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동ㆍ서독 첫 정상회담 개최
동독의 에어푸르트 역에 도착한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오른쪽)를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가 영접하고 있다. 제2차대전 후 미ㆍ소 양국에 분할점령되면서 적대시해 온 동서독이 1970년 3월 19일 동독의 에르푸르트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1949년 동서독 국가탄생 이래 첫 정상회담으로 서독의 빌리 브란트 총리가 동독을 방문했다. 이번 방문은 1966년 빌리 브란트가 대연립 부수상 겸 외상이 된 이래 전개해 온 동유럽 제국과의 관계개선을 목적으로한 ‘동방정책’의 일환이었다. 브란트 총리는 취임연설에서 “독일에 2개의국가가 존재한다 할지라도 그들은 서로 외국이 아니다. 두 국가는 단지 특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며 소위 ‘2국가론’을 제기했다. 브란트 총리는 동서독 정상회담, 소련과 무력행사 포기 협정 체결, 동서독 기본조약 체결을 대 동독 정책의 주요 목표로 설정하고 조약으로 규율되는 협력 관계로 나아가기 위한 정부차원의 협상을 동독에 제의했다. 이어 브란트 총리는 빌리 슈토프 동독 총리에게 분단으로 인한 주민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회담을 제의했고, 동독은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날 오전 9시30분 특별열차로 도착한 서독 총리 브란트는 기차역으로 환영나온 동독 총리 슈토프와 굳은 악수를 교환했다. 브란트는 그의 이름을 연호하는 시민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회담은 부드러운 분위기속에서 약 6시간에 걸쳐 진행됐으나 양측의 견해차이는 좁힐 수 없었다. 결국 구체적인 합의점에 도달하지 못한 채 다음 회담을 5월 21일 서독에서 갖는 것으로 결론짓고 회담을 마무리지었다. 그러나 이날 정상회담은 독일 통일의 초석을 다진 역사적 사건으로 회담 이후 20년 만에 통일을 이루었다.
[1992년] 이승만 전대통령 미망인 프란체스카 여사 사망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고 이승만 전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92)가 1992년 3월 19일 0시 15분 자택인 이화장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오스트리아 태생의 프란체스카 여사는 34살 때인 1934년 자신보다 25살이나 많은 독립운동가인 이승만 박사와 결혼한 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의 부인이 됐다. 여사가 이 박사를 만난 것은 스위스 제네바의 한 식당. 우연히 합석을 하게 된 인연으로 사랑을 나누게 됐고 부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 이듬해 뉴욕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48년 이 박사가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던 여사는 채 2년이 안 돼 터진 6 25전쟁으로 큰 시련을 겪는다. 이 대통령이 하야한 뒤 한 달 만에 함께 망명길에 오른 프란체스카 여사는 망명지 하와이에서 1965년 7월18일 향수병에 시달리던 이 박사를 먼저 보냈다. 이 대통령 서거 후 5년여를 모국인 오스트리아에서 보내다가 1970년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권유 등으로 귀국, 양자 이인수씨(61) 가족과 함께 이화장에서 성경읽기와 방문객 접견 등으로 여생을 보내왔다. 까다로운 벽안의 서양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생애는 영과 욕이 점철된 것이었다.
[1962년] 한국원자력 연구소 `제3의 불` 점화 성공
1962년 오늘, 우리나라에 원자력 시대가 열렸다. 경기도 양주의 원자력 연구소에서 국내 처음으로 원자로를 시운전하는 '임계 도달 실험'이 실시됐다. 원자로는 미국의 제너럴 아토믹사가 만들었다. 미국의 원조를 포함해 모두 6억8천만 환을 들여 3년 만에 완성했다. 오전 11시부터 8시간 동안 계속된 원자로 실험 가동은 성공적이었다. 이후 방사성 동위원소가 국내에서 생산돼 의학과 농학 분야 연구에 큰 도움을 주게 됐다.
[1813년] 리빙스턴 David Livingstone 출생
1813년 3월 19일 태어남 / 1873년 5월 1일 죽음 리빙스턴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의료 선교사이다. 1840년 남아프리카에 파견되었으며, 이후 15년 동안 아프리카 내륙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면서 노예무역 폐지운동에 앞장서는가 하면 지리 탐험에도 열정을 쏟았다. 1849년에는 칼라하리 사막을 건너 응가미 호를 발견했고, 1855년에는 잠베지 강을 건너 빅토리아 폭포를 발견했다. 대대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한 그는 1858~64년 2번째 아프리카 탐험에 이어 1866년 대규모의 3번째 탐험을 이끌다가 실종되었다. 1871년 헨리 M. 스탠리에 의해 구조되었으나, 나일 강의 근원을 찾겠다는 일념으로 귀국을 거부하고 탐험을 계속하다가 1873년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1993년] 비전향장기수 이인모,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
정부는 비전향장기수 이인모(李仁模)에 대해 조건없는 송환방침을 결정하고 1993년 3월 19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으로 송환했다.
[1945년] 일본 가미카제, 미국 항공모함 공격 191945년 3월19일 일본의 가미카제[神風] 특공대가 미국 항공모함 프랭클린호를 공격해 800여 명이 사망했다. '신의 바람'을 뜻하는 가미카제는 원래 1281년 몽골의 일본 침략을 막아낸 태풍을 일컫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1944년 10월 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 제1항공함대 사령관 오오니시[大西] 중장이 전투기 26대로 이른바 가미카제 특공대라는 자살부대를 편성했다. 가미카제가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오키나와[沖繩]에서였는데, 미국 해군은 단 1번의 전투에서 거의 5,000명에 이르는 전사자를 냈다. 이후 일본은 인간어뢰 가이텡[回天], 자폭용 고속정 신요[震洋], 인간 로켓 사쿠라바나[櫻花] 등의 특공부대를 계속 전쟁에 투입했다.
[1919년] 기생조합만세운동 발발 1919년 3월 19일 진주시 기생들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촉석루를 향해 시위행진을 벌이면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경찰은 6명의 기생을 구금했지만 김향화를 비롯한 수원시 기생조합 기생들이 또다시 독립시위를 벌였다. 4월에는 해주시 기생들이 피로 그린 태극기를 들고 시위를 벌였다. 이에 자극을 받은 군중 3,000여 명이 시위투쟁을 전개했다. 기생조합장 문월선 등 많은 기생들이 구속되었으나 통영시에서 예기조합기생 33명이 금비녀·금팔찌를 팔아 소복을 마련해 입고 만세시위운동을 계속했다.
[1901년] 한국 최초의 민간인 비행사 안창남 출생 안창남(1901년 3월 19일 ~ 1930년 4월 2일)은 한국 최초의 민간인 비행기 조종사이다.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도 널리 알려졌으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운동가 노백린이 미국에서 길러낸 한국인 비행사들이 안창남보다 1년 가량 먼저 비행사가 되었기 때문에 한국인 최초는 아니라고 밝혀졌다. 서울 출신으로, 일본 오오사카에서 자동차 운전을 배운 뒤 비행기 제조법에 이어 조종술을 공부해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 1921년 일시 귀국하여 금강호(金剛號)를 타고 모국방문 비행을 하면서, 자전거의 엄복동과 묶어 "떳다 보아라 안창남 비행기 내려다 보니 엄복동의 자전거" 라는 가사의 노래나 "날개로는 안창남, 수레로는 엄복동, 다리로는 현금녀" 등 다양한 유행어가 생길 만큼 유명해졌다. 간토 대지진 이후 귀국하였으며 중국으로 망명하여 중국군 소속으로 근무한 바 있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독립 운동에 뛰어들었다. 여운형의 주선으로 산시 성으로 옮겨가 비행학교 교장으로 비행사를 양성했다. 이무렵 대한독립공명단이라는 비밀 항일조직을 결성했고, 이 단체는 항일 비행학교 건설을 위한 활동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0년 비행중 추락사고로 사망했다. 중국에서 독립 운동에 참가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받았다.
[1876년] 독립운동가 여순근 呂淳根 출생 1876. 3. 19 평남 중화~1946. 3. 5. 1899년 한국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참위로 임관되었으며 1902년 부위로 승진했다. 1907년 강제로 군대가 해산당하자 이에 분격해 강원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항전했다. 1919년 3·1운동 후 아들 행렬(行烈)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 대한독립단의 훈련부장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1월 안둥 현[安東縣] 임시의사회에 참여했다. 1920년말 임시정부 경무국장 김구의 경호부장에 임명되었으며, 그해 4월에는 안병찬(安秉瓚)을 총재로 하는 대한청년단연합회가 조직되자 다시 그 경호부장으로 활동했고, 9월 21일에는 임시정부 평안북도연통제의 경무사로 임명되었다. 1920년 12월 대한독립단이 광복군사령부에 통합되자 사령장 조맹선(趙孟善)의 부관으로서 참모장 이탁(李鐸) 등과 함께 대일 무력 항쟁을 수행하는 한편 훈련국장으로 독립군 양성에 전념했다. 1922년 만주의 각 독립운동단체인 한족회·독립단·광한단·대한국민단·청년단연합회·광복군총영의 대표들이 환런 현[桓仁縣]에 모여 대한통의부를 조직하자 이에 가입했다. 그러나 대한통의부에 내분이 발생하자 유응하(劉應夏) 등 전 한교회(韓僑會) 인사 13명과 함께 탈퇴한 뒤 대한군민부를 조직하는 등, 1923년 이후에는 펑톈 성[奉天省] 등지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하다가 귀국했다. 19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1921년] 모더니즘 시인 김종삼 金宗三 출생 1921. 3. 19 황해 은율 ~ 1984 서울 6·25전쟁 뒤 모더니즘 시인으로 주목받았다. 평양 광성보통학교를 마치고 중학교에 입학했다가 중단하고 일본 도요시마[豊島] 상업학교를 마쳤다. 유치진에게 연극을 배우고 음향효과를 맡아보기도 했다. 6·25전쟁 때 월남하여 피난지 대구에서 시 〈원정 園丁〉을 발표하고 이어 1951년 〈돌각담〉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초기에는 피난민의 뿌리뽑힌 삶과 허무를 노래했는데 비약적 상상력과 뜻밖의 어구를 연결하여 난해한 이미지를 만들고 시어의 음향효과를 높이려 했다. 이런 시정신은 전봉건·김광림과 펴낸 〈전쟁과 음악과 희망과〉(1957), 문덕수·김광림과 펴낸 〈본적지〉(1968)에까지 이어졌으며 전쟁 때문에 파괴된 삶을 그린 〈민간인〉(1971)으로 1972년 현대시학작품상을 받았다. 그뒤에는 세계와의 불화 또는 인간 사이의 관계를 잃어버린 데서 나타난 정신적 방황을 노래했다. 이 방황은 세계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기나긴 역정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를 보헤미안적 시인이라고도 불렀다. 또 그의 시를 '여백의 시', '내용 없는 아름다움을 추구한 시'라고 말하기도 한다. 행의 과감한 생략과 비약으로 불완전한 문장과 불안한 문체를 통해 '여백'이 가지는 미적인 효과를 높이려 했다. 그리하여 전통적으로 익숙한 정서를 지워버리거나 독특한 질서로 바꾸어 존재하지 않는 세상을 그리려 했다. 즉 시의 기법을 통해 비어 있는 세계를 깨닫게 하고 독특한 미를 창조하려 한 것이다. 그뒤에도 이 생각은 이어져 소박한 세계에 대한 믿음으로 발전했다. 시집으로 〈십이음계〉(1969)·〈시인학교〉(1977)·〈누군가 나에게 물었다〉(1982) 등이 있다.
[1931년] 김운용 金雲龍 한국의 체육행정가 출생 1931. 3. 19 대구~ 경동고등학교, 미국 텍사스 웨스턴대학, 연세대학교 대학원(정치외교학과)을 졸업했으며 1976년에 미국 메리빌대학에서 명예법학박사학위를 받았다. 1961년 국방부장관 보좌관을 시작으로 1961~63년 송요찬·박정희·김현철 등 내각수반 의전비서관을 지냈다. 1963~68년 주미·주국제연합(UN)·주영 대사관의 참사관을 지냈고 제20차 UN 총회에 한국 대표로 참가했으며, 1968~74년 대통령경호실보좌관을 지냈다. 태권도 10단으로 1971년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을 맡으면서 체육행정에 관여했다. 1972년 국기원(國技院) 원장, 1973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로 각각 취임하여 지금까지 맡아오고 있다. 1974년 대한체육회 부회장 겸 대한 올림픽 위원회 부위원장에 취임하고 1979년 비올림픽 종목 국제경기연맹 회장 및 월드게임 회장을 지냈다. 1986년 국제경기연맹총연합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10월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국제 올림픽 위원회(IOC) 총회에서, 사망한 박종규 위원의 뒤를 이어 한국의 6번째 IOC 위원에 선출되었으며 이어, 1992년 7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린 총회에서 IOC 부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태권도를 한국의 전통 스포츠로 굳히고 태권도 사범의 해외진출을 꾀하면서 태권도의 국제화에 노력했다. 대한태권도협회 회장에 취임 후 이듬해인 1972년 11월 30일 서울 역삼동에 국기원을 지어 태권도의 총본산으로 삼았고, 3분 3회전 및 체급제의 경기방식을 확립, 태권도를 경기종목으로 자리잡게 했다. 세계태권도대회를 개최하여 1973년 5월 국기원에서 제1회 대회를 열었고, 세계태권도연맹을 만들어 1980년 IOC의 승인종목으로 인정받도록 했다. 아시아 경기대회, 범미경기대회, 아프리카 경기대회, 국제군인대회, 남미경기대회, 보리바리안 경기대회 등에서 태권도를 정식종목으로 채택되도록 했다. 국내는 물론 국제 체육관계 주요직책을 두루 맡아오면서 우리나라 체육의 국제적 지위향상에 노력해왔다.
[1900년] 프랑스의 핵물리학자 졸리오 퀴리(Joliot-Curie, Frédéric, 1900~1958) 출생 파리 출생. 옛 성(姓)은 졸리오. 방사능의 연구, 특히 원자의 인공전환으로 아내 I.졸리오퀴리(Joliot-Curie, Irène)와 함께 노벨화학상을 받았다(1935). 고등공업물리화학학교에서 P.랑주뱅의 지도를 받고, 1925년 라듐연구소에 들어가, M.퀴리(Curie, Marie, 1867~1934)의 조수가 되어 방사능 연구를 했다. 이듬해 I.퀴리와 결혼, 성을 졸리오 퀴리로 바꾸고, 아내와 협력하여 연구를 계속했다. 1932년 ‘보테 베커의 방사선’의 성질에 관한 연구로 중성자 발견, 이어서 γ선에 의한 음양 전자쌍생성을 보고하고, 1934년 인공방사능을 발견했으며, 그 밖의 많은 새로운 원소 창출의 가능성을 예견하였다. 1935년 연쇄 핵반응의 가능성을 밝혔다. 그 사이 소르본의 조교수에서 콜레주 드 프랑스의 교수가 되어, 핵화학연구소를 창설하고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다. 우라늄 핵분열의 가능성이 발견되자, 핵분열 때 중성자 방출이 따른다는 사실을 보고하고(1939), 연쇄반응 조건을 연구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독일군이 침입하자 국내에 남아 국민전선을 지도했다. 대전 후 국립중앙과학연구소 장관에 취임, 창설된 원자력청 장관 외의 여러 요직을 역임하며 과학 연구조직이나 과학 행정면에 진력하였다. 1950년 정치적 이유로 원자력청 장관에서 해임된 후, 사크레의 대원자핵연구소에서 지도에 전념하는 한편, 세계평화옹호회의 의장으로서 평화운동에 공헌하였다. 부인 사후에는 소르본대학의 교수와 라듐연구소장을 겸임, 오르세 핵물리학연구소 건설을 지도하였다. 프랑스의 제1호 원자로 ‘조에’(1948)와 오르세의 싱크로사이클로트론의 실현에도 공헌하였다. 과학아카데미 회원을 지냈고, 프랑스공산당에 입당(1943), 중앙위원이 되어 원폭 반대 스톡홀름 호소문을 기초하였다. 1951년 스탈린상 수상, 레지옹 도뇌르 훈장 등 많은 상과 명예학위를 받았다.
[1899년] 한국화가 변관식(卞寬植, 1899~1976) 출생
1899년 3월 19일 황해도 옹진(甕津)에서 출생하였다. 호는 소정(小亭)이다. 관립 조선총독부 공업전습소 도기과(陶器科)에서 도화(陶畵)수업을 받은 후 외조부인 소림 조석진(趙錫晋)이 관여하던 서화미술원에서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심산(心汕) 노수현(盧壽鉉)·청전(靑田) 이상범(李象範) 등과 함께 공부하고, 1925년 일본에 가서 동경미술학교(청강생)를 수료하였다. 8·15광복 후 초기 국전에 참여하였으나 심사부조리를 개탄, 국전을 포기 외면하고 이후 작품제작에만 몰두했다. 화법의 특징은 첫째, 화면상의 시점이 부감시( 瞰視)에 따른 일종의 심원(深遠)의 형식이면서 다각적인 방향에서의 시점을 구사하여 박진감과 입체파풍의 구조적 해석을 보였다. 둘째, 청전(靑田)과 달리 적묵법(積墨法)에 의해 변화를 주었으며 관념적인 산수가 아니라 엄격한 사경(寫景)을 바탕으로 한 한국적 풍치가 배어났다. 그리고 그러한 산세에 접경되는 인물들은 비탈진 산길을 뒤뚱거리며 올라가는 흰 두루마기의 촌로들이 보여주는 해학적인 풍정에서 진정한 한국적인 야취(野趣)를 맛볼 수 있다. 작품으로는 일련의 금강산 시리즈인 《외금강 삼선암(外金剛三仙岩)》 《내금강 진주담(內金剛眞珠潭)》 《옥류청풍(玉流淸風)》 등과 《이어(鯉魚)》 등의 어해도(魚蟹圖)가 있다.
[1944년] 정명화 鄭明和 한국의 첼로 연주자 출생
4세 때 피아노를 배우다가 첼로로 악기를 바꾸었으며, 13세 때 전국음악경연대회에서 특상을 받았다. 1958년 명근·명소·경화 남매들과 함께 서울 시공관에서 정 패밀리 연주회를 가졌다. 1961년 2월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졸업했으며 1965년 미국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졸업했다. 1967년 샌프란시스코 교향악단 주최 경연대회에 수석 입상했다. 1968년 서던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3년을 수료하고 2년 동안 조교로 있었다. 1969년 4월 키징거 독일 총리를 위한 백악관 환영음악회에서 연주했고 1971년 제네바 국제음악 콩쿠르 첼로부에 수석 입상했다. 1979년 7월 로스앤젤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차이코프스키의 로코코 변주곡을 취입했고 1979년 이후 정 트리오와 지속적으로 음반을 취입했다. 1985년 이탈리아 시칠리아 오케스트라 주최 금년 최고의 협주자로 지명되었고 1989년 이탈리아 나폴리 방송교향악단과 베토벤의 〈피아노·바이올린·첼로와 관현악을 위한 3중 협주곡〉을 녹화·취입했다. 1991년 뉴욕 메너스음악대학에서 첼로 및 실내악 교수로 재직했고 1992년 6월 국제연합마약퇴치기구(UNDCP)의 친선대사로 임명되었다. 음악을 통해 미국에 기여한 공로로 엑설런스 2000상을 수상했다. 현재 미국에 살고 있다.
[1601년] 에스파냐의 화가, 조각가, 건축가 카노(Cano, Alonso, 1601~1667) 출생
다재다능해 스페인의 미켈란젤로라고 불렸으며 개인적으로는 험난한 생애를 보냈지만 작품은 우아하고 이해하기 쉬운 종교적 내용을 담고 있다. 1614년 세비야로 이주한 뒤 후안 마르티네스 몬타녜스 밑에서 조각을, 프란시스코 파체코 밑에서 회화를 공부했다. 화가 야노 이 발데스와의 다툼으로 1637년 그곳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던 그는 마드리드로 가서 궁정의 총애를 얻었다. 1644년 자기 아내를 살해한 혐의를 받게 되자 발렌시아로 달아나야만 했고 그로 인해 궁정화가로서의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후 펠리페 4세에게 간청하여 1652년 그라나다 대성당의 참사회원 직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1656년 부정을 저질러 쫓겨나고 말았다. 그는 마드리드로 돌아가 성직자가 되었으며 그라나다 대성당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직위를 유지했다.
[1593년] 프랑스의 화가 라 투르(La Tour, Georges de, 1593~1652) 출생
주로 촛불 비치는 장면을 그린 프랑스의 화가. 로렌 출생. 빵집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로렌공(公)의 회계사의 딸과 혼인, 부호가 되어 종교전쟁, 30년전쟁 등 동란시대에 광대한 영지를 소유하는 행운을 안았다. 그러나 민중을 돌보지 않고 농민에게 린치를 가하는 등 반민중적인 행위를 일삼은 탓으로 1652년 1월 일가족이 학살당하였다. 생존시의 그의 행적과는 달리 그 작품에는 종교의 경지로까지 고양된 깊은 인간성에의 통찰이 있으며, 명쾌하고 청아한 분위기와 더불어 명암의 대비, 인물의 기하학적 대치, 세련된 단채화법(單彩畵法) 등은 현대미술과 상통하는 바가 있다. 종교적 주제를 다룬 작품이 많으며 그 중에서도 《성탄도》《성(聖)세바스티아누스의 죽음을 슬퍼하는 성(聖)이레누》 등이 유명하다.
그밖에 1999년 서울시, 버스 토큰 판매 금지 1997년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화가 데 쿠닝 사망 1996년 태아성감별 의사 자격정지 1995년 미국 우주왕복선 엔데버호가 16일 15시간의 최장 체류 기록 세우고 귀환 1994년 박영수 북한측단장, 8차 남북한실무접촉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서울이 불바다가 될 것’이라고 극언 1992년 영국 앤드루왕자와 퍼커슨왕자비 이혼 공식발표 1991년 이해방박사 - 인슐린 피부투여법 세계최초 개발 1989년 이열우 WBC 라이트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획득
이열우는 WBC 라이트 플라이급과 WBA 플라이급 두 체급을 석권했던 복서이다. 그 체급엔 워낙 강타자들이 즐비해 이열우가 롱런을 못했는데 자질 만큼은 참 좋은 선수였다. 2008년 2월 대전 대흥동에 체육관을 개관하였다.
1989년 알프레도 크리스티아니, 엘살바도르 대통령 당선 1987년 일본 AIDS 예방 치료약 VFC-A개발 1982년 서울올림픽 범시민추진위 구성 1981년 한국청소년연맹 발족 1975년 국회, 외국인 상대의 반국가언동을 규제한 형법개정안 통관 1975년 북한 제2땅굴 발견 1973년 박정희 대통령, 헌법위원회 구성하고 위원장에 김현철씨 임명 1971년 고리원자력발전소 기공 1965년 미국 흑인 민권행진 1964년 베트남-캄보디아 국경서 무력 충돌 1959년 반공예술인단 결성 1958년 유럽경제공동체(유럽연합의 전신)의 유럽의회 출범 1957년 필리핀 가르시아 부통령, 대통령직 계승 1955년 북한 아오지탄광 광부 의거 1953년 서독의회, 유럽군조약 가결 1951년 훈련시설 부족으로 국민방위군 20만 소집해제 1950년 선거법 국회통과 1950년 원폭을 반대하는 ‘스톡홀름 호소문’에 전 세계 5억 명 서명 1913년 그리스 조지1세 황제 피살 1716년 강희자전 완성(청 강희55년) 1644년 중국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자살, 명나라 멸망 721년 바빌로니아의 천문학자들, 최초로 개기월식을 사서에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