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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양오씨 대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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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대댁 손자 글방 스크랩 팔일무(八佾舞)
오대댁(병연) 추천 0 조회 385 09.10.20 15:09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2009년 10월 16일

 

종묘제례악 연주회를 들으러 종묘에 갔다.

입구에서 책자와 차양 모자를 나누어 준다.

 

 

 

훌륭한 연주회도 공짜로 보게 하는데다가,

꽤 잘 만든 책자도 그냥 주다니 우리나라 참 좋은 나라다.

 

책자를 들치니 요즈음 한참 잘 나가는(?)  어느 장관 얼굴이 나온다.

 

 

 

 

장관은 마치 사유상(思惟像)같이 손을 둥글게 말아 엄지와 검지를

얼굴에 댄 채 웃음을 머금었는데, 완장(腕章) 찬 팔은 보이지 않는다.

 

어쨌던 얼굴 옆에 적어 놓은, “종묘가 ‘세계의 문화유산’ 이며

그걸 더욱 빛내는 것은 바로 “인류 구전 및 무형문화걸작으로

선정된 종묘제례악과 종묘제례 라는 말은 맞는 이야기다.

 

 

종묘 정전(正殿)

10분 정도 늦게 간 탓에 연주회는 이미 시작하였다.

 

 

 

 

 

악기(樂器)

 

박물관에서나 보던 악기의 소리를 이날 처음 들었다.

 

 

 

 

편종(編鐘)

 

 

 

편경(編磬)

 

 

 

 

이런 악기와 아악(雅樂) 자체는 중국에서 건너 온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박물관 전시용에 불과한데 우리는 실제로 연주를 한다.

 

 

 

 

사진: 중국 광주 남월왕묘 박물관의 편경.

옛날에 이런 것도 있었다 하고 전시만 해 두고 있을 뿐이다.

 

문화는 어디서 시작되었느냐 하는 Originality 보다, 과연 자기 것으로

만들었느냐 하는 Identity 가 더욱 중요하다는 것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피리

 

 

 

무슨 피리인지는 거리도 멀고, 견문도 짧아 잘 모르겠다.

 

 

 

사진: 혹시 아쟁이 아닐까 하지만 정확히는 모르겠다.

 

 

연주장면을 가까이서 찍고 싶어도 언론사 완장 차거나 방송 카메라 든

사람들만 근처에 오게 하고 필자 따위는 얼찐거리지를 못하게 하여

도록에 있는 사진을 스캔한다.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

 

종묘 제례 중 초헌(初獻)-첫 잔을 올릴 때는 보태평(保太平)을 연주하고

아헌(亞獻-두 번째 잔), 종헌(終獻-마지막 잔)에는 정대업(定大業)을 울린다.

 

보태평(保太平), 정대업(定大業),

이름은 들었지만 뜻은 몰랐는데, 내용을 읽으니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와

컨셉이 완전히 같다. 하긴 옛날 고등학교 때 용비어천가 배우면서,

그걸로 노래도 했다고 들었던 것도 같다.

 

다 알다시피 용비어천가 제1장은 해동(海東) 육룡(六龍)이 나라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 로 나가는데,

 

보태평(保太平) 처음 악장은 열성(列聖)-여러 성군 나라 운을 여시니

찬란한 문화정치 대 이어 창성하네 이다.

 

그 다음 목조(穆祖) 이안사(이성계의 4대조)가 전주에서 삼척을 거쳐

경흥으로 옮겨간 것이 결국 조선 왕조의 기틀이다 라는 부분도 같다.

 

용가 3장: 우리 시조 경흥에 사라샤 왕업(王業)을 열으시니

 

정대업 2 악장-기명(基命) : 거룩한 목조께서 바다 건너 경원으로 옮기시니

따르는 백성 날로 늘어 우리의 영원한 명운을 닦으셨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이 보인다.

 

보태평 7악장 현미(顯美)

위대한 태종께서 난리를 평정하고 나라를 보우하셨네

공덕 구가함과 여망이 높되 돈독하게 양보하여 미덕을 드러냈도다.

 

태종 이방원이 ‘돈독하게 양보’했다는 것이 말이 되는가?

그러나 이것이 조선 왕조의 공식 역사정리였던 것이다.

 

9악장 중광(重光)은 선조(宣祖) 임금 이야기인데

의를 지켜 흉()을 제거하고 우리강토 정하셨네 라는 구절이 있다.

 

오늘날 우리는 임진왜란 때 온 백성이 죽을 고생을 한 책임의

상당부분이 선조에게 있다고 알고 있는데, 칭송하고 그걸 또

노래로 까지 나타내다니 해석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하긴 당시 사대부들은 선조 시대를 목릉의 성세(穆陵盛世)라고 하여

황금기로 보기도 하였다. 어쨌던 그 때 사림파가 완전히 득세하고

퇴계, 율곡, 남명 등 조선조를 대표할 만한 사상가들이 나왔으니까.

 

 

팔일무(八佾舞)

 

이날 보태평(保太平)과 정대업(定大業)을 연주할 때는 팔일무를 추었다.

 

 

내가 팔일무(八佾舞)라는 단어를 처음 들은 것은 논어(論語)에서였다.

 

공자위계씨 (孔子謂季氏) 하시되 팔일(八佾) 무어정(舞於庭)하니

시가인야 (是可忍也) 숙불가인야(孰不可忍也)리오

 

공자께서 계씨를 평하여 말씀하셨다. 뜰에서 팔일무를 추게 하니

이것을 차마 할 수 있다면 무엇인들 차마 하지 못하겠는가?

-논어(論語) 팔일편(八佾)

 

이 중 시가인야 숙불가인야 리오 는 달리 해석하기도 한다.

‘내 이것을 참을 수 있다면 무엇인들 못 참으리오’

또는 ‘계씨가 이런 짓을 한다면 누군들 이런 짓을 못하겠는가?’라고도 한다.

 

무엇이 옳은 해석인지? 그 판단은 내 능력 한참 밖이지만,

공자께서 계씨(季氏)의 팔일무(八佾舞)에 대하여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한 것만은 분명하다.

 

(佾)은 줄을 지어 추는 춤이니 이 때 가로 세로 인원 수를 같이-

곧 정방형으로 만들어 춘다

따라서 팔일무(八佾舞)란 가로, 세로 8명 계 64명이 줄 지어 추는 춤이다.

 

고대 중국 예법은 천자(天子)는 팔일(八佾), 제후는 육일(六佾. 6X6=36명)

대부(大夫)는 사일(四佾, 4X4=16), 사(士)는 이일(二佾, 2X2=4) 무(舞)였다.

 

(*)일무(佾舞)에 대하여 다른 설도 있으니, 기본적으로 한 줄이 8명으로

2일무 2x8=16, 4일무 4x8=32,  6일무 6x8=48명 이라는 사람도 있다.

 

()나라 계씨(季氏)는 천자(天子)도 아닌 것이 제후(諸侯)도 아닌 것이

제후(노나라 왕)의 신하로써 사일무(四佾舞 4x4=16명)가 마땅한데,

두 계단이나 뛰어 넘어 팔일무를 자기 집에서 추게 하니

세상의 질서를 무너뜨리는 참람(僭濫)한 짓으로 공자님은 생각한 것이다.

 

조선조에서는 육일무(六佾舞)-36명의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팔일무를 추게 된 것은 고종의 칭제건원(稱帝建元) 이후였다.

 

이 팔일무(八佾舞)를 필자는 지난 10월 16일 처음 구경하게 된 것이다.

 

 

 

사진: 일무원(佾舞員) 입장

일무를 추는 사람을 뭐라고 하는지?

무용수가 아닐까 생각했지만 일무원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사진: 문무.

보태평에서는 문무를 추고, 정대업에서는 무무를 추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문무(文舞)는 문덕(文德)을 칭송하고,

무무(武舞)는 무공(武功)을 칭송하는 춤이다.

 

 

 

 

문무(文舞)는 정적이면서 부드러운 춤이다.

왼손(사진상 오른쪽)에 든 피리는 이름을 ‘약’이라고 하는데 구멍이 세 개다.

오른 손에 든 막대기는 ‘적’이라고 부르는데 꿩 깃털로 장식하였다.

 

 

원래 팔일무(八佾舞)는 8x8=64명이 추는 것인데

이날 공연은 한 줄-8명만 나오는 약식이었다.

아래는 인터넷에 떠 있는 64명 팔일무 장면이다.

 

 

 

 

 

 

 

 

사진: 정대업(定大業) 음악과 함께 추는 무무(武舞)

무무(武舞)는 강하고 힘차게 추는 춤으로 손에 목검을 들고 있다.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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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09.11.03 09:58

    첫댓글 많은 공부 감사합니다 다양한악기 시조 무용 이러한 춤이 있었던가싶군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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