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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 조창원 묘/조선·정정옹주 묘/조무강·숙혜옹주 묘 written by 한국의 능원묘 |
▲ 양주 조씨 묘역 앞에서 바라 본 묘역군 모습 |
한강변에 있는 조말생선생 묘역은 다녀 왔습니다만, 주변에 조말생선생 후손과 후손들과 결혼한 옹주들의 묘역이 있다고 해서 제50차 나홀로의 능원묘 답사에서 다녀 왔습니다. |
▲ 카페 가든 갤러리 좌측 뒷편 능선으로 올라갑니다. |
▲ 묘역 중앙에서 올라 온 방향으로 바라 본 모습(전방에 보이는 능선으로 길이 있음) |
조무강·숙혜옹주 묘 |
▲ 조무강·숙혜옹주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조무강[趙無彊, 성종 19년(1488)∼중종 36년(1541)], 본관은 양주, 고조는 대제학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조말생(趙末生), 증조는 관찰사 조근(趙瑾), 조부는 조중휘(趙仲輝), 아버지는 참봉 조광세(趙光世), 성종의 서녀 숙혜옹주[淑惠翁主, 성종 17년( 1486)∼중종 20년(1525), 어머니는 숙용심씨]에게 장가들어 한천위(漢川尉)에 봉해지고 슬하에 1남을 두었다. |
▲ 조무강·숙혜옹주 묘역 전경 |
제9대 성종대왕(成宗大王) [1457 ~ 1494] 가계도
정비 공혜왕후 한씨(恭惠王后 韓氏) [1456 ~ 1474] : 소생 없음
제1계비 폐비 윤씨(廢妃 尹氏) [1445 ~ 1482]
제2계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 ~ 1530]
서1남 계성군(桂城君) [1478 ~ 1504] (숙의 하씨) |
조선·정정옹주 묘 |
▲ 조선·정정옹주 묘역 뒤에서 내려다 본 모습 |
조선[趙璿, 태종 10년(1410)~세종 19년(1437)], 자는 공근(公謹), 본관은 양주, 증조는 형조판서 조인필(趙仁弼), 조부는 서운관정 조의(趙誼), 아버지는 대제학에 병조판서를 역임한 조말생(趙末生)이다. 세종 3년(1421) 12세 때 태종의 서녀 정정옹주[貞靜翁主, ? ~단종 3년(1455), 신빈 영월신씨의 소생]와 혼인하여 한원군(漢原君)에 봉해졌고, 중군사직(中軍司直)을 역임하고 28세에 요절하여 소회(昭懷)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은 조영(趙渶)이다. |
▲ 조선·정정옹주 묘역 전경 |
제3대 태종대왕(太宗大王) [1367 ~ 1422] 가계도
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 ~ 1420] 적1남 아들 [생몰년 미상]
서1남 경녕군(敬寧君) [1395 ~ 1458] (효빈 김씨)
옹주(翁主) [1400 ~ 1402] (숙의 최씨 소생) |
오은 조창원 묘 |
▲ 오은 조창원선생 묘역 전경 |
조창원[趙昌遠, 1583(선조 16)∼1646(인조 24)]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대형(大亨), 호는 오은(悟隱)이며, 본관은 양주이다. 영사(領事) 문강공 말생의 후손이며, 지돈녕부사를 지낸 존성의 손자이다. 아들 윤석(胤錫)은 문과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으며, 조선 중기 정치사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던 복제 문제의 당사자인 인조의 계비(繼妃) 장렬왕후는 그의 막내딸이다. 인조의 국구로서 한원부원군(漢原府院君)에 봉해졌다. |
▲ 조창원선생 묘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10세의 어린 나이로 아버지를 따라 종군하였으며, 진사시에 합격하여 별좌·의금부도사 등을 지냈다. 광해군의 난정이 심해지고 아버지가 옥사에 연좌되어 화를 당하자 관직을 그만두고 시골에 내려와 아버지를 봉양하였다. 인조반정 후 형조좌랑에 제수되었고 직산현감으로 나가 민심을 무마하고 많은 치적을 올렸다. 군자감정에 승진되었다가 여산군수에 제수되었으며, 영돈녕부사를 지냈다. 시호는 혜목(惠穆)이다. |
▲ 조창원선생 묘역 뒤에서 바라 본 모습 |
오은 조창원선생 묘역 위치도 |
위 사진에 보이는 묘역에 오은 조창원선생 묘와 조선·정정옹주 묘 그리고 조무강·숙혜옹주 묘가 있습니다. |
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수석동 산2-3 우측 상단의 시작 부분이 조말생선생 묘역이고 끝 부분이 조창원선생 묘역입니다. |
좌측 하단의 토평IC를 기준으로 위치를 가늠하시기 바랍니다. 상단의 파란 화살표 부분에 조창원/조말생 묘역이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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