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련(寶蓮)을 직역하면 보배(寶)로운 연꽃(蓮)이라는 뜻이다.
무슨 사연이 있어 보련산일까?
연하(蓮河)리라는 마을 이름도 역시 연꽃과 관련있어 보인다.
또한 날머리에서 만나는 노은(老隱)이라는 지명은 늘그막(老)에 은자(隱者)의 삶을 살라는 뜻일까?
중부내륙고속도로 북충주IC에서 불과 7~8km 거리에 있는 그리 알려지지 않은 산이다.
정상 북쪽의 앙성면 돈산리와 능암리엔 탄산온천이 개발되어 있고 온천지구를 비켜선 남한강변엔 예전부터 수석(壽石)산지로도 유명하다.
산자락엔 보련이와 장미 남매의 슬픈 전설이 서려있다.
연하리 470번지에는 우리나라 대표적 현대시인인 신경림(1936~ )선생의 생가가 있다.
예술원 회원으로 1955년 ‘낮달’로 등단하여 제6회 만해상을 비롯, 총 10여 회의 화려한 수상경력을 갖고 있다.
1950년 후반까지 여기에서 거주했으니 학창시절과 청소년시절을 대부분 이곳에서 보낸 셈.
생가를 방문하고 돌아보는 연하리의 다방거리는 마치 삼사십여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빠뜨릴 수 없는 또한가지는 명성황후의 자취가 남아있는‘명성황후유허지’답사이다.
명성황후(1851~1895)는 민치록(閔致祿)과 한산이씨(韓山李氏)의 외동딸로 여주 능현리에서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에 고종비(高宗妃)로 책봉되어 궁중으로 들어가 친정(親政)을 선포한 고종의 조력자로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한다.
1882년 고종 19년에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충주 노은면 국망산 남쪽 가신리 515번지인 이음성(李陰城)의 집에 피신하여 50여 일 간 머물게 되었다.
이때 한양소식이 궁금한 명성황후는 신흥동 뒤편 금방산 산마루에 올라 한양 쪽을 바라보며 환궁할 날만을 기다렸다고 한다.
금방(金傍)산이 국망(國望)산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다.
그 후 비운의 명성황후는 1895년 을미사변(乙未事變) 때 일본 자객(刺客)들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되었고 시신은 증거인멸을 위해 석유로 불태워졌다.
산행코스: 하남고개(하남현)-석굴-스핑크스바위-보련산-남서릉-채석장-연하리-신경림생가 (약 6km,3시간)
* 이 개념도엔 우리가 내려온 남서릉에서 보련골로 내려서는 등로가 표시되어 있다.
노은면에서 앙성면으로 넘어가는 49번도로의 고개마루가 두 면계(面界)인 하남고개.(고개에는 주차장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비록 화장실까진 없지만 제법 넓은 주차장이...
하남고개는 해발 340m.
하남고개의 등산로 안내판.
안내판 뒤의 임도를 따라 오른다. (49번도로 반대쪽은 국망산)
콘테이너부스 뒤의 산길로 접어들지만...
다시 임도로 내려서고 철탑이 길을 가로 막으면 이정표가 가리키는 철탑 우측으로 에두르게 된다.
철탑 입구의 이정표.
다시 만나는 같은 이정표.
능선을 타고 오른다.
이정표.
돌아보니 하남고개 위로 국망산이 우뚝하다.
다시 국망산.
이정표
기막힌 전망대다. 정면으로 눈덮힌 보련산이 손짓한다. 우리는 이곳에서 식당을 차렸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보련산.
아내가 싸 준 돈까스버거를 후딱 해치우고 먼저 길을 나서서 만난 석굴.
석굴 안으로 들어가서 바깥을 내다보니 보련산이 우뚝하다. 석굴은 능선 좌우를 관통하고 있었다.
남한강 방향의 온천지구쪽이다.
능선엔 분재같은 소나무들이 도처에 늘어서 있다.
늙은 소나무 -신 경 림-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여자를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사랑을 안다고
나이 쉰이 넘어야
비로소 세상을 안다고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
바람소리 속에서
이렇게 말하지만
쉰이 넘어도 알 수 없는 게 여자이고,사랑이고,세상이라 한다. ('늙은 소나무들은 이렇게 말하지만'하며 전체를 부정하고 있다.)
그건 환갑을 넘어 곧은 백살이 돼도 모를 일이다.
가까이 다가오는 보련산.
스핑크스바위라고 불리어진다. (이 스핑크스바위가 있는 708봉에서 북동릉을 타고 가면 돈산리 온천지구로 내려가게 된다.)
스핑크스(sphinx)는 피라밋을 지키고 선 파라오(이집트의 최고 통치자)의 모습으로 머리는 인간이고 몸은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는 일종의 조각품.
거기에는 이러한 신화가 전해진다.
스핑크스는 (발이 4개가 되기도 하고 2개가 되기도 하고 3개가 되기도 하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수수께끼를 내어 답을 못맞추는 사람들을 잡아먹었다.
마침내 오이디푸스가 '사람'하고 정답을 맞추자 스핑크스는 그 자리에서 자결했다.
이 신화는 어릴 적 수수께끼 맞추기를 하면서 한 번쯤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피라밋을 지키고 선 스핑크스의 모습<자료사진>. 닮았나?
앞서 간 일행들(현자 애숙씨)한테 전화가 걸려온다. 정상인데 "어디로 가야 하느냐?"며 묻는다.
"이정표를 읽어 보세요."하였더니 줄줄이 읊는다. 그러면 "우측 방향의 보련마을로 가세요. 직진의 돈산온천으로 가면 반대방향임다요."
능선길.
온천지구 방향.
등로엔 분재같은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데크 전망대가 있는 정상에 닿는다.. 우리도 앞서간 일행들의 발자국을 따라 이정표상의 보련마을로 방향을 잡는다.
데크 전망대 뒤로 난 북서릉을 따라 노은면이 보인다.
우리가 걸어온 능선길과 하남고개 너머로 국망산이...
보련산엔 정상석이 무려 세 개.
정상의 데크전망대에서 직진방향으로 쳐다보니 사진의 맨 왼쪽봉이 쇠바위봉(까치봉 600m)인갑다.
우측으로 나란히 도열한 세 개의 봉은 725봉과 578봉 능선이고...
하산 후에 가만히 들여다보니 가까이에 있는 저 725봉을 가기 전에 우측 사면을 따라 보련골로 내려가면 보련폭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눈 온 후 앞서간 사람들이 없어 러셀이 되지 않은 산길을 찾아 내려오기란 그리 쉽지는 않았을 터.
보련이와 장미 남매의 슬픈 전설.
등반내내 눈에 들어오는 국망산과 그 아래론 하남고개로 올라가는 49번도로.
눈에 파묻힌 산길을 찾아 내려서는 데는 능선보다 좋은 곳은 없을 터.
벤치지점의 이정표.
왼쪽 보련골 너머론 578봉이 뿅긋하게 보인다.
보련골로 내려설려고 내내 기웃거리다가 제법 반듯한 길을 따라 왼쪽 사면으로 슬슬 붙어 보았지만 이젠 보련골에 러셀이 된 등로가 보이지 않는다.
하는 수 없이 능선을 따라 곧장 내려서다 능선이 끝나가는 헷갈리는 지점에선 우측 작은 지계곡으로 잠깐 치고 내려섰더니...
에고~~이기 어데고?
채석장이다. 이제 능선은 돌을 캐내고 나서 벼랑으로 둔갑했다. 그래서 벼랑을 피하여 우측으로 살살 돌아 내려간다.
선답자들이 나름대로 길을 내 놔서 그리 어렵지는 않다.
내려와서 돌아본 궤적.
아이젠과 신발을 자갈과 눈밭에 문질러 닦고...
고개를 드니 어휴~
채석장길을 따라 내려간다.
다시 돌아본 모습.
사진 오른쪽의 봉우리가 있는 능선에서 우측으로 내려서야 보련골이지만 그 땐 굳이 보련골로 내려갈 이유가 없었다.
나는 신경림 시인의 생가를 둘러보아야 하기 때문. (버스가 보련골 보련사에 있는줄은 나중에 알았고...)
길을 따라...
49번도로인 하남고개 가는 길에 나왔다. 채석장 입구엔 (주)혜광산업과 (주)이레산업 간판이 붙어있다.
49번도로에서 노은면 연하리를 바라보니 대강 6~700m의 거리.
연하리 버스정류장에서 뒤돌아보니 녹색 건물 뒤로 나 있는 능선이 우리가 내려온 능선이고,우측 움푹 꺼진 계곡이 보련골이다.
'민족시인 신경림선생 출생지 200m'안내판.
'신경림생가 100m'안내판
길가에 한그루 고목이 서 있다. 고목뒤로 보이는 노란 스레트지붕이 생가.
하나도 꾸며지지 않아...
안내판이 없다면 어디가 어디인지 도무지 모를 판...
녹슨 파란 철문 옆의 도로명 주소.
이끼가 덕지덕지 낀 블럭 담 넘으로 카메라를 슬며시 집어넣는다.
무표정하게 쳐다보는 저 견공께서 으르릉거리며 죽으라고 짖을 것만 같은데...
원형보전 차원에서 집수리를 못하게 하는 듯 방치된 느낌이다.
나그네의 생각엔 아무래도 신경림선생이 돌아가시기만을 바라는 것 같다.
여든이 다 돼가는 선생님이 돌아가시면 생가는 선생의 문학관으로 꾸며질 터이고,지금 거주하는 주민은 보상을 받고 이주를 할 것이고...
목계장터 -신경림-
하늘은 날더러 구름이 되라 하고
땅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네.
청룡(靑龍) 흑룡(黑龍) 흩어져 비 개인 나루
잡초나 일깨우는 잔바람이 되라네.
뱃길이라 서울 사흘 목계 나루에
아흐레 나흘 찾아 박가분 파는
가을볕도 서러운 방물장수 되라네.
산은 날더러 들꽃이 되라 하고
강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산서리 맵차거든 풀 속에 얼굴 묻고
물여울 모질거든 바위 뒤에 붙으라네.
민물 새울 끓어 넘는 토방 툇마루
석삼 년에 한 이레쯤 천치(天痴)로 변해
짐부리고 앉아 있는 떠돌이가 되라네.
하늘은 날더러 바람이 되라 하고
산은 날더러 잔돌이 되라 하네.
1인칭 화자(話者)의 독백으로 유랑인의 삶의 모습을 잔잔히 그리고 있다.
구름과 바람은 떠남의 이미지, 들꽃과 잔돌은 정착의 이미지가 아닌가?
목계나루가 있는 목계장터는 돈산과 능암의 온천지구에서 가까운 남한강변에 있다.
연하리 다방골목은 마치 3~40여 년 전의 영화 셋트장처럼 보인다.
다방골목을 벗어나 버스를 찾아 두리번 거리다 결국은 전화를 건다. 보련사 주차장에 있으니 일행들을 데리고 오라고 한다.
연화1리회관에서 보이는 저 다리는 연하교이고 노은교는 우측 아래에 있다.
연하교 옆에 보련사600m안내판이 붙어있다. 나는 이 지점에서 함께 내려온 일행들께 전화를 하여 기다렸다가 올라갔다.
보련사 앞을 지나 새로 잘 꾸민 주차장이 보인다. 빨간 지붕이 보이는 계곡안이 보련골.
버스가 보련골 안에 있으니 잘 못 내려온 사람들은 잘 찾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 가벼운 헤프닝.ㅠㅠ
한참이나 있으니 대부분의 회원들이 하산을 한다. 국사봉(480)을 둘러 계곡을 치고 내려왔다고 한다.
주차장을 만들면서 예전에 있던 우물을 그대로 둔 듯.(우물의 물은 줄줄 넘쳐 흐르고 있었다.)
뒷풀이가 끝난 뒤 3~4km거리의 '명성황후유허지'를 찾았다.
'명성황후피난유허비'
행궁건립을 시도하다 도중에 멈춘 주춧돌이 당시의 역사적 배경을 말하는 듯하다.
명성황후유허지 너머로 올려다 보이는 좌측의 국망봉(國望峰)
아직 유허비가 건립된지 5~6년밖에 되지않았고 홍보도 되지않아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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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매일 올라가 한양을 바라보았다는 국망산이 좌측으로 보인다.
아래는 2013년도 '월간 山'지에 실린 국망산 소개만화이다. 명성황후유허지와 연계하여 산길을 안내하고 있다.
'월간 山'의 만화
대형버스가 주차가능한 곳에 2013년 12월에 제막식을 가진 따끈따끈한 노래비(단추를 누르면 노래가 나옴)가 따로 건립되어 있다.
노래비의 모형은 국망산을 모티브(motive)로 하여 '山'자를 형상화 하였다.
임오군란 피난살이 야월삼경 깊은밤에/
찢어진 문틈으로 서울하늘 바라보며/
환궁할 날 기다리며 칠성님께 비는 마음/
아느냐 모르느냐 국망산에 우는 새야/
너마저 슬피울면 명성황후 중전마마/
그 마음을 어찌하라고//
구중궁궐 돌아보며 삼백리길 떠나올때/
찢어지는 가슴안고 북두칠성 바라보며/
원한 맺힌 아픈사연 인왕산에 비는 마음/
아느냐 모르느냐 산아 산아 국망산아/
그마음 모르시면 명성황후 중전마마/
그아픔을 어찌하라고
<노랫말: 류호담>
1882년 임오군란때 난을 피해 황급히 궁궐을 빠져나와 노은면 피난지에서 50여일동안 기거했던 명성황후의 애처로운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