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택(26) - 새 언약 2 98,6,22 이근호 (구득영 정리)
☞ 하나님의 선택, 178 페이지
⊙ 예수 그리스도는 12 제자를 사도로 선택하셨다. (책)
*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열 두 고을의 연합체로 이스라엘을 보고 계시는 것이다. 한 고을에 한 사람씩인데, 따로 따로 보내는 것이 아니고, 어떤 경우에는 70명씩도 보내시는 것이다. 이렇게 열 두 고을에 보냄을 받은 자들이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단순히 땅 따먹기라는 차원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 땅에 하나님의 말씀이 떨어져 있으니까, 보냄을 받은 자들은 다만 여기에 부합되는 '백성 모으기'를 하면 되는 것이다.
◈ 말씀에 부합된 새로운 이스라엘의 창조 - 중요한 것은 말씀인데, 그 말씀이 떨어진 땅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이야 엉뚱한 놈이야 있던지 없던지 상관없이 말이다. 그리고 이 말씀 안에 이스라엘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에 부합된 이스라엘의 창조를 위해서 열 두 고을을 가는 것이다. 기존의 유대인들이 문제가 아니고 말이다.
* 우리가 목회를 하면서, 기존의 있는 사람을 어떻게 사람을 끌어 모으느냐, 우리편을 만드느냐는 것이 아니고, 말씀의 성취가 어떠한 모습을 하느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것이다. 말씀에 매인 목회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 시골 교회에 목회를 하러 가서, 그 사람들이 나름대로 생각하는 천국관이 있는데, 이것이 말씀에 비추어보아서 아니면, 그 사람은 천국 백성이 아닌 것이다. 평소에 알고 있는 것은 고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말씀인 것이다.
* 교회 장로가, '성경은 모르겠고 이근호에게 배웠으니 나가달라' 라고 하면, 그러면 그 교역자는 교회에 도움이 안 된다고 거부하는 장로의 태도가 성경적인지를 알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을 보아서 "말씀에 관심이 있는 사람만 천국백성이다" 라고 하면 그렇게 하는 것이지, 그냥 돌보아주고 관심을 가져준다고 천국백성은 아니라는 것이다.
* 말씀으로 천지창조를 하시고, 구원을 하시는 것도 말씀으로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가 이 말씀에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장로처럼 말씀은 모르겠고, 다른 것에 관심을 둔다면 하늘나라와는 무관한 것이 아닌가?
* 예수님은 그 당시에도 열 두 지파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고 있으면서, 이렇게 따로 열 두 제자를 다시 뽑는 것은, 기존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말씀을 지키든지 안 지키든지 그것은 모르겠고, 다만 자기는 말씀대로 하시겠다는 것이다.
* 지금 이 세상은 생명나무에서 추방된 지옥인데, 그렇기에 지옥의 백성들이 무엇이라고 하든지 상관이 없고, 다만 우리보고 묻는 것이 쫓겨났으니 보살펴 주겠다는 것이 아니고, "너는 말씀에 관심이 있는가" 라는 것이다. 남들이 시켜주어서 목회를 해야 한다면 하지를 말고, 주님이 시켜주셨으면 주의 말씀 성취에 관심을 두고 목회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 이러한 정신을 가지고 12 제자를 평가를 해야지, 그래서 오직 말씀을 위한 제자가 되어야 하는 것이지, 교회를 위한 제자는, 그래서 자기 교회를 자랑하는 자는 제자가 아닌 것이다.
* 이근호 때문에 그러한 일을 당한다면, "나는 이근호라는 인간을 모르고, 안다면 책이나 한 권을 사서 읽어보았지, 그 놈이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진 것도 아니고, 말씀으로 그 놈을 박살을 냅시다" 라고 단호하게 장로에게 말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을 택하셨고, 이 열 두 제자들은 오직 말씀 성취에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79 페이지
⊙ 예수님과 세례요한과 열 두 제자들이 똑같이 외친 구호가 있으니, "회개하라!" 라는 것이다. (책)
* 그러나 사실 "회개하라!" 라는 말은 상대방을 모독하는 말이다. 무엇을 잘하고 있는데, 그래서 잘못된 것을 조금만 수정하면 된다는 의미가 아닌 것이다. 완전히 부수고 새로 시작하라는 것이다.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박살을 내는 것이다.
* 라즈니쉬는 [ 나를 따르라 ] 에서, 그는 산상설교를 말하면서 '회개하라' 라는 것을, 자기 자신의 순수함을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으로 설명을 하는 것이다. 이 사람은 기독교에 대해서는 알지만, 성경에 대해서는 무지한데, 이렇게 자기 나름대로 사상을 펼쳐보는 것이다. 인간의 순수함으로 말이다.
* 그러나 구약의 언약으로 보면, 이 '회개하라' 라는 것은, 세례요한은 선지자인데, 선지자는 자기의 의견을 독단적으로 제시할 수가 없고, "선지자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것을 말하는 구약의 언약 틀에 맞아야 선지자가 되는 것이다.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말이다.
* 장차 오실 메시야를 염두에 두고, 미리 일방적으로 찍어놓은 사람이 선지자인 것이다. 모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지어지는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세례요한이 선지자라는 것은, 세례요한의 사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세례요한이 장차 보여줄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 어떠하냐" 라는 것이다.
* 그러면 선지자의 언약적 틀에 있어서 회개라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 회개가 '회개하라' 는 명령법으로 되어 있지만,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성취 차원에서 이루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회개하라' 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 아니고, 하나님의 선택된 사람에게만 국한해서 하시는 말씀인 것이다.
* 그러면 우리에게 이 '우리' 라고 하는 자리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택한 자로 넘어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회개라는 것은 우리의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 이것을 말라기에서,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이키는 것을 회개라고 하는데, 우리가 아비가 아닌데 돌리는 것이 어디 우리의 마음대로 되겠는가?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아비가 자녀의 마음을 돌리게 하는 것이 회개의 원리인데, 하나님께서 택한 자의 마음을 돌이키시는데, 그 현상이 바로 '회개하라' 에 반응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 그런데 라즈니쉬는 회개를 신 앞에 자기의 모습을 세우는 것으로 보았는데, 그러나 그 신은 분명히 가짜라는 것이다. 라즈니쉬는 자기의 기준으로 회개를 하지만, 언약의 개념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이 세상에 나름대로의 기준으로 회개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 선교사 훈련을 시키면서, 회개를 촉구하는 과정에서 '신 앞에 세워라' 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 신은 인간이 다가갈 수 있는 신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나이키인가?
* 선지자는 모든 것이 이미 하나님의 작정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이다. 예레미야도 자기가 태어나고 싶다고 태어난 것이 아니고, 이미 하나님께서 선지자로 작정을 하셔서 태어나게 하신 것이다. 추상적으로 그냥 정해졌다고 말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에 밑거름해서 정해졌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말씀의 성취이다. 그러므로 예레미야는 말씀성취의 차원에서 미리 그 운명이 정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들도 비록 교회에서 쫓겨나더라도 '더러워라' 라고 할 필요도 없고, 오직 말씀성취의 차원에서 된 것이라고 보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를 좁은 길을 걸어가게 하시는 것이다.
* 우리는 주님이 아무 일도 안 하고 놀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안 된다. 그 분은 지금도 우리를 십자가의 좁은 길로 인도를 하시는데, 우리는 그 길에서 날마다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다. 주님과 우리의 싸움인 것이다. - "이리 오너라" ↔ "못 갑니다"
* 12 제자가 열 두 고을로 갔을 때, 그들은 기분은 좋았겠는가? 너희들은 양 같은데, 이 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이것이 기분 좋은 이야기인가? 물려서 죽는 것이다. 말씀성취를 위해서 주님이 우리를 밀어보내시는 것이다. - "가, 임마 !"
* '포세이돈 어드벤처' 를 보면, 신부가 다른 사람을 위해서 자기를 희생하고 살려주는데, 그 신부의 사고방식이 자기 할 일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신 이유를 생각하는 것이다. 사고방식이 세상 사람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 이리들 가운데 왜 양을 보내는가? 씹히라는 것이다. 세례요한이 이리 씹히고 저리 씹히고 해도 끝까지 놓지 아니한 것은 '회개하라' 는 것이다. 이 '회개하라' 는 것은 회개하면 살려준다는 것이 아니고, "내 백성이 어디 있는가?" 라는 것이다.
* 열 두 고을 중에서, "내 백성은 어디에 숨어 있느냐, 여기 여기 다 붙어라!" 라는 것이다. 이 '나오라' 라는 의미가 '회개하라' 라는 것이다. 그러면 이 '회개하라' 라는 내용이 무엇인가?
(말 4: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말 4:6)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 엘리야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보내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하나님이 왜 보내셨는가? 자기의 말씀성취를 위해서 보내신 것이다.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켜서, 자녀가 아비에게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것이다.
* 탕자의 비유에서 보여주듯이, 멀리서 오는 탕자를 보고 아버지가 뛰어나가자, 그제야 아들이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것이다. 그 전에 이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다.
*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서 너무 비참하게 평가 절하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생활은 비록 비참할지라도 하나님이 우리를 자녀로 삼았다는 것이다. 합격이라는 것이다. 슬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 개척교회를, 부교역자 생활을 하면서 할 일이 없다고 답답해하는데, 그러나 실제로 할 일이 너무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주님이 일하고 계시니까 말이다. 주님이 우리를 가만히 안 두시는 것이다.
* 여기서 신학적으로 복잡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세례요한은 어디에 포함되는가? 엘리야의 부분 집합이 되는 것이다. 엘리야는 모든 선지자들의 대표자인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가 온다고 예언을 해놓고 엉뚱한 세례요한이 왔고, 또한 다윗을 보낸다고 해놓고 예수님이 오신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렇게 엘리야와 다윗을 보낸다는 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고 말겠다는 것이다. 엘리야, 다윗은 하나의 심부름꾼인 것이다. 그런데 무조건 하나님 마음대로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준 약속의 범위 내에서 하시는 것이다.
* 이 세례요한도 엘리야에게 포함되는데, 선지자 전체를 엘리야의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한 것이다. 이들이 지목한, 신약에서는 세례요한이 겨냥한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인 것이다. 자기는 물로서 세례를 주면서 정말 제대로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가 바로 예수라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 1장의 내용이다.
* 학생들에게 왜 그리스도가 필요한가? 책가방만 있으면 되지 않는가? 필요도 없는 예수를 억지로 필요한 것처럼 교회에서 만들고 있지는 아니한가?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인식이 든다면 그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는 우리가 필요로 해서 만나는 분이 아닌 것이다.
◈ 그러면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종말에 나타나시는 분이다. 우리가 필요로 해서 만나는 분이 아니고 말이다. 그리고 이 분을 통해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전에는 알지 못하는 세대에서는 봐 주었지만, 이제는 마지막에는 불심판을 하기 위해서 죽은 자들에게서 살아남는 증거를 주셨다는 것이다. (행 10: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행 10:42)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행 10:43)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 이러한 점을 우리가 분명히 한다면 논다는 개념이 사라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일하신다고 자기는 놀아야 하겠다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을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생계수단으로 이용했다는 것이다.
* 그래서 엘리야나 12 제자의 이야기는 그냥 나타남인 것이다. 우리가 왜 목사가 되었는가? 그것은 그렇게 나타난 것인지, 내가 무엇을 하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이다. - 최후의 카운터다운(영화)
* 12 제자를 두고 제일 무식한 소리는? 자기들이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5장에서 귀신 들린 청년이 정신이 온전해져서 예수님을 따르려고 하니까, 예수님이 이를 거절하셨다. 예수님을 따라오겠다는 청년은 거절을 하시고, '주를 나를 떠나소서' 라고 한 베드로는 데리고 다니시는 것은, 예수님이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 아니고, 말씀성취의 차원에서 그렇게 이루어진 것이다.
* 왜 우리는 주님의 나타나심에서 머무르지를 못하는가? 왜 자기 자신이 꼭 거기에 들어가야 하는가?
* 세례요한이 성령의 예언으로 태어났는데, 이것도 그냥 나타남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모습인 것이다. 그냥 하나님의 말씀성취의 결과에 의해서 나타남인 것이다. 옥토에 떨어진 씨앗의 모습이다. 그냥 열매가 맺히게 되어있는 것이다.
* 목회자 스스로가 나타남에 확신이 없으니까, 그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함께 불안해지는 것이다. 자기가 뭔「?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온 교회가 진동을 하는 것이다.
* 이 점을 어렴풋이 아는 사람이 있으니, [ 누가복음의 통일성 ]을 지은 로버트 오툴이다. 천주교 신부인데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교회보다 말씀을 우선한다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0 페이지
(마 11: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 유대인들은 문자적으로 엘리야를 기다렸다. 이것이 바로 세대주의의 허점이기도 한데, 만약에 오는 사람이 세례요한이라면 예언도 그렇게 하시지, 왜 하나님은 엘리야라고 하셨는가 하는 점이다.
* 그러니까 성경을 있는 그대로 믿겠다고 하는 문자주의자들도 하나님은 피해 가버리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 해석학' 이라는 것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것이다.
* 그러면 엘리야가 세례요한이라고 하는 그러한 논리가 성립이 되는가? 해석학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무엇을 제대로 해석을 해서 믿겠다고 하는 그러한 시도는 다 부정되어지는 것이다. 인간 편에서는 성경을 주어도 도저히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다.
* 세례요한이 '회개하라' 라고 했을 때, 이러한 사실을 믿는 자는 오직 하나님이 택하신 사람이외는 안 믿는 것이다. 못 믿도록 되어있는 것이다.
* 그래서 이 책의 이름이 '하나님의 선택' 인 것이다. 인간의 선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은 그러한 인간의 선택을 공박하고 정죄를 하고 공격해 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선택 행위는 자신들을 지탱하기 위한 소유와 정복의 몸부림이며, 하나님의 선택 행위는 이 땅의 죄와 관련이 있다" 라고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p.27
* "죄를 지은 놈이 그것을 스스로 극복을 해서 천당을 가겠다" 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이것은 일종의 탈옥(Rock up)인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저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함이라는 것이다. 제자들에게는 따로 말씀해 주시겠다는 것이다.
(막 4:34) 비유가 아니면 말씀하지 아니하시고 다만 혼자 계실 때에 그 제자들에게 모든 것을 해석하시더라
* 예수님은 인간을 무형체로 보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 아니고, 이미 인간들 외부에 죄가 버티고 있기에, 죄 속에 갇힌 인간으로 보고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을 하셔도 왜곡이 되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말씀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 그래서 이 성경을, 교회를 가지고 해석을 하면 교회가 튀어나오고, 전도를 가지고 해석을 하면 전도가 튀어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한국교회를 비판을 해도 이러한 차원을 뛰어넘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증거하는 것이다. 교회를 비판하라고 성경이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종말과 시간에 대해서
* 그러면 엘리야가 온다고 하는데, 그 의미는? 마 10장의 변화산 사건에서, 거기에 모세, 엘리야, 그리고 예수님이 나타나는데, 세례요한이 없다. 이 세례요한은 모세와 엘리야를 합쳐놓은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예수님에 대해서 세례요한이 증거하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 변화산에서는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변화산 밑에 있는 제자들은 누구를 증거해야 하는가? 그것은 모세, 엘리야 역할을, 세례요한의 역할을, 이제는 제자들이 감당을 해야 하는 것이다.
* 이것은 종말이후에는 사건이 더 이상 진척되지 않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 이후에 엘리야나 세례요한의 시대는 지나갔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종말이 되면서 시간이 고정되는 것이다.
* 예수님이 오기를 고대했던 엘리야나 세례요한의 시대가 예수님이 오심으로 벽치기가 되어서 도로 튕겨나서, 이 모세, 엘리야, 그리고 세례요한의 역할을 누군가가 대신을 해야 하는데, 제자들이 바로 이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이미와 아직' 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역사를 가지고 성경을 보니, 이 성경이 어떻게 이해가 되겠는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잡으면 시간의 흐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연의 조화에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약속의 때를 기다리시는 것이 시간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 그렇다면, 다윗은 선택되었는가, 자기가 하고 싶어서 되었는가? 다윗은 택함을 받았던 것이다. 그러면 똑같은 원리로서, 베드로는 선택되었는가, 자기가 하고 싶어서 되었는가? 선택된 것이다.
* 다윗이 선택되었다는 것은 다윗에게 의미를 두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그 전에 말씀을 증거해야 하는 자가 있어야 한다는 원리에 따라서, 예수 이후의 제자들도 예수님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계획이 처음부터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에베소서 1장에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한다.
(엡 1:4)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엡 1:5)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 그래서 이 본문이 구원론에 관한 것이 아니라, 기독론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선택이지, 우리의 구원을 위한 선택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바울서신이 대단히 어려운 것이다.
* 죽은 나사로가 무덤에서 나왔을 때는, 그 사건은 자기 여동생인 마리아와 마르다를 기쁘게 해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인 것이다.
* 대동교회에서 설교를 하면서, 천국에는 마음이 둔한 사람은 들어가지 못하기에 깨어서 기도를 하라고 했는데, 여기서 마음이 둔하다고 하는 것은, 생활의 염려로 말미암아 마음이 그렇게 되는 것이다. 천국이라고 하는 것은 조심해서 걸어가는 것이 아니고, 덮치는 것이다.
* 교회에 나간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새로운 조건을 가지고 덮쳐오는 것이다. 마음이 둔한 자에게는 멸망으로 다가오는 것이고, 깨어있는 자에게는 소망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우리가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고, 천국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이다.
* 그런데 이 천국의 조건이 무엇인고 하니, 술 취하지 말고, 방탕하지 말고, 깨어 있으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정하신 일방적인 조건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혜성인가?
*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고 봉사하는 것은 누구든지 할 수가 있지만, 평소에 생활의 염려로 시달리고 있다면 그것은 믿는 자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 신명기 8장에서, 출애굽이라는 것은, 애굽에 있을 때의 사고방식과는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즉, 물이 없어도, 떡이 없어도 하나님과 더불어 기뻐할 수가 있느냐는 것이다. 돈 없이도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연결하는 고리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 십자가를 진 강도를 생각해 보자. 한 강도가 예수님에게, "하늘나라가 임할 때 자기를 생각해 달라" 라고 하자, 예수님은, "오늘밤에 나와 낙원에 있으리라" 라고 하셨다.
◈ 사랑과 회개 - 그렇다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힘든 천국이 이 강도에게는 왜 그리 쉽게 다가오느냐는 것이다. 이 사랑이라는 것은 하늘에서 주어야 하는 것이지, 이 세상에서는 만들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이 사랑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회개라는 것이다.
◈ 회개하라 ! - 예수님을 중심으로 세례요한, 열 두 제자, 엘리야, 그리고 다윗 등, 모든 선지자들의 공통된 주제는 '회개하라' 이었던 것이다. 모세,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이 회개하라는 것은, 너희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라즈니쉬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킬 때 아버지의 사랑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강도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0 페이지
(마 17:1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일을 회복하리라 (마 17:12)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엘리야가 이미 왔으되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임의로 대우하였도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으리라 하시니
* 인자의 고난은 어떤 차원인가? 엘리야가 당한 고난에 같이 참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예수님은 엘리야가 오리라고 하는 성취차원에서 고난에 들어가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1 페이지
⊙ 이미 세례요한이 엘리야의 역할을 하고 죽었으며 그 뒤를 이어 예수님 자신도 엘리야의 기능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난과 죽음을 받지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책)
*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를 그냥 하늘에서 낚시대로 건져 올리면 되지 않는가? 얼마나 쉬운가? 왜 직접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고, 성령을 보내셔야만 하시는가?
* 그것은 이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이루시기 위함인 것이다. 즉, 예수님 자신의 행함 속에 엘리야의 마음, 아비의 마음을 자식에게로 돌린다는 사랑이 내포된 상태로 우리에게 덮쳐져야만, 그러한 사랑이 있어야만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 그러니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자랑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자식에게로 돌리는 그러한 사랑이 내 속에 담겨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 그래서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마 20:26)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마 20:27)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杵?하리라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 비록 우리가 교회에서 핍박을 받고 수군 수군거림을 당해도, 제자들에게조차 버림을 당한 주님을 생각하면, 우리의 삶이 너무 뽀시랍지(?) 苛째? 매일 야구 보면서 영덕대게 먹고, 마누라하고 매일같이 놀고, 그리고 하루 일하고 육일을 놀면서, 우리가 무엇을 더 바라리요!
☞ 하나님의 선택, 181 페이지
⊙ 엘리야 시절에 이스라엘 모두가 다 여호와를 버리게 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무릎을 꿇지 않는 칠 천 명이 남아 있는 것을 봐서는, 구원의 대상이란 오직 여호와의 은혜로만 이루어지고 그 은혜로 택함 받은 자뿐임을 사도바울은 말하고 있다. (책)
* 남겨진 칠 천인들을 생각해 보라. 물론 구원을 받았으니 기뻐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삶을 살았다. 남들이 다하는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한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들은 엘리야와 같은 운명을 살았던 사람들이다.
* 이것을 지금 사도바울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것은 시간을 거꾸로 해서 그 칠 천명의 운명에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 같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공통분모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 그렇다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으리라' 라는 사도바울의 말은, 사실 그 이전 구약에 예언되어진 그대로 되어지는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그렇게 되어진다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은 그대로 되어진다는 것이다. 은혜로만 구원받는 것이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한번도 구약을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구약을,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2 페이지
⊙ 선지자 엘리야의 활동은 그 자체로서 이스라엘이 주님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것이요, 여기에는 오직 심판과 재앙과 저주뿐임을 알리는 것이다. (책)
⊙ 하지만 바로 이런 파멸의 상황이기에 참으로 주의 능력으로 선택되어서 남게 된 자를 찾아내기 위해서 예수님과 12제자들이 엘리야의 심정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12제자들의 전도를 듣고 주님께 복종하는 자만이 참 이스라엘이다. (책)
⊙ 예수님은 이러한 자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라고 지칭하신 것이다. (책)
(마 15:24)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 대하여
* 엘리야의 심정으로 열 두 명을 뽑았다는 것은, 세례요한은 이미 죽었지만 주님이 이 일을 마무리하고 계시는 것이다. 남은 칠 천명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 뽑힌 열 두 명은 그 생활이 남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자를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이라고 지칭하신 것이다.
* 이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은, 양이 타락했다는 것이 아니고, 양을 잃어버리게 만든 나쁜 목자가 있다는 것이다. 개떡같은 목자로 말미암아 이렇게 되어졌다는 것은, 괜찮은 목자가 나타나면 다시 모인다는 것을, 구약의 예언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 예수님의 잃어버린 양이라는 것은, 선교의 차원이 아니고, 더러운 목자를 공박하기 위해서, '목자도 아닌 놈을 목자라고 하지 말라' 라고 하시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 그 당시의 유대인들은 다 강도요 도둑놈이고, 오직 예수님만이 선한 목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잃어버린 양은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선한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 것이 잃어버린 양의 특징이라는 것이다.
☞ 하나님의 선택, 183 페이지
⊙ 첫째는, 세상에 대한 저주 선언이다.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심한 저주가 주어질 것이라고 한다. (책)
* 성경공부 모임을 하면서, 신학생들의 불만이 '왜 치느냐' 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유는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령을 받았다면 사도바울과 같은 정신을 가지는 것이다. 바울서신들을 읽어 보라. 얼마나 치고 있는가? 숨도 쉬기 어려운 지경인 것이다.
* 우리가 성령을 받았다고 한다면,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악한 이 세상을 어떻게 치지 않을 수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의 죄가 단순히 음란과 풍기문란의 죄가 아닌데, 마태복음 11장을 보면, 회개하지 않는 것은 이 소돔과 고모라의 죄보다 더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설교를 할 때에는, 교인들이 오해할 만한 것들을 소재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치원에서 소풍을 갖는데, 그만 아이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었을 때, 지나가던 젊은 남자가 그 아이들을 다 건지고 그만 자기는 힘이 빠져서 죽고 말았다고 해 보자.
* 과연 살신성인의 정신을 실천한 그 죽은 사람은 천국에 갔는가? 예수님을 안 믿었으면 못 가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없지만 현실적으로는 상당히 곤란해지는 것이다.
*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살인범에게 설명을 하면 이해가 되는데, 이 살신성인을 실천한 사람에게, 그가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에 간다고 하면, 그런 희한한 신이 어디에 있느냐고 당장 튀어나오는 것이다. 너무 무자비하다는 것이다.
* 하나님이 천지를 만들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지향하도록 만들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부터는 착해도 예수님이 아니라, 자기가 착한 쪽으로 정신구조가 바뀌고 만 것이다. 그 사람이 착하고 안 착하고가 문제가 아니고, 그러한 사고방식 자체가 창조적 요소에 비창조적 요소가 들어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 예수 그리스도를 모른다면 그 사람이 아무리 착하고 법 없이도 살아갈 수가 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이 처음의 말씀으로 창조한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자기 자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 설교자는 이렇게 설교시간에 예화를 들어도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을 찾아서 하나씩 끄집어내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빠져버리면 무조건 죄가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이다. 목사는 힘이 들어도 이러한 문제로 고민하고 바빠야 하는 것이다.
⊙ 두 번째는, 그런 가운데서 예수님과 제자들의 말을 알아들은 것은 결코 자신들의 뜻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의 뜻'이었다는 점이다. 결국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결코 아버지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책)
☞ 하나님의 선택, 183 페이지
⊙ 여기서 예수님은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이름'의 역할을 수행하고 계신다. (글)
(출 33:19)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 구약에서는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있었고, 그것이 실체화 된 것이 예수님이고, 주의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주의 이름이라는 것은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아주 실제적인 것이다.
◈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 - 여기서 신학적으로 아주 어려운 문제가 하나 해결이 되는데, 하나님과 하나님 이름과의 차이점이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은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는, 이것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영역이라는 것이다.
* 모세와 같은 경우에 이것이 하나의 상징으로 나타난 것이 성전인 것이다. 성전은 원래의 하늘의 보좌인데,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으로 이 땅에 내려 왔다는 것은 용서해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 이러한 긍휼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가? 없는 것이다. 애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내려고 할 때, 그들은 오히려 모세와 아론을 쫓아내어 달라고 하나님께 구했던 것이다. 광야에 와서도 애굽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 여기서 바로 벌어지는 것이 여호와 전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용사라는 것이다. 애굽에게 벌을 내리신 것은 하나님 이름이라는 것이다. 즉, 전쟁을 일으키고 실시하는 분이라는 것이다.
* 질문 - 애굽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한 방에 박살내지 아니하고 열 가지나 왜 내렸는가?
* 답변 - 그것은 강팍케 하시기 위함인데, 아마 그 당시에 애굽에 열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 신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다. 신 하나에 하나씩 붙여서 박살을 내시는 것이다. 결국 인간이 만든 신은 여호와 앞에서 무용지물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 이렇게 여호와 전쟁을 실시해서 얻은 것은 무엇인가? 생명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하나님 앞에서도 살아남는 생명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떡이 없고, 물이 없어서 죽겠다고 난리를 피우는 것이다. 어처구니가 없는 것이다. 도저히 시비를 걸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 기도 - 하나님 아버지, 지금도 하나님은 자기 이름을 걸고 생명을 주시는 선한 싸움을 하고 계시는데, 우리의 싸움은 물과 떡의 싸움을 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이러한 주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제대로 드러내는 생명의 증인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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