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키건 소설 『이처럼 사소한 것들』(다산책방, 2023)을 읽고
두 번 읽으면 더 깊은 뜻을 찾아 읽을 수 있다는 옮긴이의 설명을 보았다. 이 책은 숨겨진 뜻이 내포된 깊이 읽기가 필요한 책이다. 『맡겨진 소녀』을 읽을 때처럼, 작가의 깊은 사유가 담겨 마음을 울리는 문장들이 아주 많았다.
2009년에 쓰인 『맡겨진 소녀』는 같은 해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했고 《타임스》에서 뽑은 ‘21세기 최고의 소설 50권’에 선정되었다. 《가디언》은 키건의 작품을 두고 “탄광 속의 다이아몬드처럼 희귀하고 진귀하다”라고 평한 바 있다. 이 책은 2022년 오웰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부커상 최종후보에 올라 “아름답고 명료하며 실리적인 소설”이라는 심사위원들의 찬사를 받았다. - 작가소개에서 편집
매서운 추위 탓에 석탄 · 목재상인 펄롱은 주문이 밀려들면서 정신없이 바쁘다. 펄롱은 배달을 도맡았고, 일꾼들은 배달할 물건을 포장한다.
펄롱을 소개하는 문장에서 “펄롱은 빈주먹으로 태어났다.”라고 표현된다. 펄롱의 빈한한 가정환경을 말해 준다. 유아기를 주로 엄마가 일했던 미시즈 윌슨 집에서 보냈다. 펄롱이 자라자 미시즈 윌슨이 펄롱을 돌보았다. 잔심부름도 시키고 글도 가르쳤다.
어머니는 펄롱이 열두 살에 죽었다. 아버지는 미상이었다. 펄롱은 학교에서 비웃음과 놀림을 당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한 두 해 기술학교에 다니다가 석탄 야적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일머리가 있었고 사람들하고 잘 지낸다고 정평이 났고 건실한 개신교도 특유의 습관을 들여 믿음직했고 일찍 일어났고 술을 즐기지 않았다.”(p17~18)
아내 아일린과 딸 다섯과 함께 시내에 살았다. 펄롱은 “힘들게 사는 사람이 너무 많잖아.”(p20)라고 말하며 아내 아일린에게 자기가 만난 불쌍한 사람들 이야기를 한다. 그들을 도와준 이야기도.
“모든 걸 다 잃는 일이 얼마나 쉽게 일어난다는 걸.”(p22)
“멈춰서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있다면, 삶이 어떨까?”(p29)
1985년이었고,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런던, 보스턴, 뉴욕 등으로 이민을 떠나던 시기. 펄롱은 어려운 시기를 다른 사람들과 원만하게 지내며 다섯 딸을 잘 키워내고 싶어 한다. ‘딸들이 잘 커서 이 도시에서 유일하게 괜찮은 여학교인 세인트마거릿 학교를 무사히 졸업하도록 뒷바라지하겠다고 결심’한다. 그런데도 펄롱은 이유 없이 걱정과 불안을 지니고 산다.
펄롱은 스스로 어려운 처지를 겪으며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보다 더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도우려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행여 그나마 평온한 자신의 가정에 불행이 닥쳐올까 봐 걱정이 컸을 것이다.
근처에 있는 수녀원은 동네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곳이다. 기초 교육을 제공하는 직업 여학교와 세탁소도 겸업했다. 아이를 낳은 여자들을 보호하는 모자 보호소였다. 그곳에서 노동력을 착취하고 감금되어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소문들이 떠돈다.
펄롱은 수녀원에 석탄을 배달 가게 된다. 어린아이들이 마룻바닥을 닦는 모습을 발견한다. 한 아이가 자신들을 밖으로 나가게 도와달라고 사정하지만, 펄롱은 외면하고 돌아온다. 아내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말해보지만, 우리와 상관없는 일이라는 대답을 듣는다.
“뭔가 작지만, 단단한 것이 목구멍에 맺혔고 애를 써 보았지만 그걸 말로 꺼낼 수도, 삼킬 수도 없었다. 끝내 펄롱은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것을 그냥 넘기지도 말로 풀어내지도 못했다.”(p56)
펄롱의 아내 아일린은 남편의 생각에 동조하지 않는다. 자기의 가정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키워야 할 딸이 다섯이나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는 생각도 든다. 수녀원을 불편하게 한다는 것 자체가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펄롱은 크리스마스 주에도 수녀원에 배달을 가게 된다. 연탄 창고에 한 여자애가 갇혀 있었다. 아이는 무슨 말인가를 하려다 참고, 수녀원장은 차를 대접하거나 크리스마스라면서 돈을 주기도 하는 등 가식적인 친절을 베푼다. 수녀원은 곳곳의 문이 잠겨 있는 모습이 보인다. 펄롱은 갓난아이가 있다는 여자애를 외면하고 성상에 미사를 간 자신을 위선자라 생각하며 내내 괴로워한다.
펄롱은 딸들이 다녀야 할 명문 여학교와도 연결된 곳이라 딸들에게 불미스러운 일이 생길까 두려워서 쉽게 행동하지 못한다. 펄롱은 계속 수녀원의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품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갈 시간인데도 어두운 밤 수녀원으로 향한다. 수녀원에서 아이를 구해서 집으로 향한다.
“아이를 데리고 걸으면서 펄롱은 얼마나 몸이 가볍고 당당한 느낌이던지. 가슴속에 새롭고 새삼스럽고 뭔지 모를 기쁨이 솟았다.”(p119)
“변변찮은 삶에서 펄롱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이와 견줄 만한 행복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p120)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일은 이미 지나갔다. 하지 않은 일, 할 수 있었는데 하지 않은 일 – 평생 지고 살아야 했을 일은 지나갔다.”(p121)
옮긴이의 글에서
펄롱은 평범한 일상의 안정된 생활을 살아가지만, 어려운 처지인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수녀원에 갇힌 여자아이를 구하지 못해서 전전긍긍한다. 자기의 평화로운 삶에 돌을 던지는 행위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그 소녀를 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자신의 어머니와 자신을 돌봐 준 미시즈 윌슨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보답하는 일이며, 소녀를 구하는 일이 마치,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께서 돌아가시기 두 달 전에 유언처럼 말씀하셨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악의 편입니다.”
펄롱도 그랬다.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며 괴로워한다. 스스로 실천하고 난 후에야 마음의 자유를 얻는다. 아이를 구해서 돌아오는 길에 일상 동안 처음으로 행복했다고 고백한다. 사랑과 평화의 상징인 수녀원은 세상이 크리스마스라고 행복한 분위기에 들떠 있는 순간에도 폭력과 감금이 자행되는 무자비한 곳이었다. 그곳에서 한 아이가 해방되어 나오는 장면은 가슴 뭉클한 울림을 준다. 전혀 사소하지 않은 큰 울림을.
어떤 책을 읽은 사람은 변화해야 하는데, 우리는 이 책을 덮으며 어떤 변화를 느껴야 할까? 옆 사람에게 다정하기, 내 주변을 불행하게 만들지 않기, 주위를 향해 마음 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