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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순례를 다녀오며....>
월성중학교 1학년 1반 김민욱
제 1장. 남도 땅의 첫날
부스스 아침에 일어나니 벌써 7시가 넘었다. 서둘러 약속 장소인 황실고수부지로 향한다. 날씨가 얼마나 추운지 형산강이 모두 얼어붙었다. 드디어 모두 모여서 버스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이번 목적지는 전남지방으로 어렸을 때 한번 빼고는 거의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지 더더욱 기대된다. 전라도, 흔히 남도라고 하는데, 예로부터 남도지방은 정치와 거리가 멀었고 양반문화나 서민문화가 발달하였다. 그리고 산속 깊이 수많은 고찰들과 여러 불교유적도 산재해 있다. 또한 서울인 한양에서 멀어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유배지였다고 한다.
3시간쯤 후, 드디어 우리의 첫 번째 목적지인 보성 녹차밭에 도착하였다. 대한다원이라 불리는 이곳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녹차밭 이라고 한다. 보성 녹차밭은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이 차를 마시기 위해 여기에 녹차를 재배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버스에서 내려서 보성 땅에 발을 디뎠다.
(보성 녹차밭. 겨울에도 푸른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녹차밭 속 무덤. 왜 녹차밭 속에 무덤이 있는 것일까?)
입구에 눈이 조금 있는걸 봐서는 여긴 눈이 좀 왔나 보다. 쭉쭉 뻗은 삼나무길을 따라 걸으니 마침내 녹차밭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겨울에도 푸른 녹차밭은 너무나도 신기했다. 녹차밭은 산꼭대기까지 한없이 펼쳐져 있었다. 나중에 봄이 되면 꼭 다시 오고 싶었다.
보성을 뒤로한 채 강진으로 향한다. 이번에 갈 곳은 김영랑시인의 생가다. 북쪽엔 김소월, 남쪽엔 김영랑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김영랑시인은 우리나라에서 아주 유명한 시인이다. 본명은 김윤식이라고 한다. 김영랑시인은 시인답지 않게 정치에도 관심이 많았는데, 안타깝게도 6.25때 수류탄 파편에 맞아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분의 대표작으로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이 있다.
생가 입구부터 우물이 있다. 맑아 보였으나 밑에 트럼프 카드가 가라앉아 있어 마지는 않았다. 김영랑의 생가는 여느 고택이 아닌 그냥 생가였다. 아무런 꾸밈없이 정말 옛날 초가집. 그런 점이 마음에 들었다. 생가의 분위기가 부잣집 같지않고 마치 조용히 공부하는 시인. 정말 시인이 살 것 같은 집이었다.
(김영랑 생가. 조용한 초가집 분위기 여느 집과는 사뭇 달랐다.)
(방안의 김영랑 시인의 모형. 모형도 모형이지만 옆의 모란꽃그림이 상당히 멋지다.)
김영랑시인의 숨결을 느낄수 있어서 좋았던 답사였다.
계속해서 백련사를 향해 갔다. 얼마 안가 도착했는데, 앞의 기암괴석의 산이 불길한 기운을 내뿜었다. 마치 엄청 고생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도로를 따라 걸어 올라가니 백련사가 보인다. 최근에 지은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상당히 오래된 고찰이다. 하지만 난 절보다는 앞에 보이는 시원한 경치가 더 마음에 든다. 탐진강 하구가 훤히 내다보이는 것이 이절은 위치 하나는 잘 잡은 듯 했다.
(저 멀리 보이는 탐진강 하구. 역시 절은 경치 좋은데 있어야 제 맛이다.)
(백련사 대웅보전. 현판이 두개로 나뉘어 있다. 특히 현판은 이광사의 솜씨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상당히 알아보기 쉬운 글씨체였다. 누가 보아도 대웅보전이라는 한자가 또렷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내 예술감각이 많이 떨어지지만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한 글씨체는 좋아하지 않는다. 이 글처럼 제대로 알아볼 수 있는 글씨체를 좋아한다. 대웅보전은 현재 다포식양식, 즉 조선후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다포식은 조선후기, 주심포식은 고려시대에서 조선진기의 양식이라고 한다. 대웅보전까지 다 보고 내려가는 줄 알았는데, 옆 산길로 들어간다. 그렇게 우리는 산이 경고한 힘든 여정을 시작했다. 길을 따라 동백나무가 보였는데 백련사 동백나무숲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을 만큼 유명한 곳이다. 동백꽃이 필대 오면 정말 멋있을것 같다. 쉴새 없이 걸어 부도밭에 도착했다. 동글동글한 부도들이 몇기 있었다. 그중 제일위에 있는 부도는 전라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었다. 다른 부도들과 달리 화려한 장식이 눈에 띄었다. 이어서 해월루이 나타났다. 언제 어떻게 지어진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백련사만큼이나 멋진 경치를 자랑했다.
(백련사 원구형 부도. 다른 부도에 비해 화려하다.)
(탐진강 하구. 정말 멋지다.)
해월루에서 내려와 고개를 넘어 오늘의 마지막 목적지인 다산초당으로 향한다. 다산초당은 다산 정약용선생의 유배지다. 당시 신유박해로 인해 정약전, 정약용, 정약종 삼형제가 모두 변을 당했다. 정약용은 여기 강진으로,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종은 처형당했다. 정약용은 이때부터 길고 긴 유배생활을 하게된다. 다행히 강진에서는 정약용 가문과 친한 해남윤씨 가문의 장소여서 윤씨 가문의 자손들을 가르치며 유배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유배생활을 하며 500권이나 되는 책을 썼다. 그 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목민심서, 경세유표 등이 있었다. 유배지에서 탄생한 엄청난 책들이었다.
계속 가면 가장먼저 나오는 것은 천일각이다. 원래는 정자가 없지만 후에 와서 지어진 거다. 정약용은 여기서 형이 유배간 흑산도를 바라보며 슬픈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흑산도가 안보인다. 어쩌면 정약용은 마음속으로나마 여기에 흑산도를 띄워놓고 형을 그리워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천일각. 원래는 여기에 정자가 없었으나 후대에 만들어 졌다.)
좀더 밑으로 내려가면 다산초당 동암이 나온다. 동암은 정약용이 주로 거처했던 곳으로 현재는 기와집으로 되어있지만 사실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원래 여기는 초가집이었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복원 시키면서 기와집으로 바뀌었다.
(다산초당 동암.)
개인적으로 난 기와집으로 복원시키는 것보다는 초가집으로 복원하는 게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세히 알지 못하면 사람들은 정약용이 꼭 기와집에서 편하게 유배생활을 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존경하고 추대하는 것도 좋지만 원래 그대로의 모습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다시 더 내려가면 서암이 나타난다. 서암에는 정약용의 초상화가 그려져 있었다.
(서암. 정약용의 초상화가 걸려있다.)
난 왠지 초상화도 좋지만 김영랑 생가처럼 정약용 선생이 공부하고 있는 모형이 있으면 더 이해가 쉽게 갈 것 같았다. 앞마당에는 차를 갈았다는 반석이 있고, 뒤에는 차를 끓였던 샘이 있었다.
드디어 오랜 산행을 마치고 내려왔다. 밑에는 유물전시관이 있는데, 바삐 둘러보는 바람에 제대로 보지는 못했다. 다음에 다시 올 기회가 있으면 제대로 보고 싶었다.
(유물전시실내 수원화성 제작모형. 실감나게 표현되어 있었다.)
드디어 모든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향했다. 우리조가 처음 배정받은 방은 엄청 넓었지만 나의 그 실수 때문에 우리는 위층의 좀 작은 방으로 이전되었다. 그래도 꽤 넓은 편이었다. 저녁은 삼겹살 파티를 하고 숙소에서 게임도하고 즐겁게 놀았다. 다음날이 무척이나 기대되었다. 그리고 다음날에는 걷는 일은 좀 덜했으면 좋겠다.
-여정- (2011. 12. 26. 月)
경주 황실고수부지→ 경산 휴게소→ 사천휴게소→ 보성 녹차밭→ 강진 김영랑 생가→ 강진 백련사→ 다산초당→ 숙소
제 2장. 한반도의 끝. 해남땅
국토순례의 두번째 아침이 밝았다. 졸린 몸을 이끌고 아침밥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탄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해남 두륜산 대흥사다. 대흥사는 해남에서 가장 큰 사찰이다. 대흥사에 가기 전에 부도밭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그 유명한 서산대사의 부도도 있어 흥미롭다.
(수많은 부도와 비들. 이 중에서 서산대사의 부도도 있다고 한다.)
(대흥사 앞의 계곡. 나름 겨울이 가진 운치가 있다.)
계곡 위에 놓인 다리를 건너면 마침내 대흥사가 나온다. 바로 앞에 두륜산이 보인다. 설명에 따르면 두륜산은 부처님을 닮았다고 한다. 정말 멀리서 보니 손, 얼굴, 발까지 꽤 닮은 것 같다. 대흥사는 여느 절과 달리 대웅보전이 서쪽에 위치해 있었다. 원래는 거기가 정면이지만, 새 건물들을 들여놓으면서 서쪽이 되어버린 것 같다. 또 다리를 건너면 대흥사 대웅보전이 나온다.
(대흥사 대웅보전. 어제의 백련사 대웅보전과 같이 현판은 이광사의 글씨다.)
대웅보전의 글씨도 멋있지만, 옆의 무량수각의 현판도 추사 김정희가 지은 것으로 역시 멋이 있다. 역시 추사 김정희 선생님다운 솜씨이다. 같이간 임태훈은 옆에 있는 무슨 수레같이 생긴걸 부서 버렸다. 다행히 얼른 제자리에 끼워놓아 괜찮았다. 대웅보전을 나오니 전설의 연리근이 보인다. 연리근은 두 나무의 뿌리가 연결된 것으로, 흔히 사랑을 상징하는 걸로 알려져 있다. 연리근을 지나 동으로 계속 가면 표충사가 나온다. 표충사는 이 절의 유명한 스님 세분의 영정을 모시고 있었다. 특히 표충사는 들어가는 문이 낮아 저절로 고개가 숙여져 신분에 관계없이 여기서는 고개를 숙이고 가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 같다. 옆에는 우리나라에 차문화를 보급시킨 초의대사의 동상이 있었다. 나도 차를 좋아하는데 이렇게 차를 마실 수 있게 해주신 초의대사님께 감사해야겠다. 또 다시 걷다 보니 서로 마주 하고 있는 문수전과 관음전이 보인다. 석가전, 즉 대웅전이 중간에 없는 걸로 보아 아마도 두륜산을 중심으로 한 것 같다. 성보박물관은 아쉽게도 문이 닫혀있어 들어가보지 못했다.
기나긴 아침 대흥사 관람을 마치고 녹우당으로 향한다. 녹우당은 해남윤씨일가의 집으로 전라남도에서 제일 크고 오래된 집이다. 사실 처음에는 집이 커 봐야 얼마나 크겠냐 싶었지만 직접 가보니 옛말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이라는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규모가 엄청났다. 일단 녹우당을 둘러보기 전에 유물전시실부터 들렀다. 유물전시실에는 이집의 주인인 윤선도 관련유적과 윤두서의 그림 등 여러 보물급 문화재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윤두서의 자화상은 국보인데 예전에 도둑맞을뻔한 적이 있어서 지금은 박물관으로 갔다고 한다.
전시실을 보고 이제 녹우당으로 갔다. 녹우당은 원래 이 사랑채만을 예기하는 거였지만, 지금은 녹우당 전체건물을 말하는 명칭이 되었다. 녹우당의 사랑채는 수원에 있던걸 윤선도가 해남으로 낙향하면서 같이 옮겨온 거라고 한다. 집안은 네모자로 되어있는 게 양반가문적인 냄새가 났다. 뒤로 올라가니 각종 사당들이 눈에 들어왔다. 역시 위세가 있는 가문은 다르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해남 녹우당. 멋들어진 필체의 현판이 걸려있다. 녹우당은 녹색비가 내리는 집이란 뜻이다.)
계속해서 미황사로 향했다. 달마산 기슭에 자리를 잡은 미황사은 이번 국토순례에서 간 절 중에서 제일 멋있는 경치를 자랑했다.
(미황사 대웅보전 뒤의 달마산 수려한 기암괴석이 시선을 압도한다.)
달마산이 뒤로 보이고 앞으로는 해남 다도해의 전경이 보이니 이보다 더 멋진 장소에 있는 절은 찾기 힘들 것 같다.
(미황사 대웅보전. 단청이 벗겨진 게 고풍스러운 느낌을 준다.)
(미황사에서 바라본 해남 바다. 상당히 운치있다.)
미황사의 대웅보전. 고풍스러운 느낌이 많이 든다. 그러나 이 미황사의 진짜 백미는 이런 유물 가치가 있는 대웅보전이나 응진당도 좋지만, 옆 산길을 따라 오라가면 보이는 부도밭이다. 정확히 안보면 잘 안보일 것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여기 올라가는 데에도 좀 걸었다. 어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 힘이 들었다. 어쨌든 여기 부도밭은 엄청 멋진 전경을 자랑한다.
(해남 다도해의 전경. 부도밭에서 볼 수 있는 멋진 경치다.)
이 부도밭의 부도들은 대부분 00대사의 부도나 비들이었다. 얼추 해석은 가능하지만 조금 모르는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이 부도들 중에는 물고기와 꽃게가 그려진 부도도 있었다. 혹시 해산물을 사랑한 스님이 아닌가 싶다.
미황사를 내려와 해남 해양 자연사 박물관으로 갔다. 해남 자연사 박물관은 원양어선에서 30년 동안 일하신 한 선장님께서 그동안 모은 해양생물들을 박제해서 박물관을 이루어 낸 것이라고 한다.
(진주조개. 아직 자라지 안아서 조개 껍데기에 붙어있다.)
(식인조개에 물린 나. 각종 해양생물들이 널린 이곳은 진짜 살아있는 듯 했다. – 사진제공 최도현)
(대왕고래의 뼈. 상상을 초월하는 크기였다.)
(하트모양조개 및 각종 예쁜 조개들. 하나 가져가고 싶다.)
여기에는 해양생물 이외에도 황금박쥐나 꽃무지같은 육지생물과 몇몇 나무조각상 들이 있었다. 그리고 기념품 가게에서 도현이와 태훈이와 함께 퀴즈를 맞춰서 선생님들과 기사님들께 거북이를 한 마리씩 선물했다. 기념품 가게 내부에도 각종 화폐 같은 신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아마도 이 박물관을 세우신 분은 엄청난 수집광이었나 보다. 자연사 박물관을 뒤로한 채 땅끝으로 가야 하지만, 지금 가면 볼 것도 없어서 일단 숙소에서 짐을 풀고 해가 질 때쯤 가기로 했다. 가는 도중 일정에는 없는 땅끝 조각공원에 가보았다.
(해남 땅끝 조각공원. 각종 신기한 조각들이 있었다.)
(또다른 조각. 과연 저 조각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조각공원에는 여려 신기한 작품들이 많았다. 조각공원을 보고 이제 이번 여행의 두번째 숙소로 향했다. 숙소는 어제의 모텔과는 비교도 안되게 시설이 고급스러웠다. 선생님께서도 국토순례 10년 동안 이렇게 좋은 시설은 처음이라고 하신다. 그리고 여기는 학생들 같은 아무나 묵는 게 아니라 교수님 같은 분들이 오는 곳 이라고 한다. 실제로 밑에는 각종 세미나실과 연구실 등이 있었다.
숙소에서 잠시 쉰 후, 드디어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인 땅끝으로 갔다. 도착했을 때는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그리고 길고 긴 계단을 올라와 땅끝 전망대에 도착했다.
(땅끝 전망대. 꼭 촛불이 서있는 것 같다. 저기 올라가 보는 경치는 이루 말로 못한다.)
(석양이 진 해남 바다. 배가 떠가는 게 운치 있다.)
(해남 땅끝마을. 어촌치고는 뭔가 발전한 느낌이 든다.)
(석양. 한반도의 끝에서 맞이하는 석양. 느낌이 색다르다.)
(석양이 진 봉수대. 직접 가보면 정말 멋있다.)
전망대에 올라 다들 앞다투어 사진 명당을 찾았다. 나도 질세라 얼른 찍었다. 그리고 그나마 제일 온전한 석양사진 하나를 건져 올릴 수 있었다. 여기 해남 땅끝전망대에서는 보길도, 완도, 추자도 등 여러 섬들이 보인다. 그리고 밑에서부터 올라가는 모노레일도 운영하고 있다.
석양을 잘 보고 이제 진짜 땅끝으로 내려가려 했는데, 아뿔싸! 선생님들과 나를 포함한 5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냥 내려가버린 것이었다. 결국 15분 정도 후 다시 다 모여 진짜 땅끝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번 계단은 아까 올라갔던 계단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길었다. 좀 과장된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20분은 걸어 내려간 것 같았다. 그래도 중간중간에 우리나라의 각 도에 대한 설명들이 있었다. 심지어 북한의 양걍도나 자강도에 대한 설명도 있었다. 드디어 땅끝에 도착했다.
(해남 땅끝탑. 옆에는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다.)
(해남 땅끝탑. 진정한 우리 한반도의 끝이었다. 조명 때문에 탑이 완전히 순백색으로 보였다.)
우리나라의 땅끝! 정말로 서보고 싶었던 곳이다. 특히 흑과 황이 조화를 이룬 아름다운 하늘은 더욱더 여기가 땅끝이라는 신비로움을 더해주었다. 그렇게 10여분간 감상에 젖어있다가 드디어 공포의 계단을 다시 올라 갔다. 그렇게 난 맨 뒤의 후발대로 뒤따라 올라갔다. 그리고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갔다. 하늘엔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약 30분간의 등산(?)을 끝내고 저녁을 먹었다. 드디어 오늘의 마지막 일정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갔다. 숙소에서는 한창 게임도하고 그러는 등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드디어 내일이 마지막 날이다. 집에 돌아간다는 기쁨도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이제 여행도 끝난다는 마음에 아쉬움이 남았다. 그래서 그런지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내일은 제발 오늘 같은 고생은 없었으면 좋겠다.
-여정- (2011. 12. 27. 火)
숙소(강진)→ 해남 대흥사→ 해남 녹우당→ 해남 미황사→ 해남 해양 자연사 박물관→ 땅끝 조각공원→ 숙소→ 땅끝 전망대→ 땅끝탑→ 숙소
제 3장. 남도에서의 마지막 날
어제 옆방과 원화와 옆방에서 피신한 장훈이가 새벽 3시까지 전쟁을 벌여 한숨도 못잤다. 그리고 현관은 미안할 정도로 지저분했다. 설상가상으로 늦잠을 자버려 시간도 촉박했다. 빠르게 치우고 나왔다.
식당에서 아침을 든든히 먹고, 다시 길을 떠난다. 정들었던 해남을 떠나 다시 강진으로 간다.
오늘의 첫 목적지는 강진 무위사 이다. 강진에서는 알아주는 고찰이다. 그런데 온통 공사 중 이어서 입구가 전혀 절같은 느낌이 들지 않았다. 심지어 절의 정문인 일주문도 그냥 지나쳐서 기분이 그랬다. 절 바로 앞에 버스는 정차했고, 우리는 사찰 경내로 들어갔다.
(무위사 극락보전. 이번 여행 최초의 국보급 문화재다. 양식도 여느 건물과 달리 주심포식이다.)
정면에 우릴 맞이하는 것은 무위사 극락보전이었다. 확연히 이전의 백련사, 대흥사, 미황사와는 구별되는 건물양식이었다. 일단 건물이 주심포식인걸로 보아 고려에서 조선전기에 지어진 건물이다. 화려한 멋은 덜 들어갔지만 그만큼 조용하고 위엄이 넘치는 느낌의 맞배지붕도 쓰였다. 또 대웅보전이라는 현판대신 극락보전이라는 이름이 쓰였다. 이렇게 다르니까 아마도 국보로 지정된 게 아닌가 싶다. 건물내의 벽화도 보물로 지정되어있다. 하지만 이 벽화도 박물관으로 옮겨져 영구보존 중이라고 한다. 아무리 문화재 보존도 중요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것이 진짜 그 유물의 진가를 발휘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위사는 뭔가 의외로 관람이 빨리 끝났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 절을 다니면서 자꾸 불국사가 작게만 느껴진다.
무위사가 있는 월출산에는 도갑사라는 절도 있다던데 거기도 한번 가보고 싶다.
버스를 타고 가는 도중 저 멀리 보이는 동네가 안개에 휩싸여 있는 것을 보았다. 정말 이야기에나 나올법한 전설 속의 마을 같았다. 그리고 10분 정도 후, 강진에서의 진짜 마지막 목적지 월남사지에 도착했다.
(월남사지 삼층석탑. 경주에서는 보기 힘든 백제양식을 띄고 있다. 또 뒤의 월출산도 멋있다.)
처음으로 사가 아닌 사지에 도착했다. 물론 평소에 절이나 절터를 좋아해 여려 경주의 절터를 망라했지만, 이렇게 민가에 둘러싸여있고 절터답지 않은 절터는 처음이다. 그래서 더 재미있다. 월남사는 고려시대 진각국사가 창건했다고 한다. 현재도 옆에 가보면 1/3이 깨진 진각국사비가 남아있다.
월남사지가 더 신비로운 이유는 뒤의 월출산이 그 멋을 함께 하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한다. 월출산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을 정도로 경치가 빼어나다. 그런데 어제의 달마산의 위엄가 너무 컸지 월출산의 멋진 경치가 확 다가오지 않았다. 그래도 월출산은 달마산보다 2배이상 길게 병풍같은 기암괴석들이 쭉 나열되어 있었다.
폐사된 절터였지만 볼 것이 많은 월남사지를 지나서 우리는 강진을 떠나 화순으로 갔다. 화순하면 누구나 떠오르는 고인돌과 운주사를 보러 가기 위해서였다. 먼저 도착한 곳은 운주사였다. 너무나도 잘 알려진 천불천탑의 전설을 간직한 운주사는 나말여초에 우리나라에 풍수지리를 전파하신 도선국사가 동쪽에 산이 많아 좋은 기운들이 기울어서 모두 일본 쪽으로 흘러간다고 하여 하늘나라의 도공들을 불러 균형을 맞추기 위해 여기에 하룻밤 만에 천불천탑을 세운 것이라 전해져 온다. 그러나 현재는 불상 93기, 석탑 21기만이 전해져 온다. 나머지는 세월의 무게를 못 이기고 파손되었거나, 도굴당하여 하나 둘 줄어든 게 지금인 것 같다. 일단 운주사는 입구부터 여러 불상들이 모셔져 있다. 여기 부처님들은 신기한 게 경주 신라 남산의 불상처럼 섬세하고 예술적인 미를 추구하기 보다는 그냥 투박하고 빨리 여러 개를 만든 느낌이 든다. 그래서 서민적인 느낌이 많이 난다.
(우병길 선생님과 부처님들. 투박한 미가 있어서 더욱 멋이 있다.)
(각종 탑들. 여기에는 7층, 5층, 9층 등 수많은 탑들이 있다.)
(감실 부처님. 사진상 한 분처럼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실제로는 서로 등을 맞대고 계신다.)
(원모양탑. 운주사에는 이 탑 이외에도 신기하게 생긴 탑들이 많다.)
(운주사의 유일무이한 마애불. 하지만 모양은 여느 운주사 불상과 같다.)
정말 눈 돌아가기 바쁘다. 좌우 측 모두 부처님과 탑들. 부서진 불상, 반쯤 묻힌 불상, 공사 중인 탑, 다 똑같은 듯 하면서도 제 각기의 개성은 다 지니고 있었다. 길을 따라 쭉 걸어서 불사바위를 향해 또 오른다. 이번 여행은 매일 등산이다. 마치 꼭 골라가는 것처럼.... 산꼭대기쯤 딱 다다르면 불사바위가 보인다. 정확한 뜻은 모르겠고 선생님께서는 그냥 전망 좋은 바위라고만 하신다.
(불사바위. 친절하게 계단도 있다. 그냥 경치 좋은 바위)
(불사바위에서 본 전경. 운주사가 한눈에 다 보인다)
(불사바위 뒤 산꼭대기. 올라가 보니 조선시대 누군가의 무덤이 있었다. 직책은 장군 급 정도?)
불사바위에서 내려와 운주사 유일의 마애불을 보고 이번엔 와불을 보러 또 올라간다. 이 와불은 세계에서 제일 큰 와불로 전설에 의하면 하늘에서 온 도공들이 이제 이 와불만 일으키면 되는데 동자스님이 장난으로 닭 울음소리를 내서 날이 밝은 줄 알고 모두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이후 이 와불이 스스로 일어나면 온 세상이 태평성대를 이룬다고 한다. 실제로 이 와불에는 때내어 내려는 자국과 부처님 머리의 나발이 때어져 세워져 있었다. 이런 걸로 미루어 보아 정말 때어서 일으켜 세우려던 건 확실한 것 같다. 이렇게 중요한 유물을 실수로 태훈이가 밟아 버렸다. 온 야유가 울려 퍼지며 우병길 선생님께서 혼내셨다. 저번 대흥사 사건도 그렇고 점점 태훈이는 문화재훼손범이 되어가고 있었다.
(와불 가는길에 있는 불상. 마치 불상이 머리에 바위를 이고 있는 것 같다.)
(와불. 얼굴이 태훈이에게 밟힌 비운의 부처님이시다. 옆에는 때어진 나발이 세워져 있다.)
와불을 보면 생각 외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10m나 되는 크기는 세외 졌으면 더 엄청났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 와불을 지나 밑의 칠성바위로 향했다. 칠성바위는 말 그대로 일곱칠에 별성, 일곱개의 별이란 뜻이다. 칠성바위는 그냥 탑을 세우려고 때어낼려한 돌이라는 의견과 북두칠성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뭐가 확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북두칠성을 나타낸 거라고 믿는다.
(칠성바위. 위에 올라간 사람과 비교했을 때 엄청 크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칠성바위까지 보고 나서야 우리의 운주사 대장정은 끝을 맺었다. 이제 이번 여행의 마지막 장소인 화순 고인돌군으로 향했다. 그전에 나주에 점심을 먹으러 갔는데 나주평야라는 말을 입증하듯이 산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먹은 가정식 백반은 정말이지 꿀맛이었다.
점심도 배불리 먹고 이제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도착한 화순 고인돌군은 고창, 강화의 고인돌과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어있다. 특히 화순의 고인돌군은 돌을 직접 캐던 채석장이 같이 남아있어 신기하다.
(화순 고인돌유적. 여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임을 알리고 있다.)
(화순 고인돌. 옆의 사람과 비교 했을 때 실로 어마어마한 크기라는걸 알 수 있다.)
(수많은 고인돌들. 넓적한 것부터 땅속에 파묻힌 것 까지. 모양이 정말 제 각각이다.)
진짜인 줄은 잘 모르겠지만 오다가 2층 고인돌을 보았다. 지금 와서의 추측은 아마도 채석의 흔적이라 생각한다. 현재 여기서 제일 큰 고인돌은 자그마치 250t이나 된다고 한다. 정말 6000여년 전에 그런걸 옮겼다는게 믿기지가 않았다.
드디어 이번 여행이 끝났다. 많이 아쉬웠다. 다시오면 꼭 자세히 보고 가겠다고 생각했다.
쉼없이 달려 완전히 어두워진 후에야 우린 드디어 우리 고향땅 경주에 도착하게 되었다. 아버지가 먼저 마중나와 있었다.
남도답사. 나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시간이었다. 이번 2학년 때 기회가 온다면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그때는 산행이 좀 적었으면 하는 바램을 하고 말이다.
-여정- (2011. 12. 28. 水)
숙소(해남)→ 강진 무위사→ 월남사지→ 화순 운주사→ 화순 고인돌군→ 지리산 휴게소→ 평사 휴게소→ 황실 고수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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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민욱군^^ 기행전문작가 수준 이상의 글을 접하며 정말 중학생인지 의심이 갈 정도군요^^
무척 대견하고 식견이 높은 글을 읽고 댓글로나마 감사한 마음을 남겨요^^
더불어 지금처럼 곱고 반듯한 심성으로 자라서 훌륭한 성인이 되리라 믿어의심치 않아요^^
만난적은 없지만 항상 건강하고 많은 행복을 느끼며 훌륭한 성인이 되도록 빌게요^^*
민욱아!
국토순례 다녀온 기행문 잘 읽었고 쓰느라 고생 많았다.
설명할 때도 열심히 듣고 하더니 설명과 사진까지 곁들인 멋진 기행문인 것 같다.
설명을 하고 중간 중간 질문을 할때에도 민욱이가 가장 확실히 답변도 잘하고 독서량이 풍부하고 문화 유산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는 것도 느꼈어.
앞으로 역사에 대한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유명한 역사학자나 고고학자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내년에도 이 행사는 계속하지 싶다.
하지만 마지막 줄에 대한 답변은 아직 내가 하기엔 좀 곤란할 것 같다.
코스도 여름과 겨울에는 달라야 하기 때문에...
여름에 간다면 레프팅이 또한 재미 있거던.
봄 방학 맞이하여 미흡한 과목이 있다면 좀 더 열심히 해서 부족한 부분을 만회할 수 있도록 하기 바라며 기행문 올려주어서 고맙고 학교 홈페이지에도 올려 두었다.
개학해서 보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