쌍계사 십리 벚꽃길
섬진강 유역에 있는 대나무 숲길
노고단 정상에는 화랑정신이 깃든 돌탑이 반긴다
난생 처음으로 올라간 노고단(1507m)에서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양말을 다 벗은 맨발로 앉아 햇볕을 쬐었다. 성삼재에 자동차를 파킹해 놓고 90분 정도 또박또박 걸으니 정상에 도달했다.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아직은 무릎관절이 벼텨주니 가고 싶은 산꼭대기까지 거뜬하게 오른다는 것.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감사하는 마음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한다. 모든 의식과 감정까지 온 몸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갖다 보면 초월적 경험을 한다는데 노고단 정상에서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
9박 10일을 구례에서 보냈다. 누군가는 뭐 볼게 있다고 9박 10일을 한 지역에 머무느냐고 말하나 우리에겐 2박3일보다 짧게 느껴졌다. 해마다 봄이면 벚꽃필 무렵 섬진강유역이 아름답다고 누누이 들었지만 실상 나에게 봄은 그리 자유로운 편이 아니었다. 매 년 봄이면 4월에 열리는 전국화곡어머니대회 팜플랫 준비하느라 심리적인 여유가 없는 계절이다. 약간 어폐가 있지만 올 봄 구례 여행은 코로나가 준 선물이었다.
윤스테이를 촬영했다는 쌍산제, 기도를 하면 대부분 이루어 진다는 사성암, 홍매화 사진전으로 봄이면 전국의 사진작가들을 모이게 하는 화엄사, 하필이면 쌍계사벚꽃 십리길을 걸어 올라간 쌍계사는 '고산' 주지 스님이 입적하셔서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벚꽃이 필 때만 섬진강에서 캔다는 민물 벚굴. 내 손바닥보다 큰 벚굴을 초장에 찍어 산수유주에 곁들이니 화개장터가 더욱 화려해 보였다.
바람이 불면 함박눈이 쏟아지는 듯 한, 하늘을 가린 하얀 벚꽃 터널을 얼마나 걸었는지 모르겠다. 누구말대로 꽃길만 걸으라더니 구례에 가면 그 말이 단순한 레토릭이 아님을 알게 된다. 벚꽃 아래에서 보면 누구나 아름답다. 꽃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 아름다움을 보고 느낄 줄 아는 심안이 있으니 사람도 꽃이 될 수밖에.
고지대의 산수유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3월 말이 되어도 의연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최불암씨가 나오는 '한국인의 밥상' 촬영지에 운 좋게 들어가 상차림 준비 과정을 구경할 수 있었다. 산수유는 가까이 보면 꽃이라 할 수 없을 정도 연약하나 멀리서 보면 은은한 노란빛으로 확실한 봄을 알린다.
토지면 문수리를 두 번이나 갔다. 우리가 인문학을 공부할 때 강의하시던 박하선 사진작가 선생님를 만나기 위해 문수 저수지를 끼고 산꼭대기 별장을 찾아갔다. 경사가 얼마나 심한지 한계령이 떠올랐다. 박하선 선생님은 오지 여행하는 사진작가로 세계적으로 유명한 분. 특히 티벳의 장례의식을 담은 사진 ‘天葬(천장)’으로 '2001 World Press Photo' 상을 수상했다. 두 부부가 황토로 지었다는 미니멀 별장은 신세계를 보여줬다. 그렇게 소박하면서도 특별할 수 있는 것일까? 산과 산 사이에 보이는 문수 저수지는 오묘한 빛을 발했고 예술가의 아내가 차려준 밥상은 깊은 정을 담아냈다.
또 한 번 문수리에 가게 된 것은 올해 78세 되신 최로사님댁에 초청 받은 것. 아담하면서도 정겨운 실내 장식도 멋스러웠지만 손수 가꾸셨다는 750평의 정원은 알록달록 봄을 품고 있었다. 정원 위쪽에서 바라보니 섬진강 유역에 핀 흰 벚꽃 길까지 한 눈에 들어왔다. 한 달에 절반을 공기 좋은 구례에서 보낸다니, 크게 놀랐다. 경계를 벗어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거미줄처럼 엉킨 인연의 끊을 잠시 놓고 홀연히 떠나는 것,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야말로 자유인으로 넉넉해진 시간을 성경필사하고 손수 흙 만지며 정원을 가꾸고 이웃과 나누는 삶. 꿈같은 삶을 간접 체험하게 되었다. 또 자기다움이란 무엇인지, 내면의 에너지란 무엇인지, 멋지게 나이 들어가는 것은 무엇인지, 로사 형님은 내게 숙제 같은 의문을 갖게 했다.
짬을 내 중간 중간 테니스를 하면서 구례 여성 동호인들과 사귀게 되었다. 마지막 날엔 산에 가서 쑥을 캐고 고사리를 뜯었다. 유명한 지리산 흑고사리를 찾아 직접 내 손으로 뜯다니, 너무나 놀라운 일이었다. 금방 뒤돌아보면 어디선가 쑥 쑥 나타나서 자꾸 발길을 멈추게 했던 고사리들, 미나리들, 이번 여행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특히 유샘과 미란 어머님과 이모님 덕분에 더욱 알찬 여행이 되었다. 이번 가을엔 그렇게 유명하다는 피아골 단풍 맛을 볼 계획이다.
바빠서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늘 입에 달고 살아왔던 나는 여행을 떠나는 것만큼은 반드시 실천해 보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13년 동안 세계 곳곳을 배낭여행 하면서 직 간접적으로 경험했던 무수한 고생들이 나의 의식전환에 크게 기여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소설가 백영옥씨는 "삶을 충실히 사는 많은 사람의 지혜 속의 시간은 생기는 게 아니라, 끝내 만드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자기 효능감’이 높아지는 비밀의 열쇠가 있다. 그것은 수많은 ‘바쁨’ 속에 휘둘리지 않고, 내가 시간의 진짜 주인이 되는 것이다."라고 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자기 효능감을 높일 수 있으나 나에겐 여행하고 글쓰는 것이 최고였다.
2021.04.14 선순.
벚꽃이 필때만 섬진강에서 자란다는 민물 굴, 벚굴이라고 한다. 생전 처음 맛보았다.
아래 기사는 50여 년 테니스계에 몸담고 다양한 봉사를 하신 최로사(78세) 형님 인터뷰.
장미클럽 회원들과 함께 구례 로사님댁에서 찍은 사진
인터시티 한국 대표들과 한 컷
50년 테니스로 건강과 행복을 키운 최로사
구례에서 취재하던 중 최로사(78세)님을 만났다. 로사는 세례명으로 1980년 대부터 테니스 발전을 위해 소리 없이 노력한 분으로 유명하시다. 한결같다는 표현이면 적당할까? 당시 여성 대표클럽이었던 화곡어머니클럽에 버금가는 장미클럽을 창단해서 40여년 활동하며 현재까지 후배들을 후원하고 계신다. 또 시니어테니스연맹(구한국 베테랑 테니스연맹) 창단하던 해부터 아시아 여러 나라와 국제교류를 하는 아시아인터시티 (Asia Inter-city Team tennis Tournament) 행사 때마다 주된 역할을 해 왔다. 외국인들과의 소통에 지장이 없을 정도의 외국어 실력과 원더우먼이라는 애칭에 맞게 다방면으로 탁월한 기량의 소유자였다. 그러한 이유로 3년 전 대한테니스협회 회장으로 부터 공로상을 받았는데 순수 동호인이 이 상을 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자연과 더불어 살고 싶다는 소망으로 17년 전 구례로 내려와 한 달에 절반은 서울 그 나머지는 구례에서 생활하며 다양한 삶을 일궈내고 있는 최로사님의 테니스에 관한 인생이야기를 들어본다.
테니스는 언제 어떻게 시작했나요?
출산 후 몸이 좋지 않아 진료 받으러 갔는데 담당 의사선생님이 쓰던 라켓까지 주며 권유하셨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테니스가 평생 이렇게 몸을 건강하게 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하지 못했는데 뒤돌아보니 너무나 감사한 인연이었다.
장미클럽은 어떻게 창단하셨는지요?
1982년 당시는 한국여성테니스가 소수의 그룹만 있었고 매 주 금요일 정기적으로 만나는 멤버중 대부분 화곡어머니클럽 회원들이었다. 클럽 대항 단체전 무궁화배가 열리는데 개인전에서 두각을 내던 몇 몇이 도원결의를 했다. 운동을 하면서도 장미처럼 예쁘고 향기를 품은 테니스인으로 살자는 뜻의 ‘장미’라는 클럽 명을 지었는데 정말 회원가입 하고나면 태도나 말씨가 순화되고 외양마저 예뻐지는 변화를 느끼게 되었다. 현재 회원은 22명. 주 2회 월,수 강동에 있는 명일테니스장에서 모여 운동한다. 장미클럽 회원이라는 자부심을 가진 후배들이 건강하고 발랄하게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큰 기쁨이자 뿌듯한 보람이다.
연례행사인 Asia Inter-city Team tennis Tournament 라는 대회를 간략하게 설명해 주신다면?
아시아 인터시티는 1986년 한국의 홍종문, 홍콩의 휴세광, 일본의 가와테이 에이이치 세 분이 모여 동아시아 시니어 테니스 멤버들 사이의 친선과 단결을 도모하기 위해 창설했다. 그 이후 1987년 한국 베테랑 테니스연맹 (현 시니어 연맹)이 만들어졌고 매 년 아시아 각 국을 순회하며 개최가 된다. 도쿄, 베이징, 상하이, 방콕, 싱가포르, 미국, 로스앤젤레스 등의 대표선수들이 참석한다.
시니어 연맹 창단 때부터 활동하셨다는데 어떤 추억들이 있나요?
참, 많은 혜택을 받았는데 그중 으뜸이 건강과 다양한 친구들이다. 테니스 국제적인 교류를 통해 알게 된 각 국의 대표선수들과의 인연, 그리고 국내의 우수한 동호인들과의 사귐을 통해 인생의 폭이 넓어지고 깊어졌다. 특히 1988년 중국이 개방되지 않았을 때 비공식적으로 체육회 통해 인터시티 한국 대표로 북경에 가서 공산당 고위 간부들과 운동하고 놀랄 정도의 다양한 음식문화를 경험한 것은 잊지 못할 추억이다. 80년대 한국대표로 태국등 해외를 방문하면 거의 국빈 예우를 하듯 최고의 대접을 받았는데 이 모두가 테니스가 준 선물이었다.
가족들도 테니스를 하나요?
부부가 함께 테니스를 했다. 남편과 뉴욕에서 3년 여 생활할 때 다양한 한국 사람을 만나게 한 촉매제도 테니스였다. 테니스 실력이 괜찮은 편이어서 곳곳에 초대되어 많은 환대를 받았다. 미국 사람들은 상대가 잘 하는 부분은 과감하게 인정해 주는 장점이 있다. 딸 내외가 현재 미국에서 주말마다 리그전에 참석하며 테니스를 하는데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가장 훌륭한 유산이 어릴 적 테니스를 가르쳐 주신 것이라고 한다.
지방에서의 생활은 어떤가요?
자유인이 된다. 공기 좋고 아름다운 곳에서 내가 원하는 삶을 살고 있어 좋다. 관계에 이끌리지 않고 자기 주도적 삶을 살 수 있다. 요리도 더 충실해 졌고 언제든지 운동하고 싶은 날에는 구례 동호인들과 어울려 테니스를 한다. 시간에 쫓기던 서울 생활과는 완전 다른, 이웃과의 나눔을 통해 삶의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긴 시간 인터뷰에 답변을 하면서도 전혀 피로한 기색이 없는 최로사님은
"주부가 건강해야 온 가족이 건강하다. 건강 지킴이로는 테니스가 최고의 운동이고 테니스는 아무리 예찬해도 끝이 없다는 것을 늘 후배들에게 전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까지 장미클럽 회장이었던 오세정은 "장미클럽 원로 중 유일하게 활동하고 계시는 최 고문님이 지켜봐 주시는 것만으로도 회원들의 정신적 지주로서 든든한 울타리가 되고 있다"며 "자주 참석은 못하지만 오실 때마다 회식은 물론 회원들 간의 끈끈한 친목과 우애가 넘치는 분위기로 이끌어 주셔서 회원 모두가 감사한 마음으로 존경한다"고 전했다. 또 "운동을 떠나 사회생활에 있어서도 회원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는 모범적인 면면은 아름다운 노년의 롤 모델이시다"고 전했다.
겨울 추위를 이겨내고 자란 초록의 부추를 한 바구니 잘라 챙겨주시는 로사님의 손길에서 인생의 목적은 꼭 행복해 지는 것만이 아니라 의미 있게, 명예롭게, 또 꿈꾸던 세상을 실현하며 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돌아왔다.
글 사진 송선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