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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9 - 크림전쟁 후에 오스만 제국을 꺽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에 패배하다!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에 전쟁을 선포하니 크림전쟁으로 발칸에서는 11월 올테니차
전투를 비롯 러시아는 오스만에 5번이나 패했으며 러시아군은 전염병 피해를 포함 2만 8천의
전사자를 냈지만 1853년 11월 30일 시노페 해전에서 오스만 군함 11척중 10척을 침몰시켰습니다.
그러자 영·프 양국은 3월 28일, 러시아 제국에 선전포고하고 대규모 병력을 파견하자 당황한 러시아는 공세를
중단하고 방어전으로 전환했으니, 4월 22일, 영- 프 해군 연합함대가 오데사 항구를 포격했고 러시아 선박
24척이 격파되면서 오데사항은 항구 기능을 상실했으며 영· 프· 오 3국 연합군 20만이 크림반도에 상륙합니다.
세바스토폴 요새가 연합군에 포위당했으며 10월 25일 발라클라바 전투에서 러시아군이 승리했지만 11월 5일
인케르만 전투에서 러시아군은 4만명의 병력으로 세바스토폴 포위를 풀기위한 공세를 했음에도 1만
500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채 패퇴했으며, 황제 니콜라이 1세의 사망으로 러시아군의 사기가 꺾입니다.
9월 11일 세바스토폴 요새가 함락됐으며 1856년 러시아는 병력 손실은 늘어 갔고, 국가 재정도
나빠졌으며 전세 악화에 따른 민심 이반도 심각했으니.... 패전한 러시아는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경은 전쟁 이전으로 조정당했으며 흑해 함대를 해산하고 요새들도 철거해야 했습니다.
인명 피해가 유달리 큰 전쟁이었는데, 러시아는 최소 14만에서 최대 50만에 가까운 사상자를
냈으며..... 오스만 제국이 10만~ 17만, 프랑스가 10만명(총 병력 30만),
영국이 2만명 (총 병력 10만) 피해를 입었으며 간호사 나이팅게일이 활약한 전쟁으로 기억됩니다.
1855년 알렉산드르 2세 황제는 즉위하자마자 러시아의 근대화에 착수했는데 알렉산드르 2세의 대표적인
근대화 작업은 농노 해방령(1861) 이었는데 2,300만 명의 농노들이 해방되었으지만 좁은 토지를
분배받은 농노들에 인기가 없었으니, 러시아 도시에서는 해방 농노 출신의 빈곤한 노동자들이 등장합니다.
1861년의 농노 해방령으로 토지에 기반한 귀족들의 특권이 무너지기 시작했고 해방된 농노들은 일자리
를 구하려 도시로 향했고..... 산업화를 촉진했으며 이후로 상당수의 중산층들이 생겨나게 되며
알렉산드르 2세는 청나라에서 중가리아와 외만주를 할양받았으며, 아메리카 대륙에서 러시아 영토
알래스카를 미국에 720만 달러에 매각했는데... 1881년에 아나키스트(무정부주의자) 에게 암살됩니다.
그후 알렉산드르 2세의 러시아는 발칸반도에서 오스만 제국과 충돌했으니 1875년부터 1877년
까지 발칸의 소요 사태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 대항하는 슬라브족의 투쟁으로
발전했고, 자국의 이슬람교도들을 혹독히 차별하고 있던 러시아 제국에게도 위협으로 보였습니다.
러시아 국가주의자들은 불가리아와 세르비아 기독교도들이 이슬람교도인 오스만의 굴레에서 벗어나
독립된 국가들을 세우는 것을 도와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니, 1877년초, 러시아는 불가리아와
세르비아의 의용군들과 함께 오스만 제국군과 전쟁을 벌였고 이 것이 바로 러시아- 튀르크 전쟁입니다.
망해가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침입을 막아낼 능력이 없었고, 1년도 채 되지 않아 러시아 군대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가까이 진군할수 있었으니, 러시아 민족주의자 외교관들은 알렉산드르
2세를 설득해 불가리아를 발칸 반도의 거대한 영역 국가로 만드는 산 스테파노 조약을 체결시킵니다.
허나 발칸 반도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을 전혀 원치 않았던 영국은 이 조약의 이행을 절대적
으로 거부했고, 전쟁으로 인해 여력이 없던 러시아는 이를 물릴수 밖에 없었고 1878년
7월 베를린 회의에서 조약을 개정하니 불가리아는 오스만 제국의 통치를 받는 소규모 국가로 독립합니다.
알렉산드르 2세는 군비 증강에도 힘을 기울였으니 귀족과 호족, 부르주아, 중산층 자제들에게도 병역의
의무를 부과하기 시작했고 (국민 개병제), 병역 기간을 25년에서 6년으로 줄였지만...
알렉산드르 황제는 공화주의자들에 의해 1881년에 암살당했고, 아들인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합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알렉산드로 2세의 암살에 충격을 받아 부황이 행했던 대학 자치제등 자유주의를
극히 제한하고, 전제 정치를 오히려 더욱 강화시켰으니, 그는 강력한 슬라브주의자 였고,
러시아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오히려 서구 세계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알렉산드르 3세는 서쪽에서 급격히 성장하고 있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러불동맹을
맺었고, 중앙아시아에 군사적 원정을 실시하였으며 청나라를 상대로 몇몇
중요한 군사적 협약들을 맺고 영토를 얻어내서 발하슈호 와 동해 바다를 차지 합니다.
알렉산드르 3세 최측근은 황제와 황태자 교사이자 종교회의 의장이던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브였는데, 극히
보수적인 인물로 황제가 언론의 자유, 민주주의, 의회, 헌법과 같은 근대적인 가치들을 혐오하게 했으니
황제는 서구화 정책들을 폐기했으며 '러시아의 순수성' 을 지키기 위해 혁명과 발전 가능성을 차단해 버립니다.
1881년 러시아 알렉산드르 3세는 청나라와 일리 조약을 맺음으로써 발하슈호, 추이강(추 강)과 일리강 유역 일부
등 일리 지역 서쪽 반을 얻었으니.... 중국에서는 이곳을 "외서북/ 와이시베이 (外西北)" 이라고 부릅니다.
1894년에 알렉산드로 3세가 죽고 니콜라이 2세가 즉위했는데 알렉산드르 3세 못지않게 전제정치를
행했으니, 제국에 변화를 원하지 않았으며, 격동하는 시대에 변화를 두려워 했으니 제국
의 지도자로서는 부적격했으며..... 결국 제국의 마지막 황제 라는 비운의 운명을 맞이하게 됩니다.
산업혁명의 여파가 러시아에도 드러나기 시작했으나, 지방과 시골 지역들은 비참한 상태로
남아있었고 산업 혁명으로 생성된 새로운 자본주의자 엘리트들은 평화적인 개혁과
입헌 군주정의 설립을 기대하고 있었으며 사회를 점진적으로 바꾸어나가고 싶어 했습니다.
러시아 권력을 잡고있던 극우 세력들은 강력한 지주제를 선호했지만, 지주들은 알렉산드르 2세의 개혁
조치 이후 땅을 팔아가며 세가 약해지고 있었으니, 온건적 개혁파들은 지주들이 땅 일부를 농민
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에 동의하였으나, 무조건 지주들에게 '합당한 보상' 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허나 극좌들이나 공산주의자들은 지주들의 땅을 모두 무상 몰수하여 분배하고 싶어헸습니다.
이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따르던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농민들이 아니라 도시의 노동자들에
의한 혁명을 일으켜 새 세상을 건설하고 싶어했으며, 또다른 좌익 단체인 사회주의 혁명당은
전통을 존중하며.... 실제로 노동을 하는 계급인 농민들을 중심으로 혁명을 일으키고 싶어했습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2차 회의에서 당은 온건파인 멘셰비키와 급진파인 볼셰비키로 갈라
졌는데.... 멘셰비키들은 러시아가 아직 충분히 산업화 단계에 다다르지 못했고, 진정한
의미의 사회주의란 일정 기간의 부르주아 민주주의 체제를 겪은 후에 누릴 수 있는 것이라 여겼습니다.
마르크스 이론에 따른 멘셰비키 세력에는 주로 자유주의적인 기업가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한편 볼셰비키는 블라디미르 레닌의 지휘하에 있었는데 그들은 소규모의
규율잡힌 혁명가들을 만들어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권력을 쟁취할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러일전쟁에서 구미열강들은 러시아 제국의 승리를 예상했으나 결과는 반대였으니
이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대한제국은 을사조약을 강요당해 외교권을
박탈당했고.... 5년 후 강제 합병되어 멸망하고 35년간의 일본 통치에 들어갑니다.
청일전쟁 패배로 청나라는 일본 정부의 4년치 예산인 2억냥이라는 천문학적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영토까지
할양해야 했는데 요동반도 할양을 러시아가 반대했으니, 천혜의 군항인 뤼순을 일본이 차지하자 일본 세력
확대를 꺼려한 러시아는 독일 제국과 프랑스를 끌어들여 삼국 간섭으로 일본이 요동을 반환하도록 압박합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군에 경복궁 점령 상태였던 조선의 고종과 민왕비는 러시아를 통해 일본의 침략을 막아
낼수 있을 것으로 보고 러시아와의 외교를 돈독히 했으며 일본이 세운 친일내각이 실각되고
친러파가 대두하자 일본은 을미사변을 일으켜 민왕비를 살해하고 조선 조정에 다시 친일 내각을 세웁니다.
1896년 2월 고종이 엄상궁의 가마에 함께 (발을 쳤음) 타고 러시아 공사관으로 도주한 아관파천으로 친일내각이
몰락하고 친러내각이 수립되자 일본은 러시아와 협상하니 야마가타는 임진왜란시 명나라 심유경과 남부 4도
분할 협상처럼 39도선에서 한국을 분할하자고 제안했으나 로바노프 외상은 다 차지할수 있다는 생각에 거부합니다.
대신 비밀조항에서 소요 발생시 양국 군대를 파견할 수 있고 충돌을 막기 위해 중립지대를
설정할수 있다는 야마가타-로바노프 의정서를 채택했는데.... 그 사이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해 중국 청나라의 제후국에서 벗어났고 광무 개혁을 추진합니다.
1897년 11월 러시아와 밀약을 맺은 독일이 청나라의 칭다오 주변을 점령했고, 러시아는 1898년 3월,
청나라에게서 뤼순과 다롄을 조차받아 포트 아르투르 로 칭하며 해군 기지 및 요새를 건설했습니다.
1900년 청나라 북부에서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자국의 국민들을 보호한다' 는 명분으로
러시아는 150,000명 대군으로 만주를 점령하고, 시베리아 철도 건설을 시작하니
일본 및 서양은 경계심을 가지게 되었고, 미국도 러시아의 만주 진출에 불만을 품게 됩니다.
러시아는 전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으니 뤼순 요새도 청일전쟁시 구축한 중국 요새를
수복하고 강화한 수준이며, 유사시 유럽에 주둔한 병력과 물자, 장비를 보낼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대부분이 단선인데다가 미완성이라 여러 곳에서 끊어진 상태였습니다.
바이칼호 근방 노선은 호수가 거대하고 주변 지형이 험준하여 수십 km 공백이 발생한 상태라 사용하기
에는 문제가 많은 철도였으니 겨울의 추위 때문에 얼어붙은 호수 위에 철도를 임시로
부설하기도 했고 물자 문제도 심각해 석탄, 식량, 탄환, 무기, 옷 등 전쟁에 필요한 모든게 부족했습니다.
니콜라이 2세가 극동총독 알렉세예프에게 내린 훈령은 '일본이 백두산 천지까지 점령하더라도 허용할 것'
으로 되어 있었는데, 한반도를 일본에 내주면 만주와 연해주가 위협받는다는 로젠의
의견에 따라 철군 계획을 철회하고, 1903년 압록강 국경지대의 용암포를 무단으로 점령하기도 했습니다.
1903년 8월 12일 주러 공사 쿠리노 신이치로가 한국을 일본 세력하에 둘 것을 요구하고, 만주에서 러시아
권한을 철도 경영에 한정시키려고 하니 10월 3일 러시아 정부는 39도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할 것을
제안했는데 일본은 거절하면서 한반도와 만주를 분할하고 남북 각 50km 중립지대를 설정하자고 제의합니다.
일본이 한반도를 차지하고 러시아는 만주를 차지하자는데 비해 러시아는 만주는 당연히 러시아가 차지하고
한반도는 39도 선에서 분할해 나누자는 것인데, 이는 원래 일본이 몇년전에 제안했던 것이지만
영국과 동맹을 맺고 미국과 는 이토 히로부미의 활약으로 준 동맹에 이른지라 이젠 일본이 거부한 것입니다.
5천년 인류 역사에서 약소국은 강대국들이 찢어서 나누어 먹는 것이니.... 히타이트는 시리아를 차지하고
이집트는 팔레스타인을 소유했으며, 북이탈리아는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차지하고 베네치아는
오스트리아가 얻었고, 폴란드는 러시아와 독일, 오스트리아가 셋으로 찢어 나누니 세계 지도에서 사라집니다.
일본은 러시아의 전력을 관찰해 유럽에서 극동까지 동원되는 러시아 제국군이 100,000명에 불과하다고
평가했으니, 시베리아 철도는 미완성에다가 단선이라 1개 대대를 뤼순으로 보내는데도 40일이나
걸리며....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100,000명에 일본군은 250,000명을 전선에 투입할 수 있었습니다.
전체적인 전력은 러시아가 일본 보다 훨씬 강력했지만 7,000km 가 넘는 극동까지 군대를
보내 전쟁을 벌일 수 없었기 때문에..... 러시아군이 본격적으로 작전에
나서기 전에 극동의 교두보를 강습해 제압한 다음 협상을 제안하면 승산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일본은 전장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했으며 1904년 1월 21일 중립을 선언한 대한제국에
군대를 상륙시키고,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면서 요충지를 차지
했는데 영국도 역시 러시아의 남하정책 저지를 위해 일본에 막대한 차관을 저리로 지원합니다.
일본은 전시 동원체제의 확립과 아시아주의라는 이념무장, 만주 지역에 대한 대러시아 첩보망을 갖춰놓은
상태였으니..... 러시아가 전쟁준비가 안 된 것을 간파한 일본은 1904년 2월에 전쟁을 개시합니다.
영국 런던대학에 유학한 이토 히로부미는 만주까지는 먼 거리라 보급이 문제인지라 하버드 대학 출신 겐타로를
동문인 미국 루스대통령에게 보내면서 국제연맹 사무차장이자 구미 대학의 교수를 지낸 니토베 이나조가
영어로 쓴 무사도 책을 선물했으니.... 터프 가이 루스벨트는 저 책을 읽고 감명을 받아 스스로 친일파가 됩니다.
전쟁 중에 이토 히로부미의 요청을 받은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나서 두나라 대표를 미국
포츠머스에 불러 중재했으니 그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는데.... 러시아와 일본 모두 전쟁
을 계속했다간 재정이 파탄날 지경이라 루스벨트가 반 강제적으로 전쟁을 끝내게 만든 것입니다.
종전 협정이 열렸던 포츠머스에서는 매년 포츠머스 조약체결일에 축제를 여는데, 자신들이
중재하여 전쟁을 멈추고 세계 평화에 기여했다는 의미지만 그 '평화' 의
결과로 한반도는 끝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조선은 일본이 전쟁에서 챙긴 전리품 입니다.
포츠머스 조약 협상에서 일본 측 대표 고무라 주타로 전권대사는 승리했으므로 러시아로 부터
전쟁배상금을 받겠다고 주장했으나, 러시아측 대표 세르게이 비테는 국내 사정 때문에
전쟁을 중단하려는 것 뿐이지, 자신들이 패배한 것이 아니라며 한 푼도 낼 수 없다고 맞섭니다.
뤼순 요새의 함락으로 러시아군은 큰 타격을 입었지만, 일본군의 희생도 그에 못지않았으니
뤼순을 공략하면서 일본군은 무려 3만명이나 잃었기 때문이며 개전 당시
일본이 확보한 군대는 20만에 불과했는데 그중 15% 전력을 일개 전투에서 상실한 것입니다.
전투는 확대되었고 봉천 전투에서 사상자 7만명을 낸 일본군도 상당한 출혈이었고 러시아군도 손실을
입었으며, 시베리아 철도로 병력수송, 보급한다는 계획은 어려웠고 더군다나
전장이 격화되던 시점에선 유럽 전선의 병력 수를 아득히 넘은게 만주전역 러시아군의 병력수 입니다.
만주에서 전쟁은 겉으로 보면 일본군이 일방적으로 승승장구한 것으로 보이지만,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기 보다는 단지 격전 끝에 러시아군이
물러나는 양상에 가까웠으며 일본군 역시 지속적으로 상당한 손실을 입고 있었습니다.
러시아군은 아직 완전히 완성되지도 않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최대한 활용해
유럽에 주둔 중인 주력 병력을 수송하고 만주 일대에 기본적
으로 존재하던 병력은 이를 위한 시간을 번다는 전략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땅이 넓으니 철도로 뒤로 빠지면 추격할 여건이 안되는 일본군은 무작정 추격하다간 자멸하거나 반격
당해 괴멸될 수도 있었으니.... 애초에 러시아군의 기본 전략이 빠르게 후퇴한 뒤에
따라오면서 힘이 빠진 적을 친다는 것이니 대륙전을 해본 적이 없는 일본군이 따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후 러시아군이 집결하자 일본군이 공격한 봉천 전투에서 결국 일본군이 러시아군
을 물리치고 승리했지만, 전면 수세 방어로 참호를 파고 버티는
러시아군에 대한 전면 포위 계획은 결국 러시아군의 신속한 퇴각으로 실패 합니다.
31만 러시아군과 25만 일본군이 맞붙었던 봉천 전투는 러시아군 9만에 (2만명은 포로)
일본군 7만 5천이라는 사상자 숫자에서 나타나듯 일본의 일방적인
승리가 아니었으며 일본군으로서도 더 이상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여력이 없었습니다.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뤼순을 점령하고 봉천을 차지하며 쓰시마 해전에서 도고 헤이하치로의
일본 해군이 상트 페테르부르크를 출발해 지구를 반바퀴나 돌아온
발트함대를 전멸시킴으로써 승리하였지만 저체 인명 피해 비율은 일본 측이 더 컸던 것입니다.
러시아군은 봉천 전투에서 물러난 것을 전투의 패배로 인식하였고..... 쓰시마전투 이후 독선적인
니콜라이 2세 조차 전쟁에서 패하였음을 시인하고 미국 중재하의 종전 쪽으로 방향을 잡습니다.
지속적인 병력 수송으로 40만까지 북만주로 이동시켜 공세를 노리나 이는 일본의 속전속결 공세로
요새화시킨 만주 전역을 빼앗겨 공든 탑이 무너졌기에 소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며, 이전에
겪었던 몇차례 육전 패배와 짙어진 패색으로 일어난 민중소요 때문에 강력한 공세로 나서지는 못합니다.
반면에 일본군은 신속한 철도개설과 여러갈래 보급선 확보등 최선을 다했지만, 국력 부족으로 보급이 한계에
달했으며, 그 결과 식량 공급도 부족했고 방한복조차 지급되지 않아 일본군은 만주의 추위에
떨며 주먹밥으로 연명하느라 각기병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너무 춥다보니 유행한 노래가 “눈의 진군” 입니다.
일본의 재정도 이미 파탄 상태였으니.....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거액의 국채를 발행했지만 액수가 너무 늘어
나자 영일동맹을 맺은 영국이나 우호국이었던 미국도 더이상의 매입을 거부하게 되어 사실상 막다른
골목에 몰렸으니 일본의 1년 세입이 3억엔에 못 미쳤는데 러일전쟁 총전비는 이미 17억 3000만엔에 육박합니다.
러일 전쟁이 있었던 1905년 총군사비 / GDP가 23.7%, 여기서 12억엔을 영국과 미국이 지원하긴 했지만 만약
1~ 2개월만 더 전쟁이 지속되거나 러시아가 일본과의 협상을 거부하고 강경론으로 나간다면 일본은 국가
파산에 처할 위기였고 물론 러시아도 만만찮은 전비를 지출해 파산위기에 있었으므로 피차 마찬가지입니다만....
때문에 휴전 협상에서 고무라는 반드시 배상을 받아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비테는 배상금 지불을
거부했고, 국제여론에 돈만 밝히는 신흥열강이란 이미지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전쟁을
더 수행할수 있는 상황이 아니므로 배상금을 받지 못하더라도 협정을 진행하라는 훈령을 내립니다.
이에 협정은 무사히 진행되었으니 결국 일본은 최우선 목표인 한반도 영유후 다음 목적으로
요구했던 사할린 전체 할양도 남사할린 할양으로, 하얼빈- 여순의 동청절도
이득권도 장춘 - 여순선의 권리 획득으로 바꿔 전쟁 발단의 목표에는 완전히 미치지 못합니다.
러시아가 전쟁 수행 의지를 잃어버리고 휴전협정에 나선 것은, 연전연패로 인한 사기 하락으로
전쟁 수행능력이 고갈되었고 일본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이유로 작용했으며 전략의 미흡함으로 보급이나 병력의 보충에도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전쟁중에 터진 “피의 일요일” 사건을 들수있는데, 주러 일본 공사관은 유럽의 공산주의 혁명가와 좌익분자
들과 접촉해 자금을 지원하고 선동 여건을 조성했으니, 피의 일요일 사건은 러일전쟁 패배의 결정적
이유가 되었고 유럽은 자유주의 열풍을 막을수 없었기 때문에 전쟁으로 민생이 어려워지자 불만이 터져나옵니다.
그리고 1903년에 러시아에서 벌어진 유대인 학살 사건이 있으니... 한 어린 소녀가 강간당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는데, 유대인이 저질렀다는 헛소문이 퍼지면서 유대교 회당에 대한
테러를 비롯 유대인이라는게 드러나면 죽여버리는 사태가 발생했으니 키시네프 포그롬 이라 합니다.
문제는 사건이 소녀의 친척이 저지른걸로 드러났음에도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는 것이니.... 수천에서 수만으로 추정
되는 유대인 및 폴란드 소수민족들이 학살및 약탈, 강간을 당했고 결국 미국으로 대거 이민을 갔으며, 독일에서
미국으로 이민간 유대인 부호 제이콥 쉬프가 일본을 강하게 지지해 하루만에 500만 파운드의 공채를 맡아줍니다.
제이콥 쉬프는 공채 2억 달러도 융자해줘 일본애 강력하게 자금 지원을 했으며, 이에 쉬프는 1906년
일제로 부터 훈장을 받았는데... 쉬프는 제정 러시아를 격렬하게 증오하여 1차 대전 때도
협상국중 유독 제정 러시아에 대해서만은 자금지원을 하지 않았고, 볼셰비키에게 자금 지원을 해 줍니다.
어쨌든 러시아나 일본이나 전쟁 수행이 불가능했으므로 휴전협정에 비교적 만족할 만한 상황
이었지만 그러나 일본의 상황은 일본 정부와 군부에서만 파악하고
있었을뿐 국민들에게는 일본군의 승리만이 과대 선전되었으므로 기대가 커진 상황이었습니다.
과거 청일전쟁에서 일본 정부 연간 예산 4배에 달하는 배상금을 받았듯 막대한 배상금은
당연하고, 연해주와 캄차카 반도도 할양받자고 생각했던 일본인들은 포츠머스
협정 내용에 격렬한 분노를 표시했으며, 히비야 방화 사건 같은 반정부 폭동까지 일어납니다.
일본 대표는 정부에서는 찬사를 받았지만 국민들에게는 공공의 적으로 몰려 매국노로 지탄받았으니 엄중한
경호를 붙여야 하는 지경이었고, 휴전협정을 주선한 미국에 대한 비난도 이어져 강렬한 반미 여론이
일어나자 미국 언론도 일본측의 황당무계한 행동을 비난하고 나섬으로써 양국 국민 간의 감정이 악화됩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 발발 이틀전인 2월 6일 부산, 마산, 울산에 상륙해 대한제국 항구들을 선점하였으며
전신국을 점령하고 러시아 상선을 나포하는등 철저히 전쟁 초기 기습이 알려지지 않도록
했으며, 인천과 뤼순의 기습 성공으로 서울을 장악하고 뤼순항을 포위해 러시아 해군을 고립시켰습니다.
러시아군 사령관 쿠로팟킨은 러일전쟁이 발발하고 40일이 지난 뒤에야 현지에 나타났는데,
그의 판단으로도 러시아 극동군의 전력은 대규모 회전을 치르기에 미비한
상태였으므로 객관적인 전력상의 우세를 점한 일본군과 정면대결을 벌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서부 러시아 지원이 만주까지 오려면 40일이 넘게 걸렸기 때문에 일본군을 내륙 깊숙이 유인해 섬멸하자는 전략을
택하는데, 일본도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가 극심한 근대식 대규모 회전을 치러본 경험이 없어 몇차례 전투후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차원이 다른 피해 규모에 국력의 열세로 한방을 먹여 러시아군을 괴멸 시키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쿠로팟킨이 의도한 장기전에 따라 러시아군은 전투마다 불리하다 싶으면 주저없이 철수해버렸고,
봉천 전투에서 일본군은 러시아군을 압도적으로 괴멸시키지 못하면서 부분적으로 타격으로
후퇴시키기만 했으니 슬슬 경제적 압박이 심해지고 있었고 일본군의 무능한 지휘력이 문제가 됩니다.
앞선 청일전쟁이야 상대가 너무나도 후진적이었으니 그럭저럭 먹혔고, 이후 중화민국 역시 마찬가지
였지만 러시아 제국은 좀 달랐으며 훗날 2차대전의 미국은 전혀 그렇지 않았으니....
전쟁은 러시아에 불리하게 돌아갔어도 함대를 보내면 상황이 개선되리라는 희망은 있었습니다.
가장 유능한 스테판 오시포비치 마카로프 제독이 부임하여 몇차례의 해전에서 병사들의 마음을 후려잡고 무능한
지휘관들을 쳐내며, 유능한 지휘관으로 교체하는등 강직하고 훌륭한 지휘관의 실력을 보여주었으나,
미처 러시아 해군이 집결하기도 전에 기뢰가 터져 기함과 함께 전사하는 바람에 해상을 일본이 장악하게 됩니다.
일본 역시 기뢰로 구축함 하츠세, 야시마에 순양함 요시노, 수뢰정 아카츠키, 포함 오시마를
잃었으나 마카로프 제독의 끔찍한 죽음을 본 러시아 해군 장교들의
행동은 소극적이기만 했으며 일본은 한반도를 점령했고 만주로 진군해서 러시아군을 압박합니다.
지독한 뤼순항 요새 공방전 이후 1905년 뤼순까지 내주고 봉천전투 패전으로 패색이 짙어지던 러시아는
국내외 상황이 점점 악화되었고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과 러시아는 최후의 결전을 벌였습니다.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이 아프리카와 인도양을 지나 이끌고 온 발트 함대는 해전에서 우월한 성능의
전함과 숙련도 높은 승조원들, 그리고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과 아키야마 사네유키 라는 명장을
보유한 일본 연합함대에 전멸되고 러시아는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포츠머스 조약을 맺으며 전쟁을 끝냅니다.
러시아의 패배 요인은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에 있었으니....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병참과 후방기지 역할을 하는 한반도 지역을 습격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았고,
일본군과의 전투도 방어만하다 불리하면 철수하는 식의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자세로만 임했습니다.
물론 일본군을 유인하려는 전술이라고 볼 수도 있으나, 문제는 그렇게 후퇴만 거듭하다가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고 본국에서 반전 여론이 일어나 결국 전쟁 자체를 못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아울러 러일전쟁의 주무대인 만주에 주둔중이던 러시아군은 수가 8만명 내외였고, 러일전쟁이 벌어지자
20만명 가량의 일본군에 비해 수적으로 열세였음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정부는 독일 국경에
주둔 중인 100만명 주력 부대를 보내지 않고 새로 모병한 병사들 40만명을 훈련시키느라 바빴습니다.
우랄산맥 서쪽 유럽에서 머나먼 극동인 만주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는 역할을 맡은 시베리아 횡단철도는 러일
전쟁이 벌어지던 1904년에는 완공조차 되지 않았으며, 러시아는 일본보다 많은 병력을 극동으로 보내는
데에 어려움이 있었으니 러시아군 병사들은 사용할 총탄 조차 2800만발이나 모자랐을 만큼 물자가 부족했습니다.
반면 일본은 전장인 만주와 본국의 거리가 러시아 보다는 상대적으로 가까웠는데다가, 전쟁 초기부터
제해권을 잡았기 때문에 배로 병력과 물자를 실어나르면 되는 상황이라 보급이 수월했으며
또한 러불동맹의 존재로 동맹국 프랑스가 러시아의 주전력이 동아시아쪽으로 이동하는 것에 반대했습니다.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에서 빚어진 차이도 있었으니 러일전쟁 기간 러시아군은 일반 병사들중 상당수를
교도소에 갇힌 죄수들로 충당했는데, 많은 수는 러시아의 전제정치에 불만을 품은 정치범
들이었고, '우리가 왜 머나먼 극동에 가서 싸우다 죽어야 하냐?' 하는 불만을 품었고 사기 또한 낮았습니다.
한 예로 러시아 발트 함대의 수병은 러시아 본토에서 극동으로 가는 사이에 자기들끼리 총격전을 벌여
사상자 수십명이 발생했을 만큼 군기가 엉망진창이었고, 지휘관들도 이 수병들을 가리켜
"똑같은 명령을 5번이나 계속해서 전달해야 겨우 알아 듣는다." 라고 한탄했을 만큼 훈련도도 낮았습니다.
일본군은 러시아군보다 병사들의 사기와 훈련도가 높았으니 러시아군과의 전투에서 우세를 점유했는데,
일본은 "이 전쟁에서 지면 일본은 망하니, 반드시 이겨야 한다!" 라는 마음가짐으로
온 나라가 총력전 체제에 들어갔으며, 러시아군의 진지나 요새를 상대로 한 뤼순 공방전등
전투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음에도 추가로 병력을 보내는 적극적인 공세로 주도권을 쥘수 있었습니다.
전쟁 중 일본은 러시아 내 좌익 및 공산주의자들에게 거금을 주어 피의 일요일사건이 일어나도록
도왔으며..... 이는 러시아가 전쟁을 지속할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했고
외교 상황도 러시아에 불리했으니 세계 최강대국인 영국과 그에 버금가는 강대국인
미국은 잠재적 적국인 러시아를 견제하고자 일본에 자금과 무기를 지원하며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또한 영국과 미국은 언론을 통해 일본을 찬양하고 러시아를 폄하하는 식으로 여론전을 폈고
몇몇 자본가들을 동원해 일제의 국채를 사 주었으며, 남는 전함을 빌려주고
수에즈 운하를 닫고 식민지 어디든 러시아 배가 정박하면 무장해제하도록 방침을 내렸습니다.
또 프랑스와 독일이 러시아에 자금을 지원하려고 하자 미국 정부가 직접 나서서 "만약 러시아를 돕는다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고 격렬한 압박을 넣어 중단시키는 등 영일동맹을 근거로 영국과 미국은
일본에 특급 서포터 역할을 했으니.... 이토 히로부미의 심모원려(深謀遠慮) 가 결실을 맺은 것입니다.
러시아 제국은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니 대일 전쟁의 직접 지출액만 23억
4,690만 루블에 달했고 여기에 간접지출(전투로 파괴, 채무이행, 유족 및
상이자 보상금)까지 고려하면 총지출액은 30-40억 루블에 달할 것으로 추산됩니다.
여기에 만일 볼셰비키 혁명으로 채권이 무효화되지 않았을 경우 1950년까지 지출해야 할 총액은 90-
1 00억 루블에 달할 것인데, 1904년 러시아 세입이 20억 1,800만 루블이었으니 5년치 세금을
지불해야 할 판이었는데 재무장관 블라디미르 코콥초프가 프랑스에서 차관을 받아내 급한 불을 끕니다.
러시아는 대일 전쟁에서 29만명 병력 손실을 입었으며 포로 7만4천명을 제외해도 21만 6천명인데, 뼈아픈 것은
러시아 자랑 발트함대와 태평양함대의 전멸이었으니 러시아 해군력은 세계 3위에서 6위로 추락했고 태평양
까지 넘보던 러시아 해군이었지만 러일전쟁후 독일을 상대로 발트해 연안을 지키는 것으로 전략을 수정합니다.
자유주의자와 보수주의자가 대립하고, 러시아 국내에서 소수민족의 반란이 격화하는 시점에서
대일전쟁 패배는 반황실 분위기에 기름을 부었는데, 패전한 러시아 제국은 1905년
혁명이란 대격변을 겪었으며, 국민들은 로마노프 황가에 대한 마지막 기대와 신뢰를 거둡니다.
세계 정세에도 큰 변화가 일어났으니 일본의 패배를 에상하고 거문도를 점령해 해군기지화하는등 러시아군과
맞설 계획을 하던 영국은 1세기간 이어졌던 그레이트 게임을 종결했으니, 영러 협상으로 이어져
러불 동맹, 영불 협상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삼국 이 탄생하고 삼국 동맹이 상호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합니다.
10년뒤 러시아 혁명 도화선중 하나가 되어 세계공산화에 큰 족적을 남긴 소련 탄생의 배경도 됐는데 러시아 제국은
삼국 협상과 함께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가, 전쟁으로 인한 경제 붕괴와 식량난을 견디지 못한 러시아인
들의 분노로 붕괴되고 공산주의 국가인 소련이 들어서고, 1945년 만주 작전으로 러일전쟁의 굴욕을 되갚아줍니다.
러일전쟁이나 만주 작전이나 한국 입장에선 나쁜 쪽으로 영향이 컸던 사건인데,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두고
러시아- 소련과 일본이 싸웠던 사건이기 때문이니 러일전쟁에선 일본이 승리하며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지만, 그후 만주 전쟁에선 소련이 승리하며 북한의 전신인 소련군정을 세웠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러일전쟁에서 만약 러시아가 승리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짜르의 힘이 강해지면서 공산 혁명은 일어나기
힘들엇을 것이고, 중국 땅인 만주는 러시아 땅이 되었을 것이며 한반도는 잘하면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을 것이고
잘못되면 나라 자체가 없어지고 러시아땅이 되어 조선인은 일본 여권이 아닌 러시아국적 여권을 쓰게 되었을지도.....
전쟁은 일본인들의 애국심을 고양해 일본을 하나의 국가로 결속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전쟁 삽화가 매 전투마다
수백장, 수천장 출판되어 도시와 마을 중심가에 걸려 모든 국민들에게 일본군이 덴노를 위해 목숨바쳐
싸우는지 보여주었고 음악가들은 애국심을 고취한 군가를 연주했으며 군함행진곡, 눈의 진군, 히로세 중좌입니다.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이 승자이니 마땅히 패자에게 갑질을 할수 있을 것이라 여겼으나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했는데,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부조리한 대우를 받고 있다고 판단해 분노가 폭발햇으니 일본 전역에서 폭동이 발생하였습니다.
폭도들은 내무대신 관저, 어용 신문이었던 고쿠민 신문사, 파출소 등에 불을 질렀고 다음 날인 9월 6일
일본 정부는 긴급 칙령에 따른 계엄령을 선포하여 소동을 진압했는데, 이 사건으로
17명이 사망하고 500명 이상이 다쳤으며, 2천명 이상이 검거되고 검거자 중 87명은 유죄를 선고받습니다.
포츠머스 조약의 결과에 대한 불만과 일본 국민들의 불만은 1910년대 말부터 시작되는
민주주의 운동 '다이쇼 데모크라시' 의 근원이 되었는데, 일본은 열강으로 인정받아
동아시아의 최강자이자 조정자라고 불릴 위신을 얻게되니 중국과 러시아를
물리치고 대한제국을 합병하였으며 요동등 남만주도 사실상 영향권 내에 편입시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