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수필 한 편을 써서
윤진호 목사와 박도훈 목사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농촌에서의 체험과 들은 풍월을 끄저거린 글이다.
습관처럼 마감일을 하루 넘기고 말았다.
2018년도 기독문학 제18집에 실린 원고다.
농경(農耕)파적(破寂) -이관수-
은퇴 후 목사의 삶은 개인마다 그리고 형편에 따라 매우 다양할 것이다.
나는 농촌에 정착했고, 농업에 종사하면서 여전히 ‘절반의 농군’으로 살고 있다.
사람마다 자기가 직접 체험한 이야기라면 실감나게 전할 수 있지 않겠나 싶어
계절을 건너뛰며 농사에 대한 이야기를 심심풀이 삼아 주저리주저리 읊어보려고 한다.
(1월) 새해가 되면 우선 농업경영체 등록을 하게 되는데 이장으로부터 서류를 받아 놓았다.
<농업경영체 등록은 농지, 축사, 원예시설 등 생산수단과 농산물, 가축사육 등 경영정보를 등록,
관리하는 제도로서, 그 정보는 면세유 배정, 건강, 연금보험 지원 등 각종 농림보조사업자 선정 및
지원규모를 결정하는 기초자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서 작성된 문건의 첫 장에 나온 내용이다.
문서를 작성하면서 그리고 관계기관에 신고를 하면서 농사꾼이 다 되었음을 느껴본다.
(2월) 설 명절이 지나면 고추농사가 시작된다.
말하자면 정월 대보름 무렵이면 농한기를 벗어나게 되는 셈이다.
고추는 열대성 작물이며 다년생이기에 추위만 이길 수 있다면 오래도록 수확이 가능하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일찍 싹을 틔워 밭으로 이식(移植)하는 작물이다.
고추는 농가수입의 기본이라 할 수 있으니 고추묘를 성공적으로 키워내야 하는 농군의 정성은 매우 중요하다.
고추농사를 전문적으로 할 수는 없으나 상식적으로 알 필요는 있겠다 싶어
농사로 잔뼈가 굵은 옆집의 yu씨에게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비닐하우스도 방문해 사진도 찍어두었다.
(3월) 집 앞에는 y씨네 인삼밭이 매일매일 열병식을 하듯 늘어서있다.
3년 차 인삼의 누렇게 마른 잎들은 땅바닥에 귀를 대고 봄소식을 기다리고 있는가.
아직도 지푸라기이불을 뒤집어쓴 채 동면에서 깨나지 못하고 있다.
영하 이십 도를 오르내리는 강추위를 얼마나 잘 버텼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입춘절기를 보내면서 따뜻한 날씨가 기다려지고 밭에 나갈 생각에 몸이 근질거린다.
올해는 농사를 제대로 한 번 잘 지어 보겠다고 다시 한 번 각오를 새롭게 해본다.
옆집의 sh씨가 트랙터와 관리기를 동원하여 큰밭을 갈아엎어 두둑을 만들고 검은 비닐을 씌웠다.
힘든 일은 기계가 하고 자질구레한 잔손질은 사람이 하는 반기계화농법이다.
가지런한 밭두둑은 햇빛을 반사하며 깜장색은 모두 밀어내니 검은 색이 검기만 한 게 아니다.
우리 마을에는 아직 품앗이라는 미풍양속(美風良俗)이 남아있다.
나는 기계 대신 인삼밭에 가서 품앗이를 해야 한다.
그날은 sh씨네 농촌형 4륜구동 소형트럭을 몰고 그네 인삼밭으로 달려갔다.
얼마 전에 돌풍(突風)으로 애써 가꾼 4년근 인삼밭이 훼~ㅇ 하다.
농사는 하나님이 도와줘야 되는 거여~!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바람결을 타고 날아든다.
(4월) 농가월령가에 나오는 24절기 중에 곡우(穀雨)가 되었다.
곡우란 비가 내려서 백가지 곡식이 윤택해진다는 뜻이라던가?
아침에 창문을 여니 회색하늘 아래로 부슬부슬 비가 내린다.
밤새 후두둑거리더니 지금은 숨소리를 죽이고 있다.
이 무렵에 비가 내리면 풍년이 든다고도 하고, 볍씨를 담근다고도 한다.
세상 돌아가는 잡다한 소음(騷音)에도 불구하고 농부들의 마음은 온통
씨앗의 파종이나 고추모이식의 날 잡기에 집중하고 있다.
나도 기지개를 켜고 슬슬 나가서 움직여 보자.
어쨌거나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누는 해"라는 교회 표어는 잊지 말자.
늦잠 자던 버릇을 벗어던지고 도구들을 챙겨 일찌감치 큰밭으로 달려갔다.
겨우내 돌보지 않던 밭엔 할 일이 태산이다.
잡초는 밭고랑마다 다 차지하고 지가 주인이란다.
호미로 뚜덕뚜덕 잡초 캐내는 걸 보고 지나가던 Yi노인이 한마디 거든다.
“힘들게 뭐하는 겨~ 약 뿌리고 말아~!”
제초제 없으면 농사를 어찌 짓는다나?
아들이 보낸 경운기는 힘도 부치고 요령도 없어 사용을 포기했다.
대신 오토바이에 리어카를 매달아 끌고 다닌다.
기동력은 경운기보다 오토바이가 훨씬 낫지? 아~암!
비닐하우스의 고추들은 주인의 발자국소리를 들으며 이식(移植)할 만큼 잘 자랐다.
집집마다 아들 딸 며느리 사위까지 동원되고 손자들까지 와서 마을엔 생기가 넘친다.
이식을 마친 집에서 고추모를 몇 판 가져왔다.
남의 일을 약간만 거들어도 인심 좋은 마을에서는 뭐든지 쓸 만큼은 얻을 수 있다.
“Give & Take”라 하던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속담은 성경에서 차용한 것일까.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a)
혹 내게로 돌아오는 게 없더라도 주면서 살기를 힘쓰기로 하자.
콩은 직파하고 고추모는 이식했다.
산비둘기는 어찌 알고 새싹들을 쏘옥쏘옥 빼먹는가.
빈자리는 이빨 빠진 것처럼 보기 싫다.
줄지어 자라던 새싹들에 빈자리가 생기면 채우고 싶다.
농부의 마음이다. 그래서 이런 구호가 생각난다. “빈자리를 채우소서!”
(5월) 참깨는 모내기한 다음에 심어도 돼! 하던 말이 생각나서
느긋한 마음으로 참깨 심는 걸 미루고 있었는데
큰아들 내외가 신품종 참깨종자 한 봉지를 큰밭에다 직접 심고 들어섰다.
너무 이르다던데 했더니 "다른 곳엔 벌써 싹이 올라왔던 데요!" 하는 거다.
허긴 참깨는 이모작도 가능하다니 일찍 심는 것도 틀린 일은 아니다.
농부들에게 농토는 곧 직장이다. 새벽에 출근하고 해거름에 퇴근 한다.
다만 집에서 가까우니 자주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 자유로운 직장이다.
그렇다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반드시 보응이 따른다.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서 결코 눈속임을 해선 안 되는 이유다.
제초제를 덜 쓰려고 밭고랑에 폐기된 현수막을 얻어다 덮어주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절반의 농군은 꿈도 꾸지 못했을 삶이다.
(6월) 오래간 만에 비가 내릴 거란 예보다. 참 반가운 소식이다.
고추와 옥수수들이 춤을 추겠네! 누군가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느냐' 노래했지만
하늘에서 내리는 은총의 빗줄기를 외면하고야 어찌 풍성한 삶을 노래할 수 있으랴!
무더위를 씻어 내리고 생물을 춤추게 할 빗줄기가 한 줄금 시원하게 쏟아지기를 고대한다.
(7월) 장마철이라 하지만 가뭄이 지속되어 농심들을 태우고 농작물을 태운다.
머릿속에서 스물스물 기어 나오는 글귀들을 손가락으로 또드락또드락 걸러내 보았다.
*기다리거라*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
가뭄으로 애태우는 농심
검은구름 비구름 기다려보나
기다리거라
짚신장수 우산장수 두 아들 둔
애태우는 어미의 심정을 아는가
어디는 대홍수로
어디는 가뭄으로
세상은 온통 혼란스럽건만
하늘의 경륜은 변함없어라
별은 뜨고 지고
해는 뜨고 지고
비를 기다리는 이들에게
바람이 분다
아직은 조금만 더
기다리거라
-觀-
*소낙비*
오밤중에 소낙비 한 줄금 쏟아졌다
후두두둑 쏴아~
잠결에 기도한다
아직 많이 부족해요, 하나님!
다시 쏟아지는 소나기
창문을 두드린다
후두두둑 쏴아~
이렇게 한 시간 쯤 쏟아지면 참 좋겠네
새벽에 창문을 여니
물기 먹은 대지가 함박웃음 웃는다
그래도 아직 부족해요, 하나님!
강줄기가 타들어가고
농지에 파종도 못했다는
안타까운 소식 떠올리며
두 손을 모은다
하나님, 조금만 더~
-觀-
옥수수를 따러 오토바이를 몰고 밭으로 달려가리라 마음먹는다.
그러나 생각만큼 몸이 따라주지 않아 침상에서 뒹굴고 있는데
창밖으로 스산한 빗소리가 귓바퀴를 간지럽힌다.
핑계 김에 뭘 한다던가,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던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도다.” (시127:2b)라는 성경말씀을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중얼거리며 오래간만에 실컷 잠에 빠져들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