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푹푹 찌는 구만. 목이나 좀 축이면 좋으련만 등에 찬 물통의 물은 이미 비어 버린 지 오래다. 지면을 타고 올라오는 열기는 관자놀이에 머물고 있는 혈관을 터질 듯이 팽창시키며 온몸에서 물을 짜내고 있다. 속이 뜨끈하고 목구멍은 말라 쩍쩍 붙지만 그래도 이 짓을 계속하면서 가고 있는 까닭은 멀지 않은 곳에 바로 내 집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계속 머리 속에 떠올리며 집에 도착했을 때 바닥에 주저 않은 나는 하늘이 노랗게 변하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잠시동안의 절망감을 느낀 나는 조금 편해지자 내가 걸어왔던 길을 바라보았다. 지면의 키 작은 풀들이 짓이겨져 누런 흙이 드러나보이는 길이 멀리 서부터 이곳까지 생겼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누워있는 나무. 내가 봐도 크긴 크다. 사람들이 이걸 혼자서 끌고 왔다면 미쳤다고 한마디씩 하겠지. 내가 어떻게 굴러먹고 살아왔는지 보여주는 증거기도 하고. 망할...
한숨한번 쉬고 자리에서 다시 일어나 나무를 감싸 쥐고 힘을 주었다.
“흡!”
기합소리와 함께 그 큰 나무는 어느새 내 오른쪽 어깨에 놓여졌다. 그리고 집 뒤 장작터로 가서 나무를 고정시켜 두고, 근처 나무둥치에 꽂혀 있던 도끼를 가져왔다. 건물 재료로 팔기 위해 열심히 도끼질을 하며 난 생각했다.
‘언제까지 이 짓 거리를 하고 살아야 하는 건가?’
이렇게 사는 것이 그래도 예전보단 훨씬 잘 살고 있지만, 습관대로 난 내 삶을 비관하기 시작하였다.
오늘하루도 틀릴 것 없이 힘든 일과 내 처지를 곱씹으며 저녁을 맞이 하였다. 방과 홀,부엌의 구분 없이 단칸으로 이루어진 통나무 집이지만 내가 가진 전부이자 쉼터이다. 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고생을 하였던지 생각만 해도 치가 떨린다.
램프에 불을 붙이고 곧 다가오는 어둠에 대비하였다. 약간은 어두 침침한 불빛아래 또 하루를 버티게 해줄 끼니를 준비하려 벽난로에도 불을 지켰다. 그리고 물을 담은 솥을 불 위에 올리고 끓이기 시작하였고 그 앞에 주저 앉아 내일 일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영감이 곱게 굴어 주려나.”
내가 매일 같이 해오는 나무들을 삼 사일마다 팔아 넘기는데, 내일이 팔러 가는 그날이다. 그것이 유일한 내 생계 수단이다. 장작거리나 건물에 쓰일 재료용 목제를 그 까칠한 영감에게 넘겨 주는 일이 말이다.
솥의 물이 제법 끓어 오르자 난 말린 야채와 고기를 조금 쏟아 부었다. 그리고 싸구려 향신료들과 조미료를 조금씩 부은 다음 국자로 휘휘 내저었다. 이렇게 혼자서 끼니를 해결하는 것도 이제는 신물이 난다. 가끔은 마냥 귀찮아 져서 하루종일 굶기도 하는 날도 있다. 뭐 그 편이 낫기도 한 이유는 적은 수입을 조금이라도 덜 쓸 수 있기에. 그렇게 끓인 스프와 말라서 돌처럼 딱딱한 빵으로 어느 정도 배를 채운 나는 바로 침대에 파묻혔다. 있지도 않은 손재주로 직접 만든 거라 볼품도 없고 딱딱 하기만한 나무 침대지만 익숙해져 있는 나에겐 어느 무엇보다 포근하고 푹신푹신하게 느껴졌다. 몰려오는 졸음에 그냥 나도 모르게 자버렸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벽난로의 나무는 홀라당 모두 재가 되었고 램프의 기름은 그만 바닥이 나버렸다.
‘제길. 불을 끄지도 않고 그냥 자버렸었지. 아까운 나무와 기름만 버렸어. 일어나자 마자 짜증나는 일이 일어나는군. 오늘 영감 만나는 날인데 아침부터 재수없게.’
거래를 앞두고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는 그만 기분이 잡쳐버렸다. 오늘도 좋은 일이 일어나기는 틀려먹었군.
밖으로 나와 받아놓은 물로 세수를 한 나는 바로 장작터로 발길을 돌렸다. 아주 상쾌한 아침이었지만 결코 그 기분을 느끼지 못한 채 어제가 오늘 같은 기분으로 나무들을 크디 큰 수레에 옮기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이 수레에 나무를 실을 땐 안정감 있게 쌓는 방법을 몰라 얼마나 고생했던지. 지금이야 요령이 붙어 집채만하게 쌓아올려도 무너지지 않는다.
한 시간쯤 되었을려나.
정말 집채 만하게 쌓인 나무를 실은 수레를 바라보며 잠시 흡족한 미소를 지은 나는 곧바로 수레의 손잡이를 움켜 잡았다. 그리고 서서히 끌고 나가기 시작했다. 제법 무게가 나감을 느끼며 아침도 먹지 않은 채 바로 영감이 있는 허슬타니아 시내로 향했다. 여차하면 간만에 펍에서 식사다운 식사 한끼를 기대하면서.
“어이구. 네 녀석은 인간이 맞는지 볼 때 마다 의문이 가는군. 웃기게 생겨 처먹은 놈이야. 어떻게 저런 무게를 말도 없이 손으로 끌고 오냐?”
길게 뻗어 아래로 쳐진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영감이 내게 말했다.
“거 헛소리 마시고, 돈이나 빨리 주십쇼.”
유일하게 내가 편하게 말을 꺼낼 수 있는 목재장이 영감, 폰 뒤에르. 여러 일꾼들을 거느리고 시에서 목재를 사고 파는 이 영감은 제멋대로인 성격으로 유명하다.
“말로 수레를 끌고 오든 내가 끌고 오든 무슨 상관이요?”
“거참. 젊은 놈이 내뱉는 말 꼬락서니가 저따위라니. 아무리 봐도 많이는 못 쳐주겠는걸. 여기저기 흠이 많아서 말이야.”
제대로 살펴보지도 않고서는 툭툭 내뱉는 말에 진저리가 난다.
“많이 줘봐야 4펜다로군.”
“지난번엔 5펜다로 쳐줬잖습니까!”
“그냥 주는 대로 받아! 요즘 통 수입이 시원찮으니까. 싫음 말던가.”
영감이 내미는 동으로 만들어진 동전 다섯 개를 떨떠름한 표정으로 받아 든 나는 인상을 한번 써 주었다.
“수레 잠시 놓고 갈 테니 팔아 먹지 마십시오.”
“자식아. 저렇게 낡은 걸 누가 사기나 하겠냐. 알아서 해.”
뒤 돌아 서서 뚱뚱한 몸을 이끌고 뒤뚱뒤뚱 걸어가는 영감에게 비웃음을 날려주고는 그의 목재장을 빠져 나왔다. 시의 변두리 측에 위치한 곳이 여서 그 빌어먹을 놈들이 없을 거라는 생각에 바로 앞에 위치한 펍으로 발길을 옮겼다. 조금 적은 돈을 받았지만 시원한 맥주한잔과 따뜻한 식사한끼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었다.
그렇게 펍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 빌어먹을 놈들이 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 이였다.
“이야. 이게 누구신가. 무크 아닌가?”
“얼래? 저런 거지 같은 자식이 이런 곳엔 웬 일이지?”
중앙 테이블에서 곱지 않은 눈길로 나에게 딴지를 걸고 있는 놈들은 바로 이곳 영주의 아들 샨 메그너 무리였다.
“한동안 안 보인다 싶더니 변두리에서 들락거리고 있었군.”
“이런 곳도 오는 걸 보니 제법 살맛 나는가 보지? 버러지 같은 새끼.”
건들 거리는 모습들로 걸터앉은 다섯 녀석은 귀에 거슬리는 말들을 내뱉었다. 나는 녀석들을 피해 입구쪽 구석진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고 주문을 하기 위해 종업원을 찾으러 이리 저리 둘러보던 차에 둔탁한 소리가 났다.
-쾅-
긴 가죽 부츠가 내가 앉은 자리 테이블 위에 놓여져 있었다. 놈들 중 한명, 죠니의 것 이였다.
“돈 좀 만져보더니 이젠 눈에 뵈는 것이 없어?”
옆으로 찢어진 눈을 더욱 가늘게 찢으며 이를 가는 죠니의 얼굴을 나는 올려 다 보았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녀석의 면상에 불만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넌 늘 그 시건방진 태도가 맘에 안 들어. 새끼!”
무언가가 내 뒤통수를 후려쳤다. 녀석은 강하게 휘두른 탓인지 아픈 얼굴을 하며 손을 감싸고 있었다.
그깟 허약한 팔뚝으로는 내 눈 한번 깜빡이게 만들기도 힘들지. 약해 빠진 놈.
“야. 조니. 그만하고 마시던 술이나 계속 마셔. 그런 놈 손찌검 해봐야 기분만 더러워져.”
더러운 벌레라도 본 듯한 얼굴로 샨 녀석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죠니는 아무런 토도 달지 않은 체 녀석의 말 대로 곧장 돌아갔다. 미간을 찌푸린 체로 난 샨을 쳐다보았고 녀석은 나의 시선을 느끼자 비소를 날렸다.
“왜? 그 잘난 도끼라도 내려칠 모양이지? 주제를 알아라 병신아.”
녀석의 말에 식욕이 사라진 나는 벌떡 일어나 펍을 나와버렸다. 그사이에도 녀석들은 나에 대한 야유를 빼놓지 않았다.
“이제서야 꽁무니를 내빼는군. 눈치 하고는. 예나 지금이나 웃기는 자식이 라니깐.”
한 여름이지만 아직 해가 그리 높이 뜨지 않아 비교적 시원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식지 않은 이마를 느끼며 나는 조금 윗 쪽에 위치한 펍에 들러 독한 술 한 병을 샀다. 그리곤 바로 폰 영감 목재장에 들러 수레를 끌고 나와 집으로 향하였다. 영감은 바쁜지 보이지 않았다.
한 손으론 수레를 끌고, 다른 한 손으론 술병을 입가로 가져갔다. 입구를 막은 코르크 마개를 이로 물어 뽑아 내었다. ‘퐁’ 하는 소리와 함께 독한 술 냄새가 코를 찔렀으나 망설임 없이 병 주둥이를 입에 물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침도 안 먹은 빈속이라서 짜릿짜릿한 느낌과 함께 확 달아 올랐다.
‘망할 놈의 자식들.’
나는 무기점 주인의 아들 이였다. 일찍이 어머니를 여읜 후 온갖 서러움을 받으며 살았다. 마법의 고장이며 대마법사 파몽스 커틀렛의 고향인 이곳 허슬타니아는 온통 마법사에 대한 열의 만이 넘칠 뿐이 였다. 아버지는 검과 방패를 위주로 무기점을 차리시길 원하셨고, 따라서 기사의 도시인 게루쉬나 쥬넌에서 장사를 하길 바랬다. 허나 허슬타니아가 고향인 어머니는 다른 곳으로 떠나길 반대하셨고, 그로 인해 이곳에서 장사를 하게 된 것 이였다. 마법도시에서 기사나 전사를 위한 무기를 파는 무기점이 잘될 리가 있을 수 없었다. 웬만하면 마법 도구들을 들여 팔았을 텐데 고집이 남다른 아버지는 끝내 그러지 않았다. 장사는 끼니를 간신히 때울 수 있을 정도로 어려웠으나 아버지는 어머니만을 바라보며 참고 살아갔다. 그만큼 그는 어머니를 사랑했었다. 하지만 내가 어설프게 뛰어 놀 나이쯤 되었을 때 어머니는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버렸다. 그 충격으로 인해 아버지는 술로 하루하루를 보내기 시작하였고, 점점 더 어려워져 가는 살림과 삐뚤어져 버린 성격으로 어느 순간부터 어린 나에게 손찌검을 하기 시작했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수시로 맞던 나의 생활은 집 밖에서도 마찬가지 였었다. 무기점 아들답게 검을 동경하던 나는 기사가 되기를 꿈꿨으나 또래의 아이들은 대마법사 파몽스 커틀렛을 영웅으로 삼아 마법사가 되기를 원했다. 꿈이 달랐던 나는 자연스레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했고 마법사에 대한 집착이 유달리 특별했던 샨은 아이들을 이끌고 특히나 괴롭혔었다. 수도 없이 맞붙어 싸웠지만 사람들은 영주의 아들인 샨 녀석의 편을 들어주었지 내 편은 아무도 들어주지 않았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른 뒤 술에 찌들어 살던 아버지는 결국 병으로 죽어버렸다. 장사는 내쳐 두었기에 빚이 쌓였었고, 가게는 어느 누군가의 손으로 넘어가 버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혼자가 되어버린 어린 나는 살기위해 온갖 일을 하였고 잔심부름부터 막노동까지 안 해본 것들이 없었다. 그렇게 번 돈들도 나이가 어리다고 턱없이 적게 받거나 띄어 먹히기 일쑤였고, 사기도 당했었다. 어느 누구도 나를 가엽게 여기거나 관심을 가져주지 않았고 그렇게 커가는 동안에도 샨 일행의 괴롭힘은 계속되었다. 조금 머리가 굵어지자 세상살이를 알게 된 나는 악착같이 돈을 모았고, 제법 돈이 모이자 외곽으로 벗어나 지금의 집을 지었다.
서서히 지면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얼마 남지 않은 술을 한입에 털어넣고 휘청거리며 걷다 보니 어느덧 집 앞까지 도달하였다. 장작터에 수레를 내치다시피 하여 놓아두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침대에 몸을 던져 누운 나는 집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서툰 곳이 보이지만 혼자서 지었다고 보면 썩 훌륭한 솜씨지.’
여기저기 굴러먹으며 일한 결과 잡기들을 많이 배울 수 있었고, 그것들을 총동원하여 홀로 지었다. 그 동안 살아온 모습들이 이 집에 고스란히 담겨진 셈 이였다. 서서히 감기는 눈꺼풀을 느끼며 그냥 그대로 잠을 청했다. 오늘은 그냥 쉬어 버리는 거다.
눈을 떠 창가를 바라보니 제법 해가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약간 지끈지끈함을 느끼며 몸을 일으키니 시장함이 느껴졌다. 물 한잔 시원하게 마신 나는 밖으로 나와 심호흡 한번 하고 다시 들어가 어젯밤 동이 나버린 램프의 기름을 미리 채워두고 몇 가지 물건들을 가지고 나왔다. 작은 토끼 한 마리라도 잡아 볼까 싶은 요량으로 트라이던트 한 자루와 호신용으로 그레이트 엑스 한 자루를 말이다.
제법 무게감을 느끼며 살짝 들어 날을 확인해 주었다. 이 녀석의 이름은 ’미티어라이트’. 특별히 비싼 값을 치르고 구해 이름까지 직접 붙여 주었다. 기사를 꿈꾸어 검을 동경했었지만 온갖 궂은 일을 하며 살아온 나에게 검은 가느다란 나무 작대기를 휘두르는 느낌밖에 선사해 주지 않았다. 그래서 택한 것이 그레이트 엑스였다. 그 무게감과 파괴력은 내 구미에 맞아 들었고, 보는 이들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큰 거한들이나 다루는 무기를 그리 크지 않은 몸집으로 가벼이 휘둘러 대니 어느 누가 놀라지 않겠는가.
어깨에 떡 하니 걸치고 숲으로 들어간 나는 숨을 죽이며 사냥감들을 찾아 다녔다. 가벼이 잡을 수 있을 거란 내 예상은 쉽게 빗겨나가 버렸다. 해가 저물어 금빛 황혼이 질 때 까지도 토끼는커녕 그 흔한 쥐새끼 한 마리도 구경하지 못하자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상하다. 숲이 너무나도 조용한데.’
혹 몬스터라도 주위에서 서성이나 싶어 깊이 경계하고 살펴 보았지만 녀석들 조차 눈에 띄는 건 없었다. 숲의 넘치는 생명력은 그대로 인데 전부 하나 같이 가만히 숨 죽이는 듯한 느낌 이였다. 설마 드래곤이라도 나타난 것은 아니겠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몽글몽글 피어 오를 때 갑자기 고막을 찢을 듯한 소리가 들렸다.
-가까이 오라.-
굵직한 저음 이였다. 사람의 목소리 같기도 했으나 감정이 전혀 실리지 않은, 너무나 이질감이 느껴지는 소리였다. 어찌나 크던지 숲이 흔들릴 정도 였고 나는 깜짝 놀라 주저 앉을 뻔했다.
‘무슨 소리지?.’
놀란 가슴은 터질 듯이 두근거렸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어디서 들려오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자 나는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정말 드래곤 이라도 나타난 걸까? 그 엄청난 소리를 낼 수 있는 존재는 그리 많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리저리 머리는 열심히 굴러갔으나 두 다리 만큼은 땅에 붙은 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쿵. 쿵-
어디 선가 지면을 타고 떨림이 전해 왔다. 그것을 신호로 비로소 걸음이 떨어졌고 나는 죽을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했다. 왠지 이 숲을 빨리 벗어나야 할 것만 같았다.
굵은 나뭇가지들이 머리를 때리고, 까칠한 나뭇잎들이 피부를 찢어놓아도 정신없이 앞만 보며 나갔다. 아픔도 느끼지 못하며 그렇게 숲에서 벗어나자 그 진동은 어느새 사라져있었고, 숨이 넘어 갈 것만 같던 나는 헐떡였다.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아 비틀거리면서도 계속 걸음을 재촉하였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나는 가시지 않은 몸의 떨림을 느끼며 문밖을 지켜보았다.
“허억. 헉. 끄응.”
한참을 지켜본 나는 숲에서 어떠한 것도 튀어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자 비로소 램프에 불을 붙여 어두워진 집안을 밝혔다. 손이 가늘게 떨려 조금 애를 먹었다.
‘뭐야 대체.’
일터인 저 숲은 일찌감치 모두 둘러보았다. 혹시나 일하는데 방해될 뭔가를 찾아 보았지만 기껏해야 저 넓은 숲에는 트롤 몇 마리가 있는 것이 고작 이였다. 그런 곳에서 저런 엄청난 소리를 내는 무언가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해보지 못했다.
‘잘못들은 것은 아닐까? 아닌데. 술은 모두 깬 상태였어. 분명히 인간의 말을 했는데. 유령이라도 있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잡히는 것이 없자 나는 더 이상 생각하기도 싫어져 얼른 다른 어떤 일에 몰두하였다.
괜히 서두르며 땔감이 다 타버린 벽난로에 장작을 넣고 불을 붙였다. 그러고 보니 펍에서의 식사도 날려버리고, 사냥도 헛탕치고 어두워진 아직까지 한끼도 먹지 못했다.
‘젠장. 또 지겨운 스프를 먹어야만 하나.’
절로 찌푸려지는 인상을 느끼며 나는 솥에 물을 담아 불에 올리기 시작하였다.
아무리 권태롭던 일이였다 하더라도 유일한 생계 수단인 그 짓을 이틀동안 안 하다 보니 걱정이 되었다. 물론 모아둔 돈이 있기는 하지만 힘들게 모아놓은 것들을 이렇게 써버릴 수는 없는 거 였다.
그 사건으로 인해 숲 근처에 섣불리 갈 수 없었던 나는 지금처럼 침대에 누워 빈둥 거리기만 했다. 다른 일을 할까 하고 생각도 해보았다. 하지만 이 일이 나에게 어울렸고, 익숙해져 버려 새로이 다른 일을 한다는 게 결코 쉽게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 굶어죽는 거나, 들어가서 죽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뭔지도 확실히 모르는데.’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나는 작업용 도끼 한 자루와 미티어라이트를 들고서 집 밖으로 나왔다. 시간은 한창 정오였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나는 마음을 굳히고 성큼성큼 숲으로 걸어 들어갔다.
‘도대체가 숲이라고 할 수가 없군.’
그 날처럼 숲은 정적에 쌓여 있었다. 어느 정도 깊이 들어갔다 생각한 나는 눈치를 살피다가 작업용 도끼를 들고 나무 한그루에 찍기 시작했다. 어디 나타날 테면 나타나 보라는 심정으로 대 열번을 휘둘렀을까, 갑자기 위압감이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나왔다!’
무언가의 존재감을 느낀 나는 도끼질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가까이 오라-
어디 선가 웅웅 거리듯이 들려왔다. 그러나 같은 말이 였지만 전과 같이 충격을 받을 정도로 크진 않았다. 그 덕분에 조금 힘을 얻은 나는 소리를 지를 수 있었다.
“뭐야?!.도대체 뭐 하자는 거지?!”
내가 외친 소리는 사방의 나무에 부딪쳐 여러 개로 갈라 져 퍼졌다. 녀석의 소리와는 확연히 틀렸다.
-이곳으로-
-쿵!-
또다시 발 아래로 지진과 같은 진동이 울려왔다. 아무래도 자신의 위치를 알리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미치자 나는 이를 악 물었다.
‘그래. 어차피 각오하고 나온 거 어떤 녀석인지 맞부딪쳐 보는 거다.’
최대한 마음을 편하게 다스리며 소리와 진동을 따라 서서히 걸어갔다. 추측컨데 그리 멀지 않은 곳 이였으나 그 시간이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의지와는 상관없이 가슴은 더더욱 요동 쳤다.
이 부근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다다르니 어느새 진동은 멎었고, 의아함을 느낀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여기다.-
녀석의 말에 더더욱 주위를 살피던 나는 한곳에 시선이 머물러졌다. 처음에는 거대한 바위하고 생각했던 것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어떤 형체를 갖추고 있었다. 그 순간 바위의 한 부분에서 번쩍하고 빛이 뿜어져 나왔다. 나도 모르게 주춤거렸고, 미티어라이트를 든 손엔 힘이 바짝 들어갔다. 푸른색의 빛은 사방을 환하게 비추었고 황홀함과 불안감이 교차 하였다.
-수년간 지켜보았다. 그대는 주인으로써의 충분한 자격을 가지고 있다.-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혹시나 녀석의 공격에 대비하느라 정신이 없던 나는 그 말의 뜻을 생각해 보지도 않았다.
-나 티그라의 주인이 되겠는가?-
“뭐?”
난데없는 소리에 난 어안이 벙벙해 졌다. 갑자기 뭔 주인?
-그대가 존재하는 한 난 그대의 의사에 따라 움직이며 존재할 것이다. 나의 주인이 되겠는가?-
뭔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대체 왜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거지?”
-자격이 되는 자들은 누구든 내 주인이 될 수 있다. 나는 그렇게 만들어져 이곳에서 기다려왔다.-
어이가 없어진 나는 한동안을 생각에 잠겼다. 엄청난 몬스터라도 기다릴 줄 알고 왔지만 커다란 바위덩이 하나가 말을 거는 것도 모자라 나보고 주인이 되겠냐고?
“뭘 원하는 거지?”
어느 정도 생각이 진척된 나는 분명 뭔가를 요구할 꺼라 생각했다. 어쩌면 무언가 함정이라고 여겨지기도 했다.
-조건은 없다. 난 단지 어떠한 요구조건도 없이 주인의 명을 따르게끔 만들어 졌다.-
“그래? 그럼 최소한 내가 숲에서 나무 패는걸 방해는 하지 않겠군?.”
내심 어떠한 조건도 없이 내 말만 따른다는 녀석의 말에 안도 했다. 저게 뭔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일하는데 방해가 될 것 같아 보이지 않았고, 내 말을 들어준다는데 다행이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때까지도 의심과 불안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 였다.
-물론. 그럼 받아들이는 건가?-
뭔가 잘못될지도 몰랐지만 거절 했다간 또 다른 어떤 일들 당할지도 몰라 거절할 수 없었다.
“...좋다.”
-그대의 이름은 무엇인가?-
“무크. 무크 레이르챤”
순간 빛이 사라지고 눈앞의 거대한 바위가 꿈틀거렸다. 놀란 나는 재빨리 뒷걸음질을 쳤고, 바위는 크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것이 구르기라도 할 모양인가?!’
-쿠워어어어어!!!-
작은 잔해들과 먼지들을 날리며 갑자기 바위가 일어섰다. 빛이 나던 곳은 다름아닌 머리였고, 둥글게 보이던 전체는 사실 사람으로 치자면 팔다리를 모으고 웅크리고 있던 형상이 였던 것이다. 움직이면서 느껴지는 중량감은 나를 몇 발자국 물러서게 만들었다.
‘세상에! 저건…’
내 눈을 의심하기 시작했고 머리 속에 떠오르는 생각까지 의심했다.
서 있는 높이가 2미터는 훌쩍 넘어서 버린 저것의 정체는 바로...
“골렘!!!!”
골렘이었다. 입이 떡 벌어진 나는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바위덩어리라고 생각했던 나는 몸과 정신이 굳어지는걸 느꼈다.
2. 서툰 생활
“이름이 뭐라 했었지?”
-티그라-
녀석의 말에 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녀석과 숲을 함께 거닐고 있는 사실이 어색하기 그지 없었다. 살아있지 않은 무엇이 이렇게 스스로 움직이는 모습은 신비로웠다. 그 큰 덩치로 걸을 때 마다 땅이 울리진 않을지 생각했지만 어떤 방법인지는 모르겠으나 전혀 울림 없이 마치 사람이 사뿐히 걷는 것처럼 보였다. 앞을 가로막는 가지가 있을 때면 이리저리 피하는 모습은 나의 멍한 시선을 받기에 충분했다.
‘정말 이게 무슨 일인지. 이런 녀석이 붙다니.’
나는 마치 마법사가 된 것 같은 기분 이였다. 고위 마법사들은 골렘이라든지, 스켈레톤 같은 몬스터들을 불러내어 부리고 다니지 않던가.
아직도 어리둥절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어느덧 집 앞까지 도착하였다. 무심코 집안으로 들어가 버린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여태껏 졸졸 따라온 걸로 봐선 저 덩치로 집안까지 들어 올까 봐 해서 였다. 애써 지은 집 부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었기에. 그러나 녀석은 문 앞에서 가만히 서 있을 따름 이였다.
“설마 여길 들어올 생각을 하는 건 아니겠지?”
녀석은 대답 없이 가만히 서 있을 따름이었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본 나는 생각보다 녀석의 지능이 좋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들어오면 안 되겠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으니.
침대에 걸터 앉으며 나는 앞으로도 나무를 팰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좀 전에 긴장한 탓에 피곤함을 느꼈다.
‘에라. 기념이다. 다시 일을 할 수 있는 기념으로 오늘도 하루 쉬는 거다.’
그렇게 희한한 경험을 한 하루는 지나갔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 문 밖으로 나섰을 때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녀석이 어제 이후로 그때까지 그 자리에 계속 있었기 때문 이였다.
“아직까지 있었다니... 티그라라고 했지? 넌 쉬지 않고 그렇게 계속 있어도 괜찮은 거냐?”
-아무렇지 않다.-
간단한 그의 말에 피식 웃으며 티그라를 피해 지나쳤다. 그러자 티그라는 살짝 비켜섰고 난 녀석의 의식수준을 다시금 확인할 수 있었다. 간단히 세수와 식사를 한 나는 나무를 하러 갈 준비를 하다가 문득 티그라를 쳐다보았다.
‘도움이 될지도 모르겠는걸?’
“따라와라.”
녀석을 데리고 숲으로 들어간 나는 제법 굵직한 나무 앞에 섰다. 그리고 내 뒤에 서 있는 티그라에게 말했다.
“이 나무를 쓰러뜨려 보겠나?”
나의 말을 들은 티그라는 눈이라 생각되는 두 구멍에서 본적이 있는 푸른 빛을 잠시 강하게 내뿜더니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대로 다가가 그 덩치에서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속도로 주먹을 뻗었다.
-와지끈!!-
그러자 엄청난 소리와 함께 나무는 부러져 토막이 난 체 날아가 버렸다. 잠시 넋 놓고 바라보던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녀석을 쳐다보았다.
‘어마어마하군. 이런 힘을 가지고 있다니.’
골렘이 강하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정도일 줄은 생각도 못했었다. 그 커다란 덩치는 괜한 것이 아니 였다.
“이 걸로 이런 식으로 쳐서 쓰러뜨려.”
난 작업용 도끼를 다른 나무에 치며 녀석에게 얘기했다. 그리고 도끼를 건네주고 녀석이 하는 걸 지켜 보았다. 역시나 몇 번 내려치지 않아 나무는 허무하게 넘어가 버렸다. 이 숲에 나무는 대부분 그 둘레가 한 사람이 겨우 안을 정도로 컸다. 이런 나무를 도끼질로 패서 끌고 가는 나도 사람들 사이에서 괴물로 불리지만 난 녀석에겐 비교가 될 수 없었다. 들뜬 기대감으로 난 나무를 쓰러뜨리고 이리저리 손질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조금 뒤 하루 분의 일을 모두 마치고 유유히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이틀 후 평소보다 좀더 많은 양을 실은 수레를 바라보며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아무래도 좀더 크고 튼튼한 수레를 준비 해야 될 것 같다. 지금의 수레도 그 크기가 컸지만 앞으로 늘어날 목재량과 이동횟수를 생각해서 였다. 정말 목돈을 쉽게 만들 수 있는 기회였다. 티그라를 얻은 것이 행운 이였다. 불운했던 내 인생에 하브의 신께서 축복이라도 내리신 건가.
녀석에게 수레를 맡기고 나는 편안하게 허슬타니아 시내로 갈 수 있었다.
“이건 웬 괴물이야!”
난리였다. 목재장 일꾼들은 피하기 바빴고, 그나마 영감은 멍한 표정으로 내 뒤에 우람한 덩치로 떡 하니 서 있는 티그라를 쳐다보았다.
“어서 값이나 쳐 주십쇼.”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난 영감에게 돈을 요구했고, 영감은 아직도 티그라를 보고 있었다.
“저게 왜 네 수레를 끌고 온 거냐?”
“뭐...제 일꾼이라고 해두죠. 얼마나 주실거요?”
그제서야 영감은 수레를 한번 힐끔 보더니 다시금 시선을 멍하니 티그라에게 고정 시켰다.
“7펜다 쳐주지. 저거...골렘 아니냐?”
느릿느릿 돈주머니에서 돈을 꺼내는 영감에게서 빼앗다시피 7펜다를 챙긴 나는 뒤돌아섰다.
“보면 모르슈? 수레 잠시 놔두고 갑니다.”
목재장을 빠져나가던 나는 잠시 멈추고 한마디 더 던졌다.
“아. 이 녀석도 잠시 두고 갑니다.”
대답도 잊은 영감을 뒤로 한 체 시내로 곧장 향했고 집에서 가져온 돈과 오늘 받은 돈으로 난 이것 저것 구입하기 시작했다. 생활 필수품들을 먼저 사고 남은 돈들로 한동안 제대로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야채들과 육류 등의 음식 재료까지 챙기고, 마지막으로 옷 가게에 들렀다. 앞으로 직접 일을 할 경우가 거의 없어짐을 생각하여 보기 좋은 옷을 마련하기 위해서. 가게에서 나온 나는 조금은 색다른 기분을 느끼며 시내를 활보하였다. 예나 지금이나 북적대는 사람들로 활기차 보였다. 한땐 이런 분위기를 느껴보지 못하며 어두운 골목들을 힘들게 지나쳤었는데. 오늘따라 살아있는 밝은 느낌들을 느낄 수 있었다. 한쪽에선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는 고독해 보이는 버드도 보이고, 룰렛으로 작은 도박판을 벌이고 있는 도박꾼과. 맵시 있게 차려 입는 아가씨와 주절주절 말장난을 하는 남자가 함께 여유롭게 거닐고 있는 모습도 내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도시 전체가 밝게 보였다.
목재장에 도착한 나는 아직도 티그라를 둘러싸고 궁시렁거리고 있는 영감과 일꾼들을 볼 수 있었다.
“어이. 무크. 이 녀석 어디서 얻은 거냐?”
“굉장한걸. 남몰래 마법이라도 익히고 있었어?”
이런 저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영감은 어느덧 안정을 되찾았는지 빽빽거리기 시작했다.
“자식아. 빨리 이거 치워. 일하는 데 걸리적 거리게. 뭐해 이 사람들아. 얼른 일하지 않고! 어서.”
쉽게 자기자리로 돌아가지 않는 일꾼들에게 영감은 고래고래 소리 질렀고, 그제서야 사람들은 힐끔 거리며 뿔뿔이 흩어졌다.
“티그라. 수레 끌고 따라와라.”
나무같이 꿈쩍도 않고 서 있던 티그라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감탄소리가 들렸다.
집으로 되돌아 가는 길에 궁금한 것이 생긴 나는 티르라를 향해 말했다.
“혹시 필요한건 있지 않나? 사람으로 치자면 물이라던가, 아님 먹는 거 라던지.”
-없다.-
“그럼 어떻게 계속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충분한 마나를 공급해 주는 기관이 있다.-
“흠... 그런 게 있었군. 얼마나 갈수 있지?”
-모른다.-
지금 당장이라도 사라질 수 있다는 소리군.
“누가 널 만든 거지?”
-모른다.-
‘어떤 이가 이런 녀석을 만든 거지? 왜 만들었을까?’
여러 가지 의문이 계속 떠올랐으나 천천히 알아보기로 생각한 난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당장 사라져 주지만 않으면 고맙지.
일주일 후, 나는 시에서 제법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티그라를 데리고 목재장 뿐만이 아니라 시내를 활보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을 모두 받았다. 골렘이란 쉽게 볼 수 없었기에 마법에 대해 익히 알고 있는 이곳 사람들도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모두들 아마 의아해 했을 거다. 녀석을 데리고 다니는 나를 높은 수준의 마법사로 생각 했을 테지만 젊은 나이에 탄탄한 몸을 가져 아무리 봐도 전사,워리어(Warrior)로 보였을 테니깐. 나를 알고 있는 장사치들 이나 일꾼들도 놀라긴 마찬가지 였다.
그러던 어느날 티그라와 함께 나무를 패고 돌아온 집 앞에는 낯선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은빛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친 기사 십 여명과 짙은 붉은색 고급 망토를 두른 중년의 남자 였다. 시원스레 빗어 넘긴 머리와 약간은 고집스러운 외모의 중년 남자는 한눈에 보아도 귀족으로 보였으며 상당한 관직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기사들은 하나같이 강한 위압감을 담은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자네가 무크 레이르챤 인가?”
중년의 남자는 나와 내 뒤에 서 있는 티그라를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맞습니다만.”
“난 국정 인사관 인사부단장 멜시 세르챤 백작이라고 하네. 반갑네. 자네에게 용건이 있어서 말이야.”
인사관? 인재 등용과 파직, 행적 기록에 관한 곳 말인가? 기본적인 교육 수준이 높은 베라모스왕국민답게 난 그곳이 어떤 곳인지 쉽게 알아 챌 수 있었다. 가벼운 목례를 한 나는 집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유하였다.
“험. 아늑하고 편안하구만 그래.”
투박한 나무 의자에 앉으며 별로 좋지 않은 인상과는 달리 나오는 세르챤 백작의 말이 였다.
“다름이 아니라, 국정에선 오래 전부터 착수 해 오던 중대시행이 있다네. 다름이 아닌 개국 대공신 파몽스 커틀렛의 유물을 찾는 것. 그분이 남기신 사적, 연구적 자료들을 토대로 그 위치가 동부 지역임을 알 수 있었고, 이 일대 조사 및 주의 관찰을 하였다네.”
대 마법사 파몽스 커틀렛이라. 뜬금 없는 이야기가 나오자 나는 의아해졌다.
“그게 저를 찾아 오신 이유와... 상관이 있습니까?”
세르챤 백작은 문밖으로 보이는 티그라를 잠시 쳐다본 후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물론. 그 유물이라는 것이 바로 골렘 왕 이거든.”
뭔가 감이 잡힌 나는 혹시나 했다.
“설마,”
“확인 작업이 필요하지.”
그러자 세르챤 백작은 티그라를 만났을 때 전후사정을 듣길 요구하였고, 난 석연치 않은 기분으로 얘기를 풀었다. 그가 몇 가지 사항들을 물었고, 계속해서 그의 질문에 대답을 해 주었다. 시간이 조금 지난 후 백작은 확신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난 약간의 허탈감을 느꼈다.
“티그라가 골렘 왕, 그것도 파몽스 커틀렛의 유물이었다니...”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나를 주인으로 선택한 것과 무한정 움직이는 녀석의 능력이 의심스럽기는 했지만 이런 녀석일 줄은 생각도 못했다.
가벼운 한숨을 쉬는 나의 모습을 본 세르챤 백작은 피식 웃었다.
“자네 것이지. 파몽스 커틀렛은 단지 만들었을 뿐.”
“그럼 이제 저 녀석을 가지고 가실 겁니까?”
백작은 깍지를 끼고 한쪽 무릎을 감싸며 잠시 여유를 두었다.
“그건 우리에게 달린 것이 아니라네. 골렘 왕 티그라는 한번 정한 주인을 버리지 않거든. 그리고 주인이 사라지는 순간, 같이 사라진다네. 국정에선 골렘을 찾은 것과 다행히 우리 백성이 주인이라는 사실에 많이 기뻐할 것 일세”
“...그럼?”
“골렘 왕의 존재가 확인 된 만큼, 자네에게 귀족의 신분이 내려지며 관직 자리도 내려질 걸세. 아마 최소한 백작 자리는 꿰찰 수 있을 꺼야. 그 만큼 저 고렘의 존재는 국가적으로 큰 의미를 주지. 잘만 사용하면 한 왕국을 몰락시키는 정도는 거뜬히 해 낼 수 있을 정도. 자네가 나라의 의지에 따라 잘 다뤄줘야 할걸세.”
“허.’
놀란 나는 감탄을 하였다. 티그라가 그렇게 대단한 존재였다니. 물론 같이 일을 하며 녀석에게 많이 놀라긴 했었지만.
“백작의 자리야. 평민인 자네에겐 어마어마한 기회지. 그리고 국가적 입장에서도 아주 중대한 문제일세. 만약 거절이라도 한다면 반역으로도 치부할 수 있어. 그럴 리는 없겠지만 텔론 왕국으로 넘어가 버린다면 아주 심각한 문제거든.”
은근히 압박을 가하는 세르챤 백작의 말에 기분이 나빠진 나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시간이 필요할 것 같군요.”
“뭐. 큰 행운에 대한 준비기간으로 생각하지.”
집을 나서는 백작은 마지막 말도 잊지 않았다.
“행여나 어딘 가로 갈 생각은 말게나. 보는 눈이 많을 거야.”
기사들과 말에 올라 저 멀리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난 기분 나쁜 표정을 숨기지 않은 체 인사는커녕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골렘 왕이 어째? 백작자리를 꿰어 차? 반역? 웃기는 군. 나는 아무것도 아닌 허수아비로 얘길 하더니, 수가 틀어지면 반역자라고?’
갑작스런 큰 선택의 짐을 지어진 나는 기분이 괴이했다.
문득 티그라를 바라 보았다. 아직도 동상처럼 굳게 서 있는 녀석이 새로이 보였다. 골렘의 왕. 한 왕국을 쓸어버릴 만큼 힘을 가진 존재. 저런 녀석을 나무 패는 일에나 쓰고 있었다니. 나 아닌 다른 비범한 인물을 만났다면 역사의 한 페이지를 멋지게 장식하였을 텐데.
“어째서 나를 선택한 거지?”
-자격이 충분한 이는 누구든 가능하다-
“내게 무슨 자격이 있지?”
-세상을 움직일 힘-
어이가 없어 헛바람이 나왔다.
“푸훗. 내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단지 힘이 있는 자 만이 날 움직일 수 있다.-
사람들이 있는 곳을 피해 이렇게 변두리에서 나무나 끌고 다니는 내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움직일 힘이 있다고? 가진 것도 없고 천대만 받고 살던 내가? 어느 누군들 이 소릴 들으면 저 골렘이 300년 넘게 꼼짝도 않고 쳐 박혀 있더니 결국 망가졌다는 소리를 하지 않겠는가. 정작 본인인 나도 그리 생각이 드는데. 더 심한 야유와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그나마 내 인생에 한번 오게 된 축복이라 생각되던 티그라의 존재가 나를 더욱더 구렁텅이로 밀어 넣는 것이 아닌가. 머리 속이 혼란스러워진 나는 고개를 세차게 흔들었다. 어찌할 바를 몰랐다. 내가 이런 상황을 고민을 해야 되는 것이 어색하고 우습기도 했다.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다.
“맘에 안 들어.”
저녁을 먹고 램프가 켜진 은은한 방의 침대에 누워 혼자서 중얼거렸다. 정말 맘에 들지 않았다.
‘백작이라고?’
보통 사람들 같으면 앞으로 펼쳐지게 될 화려한 자리를 어마어마한 복이 굴러들어 온 걸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난 아니다. 도리어 은근히 기분이 나빠졌다. 이제껏 고생을 해오며 좋은 부모, 좋은 환경을 물려 받아 아무런 걱정 없이 편하게 살아가는 녀석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게 바로 나였다. 그런 데 내가 그런 부류가 되라고? 과거에 서러웠던 나는 도대체 무엇이 된단 말인가? 견디어내어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온 것에 대해 나름대로는 자부심 가지고 있었다. 그런 내 노력들을 비웃듯이 우연하게 얻은 티그라로 인해 부귀와 영화를 누린다고?
‘망할 놈의 세상.’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반역이라면 남는 건 죽음 뿐이다. 그게 아니라고 우겨봐야 나 같은 놈 사정 봐 줄 리도 없다. 이 더러운 세상, 까짓 정말 반역이라도 일으켜볼까도 했다. 하지만 난 그런 무게를 짊어질 힘도, 대담성도 없다. 티그라도 정말 그럴 힘이 있는지 확신이 없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내가 피해자일 수 밖에 없는 결과에 기분이 무척 망가진 나는, 사 두었던 술병을 들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걱정 하게 될지 모르는 나날들에 지금 잠시라도 잊고 싶었다.
‘정말 꼬인 인생이구나.’
막 술병을 입에 물었을 때 들려오는 소리로 하마터면 병을 놓칠뻔했다.
“안녕하십니까?”
뒤를 돌아보니 낯선 사람들이 서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튕기듯이 그들에게서 멀어졌다. 바닥에 뒹구는 술병으로 인해 술은 바닥에 엎질러 졌다.
‘뭐야. 이 사람들.도대체 언제 들어온 거지?’
검은 로브를 입은 다섯의 남자들은 하나같이 검을 차고 있었다.
“누구요?”
설마 세르챤 백작이 벌써 답변을 요구하는 것인가? 입구에 서 있던 녀석들은 나를 의식해서 입구를 막아 서기 시작했다. 서서히 긴장감을 느끼는 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왔다.
“긴장하지 마시오. 단지 얘기를 나누려는 것 뿐이외다.”
특이한 억양으로 말을 하는 남자로 인해 나는 더더욱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우린 텔론 왕국에서 왔소. 우선 내 소개부터 하지. 난 ‘알렙’ 이라 하오. “
적국 텔론 왕국 사람 이였다. 그렇다면 옷차림과 성이 없는 이름으로 봤을 때 이들은 최고의 기사들이라는 ‘검은 로브의 기사’!
비록 우리 왕국의 ‘4국왕 기사단 전투무관’에겐 한 수 아래로 평가 받지만 그들의 실력은 대단한 수준이다. 또한 귀족들만 성을 쓸 수 있는 그네들의 법에 따라 그 아래, 수도자의 계급인 기사들은 성이 없다.
“다름이 아니라 우리 왕국에선 그대에게 최고의 영광을 주려 하오.”
“티그라 때문인가?”
“이미 이 나라에서 다녀간 게군.”
알렙이란 자는 잠시 인상을 찌푸렸다.
“알고 있는지 모르지만 텔론 왕국에선 영주라 함은 국왕 다음가는 직책이오. 한 도시를 책임지는 것은 같으나 직책과 계급에 따라 힘이 달라지는 이곳과는 다르지. 영주가 됨은 무조건 국왕다음 가는 직책이요.”
베라모스에선 후작이라 할 지라도 직책이 없으면 한 도시의 백작 신분의 영주보다 영향력이 낮을 수도 있고, 백작 영주는 자작의 신분의 시중보다 영향력이 낮을 수 있다. 따라서 직책에 따라 혹은 계급에 따라 함부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텔론에선 직책이 곧 계급이 되므로 영주의 계급은 베라모스의 백작이란 게급보다 더 큼을 의미한다. 그리고 베라모스에 텔론의 첩자가 있다는 사실도 거짓이 아니 였다. 티그라의 소식을 듣고 이렇게 내 앞에 나타난 것을 보면 말이다.
“만약 거절을 한다면 날 죽일 텐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소.”
베라모스국정 과는 달리 이들은 납치라도 해서 어떻게 든 이용해 먹을 생각 이였다. 서로 적대적인 두 국가 사이에 텔론은 베라모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이기에.
“어디 한번 지켜보지.”
나는 말을 끝내자 마자 한 켠에 놓여져 있는 미티어라이트로 몸을 날렸다. 차가운 감촉의 손잡이가 잡히자 난 몸을 굴려 급히 일어섰고, 나에게로 달려드는 그들을 볼 수 있었다.
“생포하라!!”
알렙은 나를 향해 튀어가는 네 명의 기사들에게 소리쳤고 그와 동시에 문이 박살 나는 소리와 함께 또 다른 기사들이 들이 닥쳤다. 은빛 풀 플레이트메일의 우리 왕국 기사였다.
-쿠워어어어어어어어-
티그라의 울음소리도 들렸다. 순식간에 상황이 틀어지자 검은 로브의 기사들은 당황했고, 베라모스 기사들은 그 틈을 타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세르챤 백작은 돌아갔지만 기사들의 일부는 숨어서 내 동태를 살피고 있었던 것이다.
-콰쾅-
밖에 있던 티그라가 한쪽 편의 벽을 부수고 들어왔다. 집 전체가 흔들리며 튀는 파편들로 인해 모두들 주춤거렸고, 서로 맞붙어 싸우던 양쪽 기사들을 향해 녀석은 어마어마한 힘의 팔을 휘둘렀다. 한번에 세 명의 기사들이 날아가 벽에 쳐 박혀 늘어져 버렸다. 서로 싸우던 기사들은 급히 무언의 휴전을 한 체 티그라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도저히 상대가 되질 않았다. 단 두 번 티그라의 주먹질로 남아 있던 대 여섯 명의 기사들은 우르르 쓰러지기 바빴다. 모두들 하나같이 벽으로 날아가 널 부러져 버리자 집안은 온통 난장판이 되었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어졌다. 텔론 기사들은 물론 베라모스 기사들도 모두 쓰러졌다. 양쪽 모두에게 거절한 셈이다. 텔론은 몰라도 베라모스에선 이제 나를 죽이려 들것이다. 티그라가 제멋대로 공격했다고 말해봐야 충분히 멈출 수 있었던 난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서둘러 짐을 싸서 집을 나섰다. 혼란스러운 내 처지와 앞날들이 머리를 지끈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이젠 어찌해야 하는 거지? 반역자로써 온 나라에 내 몽타주가 붙여지고, 호시탐탐 노리게 될지 모르는 텔론 기사들. 어느 곳에도 속하고 싶지 않다. 어떠한 것도 티그라와 연관되어 하고 싶지 않다. 혼란스러운 탓에 뛰는 둥 마는 둥 하며 갈 곳을 생각해 보았다. 메릭트 연합국가로 숨어 들어 갈까? 아님 멀고도 먼 사르벵커 제국으로? 어디로든 갈수가 없다. 티그라가 나를 따라다니는 한. 여느 때와 다름없이 뒤따라 오는 티그라를 향해 나는 속도를 늦춰 걸으며 물었다.
“계약을 파기 할 수는 없는 거냐?”
-없다.-
“제길. 도대체 널 왜 만든 거야. 파옹스란 작자는!”
이런 엄청난 혹을 붙여준 그를 향해 불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고, 왜 그들을 쓰러뜨린 거지?”
-주인을 보호하는 것도 의무 중 하나다.-
납치하려는 검은 로브의 기사와 여차하면 나를 제거 할 생각이었던 베라모스국 기사들이 티그라에겐 나를 위협하는 존재들로 느껴졌던 것이다.
한참을 방향도 모른 체 달리던 나는 갑자기 한곳이 떠 올랐다.
‘아!. 니벨랴!’
-니벨랴-
메릭트 연합국가와 베라모스사이에 위치한 어느 국가에도 속해있지 않은 작은 도시이다.베라모스의 전설적 기사 케르반 커뮤와 레넷 지루자의 이야기가 숨쉬는 그곳. 그리고 골렘의 태생지. 그곳이라면 괜찮을 것도 같았다. 많은 골렘들이 거리를 활보하는 곳. 티그라를 데리고 다니더라도 이상하게 보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녀석과의 계약 또한 파기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곳만큼 골렘에 대해 아는 곳도 없을 테니깐.
‘그래. 북서쪽. 니벨랴로 가는 거다.’
갑작스런 상황들에 내가 과연 도망을 쳐야 하는 것이 맞는 건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지만 떠오르는 생각은 그것 뿐 이였다.
어두운 초원을 달빛을 받아 걸으며 난 북서쪽으로 나아갔다.
3.NO WANTED
‘젠장할’
지치고 배고픔에 시달린 나는 속에서 욕지거리가 절로 나왔다. 장작 9일째 강행군을 하고 있지만 도무지 도시가 나오질 않았다.
고향인 허슬타니아에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멤버리첸 이란 시가 나온다고 알고 있던 나는 우선 그곳으로 향했다. 멀기도 하고 도중에 작은 마을조차 없다는 것도 알고서 낮 종일 뜨거운 태양아래 걷고, 또 걸었지만 이정도로 멀 줄은 생각 못했다. 집에서 들고 나온 건조 식량과 운 좋게 얻은 와이번 고기는 아껴서 먹었지만 바닥이 나 버렸고, 물도 마찬가지였다. 허슬타니아에서 한번도 벗어나 본 적이 없었기에 지도도 없었고, 가는 길 내내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도 더욱 커졌다. 이러다가 털썩 쓰러져 버리면 어쩌나 싶었다. 그러던 중 난 마치 지금 막 소풍 나온 듯 경쾌하게 걷고 있는 티그라를 바라보았고, 머리가 어지러움을 느꼈다. 바보같이 티그라에 올라타면 되는 걸 이제서야 떠올렸던 것이다.
이마를 강하게 손바닥으로 친 나는 티그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조용히 손가락을 녀석에게 보이며 아래로 내렸다. 그러자 무슨 뜻인지 알아 챘는지 티그라는 무릎을 굽혀 자세를 낮추었다. 녀석의 어깨에 올라탄 나는 손등으로 이마를 훔쳤다.
“티그라. 흔들리지 않게 갈 수 있겠지? 가던 방향으로 최대한 속도로 가보자.”
내 말이 끝나자 티그라는 서서히 일어섰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몇 걸음 가지 않아 갑자기 티그라는 달리기 시작했고 몸의 무게주심이 뒤로 쏠렸다. 굉장한 속도에 놀란 나는 행여나 떨어지진 않을까 녀석의 머리를 꽉 안았지만 이내 소용없는 짓임을 알게 되었다. 티그라는 상체는 전혀 흔들지 않은 체 자세를 낮춰 다리만을 열심히 놀리고 있었다. 사람이었다면 그리 오래 가지 못해 힘이 많이 들 주법 이였다. 바람에 머리카락이 휘날릴 정도로 달리는 녀석의 어깨에 앉은 나는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빠르게 사라져 가는 주변의 풍경을 여유롭게 바라보았다.
‘정말 대단한 녀석이군.’
또 다시 감탄한 난 티그라의 머리를 손바닥으로 몇 대 쳐주었다. 도대체 이 녀석의 힘은 어떻게 계속해서 나오는지 궁금했다.
아마 눈동자의 숲이 였을 거다. 허슬타니아의 서쪽에 위치한 눈동자의 숲은 위험한 몬스터들로 유명한 곳이다. 숲에 들어간 자들은 자신을 위협하는 수 많은 눈동자들에 머리칼이 쭈삣 서 버린다는 얘기로 눈동자의 숲이 이름이 되어 버린 그곳에는, 밝혀진 몬스터들로는 트롤부터 시작해서 오우거, 하피, 고블린들과 심지어 그리폰들도 서식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과연 헛소문이 아니 였다. 3일째 되던 날 그 숲의 근처를 지나가던 난 우리를 향해 덤벼드는 오우거 세 마리를 볼 수 있었다. 사 오 미터는 됨직한 덩치와 흉한 얼굴로 사람 덩치만한 메이스를 쳐들고 오는 녀석들을 보며 기가 질려버린 나와는 달리 티그라는 그 어마어마한 주먹을 휘둘렀고, 오우거마저도 그런 티그라에겐 어쩔 수 없었다. 허리까지 밖에 오지 않는 골렘에게 한방만으로 나가 떨어지는 오우거의 모습은 정말이지 장관 이였다. 쓰러진 오우거들을 멍하니 지켜 만 보고 있을 수 없던 나는 목을 향해 미티어라이트를 휘둘렀고, 잘려진 녀석들의 목에선 분수 같이 피가 뿜어져 나왔다. 나무 둘레 정도의 목이였지만 힘이라면 자신 있었던 터라 목은 나가 떨어 졌다. 크디 큰 미티어라이트도 한 몫을 한 셈이지만.
진한 피 냄새가 진동할 무렵 하마터면 간이 떨어질 뻔했다. 오우거에 이어 갑자기 숲에서 날아든 큰 그림자는 발이 땅에 붙게 만들었다.
‘맙소사.’
저런 것까지 있을 줄은 생각도 못했다. 오우거의 피 냄새를 맡아 녀석까지 온 것이다.
-키아아아아아-
찢어지는 듯한 높은 톤의 울음소리를 뿌리며 육중한 몸매로 무게감을 여실히 드러내 공중을 천천히 선회하는 것은 와이번 이였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이 소리를 내며 삼켜졌었다.
땅에서 바라보는 것과는 틀리 그 속도는 엄청났다. 어느새 지면에 가까이 내려와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와이번을 정면에서 바라보던 나는 그 위압감에 날아갈 것 만 같았다. 최대한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녀석의 입이나 발톱을 어떻게 든 피할 생각을 하던 내 앞에 티그라가 막아 섰다. 그리고 녀석은 와이번을 향해 달려갔다. 티그라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아무리 녀석이라 해도 와이번의 공격에 산산이 부서져 나갈 것만 같았다. 크기에서 너무나 압도적인 차이 였다. 그 만큼 힘에서도 차이가 많이 날 거라 생각했다. 막 와이번의 머리가 그대로 티그라에게 쏜살같이 다가왔다. 녀석은 그대로 밀어버릴 생각 이였다. 그럴 만도 하지. 일반 골렘 이였다면 쉽게 부서져 나갔을 테니깐. 그렇게 다가온 와이번의 머리를 향해 달려가던 티그라는 도저히 그 덩치에서는 나올 수 없는 속도로 옆으로 슬쩍 방향을 틀었다. 속도 탓에 그냥 비켜지나 가려는 찰나 티그라는 다시 와이번에게 다가가 길고 유연한 녀석의 목을 후려쳤다. 그러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장면이 연출 되었다. 와이번의 목이 휘며 날아가던 방향이 크게 꺾여 버렸고 엄청난 진동과 굉음을 내며 내 옆을 지나 땅에 곤두박질 했다. 놀란 나는 가만히 서 있을 수 밖에 없었다. 뿌연 먼지가 수십 미터 높이 까지 날리고 숨을 막히게 하였다. 먼지사이를 바라보며 행여나 다시 일어설 까봐 내심 긴장을 했었지만 녀석은 일어나지 않았다. 서서히 가라앉는 먼지 넘어 한쪽 날개는 땅에 부딪치며 찢어져 있었고, 혀는 길게 내뺀 체 볼품없이...죽어있었다.
“허...허...허허”
멍하게 웃고 있는 나에게 티그라는 벌써 다가와 예의 그 자세로 서 있었다.
“도대체 네 녀석은...”
티그라를 바라보며 녀석에게 중얼거렸다. 아무리 골렘왕 이라지만 이건...완전히 괴물이지 않는가.
한참을 감탄하던 나는 와이번에게 다가갔다. 정말이지 가까이 다가가니 그 크기가 대단했다. 비록 드래곤에게는 비할 바가 못 돼지만 삼 사십 미터는 족히 되는 녀석의 몸집에 나는 다시금 티그라에게 감탄했다.
“정말 질기구만.”
와이번의 가죽을 벗기면서 중얼거렸다. 어찌나 질긴지 이 큰 미티어라이트와 내 힘으로도 한동안 씨름 한 끝에 겨우겨우 벗길 수 있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앞날에 이렇게 돈이 되는 것들을 놓칠 수는 없었다. 와이번의 가죽은 금속갑옷 보다 휠씬 가벼우면서도 그에 못지않은 강도를 가져서 비싼값에 팔 수 있으니. 모포크기 정도를 떼어낸 난 고기도 조금 챙기기 시작하였다. 질겼지만 이것도 얼마나 길지 모르는 여행 길에 필요할 것 같아서 였다. 하지만 결국 그리 오래 가진 못했다. 날씨 탓에 태반이 상해버렸기 때문 이였다.
멀리 서서히 도시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거의 일주일이 지나서야 도시를 본 나는 반가움과 처음으로 다른 도시를 방문하는 설레임에 들떴다. 과연 밖에서 보이는 것 만으로도 듣던 대로 허슬타니아보다 큰 도시였다. 교통의 요지이며 상업의 도시. 남부의 해상 무역도시 무슬베니아의 교역품들이 수도 뷰르크 및 게루쉬, 쥬넌, 게포르탄으로 수송되기 위해 거치는 관문 도시. 그만큼 많고 진귀한 물품들이 뿌려지기도 한다. 교역자들을 위한 숙박시설과 시장이 발달해 있고 제법 규모가 크다. 또한 고향과는 달리 엘프들도 간간이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고.
허슬타니아에선 엘프들을 보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게포르탄, 차와돈과는 가까워 드워프들은 종종 볼 수 있지만.
멀리서 모험가 무리들과 행상인 마차가 이리로 오는 모습이 보였다. 아마도 허슬타니아가 포함된 동부로 향하는 거겠지. 일반 행로와는 다른 길로 왔던 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도착한건 다행인 셈 이였다. 시간이 다소 더 걸리긴 했지만.
난 행로에서 제법 떨어진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잠시 멈추었다. 내 목에 현상금이라도 걸려 있을지 모르는 상황. 아무래도 녀석과 같이 시에 들어선다는 건 위험할 테니. 혼자서 조용히 상황을 살핀 후 필요한 것들을 구하고 도시를 비켜 지나갈 생각 이였다. 티그라에게 여기서 꼼짝 말고 마치 바위처럼 있으란 말에 녀석은 처음 나와 만났을 때처럼 웅크리고 앉았다. 그냥 큰 바위로 착각 되게 끔 보였다.
그리고 난 눈치를 보며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들은 아무런 관심 없이 지나쳐 갔다.
도착한 도시의 입구초소에는 여러 명의 경비병들이 서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맘에 되도록 천천히 다가서며 녀석들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런 재제도 가하지 않고 지나가도록 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 다녔기에 그런가 하고 생각하고 더욱 조심하기 위해 되도록 고개를 숙이고 걸었다. 아무래도 후드라도 쓰고 다녀야 겠다.
가끔씩 고개를 들어 보이는 도시는 고향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활기 차 보였고 곁눈질로 보이는 장물들은 너무나도 신기 했다. 커다랗고 뾰족한 머리의 어류와 산호초라 불리는 신기한 장식품들, 많은 수공예품들과 특이한 복장의 사람들.
더욱이 이곳은 검을 찬 사람들이 많았다. 마법의 도시인 허슬타니아에선 로브를 걸친 마법사들이 즐비한 데에 비해 이곳에선 검사들이 많이 보였다. 모험가들이 많아서 활을 맨 아쳐와 워리어도 제법 보였다. 높은 건물들도 즐비했고, 펍 들은 어찌나 많은지. 거리는 온통 상인들의 외침소리와 웃음소리, 노랫소리들로 시끌시끌했다.
“이봐. 청년. 당신 무기 손질 좀 해야 되지 않아? 평소에 관리가 중요하다고. 싸게 줄 테니 맡겨봐.”
억지로 붙잡으며 끌어당기는 대장간 남자의 팔을 뿌리치고, 좋은 약들 많다는 도구점 가게 여인네의 팔도 뿌리치고, 용병일 하면 잘하겠다는 용병길드의 부름도 뿌리치고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 문득 한 펍의 벽면에 붙어 있는 현상 수배자들의 전단을 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나에 관한 것은 붙어 있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난 제법 커 보이는 무기점에 들어갔다.
“어서 오게나.”
입구를 들어서자 마자 양쪽으로 어머 어마한 양의 무기들이 놓여져 있어 나는 깜짝 놀랬다. 고향의 무기점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 였다.
“무엇이 필요한가? 우리가게는 무기도 손질 해 준다네.”
내가 가지고 있는 미티어라이트를 보고 한 소리였다. 중앙의 카운터를 바라보니 땅땅한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한 드워프 노인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레더후드 있소?”
“후드? 특이한 걸 찾구먼. 잠시 기다리게나.”
노인은 한 켠에 다가가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난 이리저리 우기들을 둘러보았다. 실용성과 멋 등을 고려한 다양한 형태와 크기들의 무기들은 구입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해주기 충분했다.
“여기 있네. 좀더 둘러 보겠나?”
“그러죠.”
이리저리 둘러보는 나에게 노인은 내 미티어라이트에 관심을 보였다.
“호오. 그 엑셀 잠시만 보여주겠나? 그거 보통이 아닌 거 같은데.”
난 미심쩍은 눈길로 노인을 쳐다보았다.
“엉뚱한 생각마쇼.”
“이런 가게를 가지고 있는 내가 뭐가 모자라서 자네 것을 어찌하겠나? 껄껄껄”
노인은 호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난 말없이 건네주었다.
“역시 마법이 걸린 거구만.”
한참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노인이 아직도 시선을 미티어라이트에게서 떼지 못한 체 말했다.
“마법?”
“몰랐는가?”
노인은 의심스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고, 난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다.
“자그마치 금화 두개, 2 그라 주고 산 거요. 팔던 주인장이 그런 얘기를 안 하길래 몰랐소.”
“그냥 엑셀을 2그라나 줬다고? 애송이로세. 허허허.”
“왠지 맘에 들어서 산 거요. 비웃지 마쇼.”
“허허. 그래도 보는 눈은 있었던 게군. 이게 2그라 라면 싸게 산거야.”
무기점 주인도 나와 마찬가지로 잘 모른 체 바가지 씌워 팔았던 것이 알고 보니 마법이 걸린 것 이였다.
“무슨 마법이 걸린 거요?”
“마법에 대한 내성이 걸려있어. 실드 마법도 있고.”
그랬던가? 처음 미티어라이트를 보았을 때 다른 것과는 틀린 감이 있어 비싸도 무모하게 샀었는데, 저런 것 들도 걸려 있다니.
“실드 마법은 어떻게 사용하는 겁니까?”
“그냥 ‘실드’라고 시동어만 외쳐주면 되네. 물론 자네 마나가 소모되고.”
그러자 노인의 주변으로 푸른 막이 형성되었다. 신기한 듯한 내 눈길을 노인은 재밌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중지’라고 말하면 이렇게 사라지지.”
서서히 실드가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본 나는 기분이 좋아졌다.
뜻밖의 수확 이였다. 마법이 걸린 무기들이 흔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못 받아도 6그라는 받을 걸세. 아마 그걸 팔았던 전 주인이 몰랐던가 본데, 알게 되면 땅을 치고 후회 할 걸세.하하하. 드워프인 내 눈은 못 속이지.”
역시나 드워프들은 타고난 재주와 눈을 가졌다. 특히나 이런 금속 물질인 무기들에 관해서는 탁월하지.
정말 대단한 걸 건진 나는 이 드워프 영감에게 고마워 졌다. 맘만 먹으면 속여서 사들일 수도 있었지만 그는 도리어 나에게 몰랐던 것을 모두 가르쳐 주었으니.
“고맙소. 정말 정의와 신의의 드워프군요.”
“하하하. 당연한 소리 아닌가?허허”
레더후드를 계산하려 했으나 노인은 돈을 받지 않았다.
“까짓거 얼마하지 않으니 거저 줌세. 나도 오늘 좋은 거 구경했으니 구경 값이라 생각하게.”
후드를 쓰며 가게를 나선 나는 고마움에 훗날을 기약하였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꼭 한번 들리겠노라고.
어느덧 해가 저물어져 가는 것을 확인한 난 후드를 깊게 눌러 쓴 체 시의 입구 초소를 빠져 나와 서둘러 티그라가 있는 곳으로 향하였다. 와이번의 가죽을 팔아 거금을 손에 넣은 나는 좀더 큰 배낭을 구하여 식량들과 필수품들을 넉넉히 준비 할 수 있었다. 와이번의 가죽은 대게 갑옷에 사용되는데 희귀성과 그 가치로 인해 상당한 고가이다. 거기다 큰 맘 먹고 도구점에서 힐링 포션까지 한 개 사 보았다. 1그라 씩이나 하는 비싼 값이 였지만 들은 바에 의하면 가격만큼 효과가 뛰어 나다 했으니 아쉬울 건 없었다. 손가락 길이 만한 투명한 병안에 붉은 색의 선명한 액체가 담겨 있는데 보편적으로 널리 알려 진 것처럼 트롤의 피를 가공하여 만든 것이다. 재생력이 무척 뛰어난 트롤의 힘을 이용한 만큼 상처를 회복하는 효과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고.
아직도 그 자리에 꼼짝도 하지 않는 티그라에게 다가가 주위를 확인한 후 불을 지피기 시작했다. 배가 많이 고팠었지만 시를 돌아다니며 잠시 허기짐이 사라진 터라 그리 바쁘지 않게 끼니를 준비했다. 마을에서 구했던 물과 술병을 꺼내 놓고 베이컨도 굽기 시작했다. 치즈를 살짝 얹은 베이컨이 고소한 냄새를 풍기며 입맛을 자극하자 맥주가 든 술병을 들었다. 목구멍을 쏘며 맥주가 넘어가자 갈증이 해소 되었고 대충 익은 베이컨을 입안에 넣었다.
“형씨. 혼자요?”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입안에 든걸 씹는 것도 멈춘 체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싱글벙글 웃는 모습이 인상적인 그는 경계하는 날 의식하였다.
“아~~ 다름이 아니라 불 좀 같이 쓸까 해서. 너무 그리 이상하게 생각 마오.”
넉살 좇게 남자는 불 가까이 다가와 자리를 잡았다.
서서히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고 달아올랐던 대지와 공기는 점차 식어갔다. 뻔치 좋게 나에게서 음식까지 얻게 된 남자는 한 가득 입에 넣은 체로 우물거렸다.
“음. 밖에서 먹는 것 치곤 제법이구만. 형씨 제법 밖으로 돌았나 보군.”
혼자 살게 되면서 요리솜씨가 자연히 늘게 된 것 뿐 이였지만 남자는 날 좀 굴러먹은 모험가로 생각한 모양이다.
“난 시르실 게헤프라 하오. 형씨 이름은?”
어찌나 입에 꾸역꾸역 넣었는지 발음이 불분명한 말로 시르실은 말했다. 이름을 밝히기가 꺼름직 했지만 도리어 의심을 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크 레이르챤”
“아. 그러쇼? 이거 참 신세지게 되어서 미안수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시르실이란 사내는 사람 좋게 보이는 특이한 미소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의 미소는 마치 고양이 표정과 같았다.
“북서쪽.”
그가 내게 손을 내민 이유는 내 손에 들린 술병이 목표였다. 나에게서 건내 받은 술병을 입을 물고 들이키더니 입가를 닦았다.
“뭣하러 가는 거요? 혹시 야성의 평야에 버려진 던전 이라도 찾는 게요?”
“뭐...그렇다고도.”
대답하기가 까다롭던 나는 그의 말에 수긍해 버렸다.
“헛. 잘되었구만. 나도 그 길로 가는데. 같이 동행 하지 않겠소? 혼자 가는 것보단 아무래도 나을 텐데.”
“난 혼자가 좋소”
딱 잘라 말하는 나의 말에 시르실은 잠시 말이 없었다. 뭐 하는 작자인지도 모르는 사람과 쫓기는 내가 같이 동행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너무 하는 것 아니오? 혼자 가기 심심하기도 하고 같이 가면 서로 도움이 많이 될 건데. 꼭 쫓기는 사람처럼 말야.”
내심 불안해진 난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이 남자도 그렇고 이렇게 점점 사람들에게 노출이 되다 보면 꼬리를 밟힐 것 같아서 였다. 하지만 시르실은 자신의 말에 기분이 상한 걸로 생각한 나머지 당황했다.
“어.어. 농담이라고, 그렇게 까지 화낼 필요 없잖수.”
녀석에게는 야성의 평야로 가듯이 얘기를 했으니 별반 문제는 되지않는다. 그리고 이상하게도 추적자라던가 시에서 본 것처럼 내 목에 현상금도 걸려있지 않다. 아직은 시간의 갭이 있다는 것. 조금이라도 서둘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보라고. 에이 젠장. 가더라도 같이 가자고. 실은 혼자 가기가 여간 내키지 않아서 그래. 같이 좀 가자고.”
시르실은 내가 정리하는 걸 도와가며 눈치를 살폈다.
“보시다시피 혼자선 끼니도 잘 때우지 못해. 솜씨가 있어야지. 여태 난 늘 파티로 다녔다어. 적당한 파티를 찾지 못해서 여지껏 놀고만 먹었는데, 더 이상 이러고 있다간 파산이라고!”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그는 열변을 토하였다.
“값어치는 제대로 할 테니깐 같이 가. 당신 같은 워리어와 골렘이라면 아주 든든한 파티지.”
사정을 하는 통에 맘이 약해지던 나는 티그라의 얘기가 나오자 신경이 날카로워 졌다.
“당신. 골렘인지 어떻게 알았지?”
단순히 큰 바위로만 보일 정도로 교묘하게 자세를 잡은 티그라였다. 물론 한적한 초원에 큰 바위는 전혀 어울리지 않겠지만 사람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 골렘이라면 소환물이라는 얘기밖에 되지 않는데, 그러나 나는 마법사라고는 전혀 볼 수 없는 인물이다. 이 골렘이 나와 같이 행동한다는 건 쉽게 눈치 첼 수 없는 일이다.
“이래봬도 경험이 제법 되는 모험가라고. 골렘쯤은 많이 봐왔지. 니벨랴에도 몇 번이나 가봤어.”
그렇다면 쉽게 알 수 있는 상황이다. 골렘은 흔히 몬스터 내지 마법사의 소환물로 유명하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이와는 다른 방법의 골렘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바로 니벨랴의 클라이어써(clay author)들의 창조물이다. 이들 클라이어써들은 종종 신성시 되기도 하는 데 그 이유는 순수한 의지만으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기 때문이다. 그들은 정제된 깨끗한 점토를 빗어 형상을 만들고, 만드는 내내 자신의 의지로 또 다른 의지를 작품에 싣게 된다. 클라이어써들의 능력에 따라 그 생명력과 능력이 좌우되며,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 즉 골렘들은 자아를 가지게 된다. 또한 움직이는 원동력은 마나를 이용하나 소환골렘이나 몬스터골렘과는 달리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에게 마나를 공급한다. 마치 인간이 스스로 음식물을 취하고 그 힘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당신처럼 저런 골렘들 달고 다니는 사람들을 봐 왔어.그래서 말인데... 혹시 클라이어써인가?”
“아니.”
“흠. 그렇담 어디서 운 좋게 구할 수 있었던가 보군. 내가 보기엔 당신 능력도 썩 뛰어난 것 같은데, 저런 골렘까지 라니...에이 정말. 나랑 동행 하자니깐!”
아이가 떼쓰듯이 발로 땅을 밟으며 조르는 그를 보고있으니 웃음이 슬며시 나왔다.
‘뭐, 정 안 되겠다 하면 놓고 가도 상관은 없으니...’
“밤길 상관 없겠소?”
어두워진 밤 출발 할 준비를 끝낸 나의 말에 시르실은 환한 얼굴로 대답했다.
“물론이지.”
문제없다는 듯 그는 가슴을 탕탕 쳐댔다. 어째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후아. 시원하구만.”
여름 밤은 무척 시원했다. 드넓은 초원 위에 풀잎 들을 건드리며 지나가는 바람은 마치 음악 같았고, 마법처럼 밝게 빛나는 별들은 그 어떤 마법보다도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검푸른 하늘은 그대로 내려와 빨아들일 것 같았고 무엇보다도 어떠한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포근한 두 달은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언제 보아도 신비롭기 그지 없는 풍경이다.
풀잎하나를 입에 물은 시르실은 기분이 좋은 듯 두리번 거렸다.
“무크. 난 말이지 이런 모험을 하며 숨겨져 있던 던전을 기웃거리고 보물을 찾는 것도 좋지만, 지금의 이런 하늘은 그에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 좋거든.”
“하늘과 자연은 자유와 여유를 주지만, 보물은 고민을 덤으로 주거든.”
시르실은 나보다 나이가 다섯은 많았지만 세월의 힘듬에 찌든 내 모습은 서로에게 친구가 되기를 허락하였다. 아직은 풋내가 조금 남아있어야 할 나이지만 그렇지 않음은 그에게 적지않은 놀람을 주었다.
-난 또... 풍기는 분위기가 같은 연배라 생각했더니만. 어지간히 고생하고 살았나 보군.-
내가 나이를 말하자 그가 바로 꺼낸 말이다.
출발한지 몇 시간이 지난 뒤 하룻밤을 지샐 자리를 잡았다. 제법 도시에서 많이 떨어졌으니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었다. 티그라를 곁에 앉게 만들어 두고 난 모포를 피기 시작했다.
“아. 간만에 밖에서 자는 구만. 밖에선 혼자자기 뭐해서 계속 여관에 있었더니 하루하루 돈 나가는 게 장난이 아니더라고.”
“훗. 그래도 제법 벌어두긴 했었나 보지?”
“그~~~럼. 사냥을 많이 했지. 트롤, 오우거,거기다가 와이번, 그리폰까지도... 아 물론 혼자한건 아니지만. 꽤나 많이 벌었다고. 그래서 지금 이 녀석도 얻을 수 있었고.”
나와 나란히 누운 시르실은 허리춤에서 단검 하나를 꺼내 들었다. 달빛에 반사되어 빛나는 단검은 보기에도 대단히 예리해 보였다.
“한번 봐도 될까?”
“물론. 함부로 손가락 갖다 대진 말라고. 그냥 베이니깐.”
시르실의 충고가 아니 였어도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까이에서 보니 더더욱 예리해 보였으니깐. 유연하게 굽은 날의 허리는 날카로움을 한층 더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건 손잡이 끝부분에 달린 큼직한 루비였다. 내가 루비를 한참이나 바라보고 있자 시르실은 나를 보며 말했다.
“그거 내 재산이지. 모은 돈을 거기다 거의 투자했으니깐.”
“보석이란 건 처음 만져 보는군.”
어렵게 살았던 나는 이런 보석은 어쩌다 보기만 했었지 이렇게 만져 본 적은 없었다.
“엑셀이 너랑 생각보다 제법 잘 어울리더군.”
미티어라이트를 보고 한 소리다. 시르실은 호리호리한 그의 덩치에 어울리게 단검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덩치로 봤을 땐 내 그레이트 엑셀은 그리 잘 어울리는 무기는 아니 였으나 왠지 모를 분위기는 잘 맞았었다.
“덩치는 그리 크지 않던데, 보기보다 힘이 장사인가 보군. 난 아마 몇 번 휘두르지도 못할 텐데.”
시르실은 이마를 덮는 금발을 매만졌다. 어디에선가 향긋한 꽃향기가 코를 즐겁게 했다. 기분이 좋아져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시르실과 같이 잠에 드는 것이 불안하기 했지만, 티그라가 바로 옆에서 버티고 있는 한 별탈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 짐까지도 녀석에게 부탁을 해 두었으니.
시끄러웠다. 쫓기고 있는 탓인지 꿈이 좋지 않은 거라 생각했다. 피곤해서 여기저기 조금 쑤시는 것 같기도 하고. 특히나 얼굴이 조금 얼얼했다. 잠이 무시무시하게 몰려왔지만 어쩐 일인지 시끌시끌한 기분에 쉽사리 깊게 잠들지 못했다. 한참을 비몽사몽간에 있던 나는 겨우 눈을 서서히 뜨기 시작했다. 뭔가 바삐 움직이고, 고함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눈을 완전히 뜨고 앞이 확실히 보일 때에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한참을 그렇게 있었다.
“무크! 일어나!!”
무언가가 내 뺨을 강하게 쳤다. 잠이 확 달아남을 느낀 나는 벌떡 일어나 보았다.
“아주 나가 떨어졌었구만, 이거.”
숨이 가뿐 소리를 하며 시르실이 서 있었다.
“어떻게 된 거지?”
고개를 다른 곳으로 돌리니 티그라가 열심히 움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검을 든 몇몇 사람들이 보였다.
“검은 로브!”
검은 로브의 기사단 이였다. 달빛을 받아 그들이 휘두르는 검들은 번쩍였고, 티그라를 둘러싸고 있었다.
“저승 꽃, 카를랸을 썼어. 그 덕분에 네가 그렇게 곯아 떨어진 거고. 깨우느라 무척 힘들었다고.”
아무래도 녀석들은 나를 잠들게 한 후 납치를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시르실은 곁에서 나를 지켜주고 있었고, 그 증거로 곁에는 두 명의 기사가 죽어 있었다. 내가 깨어난 모습을 본 몇 녀석이 티그라에게서 떨어져 이쪽으로 다가왔다. 나머지 녀석들은 티그라에게 직접적으로 덤비지 않고 치고 빠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맞붙었다가 단 몇 방에 모두들 나가떨어질 테니. 시간을 벌고 있는 것 이였다. 나는 얼른 곁에 있던 미티어라이트를 들었다.
-채챙-
한 녀석의 검과 내 미티어라이트가 부딪쳤다. 하지만 내 힘과 미티어라이트의 무게로 부딪침이 무색하게 녀석의 검이 꺾여 버렸다. 차마 내 힘을 파악하지 못했기에 그는 손목에 큰 고통을 느꼈고,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나는 재빨리 치고 들어갔다. 엄청난 무게감의 소리를 내며 미티어라이트는 여러 차례 베어 들어갔다. 녀석은 큰 무기를 사용할 때 드러나는 큰 허점을 노렸으나 그건 실수였다. 내 힘은 이 큰 도끼를 가볍게 휘두르기에 충분했으니 실상 가벼운 검을 다루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기어코 녀석은 힘을 못 이겨 넘어져 버렸고 난 망설임 없이 내려쳤다. 막아보려 검을 쳐들었으나 힘껏 내려친 미티어라이트는 녀석의 검을 그대로 누르며 배를 갈랐다. 비명도 지르지 못한 녀석은 내장을 드러내며 즉사해 버렸다. 처음으로 사람을 베게 된 난 약간 몸을 떨었으나 상황이 긴박하게 돌아가는 지라 금방 잊고 말았다. 시르실은 또 다른 한 녀석과 말 그대로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짧은 단검은 화려하게 휘둘러졌고, 상대도 롱소드를 자유자재로 구사 하였다. 검은 로브의 기사들의 실력은 그야말로 최상급이었으나 시르실도 그에 못지 않았기에 적잖이 나를 놀래 켰다. 복부를 노리고 들어오는 검을 살짝 흘린 시르실은 ㅕ녀석의 목을 향해 강하게 나아갔고, 서둘러 검을 거둬 들어 녀석이 강하게 막아내자 둘 다 튕겨지며 주춤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나는 미티어라이트를 날렸다. 육중한 소리를 내며 날아가던 미티어라이트는 정확히 녀석의 등을 향해 날아갔다. 소리에 놀란 녀석이 뒤를 돌아 봤고 급히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 이였다. 그 무게감과 힘을 녀석도 눈치 채지 못했고, 그 힘에 밀려 미티어라이트는 그대로 가슴에 박혔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녀석의 몸은 시르실을 비켜지나 날아가 땅에 쳐 박혔다.
“휘우. 굉장 하구만.”
시르실의 감탄이 들렸고, 나는 티그라쪽으로 바라보았다. 다섯 녀석이 티그라를 둘러싸고 있었고, 하나같이 거리를 둔 체 빠르게 치고 들어가 빠지길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가오는 나와 시르실을 본 녀석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 받더니 일제히 달아나기 시작했다.
“티그라. 쫓아.”
내 말을 들은 티그라는 눈에서 빛을 강하게 뿜으며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어쩐 일인지 티그라가 강하게 땅을 울리며 달려나가자 녀석들은 힐끔 뒤를 돌아보더니 급기야 뿔뿔히 흩어져 속도를 더욱 높였다. 부상을 입었는지 한 녀석이 쳐졌고, 티그라는 그 큰 몸을 날려버렸다. 마치 사슴과 같은 가벼운 점프에 난 다시 한번 티그라에 대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쿠쿵-
“크아아아악!!”
뼈가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리며 녀석은 티그라의 두 발에 무참히 깔려버렸다. 전력을 다해 뛰어 티그라의 근처에 다다른 내 앞에 툭 하고 내장인지 뭔지 모를 시뻘건 핏덩어리 하나가 날아왔다.
“허허. 거 정말 대단하구만.!! 이야~~.”
연신 감탄하며 시르실은 다가오는 티그라에게 경외에 가까운 눈빛을 보였고, 나 역시도 그에 못 지 않은 눈길을 보내었다. 나머지 녀석들은 이미 모습을 감추어 버려 쫓기가 힘들었다.
“수고했다 티그라.”
-별로.-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나는 티그라의 팔을 두드려 주었고, 시르실은 더욱 놀란 눈이 되었다.
“말도 하는 군!! 이름이 티그라였어? 골렘이 이정도 일 줄은 몰랐는걸!”
방정 맞은 시르실의 말을 들으며 나는 다시 우리가 자던 곳으로 되돌아 왔다. 죽어있는 검은 로브의 기사 넷으로 인해 피 냄새가 진동을 했고, 난 서둘러 모포를 다시 말기 시작했다.
“자지않아도 괜찮겠어?”
또 다시 녀석들이 몰려올지도 모르고, 피 냄새로 인해 어떤 몬스터들이 들이 닥칠지 모르는 상황이어서 난 바로 떠날 생각 이였다.
“그럼. 여기 계속 있다간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지.”
시르실도 얼른 짐을 다시 꾸리기 시작했고, 난 티그라에게 다가갔다.
“티그라. 부탁해.”
그러자 티그라는 상체를 숙였고, 난 시르실을 불렀다.
“왜? 뭐 할 일이라도 있는 거야?”
난 보란 듯이 티그라의 한쪽 어깨에 올라 탔다.
“타라.”
“뭐?”
“타보면 알아.”
어리둥절한 얼굴로 시르실은 반대쪽 어깨에 올라탔고, 그가 탄 것을 확인한 나는 티그라의 머리를 바라보았다.
“가자. 전속력으로”
그러자 티그라는 서서히 상체를 들었고, 시르실은 어어 하는 소리를 내었다. 눈에 빛을 살짝 뿜던 티그라는 역시나 엄청난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정말 끝내주는군. 정말 대단해. 하하하”
목까지 내려오는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시르실은 웃었다. 티그라는 말에는 못 미치지만 건장한 사람이 전력으로 달리는 속도의 그 이상으로 달렸다. 최대한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거지?”
나의 물음에 시르실은 여전히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잠들기 전에 꽃 향기 맡지 않았냐? 그게 바로 카를랸의 향기라고. 냄새를 맡으면 누구든, 심지어 큰 오우거도 그냥 골아 떨어지지. 말 했다시피 난 경험이 많다고. 그 정돈 눈치 챌 수 있지. 내가 눈치 챈 후엔 이미 넌 잠들어 있더군.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녀석들이 덮친 거야. 자네에게 다가가길래 나와 이 녀석, 티그라가 막아 섰지. 녀석들을 막아내면서 자네 깨우려고 고생 좀 했지. 뺨 좀 아팠지?”
어쩐지. 여기저기가 쑤시고 뺨이 얼얼 하더라니.
“고생했군. 고마워.”
“뭘. 그 정도로.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 내 값어치는 하겠다고 말야. 파티동료로써 그 정도는 기본이지. 그나 저나 자네, 그 녀석들이 어떤 녀석들인 줄 아나?”
시르실의 물음에 나는 모르는 척 담담히 대답했다.
“아니. 뭐 복장을 보아하니 씨프(thief)아닌가 싶은데.”
“아냐. 내가 보기엔 텔론국의 검은 로브의 기사들인 것 같아.”
“검은 로브의 기사? 설마. 여기가 어딘데 그들이 설치겠어. 또 우릴 덮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도둑길드 중 비슷한 복장이야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
시르실은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아닌 것 같은데. 씨프 치곤 검을 다루는 솜씨가 급이 틀렸어.”
난 화제를 돌렸다. 더 이상 말이 나가다간 귀찮아 질 것 같아서.
“네 솜씨 참 놀랍던데?”
“응?”
시르실은 생각하다 말고 내 말에 주의를 돌렸다.
“아. 별로.하하 너야말로 놀랍더군. 파티하나는 정말 잘 고른 것 같단 말야. 아주 든든한데? 드래곤이 와도 무섭지 않겠어. 하하하.”
시르실의 솜씨가 놀랍다는 건 빈말로 한 것이 아니 였다. 상대는 검은 로브의 기사들이다. 베라모스, 텔론, 그리고 북쪽의 메릭트 연합국가, 사르벵커 제국에 이르는 야들루에서 손꼽히는 일류솜씨의 기사단이 바로 그들이다. 그런 그들과 당당히 맞서 싸우던 시르실의 실력은 굳이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다. 넉살스러운 말투와 호리호리한 몸매, 그리고 부드러워 보이는 그 특유의 미소로는 상상하기 힘든 솜씨였다.
“조심해야 겠는걸? 머릿수가 적다고 쉽게 덤벼드는 것 같은데. 하긴, 티그라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알아서 움직이더구만 그래.”
티그라는 시르실의 말처럼 정말 듬직한 호위무사였다. 위험이 있을 때면 알아서 판단하여 날 보호하였고 그 만큼 녀석은 점점 내 마음속에 차고 들어왔다.
“정말 여기에 두고 가려는 거야?”
“응”
시르실은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번 생각해봐. 티그라를 데리고 간다면 끝내준다고. 정말 폼 나지 않겠어? 멋진 모험가와 엄청난 골렘. 도시가 떠들썩 할거야. 레이디들의 시선을 한눈에 받을 수 있다고.”
다시 나를 설득하려는 시르실을 향해 딱 잘라 말했다.
“난 떠들썩 한건 싫어. 경비병들의 괜한 눈총 받기도 싫고. 어디 맘 놓고 편히 다닐 수가 없잖아.”
어느새 쥬넌의 남부에 도달한 우리는 제법 큰 숲을 발견하였고, 지금 그 숲 깊숙한 곳에서 티그라를 놓고 가느냐 데리고 가느냐 실랑이를 벌이고 있는 중이다. 티그라 덕분에 멤버리첸에서 떠난지 2일째 되는 날 정오에 여유롭게 도착했고, 오는 내내 특별한 일도 없이 무사했다. 행여나 지나가는 사람들이 있을 시엔 티그라에게 일러 멀리 피해가며 최대한 사람들의 눈길을 벗어났다. 시르실이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지금처럼 괜한 시선이 거북해서 그렇다고 둘러대었다. 그리고 검은 로브의 기사들과도 만나지 않았다. 만약 뒤쫓고 있었다면 아마도 말을 타지 않는 이상은 제법 거리가 벌어져 있을 것이다. 녀석들이 말을 타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니. 적국 베라모스 안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보인다는 건 외교적 문제로 크게 불거질테니깐. 최대한 잡음 없이 진행해야만 할 것이다. 내 집에서 널 부러졌던 녀석들이 궁금해 지기도 했다. 베라모스 기사들도 같이 있었으니 분명 국정에 알려졌을 법도 한데, 조용한 걸 보면 어떻게라도 조용히 마무리 지은 것 같다.
시르실은 뾰루퉁한 얼굴로 궁시렁 거렸다.
“멋진 레이디들이 줄을 설 텐데 말야.”
며칠을 같이 지내며 난 어느새 그를 진정한 파티원으로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니 검은 로브의 기사들이 덮쳤을 때 그냥 달아날 수도 있었지만 그는 멤버쉽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겉모습과는 달리 책임감 있는 모습과 든든함을 은연중에 보였다. 난 점점 나중에 어떻게 녀석을 떼어내나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남부 초소의 모습이 보이자 난 시르실이 눈치채지 못하게 후드를 깊게 눌러 섰다. 경비병들에게 다가갔을 때 그들은 유심히 나와 시르실을 지켜보았으나 별다른 언급 없이 통과 시켜주었다.
‘이상한데. 지금쯤이면 내 얼굴이 알려졌을 법도 한데.’
의아함을 느끼며 난 시가지를 향해 걸어갔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바로 엘프들 이였다. 멤버리첸에선 쫓기는 마음으로 주위를 의식해 고개를 숙이고 다니다 보니 엘프들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곳에서도 심정이 별반 다를 것 없었으나, 이렇게 눈에 보인다는 건 그만큼 흔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처럼 도처에 널린 건 아니 였지만, 소문 그대로 엘프들을 자주 볼 수 있다는 도시, 쥬넌 이였다.
“정말 엘프들은 아무리 봐도 환상적이야. 신의 조각이라니깐.”
시내로 향하는 길에서 지나쳐 가는 엘프들 바라보며 시르실은 중얼거렸다. 손 꼽을 정도로 엘프들을 많이 볼 수 없었던 나 역시 그 말에 긍정했다. 정말 하나 같이 대단한 미인, 미남들이다.
어느덧 한적한 길을 벗어나 점점 시내의 중심으로 향해가며 건물들이 하나 둘 늘어가기 시작했다. 사람들도 점차 많아져 갔고, 난 조금씩 긴장해 갔다.
“긴장 풀어. 아무리 사람들 시선이 부담스러워도 그렇게까지 긴장할 필욘 없잖아. 다들 널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다고.”
시 중심에 가까이 들어선 나는 멤버리첸에서와는 또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다른 도시에서 느낄 수 없는 향기가 있었다. 거리에는 처음 보는 식물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았고, 그 식물들로 인해 거리 전체에 독특한 향이 퍼져 있었다. 엘프들과의 교류로 인해 누다쉰산의 희귀한 약초들과 식물들이 즐비해 있고, 기사의 도시답게 검을 찬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죽은 아버지는 이곳에서 장사하기를 바랬었는데.
거리 한복판에서 서로 검술을 겨루며 주변의 레이디들로부터 환호성을 받는 남자들도 보였고, 대장간과 무기점도 유난히 많았다.
“무크. 여기 어때?”
시르실은 한 건물 앞에 서서 엄지손가락으로 입구를 가리켰다.
‘석양의 발길’이라는 글귀와 검의 문양을 멋지게 그려 넣은 간판을 바라본 후 나는 시르실 가까이 다가갔다.
“들어가보지.”
스윙도어를 가볍게 밀치고 시르실이 먼저 들어갔고, 뒤이어 나도 조심스레 들어갔다. 점심때라서 그런지 펍 안은 무척이나 시끌시끌하였다. 검을 찬 거친 남자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땀내음과, 쇠의 냄새, 그리고 철그덕 거리는 소리.
“이보슈 주인장.”
“왜?”
머리카락 한 올 없는 번쩍이는 머리를 한 대머리 남자가 다가왔다. 머리처럼 수염도 없이 깔끔한 모습에 담배파이프를 물고 있는 주인의 모습은 강인해 보였다.
“요즘 재밌는 얘기 없수?”
시르실은 특유의 넉살로 말을 건 냈고, 주인장 역시 뒤지지 않았다.
“뭘 시키냐에 따라 재미의 정도가 틀려지지.”
“아아. 물론이지. 여기 가장 깔끔하고 독한 걸로 두잔. 아. 오늘 제일 물 좋은 식사도 2인분으로”
“것참 좋군. 어이 란다! 여기 ‘화이어 키스’둘과 양고기 둘.”
주인은 주방인 듯한 한 편의 통로로 소리쳤고, 난 시르실과 함께 주인이 서 있는 바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어떠우? 요즘.”
시르실의 말에 주인은 술잔 두개를 마른 행주로 닦아 우리 앞에 놓았다.
“아주 타이밍 좋은데? 요즘 괜찮은 얘기가 있거든? 비골 산맥 쪽에 좋은 게 하나 터졌던데.”
“비골산맥? 던전인가 보군. 어떻게 됐수?”
“어떻게 되긴. 아직 빈집이지. 제법이다 더만. 규모도 제법 되고. 비슷한 게 하나 더 있다 던데. 해츨링꺼라더군. 잘하면 드래곤본도 얻을지 몰라.”
시르실의 눈이 커졌다.
“본? 이야~~! 거 정말 죽이는데? 국정에선 나서지 않수?”
“여간해선 힘들 다더군. 더구나 야성의 평야를 가로질러야 하니 군대로썬 힘들어. 머릿수가 많아야 하는데 텔론 때문에 어디 그렇게 보낼 수가 있겠어? 용병들은 믿을 수가 없어서 모집도 안하고. 그냥 아예 무신경한 것 같던데.”
“메릭트에선?”
“메릭트 연합국가에선 가깝지. 하지만 그럴 힘이 있어야지. 알다시피 사르벵커제국 신경 쓰는 것만도 걔네 들은 벅차.
“완전 우리 애들꺼군?”
시르실이 말하는 우리 애들은 바로 모험가들이다. 어느새 우리들 앞으로 주문했던 것들이 놓여졌다. 시르실은 술잔을 들어 보였다.
“이게 화이어키스라는 건가?”
시르실의 말에 주인은 혀를 쭉 내밀었다.
“히히. 혀 데이지 않게 조심 하라구.”
“거 충고 고맙군. 자, 무크 한잔 하자고.”
난 녀석과 함께 서로 잔을 살짝 박은 후 입가로 가져갔다.
“우와! 이거 정말 물건인데?”
정말 혀를 데일 뻔했다. 혀 안쪽부터 불처럼 타 넘어가는 술 맛은 정신을 혼미하게 만들 정도였다.
“후우. 진짠데?”
난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불 덩어리 하날 삼킨 것 같았다.
“큰 돈 걸린 애들은 없고?”
“없어. 걔들은 요즘 뜸해.”
현상수배자들을 가리키는 시르실 말에 난 주인의 대답이 무척 궁금 했는데, 다행이었다. 하긴 나에 대한 뭔가가 있었다면 주인장이 날 먼저 알아 봤을 테니깐.
‘왜 날 공개 수배하지 않는 걸까?’
다른 나라로 도망칠 것을 염려해서 일까?
그럴 지도. 온 나라에 내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가 걸리면 아무래도 그럴 가능성이 많으니깐. 아. 또 있군. 아마 소문이 무서울 수도 있다. 메릭트나 사르벵커에서 눈치를 채면 더 골치 아프니깐. 텔론처럼 날 잡으러 난리를 칠 지 모르지. 그러니 텔론과 베라모스 양국에서 쉬쉬하는 걸 수도. 다행히 상황이 좀 나은 건가?.
기분이 한결 나아진 나는 멋진 양고기 맛을 천천히 음미하였다. 그리고 화이어키스라는 이 술도 화끈하게 즐길 수 있었다.
“아. 취하는데? 어때? 오늘 여기서 지내는 거. 괜찮지 않아? 출발 전에 미리 푹 쉬는 게 좋지.”
여유가 있어진 난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좋은 음식에 좋은 술, 그리고 편한 하룻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도 모르는데.
“좋아. 그러지.”
“어이. 주인장. 여기 방도 있수?”
“다행이군. 여관도 같이 하지.”
“잘됐어. 두 사람 묶을 방, 그리고 목욕물도 준비 하슈.”
“란다. 2인실 하나, 목욕물 준비!”
주인은 다시 소리쳤고, 긴 흑발의 젊고 예쁜 여자가 모습을 보였다.
“저 따라 오시겠어요.”
바쁜 걸음으로 그녀는 우리를 2층으로 안내하였고, 독한 술로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며 걸어갔다. 죽 늘어선 방들 중 하나를 고른 그녀는 방문을 열어 젖히며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실래요? 목욕물 데우는 데 시간이 걸리거든요.”
“물론이죠. 예쁜 아가씨.”
능글 맞은 시르실의 말에 그녀는 얼굴에 홍조를 띄며 사라졌고, 우리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누웠다.
“아~~ 좋다. 쿠션도 좋고.”
시르실은 침대를 이리저리 누르며 말했다. 처음으로 여관에서 잠을 자게 된 나는 어색했다. 침대도 무척 푹신했고, 이불도 포근해 보였다. 이런 곳에서 잘 일도 없었고, 쓸데없이 돈 쓰는 것도 뭐 해서 가본 적이 없었다. 이 참에 이런 경험도 좋은 것이라 생각했다.
“어때? 비골 산맥 건수. 같이 갈 거지?”
시르실은 나의 표정을 살피며 물었고, 나는 잠시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괜찮지.”
나의 말에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좋아. 너와 나, 티그라라면 해낼 수 있을 꺼야. 우리 한번 돈 벼락 맞아 보자구. 하하!”
뭐 자네 생각대로 그렇게 될지 모르겠지만, 지금은 편히 웃어두라고. 기뻐하는 걸 보니 내 기분도 썩 나쁘지는 않으니깐. 누군가에게서 이렇게 도움이 되고 중요한 존재가 된다는 걸 처음으로 느껴본 나였다. 행복함이랄까? 이런 기분일 줄은 몰랐다.
“목욕물 준비 됐어요.”
방문 밖에서 들려온 말에 우리는 곧장 방을 나섰다.
밝게 켜둔 가게들의 램프들은 온 거리를 밝게 비추었고, 낮과는 다른 느낌의 생기를 전해주었다. 특히나 펍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가락이나 흥에 겨운 목소리, 창으로 새어 나오는 환한 불빛들은 거리를 지배하기에 충분했다. 여전히 낮과 같이 문을 열어 젖힌 체 손님들을 맞는 물품 가게들도 한 몫을 하였고. 찻집이나, 꽤나 고급스러워 보이는 레스토랑들도 조용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도시의 야경도 색다른 맛이지. 밤거리의 여자들도 좋은 볼거리고. 어이~ 아가씨. 옷이 죄어 주는데?”
시르실은 옆을 스쳐 지나가는 노출이 심한 여자를 보며 히히덕 거렸다. 고운 드레스와 얌전한 태도의 순백의 여자들이 메우던 낮과는 달리 밤은 허벅지가 드러나 보이는 짧은 치마와 매혹적인 눈길의 여자들을 허락했다.
밤의 풍경은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 허슬타니아에서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고, 멤버리첸도 마찬가지 였다. 술에 절은 체 가게에서 내동댕이 쳐지는 주정꾼들도 다를 바 없이 지금 막 내 옆에 등장하였다. 우람한 덩치를 자랑하며 씩씩대는 중년의 여 주인은 다가가 빰을 내려치기에 바쁘다.
“돈이 없으면 퍼먹지를 말던가. 에이. 재주가 없을려니.”
“너무 하는 거 아냐? 돼지 같은 여편네. 퉤!”
“그러게 저런 여자 가게에 뭐 하러 갔수? 술 맛 떨어지게.”
옆에서 지켜보던 시르실의 말에 남자는 비척대며 일어서 동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 거 맞수 맞수. 내가 매번 가서 잘 아는데. 저 여편넨 돈에 환장 했다니깐. 영감이 하는 곳으로나 가 볼까.”
지나가는 옆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부딪칠 만큼 많이 취하였으나 그는 또 다른 펍을 찾아 걸어갔다. 한 켠에선 여러 명의 여자들에 둘러싸여 환호성을 받는 검사도 보였다. 제법 재빠른 동작들을 가볍게 보이며 히히덕 거리는 남자와 맞장구를 치는 여자들 역시 검을 만져 봄 직해 보였다.
“헹. 저런 솜씨로 어떻게 해보겠다니 웃기는 걸?.”
일부러 들리게 끔 중얼거리는 시르실의 말에 남자가 들었는지 곱지 않은 눈길로 천천히 이쪽을 돌아보았다.
“뭐?쳇…난 또. 당신 말야. 약한 몰골로 그런 말을 함부로 한다는 거 창피하지 않아?”
여자들을 의식해 나름대로 점잖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엔 미쳐 보이지 않았던 긴 상처가 있었다.
“어이구. 여인네 손톱자국을 얼굴에 세긴 당신은 어떻고? 실력이 모자라니 흉이나 만드는 것 아닌가?”
시르실의 우는 아이를 달래듯 과장된 표정과 말투에 남자는 발끈하였다.
“이런 빌어먹을 자식이!”
다짜고짜 그는 검을 뽑아 들었고, 시르실은 여전히 능글거리며 아예 팔장을 끼기까지 했다.
“호오. 여기에서 설쳐보겠다고? 경비병들에게 쫓겨 날 걱정도 안 되나 보군.”
“경비고 뭐고, 오늘 네 녀석 얼굴을 구워 주겠어. 화이어!!”
독이 오를 대로 오른 남자는 시동어를 외쳤다. 마법이 걸린롱소드였다. 아마 녀석은 약해보이는 시르실을 그대로 눕히고, 곁에서 걱정스레 바라보고 있는 여자들에게서 점수 좀 따볼 생각이겠지. 그러니 별일도 아닌 일에 저리 열을 낼 수 밖에. 이런 녀석이 아니꼬왔던 시르실은 괜시리 건드리는 것 이였다. 콧대를 눌려주기 위해. 뭐, 지내면서 느낀 바로 시르실도 저 남자와 크게 다를 것은 없는 부류였으나, 그는 누가 뭐라 하지 못할 정도로 실력을 갖추고 있다.
남자의 고함과 검을 뽑는 소리에 주위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선을 의식한 남자는 더욱 의기 양양해져 시동어로 인해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싸인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는 순간까지도 시르실은 여전히 팔장을 낀 체 조소를 머금고 있었다.
“타앗.”
우렁찬 기합소리와 함께 남자는 발을 내딛으며 종으로 베었다. 화르르 불이 스쳐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며 제법 솜씨 있게 갈라졌으나 시르실은 한 걸음으로 가뿐히 비켜버렸다. 그리곤 툭 하고 팔로 남자를 밀어버렸다. 힘을 많이 실었던 남자는 그로 인해 큰 틈이 생겼고, 가벼운 밀침에도 그만 옆으로 쓰러져 버렸다. 그 기회를 놓칠 시르실이 아니 였다. 단숨에 단검을 뽑아 들어 쓰러진 남자 위에 올라타 목에 정확히 겨누었다. 순식간의 상황에 남자와 주위 사람들은 모두 놀랐고, 그들과는 달리 시르실은 능글 거리며 말했다.
“제법 검은 휘두른다만, 상대를 알아보는 눈도 좀 길러봐.”
그 말에 남자는 검을 놓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손에서 멀어진 검은 곧바로 불길이 사라졌다.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고, 특히나 좀 전까지 남자와 히히덕 거리던 여 검사 들은 일제히 시르실에게 다가가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녀석은 넉살 좋게 주위 사람들에게 가벼운 목례까지 하였고, 난 웃음을 지었다.
“도저히 못 봐주겠는걸 어떻게. 안 그래 무크?”
폼 나게 당당히 걸어오는 시르실에게 난 미소를 지어보였다. 쓰러져 있던 남자는 얼굴을 붉히며 황급히 사라졌고, 사람들은 그를 보며 야유를 퍼부었다. 시르실의 주변을 둘러싸고 오던 여자들은 나를 바라보았고, 그녀들의 관심은 나에게 돌려졌다.
“어머. 친구 세요?”
“미남이시다. 친구니깐 이분도 대단한 실력이시겠지?”
“와. 멋져!”
갑작스런 여자들의 시선과 관심에 익숙하지 않던 나는 얼굴을 붉히며 시르실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 생각을 알아챈 듯 그녀들의 주위를 돌렸다.
“자자. 이러지 말고 아가씨들 차나 한잔 합시다. 내가 살 테니.”
그 말에 여자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시르실을 따라 걸었고 나 또한 그 뒤를 따랐다.
‘옷이 날개는 날개인가 보군.’
난 내 옷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늘 꾀죄죄하고 볼품없던 옷을 입고 다니다가 티그라를 만난 후 처음으로 비싼값을 지불하고 샀던 옷이다. 고급스런 옷감에 은은한 회색 빛의 상의와 하의.잿빛의 짧은 내 머리카락과 잘 어울렸다. 예전 모습과는 많이 달라 보임을 나 자신도 어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나에게 여자들의 관심이 있을 리 만무하였고, 설령 있었더라도 하루하루 살기 힘든 나는 그런 것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어찌 생각하면 티그라가 내 인생을 살맛 나게 확 바꾼 셈이기도 하다. 아님 지금의 이런 옷과 좋은 음식들, 그리고 저런 여자들도 볼 수 없었을 테지.
조금 걸어가던 시르실은 여느 가게와 다름없이 환히 불을 켜 둔 찻집을 골랐다. 그리고 거침없이 입구로 들어갔고, 난 가게의 간판을 바라보았다. ‘향기를 따라.’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을 때 시르실의 외침소리가 들렸다.
“뭐해? 안 들어오고.”
“어.그래.”
안으로 들어선 나는 상당히 조용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에 어색함을 느꼈다. 여러 빛깔의 램프들은 은은히 빛나며 한 구석에 자리잡은 버드의 악기소리에 무척이나 어울렸다. 펍과는 달리 여러 칸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각 칸마다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져 있었다. 벽쪽에 붙은 자리를 잡은 시르실과 그녀들은 나를 바라보며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이리와 여기 앉어.”
나는 다시 얼굴을 붉히며 시르실이 가리키는 곳에 앉았다. 옆 자리엔 그녀들 중 한명이 앉아 있었다.
“꺄르르. 부끄러움이 많은가 봐요.”
여자들은 나를 귀여운 듯 바라보았고, 할말이 없어진 나를 시르실은 다시금 구해 주었다.
“그런데 숙녀 분들은 어쩌다 그런 녀석과 함께 계셨는지요?”
“아. 아까 그 흉터 남자? 파티가 필요해서 얘기를 나눠 본 것 뿐 이예요. 저희들도 무리를 지은 지 얼마되지 않았거든요.”
어깨까지 내려오는 비교적 짧은 머리를 한 여자가 대답했다. 로브를 입은 복장으로 보아 유일하게 마법사 인 듯 했다. 여름이지만 가볍고 얇은 옷감으로 인해 무리 없어 보였다. 그리고 밝은 색 레더를 아래위로 입은 한명과 조금 질긴 듯한 평범한 복장을 한 또 다른 한명. 이렇게 그녀들은 셋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런 미인들이 모험이라...정말 멋지군요. 하하하.”
시간이 제법지나 그녀들과 시르실은 분위기가 무르익어갔다. 난 물론 한마디도 하지 않은 체 시켰던 차를 홀짝일 뿐이 였다. 그러던 중 시르실은 날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따로 불러내었고, 난 의아해졌다.
“무크. 누가 제일 맘에 들어?”
“뭐?”
“어때? 같이 동행하는게? 그리고 맘에 드는 여자 한번 골라봐.”
시르실은 왠지 선량해 보이는 그 미소와는 달리 음흉한 말을 하였다. 난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이 말했다.
“안돼. 이만 돌아가자.”
그리고 바로 자리를 박차고 가게를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르실이 따라 나왔다. 아마 그녀들에게 급히 이별 인사를 하였겠지.
“대체 왜? 좋지 않아?”
볼멘 소리로 시르실은 말했고, 난 무표정한 얼굴을 하였다.
“별로. 그 여자들과 같이 다니는 건 우리로썬 짐이 늘어나는 것 뿐이야.”
말을 마친 나는 우리가 묶고 있는 펍으로 돌아가기 시작했고, 도착하기 전까지 오는 내내 시르실의 설득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결국 펍에 도착하는 순간 녀석은 포길 했는지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여자라니. 생각해 본 적도 없다. 내 처지에 여자라는 게 어디 가당한 말인가? 그리고 부담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 이였다.
시르실도 달래줄 겸 아랫층 주인에게서 화이어 키스라는 술을 두잔 들고 올라왔다.
“마시고 기분 풀어.”
웃으며 건넨 술을 시르실은 기분을 바꾸려는 듯 한숨과 함께 받았다.
“에이. 그래. 술이나 마시자.”
화끈한 열기가 속을 녹일 듯 번져 나갔고, 처음으로 화려했던 밤도 녹아 내리듯 흘러가는 것 같았다.
저희 오빠가 쓴글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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