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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글을 써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져놓고 너무 에둘렀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글의 성격을 한정하고
넘어가자. 우리의 글쓰기는 문학이나 학술, 언론 분야의 전문적 글쓰기가 아니다. 우리의 글쓰기는 읽기나
말하기, 듣기처럼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데 필요한 기본적, 일반적 글쓰기를 지향한다. 구체적으로는
자기자신의 삶을 에세이 형식으로 풀어내는 방식이다. ‘내가 나를 쓰는 글’이다. 이런 맥락에서
글쓰기의 필요성을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가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선, 글을 쓰지 않으면
자기 자신과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글쓰기라는 인위적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자신과 대화하기가
쉽지 않다. 자기 자신과 대화하지 못하는 인간, 그리하여 경제논리에 포섭된 채 일상적 삶을 지속하는 인간을
나는 ‘소비자’라고 부른다. 이때의 소비자는 ‘최후의 인간’이다. 생각하지 않는 존재, 노예적 존재인 탓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시대(사회)를 한꺼번에 살고 있다. 대중(대량)소비, 디지털 문명, 도시적 삶으로 대표되는
탈산업사회는 겹겹의 그늘을 드리우고 있다. 위험사회, 피로사회, 불안사회. 독거(무연)사회 ― 이와 같은
‘사회들의 사회’ 속에서 부대끼면서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도대체 나는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인지” 자문할 겨를이 없다. 발 디딜 틈이 없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교육, 성장) 올라가
다시 롤러코스터를 타는(노동, 고용) 형국이다. 문제는 우리가 자각하고 결행하지 않는 한 롤러코스터에서
내려가기가 어렵다는 것이다(영화 <설국열차>를 떠올려보자).
우리는 대부분 소비자다. 살기 위해 버는 게 아니고 벌기 위해 사는, 존재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소유하기 위해
일하는 소비자. 그런데 이런 삶의 와중에도 자기자신과 대면하는 순간이 있다. 강의 첫 시간에 꼭 하는
이야기지만, 숨 가쁜 도시적 삶에서도 자기자신과 마주하는 계기가 몇 있기 마련이다. 누군가를 사랑할 때,
어디론가 여행을 떠났을 때, 어딘가 탈이 나 병석에 누워 있을 때. 한마디로 일상적 삶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고서는 스스로 내면을 응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물론 걷기나 명상, 독서, 음악감상과 같은
취미나 여가 활동도 탈일상을 가능케 한다. 하지만 ‘내가 나를 쓰는 글쓰기’만큼 자기 자신과 깊이 만나지는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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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위한 글쓰기’가 아무리 단순한 구조와 방법으로 진행된다고 해도, 처음에는 주저하게 된다.
글쓰기 앞에서 자신만만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왜 그럴까. 글쓰기 나라에 입국하기 전에 함께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사항이 있다.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글을 못 쓴다고 자책하지 말자는 것이다. 사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는 글쓰기 교육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얘기했지만, 글쓰기 전도사를 자처하는 필자도 글쓰기를 배워본 적이 없다. 지금도 중·고등학교에
글쓰기 교과가 개설되어 있지 않다. 논술? 논술은 우리의 글쓰기와 전혀 다른 성격이지만, 그마저 전적으로
사교육에 맡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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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 불과 10년 전이다. 그렇다고 대학에서 글쓰기를 전문적으로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문학 전공, 문예창작 전공은 있어도 글쓰기는 여전히 생소한 전공이다. 그러니까
대학에서 교양 글쓰기를 배우고 초·중등 고사가 되었다고 해도 글쓰기 교육은 요원하다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글쓰기를 가르치지 않는 나라에서 글을 잘 쓰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 큰 문제는 우리사회가 글쓰기 능력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글은 작가나 기자, 교수의 전유물
이라는 고정관념이 완고하다. 후마니타스칼리지 글쓰기 교재 맨 앞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박아놓았다.
“생각하지 않아도 말은 할 수 있지만 생각하지 않고서는 글을 쓸 수 없다.” 그렇다. 글쓰기는 전적으로
생각하기다. 글쓰기가 생각하기라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글쓰기 교육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방치한
장본인은 다름 아닌 우리 사회다. 우리 사회가 생각하는 능력을 무시해왔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잘살 수 있다, 돈을 잔뜩 모으거나 권력만 움켜쥐면 글 따위는 아랫사람에게 시키면 된다는
야만적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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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차 언급하지만, 글 쓰는 인간은 생각하는 인간이다. 생각하는 인간이 바로 자율적 인간이다.
자율이란 무엇인가. 자기 삶에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능력이다. 루소는 “자유란 스스로 법을 정하고
그 법에 복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루소의 자유를 우리의 자율로 바꿔도 무방할 것이다. 글쓰기와 자율적
인간이라니 ― 목표와 기대가 너무 크고 높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자율적 인간을 꿈꾸지 않는다면,
우리가 자율적 인간들의 열린 공동체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바라 마지않는 ‘지금과는 다른 미래’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왜 글을 써야 하는가’ (이문재)
'나를 위한 글쓰기' 강좌(1)―연재를 시작하며(<녹색평론> 144호)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