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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세 개의 선교의 틀(framework)
현대 복음주의 선교학계는 과거 40여 년 동안 선교의 틀(framework)을 교회(교회개척, 교회성장학)아니면 하나님의 왕국으로 보았고, 이 둘 중에 하나를 구심점으로 삼아서 현대 선교학을 구성했다. 풀러신학교의 맥가브란(McGavran)박사와 랄프 윈터(Winter)박사 등이 전자를 통해 선교학을 구성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라 볼 수 있다. 더 세밀하게 이 진영을 나눈다면 맥가브란은 로잔 I차 대회와 그 후 수십여 년에 걸쳐서 추수지역에서의 교회성장학에 초점을 맞추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윈터는 80년대 이후 거의 20세기 말까지 미전도종족 중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목표로 삼았고, 로잔 II 차 대회이후 이십여 년 간은 AD 2000년과 이후 운동의 부레인 역할을 한 사람 중에 하나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왕국의 도래를 선교의 구심점으로 삼은 사람들은 데빗 보쉬(Bosch) 박사와 최근에는 크리스 라이트(Wright), 베반스/스레더(Bavans/Schroeder) 박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더 최근에는 오트/스트라우스(Ott/Strauss)와 테낸트(Tennent) 박사가 후자의 진영에 추가 되었다.
이와 같은 선교학적인 추세 중에 혜성처럼 나타난 것이 소위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구심점으로 하는 선교학적인 흐름이다. 이는 위에서 언급한 하나님의 왕국을 구심점으로 하는 선교학의 방향과 동일하다. 다만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선교신학적 주제에 있어서 한 발자국 더 구체화 단계로 진입한 개념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보다는 좁은 의미이나 선교적 관점에서 볼 때에는 더 구체적이며 글로벌화 된 세계 선교에 있어서 구심점의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현재 선교학은 두 개의 축이 아닌 세 개의 축으로 이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앞서 언급한 두 개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중심으로 이뤄진 또 다른 축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론의 관계의 발전과정
후자의 경우 선교적교회론을 주장하는 일연의 학자들과 지난 10여 년 간 간행된 선교적교회론 책들이 이 진영을 대표하고 있다. 그중에 핵심적인 인물을 몇 사람만 예로 든다면 구더(Darrel L. Guder), 길더(Craig Van Gelder), 훈스버거(George R. Hunsberger) 박사 등이다. 이들의 영향력으로 20세기 중반에 맥이 끊겼던 교회의 선교적 본질이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연관해서 다시 살아났고, 반대로 현대선교운동이 1792년에 일어난 이후 선교계를 장악해 온 선교단체적(missionary societal - 일명 안디옥 선교모델이라고도 함) 선교방법론은 최소한 이들의 문서상으로는 위축될 운명에 놓이게 되었다. 이글에서는 하나님의 선교를 선교적 교회론의 출현과 연관해서 보게 될 것이다.
좀 더 자세히 세 번째 축이 어떻게 형성되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발전 단계를 잠깐 더듬어 보면 다음과 같다. 20세기 중반에 에큐메니칼 운동(IMC 대회와 WCC총회)을 통해 선교는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 시작하신 것이고 삼위일체 하나님은 성자와 나중에는 성령님을 이 세상에 보내심으로 선교를 하셨다고 주장했다. 오순절에는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교회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하나님의 선교를 하게 하셨다고 주장한다. 이런 하나님의 선교는 거슬러 올라가 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이미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론이 고개를 들기 전까지 복음서의 지상명령이 선교의 근거가 되었던 것이 그 후부터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적이시기 (본질적으로 선교적이심)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은 교회도 선교적인 DNA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교회가 그 본질에서 떠나 있을 경우, 다시 말해서 선교를 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향해 직접 선교를 하실 것이고, 교회는 제 삼자의 자리로 물러서야 한다고까지 주장하게 이르렀다. 그 후 소위 하나님의 선교는 이 세상에 집중하여 교회는 교회대로 선교에서 한 발자국 물러서게 되고, 하나님의 선교는 사회적인 운동 쪽으로 너무 깊이 빠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맥락 속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는 이들은 선교는 교회가 주도해야 한다는 선교신학적 입장하에 드디어 WCC(교회 연합)과 IMC(선교단체의 연합체)를 통합하게 되었다(뉴델리 1961년 WCC 총회). 이로써 선교단체의 연합인 IMC는 교회에 귀속되게 되었다. 문제는 그 후 이런 신학적인 진영의 선교는 쇠퇴일로를 걷게 되었고, 자연적으로 하나님의 선교는 그 동력을 잃어버린 가운데 20세기 후반까지 흘러왔다.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 교회론의 새로운 관계와 그 여파
1990대에 들어서면서 일련의 영미 선교학자들이 네슬리 뉴비긴(Newbigin)을 마스코트(이분은 WCC와 IMC가 통합하는데 주역 중에 한 사람이었다)로 사용하여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와 잃었던 교회론의 위치를 재 확보한 것이다. 뉴비긴을 사용함으로써 과거 원하지 않는 신학적인 논쟁에 휘말리지 않으면서도 주된 신학의 방향자체는 살려서 북미주 상황에 적합하게 선교신학화 한 것이다. 특히 대다수의 세계(The Majority World)의 선교가 번성하고 서구 선교가 점점 쇠약해지는 상황 가운데 선교학을 재구성하였다는데 그 의의가 크다. 여기에서 부각시킨 것은 기독교권(Christendom)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북미주가 빠른 속도로 다민족 및 선교지화 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교회가 어떻게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적 DNA을 극대화 할 수 있는가에 그 착안점을 두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교적교회론의 탄생의 간단한 배경이며 하나님의 선교의 구심점을 통한 선교학적인 돌파구를 마련한 계기이다.
마치 상황화 신학처럼 선교적교회론은 선교학적 근간들을 다 흔들어 놓고 경우에 따라서는 선교학을 다시 쓰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고, 그 방법론은 비록 현대 서구(특히 북미주) 상황에 초점을 맞추어진 선교신학 방법론이지만 글로벌화 된 세계 어디서나 활용하지 않으면 뒤 떨어지게 만드는 상황까지 초래 했다. 특히 역사상 처음으로 선교와 교회론의 선교신학적 통합(integration)이 시도되었다는 데도 큰 의의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우리가 간과할레야 간과할 수 없게 되었다. 다만 이를 활용하되 복음주의 입장에서 재평가를 해 가면서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이 때문에 이 글을 통해 그런 시도를 하기 원한다. 이를 위해 간단하게나마 20세기 중반 하나님의 선교가 혜성처럼 등장했을 때에는 하나님의 선교의 정의를 어떻게 내렸으며, 출현 배경과, 그 평가와, 21세기의 현 상황 중에 복음주의 선교계가 이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해 논하고, 이를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교훈에 대해서도 언급하기 원한다.
A. 20세기 중반의 하나님의 선교의 정의와 성격
Missio Dei(하나님의 선교)란 선교는 교회가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시작하신 것이며, 따라서 선교 신학의 기초도 삼위일체 하나님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사용된 말이다. 이 개념에 따르면 선교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하시는 모든 일을 의미한다(거시적 선교). 이런 Missio Dei 개념 자체는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초대교회시대에 이미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임을 인식했다. 그러나 교회는 중세를 거치면서 선교가 정치세력과 결탁하여 이뤄졌고, 개신교는 16세기 이후에야 비로소 교회가 선교를 위해 세상에 보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교회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와의 연관성은 잘 인식하지 못했었다. Abraham Kyper는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와의 관계를 먼저 인식한 사람 중의 하나이다. Warneck도 역시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의 근원이 되심을 주장한 사람 중에 하나였다. Karl Hartenstein은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좀 더 구체화시켰다. 그의 노력으로 1952년에 열린 IMC(국제선교협의회) Willingen 회의에서 Missio Dei 개념이 빛을 보게 된 것이다(Bosch, Witness To the World, 239-240).
B. 20세기 중반의 하나님의 선교의 발전 배경
1947년 Whitby IMC 선교대회서 선교 신학에 대한 재평가가 대두되었다. 그 결과 “교회의 선교적 책임”이라는 주제가 논의 되었고, 1952년 Willingen 회의에서는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선교 신학에 대한 논의가 구체적으로 진행 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Max Warren의 “기독교 선교와 십자가”라는 논문의 자극을 받아 선교의 시발점은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라는데 의견들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Barth 신학의 영향을 받아, 삼위일체 중에서도 특히 기독론 쪽으로 선교신학의 근원이 기울어지게 되었다. 따라서 삼위일체 하나님은 간접적으로 선교의 근원이 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구속이 선교의 직접적인 근원이 된다고 주장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은 선교의 근원이 교회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변화에 대해 설명하기 위하여 Hartenstein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라는 말을 공식적으로 사용한 것으로 간주된다(Bosch, 179).
Willingen 선교대회 이후로 Missio Dei 개념은 계속 변화되어 “하나님의 선교”란 세계 가운데서 교회와는 상관없이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과 동일시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교회의 책임은 이런 하나님의 일을 발견하여 동참하는데 있다고 했다. 1960년대에 와서는 이런 주장이 곧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으로서 그 위치를 굳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Hoekendijk에게 있어서는 “샤롬”으로 표현되었다. 이는 구속적인 의미보다는 다만 도덕적인 의미로서 지상에 평화를 이루는 것을 의미한다. 1963년 Mexico City에서 열린 CWME(세계 선교 및 전도 분과 위원회)에서는 선교가 광범위하게 정의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1968년 Uppsala WCC 총회는 에큐메니칼 신학의 세속화 경향이 최고조에 달했던 때였는데, 이때는 Missio Dei를 인간화(Humanization)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웁살라에서는 모든 봉사 활동이 선교가 되었다. 또 획기적인 사실은 선교의 Agenda를 성경이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제시한다고 규정했다는 점이다.
시대의 요구에 따라서 1950년대의 “봉사”는 서서히 “혁명”으로 선교의 개념이 탈바꿈하기 시작했다(Bosch, 190). 1973년 Bangkok 세계 선교 및 전도 분과 위원회에서는 “Salvation Today"를 주제로 삼았는데, 여기서 선교는 교회가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규정지었다. 선교는 더 이상 불신자들을 타종교에서 기독교로 개종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았다. 이로써 1975년 나이로비 대회에서는 선교의 개념이 해방으로 굳혀졌다(전호진, 35).
1980년 Malbourne 세계 선교 및 전도 분과 위원회에서도 라틴 아메리카의 소리에 귀를 깊이 기울였다. 따라서 1960년대의 Missio Dei가 인간화(humanization)과정이었다면 1970년대에 와서는 해방 신학을 힘입어 Missio Dei가 사회, 경제, 정치적 개념으로 확대 되었다.
그 당시 Missio Dei에 대한 복음주의적 관점
A. 성서 해석학적 문제
원래 선교 신학은 올바른 성경 석의(Exgesis)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 Bruce Fleming에 의하면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
계시 - 올바른 Exegesis(역사적 - 문법적 - 문화적 - 문맥상의 Exegesis) - 성서 신학 - 조직 신학 - 선교 신학(B. Fleming, 61)
그러나 에큐메니칼 진영은 그 당시 성행했던 비평적 해석학(Textual Criticism, Literary Criticism, Higher Criticism)의 영향을 받아서 성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축소하거나 부인함으로써 선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는 상황적 요소가 성경의 권위 못지않게 작용하게 되었다. 특히 Bultmann 이후 New Hermeneutics의 영향 등으로 성서의 권위가 격하되거나 상실되었고 또 성경 해석도 실존주의적으로 흐르게 되었던 신학적 배경 속에 형성되었음으로 선교 신학도 상황에서 시작하여 성경에서 유사사건(Proof Text)을 찾는 식으로 진전되었다. 해방신학과 민중신학이 좋은 예이다.
B. 하나님의 왕국 개념의 변형
19세기까지는 선교는 영혼구원 및 교회 중심적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맥락에서 3자 교회를 세우는 것이 선교의 중요한 정책으로 존재했다. 반면에 에큐메니칼 진영에서는 20세기 초에 하나님의 왕국 확장이 선교의 목표로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1928년 IMC 예루살렘 회의에서는 미국의 사회 복음주의자들이 이를 권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1938년에 열린 IMC Tambaram 대회에서는 선교의 목표를 “새 땅”이라고 규정지었다. 따라서 세속적인 왕국 개념을 갖는데 일보 진전했다.
하나님의 왕국을 세상으로 보게 하는 데에는 누구보다도 Hoekendijk의 영향력이 컸다. Hoekendijk의 사상에서는 선교가 하나님의 왕국과 세상에 동시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에게 있어서는 사실상 하나님의 왕국은 더 이상 종말론적인 의미를 가진 것이 아니라 세상 그 자체가 종말론적인 왕국과 조화를 이룬 것이었다. 이에 반하여 복음적인 입장은 하나님의 왕국은 종말론적인 것이며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도 미완성 단계에 있다고 본다. 같은 맥락에서 복음주의 계의 대표적 선교신학자 중에 하나인 Arthur F. Glasser에 의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최소한 다음 다섯 가지 성격을 갖고 있다.
1) 하나님이 왕으로 통치하시는 영역이다.
2) 하나님은 구원받은 심령 가운데 통치하신다.
3) 하나님의 백성들은 “종”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
4) 하나님의 통치는 그의 백성과 세상과 보이지 않는 세력의 저항을 받게 된다.
5) 하나님의 통치는 항상 미래지향적이다.
C. 종말론적 개념의 세속화
19세기에서 20세기를 넘어가며 신약 신학 분야에서는 종말론적 개념의 재기시키려는 노력에도 불구하고(Johannes Weise 와 Albert Schweitzer)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이미 종말론적 왕국 개념이 세상과 일치하는 쪽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Missio Dei 는 세속 역사 중에서 하시는 하나님의 일로 규정되었다.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라든가 주님의 재림 등을 등한시하거나 무시한 세속적인 역사관이다.
D. 유물론적인 구원관
전통적으로 구원은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영적인 차원이 주가 되어왔다.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에 그 기초를 둔 것이었으며 구원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와 또 우리와 우리와의 관계가 화목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은 구원을 현 세상적이며 수평적인 것으로 변질시켰다. 죄의 개념도 개인적인 죄에서 사회구조의 모순들로 바뀌게 되었다. 샬롬은 평화, 조화, 번영이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Uppsala WCC 총회에서는 인간화(Humanization)로 규정지었다. 누구든지 불의와 고통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 이웃과 관계를 회복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은 완전한 인간이 되어 가는 증거로 보았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가 말씀하는 온전한 인간이 되어 가는 것으로 간주했다.
이런 개념이 1970년에 와서는 정치적인 의미를 띠게 되었다. 모든 사회악과, 인종차별과 정치 구조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곧 구원이 되었다. 이런 모든 개념들은 영원성을 결여했으며 초자연적인 요소를 배제했다. 다만 이 세상에서 누리는 유토피아적 차원만을 제시했다.
E. 20세기 중반의 하나님의 선교가 준 교훈들
위에서 언급한 바대로 하나님의 선교 개념은 복음주의자들이 받아드리기에는 너무 진보적이었고, 이 세상적이었고, 전통적인 선교의 개념들에서 벗어난 면이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돌이켜 보면 복음주의자들이 간과하고 선교를 단순화 시켰던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교회론의 대두로 말미암아 복음주의진영에 많은 변하를 초래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가장 큰 영향은 아마도 1974년에 로잔에서 개최된 로잔 I 차 세계복음화 대회를 계기로 선교가 복음전도 이상의 것이며 총체적인 것이라는 데 세계교회의 합의(consensus)를 이뤄낸 것을 들을 수가 있다. 그 외도 다음과 같은 교훈들을 들을 수 있다.
첫째로, 좁은 의미의 선교사역에 포커스를 맞춤으로 말미암아 더 큰 세상, 곧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와 문화들에 대해 등한시 할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창조의 세계에 대한 강조와 교회개척과 성장에 초점을 맞춘 선교양식 간에는 마치 외줄을 타는 것 같은 위험성을 양쪽으로 다 갖고 있다. 전자를 좇을 경우 선교의 초점이 흐려져서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발하신 첫 신호인 “회개하라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느니라”의 첫 부분인 하나님의 왕국의 입문이 위축되거나 그 강조점을 잃을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반대로 복음주의 선교가 강조한대로 후자를 택했을 경우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인 창조의 세계와 문화에 대해 접전(engage)하지 못하고 이를 세상의 물결에 맡겨버릴 수가 있다. 물론 변화된 사람들이 문화를 정화 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친히 이 세상과 문화를 향해 선교하고 계신 것을 잊어버리고 인간의 선교(human mission)로 전락할 가능성이 있다. 20세기 후반과 21세기에 들어서면서 복음주의 선교학자들이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교회론을 주장하며 준 가장 큰 교훈 중에 하나는 바로 하나님께서 선교를 창안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선교에 초대하셨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선교가 사회과학에 기초를 두지 않고 선교신학에 기초를 두게 한 것이다. 또 선교를 이원론적으로 보지 않고 일원화시켜서 하나님의 선교로 통합되게 한 것도 큰 기여라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로 후기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교회론의 연관성을 주장한 이들의 기여 중에 가장 현저한 것은 교회의 선교적 본질의 회복이다. 아마도 이것이야말로 가장 큰 기여 중에 기여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걸쳐서 겨우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던 교회의 선교적 본질을 재발견한 것이다. 이미 오순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적 본질을 보았다. 특히 이런 사실이 성령의 강림과 교회를 개척하심으로 보여준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선교가 오염되어 이런 사실을 선교신학화 하지 못한 상태에서 현대선교운동이 일어났고, 지금 생각해 볼 때 그 기초가 너무 얕은데 있었다. 더 깊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적 본질에 두지 않고,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데 두었고, 20세기 후반에 선교학의 바통이 북미주로 넘어오면서 더욱 더 사회과학적이고 실용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이는 필연적으로 신적(divine)인 부분의 결핍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에스코바는 이렇게 평했다. “선교가 단일평면적이고, 예측이 가능하고, 마케팅 원리에 그 기초를 둠으로써 단순 논리적화 되었다[나의 정리].”
셋째로, 이런 유익성이 있는 반면에 위험성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이는 아주 노골적으로 서구적이며 북미적이다. 이는 지역선교적이며 글로벌 미전도 선교를 동한시하는 착상이기도 하다. 물론 글로벌 미전도 선교도 각 지역교회가 하면 된다는 논리가 그들의 주장 밑에 깔려 있을 수도 있다. 만일 그렇다 해도 이는 지극히 이상주의적이며 성경과는 다른 견해이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다중적이며 동시적 선교책임을 주장하고 있다. 사도행전 1:8이 그 좋은 예이다. 선교는 교회가 있는 곳에서도 하고, 동시에 선교팀들이 파송되어 미전도 지역에서도 해야 함을 신약은 명명백백하게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점을 의도적으로 보강하여 이 이론을 받아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21세기 삼위일체 하나님과 선교에 대한 복음주의적 입장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금도 선교를 하고 계시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인가? WCC진영은 세상으로 너무 깊이 하나님의 선교가 기울러지는 우를 범했다면 복음주의 쪽은 그 반대로 너무 깊이 기울러지는 또 다른 우를 범했을 가능성이 있다. 현대선교운동이 1792년이 일어났을 경우 마태복음 28:18-20을 하나님께서 크게 사용하신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를 향한 하나님의 선교나 문화 속에 깊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선교사역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 동안 침묵을 했다. 더 큰 창조의 세계에 대해서는 마치 이신론적으로(Deism) 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천지와 인류를 창조하시고 우주가 기계적으로 돌아가게 해놓으신 다음에 멀리서 가만히 보고만 계시다고 보는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주장에 의하면 마치 시계에 태엽을 감으면 스스로 돌아가는 것처럼 이 세상도 그렇게 자연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견해이다. 이를 선교에 적용시켜보면 선교를 교회와 선교사들에게만 맡겨 놓고 하나님께서는 멀리서 불구경하시듯 보고만 계신다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이런 견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처럼 지금도 적극적으로 역사하고 선교에도 동참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는 진영을 바로 이런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주는 일을 과거에도 했고, 지금 선교적교회론과 하나님의 선교가 통합되어 선교를 하는 과정 중에서 이런 강조가 더 강하게 이뤄지고 있다.
우리는 지금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통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 전반에 걸쳐서 계속적인 간섭과 선교가 이뤄지고 있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효과가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첫째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온 우주를 통치하시며 선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범세계적으로 더 확장되고, 더 나아가서 통치하는 영역이 더 넓혀지는데 적극적으로 참여 하고 계시다는 점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님의 선교를 선교학적으로 다 파악할 수는 없다. 심지어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고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아젠다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호켄다익의 의견) 방법으로는 더 더욱 다 알 수가 없다. 그것은 자칫 잘못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대로 상상해보는 것이 될 것이다.
우리가 추측해볼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이미 성경에서 계시하신 대로 하나님 편에서 보았을 때 선교를 이행해 나가고 계신다는 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선교를 하신다는 말 자체도 하나님께서 아무것이나 하신다는 뜻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은 계시(성경말씀)보다 더 위에 계시고, 하나님의 계시에 얽매이는 분은 아니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경(계시)을 통해서 어떻게 하시겠다고 말씀해놓고 그것을 지키지 않으시고 다르게 행동하는 분은 더욱 아닐 것이다. 가령 복음을 통해서 온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는데 복음을 통하지 않고서도 인류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는 다원주의적인 발상을 우리는 배제해야할 것이다. 이 다원주의적인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 묶어둘 수도 없고 소위 기독교적인 그리스도는 더욱 그렇게 할 수 없고 하나님이 자유의지를 가지시고 누구에게도 구속되지 않으신 채 움직일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따라서 다르게도 하실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계시할 수 있다고도 주장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서적인 세계관은 아니다. 이것은 이성적이며 세상적인 의견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선교의 범위가 종전에 비해서 넓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원칙 없이 넓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경우는 세상적인 의견 대 성경에 나타나있는 하나님의 계시의 대결을 할 수밖에 없다. 이 때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쪽을 선택했을 때는 오류를 택하는 것이고 또 다른 쪽을 선택했을 때는 진리를 택하는 것이다. 이 둘이 똑같이 진리일 수는 없다. ‘사과가 아니다’와 ‘사과이다’가 동시에 진리일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다원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하나님의 임의성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서 계시한 하나님의 약속을 계시한 내용을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내용과 동일시될 수 없다. 따라서 한쪽은 진리이고 한쪽은 거짓일 수밖에 없다. 이로써 다원주의적인 입장을 택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리를 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최소한도 성경에 나타난 진리는 버리는 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허용할 수 없다. 이처럼 하나님이 통치를 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무런 근거도 없이 하신다는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하는 것 이상의 하나님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 깊이는 우리가 다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역시 임의로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계시한 것을 지키시는 가운데 계시한 내용을 이루어 가는 방향으로 지금도 계속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약속대로 역사하고 계시다는 사실에 대한 아주 흔하고 근본적인 예는 그리스도를 보내심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구약에 그리스도를 보내시겠다고 누누이 말씀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셨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이 땅에 사시게 하시고 구속역사를 완성케 하신 후 또 다시 승천하실 수 있게 하셨다. 이것도 역시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고 선교하신다는 커다란 증거 중에 하나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 그리스도가 승천하신 후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보내셨다. 그리고 이제는 성령님을 통해서 역사를 하시되 계시를 무시하지 않으시고 약속을 지키시면서 역사를 하신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역사를 볼 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지금도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아들도 역사하시고, 성령님도 역사하시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계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삼위일체 교리를 믿는 우리라면 하나님 아버지도 또 하나의 인격이시기 때문에 아버지대로 역사하시고 또 아들도 구속역사를 마치신 다음에 그대로 하나님 우편에 앉아만 계시지 않고 계속 우리 가운데 거하시면서 역사하시는 신비로운 면이 있다는 것이다. 또 성령께서는 이 땅에서 지금 역사하시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신비롭게 성령이 역사하는 가운데 아버지도 계시고 아들도 함께 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선교는 이렇게 선교학으로 규정할 수 없는 면들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선교학에 있어서 기존의 패러다임을 바꾸어야할 것이다. 지금까지는 선교학이 이성주의와 계몽주의 사상이 만들어놓은 학문적인 틀에서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칸트의 역할도 매우 크다고 볼 것이다. 이는 곧 현대주의(modernism)에 입각한 학문방법을 적용한 것이다. 즉 우리가 검증될 수 있는 것, 논리적인 것, 이성적으로 어긋나지 않는 것, 이런 것들을 기반으로 해서 학문적인 기초를 세웠다. 따라서 신학적인 기초 위에 사회과학적인 점들과 접목시켜서 선교학을 형성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제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선교관을 소유하는데 그치지 말고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관을 갖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된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지금도 역사 하시는 것을 알고 종종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역사하시는 사실을 경험케 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그분이 지금도 살아계시며 지금도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더욱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께 의견을 묻고, 하나님에게 기도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예수그리스도의 능력을 기대하고, 성령님을 의지해서 부흥의 역사가 일어날 것과 부흥을 통해서 성령께서 사람들과 문화를 변화시켜 주실 것을 확신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소위 제2 선교개혁 때 주장했던 이중적인 성령의 역사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내적 갱신과 외적인 변화들이 올 것에 대해 우리는 경험케 될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평가해 볼 때에 우리는 지금까지 선교학을 하면서 많은 면들을 간과하였다. 그러나 이제 다시 등한시했던 영역을 찾아야할 것이다. 선교와 기도, 선교와 부흥, 선교와 회심, 선교와 대각성, 선교와 성령님의 선재적인 역사들, 하나님 아버지의 계속적인 관여, 나라와 천지의 운행과 국민들의 심리를 주장하시고 통치자들을 지금도 주관하시는 이런 영역들을 우리는 선교학과 더불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와 교회만이 선교하는 것으로 선교를 국한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우를 범할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고 이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피동적으로만 호응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 역시 얼토당토않다.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준 메시지가 아니다. 성경은 우리가 명령을 받았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고 하였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선교적 본질을 가지고 재창조된 교회공동체이기 때문에 그 본질 상 선교적이라는 점이 우선된다. 이런 전재를 가질 때 교회의 선교를 통해서, 교회의 삶과, 전 생활과 전존재와 그리고 교회가 파송하는 선교사팀들을 통해서 선교가 이뤄질 것이다. 이런 상황속에서는 교회가 선교하기 때문에 이제 선교사를 보내지 않아도 괜찮다는 이론도 호소력을 잃게 된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교회의 경우처럼 본질적으로 선교적이기 때문에 교회가 선교할 때 바울사도가 이끄는 선교팀들도 동시에 선교했다. 우리는 이런 모델을 좇아서 선교팀들이 지금도 세계 각 곳으로 속속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전략적이면서도 결정적인 선교에 계속 참여해야할 것이다. 어떤 때는 그 곳에서 사는 것을 (현존하는 것- presence) 통해서, 또 직접 선포하는 것을 통해서, 또 다른 때에는 그 상황이 요구하는 것들을 채워주는 것을 통해서 선교해야할 것이다.
이 모든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큰 그림을 한시라도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데 있어서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 핵심은 곧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데 있어서 좀 더 느낄 수 있는 것은 치유와 구제와 개발과 공의와 환경에 관한 책임을 지는 것 등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일에 있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가면서 그 수위를 조절해야할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인 복음을 전하는 것, 즉 회심이 이루어지는 것과 제자가 양성되는 것이 결코 등한시되거나 제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님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선교는 매우 희망적인 사업이다. 우리의 관점에서만 보았을 때 선교는 매우 비관적인 사업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비관적인 일들을 시키지 않으셨다. 희망적이고 실현가능한 일을 시키셨다.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 일을 행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도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셨다. 21세기 선교는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가운데 교회와 선교사 팀들이 참여하는 것이 되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적 시각은 특히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자리를 잡아 가고 있다. 21세기에 접어들어선 후에 이런 시각을 가지고 저술 된 대표적인 선교학 책들만 예를 든다면 다음과 같다.
넷째로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교회론 분야에 관한 책들의 예를 들어 볼 필요가 있다.
1. 1999년 10월에 열린 WEA Mission Commission이 주최한 선교대회에서 아지쓰 퍼난도가 전한 “하나님: 선교의 근원, 출발점 끝”과 “예수: 선교의 메시지와 모델”과 성령: 선교의 신적 실행자“와 ”교회: 삼위일체의 거울“이라는 강의안을 토대로 한 글들이 있다. 여기에서는 아직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신학이 정립이 되지 못한 상태이었다. 다만 성서적 기초를 놓았을 뿐이다. 퍼난도는 교회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거울이 된다고 했다. 빌 테일러 편집, 21세기 글러벌 선교학, 기독교문서선교회, 2000/2004년(한글번역판), 331-443
2. 바티칸 II차 공회에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의미로서의 선교에 대한 개념이 로만 가톨릭교회의 공식선교관으로 채택되었다. 물론 선교가 미전도지역에서의 교회개척과 전도화를 하는 것이라고도 주장했다. 하지만 이런 것도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의미로서의 선교로 보았다(이상은 286-304페이지). Stephen B. Bevans & Roger P. Schroeder, Constants in Context: A Theology of Mission for Today, Maryknoll: Orbis, 2004/2007(한글번역판) 중에서,
3. 아마도 복음주의자이자 구약학자로서는 처음으로 삼위일체 성서선교신학을 형성했을 것이다. 그는 성경 전체가 선교적이라는 사실을 해석학적인 면에서부터 실제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성서적으로 그의 저서를 통해 정립하였다. Christopher J. H. Wright, Mission of God, IVP, 2006/2010(한국번역판)
4. Craig Ott, Stephen Struss, Timothy Tennent, Encountering Theology of Mission: Biblicla Foundations, Historical Developments and Contemporary Issues, Grand Rapids: Baker, 2010에서는 다음과 같은 점이 강조되었다.
(1) 복음주의 선교학자 중에 성서적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와 교회의 선교와 선교사역들의 영역과 범위를 정리하였다.
(2) 이제까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주장한 진보적인 선교신학을 복음주의 입장에서 정립하였다. 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포함해서 보다 광의적으로 선교를 보았다. 다만 다른 광의적인 선교를 주장하는 에큐메니칼 선교신학이나 RC 선교신학과 다른 점은 첫째는 전도를 통한 회개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점을 명백하게 했다. 둘째로는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와 교회의 선교(mission)과 선교사역들(missions)을 나눔으로써 실제로 선교사들이 선교사역에 참여할 수 있는 선교신학적인 기초를 제시했다. 이렇게 주장한 사람들은 이들이 처음은 아니다. Scott Moreou외 2인, Introducing World Missions: A Biblical, Historical, and Practical Survey, Grand Rapids: Baker, 2004에서도 이런 선교신학적 구조에 대해 언급한바 있다.
5.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신학적 구조는 Timothy Tennent, Invitation To World Missionss: A Trinitarian Missiology for the Twenty-first Century, Grand Rapids: Kregel, 2010에서 통합된 형태로 나타나 있다.
(1)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원론적인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교에 참여하는 자는 영적인 것과 비영적인 것을 나누는 것을 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조의 하나님이기도 하며 동시에 영적이시기도 하다.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모든 사역은 그것이 소위 영적 차원에서 교회관련 사역이든 BAM을 하는 것이든, 그 어떤 통합적 사역을 하는 것 모두가 다 정당한 선교사역일 수가 있다. 좋은 예가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하신 사역이다.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기도 하시고 선행을 행하기도 하신 것이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델이다.
(2) 문제는 이런 경우 선교사역의 범위가 너무 넓고 커서 무엇이 전략적이며 우선성을 갖는지 모르고 지낼 수가 있다. 그런 면에서 볼 때에 선교사역(missions)을 통해 전략적인 사역을 먼저 할 수 있게 한 면이나, 회개와 믿음을 하나님의 나라의 입문의 조건으로 한 Craig Ott 박사 등의 책은 우리에게 실제적인 지침을 주고 있다.
결론
지난 세기 말과 21세기에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가 재조명되면서 부각되기 시작한 선교신학적 의의 중에 가장 획기적인 것은 선교적 교회론의 출현이라 하겠다. 이것이 주는 선교적인 의미는 교회가 글로벌화 되면서 더욱 더 큰 영향을 주고 있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적 본질에 따라서 보내심을 받은 교회야 말로 본질적으로 선교적이며 이런 정체성을 회복하는 교회들이 범세계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할 때에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하는 것은 그 만큼 빨라질 것이다.
특히 교회론과 선교를 선교신학적으로 통합한 것은 그 어느 시대에도 찾아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로써 북미주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선교적교회론의 부상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선교는 더 이상 선교사를 보내는 행위만으로 볼 수 없게 되었다. 선교는 하나님의 선교에 교회가 참여하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교회가 처해 있는 문화권에서 주위 문화 속에 들어가서 복음으로 변화를 꾀하는 것(engage)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교팀들을 세상 모든 족속들, 특히 미전도 족속들에게 파송하는 것 -- 이 모두를 포함하게 되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임재를 통해 선교적 공동체로서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을 통해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게 된다. 모든 문화권에 이런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하는 교회들이 생길 때 그 어느 때보다 세계복음화의 진척은 빨라질 것이다.
비록 20세기 중반에 처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 개념이 형성되었을 때만해도 복음주의자들은 이를 회의적인 눈으로 보았다.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이런 개념이 복음주의자들의 손을 거치면서 새로운 세계선교의 총아로 변신의 변신을 거듭했다. 또 교회론과 통합이 이뤄지면서 이제는 것 잡을 수 없는 속도로 선교계를 재편하고 있다. 우리는 이런 변화를 하나님께서 시대적으로 주시는 것으로 보고 하나님의 선교에 초대에 적극 호응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하루 속히 이 세상에 펼쳐지게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실로 한없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리의 소원은 하루 속히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하나님의 나라로 변화케 하시는 데 있다. 이런 일에 초대를 받은 교회와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큰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선교하시는 데 우리를 초대해 주심에 대해 한없이 기뻐하며 그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선교할 수 있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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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하나님의 선교와 선교적 교회론의 관계 (이태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