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저 젖을 저으면 뻐터가 되고 코를 비틀면 피가 나는 것 같이 노를 격동하면 다툼이 남이니라
오늘의 역사
① 한국 최초의 한자전(漢字典) 발행(1909) : 1906년(광무 3년)에 탈고하여 1909년 이날 서울 동서관(東書館)에서 발행하였다.
16,000자를 수록한 후 재판을 시작하여 5,000부씩 20판을 거듭 중판하였다.
② 러-일 비밀협약조인(1907) : 만주의 이권을 양국이 갈라 일본은 한국을, 러시아는 외몽고를 강점키로 함.
러․일 전쟁 전후 4차례에 걸쳐 맺어진 협약이며, 1907년에 제1회, 1910년에 제2회(미국의 만주에 대한 야망에 대항), 1912년 제3회(세력권을 몽고와 중국서부까지 확대), 1916년에 제4회(제3국의 중국지배 방지) 협약이 있었으나 이들 협약은 1917년 러시아 혁명에 의해 모두 파기되었다.
③ 백건우-윤정희 부부 피랍 중 탈출(1977) : 파리의 이응로 화백집에서 올린 결혼식 당시의 윤정희, 백건우, 박인경씨(왼쪽부터 사진.....).
1977년 7월초, 재불 피아니스트 백건우는 박인경을 통해 스위스 취리히의 한 부호가 그의 연주를 듣고 싶어한다는 제의를 받는다. 박인경은 고 이응로 화백의 두번째 아내로, 이응로와 함께 프랑스에서 생활하다가 1967년 동백림 사건으로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던 인물이다.
백건우는 한 해 전, 이응로의 주례로 영화배우 윤정희와 결혼식을 올린 바 있어 평소 이.박 부부와 가깝게 지내던 사이였다.
백건우는 윤정희와 5개월된 딸, 그리고 박씨와 함께 1977년 7월29일 취리히행 비행기에 올랐다.
공항에는 부호의 여비서라는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여자는 부호의 양친이 유고 자그레브에 있다며 연주지 변경을 요청했다.
공산국가라 내심 찜찜했으나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백건우 가족과 박씨가 찾아간 곳은 한적한 시골에 있는 3층 집. 있어야 할 부호는 없고 동양인 남자 만이 보이자 백건우는 신변에 위협을 느꼈다.
웨이트, 웨이트 소리를 뒤로한 채 타고온 택시를 타고 유고 주재 미국 영사관으로 달렸다.
직원의 안내로 호텔에 투숙했으나 이튿날 아침 객실 문앞에는 북한사람으로 보이는 3명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영사관 직원의 도움으로 자그레브 공항을 벗어나 파리 오를리 공항에 내린 것은 30일 정오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이 사건은 박씨가 3차례에 걸친 파리 주재 한국 대사관의 조사요구에 응하지 않아 아직도 미완이다.
④ 영광 원전 노동자 무뇌아 유산(1989) : 89년 영광원전 노동자였던 김익성씨의 2차례 무뇌아 출산 등 원전 가동으로 인한 피해는 그치지 않고 있다.
핵발전소 사고가 다른 사고 보다 강조되는 이유는 방사능 때문이다.
방사능은 맛도 냄새도 색깔도 느낄 수 없는 데 반해 그것이 인체에 미치는 영향은 치명적이며 체내에 흡입되면 암이나 백혈병, 기형아 등을 유발해서 대대손손 영향을 미치는 무서운 물질이다.
⑤ 전두환, 7․30교육개혁조치 발표(1980) : 7월 30일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학교 내 보충수업 이외의 모든 과외교습을 금지하는 내용의 7․30교육개혁조치가 발표되었다.
과외교습의 대표적인 문제점은 학생들의 심리적 압박감과 과중한 학습시간으로 인해 심신의 발달이 저해된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폐단을 줄이기 위해 정부는 1969년 중학교 입학시험을 폐지하고 1974년 고교평준화정책을 도입하는 등 입시제도를 고쳐왔다. 그러나 이것은 다시 대학입학에 대비한 고등학생들의 과외로 모양을 바꾸면서, 1970년대말에는 '과외망국론'이 거론될 정도로 과열과외가 계속되었다.
이에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는 대학입시에 고교 내신제 도입, 대학본고사 폐지, 대학 졸업정원제 도입 등을 내용으로 하는 '교육정상화 및 과열과외 해소방안'을 발표했다.
그러나 사회 일각에서 과외교육 금지의 정당성과 실효성에 대한 문제제기가 계속되면서 1989년 6월 이후 과외교육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으며, 2000년 4월 27일 헌법재판소에서 과외금지조항 위헌결정을 내림으로써 다시 과외교육이 전면 허용되었다.
⑥ 이승엽 일파 간첩혐의로 기소(1953) : 7월 30일 북한 당국은 남조선노동당 계열을 비롯한 이승엽․임화․이강국 등 12명을 기소했다.
기소장에는 이들이 미제국주의를 위해 간첩행위를 했으며 남반부 민주역량을 파괴하고 약화시키는 음모를 꾸미는 것과 동시에 테러․학살 행위를 자행하고 공화국 정권 전복을 위해 무장폭동 행위를 했다고 적혀 있었다.
남로당 출신에 대한 숙청은 1952년 12월 15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이 '당의 조직적․사상적 강화는 우리 승리의 기초'라는 보고를 통해 당의 강화와 종파주의의 청산을 강조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승엽일파간첩사건'으로 체포된 자들 중 이원조가 징역 12년형, 윤순달이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이승엽을 비롯한 나머지 10명은 모두 사형을 선고받았다.
⑦ 죽산 조봉암(竹山 曺奉岩)의 사형판결(1959) : 7월30일 서울구치소.
대법원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직후 죽산 조봉암은 가족들과 진보당 관계자들과의 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비록 법에 의해 죽음의 몸이 되었다고 하여도 나의 조국 대한민국에 대한 충성은 스스로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밝힙니다.
내 나이 딱 환갑입니다.
여러분은 나가더라도 내 구명운동은 절대로 하지 마세요.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여 죽고, 침실에서 자다가 자는 듯이 죽는 사람도 있는데 과히 상심하지 마세요.』
그는 다음날 사형집행됐다.
⇨ 7월 31일
⑧ 미국 우주선 서울 도착(1962) : 존 글렌(John Glenn)을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사로 만들어 준 유인인공위성 '프렌드십(friendship)
7호 !
1962년 오늘 사흘 동안의 전시를 위해 우리 나라에 도착했다.
'프렌드십 7호는 세계 주요 도시를 순회하다 24번째로 우리 나라에 왔다.
전시장 개막식에는 버거 주한 미국 대사 등 국내외 요인들이 참석했다.
'프렌드십 7호를 보기 위한 시민들로 서울 시민회관은 전시 기간에 상황을 급반전시켜가며 여러 쟁의를 승리로 미국의 첫 유인인공위성 '프렌십 7호는 1962년 2월 20일에 머큐리계획에 따라 존 글렌을 태우고 4시간 56분에 걸쳐 지구궤도를 3바퀴 선회함으로써 미국 최초의 우주비행에 성공했다.
⑨ ‘신문윤리 실천요강’ 제정(1961) : ‘베이징(北京) 쇼크.’
1989년 중국 베이징에서 민주화투쟁인 톈안먼(天安門) 사태가 발생했을 때 미국 언론에 이런 표현이 등장했다.
그 쇼크는 민주화 열기보다 그것을 탄압하는 중국 정부의 비민주적 집요함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한 미국 방송의 베이징 특파원은 중국 계엄군의 무차별 살상 진압에 대한 증언을 1분 30초짜리 비디오테이프에 녹화해 인공위성을 통해 미국 본사로 송고했다.
며칠 뒤 중국 정부는 그 테이프에 등장했던 시민을 전부 체포했다.
실제 방송에 나오지 않은 녹화 내용까지 중간에서 검열한 결과였다.
그때서야 미국 언론은 ‘취재원 보호’의 절박성을 인식했다.
증언자의 얼굴을 모자이크 처리했고 이름은 익명 처리했다.
취재원이 보호되지 않으면 이처럼 언론의 자유도 보장되지 않는다.
1961년 7월 30일 한국신문편집인협회는 ‘신문윤리 실천요강’을 제정했다.
1996년 수정 작업을 거친 이 실천요강 제5조는 ‘취재원 보호 의무’를 명시하고 있다.
“취재원의 안전이 위태롭거나 부당하게 불이익을 받을 위험이 있는 경우 그 신원을 밝혀서는 안 된다.”
실천요강의 모법(母法)격인 신문윤리강령은 이보다 4년 전인 1957년 처음 만들어졌다.
그 제1조는 “우리 언론인은 언론의 자유가 국민의 알권리를 실현하기 위해 언론인에게 주어진 으뜸가는 권리라는 신념에서 대내외적인 모든 침해, 압력, 제한으로부터 이 자유를 지킬 것을 다짐한다”고 적고 있다.
한국의 모든 신문은 매일 ‘본지는 신문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을 준수한다’고 적으며 이 다짐을 반복한다.
평소 무심코 보고 넘겼던 이 문구에 담긴 엄중함을 요즘 절실히 느끼곤 한다.
검찰이 월간 신동아가 6, 7월호에 보도한 이른바 ‘최태민 보고서’의 출처를 확인하겠다는 이유로 동아일보사 전산실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을 시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압수수색영장을 앞세운 검찰의 공권력 발동 앞에 굴복할 수는 없다.
진정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검찰의 법 논리 못지않게 ‘언론 자유’를 위한 취재원 보호도 그만큼 중요한 가치라고 믿는다.
늘 만나던 ‘신문윤리강령 및 그 실천요강 준수’에 대한 다짐이 오늘 아침 신문에서는 새롭게 다가올 것 같다.
(부형권 기자 bookum90@donga.com.2007)
⑩ 그린벨트 첫 지정(1971) : 개발제한구역(그린벨트)은 국내 도시의 무분별한 팽창과 토지 투기를 막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환경보전과 관련한 정책 중에서 세계적으로 비슷한 사례를 찾기 힘든, 획기적 정책이라고 국내외 학자가 지적하기도 한다.
생산녹지와 차단녹지로 구분되는데 건축물의 신축·증축, 용도변경, 토지의 형질변경 및 토지분할 행위를 원칙적으로 제한한다.
정부는 1971년 7월 30일 그린벨트를 처음 지정했다.
서울 종로구 세종로 사거리에서 반경 15km를 따라 폭 2∼10km 지역의 454.2km²가 대상이었다.
문제는 시행방식이었다.
사유재산권 침해 소지가 있는데도 공식 발표를 하지 않고 관보에만 실었다.
근거는 도시계획법 시행규칙이었다.
이 사실이 나중에 알려져 땅값이 폭락하자 토지 소유자들이 반발했다.
서슬 퍼런 박정희 대통령 시절이라 집단행동이나 법적 대응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듬해 8월에는 서울 중심부에서 반경 30km 이내의 지역까지 늘었다.
수도권 위성도시 6곳을 포함했다.
밀실에서 도입한 그린벨트는 부산 대구 광주로 이어져 1977년 4월 18일 전남 여수시 일대까지 모두 8차례에 걸쳐 확대됐다.
전 국토의 5.4%에 해당한다.
김대중 정부는 국토의 효율적 이용과 사유재산권 보장을 명분으로 그린벨트를 풀기 시작했다.
지방자치단체는 택지와 공장용지 확대가 꼭 필요하다고 강조할 때마다 도시를 감싸는 그린벨트를 걸림돌로 거론한다.
국토해양부의 건설교통 통계연보를 보면 2006년 말 현재 그린벨트 지정 구역은 3980km²이다.
수도권이 37%(1472.9km²)를 차지한다.
참고로 미국에는 그린벨트라는 이름의 도시가 있다.
메릴랜드 주에 인구는 2만1000명 정도.
연방정부가 중산층을 위한 계획도시이자 워싱턴의 위성도시로 1935년부터 건설했다.
1937년에 정식으로 시(市)가 됐다.
한국의 그린벨트는 도시 팽창을 막기 위한 제도였지만, 미국의 그린벨트는 도시 확장의 결과로 들어선 공간이다.
이름은 같지만 성격이 전혀 반대라는 점이 눈길을 끈다.
(송상근 기자 songmoon@donga.com.2008)
⑪ 유럽안보협력회의 개최(1975) : 미국과 소련을 포함한 35개 나라의 정상들이 1975년 오늘 핀란드의 수도 헬싱키에 모였다.
유럽안보협력회의(Conference on Security and Cooperation in Europe)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냉전시대 양 진영의 평화공존 모색이 이 회의의 목적!
포드 미국 대통령은 동유럽 공산국가의 인권유린에 대해 거론했다.
이에 대해 브레즈네프 소련공산당 서기장은 인권보다 내정간섭이 더 큰 문제라고 응수한다.
각 국 정상들은 사흘 동안의 회의 끝에 '상호간의 국경 존중'과 '내정과 외교정책 불간섭'등 10개 원칙을 담은 이른바 '헬싱키 선언'에 서명한다.
헬싱키 선언을 계기로 냉전의 당사국들 사이의 긴장완화와 협력의 전망이 밝아졌다.
⑫ 중국 공산당 창당(1921) : 주도자는 진독수(1879-1942).
당시 27세의 모택동․23세의 주은래․16세의 등소평이 급진 강성파로 참여했다.
⑬ 닉슨 측근, 워터게이트사건 청문회 출두(1973) : 워터게이트 사건에 대한 미국 상원의 청문회가 진행 중이던 1973년 오늘 !
닉슨 대통령의 최측근 두 사람이 증언대에 선다.
백악관 비서실장을 지낸 봅 홀드맨(Bob Haldeman)과 내무담당 수석 보좌관을 지낸 존 에를리히맨(John Ehrlichman) !
둘은 워터게이트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의혹이 일자 석 달 전인 4월 30일 공직에서 사임했었다.
홀드맨과 에를리히맨은 청문회에서 의혹을 전면 부인한다.
이 때만 해도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를 녹음한 테이프가 공개되기 전이었다.
그러나 이 테이프가 이듬해인 1974년 7월 법정에 제출되면서 두 사람이 닉슨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CIA를 동원해 FBI의 조사를 방해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홀드맨과 에를리히맨의 재판은 1977년까지 계속되고 두 사람은 결국 감옥에 갇힌다.
1972년 6월 17일 미국 워싱턴D.C.의 워터게이트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사무실에서 괴한 5명이 도청장치를 설치하려다 발각되면서 불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미 정계에 일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8일 하야했다.
⑭ 세계 최초 문고본 펭귄북스 탄생(1935) : 런던의 젊은 출판업자 알렌 레인은 당대의 추리 소설가 아가사 크리스티 부부와 함께 열차 여행 중이었다.
그는 역 가판대에서 읽을 거리를 찾았다.
화보만 번드레한 잡지 아니 면 비싼 양장본, 빅토리아시대의 낡은 소설들 뿐이라 성에 차지 않았다.
순간, 그의 머릿 속에서 여행의 동반자 아가사 크리스 티 등 유명 작가들 얼굴이 스치면서 불빛이 반짝였다.
당시 인기 작가들 책은 비싼 양장본 뿐이었다.
그 책들을 좀더 싸게 만 든다면 어떨까?
그는 런던에 도착하자마 당시 인기 작가들의 판 권을 쥐고 있는 출판사들을 찾아가 문고본 판권을 따냈다.
''위엄이 넘치면서 소박한'' 문고본 이름을 놓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 했다.
처음부터 짐승 아니면 새를 등장시킬 생각이었다.
남극의 신사 펭귄이 떠올랐다.
마침내 ''펭귄 북스'' 1차분으로 아가사 크리스티의 ''스타일즈장의 괴사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 등 10권이 나왔다. 판매는 서점이 아니라 담배 가게나 대형 백화점에서 했다.
책 값은 당시 물가로 담배 한 갑 가격에 불과했다.
노임으로 치면 반나절 품삯이었다.
이듬해 이 시리즈 는 70권으로 불어날 정도로 대성공을 거뒀다. ''펭귄 북스'' 시리즈는 출범 1주년을 맞았을 때 300만권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펭귄 북스'' 출판사는 1938년부터 인류 고전만 엄선해서 새로 번역한 ''펭귄 클래식''을 시작했다.
2차대전이 끝나고 평화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넘치자 독서 인구가 늘어났다.
''펭귄 클래식''은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로 대성공을 거뒀다.
당시 ''오딧세이''는 무려 300만부나 팔렸다.
이로 인해 오늘날 전세계 영어사용자들이 애독하는 인류 고전 시리즈 ''펭귄 클래식''의 초석이 다져진 것.
현재 ''펭귄 클래식'' 은 고대 신화에서 20세기 걸작에 이르기까지 모두 1600종이나 된다(아듀 20세기에서 발췌).
⑮ 영국 광산법 제정(1900) : 1832년의 선거개혁법을 비롯하여 많은 개혁이 연속되었으나 그 과정에 결국 노동자층의 복리는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그들의 이익과 적대관계에 있는 부르주아계급의 욕심을 위한 결과가 되었다.
실상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법 예를 들어 공장법(1833)이나 광산법(1842) 등은 토리당의 제안 또는 지지에 의한 것이었다.
그나마 이러한 법령들은 노동자층의 복지증진에 별로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광산법에서는 소년의 지하 노동 금지 조항이 있었으나 실질적인 개선을 이루지 못했다.
⑯ 미국의 전설적 노조지도자 호파 실종(1975) : 미국의 전설적인 노조지도자 지미 호파(Jimmy Hoffa)가 1975년 오늘 실종된다.
호파는 미시간주 디트로이트 외곽의 브룸필드 힐스(Bloomfield Hills)에 있는 한 레스토랑 주차장에서 마지막으로 모습을 보인 뒤 행방불명됐다.
호파는 이 레스토랑에서 마피아 보스인 안토니 지아칼로네와 모종의 협상을 할 예정이었다.
경찰은 마피아의 소행일 것으로 추정했지만 단서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
이후 그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고 실종 8년 만인 1983년 미국 정부는 호파가 사망했다고 공식 선언한다.
호파는 1957년 미국 트럭운송노동조합의 위원장에 선출된 이후 강력한 카리스마와 능수능란한 협상력, 저돌성으로 이 조합을 회원이 200만 명에 이르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노동단체로 성장시켰다.
특히 파업을 방해하던 마피아를 아군으로 만들어 상황을 급반전시켜가며 여러 쟁의를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마피아와의 연계, 조합 공금 유용, 카지노 운영 등의 가려진 면이 드러나면서 1967년 기소돼 8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3년 뒤인 1970년 가석방된 호파는 노조를 재장악하기 위한 활동을 펴다 결국 실종과 함께 역사 속의 인물로 사라졌다.
그의 일대기는 잭 니콜슨이 주연한 1992년 개봉 영화 '호파'의 소재가 됐다.
⑰ 착색 영화 및 천연색 필름 발명(1928) : 미국인 사진 기술자․발명가․기업가․사진 건판 발명자, 조지 이스트맨 !
KODAK사는 최초의 칼라필름을 발명하여 사진에 칼라시대를 열어주었다.
30년대말에는 전자동 카메라인 코닥 슈퍼62를 개발하기도 하였다. 다시 1947년에는 그 자리에서 바로 영상을 확인할 수 있는 폴라로이드카메라가 개발되었다.
1960년대이후 이때까지 세계 카메라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독일의 기계식 카메라들이 전자화, 자동화를 앞세운 일본 카메라에 밀려 가기 시작했다.
1970년대에 들어서는 셔터만 누르면 촬영이 가능한 AF 컴팩트 카메라가 출현하여 사용자들이 좀더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⑱ 버지니아 의회 : 1619년 7월30일, 아메리카 동부 제임스 타운(James Town).
24명의 성인 남자가 회의를 갖기 위해 교회당에 모였다.
식민지에 인력을 송출한 버지니아 회사의 대표자와 성직자ㆍ거주민들이 참석한 회합의 명칭은 ‘버지니아 버지스 의회(Virginia House of Burgesses)’. 버지스란 세금을 낼 수 있는 자유농민.
유산자 계급을 뜻하는 프랑스어 부르주아와 어원을 공유하는 단어다.
축소판 웨스트민스터(영국 의회)격인 버지니아 의회는 미 대륙 최초의 민주주의 기구였다.
모국인 영국에서 절대왕권의 권력이 한창일 때 식민지에서 제한적이나마 의회 성격의 기구가 세워진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정치적 당근 차원이었다.
식민지 이주를 기피하고 그나마 남은 정착민들도 본국 귀환을 원하는 상황에서 제한적 자치권과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두번째는 경제적 이해관계 조정. 북미 식민지 최초의 경제호황을 가져온 작물인 담배 경작을 둘러싼 이주민 간의 갈등이 잦아지자 조정을 위한 기구가 필요했다.
버지니아 의회의 첫 안건도 본국 수출용 담배의 최저 가격 설정이었다.
여자 문제도 숨겨진 의제였다.
1619년 봄 여성 90명을 태운 배가 도착한 후 잎담배 60㎏에 해당하는 재산이 없어 아내를 사들이지 못한 남성들의 불만 해소와 사회적 성비 안정이 의회의 과제였다.
영국 왕실은 버지니아 의회의 민주주의가 본국에 파급될까 우려해 일시적으로 기능 정지 등의 명령을 내렸지만 버지니아 의회는 확대 발전하면서 독립전쟁에 이르기까지 제 역할을 다해냈다.
버지니아 의회의 성립은 미국인들이 공식적인 선조로 여기고 있는 메이플라워호 청교도의 도착보다 1년여를 앞선다.
출발점에서부터 돈과 권력ㆍ이성 문제가 미국 역사의 흐름을 결정했던 셈이다.
(2008.서경.인터넷한국일보)
⑲ 기타 오늘의 역사
1419 보헤미아의 개혁자 후스의 혁명 일어남
1592 임진란에 임금이 의주에 피난
1893 프랑스 샴조약 체결(프랑스 메콩강 동안 획득)
1903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제2회 대회서 맨셰비키(소수파)와 볼 셰비키(다수파)로 분열
1913 독일, 대군비(大軍備) 확장안 제정
1920 조선물산장려회(평양) 발기대회
1921 소련-터어키 평화조약 성립
1932 제10회 로스엔젤레스 올림픽 개막
1932 평양의 조만식 등, 민족주의 단체를 통합하여 건중회 설립
1934 부민관 기공
1938 랑군서 불교도와 회교도 충돌. 사상 3000여명
1940 범미상회담, 공동방위결의를 채택(아바나선언)
1946 전국학생연맹 결성. 위원장 이철승
1950 유엔 안보리, 한국구호결의안 채택
1952 국제적십자사, 세균전쟁금지협정 가결
1953 미국 상원, 한국부흥비 2억불 사용 승인
1953 역도산, 일본프로레슬링협회 결성
1958 아이슬란드 영해 12마일 확대 선언
1959 대법원, 조봉암 재심청구 기각 결정
1959 정부 한․일 회담의 무조건 재개 제의 : 8.1 일본측 수락.
1961 신문윤리 실천요강 채택
1963 필리핀-말레이지아-인도네시아 3개국 수뇌회담
1963 서울 FM방송주식회사 창립
1968 대법원, 동베를린 사건 및 민비연 사건 언도
1969 중부 지방에 큰 비
1971 전 일본항공 보잉 727기와 일본 공군 F-86기가 모리오카 상 공서 충돌
1971 서울외곽에 그린벨트 첫 지정
1975 헬싱키 회담 개막(유럽안전보장협력회의)
1978 황룡사 사리장치 조사
1978 알바니아 단원(斷援)에 반발 중국 비난
1978 비동맹회의, 베오그라드선언 채택
1981 감비아 좌익 군사쿠데타
1983 미국-중국, 무역분쟁 종식
1987 북한적십자 손성필 위원장, 대한적십자사에 수해위문문 발송
1992 경남 남해 참선대교 붕괴 2명 사망
1993 일본에 비자민 비공산 연립정권 수립 발표
1998 오부치 게이조 일본 제84대 총리에 선출
2000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 재선
2003 빌 뮬러 미국 야구 사상 최초로 한 경기서 좌우 연타석 만루 홈런 기록
2004 배우 출신 오기 지카게, 일본 여성 최초 참의원 의장에 선출
오늘의 인물
① 엄항섭(嚴恒燮 ; 1898.9.1 ~ 1962.7.30) ; 일제강점기에 활동한 독립운동가․정치가.
경기 여주(驪州)에서 출생했다.
보성고등보통학교와 중국 지장대학[芝江大學(지강대학)]을 졸업하였다.
1929년부터 청년운동에 참여, 재중국한인청년동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31년 안창호(安昌浩)․선우혁(鮮于赫) 등과 자활자위를 목적으로 하는 공평사운동(公平社運動)에 참여하였다.
1932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취임하여 한국독립당 선전부장이 된 이후 김구(金九)를 보좌하였다.
1948년 4월 20일 남북협상에 한국독립당대표단 5명과 함께 참가, 전조선정당사회단체대표자연석회의에 이어 개최된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에 참석한 15명의 한 사람으로 4월 30일 공동성명의 기초작업을 하였다.
1949년 6월 26일 김구가 피살될 때까지 그를 보좌하였고, 6․25 때 납북,
1962.7.30 평양서 서거.
1989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② 황금심(黃琴心 ; 1922 ~ 2001.7.30) : 한국의 대중가수.
본명 황금동
별칭 황마리아(세례명), 꾀꼬리의 여왕
부산 동래(東萊)에서 태어나 13살 때인 1934년 《외로운 가로등》으로 가요계에 데뷔한 뒤, 1938년 빅터레코드사에서 《알뜰한 당신》을 발표하면서 대중가수로 이름을 얻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0년대까지 4,000여 곡을 발표하며 가요계의 여왕, 꾀꼬리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18살 때 같은 레코드사 소속이었던 《타향살이》의 가수 고복수(高福壽)와 결혼해 최초의 스타 커플로 화제를 모으기도 하였으나 1958년 남편이 사업과 영화에 실패하면서 좌절을 겪기도 하였다. 1972년 고혈압으로 남편을 잃었고, 1996년부터 파킨슨병을 앓다가 2001년 7월 30일 사망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말부터 일본․만주․사할린섬으로 위문공연을 다니며 나라 잃은 동포들의 애환을 달랬고, 일제 말기에는 남편과 함께 '고복수와 그 악단'을 결성해 공연 활동을 펼치는 한편, 6․25전쟁 동안에도 남편과 위문단을 만들어 공연을 다녔다.
1990년 원로 연예인들의 모임인 상록회 최고위원을 지냈고, 대중문화에 기여한 공을 인정 받아 1992년 옥관문화훈장을 받았다.
대표적인 가요에는 《울산아가씨》《삼다도 소식》《뽕따러 가세》《사람팔자 몰라요》《한양낭군》《장희빈》《양산도 맘보》《화류춘몽》 등이 있다.
③ 메이지(明治 ; 1852 - 1912.7.30) : 일본 제122대 천황.
토쿠가와 바쿠후(德川幕府)를 타도하여 정권을 환수한 후 에도(江戶)를 토쿄(東京)로 개칭하여 천도(遷都),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정했다.
제국 헌법(흠정 헌법)을 발표, 최초 의회를 열고, 청일․노일 전쟁, 조약 개정, 한일 합방 등을 하여 강대한 군사적 제국주의 국가를 만들었다.
⇨7월 31일.
④ 헨리 포드(Henry Ford ; 1863.7.30 - 1947.4.7) : 미국의 자동차 왕.
포드는 자동차산업 발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미국의 실업가이다.
농촌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기계에 관심을 가졌다.
16세 때부터 기계제작소의 도제, 기계수리공 등을 거쳐 1888년부터 약 10년간 에디슨조명회사의 기술자로 일했다.
1903년 포드자동차회사를 설립했고, 1908년에는 이후 20년 가까이 전세계 차량 생산의 절반을 차지한 T형 포드를 선보였다.
1910년대초부터 부품의 표준화 및 일관작업공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판매가격을 낮출 수 있었다.
또한 노동자들의 최저임금을 타사의 2배로 하는 동시에 작업 시간을 줄여 생산비용을 낮추고 노동자들의 구매력을 높였다.
자동차문화를 일반화하는 데 기여했으나 1920년대말부터는 완고한 경영방침으로 시장변화에 대처하지 못하고 노동조합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해 어려움을 겪었다.
1936년 포드 재단을 설립해 자선활동에도 힘썼다.
⇨7월 19일.
⑤ 비스 마르크( Otto Eduard Leopold von Bismarck ; 1815.4.
1 ~ 1898.7.30) : ⇨4월 1일.
독일의 정치가.
독일 제국의 초대 총리로 독일 통일과 국가 발전에 공적이 있었다.
프로이센의 쇤하우젠에서 융커(지방귀족)의 아들로 태어나, 괴팅겐과 베를린 두 대학에서 공부한 후 프로이센의 관리가 되었다(1836-39).
베를린의 3월혁명(48) 때는 반혁명파로 활약했고 보수당 창립멤버의 한 사람이었다.
혁명 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독일연방의회에 프로이센 대표(51-59)로 임명되어 프랑크푸르트에 부임하였다.
그는 독일의 통일방식에 대해 오스트리아와의 협조를 주장하였지만 결국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을 동등하게 취급하지 않는다는 판단을 갖게 되어 오스트리아와 자주 대립하였다.
48년 전후에 보수적인 정치가에 불과하였던 그는 러시아 주재대사(59), 프랑스 주재대사(62)가 되면서 안목이 넓어졌고, 62년 국왕 빌헬름 1세가 군비확장 문제로 의회와 충돌하였을 때 프로이센 총리로 임명되었다.
취임 첫 연설에서 이른바 철혈정책(鐵血政策) 즉 현재의 큰 문제는 언론이나 다수결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과 피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하여 의회와 대립한 채 군비확장을 강행하였다.
결국 64년, 66년 전쟁에서 승리하여 북독일연방을 결성하였고, 나아가 70-71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독일 통일을 이룩하였다.
71년 독일제국 총리가 되어 90년까지 이 지위를 독점하였다. 경제면에서 그는 보호관세정책을 써서 독일의 자본주의 발전을 도왔으나, 정치면에서는 융커와 군부에 의한 전제적 제도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그는 통일 후 외교면에서 유럽의 평화유지에 진력하였으며, 3제동맹, 독일-오스트리아동맹, 3국동맹, 이중보장조약 등 동맹과 협상관계를 체결하여, 숙적이었던 프랑스의 고립화를 꾀하고 독일 지위를 튼튼하게 함으로써 국력을 충실히 하려 하였다.
그리고 러시아-투르크전쟁(77) 후에는, 베를린회의를 주재하여 공정한 중재자의 역할도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는 많은 반대 세력이 있었는데, 특히 남독일을 중심으로 한 가톨릭교도를 억압하기 위하여 72년 이후 문화투쟁(Kulturkampf)을 벌여 왔으나 실패하였고 사회주의 세력에 대해서는, 사회주의자진압법(78)을 제정하는 한편, 슈몰러 등의 강단(講壇)사회주의 사상을 도입하여 사고․질병․양로보험 등의 사회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럼에도 사회주의 세력은 증가하고 결국 소기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 못하고 말았다.
그는 원래 현상유지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식민지를 확장하여 아프리카에 토고․카메룬(84), 독일령 동(東)아프리카(85) 등을 경영하였다.
그의 집권 아래 독일 공업은 유럽에서 가장 발전하였으므로, 비스마르크시대 말기에는 그의 평화정책에 반대하는 제국주의자가 늘어갔다.
88년 빌헬름 2세가 즉위하자 비스마르크는 곧 그와 충돌, 90년에 사직하였다.
그의 《회상록 Gedanken und Erinnerungen》(3권,1898-1919)은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⑥ 크루프(Gustav Krupp ; 1870 - 1950.7.30) : 독일의 실업가.
크루프 집안의 딸 베르다(Bertha)와 결혼하고, 4번째의 크루프 중공업 재벌의 경영을 맡았다.
2번에 걸친 세계대전 때 독일 군비 증강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세계 제2차 대전 후 전범으로 기소되었으나, 무죄 석방되고, 31년 독일 공업동맹 총재를 역임하였다.
⑦ 다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 ; 곡기윤일랑 ; 1886.7.24 ~ 1965.7.30) : 일본의 소설가 ․극작가.
도쿄 출생.
제1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도쿄대학 국문과에 입학하였으나 학비의 곤란으로 중퇴하였다.
소설가 ․영문학자이며 와세다대학 교수였던 다니자키 세이지[谷崎精二]는 그의 아우이다.
1910년 와쓰지 데쓰로[和?哲郞] 등과 제2차 《신사조(新思潮)》를 창간하여 단편소설 《문신(文身)》 《기린》을 발표하고 다음해에 《스바루》에 희곡 《신서(信西)》, 단편 《소년》을 발표하여 격찬을 받았다.
당시 유행하던 자연주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풍려(豊麗)한 공상, 현란한 문체로 여체를 찬미하고 성의 신비를 응시하여 변태성욕의 세계까지를 파헤친 작풍으로 탐미주의(耽美主義) ․예술지상주의 ․악마주의의 천재적 신인으로 지목되었다.
후반기에는 고전적인 경향이 강해져서 《장님 이야기》(1931) 《춘금초(春琴抄)》(1933) 등의 원숙한 작품을 발표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고전인 《겐지 이야기》의 현대어역을 하였고, 전후 《세설(細雪)》(1948)로 아사히문화상[朝日文化賞]을 수상하였다.
그 밖의 대표작으로는 《치인(痴人)의 사랑》 《이단자의 슬픔》 등이 있다.
⇨ 7월 24일.
⑧ 에밀리 브론테 출생(1818) : 영국 여류소설가.
브론테 세자매 중 둘째로 황량한 벌판을 배경으로 한 소설 <폭풍의 언덕>을 썼다.
<폭풍의 언덕>이 1847년 12월 출판되었을 때는 호평을 얻지 못했으나 나중에야 영어로 씌여진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12월 19일.
⑨ 윌리엄 펜(William Penn ; 1644.10.14 ~ 1718.7.30) : 식민지 개척자이자 종교운동가,
영국의 신대륙 개척자.
런던 출생.
해군제독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대학을 졸업하였다.
1681년 찰스 2세에게 북아메리카의 델라웨어강 서안의 땅에 대한 지배권을 출원하여 허가를 받자 그 땅을 펜실베이니아(펜의 숲이 있는 지방이라는 뜻)라 명명하고, 퀘이커교도를 중심으로 하는 자유로운 신앙의 신천지로 만들었다.
이듬해 현지로 가서 총독과 양원제의회(兩院制議會)에 의한 정치를 실시하고, 그 스스로 총독이 되어 필라델피아를 건설, 인디언들과도 우호적으로 지냈다.
1684년 귀국하였다가, 1699년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의회와의 대립으로 고투, 1701년 실망 끝에 귀국한 후에는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⑩ 조르지오 바자리(Giorgio Vasari ; 1511.7.30 - 1574) : 이탈리아 화가.
아레초에서 태어났다.
피렌체에서 졸(卒).
건축가이기도 했던 바자리가 이탈리아 조형예술사의 몇몇 페이지를 할당받고 있는 것은 확실하다.
피렌체를 지배하던 메디치가(家) 사람들의 초상화나 팔라초 베키오의 벽화, 우피치 미술관 등은 만만치 않은 예술적 성과로 꼽힌다.
특히 그의 설계로 1560년에 착공해 1584년에 완공된 우피치 미술관은 후기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궁전 건축이다.
그러나 조형예술사에서 바자리라는 이름이 특히 중요한 것은 저술가로서다.
메디치가의 토스카나 대공(大公) 코지모1세에게 헌정된 이탈리아의 가장 훌륭한 화가.조각가.건축가들의 생애(1550)는 이탈리아 예술사 연구의 필수 문헌이다.
13세기 이후의 예술가들에 대한 방대한 정보를 담은 이 책에서 바자리는 중세 예술을 고대 고전주의와 르네상스 사이의 암흑 시대가 낳은 산물로 파악한 뒤, 토스카나를 둥지로 삼은 예술의 재생은 지오토에서 시작해 미켈란젤로에서 정점을 이루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 세대 앞의 동시대인이었던 미켈란젤로를 평생 흠모했다.
이 책의 중요성은 20세기 예술사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의 노작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도 확인된다.
하우저는 매너리즘(양식주의)을 다룬 챕터의 상당 부분을 바자리의 견해에 동조하거나 비판하는 형식으로 기술하고 있다.
하우저의 책에서 뚜렷한 목적의식을 지닌 최초의 매너리스트(양식주의자)로 평가된 바자리는 또한 최초의 상설 미술아카데미의 창설자이기도 했다.
바자리가 코지모1세를 움직여 1561년에 설립한 아카데미아델디제뇨는 피렌체를 중심으로 한 토스카나공국 내의 모든 예술적 문제에 대한 자문기관 노릇을 했고, 그 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각지에서 우후죽순처럼 생겨날 예술아카데미들의 모범적 선례가 되었다(고종석,2004).
⑪ 베블렌 (Thorstein Bunde Veblen ; 1857.7.30 - 1929.8.3) : ⇨8월 3일
미국의 사회학자․사회평론가.
사회사상가.
제도파 경제학의 개척자.
시카고대학 교수를 지냈다.
경제제도 연구에 진화론과 동적인 접근방식을 적용시키려고 하였다.
사회․경제 제도의 진화론적 연구만이 경제학의 대상이라고 주장, 유용재(有用材)의 생산보다 이윤극대를 꾀하는 기업가가 만들어내는 경제․의회제도의 폐해를 지적하였다.
저서에 <유한계급론(有閑階級論)><기업이론> 등이 있다.
위스콘신주(州) 매니터웍 출생.
노르웨이에서 이주한 농민의 아들로 예일대학교 출신의 철학박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민(移民) 2세라는 이유로 취직난을 겪었으며, 도시와 농촌간의 생활차에 따른 차별을 체험하였다.
시카고대학교에서 14년간 교편을 잡고 각 대학의 교직을 역임하였으나, 1926년 은퇴한 후 가난하게 살다가 죽었다.
그는 산업의 정신과 기업의 정신을 구별하여, 전자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생산량을 올리는 것이지만, 후자는 이윤의 추구를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기업합동․판매우선․정부와 소유계급의 낭비를 초래한다고 하여 배격하였다.
《유한계급론(有閑 階級論) The Theory of the Leisure Class:An Economic Study in the Evolution of Institutions》(1899)에서 "상층계급의 두드러진 소비는 사회적 지위를 과시하기 위하여 자각 없이 행해진다"고 하는 과시적소비를 지적하였다.
그 밖의 저서로 《부재소유(不在所有) Absentee Ownership and Business Enterprise in Recent Times:The Case of America》(1923) 등이 있다.
⑫ 기타 오늘의 인물
1771 영국 시인 그레이 사망
1909 '파킨슨 법칙' 만들어 낸 영국의 역사가 파킨슨 출생
1994 영국의 추리 소설가 로빈 쿡 암으로 사망
오늘의 샘터
① 헨리 포드의 말 : "돈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사업이란 한심한 사업이다."
② 지장(地藏)스님과 지장절(地藏節) : 당나라의 신라 유학승이며, 신라 국왕의 후예로 7척장신 인데다 정수리뼈가 우뚝솟아 기괴한 몰골과 힘이 장사여서 장정 열명이 당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일찍 삭발을 하고 구화산 토굴에서 선정(禪定)을 한다.
구화산의 산신부인과 교감하여 기적을 부리는 등 법명이 당나라 천지뿐 아니라 신라에까지 떨쳐 순례자가 끊이질 않았다.
99세에 열반했다.
그가 입적한 날 7월 30 오늘을 지장절(地藏節)이라 하여 중국에서 명절로 삼아 지장촉(地藏燭)이라는 성대한 유등(流燈)행사를 한다.
(*주(註) : 1993.7.23, 조선일보, 이규태코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