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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내었으나 끝내 천하통일에 성공치 못한 것은 무엇때문이겠습니까?
상제님께서는 이에 대해 "제갈량이 성공치 못한 것은 유상팔백주로 인함이라."하셨습니다. 유상팔백주는 뽕나무밭 800그루를 말하는데 제갈량이 출세하기전 가족에게 남긴 재산을 말합니다. 이 내용은 제갈량이 촉의 후주에게 올린 출사표에 등장하는 내용입니다.
문공신(文公信)성도의 일생은 한 사람의 구도자가 천하 대세에 눈떠 세상을 바로잡는 천지대역사를 집행하기 까지의 한 사람의 구도의 과정이 역력히 드러나 있습니다.
문공신 성도는 상제님께서 어천하시는 1909년 음력 6월 24일의 약 만 2년전인 1907년 가을에야 들어온 성도입니다만, 실질적으로 가장 많은 상제님의 천지공사를 맡아본 성도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 문공신 성도를 알지 못하고는 천지공사를 알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도전 속에 등장하는 문공신 성도의 전 행적을 추적하여 모아보았습니다.
3월 무장 기포
3월 20일에 무장(茂長)에서 기포(起包)한 동학 농민군은 백산으로 본진을 옮기고 전명숙을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한 뒤 호남창의대장소(湖南倡義大將所)의 깃발을 올리니라. 이에 전라도 감영의 관군이 동학군 본진을 향해 진군하매 황토현(黃土峴)에서 양 진영이 맞닥뜨려 대치하니 이 때 태인 강삼리(江三里)에 사는 열여섯 살 소년 문남용(文湳瀧)과 정읍 대흥리에 사는 열다섯 살 소년 차경석(車京石)이, 각기 접주인 중형(仲兄) 문선명(文善明)과 아버지 차치구(車致九)를 따라 이 전투에 참가하니라. 1편 46장
문남용과 전설의 인물 ‘오세동’의 운명적 만남
문남용이 황토현 전투에 참여한 날 해가 뉘엿뉘엿 넘어갈 무렵 어디선가 “생불(生佛)이 들어온다!” 하고 외치는 소리가 들리거늘 남용이 보니 키가 큰 장정 하나가 어린아이를 업고 들어와 자리에 내려놓더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채 미동도 하지 않으니라. 이 때 여기저기서 수군거리기를 “신인(神人)이라, 오세동(五歲童)이라.” 하는데 남용이 그 체구를 보니 일곱 살 정도이더라.
동학 간부들이 오세동 앞에 과자를 놓고 “드십시오.” 하며 예를 다하여 모시되 오세동은 아무 말이 없거늘 누군가 비웃으며 말하기를 “산부처라더니 벙어리를 데려왔나 보다.” 하니라. 얼마 후 오세동이 자신을 업고 온 장정에게 묻기를 “진중에 총 든 군사가 몇이냐?” 하니 그 사람이 대장에게 물어 오세동에게 그대로 전하거늘 오세동이 좌중을 향해 호령하기를 “총 든 군사는 모두 모이라!” 하고 “지필을 들이라.” 하더니 남용을 가리켜 먹을 갈게 하니라.
이에 오세동이 총 든 군사의 숫자대로 손바닥만 한 종이에 ‘푸를 청(靑)’ 자 비슷한 글을 써서 그 군사들에게 각기 나누어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잃어버리면 너는 죽는다.” 하더니 얼마 후 다시 말하기를 “하나는 할 수 없이 죽겠구나.” 하니라.
이어 오세동이 이것저것을 일일이 지시하니 동학군이 그 명에 따라 산을 둘러가며 잔솔가지에 이불보와 치마를 뜯어 중간 중간에 쳐 놓고 밤새 간간이 관군을 향해 총을 쏘며 신경전을 벌이매 관군이 이불보를 동학군으로 오인하여 총을 쏘아대거늘 그 틈에 동학군이 관군 진영을 기습하여 동이 틀 무렵에 대승을 거두니라.
이후 남용이 노인들에게 이야기를 들으니 ‘진격하는 동학군의 머리 위로 백로(白鷺) 한 마리가 유유히 날고 있더라.’ 하니라. 1편 47장
때는 언제입니까
전투가 끝나자 오세동이 자신을 업고 왔던 장정에게 말하기를 “십 세가 안 된 아이가 전쟁은 불가하다.” 하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자!” 하니라. 이 때 동학군들이 무릎을 퍽 꿇고 오세동을 붙잡으며 “때는 언제입니까?” 하고 묻거늘 오세동이 한시 두 구절을 써 주는데 남용이 앞 구절만을 기억하니 이러하니라.
花老太童禾處子
화로태동화처자
남용이 글을 보고 대강의 뜻을 짐작하여 ‘동학군도 아직 때가 아니다.’ 하며 동학군의 대열에서 벗어나 고향으로 돌아오거늘 신이한 오세동의 지혜와 기상에 크게 충격을 받은 남용은 이로부터 ‘나도 도를 닦아야겠다.’는 구도의 의지가 가슴 속에 요동치니라. 1편 48장
오세동을 찾아나선 남용의 구도 열정
문남용이 갑오년에 중형을 좇아 황토현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아직 때가 아니라는 오세동의 암시에 동학군에서 이탈하여 사지(死地)를 벗어나더니 ‘도를 닦으리라.’는 열정에 사로잡혀 하루도 그 소년을 잊지 못하고 만나고 싶어 하나 혼란한 시국에 이름도 고향도 몰라 찾지를 못하니라. 그 후 백방으로 소년의 행방을 찾다가 무술(戊戌 : 道紀 28, 1898)년에 이르러 우연히 소식을 접하고 소년의 집이 있는 밀양군 산내면 회곡리(山內面 回谷里)를 찾아가니 그곳은 건지봉과 곤지봉에 둘러싸인 시골 마을이거늘 오세동은 없고 홀어머니만이 집을 지키고 있더라.
남용이 오세동의 행방을 물으매 재인(才人)인 그 어머니가 대답하기를 “안 그래도 우리 아들이 아침에 나가면서 오늘 귀한 손님이 오실 테니 대접 잘해서 보내라고 합디다.” 하거늘 남용이 다시 “그럼 아드님은 언제나 돌아옵니까?” 하고 물으니 모친이 대답하기를 “나가면 한 달이 되어서도 돌아오고 두 달이 되어서도 들어오니 언제 들어올지 모릅니다.” 하니라.
이에 남용이 ‘날 안 만나 주려고 자리를 피했구나.’ 하고 허탈한 마음에 떠나려 하다가 미련이 생겨 아들의 방을 보여 달라 하여 들어가 보니 방 안에 네 기둥을 세우고 종이로 삼면을 발라 한쪽으로만 출입할 수 있도록 하여, 혼자 눕기에 딱 알맞을 정도로 따로 방을 만들어 놓았더라. 남용이 그 방에서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 물으니 대답하기를 “거기에 들어가서 주문도 읽고 공부합니다.” 하니라. 이후 구도에 대한 남용의 갈급증이 더욱 심해져 항상 ‘언제나 참 선생님을 만날꼬?’ 하니라. 1편 71장
문공신의 구도 과정
문공신(文公信)은 태인 강삼리(江三里)에서 태어나 장가들고 나서는 고부 와룡리(臥龍里)로 이거한 사람이라. 공신의 집은 와룡리 일대의 땅을 모두 가진 부호인지라 가사에 근심 없이 일찍부터 도(道)를 구하니라. 공신은 참봉(參奉)으로 어려서부터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고 16세 되는 갑오동학혁명 때는 중형(仲兄) 선명(善明)을 따라 황토현(黃土峴) 전투에 참가하여 다섯 살짜리 아이(五歲童)의 영험을 목격하고 더욱 도를 갈구하던 중 동학혁명이 실패로 끝나자 조용히 칩거하다가 한때 천주교에 입교하여 수릿골에서 세례를 받기도 하니라.
그 후 다시 동학을 열렬히 신봉하여 동학도들이 갑진년에 ‘얼싸 좋다, 갑진(甲辰) 을사(乙巳)’를 노래하며 강경에서 큰 집회를 열 때 논 열세 마지기를 성금으로 내놓을 정도로 신심이 도탑더니 일진회의 위세가 등등하여 고을 원(員)이 일진회 지회장에게 당하배(堂下拜)를 하던 시절에 흥덕, 부안 두 고을의 일진회 회장을 지내니라.
그러나 갑진, 을사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이변이 없자 이에 실망하여 동학 운동에 회의를 품고 지내다가 하루는 생각하기를 ‘이것이 모두 내가 찾는 길이 아닌 듯하니 어디를 가야 참된 길을 찾나?’ 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참 선생을 찾아다니다가 무주에 큰 선생이 있다 하여 찾아가니라. 이 때 공신의 눈으로는 그가 참선생인지 아닌지 구별할 수가 없거늘 문득 꾀를 내어 생각하기를 ‘오늘 내가 집안 여기저기에 방문(榜文)을 붙여 놓으려니, 만일 저분이 참 선생이라면 누구의 소행인지 알리라.’ 하고 방문을 붙여 놓으니 다음날 아침 그 선생이 방문을 보고 “어떤 놈 짓이냐?” 하며 꾸중할 뿐 알아보지 못하므로 실망하고 그곳을 떠나니라.
계시 받은 문공신, 향남방하라
공신이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함께 태인 관왕묘에 가서 ‘참 선생님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지성으로 기도를 올리거늘 닷새째 되는 날까지는 머리가 둘 달리고 셋 달린 잡귀들이 나타나 마구 몰아붙이매 공신이 무서워 벌벌 떨더니 엿새째에 이르러 비로소 잡귀가 사라지고 관운장(關雲長)이 나타나 “향남방(向南方)하라.” 하고 사라지니라. 3편 202장
귀가 번쩍 뜨여 순창 농바우를 찾아감
공신이 집에 돌아와 곰곰 생각해 보아도 ‘향남방하라.’는 말의 요령을 얻지 못하고 며칠을 보내더니 이 때는 나락을 거두고 보리갈이하는 가을철인지라 하루는 일꾼들을 데리고 나가 보리를 갈게 하고 공신은 거름을 펴다가 잠시 바람을 쐬려고 마을 뽕나무밭 옆길을 걷고 있는데 문득 관성묘의 일이 신비하게 여겨지며 정신이 아득해지니라. 이 때 갑자기 체구가 장군처럼 건장한 사람이 불쑥 나서서 “당신이 문공신이오?” 하고 묻거늘 공신이 감짝 놀라 “그렇소.” 하고 대답하니 그 사람이 대뜸 말하기를 “순창 농바우에 인자(仁者)가 났다 합디다.” 하고는 물어볼 틈도 주지 않고 칠보산 쪽으로 황급히 가 버리더라.
공신이 선생님이 계시다는 말에 귀가 번쩍 뜨여 농기구도 다 팽개치고 집으로 돌아가 옷을 갈아입고 곧장 농바우로 가니라. 3편 203장
엎드려 재차 간청하매
공신이 농바우 주막에 당도하니 상제님께서 성도 네댓 명과 함께 주막 앞 모정에서 쉬고 계시거늘 이 때 상제님께서는 공사를 행하시며 이곳에서 사흘을 머물고 계신 중이더라. 공신이 모정에 들어가 “실례합니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아, 쉬려면 올라와서 쉬지, 그럼.” 하시며 주모를 불러 “여기 술 한 상 차려 오라.” 하시는데 공신이 상제님을 뵈니 둥그런 용안에 환한 기운이 가득하여 단번에 선생님인 줄을 알겠더라.
이 때 상제님께서 한쪽에 앉아 계시고 성도들이 옆에 앉아 술을 마시는데 그 주고받는 얘기를 들어 보니 나이 든 성도들이 젊은 상제님께 존대를 하고 상제님은 그들에게 하대를 하시는지라 공신이 속으로 ‘저렇게 나잇살이나 먹은 노인들이 존대를 하고 저 양반은 반말하는 걸 보니 틀림없구나.’ 생각하고 대뜸 상제님 앞으로 가서 넙죽 엎드리며 “원(願)이 제자 하겠습니다.” 하고 인사를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반가워하시기는커녕 오히려 크게 호령하시기를 “이놈, 고얀 놈! 이런 고얀 놈 봤나. 이놈이 순전히 동학꾼이로구나.” 하시거늘 공신이 엎드린 채 거듭 제자가 되기를 간청하나 아무 말씀도 없으시니라.
한참 후에 상제님께서 다시 술상을 보라 하시어 먼저 한 잔을 드신 다음 주모를 시켜 공신에게 술을 따라 주게 하시거늘 공신이 여쭈기를 “아이고, 제가 대접을 해야지 어떻게 선생님 술을 받을 수가 있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어, 이놈 보소. 한 잔 먹고 네가 나를 두 잔 받아 주면 쓸 것 아니냐.” 하시니라. 공신이 생각하니 옳은 말씀인지라 그 술을 받아 마시고 주모를 불러 술을 사려 하는데 상제님께서 행장을 챙기시고 “이제 그만 가자.” 하며 일어서시니라. 이로부터 공신이 상제님을 따르니 공신의 나이는 29세더라. 이 때 심부름 다니러 온 복남이 공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늘 공신은 장성한 복남을 알아보지 못하니라.
공신이 뵌 상제님의 면모
공신이 상제님 일행에 끼어 박장근(朴壯根)의 주막에서 함께 지내는데 모시면서 보니 항상 상제님의 머리 위로 청광(淸光)이 나와 공중으로 큰 기둥처럼 뻗쳐 있고 방에 드시면 청광이 지붕을 뚫고 올라 비가 오거나 구름 낀 날에도 운무(雲霧)가 그 기운을 가리지 못하거늘 공신이 이를 신이하게 여겨 다른 성도들에게 물어 보니 “늘 보아 오던 바라.” 하더라. 3편 204장
공사 주인을 누구에게 정해야겠느냐
며칠 후 밤에 저녁진지를 드신 뒤 상제님께서 성도 약 20여 명을 방안에 앉히시고 오선위기 진주(眞主) 공사를 보시니 공신도 이 자리에 참석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공사를 보는데 돈 천 냥이 필요하니 누가 돈 천 냥을 대겠느냐?” 하시니 공신이 누가 먼저 낼세라 얼른 “제가 대겠습니다.” 하고 대답하니라.
공신이 잠시라도 상제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인편으로 서신을 보내어 추수한 쌀을 팔고 모시도 팔아 천 냥을 마련케 하고 인부 열 사람으로 하여금 나누어 지고 오게 하여 상제님께 올리니 상제님께서 이 돈을 경비로 사용하여 열흘 동안 공사를 행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신 뒤에 물으시기를 “공사 주인을 누구에게 정해야겠느냐?” 하시니 성도들이 모두 아뢰기를 “돈 낸 사람에게다 정하여야겠습니다.”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그렇지, 너희들 말이 진실로 옳도다.” 하시니라. 3편 205장
평소에 먹는 대로 차려 오라
상제님께서 처음 공신의 집에 가셨을 때 공신의 아내가 상제님을 큰손님으로 여겨 온갖 정성을 다해 진짓상을 차려 올리거늘 상제님께서 추상같이 호령하시기를 “이게 무슨 짓이냐? 내가 여기서 한 끼만 먹을 게 아니지 않으냐? 이것이 사람을 쫓는 상이지 먹으라는 상이냐?” 하시니 공신의 아내가 어쩔 줄 몰라 멍하니 서 있으매 상제님께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다시는 그리 마소.” 하시며 “자네들 평소에 먹는 대로 차려 오라.” 하시니라. 이에 공신의 아내가 평소대로 정갈하게 상을 차려 올리니 상제님께서 공신과 겸상하여 맛있게 드시거늘 그 뒤로 상제님께서 공신의 집을 찾으시면 공신의 아내는 특별히 갖추어 차리지 않고 평소에 먹는 대로 상을 차려 올리니라.
변산 와우는 네가 잘 썼느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신에게 “변산 와우(臥牛)가 크다.” 하시므로 공신이 여쭙기를 “저희 조상묘를 변산 와우혈에 썼는데 잘 썼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제님께서 “어디 한번 보자.” 하시고 줄을 가져오라 하시어 문턱에 줄 끝을 대시고 공신으로 하여금 한쪽 끝을 잡은 채 방을 가로질러 마당으로 나가게 하신 뒤에 방안에 앉으시어 줄을 바라보며 말씀하시기를 “변산 와우는 네가 잘 썼느니라.” 하시니라. 3편 206장
사람으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성도들을 거느리고 고부 살포정이를 지나시는데 들 가운데에서 큰 소 두 마리가 어우러져 싸우고 있거늘 상제님께서 두 소의 뿔을 하나씩 잡고 소들의 귀에 대고 무어라 말씀하신 다음 뿔을 놓으시니 두 소가 싸움을 그치고 서로 다른 쪽을 향해 가니라. 이에 공신이 감복하여 ‘사람이야 말로 훈계하면 듣는다지만 알아듣지 못하는 짐승까지 가르치시니 이는 사람으로서는 미치지 못할 바라. 선생님은 참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하느님이심에 틀림없다.’고 생각하니라.
내가 천지일월과 같거늘
공신이 평소에 상제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간직하고 싶어하다가 하루는 기회를 보아 사진 찍으시기를 여쭈니 상제님께서 마다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지일월(天地日月)과 같거늘 무슨 사진이 필요하더냐.”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 삼층전 미륵불을 보소.” 하시니라. 하루는 말씀하시기를 “사진을 많이 찍지 마라. 정기가 모손되느니라.” 하시니라. 3편 219장
다 쓸 자리가 있느니라
광찬이 늘 불평을 많이 하고 자주 말썽을 일으켜 성도들 간에 원성이 높거늘 한번은 공신이 상제님께 “어찌 저런 사람을 문하에 두셨습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집을 지으려면 재목마다 다 쓸 자리가 있느니라.” 하시매 공신이 다시는 불평을 아니하니라. 3편 220장
천지의 진액주
겨울에 성도 20여 명을 와룡리 문공신의 집에 모아 놓고 며칠 동안 진액주(津液呪)를 수련케 하신 후에 성도들에게 요(堯)의 역상일월성신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를 해설하시며 말씀하시기를 “당요(唐堯)가 비로소 일월이 운행하는 법을 알아내어 백성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때를 알게 하였나니 천지의 큰 공덕이 이로부터 열렸느니라.” 하시니라. 또 진액주를 가르쳐 주실 때에 말씀하시기를 “이 글은 천지의 진액이니라. 내가 이 주문을 지어 읽으니 천지만신이 춤을 추는구나.” 하시고 이어 말씀하시기를 “진액주 하나만 가지고도 천하를 세 번 뒤집고도 남는다.” 하시니라. 3편 221장
天地津液呪
천지진액주
新天地家家長世 日月日月萬事知
신천지가가장세 일월일월만사지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
시천주조화정 영세불망만사지
福祿誠敬信 壽命誠敬信 至氣今至願爲大降
복록성경신 수명성경신 지기금지원위대강
明德 觀音 八陰八陽 至氣今至願爲大降
명덕 관음 팔음팔양 지기금지원위대강
三界解魔大帝神位 願癲天尊關聖帝君
삼계해마대제신위 원진천존관성제군
이게 도둑놈 다리다
농바우에 계실 때 하루는 상제님께서 문공신(文公信)과 차경석(車京石)을 데리고 노루목을 지나 두주막거리 주막에 이르시어 밥과 술을 드신 뒤에 장검산(長劍山) 아래 이화동(梨花洞)으로 가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경석아, 나하고 목욕하자.” 하시며 개울에 들어가시거늘 경석이 ‘쌀쌀한 날씨에 저러시는 데는 필시 연유가 있다.’ 생각하고 상제님을 따라 물속으로 들어가니라. 이에 공신도 따라 들어가려 하니 상제님께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시매 밖에서 구경을 하는데 문득 상제님께서 경석의 다리를 잡고 외치시기를 “이게 도둑놈 다리다!” 하시니라.
이후 회문산 각처에서 여러 공사를 행하시고 사실재를 넘어 돌아오시니라.
장덕리에서 공사 보심
상제님께서 회문산에 가실 때 종종 장덕리(長德里)를 들르시니라. 하루는 피노리에서 용전리(龍田里)를 지나 밤재 너머 장덕산 아래 장덕리에 가시어 회문산을 바라보시며 말씀하시기를 “산꼭대기에 올라갈 필요는 없다.” 하시고 한참 동안 공사를 보시니라. 5:179
비구름을 물리치심
상제님께서는 종종 구릿골 뒷산 학선암에 가시고 안양동(安養洞)에도 자주 왕래하시니라. 하루는 내성이 상제님을 모시고 하운동 근처를 지나는데 갑자기 먹구름이 몰려오거늘 “아, 이놈들이 나를 싸고 비를 내리려 하네.” 하시며 담뱃대를 휙 내저으시니 비구름이 걷히면서 날이 다시 청명해지더라. 또 하루는 공신이 상제님을 모시는 중에 갑자기 비를 만나니 상제님께서 부채를 흔드시며 “저리, 저리.” 하시거늘 순간 가르마를 탄 듯이 비가 양쪽으로 갈라져 상제님께서 걸어가시는 길 위로는 떨어지지 않더라. 3편 268장
공신을 따로 불러 공부법을 전하심
상제님께서 공신의 집에 성도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시다가 아무런 말씀도 없이 나가시어 며칠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으시매 성도들이 하나둘 집으로 돌아가고 공신만 남으니라. 이 때 형렬이 공신에게 찾아와 “선생님께서 찾으신다.” 하며 상제님께서 계신 곳을 알려주므로 공신이 형렬이 일러준 대로 한참을 걸어서 밤중에야 어느 허름한 오두막집에 당도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계신 윗방에 들어 인사를 드리고 앉으니 때는 동지섣달인데도 불을 때지 않아 바닥이 냉랭한데 멍석이 깔려 있고 상제님의 의복은 남루하기 짝이 없어 버선바닥이 새카맣고 복숭아뼈 있는 곳은 다 해져서 구멍이 나 있더라.
공신이 밤길을 오느라 몸이 언 데다가 추운 방에 앉아 있자니 더욱 한기가 느껴져 몸을 떨거늘 상제님께서 옹기병에 담긴 청주를 공신에게 한 사발 가득 따라 주시며 “이놈 한 잔 해 보소. 훈기가 좀 돌 것이네.” 하시고 상제님도 한 잔을 따라 드시니라. 이때 어떤 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와 인사도 없이 상제님께 몇 마디 말씀을 여쭙고 곧바로 문을 닫고 나가거늘 상제님께서 “중국 사람 초산이라.” 하시더라. 이 때에 상제님께서 공신에게 공부법을 알려 주시니라. 3편 292장
오선위기(五仙圍碁) 진주(眞主) 공사
순창에 큰 기운이 묻혀 있으니
정미년 가을에 순창 피노리에 계실 때 농바우 박장근(朴壯根)의 집에 이르시어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곳에 큰 기운이 묻혀 있으니 이제 풀어 쓰리라. 전명숙과 최익현은 그 사람이 아니므로 도리어 해를 받았느니라.” 하시니라. 이어 공사를 행하실 때 마침 황응종(黃應鐘)이 이르거늘 말씀하시기를 “고부 사람이 오니 바둑판을 가히 운전하리라.” 하시고 글을 외우시니 이러하니라.
英雄消日大中華요
영웅소일대중화
四海蒼生如落子라
사해창생여락자
영웅은 대한(大韓)의 땅에서 바둑으로 소일하고 사해 창생은 모두 바둑돌이로구나.
또 상제님께서 양지로 고깔을 만들어 ‘마장군(馬將軍)’이라 써서 문지방 위에 걸어 놓으시고 짚으로 두 아름쯤 되는 인경(人磬)을 만들어 방 가운데 달아매시고 백지로 돌려 바르신 뒤에 24방위 글자를 돌려 쓰시고 간간이 다른 글자도 쓰시어 그 위에 양지를 비늘같이 오려 붙이시니 그 모양이 쇠비늘을 잇대어 붙인 갑옷과 같더라. 이 날 참석한 사람은 형렬, 공신, 광찬, 원일, 도삼, 응종, 갑칠, 장근 등이더라. 5편 175장
스물한 명은 할 수 없다
이 뒤에 문공신으로 하여금 돈 서른석 냥을 지니게 하시고 피노리를 떠나 태인 행단(杏壇) 앞 주막에 드시니라. 상제님께서 주모를 불러 “술을 내오라.” 하시니 주모가 술이 없다고 하거늘 상제님께서 “이런 주막에 어찌 술이 없으리오.” 하시매 주모가 대답하기를 “물을 붓지 않은 새 독 술은 있습니다.” 하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술은 새 독 술이 좋으니라. 안주가 있어야 하리니 돼지 한 마리를 잡으라.” 하시고 글을 써서 주모에게 주시며 돼지막 앞에서 불사르게 하시니 돼지가 곧 죽는지라 상제님께서 주모에게 이르시기를 “돼지를 삶을 때 누구든지 먼저 고기를 맛보면 죽으리니 주의하라.” 하시니라. 이어 삶은 돼지를 그릇에 담아 뜰 가운데 놓고 술은 독째로 걸러서 마루 위에 놓게 하신 뒤에 글을 써서 주인에게 주시며 뜰 가운데서 불사르게 하시고 참관한 마을 사람들과 행인들을 불러 술과 고기를 나누어 잡수시더니 문득 큰 소리로 외쳐 말씀하시기를 “무엇을 더 요구하느냐! 이 일은 하늘도 뜻대로 못 하리니 글자 수효대로만 가져가라.” 하시며 “스물한 명은 할 수 없다.” 하시니라. 5편 181장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밤을 지내시고 아침에 공신이 지닌 서른석 냥을 술과 고기 값으로 주신 뒤에 행단을 떠나 솔밭 속을 지나시다가 갑자기 길옆의 동자석을 보시고 “고얀 놈이 안 가고 여기 자빠져 있구나. 예끼놈, 빨리 달아나라!” 하고 호통치시니 공신이 무슨 말씀인지 몰라 어리둥절해하더라. 원평으로 가시며 공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뒷날 보라. 그곳에 일본 군사가 매복하여 있다가 수많은 사람을 상하게 할 것이라. 그러나 글자 한 자에 하나씩밖에 죽지 않게 하였으니 저희들이 이를 알면 나를 은인으로 여기련만 누가 능히 알리오.” 하시더니 무신(戊申 : 道紀 38, 1908)년 8월 16일 비가 내리는 날 일진회 회원 서른세 명이 행단 주막에서 유숙하는데 일본 군사가 의병으로 오인하여 발포하매 스물한 명이 죽으니라. 5편 182장
신경수의 집에 들어가시어
하루는 공신을 데리고 고부로 가실 때 물으시기를 “가는 길에 아는 벗이 있느냐?” 하시니 공신이 “운산리(雲山里)에 신경수(申京守)가 있습니다.” 하고 아뢰거늘 상제님께서 경수의 집으로 들어가 마루에 앉으시어 글을 써서 불사르시고 공신에게 “집에 다녀오라.” 하시니라. 공신이 집에 가 보니 일진회 두목 송대화(宋大和)가 와 있거늘 잘 대접하여 보내고 다시 운산으로 오니 상제님께서 물으시기를 “손님이 있었더냐?” 하시매 대답하기를 “손이 있어서 보내고 왔나이다.” 하고 상제님을 모시고 집으로 가니라. 이 때 공신의 모친이 요통을 앓으므로 상제님께 아뢰거늘 “매실 한 냥쭝을 가져오라.” 하시어 종이에 싸서 들보에 걸어 놓고 글을 써서 불사르시니 곧 나으니라. 5편 183장
후천선경 건설의 진주천자(眞主天子) 도수:문공신
칠성용정(七星用政)의 선기옥형 도수
정미년 12월에 정토칠봉(淨土七峰) 아래 와룡리(臥龍里) 문공신(文公信)의 집에 계시며 대공사를 행하시니라. 며칠 동안 진액주(津液呪)를 수련케 하시고 당요(唐堯)의 ‘역상일월성신경수인시(曆像日月星辰敬授人時)’를 해설하시며 “천지가 일월이 아니면 빈 껍데기요, 일월은 지인(至人)이 아니면 빈 그림자라. 당요가 일월이 운행하는 법을 알아내어 온 누리의 백성들이 그 은덕을 입게 되었느니라.” 하시고
일월무사치만물(日月無私治萬物)하고
강산유도수백행(江山有道受百行)이라
일월은 사사로움 없이 만물을 다스리고
강산은 큰 도가 있어 온갖 작용을 수용하느니라.
하시며 선기옥형(璿璣玉衡) 도수를 보실 때
천지대팔문( 天地大八門)이요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이라
금수대도술(禽獸大道術)이요 인간대적선(人間大積善)이라
시호시호귀신세계(時乎時乎鬼神世界)니라
라 쓰시어 경수의 집 벽에 붙이시고 경수의 집에 저울갈고리 도수를 정하시니라. 이어 응종의 집에 추 도수, 공신의 집에 끈 도수를 정하신 뒤에 다시 경수의 집에 일월대어명(日月大御命) 도수와 공신의 집에 천지대팔문(天地大八門) 도수를 정하시고 여러 날 동안 주야로 세 집을 번갈아 왕래하시며 공사를 행하시니라. 5편 196장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상제님께서 다시 성도들로 하여금 공신의 집에서 수일 동안 진액주를 수련하게 하시고 운산리 신경수의 집에 가시어 공사를 행하시며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일곱 고을 곡식이면 양식이 넉넉하겠느냐?” 하시니 대답하기를 “쓰기에 달렸습니다.” 하거늘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렇기야 하지만 찻독이 찼다 비었다 하면 못 쓸 것이요, 아무리 써도 마르지 않아야 하리니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 하시매 성도들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양지에 무수한 선을 그리시니 성도들이 “신작로 같은 것을 왜 그리십니까?” 하고 여쭈거늘 “이게 신작로로 보이냐? 물 나가는 물똘이니라.” 하시고 저수지와 물똘의 도면을 그리시어 불사르며 말씀하시기를 “이곳이 운산(雲山)이 아니냐. 운암(雲岩) 물줄기를 금만경(金萬頃)으로 돌리더라도 하류에서 원망은 없을 것이니 이 물줄기가 대한불갈(大旱不竭)이라. 능히 하늘을 겨루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강태공은 제(齊)나라 한 고을의 흉년을 없게 하였다 하나 나는 전북 일곱 고을의 큰 흉년을 없게 하리니 운암은 장차 만인간의 젖줄이 되리라.” 하시니라. 또 행단 앞산을 가리키시며 “저 산에 콧구멍이 둘이 있으니 후일에 저 콧구멍으로 물이 나와 불을 쓰리라.” 하시더니 훗날 과연 상제님께서 도면을 그리신 대로 댐과 저수지가 생기고 행단 앞산에는 수력 발전소가 생기니라.
계화도 공사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운암강(雲岩江)이 흘러 두치강이 되었으나 장차 계화도(界火島)로 나가게 되리라.” 하시더니 하루는 계화도에 가시어 바다에 떠 있는 배를 가리키시며 “저 배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으니 내가 육지로 건져 놓으리라.” 하시니라. 5편 198장
지구촌 만민의 새 생활법 공사
상제님께서 공신의 집에 계실 때 밤중에 여러 성도들로 하여금 서로 번갈아 가며 물독의 물을 반 바가지씩 퍼내어 우물에 쏟아 붓고 다시 우물의 물을 반 바가지씩 길어 독에 붓게 하시니라. 이어서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여러 우물의 물과 독의 물을 전과 같이 갈아 붓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천하만국이 물화(物貨)를 통상하는 공사이니 만국 인민의 새 생활법이니라.” 하시니라.
지금은 천지의 가을 추수기
또 말씀하시기를 “이 세상에 허다한 주의(主義)로 허다한 단체가 모임은 가을에 오곡을 거두어 결속(結束)하는 것과 같으니라.” 하시니라. 5편 200장
진주천자 도수를 준비하심
12월에 상제님께서 와룡리 문공신의 집과 운산리 신경수의 집을 왕래하시며 공사를 행하실 때 “이곳에 천자피금혈(天子被擒穴)이 있으니 이제 그 기운을 풀어 쓰리라.” 하시며 여러 가지 의식을 행하시니라. 이 일을 행하시기 한 달 전에 상제님께서 공신의 집에 이르시어 말씀하시기를 “쓸데가 있으니 돈 천 냥을 준비해 놓으라.” 하시매 공신이 돈을 준비하여 궤짝에 넣어 두니라.
하루 종일 슬피 우심
하루는 응종의 아들 내자와 공신의 큰아들 광옥(光玉)이 공신의 집 마당에서 놀면서 보니 상제님께서 사랑에 홀로 계시어 궤짝을 끼고 옆으로 누우신 채 궤짝을 두드리시며 하루 종일 대성통곡을 하시거늘 이 때 궤를 두드리시는 소리가 마치 북소리와 같더라. 20일에 형렬을 불러 이르시기를 “집에 돌아가서 의복을 지어 입고 자현과 함께 오라.” 하시는지라 형렬이 명을 좇아 구릿골에 갔다가 23일에 자현과 함께 신경수의 집에 와서 상제님을 뵈니라. 이 때 광찬의 양모(養母)가 운명하거늘 광찬이 부음을 듣고도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니 상제님께서 여러 번 집으로 돌아가기를 권하시되 듣지 아니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노하여 말씀하시기를 “저놈이 내 자식 같았으면 때려 죽였다.” 하시니라. 5편 201장
상씨름 종결 세계 대전쟁 공사
12월 24일 공신의 집에 계실 때 성도들에게 물으시기를 “이후에 전쟁이 있겠느냐, 없겠느냐?” 하시니 있으리라는 사람도 있고 없으리라는 사람도 있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지개벽 시대에 어찌 전쟁이 없으리오. 앞으로 천지전쟁이 있느니라.” 하시니라. 이어 “전쟁 기구를 챙긴다.” 하시며 방에 있는 담뱃대 20여 개를 거두어 거꾸로 모아 세우시고 공우와 여러 성도들로 하여금 갓을 벗고 테머리 수건으로 이마를 동인 채 수건으로 다리를 동여매어 각반처럼 하게 하시니라. 또 백지에 시천주(侍天主) 주문을 써서 심을 만들고 그 심지에 불을 붙여 문창에 구멍을 뚫게 하신 뒤에 담뱃대를 거꾸로 메게 하시고 성도들을 줄지어 세우시며 말씀하시기를 “줄이 흐트러지면 군사가 상하리라.” 하시니라.
이어 성도들로 하여금 뒷문으로 나가서 부엌으로 돌아 들어와 물부리를 창구멍에 대고 입으로 총소리를 내게 하시고 다시 측간으로 돌아 들어와 창구멍에 대고 총소리를 내게 하시며 또 헛청으로 돌아들어 그와 같이 하되 궁을형(弓乙形)을 지어 빨리 달리게 하시니 늙은 사람은 힘에 부쳐 헐떡거리더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뒷날 대전쟁이 일어나면 각기 재주를 자랑하여 재주가 일등 되는 나라가 상등국이 되어 전쟁은 장차 끝을 막으리라.” 하시니라. 5편 202장
행군하는 북 도수
이어서 응종의 집에 가시어 응종으로 하여금 태인 신경원(辛京元)의 집에서 새 수저 한 개를 가져오게 하시고 일전에 빚으라 하신 식혜 아홉 사발을 가져오라 하시어 단지 한 개에 쏟아 부으니 단지에 꼭 차더라. 이에 양지와 백지와 장지(壯紙)를 각각 여러 권씩 준비하여 놓고 말씀하시기를 “비인(庇仁) 복종(覆鍾)이 크다 하므로 이에 행군하는 북 도수를 보노라. 북은 채가 있어야 하나니 이 수저가 북채가 되리라. 행군할 때에 이 수저로 북채를 하여야 녹(祿)이 진진(津津)하여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양지와 백지와 장지를 모두 조각조각 떼어 그 조각마다 글을 써서 수저로 단지에 말아 넣으시니 종이가 단지에 가득 찼으나 식혜는 넘치지 않더라.
이에 단지 입을 잘 봉하여 공신의 집 앞에 있는 언덕 깨끗한 곳에 묻으시니 이 때 사방에서 천고성(天鼓聲)이 울리니라. 이 뒤에 공신의 집에 30여 명을 모아 놓고 진액주를 외우게 하시니라. 5편 203장
후천 음양 도수
25일 새벽이 되매 성도들을 정좌케 하시고 각기 종이 한 조각씩을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시기를 “후천 음양 도수를 보려 하니 각자 마음에 있는 대로 점 하나에 아내 하나씩 표하여 점쳐 들이라.” 하시고 점 찍은 표를 함에 넣게 하시어 상제님께서 손으로 휘저어 한 장씩 뽑으시니 경석은 열두 점이요, 응종은 두 점이요, 경수는 석 점이요, 내성은 여덟 점이요, 공신은 한 점이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홉 점은 없으니 일남구녀란 말을 알 수 없도다.” 하시고 경석에게 물으시기를 “너는 웬 아내를 열둘이나 원하느냐?” 하시니 경석이 대답하기를 “십이제국에 한 명씩 두고 달마다 한 나라씩 순유하면 남아 행락(行樂)의 극치일까 하옵니다.”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말이 그럴 듯하도다.” 하시니라.
경수와 응종에게 물으시기를 “칠십 노옹이 한 사람도 어렵겠거늘 아내 둘, 셋을 어떻게 감당하려느냐?” 하시니 응종이 대답하기를 “후천에는 노인이 다시 젊어진다 하오며 자고로 좌처우첩(左妻右妾)이란 말이 있사오니 둘을 원합니다.” 하고 경수가 아뢰기를 “천지인(天地人) 삼재(三才)로 셋을 원합니다.” 하니라.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 말도 그럴 듯하도다.” 하시고 내성에게 말씀하시기를 “육관대사(六觀大師)의 제자 성진(性眞)이 팔선녀를 데리고 희롱한다 하였으니 네가 선관이 되려고 여덟 점을 쳤구나.” 하시니라.
오직 건곤뿐
이어 공신에게 물으시기를 “칠십 노옹도 둘, 셋을 원하거늘 너는 청년으로서 어찌 한 사람에 만족하느냐? 근력이 부족해서 하나밖에 못 하냐?” 하시거늘 공신이 대답하기를 “하늘도 하나고 땅도 하나입니다.” 하매 상제님께서 무릎을 치며 말씀하시기를 “그려, 그렇지! 네 말이 옳도다. 오직 건곤뿐이니 이로써 공사를 마치노라.” 하시고 무를 잘라 무엇을 새기신 뒤에 먹물을 묻혀 모든 종이 조각에 도장찍듯이 찍으시니라. 이어 말씀하시기를 “오늘 공사를 잘 보았으니 점심과 술안주를 특별히 성대하게 준비하여 손님 대접을 잘하여 돌려보내라.” 하시니라. 이 때 광찬과 공우는 정읍 차경석의 집으로 보내시고 원일은 태인 신경원의 집으로 보내시니 이는 공우가 여러 번 관재로 곤욕을 당했음을 아시고 곧 닥칠 화액을 면케 하려 하심이요 광찬과 원일은 그 성품이 너무 과격하여 불참케 하심이더라. 5편 204장
동학 역신 해원 공사
공신이 여러 성도들을 돌려보낸 뒤에 상제님께서 공신, 경수, 응종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경석이 성경신(誠敬信)이 지극하므로 달리 써 볼까 하였으나 제가 스스로 청하니 어찌할 수 없는 일이로다. 지난 갑오년에 동학 신도들이 여러 만 명 학살되어 모두 지극히 원통한 원귀(寃鬼)가 되어 우주간에 나붓거리는지라 원래 동학은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주창하였으나 때가 때인 만큼 안으로는 불량하고 겉으로만 꾸며대는 일이 되고 말았나니 다만 후천 일을 부르짖었음에 지나지 못함이라. 마음으로 각기 왕후장상(王侯將相)을 바라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릇 죽은 자가 수만 명이니 그 신명들을 해원시켜 주지 않으면 후천에 역도(逆度)에 걸려 반역과 화란이 자주 일어나 정사(政事)를 못 하게 되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 신명들을 해원시키려고 원혼을 통솔할 자를 정하려는 중인데 경석이 십이제국을 말하니 이는 스스로 청함이라. 이제 경석에게 동학 역신 해원의 삼태육경(三台六卿) 도수를 붙이리라.” 하시고 “그 부친이 동학 접주로 그릇 죽었고 경석도 또한 동학 총대(總代)였으니 오늘부터는 동학 때 한 맺힌 신명들을 전부 경석에게 붙여 보내어 이 자리에서 왕후장상의 해원이 되게 하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춘치자명(春雉自鳴)의 설화(說話)를 들어 보라. 배짱이 그만하면 능히 그 책임을 감당하리니 뒷날 두고 보라. 경석이 금전도 무수히 소비할 것이요, 사람을 모으는 것도 갑오년보다 훨씬 많게 될 것이니라. 경석에게 밥주걱을 맡겼나니 경석은 제왕(帝王)만큼 먹고 지내리라. 이렇게 풀어놓아야 후천에 아무 일도 없으리라.” 하시고 두루마리에 글을 써서 대공사를 처결하시며 외인의 출입을 금하시니라. 5편 205장
내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이 공사를 시작하실 때 성도들에게 “각기 새 옷을 지어 입으라.” 하시더니 이 날 성도들로 하여금 모두 새 옷으로 갈아입게 하시고 상제님께서는 좋은 통량갓에 새로 지은 일광단(日光緞) 두루마기와 무문모초(無紋毛★) 바지저고리로 의관을 정제하시어 의식을 집행하시니 마치 천자가 묘당(廟堂)에 임어한 모습처럼 장엄하더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천자피금(天子被擒) 도수에 걸렸으니 만약 나의 권능으로 이를 물리치면 만세토록 억조창생에게 헤아릴 수 없는 영향을 미치리라. 내가 세상에 온 것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요, 천하의 백성들을 위함이니 내가 이제 스스로 그 운수를 받으리라.” 하시니라. 5편 206장
정음정양 도수와 문왕 도수
상제님께서 공신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너에게 정음정양 도수를 붙이나니 네가 온전히 잘 이기어 받겠느냐. 정심으로 잘 수련하라. 또 문왕(文王) 도수가 있으니 그 도수를 맡으려면 극히 어려우리라. 미물곤충이라도 원망이 붙으면 천지공사가 아니니라.” 하시니라. 5편 207장
천자가 여기 계신데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경칩절(驚蟄節)이 언제냐?” 하고 물으시니 성도들이 “2월 초나흗날입니다.” 하고 아뢰거늘 “경칩절에 일을 알게 되리라.” 하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미처 말씀을 마치지 아니하셨는데 면장 양 모(梁某)와 이장이 세금을 받으러 오거늘 상제님께서 그들을 향하여 큰 소리로 꾸짖으시기를 “천자(天子)가 여기 계신데 누가 감히 세금을 받으러 오느냐!” 하시고 “내가 천지공사를 행하여 천하를 바로잡으려 하나니 너는 어찌 그런 음모에 참여하느냐.” 하시니 두 사람이 깜짝 놀라 돌아가서 ‘와룡리에 십수 명이 모여 대사(大事)를 경영한다.’고 고부경찰서에 고발하매 순사 네 명이 나와서 비밀리에 조사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김형렬, 김자현, 문공신, 박장근, 이화춘 등 스물한 명을 모아 놓으시고 형렬에게 이르시기를 “너는 자현과 함께 공신의 집에 있으라. 나는 신경수의 집에 가 있을 것이니라.” 하시고 구르멧산(雲山) 너머 운산리 경수의 집으로 옮기시며 다시 형렬에게 말씀하시기를 “순검들이 와서 나의 거처를 묻거든 숨기지 말고 사실대로 바르게 고하라.” 하시니 모두 이상하게 생각하니라. 이날 밤 상제님께서 경수의 집에 가시어 멀리 칠보 쪽을 쳐다보시며 “건너올 텐데 안 온다. 올 텐데 안 온다.” 하시고 한참 동안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듯하더라. 5편 209장
새벽에 무장 순검들이 들이닥침
이 날 저녁에 신경수의 집에서는 상제님의 명(命)에 따라 공신과 여러 사람들이 초저녁부터 윗방에서 불을 끄고 자고, 상제님께서는 아랫방에서 주무시니라. 26일 새벽이 되자 백낙두(白樂斗)를 비롯하여 무장한 순검 수십 명이 공신의 집을 에워싸고 형렬과 자현 등 여러 사람을 결박한 뒤에 상제님의 처소를 묻거늘 성도들이 비로소 상제님의 말씀을 깨닫고 신경수의 집에 계심을 바른대로 고하니라. 이에 순검들이 상제님 계신 곳으로 들이닥치더니 총대로 문을 푹 쑤시며 “이놈들 나오라!” 하고 소리치거늘 상제님께서 들어온 총대를 마주잡으시고 “총 놓으라.” 하시니 순검이 순간 기세에 눌려 “그대가 놓으시오.” 하는지라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이놈이 말귀도 못 알아듣는다. 어서 총을 놓으라!” 하시니라.
이렇게 한참 실랑이를 하는데 한 순검이 공신을 찾거늘 공신이 대답하고 나서니 곧 포박하고, 이어서 상제님과 여러 사람들을 의병 혐의로 모두 포박하니라. 이 때 순검들이 윗목에 놓여 있는 돈을 보고 도둑질을 했다 하여 무명 몇 필과 함께 압수하니라. 날이 밝자 순검들이 상제님 일행을 고부경찰서로 끌고 가거늘 상제님께서 자현에게 말씀하시기를 “이 소식이 집에 들어가면 금번 서울서 과거 급제했다는 소식만큼이나 즐거워할까. 가족들은 하여튼지 자네는 그 소식으로 알고 있으라.” 하시니라. 5편 210장
천하사에 뜻하는 자 어찌 별로히 있으리오
경찰서에 이르니 수사관이 성도들에게 “병기를 가졌느냐?” 하고 묻거늘 모두 없다고 대답하니 즉시 여러 사람을 구류간(拘留間)에 가두고 공신은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임시 막간 문턱에 앉혀 놓으니라. 이어 순검들이 상제님의 상투를 풀어 대들보에 매달고 옷을 다 벗긴 뒤에 십여 명이 사방에 늘어서서 죽검으로 사정없이 옥체를 후려치며 묻기를 “네가 대장이냐? 관리는 몇 명이나 죽였으며, 일본 사람은 몇 명이나 죽였느냐?” 하매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를 의병으로 알고 묻는 말이냐?” 하시니 순검이 “그러하다.” 하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의병을 일으키려면 깊숙한 산중에 모일 것이거늘 어찌 태인 읍내에서 오 리 안에 들 하나 떨어져 사람들이 날마다 왕래하는 번잡한 곳에서 의병을 일으키리오.” 하시고 물으시기를 “그대들이 묻는 의병이란 것은 무엇을 이름이냐?” 하시니 순검이 말하기를 “이씨 왕가를 위하여 일본에 저항하는 것을 이름이라.” 하는지라 말씀하시기를 “그러면 그대들이 그릇 알았도다. 우리는 그런 일을 아니하노라.” 하시니라.
순검이 다시 묻기를 “그러면 무슨 일로 모였느냐?” 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제 혼란복멸(覆滅)에 처한 천지를 뜯어고쳐 새 세상을 열고 대비겁(大否劫)에 싸인 사람과 신명을 널리 건져 각기 안락을 누리게 하려는 모임이로다.” 하시니라. 이에 통역순검 문형로(文亨魯)가 놀라 말하기를 “어찌 감히 그런 대담한 말을 하느냐!”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사람마다 지혜가 부족하고 도략(韜略)이 없으므로 천하사를 도모치 못하나니 천하사에 뜻하는 자 어찌 별로히 있으리오. 그대가 만일 도략과 자비가 있다면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볼 때리오.” 하시니라.
나는 천하를 갖고 흔든다
이에 순검들이 계속하여 심문하며 “네가 누군데 감히 그런 말을 하느냐?” 하니 상제님께서 큰 소리로 “나는 강 천자(姜天子)다!” 하시매 “어찌 강 천자냐?” 하니 “너희가 나를 강 천자라 하니 강 천자이니라. 나는 천하를 갖고 흔든다.” 하시거늘 형렬과 자현은 이 말씀을 듣고 혼비백산하여 “이제 우리는 다 죽었다.” 하고 성도들 가운데 누군가는 “저, 죽일 놈 보게.” 하며 욕을 하니라. 5편 213장
천지역군에게 닥칠 큰 화액을 대속하심
이 때 순검들이 상제님의 옥체를 죽검으로 사정없이 후려치며 갖은 욕을 보이는데 공신이 보니 상제님의 가슴이 갑자기 20세 처녀의 젖가슴처럼 부풀거늘 순검들도 놀라 매질을 멈추니라. 잠시 후 다시 혹독한 매질이 계속되매 상제님께서 온 몸이 피투성이가 되고 안구가 튀어나온 채 혀를 물고 혼절하시거늘 순검들이 비로소 상제님을 대들보에서 내려 구류간으로 옮기니라. 이어서 순검이 “집주인이 누구냐?” 하매 공신이 “내가 주인이다.” 하고 나서자 박 권임(權任)이 공신에게 다가와 “이놈도 같은 놈이다.” 하며 구둣발로 앞가슴을 걷어차거늘 공신이 마음 속으로 ‘나도 저렇게 맞으면 죽으리라.’ 생각하고 일부러 난간으로 떨어져 짐짓 기절한 체하니 문 총순(總巡)이 박 권임을 꾸짖으며 말하기를 “죄의 유무를 결정하지도 못하였는데 어찌 그다지 혹독히 다루느냐.” 하고 공신에게 고채를 채워서 구류간에 넣어 여러 사람과 함께 가두니라. 이어 다른 사람도 낱낱이 신문하거늘 대답이 한결같지 못하여 혹은 ‘도를 배우기 위하여 따랐다.’ 하고 혹은 ‘속임을 당하여 따랐다.’ 하니 신문을 마친 뒤에 모두 옥에 가두니라.
일본 공주를 해원시키려 함이라
이 때 상제님의 옥체는 피가 낭자하게 흐르고 만신창이가 되시어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지경이라. 상제님께서 옷도 입지 못하시고 겨우 몸만 가리신 채 밤을 새우시거늘 이튿날 성도들이 상제님의 옥체를 살피니 거짓말처럼 상처가 깨끗이 나아 있고, 용안은 화기(和氣)가 충만하여 평소와 같으시더라. 이 뒤에 상제님께서 공신에게 이르시기를 “이는 일본 공주를 해원시키려 함이니라.” 하시고 “지난 임진난리에 사명당이 일본에 가서 인피 삼백 장을 받아 오려 하였나니 그 때 일본 공주가 ‘나 먼저 벗기라.’ 하고 자결하였느니라. 그 죽은 혼령이 원귀가 되어 내가 죽은 뒤에 너희를 죽이려고 헌병을 이끌고 왔나니 내가 해원시켜 그 도수를 때웠노라.” 하시니라. 5편 214장
너희가 혈심을 갖지 못해 장상신이 응하지 않노라
일전에 상제님께서 이번 화액에 쓰기 위하여 약간의 돈을 준비하신 뒤에 갑칠에게 명하시어 ‘경석에게 전하라.’ 하시더니 갑칠의 심부름 맡은 사람이 화란을 틈타 그 돈을 훔쳐 도망하는 것을 갑칠이 쫓아가서 되찾아 경석에게 전하매 경석이 그 돈으로 옷과 침구와 음식 등을 준비하여 옥중으로 들여보내니라. 그믐날 저녁에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서양에서 천자신(天子神)이 넘어옴이니라.” 하시고 또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자신은 넘어왔으나 너희들이 혈심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장상신(將相神)이 응하지 아니하노라.” 하시니라. 5편 215장
무신(戊申 : 道紀 38, 1908)년
대공사를 처결함이니라
무신(戊申 : 道紀 38, 1908)년 설날 모질게 추운 날씨에 눈비가 많이 내리며 우레와 번개가 크게 일어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는 대공사(大公事)를 처결함이니라.” 하시니라. 5편 216장
공신이 죽으면 우리가 다 죽을 것이니
이 때 공신은 구둣발에 채인 곳이 크게 결리며 열이 심하게 나고 몸이 으슬으슬 떨려 매우 위독하거늘 간수가 들어와 고채를 끌러 주고 상제님의 고채도 끌러 드리니라. 상제님께서 여러 사람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이제 만일 공신이 죽으면 우리가 다 죽을 것이니 인곽(人槨)을 써서 낫게 해야 하리라.” 하시더니 마침 아침밥이 들어오거늘 상제님께서 “음식에 독이 있으니 먹지 말라.” 하시고 밥그릇마다 그 위 공중에 무슨 글자를 쓰신 뒤에 다 드시고는 그릇을 물리며 말씀하시기를 “인곽을 써야 하리니 모두 일어서라.” 하시고 좌우로 일곱 사람씩, 위로 두 사람 아래로 한 사람을 서게 하시어 널과 같이 만드신 뒤에 공신을 그 가운데에 눕히시니라. 5편 217장
그래야 네가 사느니라
이 때 구류간에 바람을 통하게 하는 작은 구멍이 있어 그 구멍에 종가리 한 개를 두고 오줌을 받아내는데 마침 그 종가리에 오줌과 오줌 찌꺼기가 반쯤 괴어 있는지라 상제님께서 종가리를 손에 들고 인곽 안에 누워 있는 공신을 일으켜 세우시고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시며 친히 종가리에 있는 오줌 찌꺼기를 손으로 훑어 세 모금을 드시더니 그 나머지를 공신에게 주시며 명하시기를 “공신아, 이것을 마시라.” 하시니라. 공신이 순간 크게 감동하여 생각하기를 ‘선생님은 나를 살리기 위해 이 더러운 것을 얼굴빛 하나 변치 않고 잡수셨는데 내가 어찌 마시지 못하리오.’ 하고 받아 마시매 오장이 뒤집히는 듯하거늘 억지로 참으니 말씀하시기를 “참지 말고 올라오는 대로 다 토하라. 그래야 네가 사느니라.” 하시는지라 공신이 비로소 깨닫고 토하니 그 뒤로 땀이 많이 나며 열이 내리고 결리던 곳이 나으니라. 5편 218장
점점 더 원망하는 종도들
여러 날이 지날수록 인심이 동요하며 상제님을 원망하는 사람이 늘어나거늘 상제님께서 일러 말씀하시기를 “대저 인생이 일사(一死)면 도무사(都無事)라 하나니 죽어도 원망은 말라.” 하시고 또 공신에게 이르시기를 “일을 하려다가 이루지 못하고 죽을지라도 원통히 여기지는 말라. 죽을지라도 곱게 죽는 것이 좋으니라. 너는 자식이라도 있으니 한이 없으리라.” 하시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천지를 개벽하여 선경을 열어 각기 영화를 누리게 해 주실 것으로 믿었던 성도들은 더욱 두려워하여 그 중 몇 사람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이런 화액에 능히 대처할 권능이 없음을 스스로 드러냄이라. 우리가 믿었던 그의 권능은 한낱 무용의 믿음이요, 다만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삿된 일로 우리를 사지(死地)에 몰아넣은 것에 지나지 못함이라.” 하고 크게 원망을 하니라. 5편 219장
비록 십만 대중이 이러한 화액에 걸려도
운곡(雲谷)에 사는 노씨(盧氏)는 평소에 형렬과 자현을 잘 아는 사이로 고부경찰서 총순(總巡)과 이종간이라. 이 때 노씨가 편지를 써서 김태옥(金太玉)을 고부로 보내니 태옥이 고부에 가서 죽마고우인 옥사장 김검암(金劒岩)에게 그 편지를 보여 주며 말하기를 “형렬과 자현은 나의 친족이니 면회도 시켜 주고 이왕이면 두 사람을 좋은 방으로 옮겨 주오.” 하고 청하거늘 검암이 두 사람의 방을 옮겨 주려 하매 형렬이 그 간수에게 청하여 상제님도 옮겨 드리게 하니라.
상제님께서 형렬과 자현을 보시고 “속언에 세 사람이 모이면 관장(官長)의 공사를 처결한다 하니 우리 세 사람이 모였으니 천하사를 도모하자.” 하시매 두 사람이 아무런 대답을 못 하거늘 상제님께서 “왜 복이 무거워서 대답을 못 하느냐?” 하시고 “금일 천지공사를 세 사람이 결정한다.” 하시니라. 또 자현에게 조용히 이르시기를 “비록 십만 대중이 이러한 화액에 걸려도 털끝 하나 상함이 없이 다 끌러 내리니 안심하라.” 하시니라. 5편 220장
성도들의 석방
이 뒤로 경관이 아무리 조사하여도 의병의 증거가 나오지 않고 또한 사람들이 ‘선생님은 신의(神醫)로서, 부모나 처자의 병을 낫게 해 주신 은혜를 잊지 못하여 설날을 맞아 세찬(歲饌)을 드리러 왔다.’ 하며 혹은 ‘공신의 친척으로서 인사차 왔을 따름이라.’ 하므로 마침내 정월 10일에 사람들을 석방하며 이르기를 “지금은 비상시라 단체로 모일 때가 아니니 이 뒤로는 특히 주의하라.” 하니라. 5편 221장
공신에게 어천 후 성체를 부탁하심
이 때 다른 사람은 모두 석방하고 상제님과 공신만 남겨 두니 공신은 구둣발에 채인 곳이 덜 나은 까닭이라. 상제님과 공신이 함께 고채에 채워져 있는데 하루는 상제님께서 문득 눈물을 흘리시며 “공신아, 너는 자식이라도 있지 않으냐. 나는 죽어서 뼈가 일본으로 갈지, 만주로 갈지…. 나는 자식이 없으니 누가 찾을 것이냐. 내 몸이 조선을 떠나면 안 되느니라. 내가 죽은 뒤에 백골이라도 전라도에 묻혀야 할 것 아니냐.” 하시니라. 이에 공신이 “아들 없는 게 무슨 걱정입니까. 제가 있지 않습니까?” 하니 상제님께서 “그럴런가나.” 하시고 더 말씀치 않으시니라. 5편 222장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며칠 후에 공신은 석방하였으나 상제님의 말씀은 한낱 ‘광인의 미친 소리’라 하여 상제님을 구류간에 홀로 감금해 두더니 38일 만인 무신년 2월 4일 만물이 싹트는 경칩절(驚蟄節)에 석방하니라. 이 때 차경석과 안내성이 돈 120냥을 가지고 와서 새 옷을 지어 드리려 하거늘 그만두게 하시고는 압수당한 돈과 무명을 찾아 순검과 빈궁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고 술을 사 주시기도 하니라. 고부에서 사흘을 머무르신 뒤에 와룡리 황응종의 집으로 가시니 차경석이 따르거늘 이 때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천자를 도모하는 자는 다 죽으리라.” 하시고 “꿈만 꾸는 자도 죽으리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내가 이곳에서 죽으면 땅에서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이후 경석을 데리고 손바래기 본댁으로 가셨다가 김성연의 주막에서 술을 잡수시고 대흥리로 가시니라. 5편 223장
화액에 참여한 사람들
이 화액에 참여한 사람은 김형렬, 김자현, 문공신, 공신의 형 학철(學哲), 당질 수암(首岩), 매부 허성희(許聖喜)와 김광수(金光洙), 김공빈(金工彬), 김 참봉(金參奉), 이화춘(李化春), 박장근(朴壯根) 등이요, 그 외 열 명은 성명이 밝혀지지 않으니라. 그 가운데 허성희는 수금되었을 때 불평하는 사람들을 잘 효유하여 진정시키기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하거늘 이 화액을 겪은 뒤로 형렬과 자현 등은 여전히 상제님을 받들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흩어져 “선경(仙境)세계를 열어 평생 영화와 복락을 누리게 해 준다고 하더니 그 말에 속아 자칫 죽을 뻔했다.” 하며 상제님을 심히 원망하더라.
이화춘, 박장근의 배신과 최후
경찰서에 수금되었을 때 박장근, 이화춘 등은 상제님을 심히 원망하며 불경한 말을 하더니 2월 초에 상제님께서 대흥리 차경석의 집에 계실 때 이화춘이 오거늘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사람이 비록 불길 속으로 들어갈지라도 더욱 마음을 굳게 하여 본심을 지키고 의리를 존중하여야 하거늘 너는 어찌 그렇듯 무례하게 불의를 감행하느냐. 이 뒤로는 깊이 참회하여 모든 일에 의리를 지켜 나의 가르치는 바를 잘 따르라. 그렇지 않으면 신명을 그르치리라.” 하시니라.
또 일러 말씀하시기를 “네가 지금 돌아가거든 방문을 굳게 닫고 출입을 폐하되 문구멍을 뚫어 밥을 들여 먹고 대소변도 받아내며 보름을 지낼지어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큰 화를 당하리니 부디 명심하여 잊지 말라.” 하며 여러 번 이르시거늘 화춘이 명을 받고 물러가는데 내성에게 명하시어 화춘을 다시 불러 이르시기를 “네가 만일 나의 말을 믿지 아니하여 비록 죽는 일을 당할지라도 나를 원망치 말라.” 하시니 화춘이 대답하고 물러가니라. 5편 224장
귀신으로나 좋은 곳에 가게 하리라
다음 날 상제님께서 세수하시다가 문득 말씀하시기를 “시체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하시더니 이윽고 화춘의 집 사람이 급히 와서 화춘이 밖에 나갔다가 의병에게 총살당함을 아뢰거늘 한숨을 쉬시며 “귀신으로나 좋은 곳에 가게 하리라.” 하시고 글을 써서 불사르신 뒤 심부름꾼에게 이르시기를 “시체는 단단히 묶지 말고 널에 넣되 널덮개도 단단히 잠그지 말고 양지쪽에 외빈하여 비바람이나 가리게 하라.” 하시니라.
귀한 것이 인망이니라
이어 탄식하며 말씀하시기를 “박장근도 또한 죽으리라. 그 성질을 고치기 어려우니 어찌할 수 없노라.” 하시거늘 경석과 내성이 함께 여쭈기를 “그 위인이 성질은 몹시 사납고 포악하나 여러 달 동안 닦아 온 정성을 살피시어 그 죽음을 면케 하여 주옵소서.” 하니라. 이에 말씀하시기를 “귀한 것이 인망(人望)이니라. 인망이 그러하니 다른 도리를 생각하여 보리라.” 하시고 다시 “생명은 보전케 하리라.” 하시니라. 그 뒤에 장근이 의병에게 맞아서 다리가 부러지니라. 5편 225장
신천지의 참주인 진주노름의 독조사 도수
공신이 출옥한 뒤에 하루는 고부 주막 주인이 공신의 집에 와서 느닷없이 공신 앞으로 달아 둔 밥값을 내놓으라며 살림살이를 차압해 가거늘 상제님께서 출옥하시면 압수당한 돈과 무명을 찾아 외상을 갚아 주실 줄 믿었던 공신은 큰 돈을 내고도 다시 수저 하나 남김없이 살림살이를 차압당하매 크게 불평을 품고 있더니 얼마 후 상제님께서 집에 찾아오시매 지난 일을 낱낱이 헤어 아뢰며 불쾌한 어조로 폭담을 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고개를 숙인 채 듣고 계시다가 공신에게 “이제 말 다했느냐?” 하시니 공신이 분이 풀리지 않은 얼굴로 “다 했지요.” 하거늘 말씀하시기를 “네 말을 들으니 그렇겠도다. 내가 순창 농바우에서 사흘 동안 머물며 너를 처음 만난 뒤로 네가 여러 가지 큰 공사에 참관하여 너에게 이윤(伊尹) 도수를 붙인 바 있고 고부 도수를 보려 하나 가히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없으므로 네게 주인을 정하여 독조사 도수를 붙였노라. 진주(眞主)노름에 독조사라는 것이 있어 남의 돈은 따 보지 못하고 제 돈만 잃어 바닥이 난 뒤에 개평을 뜯어 새벽녘에 회복하는 수가 있으니 같은 끗수에 말수가 먹느니라. 네가 고부에서도 밥값을 말한 일이 있었으나 그 돈을 쓰면 독조사가 아니니라. 만일 네가 꼭 돈이 있어야 되겠으면 내가 주마. 그러나 그리하면 그 도수는 다른 사람에게 옮겨야 하느니라.” 하시니 공신이 ‘어차피 돈은 쓴 것인데 도수까지 남한테 뺏긴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라 생각하여 여쭈기를 “일이 그와 같을진대 그만두시옵소서.” 하니라. 5편 226장
화둔(火遁) 공사를 준비하심
그 후 대흥리로부터 태인 신경원(辛京元)의 집에 이르시어 한 달 동안 머무르실 때 신경원, 최창조, 김경학, 최내경이 상제님을 모시니라. 상제님께서 백암리 김경학의 집과 최창조의 집 양가를 왕래하시며 광찬의 양모(養母) 성복제(成服祭)를 창조의 집에서 거행케 하시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신경원의 집에 계실 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천지에 변산처럼 커다란 불덩이가 있으니 그 불덩이가 나타나 구르면 너희들이 어떻게 살겠느냐.” 하시며
誰識南方埋火家
수식남방매화가
라 글을 쓰신 뒤에 창조에게 명하시기를 “돼지 한 마리를 잡아 계란으로 저냐를 부쳐서 대그릇에 담아 깨끗한 곳에 두라.” 하시고 이어 “내 옷 한 벌을 지어 두라. 장차 쓸 곳이 있노라.” 하시니 창조가 대답하고 돌아가서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그 뒤에 상제님께서 구릿골로 가시니라. 5편 227장
죽어서야 쓰겠느냐
얼마 후 공신이 발에 채인 곳이 재발하여 마당 출입도 못하게 되거늘 응종을 구릿골로 보내어 상제님께 아뢰니 “그리 내비둬라, 죽게 냅둬.” 하시는지라 돌아와 그대로 전하매 공신이 다시 심사가 나서 아무 약도 쓰지 않고 있더니 병세가 점점 위중해져서 몸을 전혀 움직이지 못하게 되니라. 응종이 민망히 여겨 다시 상제님을 찾아가 뵈니 “공신의 병세가 어떠하더냐?” 하시거늘 응종이 대답하기를 “드러누워 움직이지 못하옵니다.”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어서야 쓰겠느냐. 찹쌀밥 아홉 때를 지어 먹으라 하라.” 하시니 응종이 돌아가 명하신 대로 전하매 그대로 하여 곧 완쾌하니라. 5편 228장
문공신의 불의를 경계하심
여름에 문공신이 구릿골에 와서 상제님을 뵙거늘 꾸짖어 경계하시기를 “네가 만일 허물을 뉘우쳐 전습(前習)을 고치지 아니하면 장차 어떠한 난경을 당할지 모르리라. 내가 만세의 억조창생을 위하여 그 운수를 순리로 받았으나 천지간의 모든 신명들은 혹 내 몸이 다칠까 걱정하고 혹 내가 마음 상할까 두려워하여 그림자처럼 나를 따르며 잠시도 곁을 떠나지 않나니 너는 어찌 감히 나의 덕(德)을 해하느냐. 내가 너를 버리면 너는 성명(性命)을 보전키 어려우리라. 공신아! 천지에 사죄하고 나에게 돌아와서 영화를 구하라. 나는 너를 버려 내 덕을 상하려 하지 않노라.” 하시고 자현을 불러 말씀하시기를 “네가 공신의 집에 가서 여러 날 숙식하였으니 공신을 네 집에 데려다가 잘 대접하라.” 하시니라. 이후 자현이 그 분부를 잊어버리고 지냈더니 하루는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가 잘못했도다. 이 뒤로는 대접하려 해도 만날 기회가 없으리라.” 하시거늘 과연 그 뒤로는 서로 만나지 못하니라. 5편 232장
정씨 기운을 꺾는 공사
5월에 고부 와룡리 문공신의 집에 계실 때 경학이 와 뵈니 상제님께서 이르시기를 “내일 일찍 살포정이에서 만나자.” 하시니라. 경학이 집으로 돌아갔다가 이튿날 아침을 먹은 후 살포정이 주막에 이르니 행객 두 사람이 싸우고 있고 상제님께서는 큰길가 높은 둔덕에 돌아앉아 계시거늘 경학이 올라가 인사를 드리니 상제님께서 대답만 하실 뿐 여전히 돌아앉으시어 노기를 띠고 계시더라. 이에 경학이 무슨 일인지 알지 못하여 황공한 마음으로 모시고 섰을 따름이더니 이윽고 상제님께서 싸우는 자들을 향하여 “그만두라.” 하시거늘 그 사람들이 곧 싸움을 그치고 다른 곳으로 가니라. 경학이 “어떠한 사람들이 싸웠습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우리 국운(國運)을 위하여 정(鄭)씨를 없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정씨의 노래가 끊이지 않으니 혹 이(李)씨가 정씨의 화(禍)를 받을 염려가 있겠으므로 이제 그 살(煞)을 풀기 위하여 이씨 기운을 돋우고 정씨 기운을 꺾는 공사를 보았노라.” 하시니라. 5편 239장
김준상의 집에 약방을 차리심
4월 11일에 공신의 집 상량보에 오선위기도(五仙圍碁圖)를 그려 붙이시고 공신에게 말씀하시기를 “그 안에 도깨비가 꽉 찼느니라. 도깨비로 인해 너희 집이 하루아침에 망할 것이니 일절 뜯어 볼 생각을 하지 말라.” 하시며 엄중히 단속하시니라. 그 후 구릿골로 돌아오신 뒤에 백남신에게서 돈 천 냥을 가져오시어 준상의 집 방 한 칸에 약방을 꾸미시니라. 이 때 공신으로 하여금 고부장에 가서 장판을 사 오게 하시어 약방 바닥에 깔며 말씀하시기를 “이는 고부의 선인포전(仙人鋪氈) 기운을 씀이로다.”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목수 이경문(李京文)을 불러 약방 마루에서 약장과 궤를 짜게 하시니 향나무와 오동나무, 대추나무로 짜되 이음새는 못을 쓰지 않고 부레풀을 사용해서 붙이게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그 크기와 짜는 방법을 세세히 일러 주시며 “몇 날이면 약장 원목을 완치하고 몇 날이면 약장을 다 짜겠느냐?” 하고 물으시거늘 경문이 아뢰기를 “예, 몇 날이면 다 완공하겠습니다.” 하고 약속을 정하더니 정한 날에 이르러 마치지 못하니라. 5편 243장
약장 늦게 짠 이경문에게 내리신 천벌
하루는 상제님께서 자현과 형렬을 데리고 구릿골로 돌아오시는 길에 문득 성을 내시며 “이놈아, 천지공사(天地公事)를 몰라! 이제는 죽지 못 살리라.” 하시더니 구릿골 약방에 이르시어 이경문에게 물으시기를 “편목(便木)이 완비되었느냐?” 하시니 경문이 “완비가 못 되었습니다.” 하매 크게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천지조화를 약장에 장치하려 하는데 너는 태연하니 무의무도(無義無道)한 자라.” 하시니라. 이어 판자를 잘라 포개 놓은 목재를 발로 무너뜨리시고 한 조각을 발로 밟으며 말씀하시기를 “잣대 갖다가 재어 보아라.” 하시니 그 순간 경문이 기절하는지라 급히 업어다 눕히니 잠시 후 깨어나거늘 “너는 오늘 저녁에 불칼로 죽을 것이다.” 하시니라. 상제님께서 저녁 진지를 드신 뒤에 다시 경문을 부르시어 천둥 같은 소리로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네가 천명(天命)을 알지 못하여 오늘 천벌로 너를 죽일 것이니 원통히 생각지 말라.” 하시니 경문이 살려 주시기를 간절히 애원하거늘 “천지의 불칼로 죽이는 일을 내가 어찌 살릴 수 있겠느냐.” 하시니라.
이에 경문이 대경실색하여 약방 뜰 앞에 엎드려 “선생님 살려 주십시오.” 하고 애걸하는데 문득 맑게 갠 푸른 하늘에 뇌성이 진동하고 번개칼이 경문의 온몸을 둘둘 두르매 경문이 거꾸러져서 순식간에 사경에 이른지라 성도들이 어찌할 줄 몰라 황급히 상제님 앞으로 달려와 “살려 주사이다.” 하고 간곡히 청하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경문을 방으로 끌어들이게 하시니 번개칼이 따라 들어와 방 안에 가득 차거늘 상제님께서 “저 자 때문에 다른 사람도 죽겠으니 속히 그치라.” 하고 호령하시매 옆에 앉아 있던 성도들 네댓 명이 전부 쓰러져서 똥을 싸고 정신을 잃으니라. 5편 244장
하느님, 살려 주옵소서
이윽고 번개가 그치자 형렬이 살려 주시기를 애원하니 말씀하시기를 “벼락 맞아 죽은 놈은 까마귀도 뜯지 않고 땅에 묻지도 않는다는데 내가 어찌 살리겠느냐.” 하시니라. 그래도 형렬이 그치지 않고 지성껏 애원하니 “자네 살릴 기술이 있거든 살려 보소.” 하시거늘 형렬이 그제야 허락하신 줄 알고 재빨리 옆방으로 경문을 옮겨 놓고 숯덩이 같은 몸을 주무르며 “하느님, 살려 주옵소서. 하느님, 살려 주옵소서.” 하고 쉴 새 없이 애원하니 이윽고 경문이 다시 살아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허허, 저 사람 보소. 벼락 맞은 사람을 살려내는 기술이 있었구만. 내가 몰랐네.” 하시며 무수히 칭찬하시고 다시 살아난 경문에게 이르시기를 “청수를 모셔 놓고 ‘천지공사를 어겼사오니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하고 빌라.” 하시니라.
천지사업을 허수히 알기로
다음 날 경문을 불러 또 말씀하시기를 “나는 천지사업(天地事業)을 경영하는데 네가 허수히 알기로 천지에서 너를 죽이려다가 하도 불쌍히 애걸하여 살려 주는 것이니 약장 짤 편목을 잘 상고(詳考)하여 보라.” 하시거늘 경문이 상고하여 보니 편목 한 쪽이 부족한지라 다시 살려 달라고 애걸하매 상제님께서 용서하시고 타일러 말씀하시기를 “앞으로는 부디 조심하라. 그대를 데려올 적에는 그대가 잘한다고 시킨 것 아닌가. 삼가 조심하라.” 하시고 거듭 명하시기를 “속히 약장을 짜라.” 하시니라. 이후 경문이 수전증(手顫症)이 나서 한 달이 넘은 뒤에야 비로소 약장을 완성하니라. 5편 245장
회문산에서 보신 추수도운의 진주 공사
무신년 가을에 상제님께서 수부(首婦)님과 김형렬, 김갑칠, 박공우, 문공신, 안내성, 차경석 등 여러 성도들을 데리고 태전 콩밭 도수를 보러 떠나시니라. 상제님께서 회문산에 이르시어 공우에게 물으시기를 “공우야, 여기가 어디냐?” 하시니 공우가 “순창 회문산입니다.” 하고 아뢰니라. 공우가 상제님께 여쭙기를 “여기는 무슨 도수를 보러 오셨습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오선위기 도수를 보러 왔다.” 하시고 “밤밭이 어디 있느냐?” 하시거늘 수부님께서 “밤이 익었겠지요.” 하시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명하시기를 “가서 밤송이를 주워 와라.” 하시니 성도들이 상제님의 말씀을 따라 밤을 주워 오니라. 상제님께서 다시 “밤을 까라.” 하시고 잠시 후 “밤을 몇 번 깠느냐?” 하고 물으시니 성도들이 “세 번 깠습니다.” 하고 아뢰거늘 상제님께서 “밤을 한 번 까면 정월이요, 두 번 까면 사월이요, 세 번을 까면 가을 아니냐.” 하신 후 치성을 올리시고 오선위기 공사를 보시니라. 상제님께서 회문산에서 공사를 마치시고 성도들을 데리고 눈깜짝할 사이에 고창 사창리로 가시니 성도들이 잠깐 사이의 일에 놀라 서로 웅성거리더라. 5편 296장
묵은하늘이 두 사람의 살을 쓰려 하거늘
운산리 신경수의 집에 계실 때 하루는 공우에게 물으시기를 “너의 살과 나의 살을 떼어서 쓸 곳이 있으니 네 뜻은 어떠하냐?” 하시니 공우가 “쓸 곳이 있으면 쓰시옵소서.” 하고 대답하니라. 그 뒤로 직접 살을 떼어 쓰신 일은 없으나 다음 날부터 상제님과 공우의 용모가 심히 수척해지는지라 공우가 여쭈기를 “살을 떼어 쓴다는 말씀만 하시고 행하지는 않으셨는데 그 뒤로 선생님과 저의 용모가 함께 수척하여짐은 무슨 연고입니까?” 하니 말씀하시기를 “살은 이미 떼어 썼느니라.” 하시고 “묵은하늘이 두 사람의 살을 쓰려 하거늘 만일 허락하지 않으면 배은(背恩)이 되는 고로 이를 허락한 것이니라.” 하시니라.
계룡산 살막이 공사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신과 여러 성도들을 데리고 고부군 벌미면 살막에 가시어 “충청도 계룡산에 살(煞)이 있다.” 하시고 “계룡산의 살을 막는다.” 하시며 살막이 공사를 보시니라. 5편 324장
세계일가 통일정권 대공사
무신년 10월에 고부 와룡리 문공신의 집에 머무르시며 대공사를 행하실 때 성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이제 천하의 난국을 당하여 장차 만세(萬世)의 대도정사(大道政事)를 세우려면 황극신(皇極神)을 옮겨 와야 하리니 황극신은 청국 광서제(光緖帝)에게 응기되어 있느니라.” 하시니라. 또 말씀하시기를 “황극신이 이 땅으로 옮겨 오게 된 인연은 송우암이 만동묘(萬東廟)를 세움으로부터 비롯되었느니라.” 하시고 친히 곡조를 붙여 시천주주를 읽어 주시며 성도들로 하여금 밤마다 읽게 하시니라.
선천세계의 제왕기운을 거두심
며칠이 지난 뒤에 말씀하시기를 “이 소리가 운상하는 소리와 같도다.” 하시며 “운상하는 소리를 어로(御路)라 하나니 어로는 곧 임금의 길이라. 이제 황극신의 길을 틔웠노라.” 하시고 문득 “상씨름이 넘어간다!” 하고 외치시니 이 때 청국 광서제가 죽으니라. 이로써 세계일가(世界一家) 통일정권(統一政權) 공사를 행하시니 성도들을 앞에 엎드리게 하시며 말씀하시기를 “이제 만국 제왕의 기운을 걷어 버리노라.” 하시고 성도들에게 “하늘을 보라.” 하시매 하늘을 보니 문득 구름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제왕의 장엄한 거동처럼 허공에 벌여져 있다가 곧 사라지니라.
중국을 여러 나라로 나누심
한 성도가 여쭈기를 “황극신이 이 동토(東土)에 넘어오면 천하의 대중화(大中華)는 조선이 된다 하였사온데 그렇게 되면 청나라는 어떻게 됩니까?” 하니 “내가 거처하는 곳이 천하의 대중화가 되나니 청나라는 장차 여러 나라로 나뉠 것이니라.” 하시니라. 5편 325장
무신납월의 대공사를 보러 떠나심
무신년 섣달에 상제님께서 수부님과 함께 서울에 가시어 공사를 행하시니 이 때 김형렬, 김호연, 김갑칠, 안내성, 박공우, 문공신, 차경석 등 성도들 대부분과 문정삼, 차윤칠, 차윤덕, 차순옥, 차평국 등이 따르니라. 상제님께서 대흥리를 떠나시며 성도 여덟 명으로 하여금 상제님의 앞뒤로 네 명씩 서서 걷게 하시니 나머지 성도들은 몇 걸음을 떨어져 따르니라. 상제님께서 길을 떠나시며 말씀하시기를 “조선이 팔도(八道)니라.” 하시니라.
공주를 지나 서울로 가심
상제님께서 태전을 지나 계룡산을 거쳐 공주에 이르시니 이 때부터 큰길을 두고 험한 솔밭길을 택해 가시거늘 성도들이 눈 녹은 진창에 발이 빠져 걸음을 옮기지 못하매 “선생님, 땅이 질어 더 이상 못 가겠습니다.” 하니라 이에 상제님께서 “모두들 그 자리에 서 있으라.” 하시고 잠시 주문을 읽으시더니 풍운신장을 부르시어 어떤 법을 행하시매 이내 서풍이 불어와 질던 길이 금세 마르니라. 5편 335장
경학을 시험하심
이 때 태인 읍내에서 경학의 형이 사람을 보내어 경학을 부르거늘 상제님께서 이를 아시고 발을 만지며 말씀하시기를 “상말에 발복이라 하나니 모르는 길에 잘 가면 다행이요, 못 가면 불행이라는 말이니라.” 하시고 곧 홀로 떠나시어 최창조의 집에 가셨다가 다시 그 앞 솔밭길을 통하여 최덕겸의 집으로 가서 머무르시니 아무도 상제님이 계신 곳을 알지 못하더라.
평소에 경학의 형은 경학이 이상한 술객에게 홀려 살림을 돌보지 않음을 심히 염려하던 차에 마침 관청에서 그 술객과 경학을 잡으러 간다 하거늘 따로 아우만 불러다가 몰래 숨기려 함이었는데 이 때 경학이 태인 읍내로 가는 도중에 순검에게 붙잡혀 집으로 되돌아오니라. 이에 순검들이 경학을 협박하며 상제님을 잡으려고 사방을 수색하거늘 그 계신 곳을 알 수 없으매 창조의 집까지 갔다가 결국 찾지 못하고 돌아가니라. 한편 응종과 공신은 상제님께 세배를 드리려고 창조의 집에 갔다가 순검에게 구타를 당하니라.
무사히 겪어 내니 다행이로다
이 날 경석이 정읍으로부터 공우와 윤경을 상제님께 보내어 일이 무사히 된 경과를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공사를 마친 뒤에 경석을 시험함이었는데 무사히 겪어 내니 다행이로다.” 하시니라. 5편 352장
공신에게 석 달간 진액주 수련을 시키심
상제님께서 문공신의 집에 계실 때 친히 법사(法師)가 되시어 공신에게 진액주 수련을 시키시니라. 상제님께서 공신으로 하여금 아랫방에 청수를 모시게 하시고 명하시기를 “잠도 자지 말고 석 달간 일심으로 주문을 읽으라.” 하시거늘 먼저 상제님의 무극대도를 받아 천지로부터 인증(認證) 받는 공부인 의통(醫通) 공부를 5일 도수로 하게 하시고 허령(虛靈), 지각(智覺), 신명(神明) 공부를 각각 7일, 21일, 21일 도수로 시키신 후 마지막으로 옥추통부(玉樞統符) 공부를 시키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종종 출타를 하시나 순간순간 꼭 그 자리를 지키시니 공신이 주문을 읽다 깜박 졸거나 딴생각에 빠지려 하면 윗방에서 상제님의 불벼락 같은 호통이 들려오므로 잠시도 방심하지 못하거늘 후에 공신이 말하기를 “그 때는 잠 한숨만 잤으면 살겠다 싶더라.” 하니라.
나중에 큰 스승이 나와서 공부시킨다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뒤에는 공신이 법사가 되어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와 같이 공부를 시키는데 신명 공부는 시키지 않으니라. 공신이 자주 말하기를 “내가 하는 것은 그저 대강일 뿐이요, 나중에 큰 스승이 나와서 따로 공부시키신다.” 하니라. 5편 358장
영산과 초산, 단산
하루는 상제님께서 낙수동(洛水洞) 오경재의 물방앗간 집에 방을 빌려 성도들에게 태을주 수련을 시키시니라. 이 때 상제님께서 마당에 멍석을 깔고 그 가운데에 반듯하게 누우시어 한쪽에는 영산을, 한쪽에는 초산과 단산을 앉혀 놓고 인사를 시키시거늘 사람들이 영산과 초산(楚山), 단산(丹山)을 일컬어 삼산(三山)이라 이르니 초산은 오씨(吳氏)로 중국 사람이요, 단산은 이씨(李氏)로 충청도 사람이라. 이는 상제님께서 초산과 단산을 화권으로 순식간에 불러 영산과 서로 만나게 하심이더라.
천지일월 사체(四體) 공사
이 날 황새머리에 사는 송원도(宋元道)가 함께 참석하니라. 으스름한 황혼 무렵에 공신을 비롯한 성도들이 방 안에서 태을주를 읽고 있는데 상제님께서 공신을 데리고 슬그머니 마당으로 나가시더니 잠시 후에 밖에서 도란도란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리거늘 방문 가에 앉아 있던 송원도가 호기심이 나서 손끝으로 창호지를 뚫고 내다보니 상제님과 세 사람이 서 있는데 발은 땅을 딛고 있으되 머리는 구름을 뚫고 하늘까지 닿아 있더라.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송원도는 죽는 날까지 “하느님이 넷이다.”라고 이르니라.
단산의 운명을 일러 주심
하루는 상제님께서 단산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술이나 먹고 기생 끼고 놀면서 그렇게 지내라.” 하시거늘 그 후에 단산이 얼마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니라. 5편 385장
막둥이 도수
상제님께서 내성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초복, 중복 다 제끼고 말복 운을 타라.” 고 또 말씀하시기를 “말복 운이 가장 크니라. 늦게 들어온 사람이 크게 받나니 ‘막둥이 놀음’이니라.” 하시고 내성에게 막둥이 도수를 붙이시니라. 하루는 문공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일은 결인(結咽) 도수로 되느니라.” 하시니라.
돌아서면 네가 일등이 아니냐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사를 보시는데 제일 끝에 선 성도 하나가 “제가 왜 맨 끝입니까?” 하고 볼멘소리를 하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돌아서면 네가 일등 아니냐.” 하시거늘 그 성도가 생각해 보니 과연 그러한지라 마음을 눅이고 공사에 수종드니라. 6편 59장
숙구지 공사로 일을 돌리리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개의 창자를 빼내신 후 그 가죽을 둘러쓰시고 사람들에게 달려드시니 모두 크게 놀라니라. 어느 날 공신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잠자던 개가 일어나면 산 호랑이를 잡는다.’는 말이 있나니 태인 숙구지(宿狗地) 공사로 일을 돌리리라.” 하시니라. 또 하루는 공신에게 글 한 수를 읽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孤忠一代無雙士니 獻納三更獨啓人이라
고충일대무쌍니 헌납삼경독계인이라
평생의 외로운 충절은 필적할 선비가 없으니
삼경까지 충언을 올리는 사람 오직 그 혼자뿐이네.
남은 7년 공사
하루는 상제님께서 공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남은 7년의 공사를 너에게 맡기노라.” 하시니라. 6편 75장
후천 대개벽 구원의 의통 집행 공사 : 숙구지 도수
태인 화호리(禾湖里) 숙구지(宿狗地)에 사는 전태일(全泰一)이 운산리(雲山里)에 머물고 있는 공우에게 찾아와 말하기를 “시천주(侍天主) 주문을 읽었더니 하루는 한 노인이 와서 ‘살고 잘 될 곳을 가려면 남쪽으로 20리를 가라.’ 하므로 찾아왔노라.” 하니라. 공우가 태일을 데리고 와서 아뢰니 상제님께서 글 한 장을 써서 태일에게 주시거늘 태일이 집에 돌아와서 펴 보니 곧 태을주(太乙呪)라. 이에 하룻저녁을 읽으니 온 마을 남녀노소가 다 따라 읽는지라 이튿날 태일이 와서 상제님께 그 사실을 아뢰니 말씀하시기를 “이는 문공신(文公信)의 소위라. 숙구지는 곧 수(數) 꾸지라. 장래 일을 수놓아 보았노라. 아직 시기가 이르니 그 기운을 거두리라.” 하시고 약방 벽에
氣東北而固守 理西南而交通
기동북이고수 이서남이교통
이라 쓰시고 문밖 반석(盤石) 위에 물형(物形)을 그려 점(點)을 치신 다음 종이에 태을주(太乙呪)와 ‘김경수’를 써 붙이시고 일어나 절하신 뒤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김경수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김경수를 명부시왕전에 앉히심
이후 상제님께서 성도들을 데리고 비인(庇仁)에 가시어 복종(覆鍾)도수를 보시며 말씀하시기를 “김경수를 천상의 명부시왕전(冥府十王殿)에 앉혀 해원시키리라.” 하시니라. 6편 111장
공신을 원시천존들께 인사시키심
상제님께서 구릿골에 계실 때 하루는 한밤중이 되어 여러 성도들 틈에서 잠을 자는 공신을 툭 치시며 따라 나오라고 손짓을 하시거늘 공신이 밖으로 나오니 상제님께서 “내 등에 업혀라.” 하시고 “업혀 있는 동안은 눈을 뜨지 말아라.” 하시니라. 공신이 상제님의 등에 업히며 눈을 감으니 붕 떠서 어디론가 올라가는데 공신의 귀에는 바람 스치는 소리만 맹렬히 들리거늘 이는 상제님께서 축천(縮天)을 하심이라. 이윽고 바람소리가 그치더니 상제님께서 한 곳에 공신을 내려놓으시며 “눈을 떠라.” 하시므로 공신이 눈을 뜨니 요운전이라는 현판이 걸린 장대한 궁궐 앞에 와 있더라.
상제님께서 공신을 데리고 궁 안으로 드시더니 여러 천존(天尊)들께 공신을 인사시키시거늘 선관들이 “그려~.” 하고 대답하시고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니라. 이어 상제님께서 보좌에 오르시어 만조백관에게 명을 내리시니라. 공신이 궁 안의 여러 곳을 구경하고 다시 상제님을 따라 내려와 잠자리에 드니 다른 성도들은 눈치 채지 못하니라. 6편 117장
나는 대효를 행하고 있느니라
하루는 상제님께서 채사용(蔡士用)과 성도 여러 명을 데리고 천원리에 이르시어 한 집으로 들어가시니라. 이에 성도들이 따라 들어가 보니 한 노인이 신을 삼고 있는데 상제님께서 삿갓을 들고 그 옆에서 한참을 바라보시다가 나오시거늘 성도들이 “그 노인은 누구십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나의 부친이니라.” 하시니라. 사용이 황송한 마음에 즉시 백미 한 말을 져다 드리고 오니 상제님께서 이미 아시고 “나의 부친이 죄가 많으므로 신틀로써 그 죄를 감하게 하였거늘 너로 인하여 나의 부친은 3년을 더 신을 삼아야 하리라.” 하시니라.
상제님께서는 성도들이 간혹 부친의 빈궁함을 보고 돈이나 곡식을 드리는 자가 있으면 크게 꾸짖으시고 도로 거두시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시거늘 성도들이 그 연고를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하늘의 복(福)이 다시 시작되는 그 처음의 때를 당하여 내가 모범을 보이나니 나는 대효(大孝)를 행하고 있느니라.” 하시니라. 하루는 문공신(文公信)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부친도 나중에 잘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9편 121장
죽었을 때는 안 울더니 살아나니 우는구나
이 해 겨울에 공신의 집에 머무르실 때 하루는 상제님께서 어둑새벽에 일어나 아무 말씀도 없이 짚신을 신고 급히 길을 나서시거늘 성도들이 모두 무슨 일인가 하여 뒤를 따르니 상제님께서 한 시오리 남짓을 걸어 새울에 사는 사음 박씨의 집으로 가시니라. 이 때 평소에는 상제님께서 오시면 버선발로 문 앞까지 뛰어나와 반기던 박씨가 웬일인지 밖에서 인기척을 하여도 내다보지 않거늘 상제님께서 “이 사람, 집에 있는가?” 하시고 성도들과 더불어 안으로 들어가시니 그제야 박씨가 방문을 열고 상제님을 맞이하는데 눈가에 눈물이 번진 채 넋이 나간 얼굴로 아뢰기를 “복래라는 놈이 엊저녁에 죽었습니다.” 하고 털썩 주저앉더라.
이에 상제님께서 성도들과 더불어 방안에 드시어 박씨의 죽은 아들 복래의 옷을 벗겨 방 한가운데다 옮겨 누이시고는 성도들로 하여금 빙 둘러앉게 하시더니 박씨에게 처방을 일러 주시며 급히 약을 달여 오게 하시어 숟가락으로 죽은 아이의 입에다 조금씩 떠 넣으시니라. 이 때 공신은 상제님께서 죽은 사람 살리시는 것을 처음 보는지라 내심 의혹을 품고 ‘만약 저 아이를 살리지 못하면 뒤꼭지가 부끄러워 어떻게 이 집을 나설꼬.’ 하고 생각하니라.
막걸리가 심장에 올라붙어서
그 후 한나절이 지나도록 소생의 기미가 없거늘 성도들 모두 은근히 조바심이 나서 애써 눈길을 돌리는데 이윽고 상제님께서 “저놈 손가락 까딱거리지 않는가?” 하시는지라 모두 죽은 아이를 유심히 살피니 순간 아이의 발가락이 까딱거리거늘 상제님께서 다시 “저놈 발가락 까딱거리지 않는가?” 하시니 모두 반갑게 “예!” 하고 대답하니라. 얼마 후에 죽은 아이가 눈까풀을 파르르 떨더니 “앙!” 하고 울음을 터뜨리며 깨어나 눈을 뜨거늘 눈알이 충혈되어 좀 빨갛더라. 이 때 윗방에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가슴 졸이며 지켜보던 복래의 어머니가 너무 기뻐서 울음을 터뜨리니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었을 때는 안 울더니만 살아나니까 우는구나. 죽은 자식 살려놨으니 술도 가져오고 안주도 가져와야지.” 하시니라.
이어 박씨에게 이르시기를 “애가 조금 있다가 오줌 마렵다고 할 테니 그 오줌을 받아서 나에게 가져오라.” 하시어 오줌을 보시니 그 색깔이 뿌옇거늘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이것이 무엇 같으냐?” 하고 물으시니 저마다 “쌀뜨물 같다.”, “구정물 같다.” 하는데 “이것이 막걸리 빛 안 같으냐? 이 아이가 어제 막걸리를 부모 몰래 먹었는데 그것이 그만 심장(心臟)에 올라붙어서 그 지경이 되었느니라.” 하시니라. 이에 박씨가 ‘영영 놓칠 뻔한 아들을 살려 주시니 이 은혜를 어찌 갚을꼬.’ 하며 기쁜 마음으로 주안상을 차려 올리니 상제님께서 성도들과 더불어 즐겁게 드시니라. 9편 129장
이별을 노래하심
겨울에 문공신(文公信)의 집에 가시어 쉬시다가 정읍(井邑)으로 출발하실 즈음에 공신에게 옛 시조 한 수를 읊어 주시니 이러하니라. 10편 3장
대천일해(大天一海)에 무근목(無根木)이 떠 있고
가지는 열두 가지 잎은 삼백 예순 잎이 피었으니
뚜렷이 일월이 희도다.
구시월 세단풍(細丹楓) 바람 잡아 탄금(彈琴)하니
슬프다! 저 새소리 귀촉도 불여귀(不如歸)를 일삼더라.
내가 항상 너희들의 등 뒤에 있건마는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약방으로 모이라는 통지를 띄우시고 형렬에게 “의복 한 벌을 새로 지으라.” 명하신 뒤에 이로부터 곡기를 끊으시고 소주만 잡수시니 이 때 형렬의 큰며느리가 수종 드니라. 20일에 각처 성도들이 구릿골에 모이니 김형렬, 김갑칠, 김자현, 김덕찬, 문공신과 그의 큰아들 광옥, 박공우, 김경학, 신원일, 이치복, 이공삼, 최덕겸, 채사윤, 류찬명과 그의 큰아들 재옥 등이라. 상제님께서 성도들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몸을 피하려 하나니 너희들이 능히 나를 찾겠느냐?” 하시니 모두 큰 소리로 “찾겠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때가 되면 다 한 마당에 들어선다.” 하시니라.
다시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씀하시기를 “이후에 너희들이 나를 보지 못하여 애통해하며 이곳에서 왔다갔다하는 모습이 내 눈에 삼삼하니라. 나는 항상 너희들의 등 뒤에 있건마는 너희들은 나를 찾지 못할 것이요 내가 너희들을 찾아야만 나를 만나 보게 되리라.” 하시니라. 10편 25장
어천하실 것을 천지신명에게 선언하심
이 날 오후에 상제님께서 몹시 고통스러워하시거늘 약방 마루에 누우셨다가 다시 뜰에 누우시고 마당에 나가 뒹굴며 신음하시고 사립문 밖에까지 나가 누워 괴로워하시더니 한참 뒤에 형렬을 불러 이르시기를 “나를 떠메고 너의 집으로 가자.” 하시어 형렬의 집에 가서 누우셨다가 다시 약방으로 돌아오시니라. 이렇게 네댓 번 왕복하시니 형렬이 심히 지치거늘 경석이 대신하여 두어 번을 더 왕복하니라. 잠시 후 상제님께서 일곱 사람에게 양쪽 팔다리와 허리와 머리를 떠받치게 하시고 “이리 가자.” 하시어 가리키신 곳으로 가면 잠시 뒤에 다시 “저리 가자.” 하시는데 이러기를 여러 차례 하시더니 다시 약방으로 가 누우시니라. 이 때 갑자기 상제님께서 누우신 채 천장으로 일곱 번을 튀어 오르시니라.
생사의 도는 몸의 정기(精氣)에
상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죽고 살기는 쉬우니 몸에 있는 정기(精氣)를 흩으면 죽고 모으면 사느니라.” 하시고 경석으로 하여금 양지에
全羅北道 古阜郡 優德面 客望里 姜一淳 西神司命
전라북도 고부군 우덕면 객망리 강일순 서신사명
이라 써서 불사르게 하시니라.
종통을 바로잡으라
또 공신에게 말씀하시기를 “맥 떨어지면 죽으리니 연원(淵源)을 바로잡으라.” 하시니라. 10편 45장
문공신의 7년 공사
상제님께서는 양도(陽道)로써 차경석을 내세워 동학 역신 해원공사를 보시고 진주 도수와 문왕 도수와 이윤 도수를 맡은 문공신을 음도(陰道)로써 내세워 7년 공사를 맡기시니라. 상제님께서 어천하시기 전 공신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남은 7년의 공사를 너에게 맡긴다.” 하시고 “은두장미(隱頭藏尾)를 해야 살아 남으리라.” 하시니라.
이에 공신이 상제님께서 어천하신 후 7년 동안 혼자서 오쟁이에 보릿가루를 담아 지고 주로 충청도 지방을 다니며 상제님의 말씀을 좇아 공사를 보는데 대개는 해안을 따라 오르내리며 공사를 보고 명산을 찾아 글과 부(符)를 써서 제를 올리기도 하니라. 두승산에 가서 산제(山祭)를 모시고, 부안 줄포(扶安 茁浦) 해변에서 수륙제(水陸祭)를 올리고 안면도(安眠島)에 가서는 ‘북을 울린다.’ 하며 북 도수를 보니라. 이후 공신은 단산(丹山), 수산(水山)과 함께 군산 미두장에서 복록을 균등케 하는 전곡신(錢穀神) 공사를 보니라. 10편 136장
문공신의 교단 형성
7년 공사를 마친 뒤부터 공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생겨 7, 80여 호(戶)의 교단을 형성하게 되거늘 공신이 15호를 한 반으로 하여 각 반마다 통솔할 수 있는 육임을 하나씩 두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이것이 진주(眞主) 도수니라. 진주를 상기하고 잊지 마라.” 하니라. 이 때 제자들이 자연스레 공신을 ‘선생님’이라 부르니 하루는 공신이 이르기를 “선생님이라는 호칭은 합당치 않으니 나를 주인(主人)이라 불러라.” 하니라. 한편 박인규가 공신을 자주 찾으매 그 때마다 인규를 배웅하여 대사리 재까지 따라 올라가 칠성바위를 바라보며 이르기를 “앞으로 오실 분은 저리 오시니 착실히 잘하라.” 하니라. 10편 137장
성골을 찾기 위한 공신의 노력
조철제의 허무맹랑한 만행을 탐지한 문공신은 김정우(金定雨)로 하여금 철제를 거짓 추종하여 신임을 받게 하면서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니라. 하루는 철제를 따르던 경상도 사람 둘이 공신에게 와서 공부를 청하매 공신이 흔쾌히 받아들여 공부를 시키거늘 그중 한 명이 느닷없이 피를 쏟더니 혼수상태에 이른지라 공신이 정신을 차리게 하고 그 연유를 물으니 거짓으로 남의 집에서 돈을 가져와 신벌을 받은 것이더라. 공신이 그들을 다시 돌려보내니 그들이 그 동안 베풀어 준 공신의 은혜에 감복하여 아쉬움을 남기고 다시 조철제에게 돌아가니라.
임술(壬戌 : 道紀 52, 1922)년 정월 23일에 그 두 사람이 다시 공신을 찾아와 “조철제가 상제님의 성골을 도굴하여 영모재에 숨겨 두었는데 내일 새벽에 북간도로 모셔 간다.” 하거늘 일찍이 공신이 고부경찰서에 갇혀 있을 때 ‘공신아, 내 몸이 조선을 떠나면 안 되느니라.’ 하신 상제님 말씀이 불현듯 되살아나는지라 법적 절차를 밟아 성체를 모셔오려고 하니, 공신의 제자 양주선, 민영두, 박노규, 이기선 등이 서둘러 영모재를 습격하자고 강력히 주장하매 20여 명을 거느리고 석 자가 넘는 각목을 챙겨 통사동으로 찾아가니라.
영모재에 도착하여 문지기 넷을 때려눕히고 방으로 들어가니 조철제는 이미 도망하고 피우던 담뱃불이 채 꺼지지 않았거늘 공신이 이중벽 속에 숨겨 둔 성골을 찾아 집으로 모시고 와 보니 뜻하지 않게 현금 만여 원이 들어 있더라. 공신이 현금은 경찰서에 가져다 주고 찾아온 성골을 천장 위에 은밀히 모시다가 운산리 신경수의 집으로 옮겨 용마루 속에 모시거늘 이 과정에서 성골 가운데 왼팔 뼈가 없음을 확인한 공신이 정우 등으로 하여금 다시 철제를 추격하게 하여 서대전역에서 그 일행을 붙잡으니 철제가 왼팔 뼈를 심복 김윤진에게 주어 도망치게 하매 정우 등은 철제가 가진 현금을 빼앗으니라.
이에 철제가 대전 경찰서에 정우 일행을 강도로 고소하매 경찰이 철제와 정우 일행을 취조하니 성골 도굴 사실이 모두 드러나는지라 공신과 장남 광옥(光玉)을 비롯한 정우와 철제 등 20여 명이 검거되어 공신은 7년 징역에 처해지고 철제는 되찾은 돈으로 뇌물을 주어 곧 풀려나니라. 이 때 수산도 독립 자금 후원의 죄로 공신과 함께 대전 형무소에서 7년을 복역하니라. 10편 140장
고소재에서의 10년 철야 수행
공신이 태전 형무소에서 출옥한 뒤 모악산 고소재(姑蘇峙)로 들어가 10년 수행을 시작하니라. 하루 한두 시간밖에 잠을 자지 않고 수행을 하여 49일 만에 득도하고 이후로도 10년 동안 수행하니 이 때 호랑이 한 마리가 마치 개처럼 따라다니며 공신을 지키거늘 공신은 그 호랑이를 ‘바둑이’라 부르니라. 하루는 모두들 시장기를 이기지 못하니 공신이 제자들에게 묻기를 “자네들 용봉탕 한번 먹어보지 않을 텐가?” 하거늘 제자들이 한숨을 쉬며 “준비한 것도 없이 먹겠습니까?” 하고 물으니 공신이 돌아앉아 심고를 한 뒤에 말하기를 “뒤편 굴뚝에 가 보게.” 하니라. 이에 한 사람이 굴뚝에 가 보니 국수와 계란이 놓여 있는지라 가져다 삶으니 인원에 딱 맞는 양이거늘 공신이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국수는 길으니 용이요, 계란은 닭이니 봉황이네.” 하매 모두들 크게 웃으니라. 10편 144장
파방 도수
공신이 독배고개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공부를 시키니 이 때 모인 사람들은 채청송, 양인산, 정판진, 김찬숙, 신의균 등이더라. 하루는 공신이 “자네들 선초(仙草) 맛 봤는가?” 하니 제자들이 “얘기로도 못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하거늘 공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그러면 선초 한 대씩 하세.”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문을 열고 방으로 쑥 들어오니 그는 도꾼을 가장한 밀정 유화숙이라 화숙의 밀고로 공신과 제자들이 ‘민심을 어지럽힌다.’ 하여 전주형무소에 갇혔다가 3년 후 해방을 맞아 석방되니라. 형무소에 있는 동안 공신과 제자들 모두 제대로 먹지 못해 피골이 상접하고 몇몇은 주림을 이기지 못해 죽기도 하거늘 이는 독조사가 새벽녘에 개평을 얻어 판을 모두 걷고 후천 상생 세상을 열게 하는 파방(破放) 도수라. 이후에 공신이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독조사 도수를 내가 받았노라.” 하니라. 10편 145장
도술약국을 열다
계사(癸巳 : 道紀 83, 1953)년 양력 7월 27일에 이르러 휴전협정이 조인되니 남북 상씨름의 시작인 6·25전쟁이 긴 휴게기(休憩期)에 들어가니라. 그 해 가을 공신이 제자들에게 수차례 “신태인에 도술약국(道術藥局)을 열어야 한다.” 하고 강조하매 제자들이 공신의 명에 따라 부랴부랴 신태인 남동에 집 한 채를 마련하고, 이완식의 집에서 서류함을 가져다 약장으로 개조하여 쓰니라. 이 때 다른 약은 전혀 짓지 않고 사물탕(四物湯)만 지어 주는데 많은 사람들이 아우성치며 몰려드니라.
약방의 조직과 치성
약방 조직은 공신을 제일 상좌로 하고 그 밑에 육임이 있고 육임 밑에 마을 단위로 각 15반을 두어 차례대로 치성을 모시니라. 치성은 이삼 일간 올리는데 치성이 끝나면 공신이 강훈을 하고 저녁에는 공신이 법사(法師)와 강사(講師)가 되어 직접 수도 공부를 시키니라. 10편 146장
공부법을 말하지 말라
공부는 보통 5일, 7일, 21일, 21일 도수로 하는데 일반 신도는 이를 축약하여 5일, 7일 도수로 하고 공부할 때는 누구든지 절대 잠을 자지 못하게 하니라. 의통 공부에 앞서서는 개를 잡아 천지에 제를 올리니라. 이 때 공신이 수차 명하기를 “우리 도는 음도(陰道)이니 가족들에게도 공부하는 법을 말하지 말라.” 하니라.
작가법 도수
또 33천(天) 28수(宿)의 작가법(作家法) 도수로 네 반의 제자들을 모아 놓고 공부를 시키니라. 10편 147장
의주주(意主呪)와 소원주(所願呪)
평소 공부를 할 때 십이주문을 사흘간 읽은 뒤에 의주주(意主呪)를 읽게 하거늘 그 내용은 이러하니라.
意主誠信仁降和
의주성신인강화
吾敬安保一終正
오경안보일종정
상제님 천지사업의 주인을 참된 뜻으로 정하매
성신(誠信)으로 잘 모시면
어진 마음이 내려와 화기가 감돌고
우리가 공경히 안보(安保)하면
한결같이 끝끝내 마음이 바르리라.
또 주문을 다 읽고 나면 끝에 항상 소원주(所願呪)를 읽히니 이와 같으니라. 10편 148장
천무진살(天無盡殺)하시고
지무진살(地無盡殺)하시고
인무진살(人無盡殺)하시니
상제님 도덕(道德)으로
포덕천하(布德天下) 광제중생(廣濟衆生)케 해 주옵소서.
도통 공부하러 모인 성도들
을묘(乙卯 : 道紀 45, 1915)년에 김형렬이 신안이 열려 신명을 부리고 풍운조화를 짓거늘 상제님을 모시던 다른 성도들도 신력(神力)을 통하고 싶은 마음이 일어나 통사동(通司洞)에 있는 영모재(永慕齋)에 모여 도통 공부에 들어가니 이 때 참석한 사람은 박공우, 김경학(金京學), 김광찬(金光贊), 문공신(文公信) 등 20여 명이더라. 원래 광찬은 성품이 호탕하고 성격이 급한지라 공부하는 도중에 돌연 광기(狂氣)가 발동하여 주먹을 휘두르니 성도들이 이 일을 계기로 도통 공부에 회의를 품고 모두 흩어져 돌아가니라.이 때 처음부터 끝까지 이를 지켜본 인물이 있었으니, 곧 상제님께서 문왕(文王) 도수를 붙이신 문공신이니라. 11편 35장
도운의 뿌리 분열 시대
각 지방으로 흩어져 돌아간 성도들이 지방 신도들과 연락하여 따로 문호(門戶)를 세우니 이러하니라. 안내성은 순천 양율(順天 良栗)에서, 이치복은 원평에서, 박공우는 태인에서 교단을 세우고 또 김형렬, 김광찬, 문공신, 김병선(金炳善) 등이 각기 문호를 여니 이로부터 각 교파가 분립하여 도운의 뿌리 분열 시대가 열리니라. 11편 40장
선생님은 후에 오시리니
하루는 공신이 이르기를 “남자가 아무리 잘한다고 해야 둘이 하는 사람의 절반도 못 따른다.” 하고 “세상을 잘 살피고 잴 줄 알아야 살아남는다. 늘 지혜를 모아서 세상 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잣대질하라.” 하니라. 이즈음 공신이 제자들에게 거듭 말하기를 “그분 말씀은 끝까지 하나도 틀림이 없네. 앞으로 때가 되면 자네들 마음 시키는 대로 되는 세상이 오니 일심으로들 해야 하네. 큰 스승은 후에 청운교(靑雲橋), 낙수교(洛水橋)를 타고 오시리니 주위가 어쨌든 끝까지 잘 마치게.” 하니라. 하루는 공신이 이르기를 “우리 일은 삼대(三代)밖에 없다.” 하니라.
영산 문공신의 죽음
도술약국을 연 지 몇 달 후 공신이 주변을 정리하고 이것저것을 소각하더니 그로부터 사흘 후 자리에 누워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각자 소원대로 글을 써서 내 몸에 넣어라. 내 손으로 못 쓰는 사람은 무엇이 한(恨)인지 말로 하라. 대신 써서 넣어 준다.” 하고 잠시 거친 호흡을 쉬더니 잠이 든 듯 천명을 다하거늘 이 날은 갑오(甲午 : 道紀 84, 1954)년 음력 5월 7일이더라. 공신이 죽던 날 밤 하얀 꽃상여가 하늘에 떠서 창(唱)을 하듯이 웅웅 소리가 나며 천천히 떠 가니라. 10편 149장
도기 136년 5월 5일 금요일 이른 10시 3분
피리 부는 사람, psuk0304@hanmail.net 011-9511-0423
첫댓글 잘보았습니다. 어느날 수행을 하며 공신이란 이름이 떠오르면서 입밖으로 튀어나온적이 있어서 문공신성도님에 대해 알고 싶었는데 이렇게 자세히 알게 되어 기쁘군요.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