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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작소설비평회♣ 원문보기 글쓴이: cafe
보석상자 주아름 아침 남자는 물을 끓인다. 냉장고안에 들어있는 세 개의 1.5리터들이 페트병엔 아직도 물이 가득 차있지만 남자는 항상 네 개를 채워 놓아야만 한다. 냉장고 문의 물병이 놓여야하는 자리에는 페트병 네 개가 적당하다. 그중 한 개라도 비워져있다면 남자는 까닭모를 불안함에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식기 건조대에는 냄비가 뒤집힌 채 놓여있다. 냄비는 뒤집힌 바다거북처럼 안쓰럽기 그지없다. 바로 서기위해 몸을 뒤척여 보지만 여의치 않는다. 냄비를 집어든 남자는 수도꼭지를 틀어 물을 받는다. 냄비 안에 거센 물보라가 와아 하고 인다. 바다거북의 웃음소리 같다. 심연의 바다로부터 밀려온 그 파도의 포말은 바다거북을 웃음 짓게 하기에 충분하다. 냄비에 적당히 찬 물은 늘 1.5리터 페트병을 가득 채운다. 다시 말해 그 한번의 작업으로 인해 단 한 개의 물병이 채워지는 셈이다. 언젠가 여자는 말했다. 차라리 커다란 주전자를 하나 사지 그래. 그때도 남자는 대답 없이 물이 가득 찬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렸다. 여자는 그런 남자의 뒷모습과 침대 맡의 탁상시계를 번갈아 바라보며 남자가 시계바늘과 같다고 생각했다. 시계바늘. 항상 어딘가를 향해 내달리지만 결국은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시계바늘. 그리고 한 치의 어긋남조차 용납하지 않는 원운동만을 반복하고 있는 시계바늘. 여자는 가슴이 답답했다. 가스레인지에 냄비를 올려놓고 불을 켠다. 남자의 오피스텔에 구비된 가스레인지의 화력은 막강하다. 불이 붙는 순간 정수리까지 열기가 타고 오른다. 넘실대는 불꽃은 냄비를 집어삼킬 듯 에워싼다. 마치 불타는 손을 가진 악마가 냄비를 받쳐 들고 있는 형상이다. 그 불길에 둘러싸인 손가락들은 냄비를 우그러뜨려 버릴 듯 맹렬한 기세다. 남자는 그 자리에 선 채 불길을 한참 바라본다. 열기로 인해 얼굴이 붉게 상기된다. 남자는 혹시 자신이 무언가에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하고 잠깐 생각해 본다. 물이 끓기까지는 오분 남짓한 시간이 소요된다. 남자는 베란다로 나가 담배를 피워 문다. 담배 한대를 피우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마도 사 분이면 족할 것이다. 멀리서 새벽이 어슴푸레 밀려오며 어둠을 걷어내고 있다. 푸르도록 창백한 새벽공기의 흐름은 바다거북의 유영처럼 단조롭다. 그 단조로운 흐름을 흩트려 버리려는 듯 남자는 담배연기를 훅 내 뱉는다. 그러나 연기는 흡수되듯 그 흐름을 따라 역시 단조롭게 흐르며 사라져 간다. 남자는 자신의 출신을 부끄럽다 생각하진 않았다. 단지 그 출신과 자신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만이 들뿐이었다. 사창가의 포주였던 어머니가 술 취한 누군가에게 질펀한 사투리로 상스러운 욕설들을 늘어놓을 때도, 홍조를 띤 맨얼굴에 목욕가방을 든 이모들이 학교를 파하고 돌아오는 어린남자의 볼에 입을 맞춰댈 때도 남자는 그저 아무런 표정 없이 선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남자의 표정은 그런식으로 사라져 가고 있었다. 자신의 거웃이 자라나기 시작할 무렵 남자는 가게 한 구석의 쪽방에 드러누워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진 이모들의 교성소리를 들으며 첫 수음을 했다. 아랫배에 흩뿌려져 천천히 배꼽으로 흘러들어 가고 있던 자신의 진득한 정액을 바라보며 남자는 언젠가 이곳을 반드시 떠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생각을 했다. 베란다 밖으로 담배를 튕겨버리고 들어온 남자는 또 다시 가스레인지 앞에 선다. 냄비는 맹렬한 소리를 내며 요동치고 있다. 마치 터져 오르기 직전의 활화산 같다. 불길은 여전히 거세게 타오르며 냄비를 핥아대고 열이 잔뜩 오른 플라스틱 손잡이에서는 매캐한 냄새가 피어오른다. 화산 속으로 차오르는 마그마의 냄새가 이런 것일까. 실제로 맡아본 적이 없으니 알 길은 없다. 남자는 도시 한복판에서 화산이 터져 나오던 어느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려본다. 순간, 냄비는 소리를 멈춘다. 그 순간이 바로 물이 끓어오르려는 찰나이다. 절정의 순간엔 늘 그렇듯 정적이 함께 하기 마련이다. 남자는 본능적으로 가스레인지의 레버를 돌려 불을 끈다. 기막힌 타이밍이라 생각했지만 뚜껑사이로 비어져 나오는 수증기와 함께 한 방울의 물이 넘쳐 흘러내린다. 그러나 그쯤은 상관없다. 물방울은 달궈진 냄비의 표면을 타고 내리다 증발해 사라진다. 바닥에 닿을 겨를도 없다. 뚜껑을 열자 품어져 나온 새하얀 김이 남자의 손을 와락 감싼다. 녹차 티백 두 개를 냄비 안에 집어넣은 남자는 곧 뚜껑을 닫고 욕실로 향한다. 저녁 퇴근한 남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문손잡이에 열쇠를 꽂으며 즐거운 나의 집을 흥얼거린다. 그러나 문이 열린 후 집안에서 터져 나오는 낯선 적막감은 노래와 어울리지 않는다. 그것을 감지한 남자는 노래를 멈추고 낯선 공기 속으로 한걸음 내딛는다. 그 한걸음에 낯선 공기가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나가는 듯하다. 남자는 형광등 스위치를 켠다. 형광등은 깜빡이며 더디게 켜진다. 바다거북의 심장박동 같다. 남자는 현관에서서 그 심장박동 사이사이의 찰나를 본다. 낯선 벽지와 낯선 가구와 그리고 낯선 체취가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그 바람에 놀란 어둠이 집안 곳곳으로 재빨리 숨어 들어간다. 미처 숨지 못한 어둠은 곧 멈춰버린 심장박동과 함께 소멸한다. 바다거북의 죽음이다. 구두를 벗은 남자는 어딘가에 숨어 훔쳐보고 있을 어둠의 불편한 시선을 느끼며 집안으로 들어선다. 남자의 어머니는 남자에게 이 오피스텔을 남겼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남긴 이는 남자의 의붓아버지이다. 남자의 의붓아버지는 남자보다 불과 다섯 살이 많았다. 어머니와는 열다섯 살 차이였다. 남자는 그를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처음 만났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지만 그는 친절하게도 남자에게 어머니의 사인이 뇌출혈이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곤 남자의 이름으로 된 오피스텔 매매 계약서를 건넨 후 검은색 승용차에 몸을 싣고 떠나버렸다. 남은 재산은 모두 그의 소유가 된 채였다. 떨어지는 낙엽 사이로 그가 탄 차가 점점 작아져가는 것을 바라보던 남자는 계약서를 찢어버릴 것인가 말 것인가를 잠시 고민했다. 그러나 그것을 찢어버리기엔 왠지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의 옆자리엔 단풍처럼 붉은 입술을 가진 여자가 타고 있었다. 남자의 어머니보다 훨씬 젊고 예쁜 여자였다. 남자는 계약서를 반듯이 접어 검은 양복 상의의 안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노랗게 탈색된 낙엽하나가 남자의 발치께로 굴러왔다. 그 후 이년 째 살고 있는 오피스텔은 귀가 때마다 번번이 낯설다. 실내복으로 갈아입은 남자는 가스레인지 앞에 선다. 아침에 끓여놓은 물은 바다거북의 주검처럼 차갑게 식어있다. 심연의 바다 속에 가라앉은 바다거북의 주검은 이제 다시는 수면위로 떠오르지 못할 것 같다. 뚜껑을 열자 빽빽이 맺혀있던 물방울들이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남자는 그것들을 냄비 안으로 털어 넣는다. 북통에 씌운 가죽처럼 팽팽히 당겨져 있던 수면이 이지러진다. 그러나 북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남자는 녹차 티백을 집어 들어 조심스럽게 개수대 안으로 던진다. 그것은 머금고 있던 물기를 흘리며 날아가 떨어진다. 가스레인지에서 개수대까지 발자국처럼 점점이 떨어져있는 물방울들을 행주로 닦아낸다. 새하얀 행주에 노르스름한 얼룩이 진다. 남자는 찬장 문을 연다. 몇 개의 사기그릇과 머그잔 두개가 놓여있다. 남자는 머그잔 하나를 집어 든다. 원색의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머그잔이다. 오피스텔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는 그것을 사들고 찾아왔다. 그 잔에 커피를 타마시며 여자는 행복한 눈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남자는 무심한 눈으로 잔에 담긴 커피만을 휘젓고 있었다. 여자는 남자의 그러한 시니컬함을 좋아했다. 머그잔가득 물을 퍼 담은 남자는 조그만 스테인리스 주전자에 그것을 옮겨 담는다. 세 잔으로 주전자는 가득 찬다. 비어있는 페트병의 뚜껑을 비틀어 연 후 조심스럽게 물을 따라 넣는다. 주전자의 주둥이로부터 흘러나오는 노르스름한 액체는 쪼르륵 소리와 함께 페트병 바닥으로부터 차오른다. 초인종이 울린다. 순간 남자의 양미간이 일그러진다. 잠시 망설이던 남자는 주전자를 내려놓고 현관문을 연다. 문 밖엔 여자가 서있다. 문 밖을 가득 메운 어둠 사이로, 그 어둠 같은 긴 머리를 쓸어 넘기며 여자는 고목처럼 서있다. 남자는 표정 없이 돌아선다. 그리고 주방으로 가 다시 물을 따른다. 물을 담는 순간을 방해받는 것은 남자로선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철컥, 현관문이 닫히고 여자가 집안으로 들어온다. 겉옷을 벗어 가방과 함께 옷걸이에 건 여자는 침대에 걸터앉아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남자의 움직임은 여전히 조심스럽다. 여자는 또 가슴이 답답해 온다. 냄비의 물은 고스란히 페트병 속으로 옮겨간다. 남자는 냉장고의 문을 열어 물병을 집어넣는다. 가득 찬 물병 네 개가 가지런하다. 남자는 뿌듯하다. 냄비와 잔과 주전자를 씻어 식기 건조대에 엎어놓은 남자는 소파에 앉는다. 남자와 여자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둘 사이의 대화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남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여자가 자신을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남자 주변의 모두가 그랬다. 철이 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남자는 늘 혼자였다. 남자의 어머니에 대해 알게 된 모든 이들은 항상 남자가 나타날 때면 목소리를 낮춰 소곤거리곤 했다. 그들은 모두 포주인 남자의 어머니가 창녀 출신일 것이라 확신했다. 남자역시 자연스럽게 사생아가 되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남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남자의 어머니 역시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젊은 시절 그녀의 배 위를 스쳐 지나간 수많은 남자들 중 한명일 뿐이었다. 네 엄마랑은 얼마면 할 수 있냐? 짓궂은 아이들이 놀려댈 때면 남자는 싸늘한 말투로 되물었다. 얼마나 있는데? 그리곤 얼뜬 표정의 아이들을 무시한 채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책을 향하는 남자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여자의 곁으로 가 선다. 손등으로 여자의 볼을 천천히 쓸어내린다. 여자는 자신의 몸에 돋는 소름을 느낀다. 여자의 볼을 타고 내려온 남자의 손은 턱을 지나 목덜미를 지나 단추 두개가 풀린 하얀 블라우스의 가슴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목에 걸린 샤넬 로고의 펜던트가 반짝인다. 여자는 남자의 손을 움켜쥔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몸은 여자의 몸을 덮으며 침대위로 쓰러진다. 여자는 고개를 외로 번갈아 돌리며 집요하게 포개오는 남자의 입술을 피한다. 입술을 꼭 다물고 남자를 밀어내려 애쓰는 여자를 남자는 더욱더 거칠게 안는다. 남자의 손이 치마를 들추고 팬티를 벗겨내자 여자는 체념한 듯 몸에서 힘을 뺀다. 그러나 입술만은 더욱 힘을 줘 다물고 부릅뜬 눈으로 천정의 형광등을 주시한다. 남자는 채 열리지 않은 여자의 몸 안으로 급하게 들어간다. 여자는 극심한 통증을 느끼지만 다문 입술을 열지 않는다. 형광등이 내 쏘는 순백의 빛이 여자의 눈으로 들어온다. 여자의 눈앞은 점점 흐려지고 여자를 둘러싸고 있는 것 역시 순백의 공간뿐이다. 어느 순간 머릿속마저 새 하얗게 비워진다. 여자는 입을 열어 울음 같은 숨을 토해낸다. 형광등 불빛아래 남자를 감은 여자의 팔과 다리가 더욱 하얗다. 여자를 만난 것은 남자가 대학의 마지막 학기를 다니고 있었을 무렵이었고 남자의 어머니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즈음이었다. 고향의 한복판을 가로지르고 있는 강에 어머니의 새하얀 뼛가루를 뿌리며 남자는 이제 정말 혼자임을 실감했다. 어쩐지 홀가분해지는 느낌 탓인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문득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 여겼던 존재가 사라졌으니 사라졌던 자신의 표정이 돌아올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남자의 얼굴을 더욱더 굳어져만 갔다. 그러던 날 가운데 그녀를 만났다. 그쪽은 항상 뭐가 그렇게 불만이에요? 학교 구내식당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던 남자는 눈을 치켜뜨며 고개를 들어 이제 막 앞자리에 앉으려하는 여자를 바라보았다. 봐요, 지금도 얼굴 잔뜩 굳어 있잖아요. 그런대 그런 모습, 조금은 멋져 보이는 거 알아요? 대답 없이 시래기 국을 입안에 떠 넣는 남자를 여자는 하얗게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 후로 이년이 지났다. 처음 여자를 매료시켰던 남자의 무심함은 이년 후 여자를 지치게 만들었다. 남자를 바라보면 여자는 더 이상 전과 같은 하얀 웃음을 지어보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를 떠나지 않았다. 자신이 떠나버린 순간 남자는 곧 허물어져 버릴지도 모를 것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계바늘의 움직임처럼 안쓰러운 남자는 여자가 떠난 순간 시계 밖으로 튕겨져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아니, 어쩌면 여자는 남자를 떠나기 위한 결정적 구실을 찾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남자는 베란다 밖으로 담배를 튕겨버리고 들어온다. 여자는 한쪽 무릎을 안고 바닥에 앉아 발톱을 깎고 있다. 깎인 발톱들이 튀며 바닥에 어지럽게 흩어진다. 남자는 얼굴을 살짝 찌푸리며 이면지 한 장을 여자에게 건넨다. 여자는 바닥에 내려놓은 이면지 위로 발톱을 쓸어 담는다. 남자는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한 컵 따라 마신다. 물병엔 물이 아직 삼분의 이쯤 남아있다. 남자는 침대시트위에 떨어져있는 터럭들을 모아 침대 맡에 있는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여자도 깍은 발톱쪼가리들을 쓰레기통에 넣는다. 쓰레기통 안에 하얀 휴지가 가득하다. 소파에 앉아 침대에 누운 남자를 바라보던 여자는 남자의 고른 숨소리에 겉옷과 가방을 챙겨든다. 형광등 스위치를 끄자 숨어있던 어둠들이 다시 하나둘씩 기어 나온다. 여자는 어둠 속으로 흡수되듯 사라진다. 철컥, 현관문이 닫힌다. 남자는 슬며시 눈을 뜬다. 실내를 가득 메운 채 남자를 바라보던 어둠과 눈이 마주친다. 남자는 눈을 감는다. 아침 남자는 냉장고문을 연다. 심연의 바다 속과 같이 냉장고 안은 깊고 어둡다. 네 개의 물병은 그 속에 가라앉은 바다거북의 주검처럼 고요하다. 조류의 영향력마저 미치지 못하는 그곳에서 바다거북의 주검은 조금의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가득 찬 물병들을 차례로 스치던 남자의 손은 삼분의 일 쯤 비워진 물병의 주둥이를 살며시 움켜쥔다. 그 움켜쥔 손등에 도드라진 혈관이 푸르다. 남자의 얇은 살갗은 그 혈관을 타고 흐르는 혈액이 푸른색일 것임을 짐작케 하기에 충분하다. 잠자리가 끝나면 곧장 돌아누워 이불을 덮어쓰던 남자의 마른 어깨를 바라보며 여자는 남자의 피가 차가운 푸른빛을 띠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남자와 뒤엉켜있을 때마저도 여자는 선듯함을 느꼈고 돌아누운 남자에게서는 그보다 더욱 싸늘한 냉기가 흘러나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런 남자가 안쓰러워 등 뒤에서 안아 주려하던 여자의 손길을 남자는 번번이 뿌리치곤 했다. 반듯이 누운 채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며 여자는 자신의 육체마저 차갑게 식어가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목이마른 남자는 컵에 가득 물을 따라 한번에 들이킨다. 식도로 타고 들어가는 물 한 모금 한 모금에 맞춰 남자의 목울대가 솟아올랐다 떨어지곤 한다. 냉장 되어있던 차가운 물은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지며 남자를 더욱 차갑게 한다. 그래도 갈증이 가시지 않는지 한 컵을 더 따라 마신 남자는 물병에 남아있는 물의 양을 확인한다. 물병 안엔 물이 아직 절반쯤 남아있다. 물병을 냉장고 안에 집어넣은 남자는 오늘은 물을 끓이지 않기로 한다. 남자는 책상 서랍을 연다. 서랍안의 가장 어두운 안쪽 구석에 남자의 펼친 손바닥 만 한 보석상자가 놓여있다. 남자는 그것을 꺼내 책상위에 올려놓은 후 잠시 바라본다. 주석소재의 상자 표면엔 희뿌옇게 탈색된 장미와 그 가지들이 양각되어있다. 생기를 잃어버린 듯 잔뜩 웅크리고만 있는 상자는 더 이상 이렇다 할 광택조차 흘리지 않는다. 어머니와 한방에서 생활했을 만큼 남자가 어렸던 시절 남자의 어머니는 옷장 깊숙한 곳에 그것을 넣어두었다. 그리고 매일 저녁 무렵이면 그것을 꺼내들고 화장대 앞에 한참동안 앉아있었다. 그 안에 들어있던 반짝이는 것들은 어머니의 손가락에 귓불에 그리고 목덜미에 하나하나 걸리곤 했다. 너무 어려 옥상에 올라가 별이 뜬 밤하늘을 바라보는 것 밖에 달리 할 것이 없었던 남자는 그 상자 안에 우주가 들어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밤마다 어머니의 손에 의해 하늘에 걸려 반짝이는 것이라 생각했다. 어린 남자에게 어머니의 얼굴은 곧 별이 뜬 밤하늘과 같은 것이었다. 어린이 대백과 사전에서 본 수성과 화성과 목성이 어머니의 얼굴에 떠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아침에 눈을 떴을 땐 언제나 그렇듯 별이 뜬 밤하늘은 사라진 채였고 어머니만이 역한 술 냄새와 함께 잠들어 있었다. 어머니가 죽는 바람에 아주 오랜만에 어린시절을 보냈던 곳을 찾은 남자는 어머니가 쓰던 방에 들어가 보았다. 그곳은 더 이상 남자의 머릿속에 남아있던 익숙한 풍경이 아니었다. 예전엔 없었던 더블사이즈의 침대가 놓여있었고 모던한 디자인의 옷장과 화장대로 바꿔진 채였다. 의붓아버지는 이미 자신의 물건들을 모두 챙겨 가버린 듯 옷장과 화장대엔 어머니의 물건들만이 하릴없이 뒹굴고 있었다. 방안의 모든 것들은 어머니와 함께 죽어버린 듯 한줌의 생기조차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주인을 잃어버린 물건들은 늘 그렇듯 무생물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그것들은 누군가에 의해 처분될 자신의 운명에 불안해하며 그저 무기력한 침묵으로 일관할 뿐이었다. 어머니의 옷가지들을 챙겨들던 남자는 옷장 한구석에 모로 누워있는 보석 상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상자를 집어 조심스럽게 뚜껑을 열었다. 상자 안엔 더 이상 우주가 들어있지 않았다. 그저 구름이 잔뜩 낀 밤하늘만이 들어있을 뿐이었다. 어린시절, 영원히 빛날 것이라 믿었던 밤하늘의 별들은 이미 저버린 지 오래였다. 남자역시 그런 것을 믿기엔 더 이상 어리지 않았다. 남자는 동네어귀의 공터에서 어머니의 옷가지들을 태웠다. 그것들은 검은 연기를 토해내며 금세 쪼그라들었다. 어머니의 살갗을 스쳤을 모든 것들이 하늘로 피어오르며 한줌재로 변해 가는 동안 남자는 상자를 자꾸만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연다. 텅 빈 상자 안은 밤하늘처럼 어둡다. 뚜껑에 붙은 거울에 남자의 얼굴이 비춰진다. 흐릿한 남자의 두 눈은 어두운 밤하늘의 별이 되기엔 역부족이다. 눈을 감았다 뜨고 비벼보고 힘을 줘 봐도 남자의 눈은 여전히 흐릿하다. 남자는 상자 속에서 별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본다. 그러나 좀처럼 떠오르지 않는다. 한참 후, 남자는 머지않아 자신의 곁을 떠날 것이 분명한 여자를 떠올리며 상자를 들고 침대 맡으로 가 앉는다. 쓰레기통의 뚜껑을 열고 손을 집어넣는다. 뭉쳐져 있는 검은 터럭들 중 기다란 것만을 골라낸다. 하나하나 정성껏 골라낸 터럭을 뱀이 또아리를 틀 듯 둥글게 말아가며 상자 안에 집어넣는다. 그리고 또 다시 쓰레기통을 뒤진다. 쓰레기통 바닥에 굴러다니는 발톱들을 하나씩 주워 모은다. 그러나 마지막 하나가 보이지 않는다. 남자는 쓰레기통을 뒤집어 내용물들을 방바닥에 펼쳐놓는다. 휴지를 톡톡 털며 샅샅이 뒤진다. 열중하는 남자의 손끝이 섬세하다. 결국 구겨진 휴지의 틈새에서 마지막 발톱조각을 찾아낸다. 손바닥위에 올려져있는 발톱열개가 상자 속으로 흘러 들어간다. 남자는 휴지조각 하나를 조심스럽게 집어 들어 코로 가져간다. 휴지는 코끝에 닿을 듯 말 듯한 거리를 유지한다. 남자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며 코를 찡긋거린다. 바닥에 떨어져있는 휴지를 하나씩 집어 들어 차례로 냄새를 맡는다. 냄새를 기억해 내기 위해 생각에 잠긴 남자의 눈동자가 바쁘게 헤매인다. 남자의 입가로 희미하게 미소가 번진다. 마른 침을 삼키며 남자는 들고 있던 휴지를 반듯이 접어 상자에 넣는다. 남자는 또 다시 손가락으로 짧고 구불구불한 털들을 끌어 모은다. 모아놓은 털들을 잠시 바라보던 남자는 그것들을 집어 쓰레기통 안으로 떨어뜨린다. 똑같은 모양새의 그것들 중에는 자신의 것도 분명 섞여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신중한 남자는 자신의 것을 상자에 담는 경솔함을 범하지 않는다. 남자는 바닥에 남아있는 것들을 다시 통속에 쓸어 담고 책상위에 상자를 올려놓는다. 상자 안으로 또 다시 우주가 생성되려 하는 것만 같다. 어린 시절 그토록 황홀한 눈으로 바라보던 반짝이는 우주가. 남자는 옷을 모두 벗고 욕실로 들어간다. 오피스텔에 구비된 순간온수기의 화력은 막강하여 일분 여 만에 욕실은 수증기로 가득 찬다. 비누칠을 하고 면도기를 집어든 남자는 김이 서린 거울을 닦아낸 후 면도를 시작한다. 아주 정성껏 조심스럽게 면도를 한다. 면도날이 지나간 자리가 남자의 차가운 핏줄 빛처럼 푸르다. 저녁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남자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컴퓨터 앞에 앉아있다. 컴퓨터의 새하얀 창엔 내일 있을 프레젠테이션을 위해 파워포인트로 작성한 자료들이 떠올라있다. 이번 기획안이 통과하면 다음번 인사발령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도 좋다는 부장의 말을 떠올리며 남자는 다시 한 번 자료를 정리한다. 졸업도 하기 전 취업에 성공한 남자는 악착같이 일에 매달려왔다. 어차피 회사일 외엔 별다르게 할 것도 또 하고 싶은 것도 없는 남자였다. 무엇보다 자신에게 드리워진 어머니의 천박한 그늘을 벗어버리기 위해 남자는 그래야만했다. 자신의 미천한 출신은 오로지 일로서만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버릴 수 없는 자신의 출신과는 다르게 노력여하에 따라 충분한 보상을 기대할 수 있는 곳이 이곳, 현재 남자가 속해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남자는 그 사회에 쉽게 다가서지 않는다. 이미 자신의 곁을 떠나가던 많은 이들을 보아왔던 남자이다. 남자는 그들이 자신에게 필요로 하는 것만을 주었고 또 자신역시 스스로 필요하다 생각되는 것만을 취했다. 남자가 쌓아올린 보이지 않는 벽이 세상과 남자사이를 항상 가로막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그들은 그 벽을 인식하지 못한다. 남자의 표정 없는 얼굴과 그다지 많지 않은 말수가 그것임을 알지 못한다. 그저, 그런 모습의 남자는 매사에 신중하며 사려 깊은 사내일 것이라 그들은 믿고 있다. 입사한지 이년 남짓, 남자는 이미 함께 입사한 자신의 동기들 중 누구보다도 촉망받는 사원이 되어있었다. 남자는 모니터의 창을 닫는다. 어둠 속에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의 창백한 얼굴이 푸르스름하게 바뀌고 그와 동시에 울리는 초인종 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아있던 집안의 공기를 비틀며 헤집는다. 문밖엔 어둠에 흠뻑 젖은 여자가 서있다. 흠뻑 젖도록 뒤집어쓴 어둠 사이로, 새하얀 얼굴을 빛내며 여자가 서있다. 불도 안 켜고 뭐했어. 여자는 형광등 스위치를 켠다. 컴퓨터 모니터에서 힘없이 퍼져 나오던 푸르스름한 빛은 형광등의 밝고 집요한 기세에 눌려 녹아 없어지듯 사라진다. 남자는 눈이 부시다. 얼굴을 찌푸리며 소파로 가 앉는다. 겉옷을 벗고 침대 쪽으로 향해 가는 여자의 입술이 유난히 붉다. 남자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연다. 립스틱이 너무 진한 거 아니야? 평소에 잘 하지 않던 남자의 간섭에 여자는 의아하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라도 대화가 시작된다는 것이 오히려 다행스럽다. 그런가? 여자는 티슈 한 장을 뽑아들고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여자의 등 뒤로 남자가 앉아있다. 거울속의 남자는 여자의 입술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여자는 반으로 접은 티슈를 윗입술과 아랫입술 사이에 넣고 앙 다문다. 거울속의 남자는 계속해서 여자를 관찰한다. 여자는 입에서 티슈를 빼낸 후 거울속의 남자에게 묻는다. 됐어? 거울의 표면에서 둘의 시선이 마주친다. 그 마주친 자리에 미세한 물결이 이는 것 같다. 남자는 슬며시 고개를 돌리며 응, 하고 대답한다. 여자는 남자를 향해 티슈를 펼쳐 보인다. 여자의 입술자국이 선명하다. 마치 여자의 입술이 티슈로 옮겨간 듯 자잘하게 진 주름 하나하나까지 뚜렷하다. 금방이라도 조그맣게 오물거리며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건넬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채 입을 벌리기도 전에 여자는 티슈를 구겨버린다. 귀를 기울이려 하던 남자는 그 바람에 짐짓 딴청이다. 여자는 구겨버린 티슈를 침대 맡 휴지통 안으로 집어넣는다. 별다른 대화도 없는 둘 사이로 무료한 시간만이 흐른다. 그러게 TV라도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여자는 중얼거린다. 남자는 TV를 보지 않는다. 남자는 TV속에 등장하는 비현실이 현실을 좀 먹는다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아무 생각 없이 TV앞에 멍청히 앉아있는 자신의 모습을 용납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남자는 애초에 TV를 구입하지도 않았다. 대신 매일 아침 일찍 출근하자마자 꼼꼼히 읽기 시작하는 조간신문이 남자에게 뉴스를 전하는 유일한 매체이다. 남자는 오디오의 리모컨을 눌러 CD를 플레이 시킨다. 남자와 여자가 내쉬는 얕은 숨소리와 탁상시계의 초침소리만이 더디게 오가던 오피스텔 안으로 서정적인 피아노 소리가 끼어들어 흐르기 시작한다. 여자는 귀에 익은 선율에 놀라며 남자를 쳐다본다. 남자는 여전히 무표정으로 리모컨만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자신의 가슴속으로 끈적하게 달라붙어오는 피아노 소리에 여자는 잠시 옛 기억을 떠올린다. 남자와 여자가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여자는 남자에게 이 CD를 선물했다. 둘은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한쪽씩 나눠 끼고 음악을 들었다. 그때도 역시 남자는 아무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지만 여자는 개의치 않았다. 그저 함께 있는 것이 좋을 뿐이었다. 낙엽이 지는 교정을 걸으며 쉴 새 없이 조잘대는 자신의 모습에 얼굴이 붉어진다. 소파에서 일어난 남자는 형광등 불을 끈다. 음악이 끝날 때 쯤 어느새 둘은 침대위에 뒤엉켜있다. 여자는 예전 남자를 향해 하얀 웃음을 보내던 때로 돌아가 있다. 둘은 입술을 포갠 채 서로의 옷을 하나씩 벗겨낸다. 여자의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낙엽이 떨어져 내린다. 여자는 낙엽을 밟으며 더욱 힘을 줘 남자의 허리를 안는다. 발밑에서 낙엽이 메마른 소리를 내며 바스라진다. 남자는 마지막 한 장의 속옷을 벗어던지고 자신의 다리로 여자의 허벅지를 감는다. 순간, 여자는 자신의 허벅지에 닿는 낯선 감촉을 느낀다. 무언가 밋밋한 감촉이다. 남자의 샅으로 손을 가져간 여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남자로부터 몸을 빼낸다. 여자는 담요로 자신의 몸을 가리고 형광등 스위치를 찾는다. 당황한 여자의 손은 좀처럼 스위치를 찾지 못한다. 쫓기듯 바삐 헤매던 여자의 손가락이 스위치에 걸리고 난 후 불빛아래 드러난 남자의 몸엔 한 오라기의 털도 남아있지 않다. 정강이에도 아랫배에도 사타구니에도 그리고 부신 눈을 가리려 처든 팔 탓에 드러난 겨드랑이에도 파르라니 깎인 면도자국밖에 남아있지 않다. 당신, 미쳤어. 여자는 부들부들 떨며 옷가지를 꿰기 시작한다. 그러나 남자는 침대에 앉아 표정 없이 여자를 바라보고만 있다. 옷을 다 입고 구두를 신은 여자는 뒤를 한번 돌아보려는 듯 멈칫한다. 그러나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가 버린다. 남자는 여자를 잡지 않는다. 싸늘하게 식어버렸을 여자의 얼굴을 떠올려본다. 아마도 다시는 자신을 찾지 않을 것이라 생각한다. 침대에서 일어난 남자는 책상 앞으로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보석 상자를 꺼내든다. 상자는 여전히 탁하게 굳은 얼굴로 남자의 손바닥위에 웅크리고 있다. 남자는 다시 침대 맡으로가 앉아 휴지통에 손을 넣어 뒤적거린다. 구겨진 휴지 한 장을 집어 들어 펼친다. 활짝 펼쳐진 휴지의 한가운데에서 여자의 붉은 입술이 오물거린다. 남자는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춘 후 휴지를 반듯이 접어 상자 안에 조심스레 집어넣는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침대에 떨어져있는 터럭들을 긁어모은다. 그 짧고 구불구불한 털에서는 매끄러운 광택이 흐른다. 그것들을 하나씩 집어 들어 손바닥 위에 올려놓는다. 형광등 불빛을 머금은 그것들은 더욱더 하얗게 빛난다. 손을 움직이는 각도에 따라 그 아름답고 불규칙한 곡선을 타고 하얀빛이 오르락내리락한다. 남자는 상자 속으로 그 빛을 털어 넣는다. 비로소 상자 속에서 새로운 우주가 재탄생된다. 상자표면에 양각되어있는 장미도 생기를 되찾은 듯 붉게 피어나려 하는 것 같다. 남자의 입술이 묘하게 일그러진다. 입술사이로 그 입술만큼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온다. 형광등 아래 남자의 벗은 등이 들썩인다. 웃음을 참으려는 듯 남자는 낮게 짐승의 신음소리를 흘리며 하얗게 마른 등을 쉴 새 없이 들썩인다. 오디오의 스피커에선 같은 음악만이 반복해서 흘러나온다. 아침 남자는 물을 끓인다. 냉장고 안엔 아직 물이 가득 찬 1.5리터들이 페트병 세 개가 남아 있지만 남자는 항상 네 개를 채워 놓아야만 한다. 냉장고 문 안쪽의 물병이 놓여야하는 자리엔 늘 그렇듯 페트병 네 개가 적당하다. 그중 한 개라도 비워져 있다면 남자는 까닭모를 불안감에 하루 종일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식기 건조대에는 냄비가 뒤집힌 채 놓여있다. 아주오래전부터 심해에 가라앉아있던 어느 거대 여객선처럼 그것은 고요하고 쓸쓸하다. 침몰된 호화여객선의 잔해와 마주하는 것은 늘 그렇듯 고요한 쓸쓸함을 동반한다. 그 안에서 손을 맞잡고 결연히 죽음을 맞이한 선원들의 표정이 그것일까, 그들은 아마도 그 순간 자신들이 묻히게 될 그 공간을 어머니의 자궁이라 생각하려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하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영원히 달아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남자는 냄비를 집어 들어 물을 받는다. 텅 비어 말라버린 자궁 속으로 양수가 차오른다. 그러나 가득 찬 양수는 웬일인지 따듯하지가 않다. 남자는 냄비를 가스레인지에 올린 후 불을 켠다. 순간 치솟아 오른 뜨거운 불줄기는 자궁을 에워싸며 양수를 데우기 시작한다. 물이 끓기까지 걸리는 오 분 남짓한 시간동안 남자는 어두운 냄비 안을 바라보고만 있다. 달궈진 냄비 안쪽표면에서부터 아지랑이처럼 퍼져 나오는 데워진 물의 움직임과 바닥에 점점 맺히기 시작하는 공기방울 들이 수면을 향해 솟구치는 모습들을 남자는 벌게진 얼굴로 바라보고만 있다. 수면을 타고 흐르는 진동은 차츰 강해지고 솟구치는 물방울들이 급격히 늘어나며 포효하기 시작한다. 이윽고 그 진동과 포효는 절정으로 치닫는다. 그 순간 어김없이 밀려오는 것은 정적이다. 남자는 손을 뻗어 레버를 돌려 불을 끈다. 요동치던 냄비의 기세가 꺾이고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온다. 남자는 상자의 뚜껑을 연다. 상자 속에 펼쳐진 찬란한 우주를 홀린 듯 바라본다. 남자의 눈 속에 우주가 맺힌다. 남자는 그 우주를 냄비 안으로 털어 넣는다. 그 빛나는 우주는 새하얀 궤적을 그리며 냄비 안으로 떨어진다. 냄비 안 가득한 양수로 우주가 깃들기 시작한다. 남자는 뚜껑을 닫는다. 뚜껑 틈 사이로 반짝이며 우주가 빛난다. 저녁이 되면 남자는 우주가 깃든 양수를 물병에 담은 후 곧 자신 안에 우주를 받아들일 것이다. 그 생각에 문득, 남자는 행복하다. |
심사평 “ 단정한 문체ㆍ깔끔한 구성력 돋보여 “ 최종심에 올라온 여덟 편의 작품을 읽고 나서, 예년에 비해 작품 수준이 전반적으로 향상된 것 같아 반가웠다. 먼저 ‘하느님에게 물어봐’는 글쓴이의 독특한 시각과 화법이 인상적이다. 꿈과 현실이 뒤섞이면서 진행되는 스토리를 통해 평범한 여자의 일상을 코믹하면서도 풍자적으로 그렸는데, 아무래도 설익은 문장력과 호흡이 마음에 걸렸다. 꾸준한 습작을 바란다. ‘하얀 굴뚝’은 의욕은 좋았지만, 스토리 골격이 전체적으로 엉성하고 무리가 많았다. 아내와 커트머리 여자를 병치시킨 점은 그런대로 이해가 되지만, 그것을 비둘기와 굴뚝, 방화사건 등으로 무리하게 풀어나가려 한 대목에서 작위성이 두드러졌다. 그에 비교하면 ‘마네킹’ ‘우리들의 만병통치약’ 두 작품은 문장력과 구성 면에서 보다 안정되어 있다. ‘마네킹’은 남편을 잃고 홀로 남은 50대 상류층 여자의 육체적 내면적 고독과 황량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진부한 소재와 상투적인 스토리 설정이 결함이었다. 안정된 문장력과 이야기를 다루는 능숙한 솜씨가 돋보이는 ‘우리들의 만변통치약’은 당선작과 함께 마지막까지 겨루었으나, 스토리의 단순함 그리고 상대적으로 참신함이 부족하다는 점에서 아쉽게 밀려났다. 당선작으로 뽑힌 ‘보석상자’의 미덕은 무엇보다 단정한 문체와 깔끔한 구성력에 있다. 타자와의 소통 통로를 스스로 닫아버린 채 철저히 자폐적인 삶을 이어가는 한 독신남자의 일상의 궤적을 극히 미시적인 화법으로 집요하리만치 꼼꼼하게 그려나갔다. 다소 단순한 스토리 구조, 인물에 대한 동기 부여의 허약함, 특히 결말 부분에서 여자의 체모와 발톱을 물에 타 마신다는 식의 작위적 설정 등은 약점이다. 그럼에도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묘사의 치밀함과 안정된 호흡에서 그의 만만찮은 저력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임철우(소설가ㆍ한신대 교수) |
당선소감 주아름 “ 불멸의 영웅 커트 코베인에게 영광을 “ 정말이지, 앞이 깜깜하여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기를 살고 있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는 늘 미간사이에 주름을 만들었고, 땀이 밴 주먹을 더욱 꼭 말아 쥐었고, 하릴없이 끓어오르는 가래를 보도블록의 틈 사이로 내뱉곤 했다. 도무지 웃음이라곤 나오지 않는 날들의 연속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숙취로 인해 밀려드는 두통에 뒤척이고 있던 사내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중저음의 목소리. 사내는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웃는다. 순간, 사내의 머릿속으로 아주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스쳐지나간다. 참으로 선량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계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과 외갓집 식구들. 항상 글 쓰는 자의 참된 자세를 보여주시는 안광, 김유택, 송수권, 김길수, 곽재구 교수님. 멀리 있지만 늘 힘이 되어주는 친구들. 사내의 청춘의 단편인 뮤즈 그린비 식구들과 밴드 The DeF 맴버들. 사내는 전화를 끊는다. 책꽂이 한 켠에 놓인 사진 속의 아름다운 소녀가 여전히 아픈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사내를 보며 웃고 있다. 사내는 욕실로 들어간다. 칫솔에 적당히 치약을 짠 후 양치질을 시작하려 한다. 욕실 벽에 붙은 거울 속에서 사내가 중얼거린다. 이 영광을 내 불멸의 영웅인 커트 코베인에게 바칩니다. 양치질을 시작한 사내는 계속해서 웃는다. 좀처럼 가시지 않는 두통은 여전한 채이다. 약력: △1979년 여수출생 △순천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예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