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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6; 7-24. 떠나는 것이 유익이라. 2019. 7. 14.
1. Time To Say Goodbye. 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혹시 아십니까?
이 노래가사에 오늘 나눌 말씀의 기승전결이 다 들어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제 안녕이라 말할 때가 되었어요. 당신은 내게서 모든 마음을 앗아갔어요.
그리고 그 마음에 사랑의 빛을 퍼부었어요. 길가에서 당신이 찾아 낸 그 빛을 말이죠.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당신과 함께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곳으로
이제 당신과 함께 돛을 달고 나아가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다까지도 말 이예요.
당신이 멀리 떠나 있을 때 난 수평선을 꿈속에서 그려봅니다. 그러면 할 말을 잃게 되지요.
물론 난 당신이 나와 같이 있음을 알아요. 나와 같이 있다는 것을요.
그대, 나의 달님인 그대, 당신은 나와 같이 있어요. 나의 태양, 당신은 나와 같이 있어요.
나와 같이! 나와 같이! 나와 같이!
이제 안녕이라 말할 때가 되었어요.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당신과 함께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곳으로 이제 난, 난 당신과 항해하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다까지도 말 이예요.
난 당신과 같이 그 바다를 헤쳐 나갈 거예요. 당신과 같이 가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가로질러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다로
난 당신과 같이 그 바다를 헤쳐 나갈 거예요. 당신과 같이 가렵니다. 당신과 같이
이 노래는 앞을 보지 못하는 어려움을 딛고 세계 최고의 팝페라 가수인 안드리아 보칠리의 히트 곡 Time to say goodbye입니다. 그런데 영국 출신의 뮤지컬 배우이며 오페라의 유령의 주인공인 디바였던 사라 브라이트만이 당시 독일의 세계 라이트급 참피언인 헨리 마스케로부터 자신의 은퇴경기의 오프닝 곡으로 불러줄 것을 의뢰받았습니다. 동독출신으로서 88 서울 올림픽 권투 금메달리스트인 헨리 마스케(Henry Maske, 1964-)는 통일 독일의 양 진영을 화합으로 이끈 국민적 영웅이었습니다. 곧이어 그는 세계 라이트헤비급 프로 챔피언이 되었으며 10차 방어전까지 성공하며 프로 통산 30전 30승 12KO라는 전승을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996년 11월 17일 tv로 2천 만 명 이상이 시청하고 2만 2천명 이상이 직접 관람하는 독일의 영웅 헨리 마스케의 은퇴 경기가 있던 날입니다. 그런데 은퇴 시합을 하는 날 사라 브라이트만은 안드레아 보칠리와 함께 2만 2천여명의 관중과 2천만명 이상이 시청하는 tv 시청자 앞에서 처음으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공개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날 헨리 마스케는 은퇴경기에서 판정패를 당합니다. 그의 프로 첫 패배요, 동시에 프로 마지막 경기였습니다. 너무나도 아쉬운 마음에 그가 링 위에서 좀처럼 내려오지 못할 때, 바로 그 때 다시 타임 투 세이 굿바이가 울리어 퍼졌습니다. 2만2천여 명의 관중이 약속이라도 한 듯이 일제히 일어나 Time To Say Goodbye를 합창했습니다. tv의 시청자들이 이 것을 보았습니다. 이 것은 상처투성이로 링에서 내려오는 그들의 영웅을 떠나보내는 애정 어린 마음의 노래였습니다. time to say goodbye를 부르는데 체육관 관중들도 기립하여 함께 불러 눈물과 감동의 도가니가 되었고 이를 지켜보는 TV 시청자들도 감명 받아 전 유럽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원곡은 영화 미션에서 사용되었었고 이 곡은 2000년 월드시리즈 폐막식을 비롯한 많은 세레모니에서 불리어졌습니다. 이제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되었지요.
여러분, 사람은 누구라도 삶의 무대에서 내려올 때가 있습니다. 떠 날때가 있습니다. 머물던 자리에서 물러나며 Time To Say Goodbye, 이제 안녕이라고 말할 시간이네요. 작별을 고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지 않는데 있습니다. 떠나보내야 할 때 떠나보내지 못하는 데에 있습니다. 빛나고 아름다운 실력과 경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내려와야 할 때 내려오지 못해서 결국 마지막이 초라하고 슬픈 결과로 남는 경우를 역사 속에서 봅니다. 이는 정치, 경제, 문화 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그리고 신앙의 영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 입니다. 떠나지 못하면서 대부분 남아 있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 말을 하지만, 실상은 내 자신의 욕망과 이익이 걸려 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런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하라는 말씀이 여러 곳에서 등장을 합니다. 등장하는 내용의 대부분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백성들을 위해서 말씀하시는 내용이지만 더러는 어려움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1-1. 아론의 이야기입니다. 모세와 아론은 4살 차이의 형제지간입니다. 출 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을 40년간 이끌었던 그들이 약속의 땅 가나안 목전인 호르산에 도착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아론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민20:22-28입니다. 이스라엘 자손 곧 온 회중이 가데스를 떠나 호르 산에 이르렀더니 여호와께서 에돔 땅 변경 호르 산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말씀하시니라 이르시되 아론은 그 조상들에게로 돌아가고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준 땅에는 들어가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므리바 물에서 내 말을 거역한 까닭이니라. 너는 아론과 그의 아들 엘르아살을 데리고 호르 산에 올라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라. 아론은 거기서 죽어 그 조상에게로 돌아가리라. 모세가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들과 함께 회중의 목전에서 호르 산에 오르니라. 모세가 아론의 옷을 벗겨 그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입히매 아론이 그 산 꼭대기에서 죽으니라. 모세와 엘르아살이 산에서 내려오니. 타임 투 세이 굿바이 할 때, 안녕이라고 말할 때라는 것입니다. 이는 갈증과 목마름으로 부르짖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므리바의 반석 사건을 상기시키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민33;38.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대로 자신의 옷을 아들 엘르아살에게 줌으로써 작별을 고할 때 아론의 나이 123세였습니다. 출애굽 제 40년째 되는 날입니다.
1-2. 모세의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40년 되는 해 모세 또한 여호수아에게 그 자리를 맡기고 아론처럼 작별을 해야만 했습니다. 신34;7, 그의 나이 120세였으나 눈은 조금도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했습니다. 남아서 충분히 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고 지도할 수 있는 힘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충분하다고 enough 하셨고, 모세는 그 뜻에 순종했습니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이제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되었다고 순종을 했습니다. 이 것이 남아있는 이들을 위한 모세의 마지막 최선의 배려요, 사랑이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을 보면서 너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 결과 그는 약 2 천 여 년이 지난 어느 날 변화 산에서 예수님의 떠나심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사람으로 자리하게 됩니다. 이렇게 타임 투 세이 굿바이 할 때가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이제 떠나야 할 때가 되었다고 타임 투 세이 굿바이를 합니다.
2. 예수님의 떠남의 이유입니다. 왜 떠날까요? 그 이유의 대 명제는 너희를 위하여 입니다. 오늘 본문은 너무나 잘 아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타임 투 세이 굿바이가 나와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명제가 분명합니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위하여 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나를 위해서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보냄이 나를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볼 수 있게 하셨고, 들을 수 있게 하셨고,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당신의 떠남 역시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요 16:7 상반 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위하여, 유익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오심도 나를 위한 것이고 예수님의 떠남도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떠남이 무슨 유익이고 무엇을 위하여 예수님의 떠남일까요?
2-1. 떠나지 않으면 보혜사 성령이 오지 않습니다. 어째서 주님의 떠나심이 제자들에게, 오늘 나와 우리들에게 유익이 됩니까? 계속 주님이 계시고, 계속 주님이 시각적으로 보여주시고 계속 주님을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으면 이것 자체가 확실한 증거가 됩니다. 이러한 생각이 대부분 우리의 보편적 생각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주님께서 계속해서 가시적 존재로 머무시는 한 보혜사 성령께서 오실 수 없기 때문에 떠나신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7절 하반 절,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혜사 성령을 보내리니. 물론 성령님은 처음 창조 사역에도 성 삼위 하나님으로 참여를 했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영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보혜사 성령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무엇에서 시작이 될까요?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하여 시작을 합니다. 그래서 보고, 듣고, 말하고 느끼고 경험함으로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전하는 사람이 없으면 듣지도 못하고 믿지도 못한다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합니다. 복음서에 나오는 모든 기적과 치유와 가르침과 선포가 주님의 사역입니다. 천국에서의 저와 여러분을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 시작이 눈에 보이고 귀로 듣고, 몸으로 느끼고 경험함으로 시작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작이 되고 신앙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보이는 것과 듣는 것과 만지고 느끼는 것에 고정이 되고 이런 것을 떠나지 않으면 신앙은 자라지 않습니다. 더 큰 믿음이 되지 않습니다. 매일 그 자리에 머물게 됩니다.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것에 눈을 감을 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볼 수 있고, 말하는 것에 입술을 닫을 때에 말 할 수 있는 더 깊은 내용이 나오고, 느끼고 만지는 경험에서 떠 날 때에 이전에 알지 못했던 감각과 감정과 접촉의 위대함을 알게 됩니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 가사처럼 당신은 나와 같이 있어요. 나와 같이 있어요. 나와 같이. 그런데 이제 보이는 가시적인 주님이 떠나셔야 이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 보이는 것이 다 좋은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잠시 솔로몬의 이야기를 말씀드립니다.
솔로몬의 삶은 성전을 짓기 전과 성전을 완공하고 조금 이 후로 극명하게 달라집니다. 성전건축 이전에는 하나님과 선친 다윗 앞에서 신실했습니다. 그런데 성전 건축 이후에는 그렇게 하지 아니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도리어 반대이거나 더욱 신실하게 더욱 더 하나님과 다윗 앞에서 잘 섬기고 잘 다스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것이 안 됩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솔로몬이 눈에 보이는 것에 고착되고, 눈에 보이는 것에 안주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보이는 성전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솔로몬과 더불어 머무실 마음의 공간이 없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눈에 보이고 듣고 만지고 느끼는 것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제자들은 이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고, 이 내용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눈으로 보이고, 주님께서 손으로 느껴지고, 주님께서 만져지는 사람의 몸으로 존재하시는 동안 주님을 제대로 알고, 주님을 제대로 믿었던 사람이 한명도 없었습니다. 오늘 주님의 제자들조차 오해를 했고 심지어 믿지도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 있습니다. 현상만 보고 감동을 하고 감탄을 하는 것으로 끝입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말씀대로 주님이 떠나신 이후에 보혜사 성령님이 오신 이후는 어떻습니까?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주님을 바로 믿고, 주님을 제대로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때에는 주님을 배반했던 제자들이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없었던 때에는 그 주님을 위하여 목숨까지 내어놓는 사람들로 바뀌었습니다. 주님을 눈으로 볼 수 있었던 때에는 공의를 외치면서 불과 유황불을 이야기 했지만 주님을 볼 수 없었던 때에는 사랑과 은혜를 말하는 사람으로 바뀌었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놀라운 반전이고, 얼마나 엄청난 역설입니까? 그런데 이것이 우리의 생각과 눈에 역설이지만 주님에게는 이것이 순리이고 진리입니다. 여러분, 참된 진리와 영원한 진리는 가시적인 것을 넘어설 때에 비로소 보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삶의 현장이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보여 지고 만지고 느끼고 듣는 것에 모든 것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 현상 가운데 저와 여러분이 살아갑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세상을 살아가며, 보여 지는 현상을 통하여 이상과 비전을 그려가는 동안 우리는 이것을 지속적으로 기억을 하고 지속적으로 잊으면 아니 됩니다. 왜냐하면 이 떠남의 출발이 나를 위한 것이고, 이 떠남의 출발이 모든 이웃을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오늘 주님의 떠나심에 있었듯이 내 자신과 누군가의 성장을 위하여 떠날 수 있는 믿음의 용기와 사랑의 배려와 이루실 것에 대한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것은 주님의 떠남과 함께 보혜사 성령이 우리 가운데 오시고 오신 보혜사 성령의 조명함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가시적으로 나타나지 않는 현실에서 성령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알게 됩니다. 성령의 이끄심으로 내가 이 어두운 세상에서 한 걸음 한 발을 뛰어 놓게 되고 성령의 조명하심으로 나의 비전이 보이게 됩니다. 그래서 13절에,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진리의 성령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리니 진리의 성령이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리라. 장래 일을 말하는 보혜사 성령이 주님의 떠나심으로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진리를 잊지 않고 기억하면서 주님이 보내신 성령의 충만함과 조명으로 살아가시는 그래서 나를 위하여 행하신 주의 은혜가 실로 아름답게 나타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2. 유익은 떠남으로 변화의 시작이 됩니다. 성경말씀의 내용은 떠남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떠남으로 더 나은 결과에대한시작이 되고 떠남으로 위대한 결과를 얻습니다. 에덴에서 실낙원하면서부터 시작된 인간의 아픔의 역사는 아브라함의 떠남을 통하여 회복이라는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21세기경,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르는 동쪽으로는 유프라테스강, 서쪽으로는 티그리스강 사이의 비옥한 두 강 사이에 있는 삼각주 메소포타미아에 위치한 최고의 선진 국제도시였습니다. 그런데 이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음성을 듣습니다. 그때 느닷없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는지 어떠한 실마리도 제공하지 않습니다. 단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집과 고향을 버리고 떠나라고 말씀하십니다. 창 12:1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래서 아브람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 아버지 데라와 함께 전 가족을 데리고 특별히 조카 롯을 데리고 우르를 떠나 하란에 도착을 했습니다. 하란은 현재 터키와 시리아 국경지대에 있는 산 우르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곳에서 우르에서의 삶 못지않은 부유한 생활을 누렸습니다. 하지만 아버지 데라가 죽자 아브라함은 심각한 영적인 위기에 봉착을 했습니다. 이때 그의 나이 75세였습니다. 그때까지 아버지의 그늘 아래에서 거했던 아브라함은 공허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처음 주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합니다. 누리고 있던 현재로부터 나오라고 촉구하신 말씀을 되새겼습니다. 여러분, 새로운 세계와 삶에 대한 비전이 없으면 어떻게 될까요? 그래서 행동으로 드러나야지요? 하지만. 새로운 변화를 위한 바램과 새로운 변화에 대한 불확실한 두려움 사이에는 늘 긴장이 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 때문에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기도 전에 마음을 접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말들은 아브라함이 가진 안정적인 기득권입니다. 새로운 세계가 아니어도 됩니다. 이만하면이 적용될 수 있는 공간과 울타리입니다. 특별히 고대 사회에서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는 행동은 곧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고 사서 고생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살인과 중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 내리는 형벌이 바로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문화의 사회로 부터의 추방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이런 엄청난 요구를 아브라함에게 하신 걸까요? 그 이유를 하나님은 떠남과 동시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창 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그런데 창12;1이 히브리어 본문을 해석하면서 생략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가라. 걸으라”는 לֶךְ(레크) 다음에 연이어 적혀있는 “너를 위해서”라는 לְךָ֛(르카)가 있습니다. 이를 잘 다시 번역하면,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너 자신을 위하여 가라 는 말씀이 됩니다. 너를 위하여!!!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듯이, 우리가 일생을 통하여 일구어 놓은 이익과 기득권을 버리고 하나님과 동행할 것을 말씀하십니다.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것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이 말씀의 요청은 하나님을 위해서가 아니라, 궁극적으로 우리와 내 자신을 위해서 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종종 이익을 추구하는 것 때문에,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쉽게 상실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이익에 대한 떠남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기 전에 진실로 나 자신을 위한 것이며, 나 자신의 삶의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찾아가는 출발이 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란을 떠나고 가나안 땅을 떠나고 애굽을 떠나고 롯을 떠나고, 요단 온 들과 에덴동산과 같은 곳과 애굽의 나일 강의 주변 땅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위하여 준비하시고 예비해 놓으신 복을 받았습니다. 이 것이 유익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여러분, 아브라함만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100배의 수확을 얻고, 브엘셀바, 비어 쉐바를 얻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그렇습니다. 떠남으로 광야에서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사다리에 천사가 오르락 내리락 합니다. 20년 만에 3떼로 나누어도 아니 될 만큼의 부를 얻습니다. 거기서도 떠납니다. 그래서 가문을 만들고 12족장을 이룹니다. 야곱의 아들, 요셉이 약관 30세에 세계를 장악하고 영향력을 나타냈던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하나님의 경륜 속에서 떠남입니다. 그러면 족장만 그렇습니까? 엘리야와 엘리사, 그리고 다니엘과 에스겔과 모든 지도자들이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이 떠남으로 시작 된 변화의 결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의 모든 것에서 떠난 여러분들에게 너를 위하여 걸으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지는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삶의 아픔과 고통에서 해방이 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그러면 떠남의 새로운 시작과 인생 여정이 무엇으로 인도함을 받고 조명을 받고 길이 열려질까요? 떠남의 여정 속에 성령님이 계십니다. 성령님이 함께 하십니다. 여러분, 변화, 진정한 변화를 바란다면, 이익으로부터 떠남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합니다. 신앙인이든지 아니든지 마찬가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마찬가지입니다. 보혜사성령이 함께 해야 고정 관념과 편견에서 떠나게 됩니다. 여러분, 고정관념과 편견이 무엇입니까? 고정관념의 사전적 의미는 마음속에 굳어 있어 변하지 않는 생각과 잘 변하지 않는 행동을 주로 결정하는 확고한 의식이나 관념입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의 마음속에 굳게 자리를 잡고 있어서 늘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어떠한 상황의 변화에도 흔들리지 않는 생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편견은 한쪽으로 치우친 공정하지 못한 생각이나 견해와 어떤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사실상의 근거 없이 지니고 있는 완고한 의견을 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은 오감과 직간접 경험을 통하여 형성되는 개인의 가치관입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에 의해 생긴 가치관이 모든 사건과 사람과 일어 날 일을 판단하는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고정관념과 편견을 버리고, 뛰어넘지 못하면 떠남이 쉽게 되지 않습니다. 고정 관념과 편견을 뛰어 넘지 못하면 성령의 동행과 조명과 인도함과 이끄심을 믿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늘날 세상의 사람들조차도 이 사회 속에 존재하는 교회를 하나같이 교회다움을 상실했다고 진단을 합니다. 성도의 성도다움을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단의 인식에도 불구하고 지난 수 십 년간 다움의 상실을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교회와 교우들의 이익 됨을 버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득권을 누리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기득권과 이익사회와 공동사회의 이익을 내려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려놓으면 죽고, 끝이라는 고정관념과 편견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가 염려하고 걱정하는 삶에서 타임 투 세이 굿바이라고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이제 안녕이라고 말할 때가 아닌가요?
이제 안녕이라 말할 때가 되었어요. 타임 투 세이 굿바이. 지금껏 내가 한 번도 가보지 못했고 당신과 함께 겪어보지 못했던 그런 곳으로 이제 난, 난 당신과 항해하렵니다.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바다까지도 말 이예요. 난 당신과 같이 그 바다를 헤쳐 나갈 거예요. 이런 고백과 함께 보내신 성령과 동행하고 항해하는 것입니다. 세상 바다를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성령의 배를 타고 세상과 인생의 바다를 건너가는 것입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까지 가는 것입니다. 이 것이 나를 위해서 떠나신 주님의 뜻이고, 나를 위해서 보내어 주신 성령의 임재와 역할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보혜사 성령님의 임하심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새로운 시작이 되었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 이었습니다. 제자들 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이 나에게 까지 전하여 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떠나심으로 인하여 오신 성령님과의 올바른 동행은 교회의 교회됨과 성도의 성도됨입니다. 성령님과의 올바른 동행입니다. 조명을 받고 인도함을 받고 이끌림을 받는 것입니다. 이 땅의 현상을 좇지 않고, 현상에 고정된 종교인에서 벗어나서 성령님과 더불어 주님의 참된 진리를 살아내는 그리스도인, 성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안에 내재하셔서 주님과 생각을 나누고, 마음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솔로몬처럼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안주하지 않고 참된 진리와 영원한 진리를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출발이 주님의 떠나심에 있었듯이, 우리 또한 본토, 친척, 아비 집이라는 이익 됨의 자리를 떠날 수 있는 믿음의 용기와 사랑의 배려와 이루심에 대한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서 함께 하신 성령께서 떠남 때문에 생긴 공간과 시간을 채우시도록 해야 합니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에서 부른 것처럼 당신과 같이 가렵니다. 당신과 같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바다로!!! 그러면 선제적으로 나를 성령께서 일을 하십니다. 무엇에 대하여 일을 하십니까?
8-11.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니라.
24.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 하였으나 이제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 그러니까? 죄에 대하여는 피할 모든 길을 주시고, 의에 대하여는 십자가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을 경험하게하시고, 심판에 대하여는 구원하심을 받은 사람으로 살아가게 하시고, 그리고 예수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든 것에 기쁨이 충만케 되는 놀라운 일을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여정 때문에 고민이 되시고 두렵고 걱정이 되십니까? 나를 위하여 떠나시는 주님이 책임지십니다. 그리고 나를 위하여 나에게 오신 보혜사 성령께서 함께하시고 이끄시고 안내 하십니다. 그 보혜사 성령 앞에 임마누엘 되시는 주의 이름으로 구하면 모든 기쁨이 충만케 되는 놀라운 기적과 은혜와 복을 받습니다. 이런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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