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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영면(阿英面)
갈계리(葛溪里)
해발 776m의 시루봉(증봉) 지맥이 폭 넓게 밀고 내려와 풍천(楓川) 앞에서 멈쳐 뭉친 곳, 갈계리. 옛부터 유정리로 넘어가는 육판거리에는 6 판서가 나온다는 명당이 있어 마을 터가 길지임을 말해준다.
1,150년경 창원정씨(昌原丁氏) 일가가 처음 터를 잡아 이곳에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해져 왔다. 그후 형씨(邢氏)가 입주하였고, 조선 초기에 함양박씨(咸陽朴氏)가 이주해 와 마을이 크게 번창하였다.
처음 창원정씨가 이곳에 정착할 당시 천년묵은 칡덩굴로 우거진 채 마을앞 냇물이 맑은 소리로 흐르고 있어 칡갈(葛)자와 시내계(溪)자를 써서 갈계리(葛溪里)라 부르게 되었다. 그후 새마을사업이 전개되던 1970년 행정분리 정책에 따라 마을 관통도로를 기준으로 동쪽은 동갈, 서쪽은 서갈마을로 나누어 현재 동갈마을로 부르게 되었다.
본래 운봉군 북상면의 지역이었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갈계리라 해서 남원군 아영면에 편입하였다. 자연마을로 갈계와 새터가 있었으나 현재는 동갈과 서갈마을로 분리되었다.
한때 함양박씨(咸陽朴氏) 세력이 한창 번성하여 재력과 인물이 많았으므로 일찌기 면사무소 위치를 정할 때 박씨들의 세력에 의해 이 마을로 유치된 것을 비롯하여 지서, 학교, 보건소, 단협 등 모든 기관이 이곳에 설치됨으로서 큰 마을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1928년 609번지에 신축하여 운영하던 면사무소가 1985년 6월 22일 청계리 너더리(광평)으로 이정 하는 등 모든 공공기관이 너더리로 이전하였다. 더구나 새마을사업이 전개되던 1970년 중앙의 골목 길을 갈라 동서로 분리하여 동쪽을 동갈이라 부르게 되었다. 마을이 분리되어 각각 단일 마을로 행정이 이루어지고 있으나, 아직도 생활권이 같고 마을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1960년대에는 마치 서갈의 부속 마을 처럼 되기도 하였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시작으로 마을회관, 창고 1동, 교량 1개소, 농로개설 등으로 꾸준한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현재 총 41가구에 인구수 124명(남 : 53, 여 : 71)이다.
<동갈교회> 1923년에 설립한 대한기독교 장로회 교회.
<마을회관> 1990년에 건립.
서갈 마을과 동일
해발 776m의 시리봉(증봉) 지맥이 폭 넓게 밀고 내려와 풍천(楓川) 앞에서 멈춘 곳, 갈계마을. 옛부터 6판서가 나온다는, 소위 육판거리의 장군대좌혈의 명당이 있어 마을 터가 길지임을 말해준다. 질메바우는 장군대좌 앞에 있으며 말안장이라 한다.
주민이 비교적 보수적이어서 마을 발전이 완만한 편이지만 과거 전통을 회복하려는 주민들의 긍지에 찬 의지로 노력을 다하고 있다.
광주와 대구를 잇는 88고속도로에 접한 마을로서 경사가 급한 산 비탈에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이 마을은 현재 총 42가구에 인구수 127명(남 : 61, 여 : 66)이다.
<서갈교회> 1929년에 설립한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회.
<농월정(弄月亭)> 1981년에 건립한 마을 정자.
<영창재(永昌齋)> 왜정시대에 마을 도로 좌측에 건립한 함양박씨 제각.
<박문식 효자비> 1890년에 정려를 받아 1890년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갈포(葛圃) 박문식의 효자비. 비명(碑銘) 효자증동몽교관조봉대부박문식지려(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朴文植之閭).
<청송심씨 효열비> 조선조 결혼 3개월 만에 부군과 사별 하고, 정절을 지키며 위독한 시부모 생명을 소생케한 효심을 기리기 위해 세운 청송심씨(靑松沈氏) 효열비.
<절터> 마을 뒷산에 위치. 당시 절 토방과 샘터의 흔적이 있으며, 기와 조각(瓦片)이 출토된다.
<호석바위> 갈계 북동쪽에 위치하는 바위로 고인돌로 추정.
<조산> 마을 입구 논가운데 위치하는 누석단.
갈계(葛溪) : 갈계리.
갑들 : 마갑산 동쪽에 있는 들.
계때이 : 중뫼골 북쪽에 있는 들.
고내 : 섬들 동쪽에 있는 들.
골안 : 갈계 가운데가 되는 골짜기 안쪽 마을.
뇌라터 : 계때이 서쪽에 있는 들.
동편 : 갈계 동쪽이 되는 마을.
마갑산 : 갈계 남쪽에 있는 산.
배깟너매 : 중뫼골 북서쪽에 있는 들.
새터 : 갈계 서쪽에 새로 된 마을.
서편 : 갈계 서쪽이 되는 마을.
섬들 : 조평. 중뫼골 북동쪽에 있는 들.
솔대재 : 갈계에서 청계리로 가는 고개.
웃골 : 갈계 위쪽이 되는 마을.
육판재 : 갈계에서 장수군 반암면 유정리로 가는 고개로 육조판서가 날 명당터라 한다.
장군나달 : 갈계 서쪽에 있는 산.
장테재 : 갈계에서 청계리로 가는 고개.
조평(鳥坪) : 섬들.
중뫼골 : 청룡 동쪽에 있는 들.
중뫼방죽 : 중뫼골 가운데 있는 못.
집앞들 : 갈계 동쪽에 있는 들.
청룡 : 갈계 북쪽이 되는 마을.
테미재 : 갈계에서 청계리로 가는 고개.
호석바우 : 갈계 북동쪽에 있는 바위.
효자문 : 갈계에 있는 효자 박문식(朴文植)의 정문(旌門).
인풍리(引風里)
옛부터 연재를 넘어오는 바람은 명석치를 지나 인풍리쪽 아영 평지로 내닫는다. 이는 마치 인풍리에서 바람을 끌어 모으기라도 하듯이 풍천이 일군 너른 들판을 가로질러 매치를 넘는다. 인풍리는 연재와 매치를 오가는 거센 바람을 정면으로 맞고 있는 곳이다. 그래서 풍치나대혈의 명당이 있다.
인풍리는 삼국시대 백제와 신라의 국경지대로 군사 요로변에 위치하여 당시 신라군의 주둔지였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그러나 고증할 수는 없다.
고려 말엽부터 사람들이 터잡아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1400년경에 경주이씨 풍산유씨·함양오씨가 이주하여 왔는데 그 후손들이 현재의 마을을 이어오고 있다.
고려 우왕 6년(1380) 아지발도가 이끄는 왜구가 인월에 진을치고 있을 때 삼도 순찰사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이를 섬멸하기 위해 팔량치 바람을 끌어 들여 그 바람 방향을 이용하여 활을 쏘아 아지발도의 목을 뚫고 대승을 거두었다는 전설이 있다. 또는 온몸이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어 화살이 뚫을 수 있는 곳은 목 뿐이므로 바람을 끌어와 입을 열게 했다고도 한다. 이 전투에서 바람을 인도해 왔다는 뜻으로 마을 이름을 인풍(引風)이라 하였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풍수적으로 이 마을의 형국이 비단같으며 비단은 바람에 펄럭여야 더 빛나는 것이라 생각하여 바람을 끌어와야 번창한다는 뜻으로 인풍(引風)이라 호칭 하였다고 한다. 지형적으로도 이곳은 남원에서 여원치를 넘어 황산 북쪽 명석치를 지나 정치나 웅곡치를 통과하는 길목인지라 평소 바람이 많은 곳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곳을 속칭 '바람세기'라 불렀으니 한문으로 바람을 끄는 곳, 즉 인풍(引風)이라 하였다. 그리고 '바깥 바람세기(외인리)'의 안쪽이므로 이곳을 '안바람세기' 즉 내인(內引)이라 하였다.
본래 운봉군 북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매산리를 병합하여 인풍리(引風里)라 통칭한 뒤 남원군 아영면에 편입하였다.
이 마을은 일제 시대부터 마을 자율적으로 '진흥회'를 조직하여 마을 공동재산을 마련하는 등 마을 발전을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하여 왔다. 양잠은 왜정 때부터 쌀농사가 주업인 이 마을에 전통적 부업으로 1930년대부터 공동상전(共同桑田)을 조성, 양잠 사육에 힘써 소득을 올렸으며, 지방도에 접하는 본면의 관문으로서 동면과 면계를 이루고 있다. 1961년의 '보고가는 마을', '시범마을' 등으로 아영면을 대표하여 온 마을이었다.
1972년 새마을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그해에 자립 마을로 승격하였다. 전통적인 모범 마을로서 마을회관 2동, 창고 3동, 공동퇴비사(건평 140평)는 이 마을의 명물이기도 하였다.
아영면과 동면의 면계(面界)에 위치하며, 한때 임야가 협소하여 나무연료 확보에 애로가 많았었다.
현재 총 45가구에 인구수 155명(남 : 76, 여 : 79)이다.
<마을회관> 1965년 마을 입구에 20평 규모로 건립하였다.
<인풍교> 1945년 건립.
<추모재> 마을 중앙, 옛 구사재 터에 위치한 밀양박씨 제각. 1975년 건립.
<88고속도로 인터체인지> 내인마을 북쪽에 위치.
<새사도교회> 1989년 인풍리 707번지에 설립한 새사도 교회.
<청도김씨 효열비> 마을 입구에 1962년에 '유인청도김씨효열기적비'를 면장 박봉래가 건립하였다. 1940년 성균관장 표창을 받았다.
<구사재터> 한때 동복오씨들의 서재로써 한문서당으로 사용하던 구사재가 지금은 밀양박씨 소유인 제각 '추모재'로 바뀌어 한문서당으로 활용되었다.
<오정주·박경래 기념비> 1950년 마을 재건에 공로가 큰 오정주 박경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건립하였다.
<기우제> 시리봉(증봉)에서 지냈다.
<고서·교지> 박성수씨 소유.
지방도에 접해 있는 마을로서 산간지방이지만 비교적 지형이 평탄하고 논이 넓다. 면 소재지와 300m 거리에 있는 곳으로 개발 여건이 양호한 마을이다.
삼국시대 군사기지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그후 1530년경에 남양홍씨가 옛날부터 있었던 방죽(소류지)옆에 집을 짓고 살면서부터 이씨, 김씨, 박씨 등이 차례로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양홍씨가 처음 터를 잡을 때 방죽이 있었으므로 마을 이름을 '방죽터'라고 불렀다. 고려 말에는 이곳에 군량미 보관 창고가 위치하고 있어 사창(社倉) 마을로 보통 '창몰'이라 불렀다. 또 한때는 창촌(倉村)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에 풍수지리적으로 이곳 지형이 매화낙지형국(梅花洛地形局)이라 하여 매산(梅山)으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본래 운봉군 북상면의 지역으로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에 따라 인풍리와 병합하여 인풍리(引風里)로 통칭한 뒤 남원군 아영면에 편입되었다.
마을 앞의 광활한 들은 토지가 비옥하여 주민생활이 부유 하였으나 사창(社倉)이 생기고 관원들이 거주 하면서부터 그들의 행패가 심하여 인심이 거칠어 지고 점차 마을이 쇠퇴하였다. 1920년경부터 마을이 번창하기 시작하여,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의 전개로 500m 규모의 농로개설과 주거 환경개선 등으로 현재의 문화마을이 되었다.
현재 총 39가구에 인구수 97명(남 : 46, 여 : 51)이다.
<마을회관> 1981년 건립.
<정자> 1995년 건립.
<원불교 아영교당> 1956년에 설치된 원불교 사찰. 아영면사무소 자료에는 1915년 설립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산> 마을 앞에 숫조산과 암조산 두 개의 누석단이 있었는데 1995년 농경지 정리 때 훼손되었다. 풍수지리적으로 마을의 좌청룡과 우백호를 상징하였다.
<당산제> 윗당산과 아랫당산 두 개가 있는데 당목은 없이 돌로 영역만 표시하였다. 정월 초이튿날 제사를 지냈다.
<기우제> 마을 앞 냇가.
<도요지> 서당골 '흙긋다리'에 위치.
<옛절터> 마을 뒷산에 사지(寺址)가 있다.
내인마을 남서쪽 도로 너머에 위치한다.
1982년에 내인 마을에 거주하던 이희복(李喜福)씨가 새터를 잡아 이곳에 이주하면서 마을이 형성 되었다.
이희복씨는 선조 묘를 내인마을 중앙에 모시고, 그 밑의 우물물을 먹어서는 안된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그 마을을 떠났다. 여러 곳에 터를 고르다가 북쪽으로 산을 등지고 마을 앞에 맑은 하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길지인 이곳에 처음 이주한 뒤 현재의 마을을 형성하였다.
인풍리로부터 분리하여 밖으로 나왔다는 연유로 하여 마을 이름을 속칭 '바깟바람시기' 또는 '새뜸'이라 불렀다. 그후 행정 분리로 독립하면서 외인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외인마을 사람들은 내인마을의 본가로부터 새로 분가하면서 새집을 짓고 이주해온 가구가 대부분이다. 그러므로 주택이나 환경이 비교적 잘 정리되어 있으며 주민들도 의식구조도 비교적 진취적이고 개방적이었다.
1972년 새마을사업이 전개되자 아영면에서 가장 먼저 우수 마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현재 총 33가구에 인구수 123명(남 : 55, 여 : 68)이다.
<은행나무> 160년 전 이 마을을 처음 이룬 이회복씨가 기념으로 심었다.
<인풍성은교회> 1993년에 설립한 기독교 대한 감리교 교회.
<마을회관> 1994년 20평 규모로 개축(3회)하였다.
<백수계> 나이가 55세 이상인 사람이 계원으로 가입할 수 있다.
<효행비> 서산정씨 효행비.
개난들 : 풍치나대 서쪽에 있는 들.
개지낭골 : 건지재 남쪽에 있는 골짜기로 개가 짖는 형국이라 한다.
건지재 : 매산 남쪽에 있는 마을.
날끝 : 안바람시기 남쪽에 있는 들.
인풍(內引風) : 안바람시기.
다래비설 : 매산 서쪽에 있는 산. 다리미같이 생겼다.
도지재 : 매산에서 봉대리 숲실로 가는 고개.
매산(梅山) : 창말.
매산방죽 : 매산 남쪽에 있는 못.
목넘어들 : 바깥바람시기 북쪽에 있는 들.
바깥바람시기 : 예지골방죽. 외인풍. 설지. 바람시기 바깥쪽이 되는 마을. 안바람시기의 남쪽이 된다.
바람시기 : 인풍리.
분무골 : 산직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부처가 춤추는 형국. 불무(佛舞)골
사망당 고개 : 매산에서 봉대리로 가는 고개.
사포(沙浦) : 살푸지들.
산직골 : 매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산제를 지내던 곳이라 한다.
살푸지들 : 사포. 개지낭골 동쪽에 있는 들.
설지(泄池) : 바깥바람시기.
쇠머리꿀 : 개지낭골 남동쪽에 있는 골짜기. 소머리 형국이라 함.
아내미샘 : 산과 건지재 사이에 있는 샘.
안바람시기 : 내인풍. 바람시기 안쪽이 되는 마을로 바깥바람시기 동북쪽이 된다.
예지골 : 바깥바람시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예지골방죽 : 바깥바람시기.
예지골제연 : 인풍제. 바깥바람시기 동북쪽에 있는 못. 1948년에 축조.
외인풍(外引風) : 바깥바람시기.
원분교 : 매산 북쪽에 있는 절.
인풍(引風) : 인풍리.
인풍제(引風堤) : 예지골제연.
터재 : 사망당고개 남쪽에 있는 산.
조산(造山) : 매산 동쪽에 만든산.
조산거리 : 조산부근에 있는 들.
창골목 : 창말로 들어가는 골목이 되는 마을. 전에 창(倉)이 있었다.
창말 : 매산. 안바람시기 남동쪽에 있는 마을.
퇴미골 : 도지재 서쪽에 있는 골짜기.
풍천(楓川) : 인풍제에서 남동쪽으로 흘러가는 내.
풍치나대 : 안바람시기 서쪽에 있는 골짜기. 비단 자락이 바람에 날리는 형국이라 한다
아곡리(阿谷里)
시리봉에서 타고내린 골짜기 물을 따라 형성된 마을로 풍수적으로 와우형국이다.
아영과 동면을 잇는 지방도를 아영 방면 서북방으로 농로를 따라 5km 지점에 위치한 이 마을은 해발 450m의 높은 지대로 기후적으로 고냉지대이다.
통일 신라 초기 중국 당나라 사람들이 일시 거주하였다고 전해오고 있으나 실제 고려 명종조(1170∼1197)에 풍산유씨(豊山柳氏) 등이 정착 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후 전주이씨(全州李氏). 경주김씨(慶州金氏) 등 여러 성씨들이 이곳에 이주하였다. 마을 북쪽으로 1.5km 위치에 사기를 굽던 점촌(店村)이 있었는데, 후에 동면 자래리 점촌으로 옮겨가 연실(蓮室) 마을로 개칭되었다.
통일 신라 초기 당나라 사람들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다는 구전에 따라 인근 사람들이 이곳을 '당실'이라 칭하여 왔다. 후에 한문으로 표기함에 따라 '당골'을 그대로 옮겨 '당동(唐洞)'이 되었는데 지금도 마을 사람들은 '당골'이란 명칭을 사용한다.
오래전 실제 중국 당나라 사람들이 살았음인지 이 마을은 전통적으로 한문을 중시하여 일찍부터 한문서당이 있었다. 그 유풍이 최근까지 남아 주민들이 보수적인 경향을 띠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점촌리, 당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아곡리에 편입하여 남원군 아영면에 속하였다.
1972년에 이르러 새마을사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 지면서 농로 3km를 개설한 것을 비롯하여 마을회관 20평, 마을 공동창고 30평, 마을 공동구판장 등을 설치하였고, 1975년에는 마을 뒷산 10ha에 사방사업을 실시하였다.
논 농사가 주업이며 1980년대 초까지 고냉지 채소, 고추, 밤, 감 등을 재배하여 농외소득을 올려왔다.
뒷산에서는 양질의 석재가 산출되어 1979년부터 외지 기업인들이 채석을 하고 있다.
현재 총 24가구에 인구수 68명(남 : 31, 여 : 37)이다.
<마을회관> 1985년 건립.
<당산제> 매년 1월 15일에 당산나무에서 지내 왔으나 20년 전 중단하였다.
<기우제> 시리봉에서 지냈다.
<고분> 마을 입구 고려장터. 왜정 때 훼손되었다.
<도요지> 마을 뒤쪽 1.5km 되는 곳에 있었다. 그릇 제조용 흙은 동면 자래리에서 들여왔다.
<회관건립비>
앞산에는 '베틀바위'가 베를 짜는 형상으로 마을을 굽어보고, 그로부터 200m 지점에 '울돗치'는 고려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와 싸울 때 돌들이 팔량치를 향하고 울었다는 전설을 담고 있다.
옛부터 마을 형국이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으로 마을 남쪽 베틀바위와 관련해서 공을 들이면 득남한다고 전해오고 있다. 또한 현재 지리산 휴계소 자리의 지명이 토골(토동)로 불리어 왔었는데 옛부터 이곳은 흙을 메워 큰 마을이 세워질 자리로 전해 내려왔던 곳이다.
동면∼아영간의 지방도에서 서북 방향으로 농로를 따라 약 4km 지점에 위치한 산간 마을로써 해발 450m의 고냉지대이다.
남북국시대 연안이씨 일가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아 정착하면서부터 이 마을이 형성되었다. 그후 타 지방으로 이주하고 재녕이씨, 함양오씨, 달성서씨 등이 차례로 이주 정착하였다. 마을 앞 평지에 농경지를 개간하고 농사에 진력하여 마을이 날로 발전하고, 이어 평강채씨 등 여러 성씨들이 입주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아영면에서 제일 먼저 형성된 마을이라 전해지고 있으며, 마을의 위치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 '아막성'의 성역이라 하여 마을 이름을 '아곡'이라 칭하였다고 한다. 속칭 이것을 '아실'이라 불렀으니 아실을 한문으로 옮기면 아곡(阿谷)이 되는 것이다. 공양왕 3년(1391) 운봉에 파견된 감무가'아용곡부곡(阿容谷部曲)'의 권농병마사(勸農兵馬使)를 겸임했다고(남원지, 1992) 기록되어 있는데 아용곡부곡의 이름에서 아(阿)자와 곡(谷)로 축약해서 '아곡(阿谷)'이라 부른 이름으로 추정해 볼 수도 있다.
본래 운봉군 북상면의 지역으로서 아용(요)곡부곡{阿容(要)谷部曲}이 있었으므로 아실 또는 아요곡, 아곡이라 하였으며 북상면과 북하면이 병합하여 아영면이 되기 이전에 북상면 청사가 자리하던 마을이었다. 1914년 행정 구역 통폐합에 따라 점촌리, 당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아곡리라 통칭해서 남원군 아영면에 편입하였다.
옛부터 참판, 감찰, 진사등 조정의 관직들이 많이 배출되어 이른바 양반촌으로 유교를 존중하고 예의를 숭상하던 보수적인 마을이었다. 1977년에 자립마을로 승격하면서 마을회관 30평, 공동창고 40평을 비롯하여, 마을 환경개선 사업을 꾸준히 지속하여 주민의 의식구조는 물론 시대에 걸맞는 문화 시설을 갖추었다.
옛부터 체를 제작하고 전국을 다니며 행상을 하였던 체 생산의 본 고장이다. 그러나 체 생산은 어디까지나 부업일 뿐 주업은 논농사로 다른 마을과 공통적이다. 한 때는 고냉지 채소·엽연초 경작등 밭농사에서도 소득을 올려 왔다.
이 마을 인물로는 조선조에 이 참판·박 감찰·이 진사 등 많은 명인들이 배출되었다. 서남쪽 500m 지점에 방고대가 있는데, 이곳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방을 붙여 발표하는 곳으로 '방을 기다리는 곳'의 뜻이다.
현재 총 54가구에 인구수 167명(남 : 77, 여 : 90)이다.
<88고속도로 휴게소> 아곡리 83번지에 위치. 33m의 탑이 서 있다. 동일농협에서 운영한다.
<내고장 으뜸농산물 판매장> 88고속도로 휴게소에 위치한다. 아영농협에서 운영한다.
<순령재(順寧齋)> 1919년 건립한 재령이씨 제각.
<양진제(養眞齋)> 1947년 건립한 함양오씨 사암공파 제각.
<추모재> 연안이씨 정령공파 제각.
<영모재> 서산정씨 판관공파 제각.
<기암사> 1958년 산 137번지에 설립한 태고종 사찰.
<아곡교회> 1990년에 설립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교회.
<탑거리> 마을 앞에는 옛날 아담하고 섬세하게 다듬어진 4층 석탑이 1934년까지 서 있었는데 일본인들이 수탈해 갔다. 지금도 이곳을 '탑거리'라 부르고 있다.
<수양전진계비> 마을 입구에는 '아곡수양전진계(阿谷修養前進契)'라 쓴 비가 서 있다. 독립운동가 이두석은 1929년 18세의 젊은 나이로 큰형 이두현과 같이 '수양전진계'를 조직하고 야학을 개설하는 등 항일 독립사상을 고취시키고 농촌계몽에 앞장섰는데 공적을 기리기 위한 비. 수양전진계에서 운영하던 야학터는 현재 양진제 제각터에 위치하던 운곡제 서당이었다. 그후 운곡제는 마을 회관 서편으로 이전하였다가 소멸되고 현재는 그 편액이 마을회관 정문에 부착되어 있다.
<아영고지비(阿英古址碑)> 마을 입구 탑거리에는 옛날부터 '아영고지'라 새긴 비가 세워져 있었다.
<당산제> 마을 앞 삼거리의 날당산과 마을 뒤 본당산에서 음력 1월 3일 지냈다.
<기우제> 봉화산과 황산에서 주로 지냈다.
<봉암대(蜂巖臺)> 마을 앞쪽에 위치하며 바위가 벌떼같다 해서 붙인 이름이며 이수봉, 오형철 등 105명이 계(契)를 조직하고 즐겼던 곳. .
<계거오공유허비(溪居吳公遺墟碑> 계거 오상귀(吳相龜)의 비(碑).
<지소유거비(止巢幽居碑)> 지소 오상봉(吳相鳳)의 비(碑).
<기암> 일명 베틀바위. 과거 팔월 한가위철이면 4개읍면의 부녀자가 이곳 기암대에 모여 하루를 즐겼다.기암대는 옥녀직금 또는 검도암이라고도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 석굴에서 선녀들이 베짜기를 하였다고 전하며, 아들 못낳는 여자가 바위 위에서 머리를 빗고 내려오면 아들을 낳는다 하였다.
가래터 : 당동 남쪽에 있는 들.
갈나골 : 새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기암(機岩) : 베틀바우.
당동(唐洞) : 땅골.
도장골 : 당동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뒷골 : 아곡 북서쪽에 있는 마을.
땅골 : 당동. 아실 북서쪽에 있는 마을.
명석치(鳴石峙) : 웃도치고개.
명씨바우 : 뒷골 복판에 있는 바위.
모래재 : 사치. 아실에서 장수군 반암면 유정리로 가는 고개.
방고개 : 방현. 아실에서 운봉면 가산리로 가는 고개.
방현(榜峴) : 방고개.
벌바우 : 어심이 남쪽에 있는 바위.
베틀바우 : 기암. 천황봉에 있는 바위. 큰 바위 수십개가 베틀같이 쌓여 있으며, 음력 8월 16일에 부녀들이 모여 놀이를 하였다.
병목안 : 아실 서쪽에 있는 골짜기 입구가 병목 처럼 좁아진다.
사치(沙峙) : 아실에서 장수군 반암면 유정리로 가는 고개.
새골 : 아실 북쪽에 있는 골짜기.
새목이 : 뒷골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새목이재 : 새목이에서 장수군 반암면 논곡리 배바우로 가는 고개.
설고개 : 솔고개. 송현치(松峴峙). 당동에서 봉대리 봉대로 가는 고개.
송현치(松峴峙) : 설고개.
아곡(阿谷) : 아곡리.
아랫고개 : 아실 서쪽에 있는 고개.
아랫고개절 : 아랫고개에 있는 절.
아실 : 아곡리.
아영고지(阿英古址) : 아곡에 있는 터. 아영고지라 쓴 비(碑)가 있었다.
아요곡(阿要谷) : 아곡리.
어심이 : 아실 남쪽에 있는 골짜기.
웃도치고개 : 명석치. 어심이에서 봉대리 개남들로 가는 고개.
장삼이 : 도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잿들 : 가래터 북쪽에 있는 들.
쟁갈뜸 : 아실 동쪽이 되는 마을.
점촌(店村) : 아실 북쪽에 있는 들. 그릇 굽는 점이 있었다.
집앞들 : 아실 남동쪽에 있는 들.
천황봉(天皇峰) : 아실 남쪽, 베틀바위가 있는 산.
칼바우 : 베틀바우 북쪽에 있는 바위.
봉대리(奉大里)
마을 지형은 새(鳥)의 형국으로해발 772m의 시리봉 지맥이 남쪽으로 흘러 임곡을 지나 봉대마을을 감싸안고 있다.
이 마을은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로서, 북쪽에 있는 일명 아막성이라고 하는 성리산성과 남쪽에 있는 가산산성의 중간에 위치하며, 새맥이재나 모래재를 넘어 장수군과 통하는 옛날의 군사기지였다. 조선 중엽까지도 주위에 신라총이라는 신라의 무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신라군의 숙영지로 짐작된다.
북쪽에는 88고속도로 인터체인지가 위치한다.
고려 의종(毅宗) 말경(1170), 청도 김씨(淸道金氏)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면서 마을을 형성하였고, 이어 서산정씨(瑞山鄭氏)를 비롯하여 경주이씨(慶州李氏) 등이 이주하여 왔다.
마을이 한창 번창할 무렵에는 하촌(수도촌), 중촌(쑥대. 쑥띄), 상촌(지장동), 임곡(숲실) 등 4개 마을로 형성 되었으나 이조 말엽에 이르러 하촌과 상촌은 없어지고 지금은 중촌과 숲실만 남아있다.
봉대는 원래 중촌의 속명 '쑥대' 또는 '쑥띄'를 한문으로 쑥봉(蓬) 자를 넣어 봉대(蓬臺) 또는 봉대(蓬帶)로 표기 하다가 1850년경부터 풍수지리설에 따라 새봉(鳳) 자로 바꾸어 봉대(鳳臺)로 고쳤다. 이조 중엽까지 뒷산에 봉계사(鳳溪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후 1914년 행정지역 통폐합 때 쓰기 쉬운 받들 봉(奉)자와 큰 대(大)로 고쳐 봉대(奉大)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을 지형은 새(鳥)의 형국으로 마을에 변씨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그런데 조선조 초 유교를 숭상하고 불교를 탄압하던 시절 절의 중이 시주를 구하려 오면 변씨들은 혹독하게 내어 쫒곤 하였다. 어느날 도승이 마을을 찾아와 말하기를 말바위 목을 자르면 마을이 번창하고 변씨 가문이 크게 득세할 것이라 하였다. 변씨들이 도승의 말대로 하자 오히려 변씨들이 망하였다고 한다.
조선조에 운봉군 북상면 지역으로 봉대(鳳臺)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임곡리, 당동리 일부를 병합하여 봉대리(奉大里)라 해서 남원군 아영면에 편입되었다.
인근에 4개 자연마을을 이루고 살아온 큰 마을로서 현재는 봉대와 임곡 2개 자연마을이 봉대 단일 행정 마을로 되어 있다.
조선 중엽까지 마을 뒷산 봉계사(鳳溪寺)가 있었으나, 그 터가 개간되어 지금은 알 수 없다.
영조 33년(1757)에 열락재라는 서당을 설치하여 이웃 부락 학동들까지 교육하여 많은 문인 학자를 배출하였으며 재실은 지금까지도 현존해 있다.
1944년에는 봉대 저수지를 막아 10ha의 천수답을 수리 안전 답으로 전환 시켰다. 1946년에는 봉대국민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962년에는 개천정리공사를 실시하는등 주거환경을 개선하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새마을사업으로 마을회관, 공동창고, 농로개설, 지붕개량, 구판장 설치 등 문화촌으로 발전하였다. 현재 총 60가구에 인구수 195명(남 : 98, 여 : 97)이다.
<마을회관> 1996년 20평 규모로 건립.
<영화재> 1959년에 건립한 청도김씨 판서공파 제각.
<열락재(悅樂齋)> 영조 33년(1757)년 설립. 1913년 중수하여 1948년 봉대초등학교가 설립될 때까지 2년동안 가교사로 사용되었다. 설립자는 김선흡(청도인), 이익승(경주인), 이명철(연안이), 정국채(서산인) 등이다. 초대훈장은 김선흡으로 1987년 마을 앞에 창설인 공적비 건립.
<서산정씨 효열비> 마을 입구 1964년에 마을 입구에 건립한 것으로 정민(鄭珉). 정육룡(鄭陸龍) 두 효자의 효행비.
<봉계사(鳳溪寺) 터> 이조 중엽까지 마을 뒷산 봉계사(鳳溪寺)가 있었으나 그 터가 개간되어 지금은 알 수 없다.
<향교터> 마을 뒷쪽 밭.
<누석단> 조산이 있었으나 일제 때 소멸. 현재 마을 뒷산에서 큰돌을 옮겨 놓았다.
<당산제> 마을 뒷산에 위치하는 당산바우(당할머니)와 마을 숲에 있는 앞당산(당할아버지)이 있었으나 1986년 소멸되었다.
<기우제> 시리봉에서 지냈다.
<고분> 마을 앞산 솔고개에 위치. 일제때 도굴.
<도요지> 마을 뒷편 암자 아래.
<청도김씨 공덕비> 청도김씨 제각 내에 위치.
<열락재비> 1987년 마을 앞에 열락재 창설인 공적비 건립.
<서산정씨 효열비> 마을 입구
<봉대초등학교 터> 1946년 아영국민학교 봉대분교로 마을 앞 건너들에 세웠으나 현재는 인풍리 201번지로 이전하였다.
<입석> 마을입구에 높이 165cm인 돌을 옮겨놓았다.
가도리(加道里)골 : 시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가오리 모양이라 한다.
개남들 : 앞숲 동남쪽에 있는 들.
개밑 : 숲실 남동쪽에 있는 들.
건너들 : 봉대 남쪽에 있는 들.
달바우 : 가도리골 위쪽에 있는 바위.
당산바우 : 봉대 북쪽에 있는 바위. 당제를 지냈다.
도지재 : 숲실에서 인풍리 매산으로 가는 고개.
도지잿들 : 도지재 밑에 있는 들 . 해돋이(동)쪽이라 한다.
뒷들 : 봉대 뒤쪽에 있는 들.
뒷뜸 : 봉대 뒤쪽이 되는 마을.
매바우고개 : 봉대에서 운봉면 화수리 하마정으로 가는 고개.
명석치(鳴石峙) : 웃도치재.
무지개다리터 : 앞숲 남쪽에 있는 무지개처럼 생긴 다리가 있었다.
밀골 : 보리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밀 재배가 잘 되었다.
바람골 : 가도리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배남실 : 밀골 서쪽에 있는 골짜기. 배나무가 있었다.
보리골 : 지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보리 재배가 잘 되었다.
볼골 : 개남들 남쪽에 있는 골짜기.
봉대(奉大·蓬臺·鳳臺) : 봉대리.
봉대방죽 : 봉대 북서쪽에 있는 못.
사랑바우 : 웃도치재 동쪽 기슭에 있는 바위.
산태밑 : 숲실 동쪽에 있는 들. 전에 사태가 난 밑이라 함.
상봉대 : 봉대 위쪽에 있는 들.
소매골 : 숲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소를 많이 매던 골짜기.
솔고개 : 봉대에서 아곡리 아실로 가는 고개.
숲실 : 임곡. 봉대 동북쪽에 있는 마을.
시리봉 : 시루봉. 징봉. 증봉(甑峰.) 숲실 동남쪽에 있는 산. 가뭄에 기우제를 지냈다.
신바탕골 : 숲실 동쪽에 있는 골짜기.
아랫개남들 : 개남들 아래쪽에 있는 들.
앞숲 : 봉대 앞에 있는 숲.
예스당터 : 황새집골 동쪽에 있는 옛 서당 터.
요강바우 : 사랑바우 북동쪽에 있는 요강 모양의 바위.
웃개남들 : 개남들 윗쪽에 있는 들.
웃도치들 : 웃도치재 동쪽에 있는 들.
웃도치재 : 명석치. 숲실에서 운봉면 가산리로 넘어가는 고개. 고려말 이성계 장군의 황산대첩 때 신통력으로 바위를 불러 성을 쌓았는데, 돌이 이 고개에 제 몫을 다하지 못해 울었다 한다.
임곡(林谷) : 숲실.
쥐산골 : 지장골.
지장골 : 쥐산골. 가도리골 남쪽에 있는 골짜기. 기장이란 곡식을 재배하자 자연 쥐가 많이 서식하였다.
지초바우 : 예스당터 동쪽에 있는 바위.
징봉(甑峰) : 시리봉.
하봉대 : 봉대 남동쪽에 있는 터. 수도청이 있었다.
황새집골 : 솔고개 북서쪽에 있는 골짜기. 황새집 형국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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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내 고향의 내력을 이렇게 소상하게 알수있도록 올려주신 그대가 고맙소. 우리본이 창원 丁씨 라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