만, 그는 거기서도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온갖 애를 쓰고 있었다는 사실을 강력히 시사한다. 그술 사람 - `그술'(* , Geshur)은 정확치는 않으나, `교랑'이란 의미인 듯하다. 그런데 이 종족은 아말렉 족속처럼 유랑 생황을 하던 족속으로서, 그 당시 어떤 한 지역에 모여서 살고 있지는 않았던 것 같다. 즉 그들 중 일부는 요단 동쪽 지방에(신 3:14; 수 12;5; 13:11, 13; 삼하 13:37). 또 다른 일부는 `가사'와 인접한 곳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같다(신 2:23). 기르스 사람 - 여기의 `기르스'(* , Girz)에 대해서는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되었다. 즉 (1) 팔레스틴 중앙부의 그리심 산 근처에 살던 한 종족으로 보는 견해(Smith), (2) 블레셋 땅과 이스라엘 땅의 남부에 거주하던 민족으로 보는 견해(IDB) 등이 있다. 그러나 첫째, (1) (2) 의 견해와 관계되는 민족들은 팔레스틴 남부에 위치하고 있던 다윗의 공격 목표가 될 수 없었으며 둘째, 그때 다윗의 또다른 공격목표였던 `그술 사람 및 아말렉 사람'등이 모두 팔레스틴 남쪽에 거주하던 민족들이며 셋째, 본절은 다윗으 공격 목표가 되었던 세 민족을 `술과 애굽땅으로 지나가는 지방' 곧 팔레스틴의 남쪽에 사는 거민들로 말하고 있다는 점 등으로 미루어 위의 세 견해 중 (3)의 견해가 가장 타당한 듯하다. 아말렉 사람 - 이 종족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15:2 주석을 참조하라. 이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일찍이 사울의 군대에 의하여 심각한 타격을 받았지만(15:7,8), 오랜 세월의 지난 그 당시 아말렉 족속은 다시 자신들의 세력을 규합한 듯하다(Fay). 그래서 이들은 다시 이스라엘과 블레셋 모두에게 심각한 골치거리가 되었음이 분명하다. 그들은 옛적부터...지방의 거민이라 - 원문에는 본 구절의 앞 부분에 `왜냐하면'이란 의미를 갖는 접속사 `키'(* )가 있다. 그러므로 본 구절은, 다윗이 앞에 언급된
본 구절은 히브리 본문에 보다 가깝게 `너희가 애굽과 술로 들어갔을 때의'로 번역할 수 있다. 즉 본서의 저자는, 15:7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아말렉 족속을 쳤던 영역에 대하여 `애굽 앞 술에 이르기까지'라고 언급한 것을 염두에 두고 본 구절을 쓴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본 저자는 `그 땅'을 하나님의 군대로부터 엄중한 징벌을 받아야 하는 땅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15:1-3) 결국 본 구절은 앞에 언급된 세 민족에 대한 다윗의 침공이 하나님의 뜻과 합치되는 정당한 것이었음을 입증해 주는 언급이라 할 수 있다.
=====27:9
다윗이...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 다윗의 이같은 행위는 결코 종교적 목적에 따른 행동이 아니었다. 이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1) 하나님께서든 다윗에게 그들을 `진멸하라'(* , 아헤라메템)는 명령을 내리지 아니하셨다는 사실, (2)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혹시 `진멸하라'는 명령이 있었다면, 그 거민들에게 속했던 모든 가축 등의 재산도 동시에 진멸해야 했으나 다윗은 그것들을 진멸치 않았다는 사실, (3) 본서의 저자는 다윗의 이같은 행위를 비밀 유지의 목적상 그렇게 한 것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11절) 등이다. 양...소...나귀...약대...의복을 취하고 - 사실 이처럼 노획물을 획득하는 것이, 다윗이 이스라엘 남방의 세 민족을 공격했던 주된 목적이었다. 즉 다윗은 이러한 노획물로써 (1) 자신에게 딸린 많은 식솔의 필요를 채워주어야 했으며, (2) 또한 생활이 어려운 유대 사람들도 도와야 했던 것이다(30:26-30). 돌아와서 아기스에게 이르매 - 다윗이 자신의 본거지 시글락(6절)이 아닌 왕도(王都)가드로 향한 것을 가리킨다. 다윗이 이같이 한 까닭은 아기스에게 약탈물의 일부를 바침으로써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함인 듯하다(Smith).
=====27:10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 아기스는 자신에게 바쳐진 전리품(戰利品)을 보고 이같은 질문을 하였을 것이다. 한편 여기서 `오늘'은 그 당일에 이스라엘이 남방에 거주하는 민족들에 대한 침공이 행해졌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이번에'란 의미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침노하였느냐'(* ,파솨트)는 `벗기다', `강탈하다'란 의미로서, 주로 전리품의 탈취를 목적으로 한 노략과 공격 행위를 가리킨다(8절; 30:1; 31:8; 겔 16:39). 유다 남방...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겐 사람의 남방 - 이같은 다윗의 대답은 완전한 거짓말은 아니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 지극히 애매한 답변을 함으로써, 자신이 아말렉 등을 약탈한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한편 여기서 `유다 남방'은 브엘세바의 인근지역을 가리킨다(8:2; 삼하 24:7). 그리고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은 유다의 남쪽 변방 지역을 가리킨다(30:29). 여기서 `여라므엘'(Jerahmeel)은 `하나님이시여 자비를 베푸소서'란 의미인데, 이 사람은 유다의 손자이자 베레스의 아들인 헤스론의 장자이다(대상 2:3, 5, 9). 다라서 `여라므엘 사람'(Jerahmeel)은 이 `여라므엘'의 후손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또한 `겐 사람의 남방'은 `아말렉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지역과 인접한 곳을 가리킨다. 이전에 사울은 아말렉 족속을 치려고 하면서 겐 사람들도 피해를 입을까 염려하여, `겐 사람'(Kenites)들을 대피시켰던 일이 있었다(15:6 주석 참조). 아무튼 여기서 다윗이 아기스의 질문에 실제로 그가 침노한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8절) 대신 유다, 여라무엘, 겐 족속이라고 답변한 이유는 다윗이 유다와 그 동맹.종속.우호 성읍들을 공격한 것처럼 아기스에게 믿도록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더욱 얻고자 했기 때문이다. 한편 당시 다윗이 유다를 약탈하던 이방 종족들을 공격한 것은 잘한 일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에 대하여 쉽사리 은폐.거짓말을 한 것은 당시 이방 땅에 머물러 있었던 다윗의 신앙이 연약한 상태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이다. 즉 다윗의 답변은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려는 인간적 기지(機智)에서 나온 말로, 궁극적으로 하나님 앞에서는 선(善)이 되지 못한다. 이처럼 시글라 까정착 시절에는 다윗의 신앙 상태가 연약해졌는데, 이는 블레셋의 시글락 정착 1년 4개월 동안(7절) 다윗이 지은 시편이 하나도 없다는 데에서도 입증된다. 즉 당시는 다윗에게 기도와 찬양이 메마른 때였다(F
=====27:11
본절은 다윗이 그술, 기르스, 아말렉 족속 등을 공격하면서 그곳 거민들을 남녀 불문하고 몰살시킨 분명한 이유를 제시해 준다. 그 남녀를 살려 가드로 데려가지 - 이것은 패전국의 주민을 노예로 붙잡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같은 일은 고대 전쟁에 있어서는 보편적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의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이같은 관습을 따르지 아니하고 모두 죽여버린 것이다. 이같이 행하는 습관이 있다 할까 두려워함이었더라 - 당시 다윗은 그술, 기르스, 아말렉 등의 남방 족속들에게 자신이 행한 침노 행위가 가드 왕 아기스에게 보고될 것을 두려워 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족속들은 주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민족들로서 블레셋으로서는 하등 공격할 이유가 없는 족속들이었기 때문이다. 다라서 다위의 행위는 블레셋의 입장에서는 이적(利敵)행위가 되는 셈이다. 뿐만 아니라 다윗을 시기하던 아기스의 신하들은 다윗에 의하여 끌려왔을 노예들로부터 전해들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하고 악평하여 보고할 가능성이 많았으며, 또한 끌려왔을 노예들도 다윗에 대하여 앙심을 품은 나머지 다윗의 행적을 과장해서 떠들 것이 분명했다. 아무튼 다윗의 행적이 사실 그대로아기스에게 알려지면 그 사실이 과장됐든지 안됐든지 간에, 아기스는 다윗의 그같은 이적적(利敵的)인 공격 행위로 인하여 다윗을 의심하고 또한 경계하기 시작할 것이 뻔하였기 때문에, 다윗은 바로 이 점을 사전에 방지코자 한 것이다.
=====27:12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 이것은 유다 남방 족속들을 공격했다는 다윗의 답변에 `아기스'가 완전히 속아 넘어갔음을 뜻한다(10절). 따라서 아기스는 이제 다윗에 대해 가졌던 일말의 의구심과 경계심까지 풀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이...이스라엘에게...미움을 받게 하였으니 - 다윗이 자신의 조국 이스라엘 및 그 동맹.우호.종속 성읍들을 침공 몰살시킴으로써, 스스로 그들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이같은 아기스의 착각은 그가 다윗의 답변(10절)을 사실 그대로 받아들였음을 반영해 준다. 영영히 내 사역자가 되리라 - 아기스는 동족을 무자비하게 친 다윗의 행위는 반드시 동족유대의 증오의 대상이 될 것이고, 따라서 다윗은 더이상 조국으로 돌아갈 수 없는 몸이 되어, 이제 평생토록 자신의 심복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한편 여기서 `사역자'(* , 에베드)는 `종', `신하'란 의미인데, 전에 `아기스'가 다윗을 이스라엘의 한 `왕'으로(21:11, 12) 본 것과는 많이 대조된다. 즉 이같은 다윗에 대한 아기스의 인식의 전환은, 아기스가 다윗에 대해 품었던 경계심을 이제 덩 이상 갖고 있지 않게 되었음을 시사한다. 아무튼 이때 `아기스'는 다윗이 그 자신의 동족을 침노하여 몰살시킨 일로, 다시는 조국 유대 땅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으로 오판했던 것이다.
=====28:1
블레셋...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 여기서 `블레셋'은 가드 왕 아기스를 포함한 그들 모든 족속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전투는 블레셋의 다섯 부족들의 연합군에 의해 발발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5:8; 29:2, 3). 그때 블레셋 사람들은 아벡 전투(에벤에셀 전투)(4:1-11)이후 이스라엘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전한 데 대하여 일대 복수를 하기 위해 대규모의 군사력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14;52; 17:50-53; 18:6,30)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 - 이같은 아기스의 요구는 그로서는 당연하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같은 일을 위하여 아기스는 위험 부담을 안채 다윗을 자신의 수하에 두었기 때문이다(27:6, 12). 더구나 아기스는 이미 다윗이 자신의 동족을 침략함으로써 그들과 원수지간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점에서(27:10, 12) 더욱 그러하다. 아울러 이번 기회를 통하여 아기스는 다윗을 완전히 자신의 수하에 예속시키려 했던 것이다.
=====28:2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 이 말은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밝히지 못하고 있는 다윗의 애매한 답변이다. 다윗이 이같이 애매한 답변을 한 까닭은, 그는 아기스의 요구대로 자신의 동족을 공격할 수도 없고, 또한 그 요구를 거절함으로써 자신의 본심을 들켜 사울의 추격으로부터 안전히 피할 수 있는 훌륭한 은신처를 잃을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해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본 저자는 이와 같은 애매한 표현을 기술함으로써, 다윗이 극도의 심리적 갈등을 느끼고 있음을 강력히 시사하고 있다.
그러면 내가...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의 애매 모호한 답변을 (1) 그가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2) 그리고 그가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 대한 어떤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받아들였음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머리 지키는 자'는 `경호 대장' 또는 `시위 대장'을 가리킨다. 한편 하나님 나라 왕국의 왕으로 기름 부음 받은 위대한 전사(戰士) 다우시이 한낱 이방 왕의 경호를 맡게 된 것은 다윗 스스로가 자초한 비극적 결과였다. 즉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의 손길을 전적 의뢰하여 조국 이스라엘 땅을 끝까지 떠나지 말았어야 옳았다. 따라서 당장 목전의 안전과 유익을 위해 다윗이 우상의 나라 블레셋 땅으로 스스로 찾아든 것은, 기근을 피해 언약의 땅 가나안을 등지고 애굽으로 내려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온 아브라함의 경우와 다름없다고 볼 수 있다(창 12:10-20).
< 설 교 >
거짓으로 빗나가는 다윗
삼상 27:8-28:2
■ 우리나라 박정희 대통령이 1969년 5월 27일 월남의 구엔 반 티우 대통령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티우 대통령은 그 당시에 청와대 뒤뜰에 쫙 피어 있는 목련꽃을 보고 감탄을 연발했단다. 그래서 박 대통령은 목련나무 한 그루를 잘 포장해서 티우 대통령에게 선물로 주었더니, 월남으로 돌아간 티우 대통령은 예쁜 꽃을 기대하면서 좋은 땅에 목련나무를 심고 정성껏 가꾸게 하였다. 목련나무는 금방 활착하였고 잎사귀가 무성하게 잘 자랐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그 다음해에 목련꽃을 피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티우 대통령은 박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단다. “각하, 저에게 선물로 주셨던 목련나무가 어찌된 일인지 꽃을 피우지 않고 있습니다. 목련나무는 잘 자라고 있습니다만.” 박 대통령은 서울대 농대교수님에게 그 이유를 알아보라고 지시했다. 그랬더니 서울대 교수님 왈 “목련나무는 추운 겨울을 보낸 후에야 꽃부터 피우는데, 월남의 기온은 사시사철 여름이기 때문에 잎사귀만 계속 무성할 뿐 꽃을 피우려고 하지 않는 것이지요. 개나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운 겨울을 보내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식물이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기독교도 죽음 없이 부활은 없는 종교이다. 고난을 생략하고 고난을 도피하는데 성공하는 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지 않고, 고난을 이기고 통과하는 게 은혜이고 축복이라는 것이다.
본문이 보여주는 다윗은 월남에 심어놓은 목련나무 신세를 생각나게 한다. 이런 경우에 ‘속 빈 강정’이라고 하지죠. 다윗이 어떤 고충에 시달렸는지 저랑 같이 확인해 보자. 지난주일 설교 때 살펴봤던 것처럼 다윗은 좁혀오는 사울 왕의 군사수색망 때문에 이웃 블레셋나라 아기스 왕에게 피난을 갔다고 했다. 안전지대라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윗의 블레셋 피난생활은 다윗의 예상대로 사울 왕의 수색망을 피하는데 적중했지만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들이 다윗을 집요하게 괴롭혔다. 그 사실을 기록해 놓은 게 오늘 설교본문이고요 핵심은 12절에 잘 요약돼 있다.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부하’ עבד slave, servant, to work, labour, cultivate, weary). 다윗은 블레셋에서 피난생활을 하면서 아기스 왕의 종놈이 될 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꼭 기억할 것은 다윗이 오래 전에 사무엘에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이다. 만약에 다윗이 아기스 왕의 종이 된다면 그야말로 조국배반이요 민족역적이며 매국노 행위로 아기스 왕에게 종놈이 되는 것임. =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 이 정도라면 다윗의 마음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갈 수밖에 없다. 곰을 피하려다 호랑이를 만난 격이 됐다! 차라리 자기 십자가를 지고 충성했어야 했다.
시 139:1(‘다윗의 시’)에 이런 말씀이 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살펴보시다’ ‘감찰하시고’ -개역- חקר search out, explore, examine. secret. deliberation<신중히 숙고> ‘아신다’ ידע<체험적>, ‘나를 שבתי <my sitting>1절을 직역하면 ‘여호와여, 당신은 나를 찾으셨고, 나의 앉아있는 모습을 알아내셨나이다.’이다. 2-4(앉고 일어섬, 생각, 모든 길, 눕는 것, 혀의 말까지 다 아신다고).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다해서 직접 체험하시고 확인하셔서 정확하게 아신 것을 말한다. 그만큼 우리 하나님이 관심을 갖고 궁금해 하시면서 모든 권능과 수단으로 파헤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블레셋 피난생활을 하는 다윗에 관한 모든 것도 머리털까지 세신 바처럼 잘 알고 계셨다고 할 수 있다. 시 139편에서 다윗이 밝히려고 한 것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첫째는 하나님의 끝없는 관심이요, 둘째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신 능력이다. 바로 이 관심과 능력을 다윗에게 용서형식으로 나타내 주실 때 성경은 은혜라고 설명하고 있고, 대가없이 베푸시는 사랑이란 것이요, 이 사랑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에게 그대로 적용된다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잘 알고 계신다. 우리가 이 아심에서 도망갈 필요는 없다. 이미 다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서로에 대하여 잘 모르고 사랑하다가 어떤 결함을 알게 되면 싫어하게 되고 그 비밀을 간직하는 게 힘들다고 헤어지는 사람도 많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내 약점을 아시면 관심을 갖고 도우신다.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할 것은 내 비밀한 흠을 다 아시고도 하나님은 오히려 존경하듯이 대해 주신다. 그래서 다윗이 블레셋 피난살이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윗은 블레셋 피난살이를 어떻게 했는지 설교본문을 통하여 좀 구체적으로 살펴보고 그걸 저와 여러분의 신앙 삶의 거울로 삼아 믿음의 진보를 이루길 바란다. 아멘.
1. 살려두지 아니함(9)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 어느 전투든지 병사들은 죽이지만 특히 여자들과 아이들은 죽이지 않는 법이다. 그런데 다윗은 사람은 다 죽이고 짐승만 살렸다고 했다. 이것은 그만큼 잔인한 짓을 했다는 것을 입증한다. 여호와 신앙인이니 더더욱 잔인하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가 하면 대상 28:2-3에 설명되어 있다. ‘다윗 왕이 일어서서 이르되 나의 형제들, 나의 백성들아 내 말을 들으라. 나는 여호와의 언약궤 곧 우리 하나님의 발판을 봉안할 성전을 건축할 마음이 있어서 건축할 재료를 준비하였으나 하나님이 내게 이르시되 너는 전쟁을 많이 한 사람이라 피를 많이 흘렸으니 내 이름을 위하여 성전을 건축하지 못하리라 하셨느니라.’ 조금 설명하면 전쟁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게 있고 허락하시지 않는 게 있는데, 다윗은 허락하시지 않는 전쟁도 많이 했으므로 하나님이 성전건축을 하지 못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블레셋 피난 때 전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전투가 아닌데 잔인하기는 맹수 짓을 하고 말았으니 다윗은 참으로 안타까운 피난살이를 했던 것이다.
■ 징기스칸이 18세 때 동갑내기 소꿉친구인 볼테와 결혼했을 때 적군 기마병 300명이 기습을 해서 부인까지 납치해 갔단다. 간신히 살아난 징기스칸은 복수전을 펴서 대승을 거두고 아내도 찾아왔다. 그런데 아내는 이미 임신을 했고, 얼마 후 원수의 애를 낳게 되었다. 그래서 징기스칸은 아내와 아이를 죽이려고 결심했단다. 그러자 징기스칸의 어머니가 충고하기를 “아내와 적군도 포용할 줄 모르면서 어찌 세상을 얻으려고 하느냐? 세상을 얻으려면 세상을 덮을 포용력을 갖추 거라.” 징기스칸은 마음을 다스리고 그 아이 이름을 ‘주치’(손님)라고 짓고 친 아들과 차별하지 않았고 아내도 변함없이 사랑했단다. 징기스칸은 자기 이름도 쓸 줄 몰랐지만 징기스칸 훈요30조 중 17조에 이러한 조항을 만들었단다. “예순 베이는 훌륭한 용사이다. 아무리 오래 싸워도 지칠 줄을 모른다. 그래서 그는 모든 병사들이 자기와 같은 줄 알고 혈기를 부린다. 이런 사람은 지휘자가 될 수 없다. 군사를 통솔하려면 병사들의 갈증과 허기와 피곤함을 같이 느낄 줄 알아야 한다.”
졸장부는 ‘다른 것’을 ‘틀린 것’으로 보지만, 대장부는 ‘다른 것’을 ‘개성’으로 볼 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은 대장부이기 쉽다. 저와 여러분은 대장부로 신앙생활하길 축복한다. 아멘.
2. 유다냐?(10)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 하니 다윗이 이르되 유다’라는 이 대답은 사실 일부러 했던 거짓말이었다. 8절에 보면 다윗이 실제로 침략하였던 지역은 ‘그술’과 ‘기르스’ ‘아말렉’이었다. 그런데도 이렇게 지역을 속인 것은 다윗이 아기스 왕에게 의심을 받고 있었음을 말해 준다. 그만큼 다윗은 불안한 피난생활을 했고 압박을 당했던 것이다(10. ‘여라무엘’ ; 대상 2:4-5<유다 - 베레스 -헤스론> 9-15<헤스론- 여라므엘, 람, 글루배. 람 -암미나답 -나손 -살마 -보아스 -오벳 -이새 - 다윗<9대 할아버지 장손이 여라므엘; 둘째가 다윗혈통이었음. 자신의 친 혈통을 쳤다고 속여야 할 정도였다면 다윗이 얼마나 다급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음>).
■ 맥아더 장군이 육군사관학교 교장이었을 때 어느 날 상원 국방위원들이 시찰을 나왔단다. 맥아더 장군은 보고를 마친 후에 국방위원들을 자기 방으로 안내했는데, 그 방에는 가구도 없고 쇠침대만 하나뿐이었다. 맥아더가 설명했다. “이 곳이 제 방입니다. 이 곳에서 1주일을 지내고 주일에만 집에 갑니다.” 자신은 예상보다 훨씬 검소한 생활을 하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했던 것이다. 시찰이 끝나자 만찬이 베풀어졌는데 금접시에 요리를 담아 내 놓았다. 모든 행사를 끝내고 나니 금접시 하나가 사라져있었다. 맥아더는 국방위원들을 의심하고 그들에게 편지로 금접시의 분실을 알렸더니 며칠 후에 답장 한 통이 왔다. “만일 장군께서 그날 밤에 야전용 침대에서 주무셨더라면 즉시 금접시를 찾으셨을 겁니다. 제가 금접시를 그 침대 모포 밑에 갖다 놓았거든요.” 거짓말은 한 동안 달콤하지만 필경 곤경으로 몰고 가서 부끄럽게 만든다. 다윗도 그랬다(28:2).
3. 다윗이 행한 일(11)
‘다윗이 행한 일이 이러하니라’; 전쟁포로들이 다윗의 속임수를 밝혀버릴 것으로 예상했던 말이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주민을 모조리 잔인하게 죽였던 것이다. 11절 중간에 ‘그의 생각’이란 말씀과 끝에 ‘두려워함’이란 말씀이 있는데 모두 다윗의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라’(잠 4:23). 다윗은 이 말씀순종에 실패했고 그래서 더욱 불안과 의심, 두려움에 사로잡힌 피난생활을 하게 된 것이다.
미국달러만이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IN GOD WE TRUST)라는 말이 인쇄돼 있다. 이것은 남북전쟁으로 어려운 때에, 한 농촌의 목사가 당시의 재무장관인 췌이스(S.P.Chase)에게 건의하고 국회가 승인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다. 달러는 미국만이 아니고 전 세계의 화폐이다. 누구든지 알고 쓰든 모르고 쓰든 미국달러를 쓸 때마다 전도지로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지금 유로화가 세계의 화폐로 자리 잡으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한다는 말을 적어놓은 달러가 세계의 돈으로 자리 잡고 있는 사실을 볼 때 믿음중심을 표현할 때 하나님이 전폭적으로 책임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다윗도 그랬어야 했다. 저와 여러분은 믿음을 행동하길!
수렁에서 건진 다윗
이정선목사 / 삼상 28:1-2, 29:1-11)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잘못된 결정을 안 하고 살았으면 좋겠지만, 종종 그러지 말았어야 할 선택을 할 때가 있습니다. 한 번의 잘못된 선택에 의해 인생 전체가 수렁에 빠져버리기도 합니다. 수렁에 빠지면 다시 나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젊었을 때 성숙하지 못한 인격과 판단으로 한 번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평생을 후회 속에서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잘못된 결정으로 수렁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주위의 사람들이 거기서 건져내기 위해 애를 쓰지 않겠습니까? 사실 수렁에 빠지면 자기 스스로 거기서 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몸부림을 칠수록 더 깊이 빠져듭니다. 그러므로 밖에 있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지난번에 다윗이 어떻게 잘못된 결정을 내리고 그의 인생 가운데 가장 어두운 시절을 살게 되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그를 잡아 죽이려는 사울의 끈질긴 집착 앞에서 다윗은 갑자기 두려움을 느끼게 되었고, 사울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길은 이스라엘을 떠나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것뿐이라는 잘못된 결론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블레셋의 왕 아기스에게 거짓 항복을 해야 했고, 거짓 충성을 해야 했고, 거짓 보고를 하면서 자신의 거짓이 탄로 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악한 일도 서슴지 않는 깊은 수렁에 빠지고 말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사람이었고, 그 표시로 선지자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 이후로 그는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공훈을 세우는가 하면, 이스라엘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으며, 결국 공주와 결혼하여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온 백성의 사랑을 받는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역시 하나님이 왕으로 삼으시려고 선택하신 사람다웠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에게 왕위를 물려줄 마음이 없었던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했고, 몇 차례의 살해 시도가 실패하자 대규모의 군사작전을 펴면서 본격적으로 다윗 사냥에 나섰습니다. 그렇게 도망을 치며 숨어살다 보니 사는 것이 고달프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일이 잘 풀릴 때만 하나님의 언약이 살아 있고, 일이 꼬일 때는 하나님의 언약도 죽어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이겨내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행동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가장 크고 위험한 적은 블레셋이었습니다. 이 두 나라는 국가의 존망을 걸고 싸우다시피 했습니다. 결코 화해를 하거나 평화를 이룰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힘이 없을 때는 블레셋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게 이스라엘을 짓밟고 괴롭혔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장차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그 블레셋에 망명을 하고 블레셋 왕의 신하가 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이것은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하신 하나님의 결정을 부끄럽게 만드는 행위였고, 이스라엘 모든 백성을 배신하는 행위였습니다.
이해하기 쉽게 예를 든다면, 일본강점기에 일본에 붙어서 일본 왕의 신하가 되었던 사람이 광복 후에 한국의 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일본과 싸워 독립을 쟁취하는 일에 헌신했던 사람이 나중에 대통령이 되어야 국가의 정통성이 확립되고, 대외적으로도 인정을 받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과 싸워 이스라엘을 구원해야 다음에 이스라엘 왕이 될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인데, 그 원수 나라 블레셋에 항복해서 저러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노릇입니까?
수렁에 빠져 있으면 점점 더 깊이 빠지게 되는 것이 원리입니다. 다윗이 진짜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도록 상황이 전개되었습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전쟁을 일으킨 것입니다. 다윗을 신임하게 된 블레셋 왕 아기스가 다윗에게 같이 전쟁에 참가하라고 명령합니다. 그러자 다윗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종이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 당신의 종이 어떤 활약을 하게 될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왕의 명령대로 전쟁이 참가하여 큰 공을 세우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기스가 말합니다. ‘그러면 내가 너를 영원히 내 머리 지키는 자를 삼으리라.’ 경호대장을 삼겠다는 것입니다. 가장 아끼고 신뢰하는 심복으로 평생 데리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아기스는 그만큼 다윗을 신임했던 것 같습니다. 다윗은 아기스에게 은혜를 입어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글락이라는 성의 성주까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아기스가 전쟁에 나간다면 얼마든지 함께 참가해서 아기스를 위해 싸워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기스가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려는 것입니다. 과연 다윗이 블레셋 편에 붙어서 이스라엘과 전쟁을 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는 동족을 향하여 칼을 들 수 없으니 이번 전쟁에서는 빼달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공하여 노략과 살상을 행하고 돌아와서는 아기스에게 유다의 마을들을 침공했다고 거짓 보고를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다윗은 자신의 거짓말에 스스로를 옭아맨 꼴이 되었습니다.
거짓말이라는 것은 한 순간의 어려움을 넘기는 데는 아주 효과적입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거짓말처럼 미련한 짓이 없습니다. 거짓말은 자신의 무덤을 파는 행위입니다. 양치기 소년이 늑대가 나타났다고 거짓말을 해서 사람들을 놀렸을 때 재미있었을지 모르지만, 진짜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는 자기 목숨을 잃어야 했습니다. 다윗이 유다 지방을 침공했다고 아기스에게 거짓보고를 해서 그의 신임을 얻었을지는 모르지만, 그 신임 때문에 이제는 정말로 동족을 향하여 칼을 겨누어야 할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적국에 붙어서 동족을 향하여 칼을 겨눈 자는 절대로 왕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정의입니다. 다윗이 공을 세우든 못 세우든, 이 전쟁에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장차 왕이 될 사람이라는 자격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만일 다윗이 블레셋에서 출세하려고 한다면, 이 전쟁은 좋은 기회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이라면 절대로 이 전쟁에 휘말려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놀랍게도 백성의 뜻에 의해 왕이 등극하고 폐위되는 일이 많았습니다. 다윗의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기 위하여 먼저 했던 일은 백성들의 마음을 사는 것이었습니다.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지지를 잃었을 때 나라가 둘로 깨지고 말았습니다. 민심을 얻지 못하면 왕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적군에 들어가서 동족을 향하여 칼을 휘두른 자가 어떻게 민심을 얻고 왕이 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다윗이 민족을 배반한 것은 아닙니다. 실제로 전쟁에 참가한다 할지라도 다윗이 동족을 향해 칼을 휘두를 것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로 하고 전쟁에 참가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무슨 핑계를 대고 전투에 나가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몸살이 난다거나 병에 걸려 쓰러진다거나 하면 핑계가 되겠지만, 늘 전쟁터에서 살았던 젊고 건강한 장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수도 없지요. 설령 다윗이 아파서 전투에 나가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의 부하들은 전투에 나가야 할 것이고, 그것은 다윗이 전투에 참가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전쟁에 나가서 큰 공을 세우겠다고 큰소리를 쳤는데, 공을 세우지 못하거나 또는 전투를 회피하는 것처럼 보였다가는 아기스의 신임을 잃게 될 것입니다. 전쟁에 나가서 공을 세워도 안 되고, 공을 못 세워도 안 되는, 그야말로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어쩌면 이 상황은 다윗이 진짜 모습을 드러내고 이 수렁에서 나올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어떤 선택을 해도 파멸하는 선택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아기스에게 자신의 본심을 밝히고 이 게임에서 빠지는 것이 사는 길입니다. 물론 그러자면 잃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게임 중간에 나오려면 지금 가진 것을 다 포기해야 합니다. 아기스의 신임도 포기해야 하고, 아기스로부터 받은 성도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아기스가 제공하는 안전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아기스를 속이고 농락했다고 해서 그의 분노가 다윗에게 쏟아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이 두려워서 그 잘못된 게임에 계속 남아 있다가는 완전한 파멸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 인생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곤란한 처지를 당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때는 우리 인생에 무엇이 잘못되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할 때입니다. 먹고사는 일이 우선이라서, 또는 이런저런 어려움에 시달리다 보니, 옳고 그른 것을 따지지 못하면서 살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일이 꼬이고 막힐 때, 거기서 또 다른 꼼수를 부리려고 하다가는 정말 빠져나올 수 없는 수렁에 더 깊이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앞뒤 꽉 막힌 상황에서 갈팡질팡 할 것이 아니라, 그 게임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그나마 살 길입니다. 옳지 않은 일에 관련되어 있다면, 깨끗이 손을 씻어야 합니다.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살아왔다면,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기스에게 우선은 전쟁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겠다고 하면서 그 순간을 모면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릅니다. 매 순간을 이렇게 피 말리는 긴장 속에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늘은 무사히 넘겼지만 내일은 어쩔 것입니까? 한두 번은 임기응변으로 넘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얼마 가지 못해 들통이 나고 말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개입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할 다윗이 이 전쟁에 나가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간섭하신 것입니다. 블레셋은 다섯 개의 부족으로 구성된 연합국입니다. 그러므로 왕이라고 해서 절대적인 권력을 가진 군주는 아니고, 부족장 연합체의 대표일 뿐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전쟁에 참가시키려는 것을 보고 다른 부족장들이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선 것입니다.
아기스 생각에는 다윗이 자기의 충직한 부하가 된 것 같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것을 인정할 수가 없습니다. 아기스는 자기한테 그렇게 잘하는 다윗에게 홀딱 넘어가서 다윗의 속마음이 어떤 것인지 더 알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속은 것이지요. 어떤 목적을 가지고 접근해서 잘해주는 사람에게 홀딱 넘어가면 나중에 뒤통수 맞는 수가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보면 그게 뻔히 보이는데 본인만 그것을 모른단 말이에요.
어쨌든 다른 방백들의 반대에 부딪쳐 아기스는 다윗을 전쟁에 참가시키려는 계획을 포기하게 되었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불러 다른 방백들의 반대 때문에 그를 전쟁에 참가시킬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자 다윗은 역정을 냅니다. 아니, 내가 왕께 뭘 잘못했기에 전쟁에 나가지 말라고 하십니까? 내가 모처럼 왕을 위하여 충성을 하려고 하는데, 왕의 원수인 이스라엘의 사울과 제대로 한번 싸워보려고 하는데, 왜 나의 이 충성심을 몰라주십니까? 아, 정말 섭섭합니다. 아기스는 미안해하면서 다윗을 달래려고 합니다. 참 사람의 일이라는 게 알 수가 없어요.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할 궁지에 몰렸던 다윗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습니다. 전쟁에 안 가겠다고 하다가 잘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는데, 오히려 전쟁에 못나가서 안타깝다는 식으로 말하면서 전쟁에 안 나가게 되었으니, 어쩌면 일이 이렇게 기가 막힐 정도로 해결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거야말로 하나님이 하신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이 제대로 망쳐놓고 끝내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일을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수습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잠깐 아기스에게 주목해 봅시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말하는 것을 보면 그렇게 친절하고 관대할 수가 없습니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아기스는 다윗의 은인입니다. 자기 나라 왕에게 쫓겨 갈 데가 없게 된 자신을 받아주고 살도록 해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입니까? 그런데 여기에 함정이 있습니다.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이라고 해서 다 좋은 사람인 것은 아닌 것입니다. 아기스가 아무리 다윗에게 잘해주었어도, 아기스는 다윗의 은인이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친절을 베푼 목적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배반하고 블레셋의 신하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아기스가 다윗에게 성을 주고 살도록 한 것은 다윗으로 하여금 유다의 마을들을 침공하고 노략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가하라고 하는데, 다윗이 거절을 할 수가 없지 않습니까?
사탄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식도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친절을 베풀고 신세를 지게 만듭니다. 그러고 나서 우리에게 그 대가를 요구합니다. 그렇게 해서 죄의 올무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아무 도움이나 덥석 받아서는 안 됩니다. 우선 먹기는 곶감이 달겠지만, 그 대가가 어떤 것이 될 것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온 도움이 하나님의 구원인지 사탄의 유혹인지를 분별할 수 있는 영적 분별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아기스의 친절과 도움은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은총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그런 사탄의 함정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도 그 수렁에 빠진 다윗을 건져내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고 감사합니다. 그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우리에게도 은혜 베푸시고 우리를 모든 죄악의 수렁과 유혹의 함정으로부터 우리를 구해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음성
삼상 28장 01절 / 장경동목사
본문에 두 사람이 등장하고 있는데 처음에는 두 사람 다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람이었습니다. 한사람 사무엘은 끝까지 변함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삶을 살았지만, 다른 한사람인 사울왕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에 변질이 오기 시작하며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운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항상 두 종류의 사람으로 말씀 하십니다. 양과 염소, 알곡과 가라지가 그 예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양이 아닌 염소의 종류에 해당된다면 회개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사울 왕이 무너진 이유가 여러 가지 있겠지만 그 중 하나는 자기를 위해서 기도(중보기도)해 주는 사무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누군가 나를 위해서 기도해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뤄집니다. 예수님의 중보기도를 받은 베드로는 회개하고 살았는데 예수님의 중보기도가 가룟 유다에게는 안 되더라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지금도 중보기도 해 줄 수 있는 은혜를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사무엘이 죽자 블레셋이 쳐들어옵니다. 기도의 사람이 죽자 마귀가 득세하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마귀는 오늘도 우리가 기도를 멈추기를 기다립니다. 문제는 사울 왕에게 블레셋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는 겁니다. 문제 앞에서 담대함과 두려움의 차이는 “흥하느냐? 망하느냐?”의 차이입니다. 문제가 크게 보이고 내가 작게 보이면 문제 해결에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문제가 작게 보여야 합니다. 강해져야 합니다.
사울 왕은 기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응답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1)꿈으로 하십니다(요셉) 2)우림으로 하십니다. 3)선지자를 통해서 하십니다. (다윗에게 나단선지자를 보내신 것처럼) 4)직접적인 하나님의 음성으로 하십니다.(사울아..사울아..) 5)환상을 통해서 (바울, 베드로, 고넬료) 말씀하십니다. 믿는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은 다 한결같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고 산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은 ‘하나님의 음성’ 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음성’이라고 했습니다.
1. 아담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살았습니다. (창3:8) 범죄 하기 전에 사람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과 범죄 한 후에 사람이 듣는 하나님의 음성은 다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문제가 아니고 사람의 문제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때 정말 감사함으로 기쁘게 받아 들이시길 바랍니다. 즐겁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2. 가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창4:6,9) 여기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인간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 때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들려오는 경고의 음성과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고 범죄 한 후에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사랑의 음성, 경고의 음성, 책망의 음성이 다릅니다. 여러분에게는 경고, 책망의 음성이 아닌 사랑의 음성이 들리시기를 바랍니다.
3. 노아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창6:7,8,13) 동남아시아를 강타한 쓰나미(지진해일)를 노아홍수라고 생각할 때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영이 있는 노아는 들었다는 겁니다. 은혜 받은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영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신령한 사람이 되시길 바랍니다.
4.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창12:1, 13:14) 하나님의 음성은 인간에게 유익되게만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손해 나게도 들려옵니다. (창22:2) “네 아들 독자 이삭을 드려라” 라는 음성이 그 예입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의 음성을 유익, 무익으로 듣지 말고 하나님의 음성이냐 아니냐 로 들어야 합니다. (창22:16-18) 손해나는 것 같은 음성 뒤에 축복의 음성이 있습니다.
5. 리브가에게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옵니다. (창25:22-23) 우리는 자식들 걱정이 모든 걱정의 80% 정도 인데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자녀 교육에 필요한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6. 이삭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7. 야곱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야곱이 13년 동안 요셉 때문에 울지만 하나님은 다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인간이 알아야 될 것이 있고 모르고 견뎌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후에야 130세 된 야곱이 총리대신이 된 요셉을 만나고 147세로 죽기까지 17년 동안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고통을 견디고 난 뒤에 기쁨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다시 한번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은 주의 음성을 듣고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있습니까? 그러나 혹시 들려오지 않는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해 주세요. 주의 음성듣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라
삼상 28장 1~7절 / 이성우목사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이 듣게 되며, 또 우리 삶에 아주 중요하게 작용하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곧 ‘관계’라는 말입니다. 이 관계라는 말은 우리 인생의 모습이 아주 다양한 것만큼이나 아주 다양하고 폭넓게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 관계라는 말은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의 한 중심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인간은 누구나가 아주 다양한 이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을 경험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행복과 불행은 결국 이 관계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해도 지나친 표현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한번 밖에 살지 못하는 인생살이를 행복하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자기 삶을 둘러싼 다양한 관계를 건강하고 좋은 관계,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 가기 위한 노력을 결코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맺고 살아가야만 하는 다양한 모든 관계들을 건강하고 좋은 관계, 더 나아가서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서 그 속에서 얻어지는 행복감을 누리며 살아가도록 해야 되겠지만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중요한 관계요 친밀감을 유지하기 위해서 가장 큰 노력을 기울여야 할 관계는 바로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인 것을 믿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관계의 중요성을 알고 그 관계를 친밀한 관계로 만들어서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기를 원했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남긴 말씀 가운데 구약성경 시편 1편 1-6절을 보면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사람의 삶의 모습과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지 않는 사람의 삶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기록해 놓음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삶을 살아갈 것을 자연스럽게 결단하도록 이끌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 그러므로 악인들은 심판을 견디지 못하며 죄인들이 의인들의 모임에 들지 못하리로다. 무릇 의인들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하리로다.”
또한 시편 32편 1-3절을 보면 우리들이 생명처럼 여겨야 할 하나님의 관계에서 우리들이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데 걸림돌이 되거나 방해물이 있지 않도록 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렇게 깨우쳐 주고 있음을 읽어 볼 수 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이제 말씀드린 두 곳의 말씀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하게 유지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기 위해서 우리가 관심을 기울여야 할 본질적이고도 기본적인 문제, 곧 하나님께서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우리의 삶의 모습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에서 갈등과 장벽을 해소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가를 말씀해 주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말씀하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책으로, 하나님께서 계획하셨던 인류 구원의 역사를 어떻게 이루어 오셨는가를 구체적인 역사의 현장을 통해서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책입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어떤 진리의 말씀,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분명한 방법으로 강조해서 말씀하시고자 하실 때 어느 두 가지를 대조하는 방법을 통해서 자주 말씀하신 것을 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을 전후해서 기록되고 있는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의 대조적인 증거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사무엘상 28장 1-7절까지의 말씀은 사울과 다윗 두 사람의 삶에서 가장 곤경에 처했던 상황을 기록하고 있는 말씀으로 왜 이 두 사람이 각각 다른 입장에서 곤경에 처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결론부터 한 마디로 말한다고 하면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지 않은 결과임을 설명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나라의 제2대 왕으로 사무엘 선지자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울 왕에게 쫒기면서 목숨이 위태로웠던 다윗은 거듭되는 사울 왕의 추격을 피해서 육백 여명의 자기 부하들을 거느리고 블레셋 땅으로 망명을 떠나서 아기스 왕으로부터 시글락 지방을 망명지로 제공받아 그 곳에서 머물면서 아기스 왕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신임을 받고 있던 차에 블레셋 왕이 이스라엘 민족과 더불어 전쟁하게 되면서 다윗과 그의 부하들에게 함께 전쟁에 참전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이 전반부 1-2절까지의 말씀으로, 이 대목은 다윗이 곤경에 처한 상황을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상황에서는 하나님의 특별하신 도움이 없이는 꼼짝없이 다윗이 자기 동족을 상대로 전쟁을 해야 하는 난처한 상황에 처해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무엘서에 기록된 것을 토대로 하면, 다윗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하심과 선택에 의해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무쌍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과 함께 하심으로 그는 블레셋의 적장이었던 골리앗을 물맷돌로 이기고 승리함으로써 자기 조국과 민족을 위기에서 구해냄으로 이스라엘 나라뿐만 아니라 주변에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로부터도 능력을 인정받고 일약 명성을 얻게 된 사람이기도 합니다.
특히 다윗은 사울 왕의 사위가 되어서 그를 가까이에서 모시는 동안에 여러 차례에 걸쳐서 사울 왕의 손에 의해서 죽음의 고비를 숨 가쁘게 넘겨온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런 과정 중에도 다윗은 하나님을 향한 흔들림 없는 믿음과 충성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었지만 자기 손으로 사울 왕을 죽이는 일을 피함으로써 끝까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또한 다윗은 자기의 목숨이 위태로워서 도피하는 중에도 이방 민족의 침략과 약탈로 어려움에 처한 자기 동족을 구원하고 돕는 일에는 목숨을 걸고 헌신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의 평안을 확보하는 일에 충성을 다했던 사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하며 믿음으로 따르기를 기뻐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랬던 그가 계속되는 사울 왕의 추격으로 지치고 피곤하게 된 나머지 하나님의 종 선지자 갓을 통해서 들려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순간 뒤로 하고 블레셋 땅으로 재차 망명길에 오르게 되었던 것인데, 이것은 다윗의 불신앙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것으로 다윗이 생각지도 않은 곤경에 처하게 만들었던 잘못된 출발이었던 것입니다.
물론 29장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진퇴양난의 곤경에 처한 다윗을 그 곤경에서 구원해 내심으로써 그를 통해 신정왕국을 세우고자 하셨던 역사를 신실하게 이루어 가시기 위해서 블레셋의 방백들을 동원해서 그들로 하여금 다윗 일행이 아기스 왕의 요구를 따라 전쟁에 참여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도록 역사하신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세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우선, 하나님은 우리들이 처한 상황과 현실을 핑계로 불신앙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결코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성도들의 행동 기준은 현실적인 상황이나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뿌린 대로 거두게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 주고 계시며, 셋째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곤경에서 그를 구원해 주심으로써 택한 자의 실수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랑하시고 지극한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후반부인 3-7절까지의 말씀은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 나라의 초대 왕이 되는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며, 믿음으로 하나님을 따라는 일을 기뻐하지 않고 그것을 등한히 했던 사울 왕이 블레셋 왕 아기스의 침략으로 곤경에 처한 장면을 증거하고 있는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무엘은 이미 죽었고 사울 왕이 자신의 손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시는 신접한 자와 박수를 그 땅에서 쫒아냄으로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따르는 것처럼 보였던 사울 왕이지만 그는 왕이 된 이후에 계속해서 점점 더 빠른 속도로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져갔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결과로 하나님은 결국 그를 징계하시기 위해서 블레셋 군대를 동원하셨던 것인데, 사울 왕은 하나님의 뜻을 묻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고자 하지만 하나님은 이제 더 이상 사울에게 어떤 방식으로도 응답하지 않으시게 됨으로 사울 왕이 다급한 나머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쫒아내었던 신접한 여인을 찾아나서는 장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오늘 본문 이후에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사울 왕은 신접한 여인을 찾아 갔지만 자신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신접한 여인을 통해서 자신의 멸망이 코앞에 이르렀음을 듣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시작된 블레셋과 길보아에서 전쟁을 치르던 중에 자기의 세 아들과 함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됨으로 하나님께 버림받게 된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문제는 왜 사울 왕이 하나님께로부터 철저하게 버림을 받게 되었던 것일까요? 이 물음에 대해서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그 대답을 들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사울 왕은 하나님에 의해서 왕이 된 이후에 겸손함을 버리고 극도로 교만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결과로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경홀히 여겨서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을 침범하여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는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을 경홀히 여긴 처사이며, 하나님의 종을 업신여긴 처사이었습니다.
둘째로, 사울 왕은 하나님에 의해서 왕으로 세워졌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여 자기 욕심을 부렸습니다. 전리품 가운데 쓸 만한 것들은 자기 왕궁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나중에 사무엘 선지자의 책망을 통해서 자기의 죄가 드러났지만 회개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비열함을 드러냈습니다. 사울 왕은 겉으로는 순종하는 척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을 선대하지 않고 그들과 좋은 관계를 맺지 않음으로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일에 실패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는 제사장들을 죽이는 일을 서슴치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가까이하거나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놉 땅의 제사장들이 죽임을 당할 때, 아비아달 제사장이 에봇을 가지고 다윗에게로 도망한 것에 대해서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았던 사람들은 왕, 제사장, 선지자들이었는데, 사울 왕이 하나님에 의해서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을 대신해서 일하도록 세움 받은 하나님의 종들을 선대하지 않고 좋은 관계를 맺지 않았던 것은 결국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지 않으며 하나님을 멀리한 처사가 되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나가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종 다윗을 향해서 인간적인 감정과 욕심으로 죽이고자 하는 악한 행동을 함으로써 고통을 주었고,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는 무서운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음을 스스로가 드러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울 왕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세움 받은 자로써 세상의 영화를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얻고 누리며, 그것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세상의 영화보다 더 좋은 하늘의 영화를 누리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알지 못했던 어리석은 왕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 받는 비참한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일에 실패하게 되면 그것은 곧 영적인 생명줄이 끊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형식적이고 습관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온 맘을 다 하여 하나님을 가까이 따르는 자가 되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윗의 거짓 보고와 아기스의 신임
삼상 27:8-12 / 우인택 목사
오늘 본문은 다윗의 블레셋에서의 삶과 다윗을 신임한 아기스에 대한 기록입니다.
1. 먼저, 8절에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올라가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침노하였으니 그들은 옛적부터 술과 애굽 땅으로 지나가는 지방의 주민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 기록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은 블레셋과 애굽 사이의 지방에 거주했던 종족들입니다. 이 중에서 아말렉은 이스라엘과 원수 관계에 있었습니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지치고 무력해져 있을 때, 이스라엘의 후미를 약탈하며 매우 악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힘입은 모세와 여호수아를 통해 아말렉을 물리쳤고, 하나님께서는 “내가 아말렉을 없이하여 천하에서 기억도 못 하게 하리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출 17:14).
그 후 아말렉을 멸망시키는 것은 이스라엘의 중요한 임무가 되었고,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하나님께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명령을 어기고 아말렉 왕 아각과 가장 좋은 가축들을 죽이지 않고 남겨두었습니다. 그리하여 사울은 왕위 폐위 선언을 듣게 됩니다(삼상 15:1-23).
이와 같은 역사적 상황은 다윗이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 사람들을 왜 공격했는지 알게 합니다. 당시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묻지도 않고 블레셋으로 망명하는 잘못을 범하긴 했지만, 그러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서의 자신의 역할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당시 다윗이 그술과 기르스와 아말렉 사람들을 공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이 세 족속을 공격하는 것은 곧 이스라엘의 근심거리를 제거하는 것이었기에 블레셋 왕 아기스의 의심을 살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이 이스라엘의 안전을 위해 그들을 공격한 것은 비록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블레셋에서 살게 되었지만, 신앙과 동족을 사랑하는 마음은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얼마든지 다윗과 같은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도 성도로서의 마땅한 자세를 잃지 않고 바른 신앙의 삶을 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렇게 살면, 다윗에게처럼 우리에게도 언젠가 다시 회복되는 날이 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비록 믿음의 삶에 실패했을지라도 포기하지 말고,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일에 게으르지 않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이어지는 9절에 “다윗이 그 땅을 쳐서 남녀를 살려두지 아니하고”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10절에 기록된 것처럼 아기스에 대한 자신의 거짓 보고가 발각될 위험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가나안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한 것이 됩니다. 사무엘서의 저자는 이를 통해 사울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고 아말렉 사람들을 살려둠으로써 아멜렉이 계속해서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대적자가 되게 했지만,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들을 진멸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10절에 아기스가 “너희가 오늘은 누구를 침노하였느냐”하는 질문을 한 것으로 보아, 그가 이러한 전쟁을 여러 번 했음을 알게 합니다. 그런데 다윗은 사실을 숨깁니다. ‘유다 네겝과 여라무엘 사람의 네겝과 겐 사람의 네겝’을 약탈했다고 거짓 보고를 했습니다. 여기에서 ‘네겝’은 ‘남쪽 지역’이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사실대로 보고했을 경우 아기스가 의심할 수 있었기에 거짓으로 보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다윗의 거짓말을 묵과할 수는 없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거짓말을 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합당한 자세는 아닙니다. 거짓말은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죄악입니다(출 20:16).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요인은 무엇입니까? 무엇 때문에 정직한 다윗이 거짓말을 계속해야 하는 안타까운 처지에 빠지게 됐습니까?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블레셋 왕 아기스의 신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기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이 “블레셋으로 내려가지 말고 유다에 거하라”고 한 갓 선지자의 말을 들었더라면 이러한 죄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22:5). 그러므로 다윗의 모든 죄의 출발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어떠한 일이든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면, 그때부터 사탄의 덫에 걸린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속담이 괜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오늘, 나는 과연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며 사는지 스스로를 살피시되, 작은 일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일을 하고 있다면 속히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 가운데 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3. 이어지는 12절 함께 읽습니다. “아기스가 다윗을 믿고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되었으니 그는 영원히 내 부하가 되리라고 생각하니라”
가드 왕 아기스는 다윗의 거짓 보고를 그대로 믿고 매우 만족스러워했습니다. 다윗이 보고한 대로라면 이제 다윗은 다시 이스라엘로 돌아갈 수가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백성들로부터 큰 신임을 받고 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의 가장 큰 대적인 블레셋과 연합하여 자기 민족을 침략하고 약탈했다면 어찌 용서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다윗은 이제 돌아갈 데가 없게 되어 아기스에게 충성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게 된 것이라고 여긴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같은 일은 아기스가 다윗에게 고국인 유다를 침략하도록 계속해서 종용했음을 짐작하게 합니다. 블레셋의 왕으로서 대적 이스라엘의 전쟁영웅인 다윗을 적이 아니라 자기 편으로 삼고 싶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한편으로는 좋은 인재를 등용하려는 아기스의 지혜의 결과였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기스가 택한 방법은 매우 악한 일이었습니다. 망명해 온 장수에게 자기 조국을 침략하게 하고 그 동족을 공격하게 함으로써 조국과 동족과의 마음의 끈마저 완전히 끊어지게 했으니 이 얼마나 잔인한 것입니까? 그러나 아기스의 이 악한 생각은 전혀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사건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다윗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워 블레셋을 비롯한 이방 민족을 정복하게 하시려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기스가 다윗을 자기 편으로 만들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그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아기스는 자신의 지혜로 다윗을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고 확신 했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 꾀에 빠진 어리석은 생각일 뿐이었습니다.
여러분, 이처럼 악인은 우리에게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며 온갖 꾀를 다 쓸 것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편에 서 있는 한, 그는 결코 우리를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악인이 악한 꾀로 잠시 득세하는 것같이 보일지라도 거기에 동요되지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신뢰하며, 믿음을 지키고 달려갈 길을 끝까지 달리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뜻 가운데 거해야 하는 우리가 세상의 미혹에 빠져 그곳에서 머물 때가 있을 수 있음을 다윗을 보며 깨닫게 됩니다. 그러할 때 악한 자들의 꾀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빠지지 않도록 저희를 성령의 권능으로 붙들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속히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의 선하신 뜻 가운데에서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힘있게 살아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아말렉 사람들을 침노한 다윗
삼상 27:8-12
여기에는 다윗이 블레셋 사람의 땅에 있으면서 취한 행동에 관한 기록이 있다. 다윗은몇몇 저주받은 백성들의 남은 거민들을 침략했다. 그리고 다윗은 아기스에게는 실제와는 다르게 보고했다.
Ⅰ. 우리는 다윗이 취한 잔인한 행동을 나무랄 수 없다. 그들은 하나님이 오래 전부터 멸망당하도록 정하신 족속이었고, 다윗은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자로서 그들을 처단했다. 그러므로 그가 한 일은 잘한 일이며, 그는 이 일을 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는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도록 기름 부음을 받은 사람으로서 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자기 몸을 드러내지만 않으면 사울로부터 안전하리라고 생각하고 가만히 은거하고만 있다면, 이는 그에게 합당치 않은 노릇이다.
다윗은 이들 민족들에 대한 하나님의 오래전부터의 불만을 해소시켜 드렸으며, 동시에 그 자신과 그의 군대를 위한 식량을 마련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칼을 가지고 먹고 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아말렉 사람들은 모두 죽임을 당했다. 아마 그술 사람이나 기르스 사람들은 아말렉 사람들의 한 지파였을 것이다. 사울은 아말렉 사람의 왕을 살려 준 일이 있다(15:8, 9). 그러나 다윗은 그들 중의 어느 한 사람도 살려 두기를 거절했다. 다윗은 사울의 뒤를 잇기 전에 사울에게서 부족했던 순종심을 보충했다. 다윗은 그들을 치되, “아무도 살려 두지 아니하였다”(8, 9절). 수고에 따르는 대가가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군대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물건들을 전리품으로 많이 가져갈 수 있었다.
Ⅱ. 그러나 우리는 다윗이 원정에서 돌아와서 그 원정에 관해서 아기스에게 거짓으로 속여 말한 것은 좋게 보아 줄 수 없다.
1. 다윗은 아기스에게 사실이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아무도 살려서 가드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11절). 그런데 이는 다윗이 자기의 한 일이 기쁜 일이기 때문에 부끄럽게 여겨서 그렇게 한 것은 아니다. 만일 블레셋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면, 자기를 그들의 땅에 숨겨 주는 것이 그들 자신들과 또동경한 나라들에 대해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를 그들의 땅에서 쫓아낼 것이 두렵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다윗은 열심히 그들에게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그 사람들을 모두 살육했다. 그래야만 감히 그 이웃들이 사실을 발설하지 못하고, 또 한다고 해도 그렇게 빨리 알려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정보는 오늘날 처럼 그렇게 빠르지가 못했다.
2. 다윗은 애매한 대답을 가지고 아기스에게 사실을 숨겼다. 어느 방면으로 출격을 했었느냐는 아기스의 물음에 다윗은 “유다 남방”이라고 대답했다(13절). 다윗이 유다의 남방에 있는 나라들을 침노한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다윗은 아기스로 하여금 자기가 유다의 남쪽 지방, 예를 들면 여러 번 자기를 배반한 바가 있는 십사람들을 침략했던 것으로 믿게끔 말했다. 아기스도 그렇게 믿었다.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심히 미움을 받게 하였다”고 추단했다. 그리고 다윗이 영영 자기의 편이 되었다고 단정했다.
다윗에 대한 아기스의 성실성, 좋은 평가, 그리고 신임 등은 그만큼 아기스를 속인 다윗의 죄를 더욱 큰 것으로 만들었다. 이때와 그리고 이와 비슷한 다른 경우를 생각하고, 다윗은 다음과 같은 회개의 기도를 드린 것으로 보인다. “주여 나를 거짓말하는 데서부터 옮겨 주시옵소서.”
여호와를 잊었을 때
삼상 27:1-12 / 은석교회
신앙이란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귀신에게서도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서 2:19절에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는 말씀처럼 단지 하나님이 누구시라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은 귀신들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는 지식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신자의 신앙의 의미에서의 믿음과는 다를 것입니다. 단지 지식적인 차원에서 믿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고 있다고 해서 다된 것이 아니며 입술로 말하고 고백한다고 해서 신앙이라고 말할 수 없음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참으로 힘든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자로 산다는 것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서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믿음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환경이나 형편과 타협하지를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힘들고 어려운 환경이고 형편이니까 다소 신앙을 벗어난다고 해도 이해해주겠다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신앙만을 요구합니다. 때문에 신자는 결코 자기 신앙에 대해 교만할 수 없습니다. 또한 타인의 신앙에 대해서도 섣불리 판단하고 비판해서도 안되는 것입니다.
가령 어떤 사람이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 낙심하고 염려하며 하나님을 원망할 때 그런 모습을 보면서 ‘신앙이 없다’는 등의 말로서 판단하고 비판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 또한 그 사람과 같은 처지와 형편이 되었을 때 어떻게 될지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나도 어려운 처지가 되면 저 사람처럼 낙심할 수밖에 없는 연약한 인간임을 자각하고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옳은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이란 어떤 형편과 처지에서도 그 모습이 드러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날마다 하나님을 도우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 형편을 바라보기보다는 나와 함께 동행 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가는 것이 필요한 것입니다.
오늘은 이 부분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본문의 이야기는 다윗이 사울을 살려준 뒤의 일에 대해 기록한 내용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사울을 살려주었습니다. 사울이 잠들어 있는 좋은 기회에 사울을 죽여 버리면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었지만 다윗은 그것보다는 하나님을 생각함으로써 사울을 죽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철저하게 하나님 편에 서서 행동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적어도 이런 수준의 다윗이라면 앞으로 어떤 일에서도 믿음을 드러낼 것이고 오직 신앙에 합당하게만 살아갈 것이라고 여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1절을 보면 “다윗이 그 마음에 생각하기를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여 들어가는 것이 상책이로다 사울이 이스라엘의 온 경내에서 나를 수색하다가 절망하리니 내가 그 손에서 벗어나리라”고 말합니다. 즉 다윗이 생각하기를 이렇게 사울에게 계속 쫓기다가는 언젠가는 붙잡혀 죽을 것이니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는 것이 살길이라 여겼다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피하면 사울도 더 이상 자신을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과연 이것이 하나님을 생각하며 행동했던 다윗의 모습이라고 볼 수 있습니까? 블레셋 사람은 이방인입니다. 더군다나 수시로 이스라엘을 침략하며 괴롭혔던 나라가 아닙니까? 그런데 다윗이 그러한 나라에 자신의 의탁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을 아는 자로서 합당한 행동이 아닙니다. 그런데 다윗은 이런 행동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과연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지난 시간에 말씀드린 내용에 보면 다윗이 사울에게서 몰래 가져온 창과 물병을 보여주며 사울에게 외칩니다. 다윗의 말을 들은 사울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다윗에게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돌아가지 않고 자기 길을 갑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돌아가지 않는 것은 사울은 믿을만한 존재가 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1절에서 다윗이 ‘내가 후일에는 사울의 손에 망하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비록 사울이 잘못했다는 말을 하긴 하지만 다윗은 그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때문에 언젠가는 붙들리게 될 것이라는 불안함에 의해서 피난처로 블레셋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결국 다윗은 자신이 살길을 스스로 찾아 나선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다윗이 왜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다윗이 지금까지 자신을 인도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이 아니라 지금 자신의 처지와 형편에서 자기 앞일을 걱정했기 때문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에 대해 승리한 후로 뭇 백성들로부터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는 칭송을 받았지만 그 일로 인해 사울의 미움과 시기를 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위기를 넘기면서 사울의 손을 빠져 나왔습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다윗이 살아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함께 하심의 결과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전히 쫓기는 상황이지만, 그리고 여건과 형편이 좋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이 도우시므로 이나마 지탱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지금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임을 생각했다면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할 것이다’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26:19절에서 다윗이 자신이 사울에게 쫓겨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라면 기꺼이 죽겠다고 말한 그 마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돌아봤다면 사울의 손에 죽을 것이 두려워서 스스로 피할 길을 찾아가고 결국 힘이 있는 블레셋을 의존하려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을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결국 본문에서 보여주는 다윗의 모습은 평소 하나님에 대해 고백하는 신앙의 말 그대로 살아가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연약함을 그대로 노출시켜주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갑니다. 은혜, 사랑, 자비, 긍휼, 등등 많은 말을 하지만 그러한 말들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를 살펴보면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부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에 대한 어떤 말을 했고 무엇을 기도했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살아가고, 그리고 내가 세상을 어떻게 살았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의 다윗을 보면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신앙은 항상 여호와 앞에서 살아가야 할 삶이라는 것입니다. 시 16;8절에 보면 다윗은 “내가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심이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는 말을 합니다. 다윗의 이 고백은 편안한 시절에 한 것이 아니라 수많은 고민과 문제를 겪으면서, 그리고 자신의 죄와 잘못과 실수를 반복하면서 배우고 깨달은 고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것이야 말로 어떤 처지와 형편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불안해하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는 길임을 고통과 자기 실수와 잘못에서 배운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미래를 자기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했습니다. 하나님이 인도하심을 생각하기보다는 지금의 어려운 처지와 형편에서 미래를 바라본 것입니다. 그리고 블레셋으로 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결론을 내립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니 아예 그러한 문제는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사울의 손으로부터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몰두했기 때문에 블레셋으로 가는 것이 최선이고 사는 길이라고 여겨진 이상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옳은 것인가에 대한 생각조차 까맣게 잊어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살았던 다윗의 삶이 어떠했는가는 뒤의 구절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과 함께 한 육백인과 더불어 가드와 아기스에게로 갑니다. 그리고 아기스는 다윗을 받아 들여 시글락에 있는 자신의 영토를 맡깁니다.
그런데 다윗이 피한 가드의 아기스는 21장에서 다윗이 미친체하여 도망을 쳤던 아기스와 같은 사람입니다. 당시 아기스는 다윗이 미친 것으로 여기고 쫓아내었지만 지금은 육백 명이라는 사람을 이끌고 자신의 수하가 되겠다고 찾아온 것입니다. 아기스는 이러한 다윗에게 자신의 땅을 내어 주고 지키게 한 것입니다. 다윗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땅을 지키기 위한 의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기 위해 손을 잡는 것입니다.
8절을 보면 다윗이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을 칩니다. 그런데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합니다(10절).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아기스가 모르게 하기 위해 자신이 친 사람들의 남녀를 살려두지 않았던 것입니다.
다윗이 침략한 그술 사람과 기르스 사람과 아말렉 사람은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공격한 것입니다. 이것은 다윗이 이스라엘을 돕는 행위입니다. 만약 이것을 아기스가 알게 된다면 다윗에 대해 의심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아기스는 다윗이 사울에게 쫓긴 몸인 것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울과 원수된 관계인 것으로 여기고 다윗을 받아준 것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이스라엘에게 도움이 되는 행동을 했음을 안다면 다윗이 자기에게 온 것이나 자신의 땅에 거하는 것에 대해 의심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다윗은 자기 행위를 감추기 위해 공격한 땅의 남녀를 포로로 잡아오지 않고 모두 죽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기스에게는 유다 남방과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과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입장에 있습니다. 결국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을 쳤다고 함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에게 등을 돌리고 있음을 믿게 함으로써 아기스의 신임을 받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다윗의 행동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물론 다윗이 친 사람은 이방인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다윗의 행동이 무조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다윗은 지금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신의 계략과 생각으로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거짓된 행동으로 인해서 아기스의 신임을 받게 되고 28장에서 아기스는 이스라엘과의 전투에 다윗이 함께 하도록 하게 됩니다. 하지만 블레셋 장관들은 다윗을 믿지 못하고 의심함으로써 결국 블레셋 땅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30장에 보면 아말렉 사람들이 이미 다윗이 있던 곳을 침략하여 다윗의 아내와 자녀를 포함하여 여인들을 모두 사로잡아 간 일이 발생했고 백성들은 슬픈 마음에 다윗을 돌로 치려고 합니다. 그때 다윗은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묻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아말렉을 따라가 침으로써 빼앗겼던 모든 것을 다시 찾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다윗을 다시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께 묻는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것입니다.
다윗의 이러한 삶의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배울 수 있습니까? 사실 우리가 지금 아무리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고 예수님을 의지하고 살겠다고 결심하고 각오를 가진다고 해도 정작 나에게 주어진 그날의 삶에서 어떤 모습을 보일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생각했다가도 수시로 나의 방식과 나의 계획을 앞세우고 살아가게 됩니다. 미래에 대한 염려와 불안감 때문에 내 스스로 나를 지키기 위해 나의 생각에 몰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을 생각한다거나 하나님께 묻지를 않을 것입니다. 아예 하나님을 잊어버린 채 행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에서 수시로 보여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고 하나님께 묻는 자로 만들어 가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때로는 나의 계획과 생각의 결과가 오히려 나에게 해가 되는 쪽으로 이끌어 가시기도 합니다. 내 계획의 잘못됨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하나님께 묻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앞서 말씀드린 시편 16:8절의 말씀대로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사는 것입니다. 그럴 때 여호와가 나와 함께 하심을 믿으며 요동치 않게 될 것입니다.
편안한 삶에서 주의할 것은 내 신앙에 문제가 없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삶이 편안할 때는 삶의 문제 때문에 고민할 것도 염려할 것도 없습니다. 단지 간혹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바를 믿는다고 고백하며 살아가면 됩니다. 때문에 자신에게서 문제를 발견하기가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삶으로 인해서 낙심하고 염려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의 신앙을 무시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별 문제 없다고 해서 자기 신앙을 과신해서는 안됩니다. 자신을 항상 연약한 자로 여겨야 하고, 자신의 연약함을 타인의 삶에서 발견하고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만을 막는 길입니다. 편안할수록, 삶에 문제가 없을수록 더욱 더 힘써 여호와를 항상 내 앞에 모시고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의 편안함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임을 생각하고 힘들고 어려운 삶에 있는 성도를 바라보면서 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의 어려운 삶에 마음으로나마 함께 할 것이고 그들의 나약한 모습에 대해 판단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지금의 처지가 힘들고 어렵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이 누구의 도움이었으며 힘이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사실 지금의 형편이 어렵다고 해도 그 자리까지 오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비록 다윗이 쫓기는 처지이긴 하지만 위기 때마다 하나님이 다윗을 도우시고 구하셨기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힘들고 어려울 때 잊어서는 안될 것은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라’는 고백입니다. 지금의 자리가 고통이고 어려움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다면 진작 망하고 죽었어야 할 존재이며 이보다 더 큰 고통에 빠져 헤어날 수 없었음을 생각해 보십시오. 앞으로 살아갈 미래도 하나님께 맡기게 될 것입니다. 이 자리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이 남은 인생도 인도하실 것임을 믿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여호와를 내 앞에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며 이것을 두고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앙은 결코 말로 멋 부리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은 때로는 편안함에서 때로는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절망가운데서 낙심도 하고 실망도 하면서 조금씩 하나님을 배우고 만나는 것입니다. 양복입고 자가용타고 아무런 장애물도 어려움도 없이 목적지를 향해 가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넘어지고 부서지고 깨어지면서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을 깨닫는 것입니다.
다윗이 ‘내가 후일에 사울의 손에 망하리니’라고 생각한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우리 또한 이러한 어리석음에 빠져 들게 됨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이러한 어리석음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해 아멜렉을 보내서 다윗의 아내와 자녀들과 모든 여인을 빼앗아 가게 한 것처럼 하나님은 나의 계획과 생각에 몰두하여 살아가는 어리석은 우리들을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하기 위해 이런 저런 일이 있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큰 은혜이며 복입니다. 이것을 알 때 내 뜻대로 안되고 넘어지는 결과에서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한 신자가 요동치 않는 것입니다.
항상 여호와를 여러분 앞에 모시고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이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바쁜 세상의 삶에서 조심할 것은 여호와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우편에 함께 하십니다.
다윗의 딜레마
삼상 28:1-2 / 은석교회
지난 시간에는 신자가 여호와를 잊었을 때 어떤 모습을 보이게 되는가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은 분명 하나님을 신앙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만을 믿는 믿음으로 골리앗조차 두려워하지 않고 당당하게 나가 대결하여 승리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한 그가 사울로 인하여 자신의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고 결국 망하게 될 것을 염려하여 스스로 살길을 찾아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는 장면을 보면서 여러분은 어떤 생각을 하였습니까?
저는 지난 주에 이 말씀을 설교하면서 우리에게 있는 신앙은 결코 내 것이 아님을 다시 한번 깊이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내게 주어진 신앙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지 내 스스로 신앙을 만들어 내어 내 신앙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닌 것입니다. 만약 골리앗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죽이려는 사울까지 살려준 것이 다윗의 신앙이었다면 그러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사울로 인해 망할 것을 두려워하여 원수인 블레셋에 몸을 의탁하려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 곧 인간의 연약함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붙드심이 아니면 한시도 신앙에 머물 수 없습니다. 이것을 알기에 신자는 항상 여호와를 앙망하며 여호와의 도우심을 구하며 살기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의 행동은 신자가 무엇에 힘쓰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여호와를 잊지 않는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를 유혹합니다. 베드로전서 5:8절에서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하는 것처럼 우리의 대적인 마귀는 세상을 이용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기 위해 두루 다니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산다면 우리는 깨어 있을 수 없고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신자로 하여금 여호와를 잊도록 만듭니다. 어려운 상황과 고통과 힘든 문제들이 있을 때 하나님보다 그것들을 바라보게 하고 그 문제와 어려움에 대해 깊이 빠져들게 만듭니다. 결국 고민하게 되고 염려와 근심에 빠지게 되고 낙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지금까지 누가 나를 이도하셨고 살게 하셨는가를 잊어버린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힘으로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 힘쓰게 됩니다. 우리가 이러한 삶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신자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신앙이 아닌 길을 가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이것은 세상과의 타협입니다. 그리고 타협을 하는 이유는 세상의 힘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고, 세상의 힘을 이용하고자 하는 것 때문입니다. 힘이 있어야 나의 일이 잘된다는 것 때문에 타협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타협은 타협으로만 끝나지 않습니다. 세상과 타협했을 때 결국 타협으로 인해 갈등과 곤란함에 빠지게 되고 신자의 존재성 자체에 큰 위기가 오게 된다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러한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1절을 다시 보면 “그 때에 블레셋 사람이 이스라엘을 쳐서 싸우려고 군대를 모집한지라 아기스가 다윗에게 이르되 너는 밝히 알라 너와 네 사람들이 나와 한가지로 나가서 군대에 참가할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군대를 모집합니다. 그런데 아기스가 다윗과 다윗과 함께 한 사람들까지 군대에 참가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기스가 다윗을 자기편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아기스가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여기게 된 결정적인 사건은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과 적대관계에 있는 그술, 기르스, 아말렉 사람을 쳤으면서도 아기스에게는 반대로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는 유다 남방사람, 여라무엘 사람의 남방, 겐 사람의 남방을 쳤다고 거짓말을 한 이것이 아기스로 하여금 다윗을 자신의 편으로 인정하게 했던 것입니다.
다윗은 아기스를 속여 그로 하여금 자기를 이스라엘에 대해 미련을 버린 아기스의 사람이 된 것으로 믿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다윗의 이러한 계략은 블레셋이 이스라엘과 전투를 하게 되고 아기스가 다윗에게 군사로 참가할 것을 말함으로써 오히려 큰 고민으로 다가오게 되었을 뿐입니다.
다윗이 전투에 참가할 경우 아기스와 블레셋 군대와 장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스라엘과 싸워야 합니다. 이것은 다윗에게 엄청난 고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일 다윗이 실제로 아기스 편에 서서 이스라엘과 전투를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 죄를 범하는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 택함 받은 하나님 부르심 자체를 버리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했을 때 블레셋 편에 서서 블레셋의 군사로서 자신들과 싸운 사람을 왕으로 인정을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싸우기를 거부할 상황도 못됩니다. 만약 거부했을 때 아기스를 배신한 죄로 살아남기가 힘들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은 이스라엘과 싸울 수도 없고 싸우지 않을 수도 없는 곤란함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결국 자신은 아기스 편이라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아기스를 이용하려고 했던 다윗의 계략은 오히려 자신을 더 큰 어려움으로 밀어 넣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계략과 수단으로 살고자 하는 일의 결과인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그러면 당신이 종의 행할 바를 아시리이다”(2절)라는 모호한 대답을 합니다. 싸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싸우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라 나의 행할 바를 아기스 당신이 안다는 답을 한 것입니다. 이 역시 싸우겠다는 말을 함으로써 이스라엘을 반역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 행위를 하지 않고 싸우지 않겠다고 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위기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지금의 다윗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전혀 드러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나는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사람인데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과 싸울 수가 있는가?’라는 사실을 떳떳하고 당당하게 아기스에게 증언할 수 없을 정도로 나약함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다윗의 이런 나약함의 원인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인도하심을 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모든 상황의 앞날을 자기 스스로 미리 상상하기 때문에 당당함을 내 보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윗의 이러한 모습을 바라보면서 실용적인 자신의 이익을 위해 세상과 타협하는 것이 때로는 아무리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결국 신자인 우리를 성경의 원칙에서 벗어나게 만들기 위해 항상 문 앞에 도사리고 기회를 엿보는 도구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타협은 타협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자에게 크나큰 신앙의 갈등을 안겨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죄를 우리에게 ‘현실적인 사람’이 될 것을 외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갈등은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의 사람으로 머무느냐 아니면 신앙은 교회에서만 통용하고 세상에서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머무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교회에서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정하고 신앙하는 사람이지만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현실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현실적인 사람으로 전락해 버리는 것입니다.
다윗이 가드로 가고 아기스를 속이게 된 것은 지극히 현실적인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님을 바라보지 않을 때 자신의 미래가 불투명해지고 불안해지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살길로서 블레셋을 택한 것이야 말로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의 대처 방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다윗의 현실적인 입장에 서서 다윗을 생각할 때 이러한 행동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어쩔 수 없지 않느냐?’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고 자신을 정당화 하며 나중에는 아예 하나님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한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때로 죄의 경중을 따져가며 생각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이정도는 죄라 해도 가벼운 것이니까 괜찮을거야’라든가 ‘이 정도는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안할 수 있으니까 이번만 하고 다음에는 하지 말자’라는 생각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이야 말로 스스로에게 속는 것입니다. 가벼운 죄 무거운 죄란 없습니다. 우리 힘으로 이길 수 있는 죄가 있고 이길 수 없는 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죄란 어떤 행동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에게도 힘이 있음을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미 죄악 속에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자신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고 이길 수 있는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 자체가 이미 사단의 유혹에 빠진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현실적인 입장에서 여러분의 문제를 바라보지 마십시오. 결과는 여러분의 힘으로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어떤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게 되고 때로는 문제를 벗어나기 위해 신앙을 포기하는 타협도 불사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자는 현실적인 문제든 무엇이든 모든 것을 신앙의 위치에서 생각하고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울이 변화가 되었든 되지 않았든 분명한 것은 하나님이 지금껏 다윗을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지금 살아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의지이며 계획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현실과 상관없이 다윗의 장래의 모든 일도 하나님의 뜻과 의지대로 되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고 의지하고 바라볼 뿐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한분뿐입니다. 이것이 신앙적인 위치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시각으로 현실을 살아가야 함을 다윗을 통해 배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미래를 여호와께 맡긴다는 것을 믿지를 못합니다. 여호와께 맡기는 것보다는 현실이 나아지는 것만이 미래에 대한 보장이라고 여겨버립니다. 이것은 명백한 불신앙입니다. 여호와의 전능하심과 살아계심을 믿지 못하는 것이고, 우리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동행하시고 인도하시고 지키신다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삶에서 여호와를 만나고 여호와가 누구신가를 배우지 못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삶에서 여호와를 보지 못하고 만나지 못했기에 믿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은 현실을 바라보고 미래를 전망합니다. 현실이 나쁘면 미래까지 나쁠 것이라고 생각하고 현실이 좋으면 미래 역시 그 전망이 밝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미래는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미래시며 미래의 전망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을 아무렇게나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에게 현실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책임과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 순간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 84:5-7절에 보면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저희는 눈물 골짜기로 통행할 때에 그곳으로 많은 샘의 곳이 되게 하며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 저희는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고 말합니다.
시온의 대로라는 것은 하늘나라를 향한 큰 길을 뜻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신약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에게 시온의 대로는 그리스도가 아니겠습니까? 즉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사람은 모든 힘을 주께로부터 얻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미래를 위한 길을 블레셋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결과는 이스라엘과 싸워야 하는 위기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날마다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신자에게 있어서 길은 세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 할지라도 신앙이 아닌 길은 가지를 마십시오. 그리고 이것을 위해 현실보다는 우리의 마음에 대로로 존재하시는 주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리고 주께 힘을 얻으십시오. 현실로 가는 길의 마지막과 주님으로 가는 길의 마지막을 생각하십시오. 현실은 잠깐이지만 주님은 영원하다는 것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을 여기에 붙들어 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주님이 누구신가를 열심히 항상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신자에게 사소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삶에 있어서 참으로 중요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스스로 미래를 상상하며 자신의 힘으로 해결하기 위해 현실적인 길을 걸어갈 때 어떤 곤란과 어려움에 빠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묻습니다. 여러분께 길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 있습니까? 저와 여러분은 주님의 길을 가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사람들입니다. 현실에 마음 뺏기지 마시고 현실에 속지 마시고 지금도 우리의 삶을 책임지시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의존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미래는 대로이신 주님께 있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실의 어떠한 문제이든 피할 길은 여호와께 있는 것이지 우리의 계획이나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문제에서든 하나님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이고 신자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