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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 &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초연 1942년 10월 28일 뮌헨(클레멘스 크라우스 지휘)
배경 1775년경 파리 근교 백작의 대저택
<2011년 4월 23일 뉴욕 메트 / 149분 / 한글자막>
뉴욕 메트 오케스트라 & 합창단 연주 / 앤드류 데이비스 지휘 / 존 콕스 연출
마델레인.....백작부인 혹은 女백작.....르네 플레밍(소프라노)
백작...........마델레인의 오빠............모르텐 프랑크 라르센(바리톤)
플라망........작곡가.........................조셉 카이저(테너)
올리비에.....시인............................러셀 브라운(테너)
라 로셰.......무대연출가...................피터 로즈(베이스)
클레론........여배우.........................사라 코놀리(메조소프라노)
그외 남녀 가수들, 발레리나, 하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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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독 노트 === <내지 해설 / 존 콕스 John Cox / 김종윤 번역>
행복하게도 <카프리치오 Capriccio>의 주제가 되는 핵심문제는 절대로 풀릴 수 없다. 음악과 시 중에 어떤 것이 더 뛰어난 장르인지는 개인의 취향에 따라 결정될 뿐이다.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았던 백작은 음악과 시를 동시에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오페라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타협안은 해결책이 되기는 커녕 가벼운 대화였던 이 주제를 격렬한 갈등으로 몰고 간다. 왜냐하면 오페라 내부에서도 언어와 음악 중에 무엇이 우선시되어야 하는지가 항상 갈등을 낳기 때문이다. 오페라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들은 항상 이러한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다.
<카프리치오>는 다양한 의견들을 담고 있는 대화적인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다루고 있는 문제들이 당시만큼이나 현재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또한 우리가 오페라를 공연함으로써 이미 그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고려해볼 때, 나는 이 문제가 얼마나 현대적인 이슈인지를 강조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다. <카프리치오>는 작품의 특성상 다소 정적인 느낌이 있고, 18세기의 관습이었던 파니에 스커트와 파우더 칠한 가발이 등장하는데, 이러한 요소들은 이 작품을 박물관 같은 느낌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었다. 그래서 관객들은 <카프리치오>를 보면서 실크옷을 입은 호사가들이 무료한 오후를 잡담을 하며 보내는 듯한 인상을 받기가 쉽다. 극중 상황은 프로 예술가들이 그들의 후원자들과 작품에 대해서 논의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물론, <카프리치오>가 다루는 문제는 분명 현대적인 이슈이지만, 그 상황을 둘러산 사회적 배경은 분명 과거의 것이다. 이 시대에 이 작품에 등장하는 백작부인과 그 오빠처럼 예술가들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정도로 교양있는 엘리트 부자들을 찾을 수가 있는가? 그렇기 때문에 오페라의 드라마틱한 내용을 진실되게 보여줄 수 있는 시간적 배경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지 10년이 지난 파리가 해답이었다. 그 당시 파리에서는 공작부인과 같은 후원자가 스트라빈스키(Stravinsky), 콕토(cocteau), 6명의 작곡가 모임 레씨스(Les Six)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을 후원하고 있었다. 모든 예술가들이 예술의 형태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고, 많은 이들이 극을 위해 대사와 음악을 결합하는 새로운 방법을 찾고 있었다. 디아길레프(Diaghilev)가 씬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 때다.
무엇보다도, 전쟁 직후의 사회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편안한 느낌과 안정을 추구하지만 우아함을 포기하지 않는 분위기는 18세기와 현대의 연결고리와 같은 느낌을 주었다. 이러한 분위기는 배우로 하여금 다양한 제스처와 자세 및 활동을 가능하게 하며, 관객과 배우들이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든다. 배우들이 더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기에, 관객들은 작품을 보고 들으며 작품과 자신을 연관시키기가 쉬워진다.
이번 <카프리치오>의 텍스트가 여전히 18세기 작곡가와 극작가들의 이름을 담고 있어서 일관성이 없다고 비판할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시대에는 개혁가들과 전통주의자들이 공존하기 마련이다. 그 두 그룹은 시대마다 이름은 바뀔지 몰라도 항상 존재한다. 슈트라우스는 이 작품의 서문에서 자신 또한 글루크(Gluck) 혁신의 유산을 물려받은 상속자이며, 그의 혁신이 자신의 작품에서 대사와 음악에 대한 문제의 해결점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그의 작품들이 자전적인 내용이라는 것을 확실히 해두려는 듯이, 그는 자신의 작품의 대사들을 자주 인용한다) 다시 말해, 슈트라우스가 대표했던 모든 것들은 그의 삶에서 진실했고, 글루크의 삶에서도 진실했으며, 21세기의 연출가인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극중에서 연출가로 등장하는 라 로슈(La Roche)는 "살과 피를 가진 사람들"과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무대를 보여주고 싶어했다. 아마도 이번 <카프리치오>는 그를 만족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작품해설 === <내지 해설 / 조지 홀 George Hall / 김종윤 번역>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카프리치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의 오페라 <카프리치오 Capriccio>만큼 악조건에서 만들어진 작품은 거의 없을 것이다. 이 작품의 원래 아이디어는 슈트라우스의 극본가였던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로부터 나왔다. 오랜 기간동안 슈트라우스와 함께 작업해왔던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이 <아라벨라 Arabella>의 극본을 수정하던 중 급작스럽게 사망하자, 슈트라우스는 츠바이크가 그의 대체자가 되어주길 바랬다. 실제로 츠바이크는 벤 존슨(Ben Jonson)의 연극을 기반으로 한 코메디 <말 없는 여인 Die schweigsame Frau>의 극본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1935년 <말 없는 여인>이 드레스덴에서 프리미어를 가질 때 쯤, 나치가 독일 정치의 전면에 나서게 되었고, 슈트라우스는 오페라 포스터에서 유태인이었던 츠바이크의 이름을 빼는 문제로 정권과 다툼을 벌였다. 결국 츠바이크의 이름이 빠지지는 않았지만, 이후 슈트라우스는 그의 동의도 없이 임명되었던 제국음악회(Reichsmusikkammer) 회장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이러한 정치적 압력 때문에 슈트라우스의 작품에 대한 츠바이크의 기여는 그들 사이의 비밀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츠바이크는 1934년 독일을 떠나 망명생활을 시작했고, 결국 1942년 브라질에서 부인과 함께 자살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된다.
하지만 츠바이크는 문학 연구작업을 통해 지오반니 바티스타 카스티(Giovanni Battista Casti)가 썼던 살리에리(Salieri)의 코메디 <음악이 첫째, 말은 둘째 Prime la musica, e poi le parole>의 극본을 찾아냈다. 1786년 빈에서 모차르트의 <극장 지배인 Der Schauspieldirektor>과 함께 첫 무대를 가졌던 이 작품은, 초기 오페라 창작가들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오래된 갈등인 '음악과 극본 중에 무엇이 우선인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었다. 츠바이크는 이 아이디어를 재해석해보자고 제안했다. 이 아이디어에 완전히 매료된 슈트라우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지만, 결과적으로 이 작품의 극본을 쓴 사람은 츠바이크가 소개한 극본가 요제프 그레고르(Joseph Gregor)였다. 그레고르의 극본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슈트라우스는 그가 좋아했던 지휘자인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에게 극본을 보여주었고, 크라우스가 극본의 마지막 수정작업을 맡게 된다. 하지만 슈트라우스 또한 극본작업에 참여했으며, 살리에리와 카스타의 원작도 많이 작품에 포함되었다. 당연히 크라우스가 첫번째 공연의 지휘자를 맡았다.
슈트라우스는 <카프리치오>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되길 원했다. 그는 1894년에 첫번째 오페라인 <군트람 Guntram>의 프리미어 공연을 하기도 전부터, 지휘자이자 작곡자로서 오페라를 그의 가장 주요한 장르로 여겼고, 이 작품은 오페라에 대한 그의 마지막 선언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운명은 그가 원하는 것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카프리치오>는 1942년 10월 28일 뮌헨에서 첫 공연을 치뤘다(그 극장은 이듬해에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카프리치오> 이전에 작곡했으나 아직 공연을 하지 않고 있었던 그의 다른 작품 <다나에의 사랑 Die Liebe der Danae>은 1944년 잘츠부르크에서 드레스 리허설을 가졌으나, 이후 제3제국의 전국민 전투태세 명령으로 인해 모든 공연이 금지되면서 실제 무대에는 오르지 못했다. 결국 <다나에의 사랑>은 1952년 잘츠부르크에서 첫 공연을 가졌다. 이때는 슈트라우스가 죽은지 이미 3년이 지난 뒤였다.
<카프리치오> 작곡 당시의 슈트라우스의 주변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세계는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가고 있었고, 그 속에서 슈트라우스는 그가 사랑했던 유태인 며느리와 손자들을 어떻게 보호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고 있었으며, 이렇게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개인적인 고민을 해야만했던 슈트라우스는 부끄러움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카프리치오>는 많은 이들이 '낭만적인 현실회피'라고 비판하는 것보다 훨씬 뛰어난 작품이다. 오페라 세계의 리더로서 개인적으로 알고 있던 인물들의 특성과 그들 사이의 관계와 갈등을 이야기로 풀어내면서, 슈트라우스는 사람들을 교화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예술적 가치를 주장했다. 그러한 가치가 가장 위험에 처해있던 바로 그 시기에 말이다. <카프리치오>는 영웅적 용기를 가진 작품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권위에 저항하는 작품이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이 작품은 슈트라우스가 작곡했던 음악 중 가장 아름다운 음악들을 담고 있다.
=== 줄거리 === <내지 해설 / 마이클 케네디 Michael Kennedy / 김종윤 번역>
이 이야기는 1920년대 파리 근교의 한 저택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루고 있다.
장면 1
젊은 미망인이자 백작부인인 마들렌(Madeleine)의 생일을 축하하는 파티가 벌어진다. 작곡가 플라망(Flamand), 시인 올리비에(Olivier)가 생일파티를 위해 플라망이 쓴 현악 6중주곡의 리허설을 듣고 있으며, 연출가 라 로슈(La Roche)는 잠을 자고 있다. 음악을 듣고 있던 플라밍과 올리비에는 상대방 또한 백작부인과 사랑에 빠져있음을 발견한다. 과연 플라망의 음악과 올리비에의 시 중에서 무엇이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인가? 음악이 먼저고 언어가 둘째인가, 아니면 언어가 먼저고 음악이 둘째인가? 그들은 백작부인에게 결정을 맡기기로 한다. 라 로슈가 잠에서 깨어 논쟁에 참여한다. 그는 음악도 시도 최고의 예술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의 장르, 즉 극 연출이 그 둘보다 우월하며 음악과 시를 종으로 부린다고 주장한다. 그는 엔터테인먼트의 힘을 믿는다. 화려한 무대장치, 멋진 대사, 최근에 올리비에와 교제했던 여배우 클레론(Clairon)과 같은 아름다운 여인과 같은 요소들을 말이다. 라 로슈는 클레론이 올리비에의 연극에 등장하는 백작의 상대역을 맡기 위해 저택으로 오고있다고 말한다. 플라망과 올리비에, 라 로슈는 극장에서의 리허설을 위해 준비한다.
장면 2
백작과 백작부인이 등장한다. 그들은 음악과 시의 장점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백작은 그에게 음악은 큰 감흥이 없다고 말하며, 언어가 항상 음악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여동생인 백작부인에게 그녀가 작곡가 플라망에게 관심이 있는 것 같다며 놀린다. 이에 대항하여 백작부인은 여배우 클레론의 이름을 언급한다. 백작은 그가 클레론에게 관심이 있는 것은 맞지만, 그는 쉽게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졌다가 쉽게 관심을 잃어버리는 삶이 좋다고 말한다.
장면 3
라 로슈와 그 일행들이 돌아온다.
장면 4
클레론이 리허설을 위해 도착한다. 클레론과 백작은 올리비에의 연극의 한 장면을 연습한다. 연습의 마지막에 등장하는 대사를 통해 백작은 클레론에 대한 자신의 열정적인 마음을 소네트로 낭독한다. 그는 축하를 받고, 라 로슈는 그들을 리허설장으로 데려간다. 플라망과 올리비에는 백작부인과 남는다. 올리비에는 백작부인에게 백작이 소네트를 잘못된 사람에게 읊었다고 언급하며, 그 소네트는 원래 백작부인을 염두에 두고 쓰여졌던 것이라고 말한다. 올리비에는 백작부인에게 소네트를 다시 낭송한다. 플라망은 그것을 재빨리 음악으로 표현하기 위해 사라진다.
장면 5
플라망이 없는 사이, 올리비에는 백작부인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장면 6
플라망은 자신이 방금 작곡한 소네트를 들려주기 위해 돌아온다. 올리비에와 플라망은 소네트의 진정한 저작자가 누구인지를 놓고 말싸움을 벌인다. 하지만 백작부인은 그녀 자신이 진정한 저작자라고 결론을 내린다. 라 로슈는 올리비에를 리허설장으로 데려간다.
장면 7
플라망 또한 백작부인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다. 그는 백작부인에게 음악인지 시인지, 플라망인지 올리비에인지 결정해달라고 요청한다. 백작부인은 다음날 아침 11시에 답을 주겠다고 약속한다. 백작부인은 옆방의 리허설 소리를 들으며 홀로 생각에 잠겨있다. 그녀는 가벼운 다과를 가져다달라고 부탁한다.
장면 8
연습이 끝나고, 백작과 그의 여동생 백작부인은 그들의 연애관계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대화를 나눈다.
장면 9
다른 사람들이 돌아온다. 가벼운 다과를 서빙하는 동안, 라 로슈는 공연에 참여하게 될 발레리나를 소개한다.
플라망과 올리비에는 언어와 음악에 대한 논쟁을 다시 시작한다. 다른 사람들도 논쟁에 참여한다. 백작은 오페라라는 장르 전체를 비웃는다. 라 로슈는 듀엣을 부르는 두 명의 이탈리아 싱어를 소개한다. 라 로슈는 백작부인의 생일파티를 위해 그가 준비한 작품, 'The Birth of Pallas Athene'와 'The Fall of Carthage'를 발표한다. 일행은 그 아이디어가 너무 촌스럽고 허세가 넘친다며 비웃는다. 이 장면을 본 이탈리아 싱어들은 그들이 돈을 제대로 받을 수 있을지 걱정하며 음식을 챙긴다.
라 로슈는 결국 자신의 주장을 펼칠 기회를 얻어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을 강하게 논박한다. 그는 오페라에 대한 자신의 강한 신념을 표현한다. 그는 드라마를 통해 살과 피를 가진 생물로써의 인간을 다양한 측면에서 보여주고 싶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플라망과 올리비에에게 그들의 장르를 대표할만한 멋진 새로운 작품을 써보라고 명령한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깊은 감동을 받았고, 화해의 표시로 올리비에와 플라망은 오페라를 쓰기로 결정한다. 백작이 아이디어를 제시한다. 바로 오늘 이 저택에서 일어난 일들을 기록한 오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면서 말이다. 모든 사람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장면 10
일행들이 헤어진다.
장면 11
8명의 하인이 등장해서 그 날 있었던 일들을 그들의 관점 - 그들은 "백스테이지"의 관점이라고 표현한다 - 에서 이야기한다. 하인장이 그들에게 휴식시간을 부여한다.
장면 12
리허설 도중 잠이 들었던 프롬프터 무슈 토프(Monsieur Taupe)가 등장한다. 그는 하인장에게 그가 없으면 공연이 진행될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이 극장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지금 자신은 일행에서 홀로 떨어져버렸다고 푸념한다. 하인장은 그를 도와주겠다고 제안한다.
마지막 장면
백작부인이 하인장과 함께 등장한다. 하인장은 두 개의 메세지를 전한다. 하나는 백작이 그날 밤 저녁을 집에서 먹지 않을 것이라는 소식이고, 다른 하나는 올리비에가 다음날 아침 열한시에 오페라의 엔딩을 듣기 위해 전화하겠다고 말했다는 소식이다. 백작부인은 소네트를 듣고난 이후 작곡가와 시인이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다고 한탄하며 다음날 아침 같은 시간에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두 사람을 걱정한다. 그녀는 스스로 소네트의 두 소절을 불러본다. 그녀는 둘 중 누구를 더 사랑하는가? 고통스러운 고민을 하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진 후, 그녀는 거울 속의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가 평범하지 않은 오페라 엔딩을 생각해 낼 수 있을지 생각한다. 하인장이 준비가 끝났다는 말로 문제를 해결해준다.
=== 작품 해설 === <2015년 5월 8일 네이버캐스트 / 이용숙 글>
명곡 명연주
슈트라우스, 카프리치오
슈트라우스의 마지막 작품으로 오페라에서 말과 음악의 중요도를 논쟁하는 내용
1942년 10월 28일 뮌헨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초연
‘변덕’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온 음악 용어 ‘카프리치오’는 흔히 ‘기상곡(奇想曲)’이라고 번역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는 음악’이라는 뜻이 아니라 ‘기이한 또는 독특한 상상이나 생각을 음악으로 옮긴 곡’이라는 뜻이다. 대개는 짧고 즉흥적인 기악곡을 부르는 말이지만, 춤곡, 협주곡, 독주 소나타 등 다양한 형식의 악곡을 다 포함하기 때문에 정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단어이기도 하다. 오페라 [살로메]와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유명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64-1949)는 말년에 작곡한 오페라에 바로 이 제목을 붙였다.
[엘렉트라], [장미의 기사], [그림자 없는 여인] 등 슈트라우스 최고 걸작 오페라들의 대본을 쓴 오스트리아 작가 후고 폰 호프만스탈(Hugo von Hofmannsthal)이 1929년 아들의 자살에 충격받아 뇌출혈로 숨지자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역시 엄청난 충격에 휩싸였다. 죽을 때까지 함께 작업하고 싶었던 대본가를 잃어버린 허탈감은 회복하기 어려웠다. 그런 그 앞에 나타난 인물이 소설가이자 전기 작가로 유명한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였다. 그가 소재를 제공한 작품이 바로 [카프리치오]다. 그러나 유태인이었던 츠바이크는 나치가 집권하자 독일을 떠날 수밖에 없었고, 1934년 영국으로 피신했다가 브라질로 망명한 뒤 결국 그곳에서 1942년에 자살한다. 바로 [카프리치오]가 뮌헨에서 초연된 해였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영감을 얻은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 [극장 지배인]과 살리에리의 오페라 [음악이 먼저, 말이 먼저]였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오페라 무대 뒷얘기를 소재로 삼았다. 츠바이크가 직접 대본을 쓰지는 못했지만, 그의 아이디어는 지휘자 클레멘스 크라우스(Clemens Krauss, 1893-1954)와 작곡가 슈트라우스가 독일어로 함께 쓴 [카프리치오]의 대본에 살아남았다. 1775년 파리 근교 어느 백작의 저택이 이야기의 배경이다. 초연은 1942년 10월 28일 뮌헨 국립오페라극장에서 이루어졌다.
시와 음악 사이에서 갈등하는 여주인공
막의 구분 없이 통작으로 작곡된 [카프리치오]는 우아하고 서정적인 현악 6중주로 시작된다. 백작의 여동생인 소프라노 주인공 마들렌은 음악에 심취해 이 현악 6중주를 감상하고 있고, 그런 그녀를 사랑에 빠져 바라보는 작곡가 플라망(테너)과 작가 올리비에(바리톤)는 각자 자신의 무기인 음악과 시로 마들렌의 마음을 얻으려고 경쟁한다. 오페라에서 말(내용 전달)이 중요한가 음악이 더 중요한가를 두고 이들은 격렬하게 언쟁을 벌인다. 이에 연출가 라 로슈(베이스)가 가세해 극장과 연출의 중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이들의 논쟁은 당대 글루크(Christoph Willibald Gluck)와 피치니(Nicola Piccini)의 오페라 논쟁과 유사하게 발전해간다.
백작 저택에 초대받아 온 여배우 클레롱(알토)에게 반한 백작은 여동생 마들렌의 생일 축하 공연에 직접 출연해서 클레롱의 상대 역을 연기해 그녀와 더 가까워지려고 한다. 남매간인 백작과 마들렌은 예술과 사랑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주고 받으며 즐거워하는데, 백작은 자신이 순간을 따라 사는 사람이라고 말하며 마들렌에게 시와 음악 중 어느 쪽을 선택할 거냐고 묻는다. 마들렌은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다른 하나를 잃어버린다는 뜻'이라며 대답을 피한다.
연극 연습을 하던 클레롱과 백작이 방을 떠나자 올리비에는 백작이 조금 전에 연습하던 극 속의 소네트를 마들렌 앞에서 낭송한다. 그러자 플라망은 그 소네트를 즉석에서 음악으로 작곡하기 시작하더니 잠시 후 ‘작곡을 마쳤어요!’라며 악보를 들고 와 건반악기 앞에 앉아 노래하고, 올리비에는 완벽한 문학작품을 음악으로 망쳐놓았다고 분노한다. 플라망은 마들렌에게 열정적으로 사랑을 고백하지만, 마들렌은 내일 아침 11시에 저택의 서재에서 답하겠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마들렌은 오빠에게 두 사람에게 고백 받은 사실을 이야기한다.
연출가가 데려온 젊은 여성 무용수가 파스피에, 지그, 가보트에 맞춰 춤을 춘다. 춤을 구경하는 동안 손님들은 오페라에 관련한 토론을 계속한다. ‘군대의 명령을 노래로 전달하고 죽을 때도 아리아를 노래하며 죽는 오페라라는 예술은 정말 어이없다’는 이야기가 이어지다가 이탈리아 남녀 가수 두 사람이 와서 이별의 듀엣을 노래하는데, 소프라노와 테너는 서로 자신을 부각시키려고 경쟁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는 데다 음악은 이별의 정서에 걸맞지 않는 경쾌하고 밝은 분위기다. 그래서 메타스타시오의 슬픈 가사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이 오페라는 내용과 음악적 형식이 일치하지 않는 당대 이탈리아 오페라의 부조리한 면을 비판하고 있다.
연출가가 생일 축하 공연으로 무대에 올릴 두 작품을 소개한다. <팔라스 아테나 여신의 탄생>이라는 소재에 사람들이 비웃음을 터뜨리면서 '웃음의 중창'이 시작된다. 또 다른 극 <카르타고의 멸망>은 모두의 반대를 사 길고 격렬한 토론이 이루어진다. 결국 시와 음악을 결합해 오페라를 만들자는 마들렌의 제안에 다 함께 동의하고 '헌정의 4중창'을 노래한다. 오늘 하루 동안 일어났던 일을 오페라로 만들자는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다.
모두 파리로 출발한 뒤 하인들이 들어와 주인과 그 손님들을 비웃는다. 그때 집사 앞에 오페라극장의 프롬프터인 토프 씨가 나타난다. 집사는 돌아온 마들렌에게 '올리비에가 오페라의 결말을 듣기 위해 내일 아침 11시 서재에서 기다리겠다고 한다'는 말을 전한다. 내일 아침에 서재에서 플라망과 올리비에가 마주 서게 된 것이다. 마들렌은 끝까지 시와 음악 가운데 선택을 내리지 못한 채로, 행복한 고민 속에서 설레는 마음을 표현하는 ‘거울의 아리아’를 노래하고는 살롱을 떠난다.
20세기 오페라에 등장한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
[카프리치오]는 전체적으로 말하듯 노래하는 ‘파를란도 양식’의 오페라여서 아리아를 기대할 수 없지만, 슈트라우스의 [장미의 기사] 풍의 18세기 음악형식이 자주 등장해 후기 바로크 양식 및 로코코와 초기 고전주의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바로크의 지나친 기교주의를 극복하고 오페라를 자연스럽고 아름답게 만든 작곡가 크리스토프 빌리발트 글루크는 1714년 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산림감독원의 아들로 태어나 프라하에서 음악 공부를 했다. 교회 연주자로 일하다가 대학에 들어가 음악을 전공했고, 이탈리아 작곡가이며 오르간 주자인 조반니 바티스타 사마르티니에게 새로운 이탈리아 양식의 기악을 배웠다. 그는 1741년 밀라노에서 메타스타시오의 대본으로 첫 오페라 [아르타세르세(Artaserse)]를 성공리에 초연했고,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을 모방한 작품들을 발표했다. 1745년에는 런던에서 초청을 받았고, 1752년에 빈으로 가서 활동하다가 1762년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발표했다. [알체스테], [타우리스의 이피게니에] 등의 대표작이 더 있다.
오페라 탄생 초기 작곡가 야코포 페리(Jacopo Peri)의 작품에서는 음악이 가사를 따르고 뒷받침하는 종속적인 역할을 하고 있지만,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는 음악이 ‘문학의 시녀’ 역할을 하는 이런 상태를 과감히 벗어나 음악의 아름다움과 독립성을 살리려는 시도를 했다. 17세기 초부터 18세기 중반까지 이처럼 음악의 독립성을 추구하며 현란한 성악 기교 위주로 발전해간 바로크 오페라는 기교와 과장이 지나쳐 차츰 ‘음악을 괴물로 만들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1752년 파리에서 페르골레지(Giovanni Battista Pergolesi)의 오페라 부파 [마님이 된 하녀]가 공연되었을 때 파리 음악계는 두 파로 나뉘어 저 유명한 '부퐁 논쟁'을 시작했다. 륄리(Jean Baptiste Lully)와 라모(Jean Philippe Rameau)가 전통을 세운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들과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격렬하게 대립하며 각자의 예술철학과 미학관을 쏟아놓은 논쟁으로, 오페라에서 말(대본)이 중요한가 음악이 더 중요한가가 논의의 핵심이었다.
이 무렵 글루크는 이탈리아 오페라가 성악가의 음악적 기교에만 치중하다가 생명력을 잃었다고 여기고, 대본가 칼차비지와 더불어 당대 오페라 개혁에 착수해 대표작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를 작곡했다. '음악은 오페라 스토리가 요구하는 바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가졌던 글루크는 극과 음악 전체에서 ‘기품 있는 소박함(noble simplicity)’을 추구했다. 그러려면 우선 줄거리와 구성이 사실적이고 자연스러워야 했고, 음악 역시 지나친 꾸밈이나 장식으로 극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아야 했다. 글루크는 고대 그리스 연극에서처럼 합창단이 극중 사건에 직접 관여하게 했고 합창의 비중을 독창만큼 높였으며, 바로크 오페라에서 주로 사용된 레치타티보 세코(recitativo secco: 주로 쳄발로가 간소하게 반주하는 레치타티보) 대신 레치타티보 아콤파냐토(recitativo accompagnato: 오케스트라의 현악기 또는 여러 악기가 함께 반주하는 레치타티보)를 사용해 음악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
[카프리치오]는 1942년 뮌헨에서 초연된 현대 오페라이면서도 고전주의 시대 즉 글루크의 시대를 배경으로 삼아 글루크의 오페라 개혁에 대한 토론을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어 들려주고 있다. 사랑에 빠진 백작과 배우 클레롱은 “오페라는 어이없는 예술”이라고 비난하며 의기투합하며, 연극에서 대사의 아름다움과 의미를 특히 강조하는 배우 클레롱은 오페라 가사의 빈약함을 비웃는다. 그러나 백작의 여동생 마들렌은 이렇게 말한다. "글루크의 오페라는 달라요. 그는 대본작가를 이끌어주는 작곡가죠. 글루크는 우리 가슴속의 열정을 이해해요. 그래서 그 안에 숨겨진 힘을 끌어내는 거예요." 그러자 작가 올리비에가 반박한다. "글루크의 오페라에서도 언어는 음악의 의붓자식 취급을 받을 뿐입니다." 그러자 플라망은 "글루크 오페라에서만은 음악이 더 이상 언어의 시녀가 아니죠! 글루크는 음악을 언어와 동등하게 다뤘습니다."라고 주장한다.
끝까지 말(시)을 택할지 음악을 택할지 결론을 내리지 못한 채 ‘거울의 독백’으로 이 오페라를 마무리하는 마들렌. 플라망과 올리비에는 음악과 시의 의인화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추천 음반 및 영상물 (마들렌 - 백작 - 플라망 - 올리비에 순)
[CD] 군둘라 야노비츠, 디트리히 피셔 디스카우, 페터 슈라이어, 헤르만 프라이 등, 칼 뵘 지휘, 뮌헨 바이에른 방송교향악단, 1971년 녹음
[DVD] 르네 플레밍, 모르텐 프랑크 라르센, 조세프 카이저, 러셀 브라운 등, 앤드류 데이비스 경 지휘, 뉴욕 메트로폴리탄 극장 오케스트라, 존 콕스 연출, 2011년 실황(한글자막)
[DVD] (DVD) 르네 플레밍, 보 스코프후스, 미하엘 샤데, 마르쿠스 아이혜 등, 크리스토프 에셴바흐 지휘, 빈 국립오페라 오케스트라, 마르코 아르투로 마렐리 연출, 2013년 실황(한글자막)
첫댓글 <불멸의 오페라 3 / 박종호> 공연평 ★★★
르네 플레밍이야말로 <카프리치오>의 최고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데, 세 개나 되는 뛰어난 영상에서 주역을 맡고 있다. 이 역시 뛰어난 영상으로서, 탄탄한 배역들에 좋은 연출이 어우러져 있다. 플라망 역의 조지프 카이저와 올리비에 역의 러셀 브라운이라는 두 남자 가수들이 양쪽에서 받쳐 주고, 모르텐 프랑크 라르센(백작)의 여유 있는 연기도 일품이다. 라 로슈를 부르는 피터 로즈의 캐릭터도 좋다. 플레밍의 가창은 특유의 기품으로 가득하고, 앤드류 데이비스의 지휘와 메트 오케스트라의 음향도 아주 좋다.
"...이 작품은 오페라에 대한 그의 마지막 선언을 담고 있었다." - 내지 해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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