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짜로 캘리포니아 여행을 가기 위해 야구팀에 합류했다가 황금의 왼팔을 인정받아 메이저리거로 변신해 짧은 시간동안 최고의 기록을 수립한 선수가 있으니 그가 바로 샌디 쿠팩스(Sandy Koufax)다.
생애통산 165승 67패
퍼펙트 게임 1개를 포함,4년 연속 노히트노런을 기록한 샌디 쿠팩스는 1960연대 메이저리그를 대표하는 '황금의 왼팔'이다. 한시대를 휩쓴 슈퍼스타답게 쿠팩스는 1961년부터 1965년까지 불과 5년사이에 다른 투수들이 20년 걸려서 이룬 것보다도 더 많은 기록들을 남기고 '짧고 굵게' 야구인생을 마감했다.
샌디 브라운에서 샌디 쿠팩스로
샌디 쿠팩스의 원래 이름은 샌포드 쿠팩스로 샌디는 샌포드의 애칭이다. 그는 1935년도 다 저물어가는 12월 30일 브룩클린에서 태어난 전형적인 뉴요커다. 원래 아버지는 잭 브라운이어서 샌디 브라운이라 불리었으나 3살때 부모가 이혼, 어머니 이블린이 어빙 쿠팩스란 변호사와 재혼함으로써 의부인 어빙의 성을 따라 샌디 쿠팩스가 됐다.
브룩클린시절,라파이에트 고등학교에 다니던 샌디는 수줍음 잘타고 공부잘하는 모범생이었다. 노는 시간엔 농구대에 매달려 살았고 언제나 학교의 대표선수였다. 덕택에 졸업반이 되자 여러대학에서 체육장학금을 주겠다며 스카우트를 제의해 왔다. 물론 야구아닌 농구선수로 써였다. 겨울엔 농구를 , 농구경기가 업는 여름방학때면 야구를 했다. 이때만 해도 투수는 생각조차 못했고 그저 취미운동으로 1루수를 맡는 정도였다.
1953년 고교졸업과 동시에 신시내티 대학에 농구선수로 스카우트되어 갔다. 신입생인 샌디는 한게임 평균 10득점을 올리는 팀의 주전선수였다. 흔히 그렇듯이 인생의 전기(轉機)란 지극히 우연한 기회에 찾아오는 것이다. 대학교 2학년생으로 진학한 1954년 봄, 신시내티대학 야구팀이 남캘리포니아로 전지훈련겸 친선경기를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쿠팩스는 야구감독을 찾아갔다.
자기 돈을 안쓰고 캘리포니아 여행을 즐기자는 단순한 목적이었다. 감독은 쿠팩스의 투구가 마음에 쏙 들어 그를 원정야구팀의 투수로 집어 넣어줬다. 이것이 쿠팩스가 처음 마운드에 오른 계기였다. 이 원정경기에서 쿠팩스는 32이닝을 던져 51명의 타자를 삼진아웃시켰다.
우연뒤엔 우연이 또 따르는 법. 샌디의 투수내용을 지켜본 지미 머티란 야구기자가 샌디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했고 절친한 친구사이였던 앨 캄파니스(당시 브룩클린 다저스 스카우트부장.후에 LA 다저스 부사장겸 선수단장까지 지냈다) 에게 개인적이로 "신시내티대학에 왼손 황금의 팔을 가진 투수가 있다."고 귀뜸했다.
고향팀 브룩클린 다저스에 입단
이 기사 하나로 샌디는 대뜸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표적이 됐다. 뉴욕 자이언츠,보스턴 브레이브스, 피츠버그 파이어리츠 등이 달려들었으나 그의 매니저였던 의부 어빙 쿠팩스는 브룩클린 다저스와 계약해 버렸다. 브래이브스가 계약금 3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했으나 어빙은 계약금 1만 4천달러,연봉 6천달러를 제시한 다저스와 계약한 것. 이유는 단 한가지, '고향팀'이라는 것 뿐이었다. 당시 야구 규약으로는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서 4천 달러가 넘는 선수는 메이저리그에서만 뛰게 되어 있었다. 샌디 쿠팩스의 경우에는 농구선수여서 1-2년 마이너리그에서 연수를 받아야 했으나 이 규정때문에 1955년 다저스 선수명단에 낄 수밖에 없었다.
19살의 풋내기 샌디 쿠팩스는 재키 로빈슨, 로이 캄파넬라, 듀크 슈나이더, 피위 리지, 칼 푸리요, 돈 뉴컴같은 쟁쟁한 '여름의 사나이들(Boys of Summer, 1972년 로저 칸이 써낸 베스트셀러로 브룩클린 다저스의 명 선수들을 다룸)' 틈에 끼게 된 것이다. 워낙 쟁쟁한 선수들 틈에 끼어있으니 경기에 나갈 기회도 적었다. 5차례 선발로 나가 2승 2패한게 고작. 샌디의 성적은 형편없었으나 그해 다저스는 월드시리즈서 사상 처음 우승을 차지했다. 1956년 다저스는 다시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차지했으나 샌디는 10게임에 선발로 나가 2승 4패하는 참담한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
1958년 브룩클린 다저스는 서부행 열차를 타고 LA로 본거지를 옮겼다. 새 연고지에서 다저스는 185만명의 관중을 모으는데는 성공했으나 팀은 7위에 머무르는데 그쳤다. 샌디도 40 게임에 출장, 11승 11패라는 그렇고 그런 성적을 올렸다. 1959년 월터 엘스터 감독이 이끄는 LA 다저스는 대 반격을 개시, 결국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샌디도 이젠 신인의 틀을 벗어나 8월 31일엔 시카고 컵스의 18 타자를 삼진아웃시켜 메이저리그 한 경기 최다 탈삼진 타이기록을 세웠다. 또 10월 6일에는 비록 1:0 으로 패하긴 했지만 월드시리즈에서 화이트삭스를 상대로 빼어난 투구를 보여주기도 했다. 1960년에는 8승밖에 올리지 못했으나 175 이닝을 던져 197명의 타자를 삼진아웃 시키기도 했다.
서부의 영웅
이렇게 6년동안 C급 투수로 우울한 세월을 보내던 샌디에게 어느날 신의 계시 같은 우렁찬 충고가 들려왔다. 1961년 스프링캠프를 떠나는 버스속에서 포수 놈 쉐리가 들려준 말이었다. "어이 ! 샌디,너무 직구만 던질 생각하지 말고 커브나 체인지업도 조금 섞어 보는게 어때?" 이 신의 계시같은 쉐리의 충고에 따라 그 해 봄훈련은 변화구를 익히는데 열중했다. 그 결과 샌디는 그 해 18승을 올렸고 탈삼진 269개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그 전 해에 연봉을 깎아내리고 또 시원치 않으며 샌디를 방출해 버리려던 다저스의 버지 바바시단장은 샌디의 연봉을 올려주는 수 밖에 없었다. 다음해엔 14승 7패, 방어율 2.54로 내셔널리그 방어율 1위를 차지했다.
좀 더 많은 성적을 올릴 수 있었으나 파이어리츠와의 경기서 팔목부상을 당해 6 - 7월 두 달을 쉬어야 했다. 다저스 역시 플레이오프에서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패해 월드시리즈에 나가지 못했다. 1963년은 샌디를 위한 황금의 해였다. 30 게임에 선발로 나서 25 승을 거뒀고 방어율 1.88에 탈삼진 306개를 속아냈다. 월드시리즈에서도 2승을 올렸고 그 첫경기에서 15명의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냈다. 당연히 샌디는 리그 MVP 에 뽑혔고 투수 최고의 영예인 사이영상을 처음으로 탔으며(그 뒤 1965,1966년 두차례 더 수상) 탈삼진왕이 됐고 5년 연속 최우수 방어율상의 두번째 수상했다. 샌디 쿠팩스는 이제 권총대신 공을 든 서부의 영웅이 되었고 시즌이 끝나자마자 전국의 TV 프로그램에 초청되었으며 심지어 라스베가스에선 샌디를 주인공으로 한 '다저스쇼'를 만들기도 했다. 1964년 세번째 노히트로런을 달성한 뒤 다시 고질병인 팔꿈치 부상이 도져 뒤로 물러나야 했고 19 승 5 패로 만족해야 했다. 그러나 방어율은 여전히 1.74로 2점대 이하. 1965년 샌디 쿠팩스는 선발투수에서 구원투수로 돌아섰다.
이 역할바꿈이 큰 효과를 거두어 그는 29 구원승,8 패의 놀라운 성적을 거둘 수 있었다. 그해 9월 9일 샌디는 모처럼 선발투수로 나서 시카고 컵스를 퍼펙트게임(완전게임,안타와 볼넷을 내주지 않은 게임)으로 물리쳤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인 퍼펙트게임이었고 4년 연속 노히트노런을 이룬 것이다. 미네소타 트윈스와의 월드시리즈에선 2게임에 출장,모두 승리함으로써 다저스에 또 하나의 월드시리즈 우승을 선사했다. 샌디의 월드시리즈 방어율은 0.38. 이제 샌디가 등판하는 날이면 1만 5천에서 2만 5천명의 고정팬이 따라다니는 슈퍼스타가 됐다. 1965년 시즌이 끝나자 다저스엔 돈 드라이스페일이란 기린아가 입단했다. 왼손의 샌디,오른손의 돈은 다저스의 좌청룡 우백호로 1966년 시즌에서 명콤비를 이루었다. 신인 돈이 13승을 올리는 동안 에이스인 샌디는 27승을 올렸다. 방어율 1.73에 탈삼진 317개. 그러나 샌디는 자신의 운명과 미래를 정확히 내다보았다.
미련없이 그라운드를 떠나다
1966년 11월 샌디 쿠팩스는 다저스 구단과 단 한마디 상의도 없이 돌연 은퇴를 선언했다. 인기정상에서 미련없이 유니폼을 벗은 것이다. 공식이유는 팔꿈치 부상. 그러나 뒷날 그가 털어놓은 진짜 이유는 "구질구질하게 팀의 짐만 되는 노털투수로 은퇴하느니 인기있을때 그만두자는 속셈."이었다. 현역시절시절 총각으로 지낸것도 이런 샌디의 속셈의 한 단면. 은퇴한지 3 년뒤인 1969년 명배우 리처드 위드마크의 누이동생인 앤느 위드마크와 결혼,메인주에 보금자리를 차렸다.
이와 동시에 NBC-TV와 10년 전속 해설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6년간 해설을 하고 나서는 질렸던지 그 계약을 예전 다저스 동료이던 도루왕 모리 윌스에게 넘겨 주었다. 그리고 은퇴한지 13년뒤인 1979년 샌디는 잠시 친정집 LA 다저스로 돌아온 적이 있다. 다저스 스프링캠프에 투수 인스트럭터로 초빙된 것. 1972년 샌디 쿠팩스는 36 살의 나이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어 최연소 명예의 전당 헌액자가 되는 신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그만큼 그가 1960 년대초에 남긴 업적은 뛰어났던 것이다. 1970년대 야구팬들은 아마도 놀란 라이언을 최고의 투수로 손꼽을지 모른다. 그러나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야구를 모두 지켜본 팬들은 지금도 샌디 쿠팩스를 '야구사상 최고의 투수'로 손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짧고 굻게' 선수생활을 했으며 팬들이 아쉬워할 때 미련없이 마운드를 떠났기 때문일 것이다.
키 : 6-2
몸무게 : 198 파운드
피칭 : 좌투
타격 : 우타
포지션 : 투수
본명 : 샌포드 쿠팩스(Sanford Koufax)
1935년 12월 30일생
로스엔젤레스 다저스에서 선수생활
1961년 - 1966년까지 129승 47패 기록, 4번의 노히트 노런
5번의 방어율 타이틀 획득
4번 탈삼진왕 차지, 3번 사이영상 수상, 1963년 내셔널 리그 MVP 수상
1965년 한시즌 382개 탈삼진 기록
통산 165승 87패, 탈삼진 2396개, 방어율 2.76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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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디 쿠팩스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좀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