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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이야기 |
충효당(忠孝堂)은 충과 효에 뛰어났던 주경안(朱景顔, 1536~1614)의 추호(追號)를 따서 지어진 강당이다. 충효당은 문중의 회합과 문중의 아동들을 가르치거나 손님을 맞이하는 거처이다. 불천사(不遷祠)는 신안인(新安人) 효자 주경안을 봉하고 있다. 충효당은 1907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 그 후 오랜 세월 퇴락한 것을 안타까이 여긴 문중의 발의로 1996년 불천사를 비롯하여 충효당 강당, 정려 효자각, 축천대를 중건하였다. 충효당 「당기(堂記)」는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1574~1656)이 지었다. 현재 충효당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1759년(영조 35) 4월에 세운 주경안 효자비각이 있다. |
건축 특징 |
종가는 종가의 상징인 솟을대문이 없다. 특별히 쳐진 울타리의 경계도 없다. 자동차 한 대가 지날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끝나면 바로 종가의 충효당이 한눈에 들어온다. 일제강점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27년에 다시 지은 건물이다. 충효당과 사당은 새로 단청했다. 주경안이 태어났다는 안채는 오랜 세월 견디지 못하고 옛집은 없어졌다. 그 자리에 살림하기 위한 현대식 한옥이 새로 지어져 있다. 고색창연한 종가라고는 할 수 없지만, 문중 사람들의 정성과 종손의 의지가 곳곳에 보인다. 이 집을 지을 때 심었다는 오래된 백일홍 두 그루가 있다. 한 그루는 충효당 앞에 있으며, 나머지는 사당 안에 있다. 7, 8월에 붉은 꽃을 피워 장관을 연출한다. |
건축 구성 |
충효당과 사당인 불천사와 주거공간인 가정집으로 되어 있다. 충효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지붕은 골기와로 팔작지붕을 이었다. 불천사는 충효당의 뒤에 있으며 1644년(인조 22)에 효자 주경안을 봉안하여 오다가 후일 울진후(蔚珍候) 박한(朴悍)의 주선으로 배(配) 공인(恭人) 울진장씨(蔚珍張氏)를 합사(合祠)하고 매년 음력 2월 27일에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
현판 |
현판 |
충효당(忠孝堂)이란 현판 1개가 있다. |
문중 이야기 | |
- 충효전가(忠孝傳家) | |
주씨는 원래 성리학을 집대성한 중국의 주희(朱熹)를 시조로 하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주잠(朱潛)을 시조로 하고 있다. 또한, 주씨들이 신안(新安)으로 분파하게 된 것은 주인원(朱印遠)에게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신안주씨들이 울진에 입향한 것은 봉렬(奉列) 전적(典籍) ․감찰(監察)을 지낸 주선림(朱善林)이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울진의 구만촌(九萬村)으로 피신해 살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효와 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가문이다. 말하자면 ‘충효전가(忠孝傳家)’의 집이다. 유가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충과 효는 구만동을 중심으로 한 신안주씨 문중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독송정(獨松亭) 주세창(朱世昌)은 충효당의 중부(仲父)로 하늘이 감동한 ‘천감지효(天感之孝)’로 조정에서 포 300필을 내렸으며, 연일․경원․의주 교수(敎授)로 제수하였다. 일찍이 농암(聾岩) 이현보(李賢輔)와 송강(松江) 정철(鄭澈), 월천(月川) 조목(趙穆)과 교유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구만동 고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첨정(僉正) 주호(朱皥)는 주세창의 아들이다. 정절을 지키고자 왜적에게 유방을 잘라 땅에 던져 항거했던 주호의 부인 울진장씨.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하늘이 심어 놓은 듯하였으며, 타고난 바탕이 바르고 어질어서 ‘관동부자(關東夫子)’라 칭했던 한재(寒齋) 주필대(朱必大). 효도와 청렴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한 번 보고 칭찬하기를 ‘옥과 같이 깨끗한 군자’라고 했던 주형(朱炯). 그는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의 맏이였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과도하여 3개월이 채 못돼 빈소에서 죽는다. 이처럼 정려를 받거나 충과 효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는 기록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 문중의 특별한 가풍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주경안의 경우 그 행적이 탁월하게 드러나고 있다. 양부모가 돌아가자 슬픔으로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제도(制度)를 마쳤으나,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하여 아침․저녁으로 배묘(拜墓)하였으며 제사를 모실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장만하였다. 그 외에 실기(實記)에서 자주 보이는 효행의 기록들과 ‘축천대의 행적’은 당시 원근의 선비와 관료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회자하였다.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 당시의 관료가 약간은 과장된 듯한 이야기를 그대로 조정에 보고할 정도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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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례를 올리는 전통가문 | |
제사에 숭늉대신 차를 올린다. 차를 올리는 가을향사는 종손을 비롯한 문중 사람들의 엄숙하고 정결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문중 어른들은 도포와 유건으로 예복을 갖춰 입는다. 제례는 주자의 가르침인 『주자가례』의 예법대로 제상에 차를 올린다. 경안공의 제사는 종가뿐 아니라 문중 사람들에게도 가장 큰 제례이므로 매년 음력 2월 27일에 모시고 있다. 추석 전에 할아버지께 먼저 차로써 제사를 모신 후에야 아랫대에도 올릴 수가 있어 가을향사를 조금 앞당겨 모신다고 한다. 제사를 마친 종손은 ‘주자가례’에 기록된 제례편에 ‘주인과 주부가 차를 받들어 할아버지와 할머니 앞에 나누어 바친다.’라는 기록이 있는데 그 기록 그대로 차를 올렸다고 했다. 『주자가례』권1의 「통례편」조에는 술보다 차가 오히려 앞자리에 있다. |
관련유물 |
- 관련유물 |
한국국학진흥원에 기탁된 자료 목록인 『2004 일반 동산문화재 다량 소장처 실태조사』에 보면 신안주씨 사직공파 소장 정리대상 자료는 고서 5책과 고문서 12점이다. 고서는 주필혁(朱必赫, 1636~1709)의 문인들을 정리한 『기휴재문인록(棄休齋門人錄)』을 비롯해 주환벽(朱奐壁, 1659~1711)의 문집인 『어사재집(於斯齋集)』, 『고파집(古波集)』의 부록, 황여일(黃汝一)이 지은 주경안의 전기인 「효자전(孝子傳)」, 이들 고서는 모두 필사본이다. 이들 자료가 간행된 적이 없다는 점에서 일단 현존하는 유일 필사본이라고 나온다. 또 고문서는 교지(敎旨) 9점과 시권(試券) 3점, 교지는 주연(朱鍊; 1691~1774)이 1773년(영조 49) 절충장군행용양위부호군(折衝將軍行龍驤衛副護軍)으로 임명되면서 받은 것을 포함해, 1776년(영조 52) 그의 증조부 주득신(朱得臣) 부부 및 아버지 주환익(朱奐翼) 부부와 자신의 처를 추증(追增)한 것이다. 이들 자료는 열악한 보관 상태 때문에 얼룩이 넓게 분포되어 있다. 시권은 모두 책문(策文)으로 명지(名紙)가 잘린 상태이기 때문에 저자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 가문이 주연의 가계를 잇는 점과 지질(紙質)의 상태 등으로 미루어 그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고 나온다. |
관련인물 | |
- 주경안(朱景顔, 1536~1614) | |
충효당 건물이 생기게 한 사람이다. 하늘이 내린 효자로 아버지 주세홍이 1년이 넘도록 학질을 앓고 있을 때 자기의 손가락을 끊어 피를 종이에 묻혀서 불에 태워 그 재를 술에 타서 먹여 효험을 보는 등 많은 효행이 있다. 또 나라에 충성하는 마음도 지극하여 문정왕후(文定王后), 인순왕후(仁順王后), 명종(明宗), 의인왕후(懿仁王后), 선조(宣祖)가 죽었을 때 각각 3년 동안 상을 치르며 죽만 먹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에는 단을 쌓고 7년 동안 매일 국운이 회복되기를 기도하니 사람들이 이곳을 축천대(祝天臺)라 하였다. 그의 지극한 효행은 1578년(선조 11)에 향리의 유림과 본현 훈도 진사 서천일(本縣 訓導 進士 徐千一)이 조정에 아뢰어 생시에 정표(旌表)로 정해지고,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정려각(旌閭閣)은 울진읍 고성리 청고동 동편에 있다. 그의 독실한 충효는 지역의 본보기와 사표가 되어 회자하였으며, 수많은 원근의 큰 선비들이 충효당을 방문하여 그를 칭송하는 글들이 전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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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사고(南師古, 1509∼1571) | |
충효당 주경안의 스승이다. 조선 중기의 학자․도사(道士), 본관은 영양(英陽), 자는 경초(景初), 호는 격암(格庵), 조부는 남구주(南九疇), 아버지는 남희백(南希伯)이다. 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祕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 자신의 생사문제까지 예언하였던 그는 풍수지리에 많은 일화를 남겨 그의 이름으로 된 도참서(圖讖書)인 『남사고비결(南師古祕訣)』과 『남격암십승지론 (南格庵十勝地論)』이 『정감록(鄭鑑錄)』에 전한다. 전자에서는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한산한수(漢山漢水)가 다골다탄(多骨多灘)하여 골육상잔의 화가 많을 것을 말하는 등, 각종 재난을 예언하였다. 후자에서는 정감록 사상의 특징인 십승지지, 이른바 재난이 일어날 때 피신처인 열 군데의 보길지(保吉地)를 구체적으로 예언․기술하였다. 죽은 뒤 1709년(숙종 35)에 울진의 향현사(鄕賢祠)에 배향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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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응징(黃應澄) | |
호가 창주(滄州), 충효당의 스승이다. 아들인 황여일과 손자인 황중윤과 같은 걸출한 인물을 배출한다. 창주는 임진왜란 때 웅치전투의 영웅 정담장군의 매형이기도 하다. 그는 충효로 이름이 더 높은 주경안과 같은 이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면서, 지역에서 스승으로 큰 역할을 하였던 사람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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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여일(黃汝一, 1556~1622) | |
충효당의 제문을 지은 인물이다. 아주 어려서는 부친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에게 글을 배웠다. 그 뒤 중부(仲父)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에게 수학하였다. 부친은 임진왜란의 영웅 정담(鄭湛)장군을 어릴 때 가르쳐 대성하게 하였다.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의 딸에게 장가를 들고 학봉 김성일의 제자가 된다. 1576년(선조 9)에 진사가 되고 1585년 개종계별시문과(改宗系別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여 그 뒤 경상도어사(慶尙道御使), 1592년에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맡았다. 임진왜란이 나자 지략을 발휘 함경감사 윤탁연(尹卓然)의 종사관이 된다. 1593년 형조정랑(刑曹正郞), 병조정랑(兵曹正郞)을 맡는다. 도원수 권율(權慄)의 종사관으로 행주대첩에서 많은 공을 세운다. 1596년에는 이순신 장군과 국사에 대해 논한다. 1598년 명나라와 국교가 위태롭자 백사(白沙) 이항복(李恒福)․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를 정사(正使)로, 해월은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가서 외교에 공을 세운다. ‘만국공여지도(萬國供與地圖)’를 가져온다. 귀국 후 장악원정(掌樂院正)이 된다. 1601년 예천군수를 거쳐 1611년 길주목사(吉州牧使), 창원부사(昌原府使), 1615년에 동래부사, 공조참의를 지냈다. 졸 후 이조참판(吏曹參判)에 추증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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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중윤(黃中允, 1577~1648) | |
충효당 실기에 서한문(書翰文)이 보인다. 부친은 공조참의를 한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이다. 외가는 학봉의 중형(仲兄) 되는 귀봉(龜峰) 김수일(金守一)이다. 부친은 말할 것도 없고 조부인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과 종조부인 대해(大海) 황응청(黃應淸) 같은 학자의 집안에서 일찍이 학문적 소양과 재질을 발견한다. 1612년(광해군 4) 증광문과에 급제하고 정언·헌납·사서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 명나라에서 파병을 요청하여 조정에서 징병을 논의하자 이에 반대하였다. 이후 병조좌랑과 사헌부지평을 역임하고 1620년 주문사(奏聞使)로 임명되어 연경(燕京)에 다녀온 뒤 승지가 되었다. 인조 즉위 후 광해군 추종 세력으로 몰려 유배를 당한다. 1633년(인조 11)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에서 유유자적한 삶을 살다가 1648년(인조 26)에 향년 72세로 졸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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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구(鄭逑, 1543∼1620) | |
충효당의 효행을 올린 상계문(狀啓文)이 있다.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성주(星州) 출신, 김굉필(金宏弼)의 외증손으로, 판서 사중(思中)의 아들이다. 성주이씨(星州李氏)와 혼인한 인연으로 성주에 정착하였다. 12세 때 그의 종이모부이며 조식(曺植)의 고제자였던 오건(吳健)이 성주향교의 교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생이 되어 『주역』 등을 배웠다. 1563년(명종 18)에 이황(李滉)·조식에게서 성리학을 배웠다. 1591년 통천군수에 부임하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격문을 각 군에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도록 선도하였다. 1594년에 우승지·강원도관찰사·성천부사·충주부사·공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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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열도(申悅道), 박한(朴悍), 박경(朴璥), 임이도(任以道)는 모두 울진현령을 하였으며 충효당의 제문을 지은 것으로 나온다. |
울진 > 울진근남서면권 > 울진읍 고성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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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성리 | |
1431년경에 울진장씨(蔚珍張氏)가 들어와 살면서 마을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본다. 본래 울진군 상군면 지역으로서, 1916년 3월 1일 구만동(九萬洞)·청고동(靑皐洞)·성저동(城底洞)·가원동(可原洞)의 일부 지역이 통합되어 고성리로 개편되었다. 고성리의 남서쪽 멀리 금산(錦山, 387.9m)이 솟아 있고, 북서쪽에서 내려와 마을의 북부를 지나는 남대천이 울진읍에서 동해로 흘러들고 있다. 2006년 12월 면적은 3.19㎢이며, 총 236세대에 624명(남자 326, 여자 298)의 주민이 살고 있다. 주민의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구만·청고동·고파미·새마실·도룸묵·성저·가원·게곡 등의 자연마을이 들어서 있다. 주요 성씨로는 신안주씨(新安朱氏), 울진장씨(蔚珍張氏) 등이 많이 살고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월계서원에 국보 제181호인 장량수급제패지가 있고, 이 외에도 도통사(道統祠), 불천사(不遷祠), 충효당, 축천대(祝天臺), 능허대, 주경안(朱景顔) 효자각(孝子閣), 장동유(張東維) 효자각(孝子閣), 장서린(張瑞麟) 효자각(孝子閣), 국보각, 사직단, 고산성, 독송정(獨松亭), 독송정유허비, 독송정지, 고산성, 망북루지, 고성리 구만마을 석촉, 고성리 성황목, 고성리 성황당 등이 있다. 군도 6호선과 지방도 917호선이 북서~남동 방향으로 지나고 있다. 고성리에는 유명한 청고개 전설이 있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1593년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울진에 들어온 왜구의 전초병이 울진현성(蔚珍縣城)인 고산성(古山城)으로 가는 고파현(古坡峴) 길 산모퉁이에서 어떤 노파에게 길을 물었다. 노파가 대답하기를 실제의 거리는 약 2㎞ 정도밖에 안 되는데 먼 산을 가리키며 저기에 아련히 보이는 곳은 “여기서 만리 만리 구만리(九萬里) 고개 고개 천(千)고개를 넘어야 현성(縣城)이 보인다.”라고 하니 왜병들은 길을 잘못 찾아왔다고 생각하고 현성을 포기하고 결국 다른 곳을 돌아서 읍성을 공격하였다 한다. 그 후부터 노파에게 묻던 장소를 고파목[古坡峴]이라 하였다. 고파목은 현재 울진읍과 구만동 사이 월송공원에서 남쪽으로 뻗은 산모퉁이며, 구만리는 고성1리 구만동(九萬洞)이고, 천고개는 원래 청고리(靑皐里, 현 울진상수도 취수장) 서북쪽으로 그 후부터 천고개라 불리고 있다. |
충효당 주경안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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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내린 효자 | ||||||||||||||||||||||||||||
공의 휘는 경안(景顔)이요 자는 여우(汝愚)다. 추호(追號)가 충효당(忠孝堂)이다. 1536년(중종 31)에 울진 구만동에 태어났다. 천성이 순후하고 곧고 정직하며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정성스러웠으며 어려서부터 이미 사친경장(事親敬長)의 법도를 알았다. 부친 통정공(通政公) 세홍(世弘)이 학질을 오래 앓아 치료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백방으로 약을 수소문하던 차에 어떤 이가 “인혈(人血)이 가장 좋다”하여 즉시 자기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내고 태워서 술에 타서 드렸다. 부친이 온몸에 부종(浮腫)이 나서 몹시 고생하는데 보는 사람마다 ‘지렁이 즙’을 써야 낫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때가 엄동설한이라 구할 방법이 없었다. 그는 생각 끝에 후원 앵두나무 아래 우물가에 가서 주위를 깨끗이 청소하고 일주일을 밤낮으로 정성스러이 기도를 드렸더니, 아침에 부근에 지렁이 똥이 있는지라 그곳을 파서 지렁이 즙을 드렸다. 또 모친이 종기로 몹시 괴로워하였다. 침(針)과 약을 쓸 수가 없자 그는 직접 환부를 빨아내어 차도를 얻었으며, 그 후 고을의 몇 명이 그것을 본받았다. 또 한식절을 맞이하여 선조의 묘제를 올리려 하였으나 마침 바다와 육지가 모두 흉년이 들어 제육을 구하지 못했다. 말총으로 아홉 개의 그물을 만들어 밭 가운데 꽂아 두었는데 갑자기 대설(大雪)이 내리므로 그물을 걷으려 밭에 나가니 비둘기 여섯 마리가 걸려 있었다. 비둘기를 잡아서 묘제에 쓸 수 있었다. 이것을 본 마을 사람들은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없었고 효감(孝感)이 그렇게 한 것이라 생각하였다. 부친이 매번 출입할 때면 직접 말안장을 잡고 지팡이와 신발을 들고서 앞뒤로 부축하며 노복의 수고를 대신하였다. 양부모가 돌아가자 슬픔으로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제도(制度)를 마치고, 부모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하여 아침저녁으로 배묘(拜墓)하였으며 제사를 모실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직접 제물을 장만하였으며 남에게 맡기지 아니하였다. 그의 지극한 효행은 1578년(선조 11)에 향리의 유림과 본 현 훈도 진사 서천일(訓導 進士 徐千一)이 조정에 아뢰어 생시에 정표(旌表)로 정해지고, 삼강록(三綱錄)에 실렸다. 정려각(旌閭閣)은 울진읍 고성리 청고동 동편에 있다. 문정후(文正后) 인순후(仁順后) 명종왕(明宗王) 인의후(仁懿后) 선조왕(宣祖王) 상(喪)에는 다 같이 3년의 복(服)을 입었다. 선조가 돌아갈 때는 그의 나이 73세였으나 죽을 먹으며 삼년상을 했다. 부모님상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오직 충과 효로 정성을 다하며 살다가 1614년(광해군 6) 2월 27일 잠자리에서 졸하니 향년 79세다. | ||||||||||||||||||||||||||||
스스로 나라에 충성하다 | ||||||||||||||||||||||||||||
가정에서나 국가에 대한 마음이 한결같아 일생 동안 흔들림이 없었던 선비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궁궐을 비우고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분통함을 금치 못하였다. 나가 싸우고자 하였으나 고령이요, 군량을 도우려니 집이 가난하였다. 대신 하늘에 기도하여 신의 도움으로 적을 물리치고자 하였다. 산 아래 돌을 직접 날라 석단 2층을 쌓고 매일 새벽에 목욕재계하고 향을 피우며 하늘에 7년간 기도하였다. 기도하기를 “우리 종사의 태움을 하늘이 차마 하겠는가?” “우리 백성을 살육함을 하늘이 어찌 차마 하겠는가?” “지극한 불인으로 지극한 인을 치고” “지극히 무도함으로 유도함을 치는 것을 하늘이 차마 어찌하겠는가?” “적의 명은 어찌해서 오래며 우리 임금께서 어찌하여 밖에 오래 있음을 하늘이 어찌 차마 이에 이르게 하였는가?” 이와 같이 기도하기를 무려 7년을 하루같이 하였다. 오랜 세월에 혹시 집역사(執役者)가 향과 물 공급에 나태할까 하여 밭 한 뙈기를 주어서 보상 격려하고 자신은 조석으로 죽과 솔잎가루만 먹을 뿐이었다. 비록 날씨가 춥거나 덥거나 하루도 그치지 않았으며 주위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비웃었으나 나중에는 감탄하여 말하기를, “자신은 노쇠한 나이로 죽을 먹으며 동산에 오르는 것도 힘든 일인데, 세월이 7년이나 되었으니 고금에 드물게 있는 일이라 하늘이 어찌 감동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주위 사람들이 걱정하며 밥 먹기를 권하였다. 그는 군부(君父)께서 욕됨에 계시는데 스스로 먹을 생각이 없으며 국가의 부흥을 기다려서 먹어도 늦지 않을 것이라 하였다. 이로써 주위에서는 고의 고절(苦節)에 감탄하였으며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주효자(朱孝子)’라 칭하고 7년간 하늘에 기도하던 그 석단을 축천대(祝天臺)라 부르게 되었다. |
가족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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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야기 | ||||||||||||||||
충효당은 아우 경삼(景參)과 우애가 돈독하여 종신토록 한집에서 살았으며 친족들과도 화목하게 지냈다. 한결같은 정성으로 거짓 없이 사람들을 대했다.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효와 충은 그의 가문과 무관하지 않다. 유가의 두 축을 이루고 있는 충과 효가 마음과 몸에 밴 집안이다. 특히 충과 효는 구만동을 중심으로 한 신안주씨 문중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충효당의 증손 기휴재(棄休齋) 주필혁(朱必赫)은 9세에 모친상을 당하여 3년간 소식하였다. 후진교육으로 일생을 바쳤으며, 수많은 제자 중에는 대성한 사람도 많았다. 지금도 문인록이 전하여 오고 있다. 임만휴의 문인으로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송시열, 송준길 등과 교유하였다. 독송정(獨松亭) 주세창(朱世昌)은 충효당의 중부(仲父)로 하늘이 감동한 ‘천감지효(天感之孝)’로 조정에서 포 300필을 내렸으며, 연일 경원 의주 교수(敎授)로 제수하였다. 일찍이 농암 이현보(聾岩 李賢輔)와 송강 정철(松江 鄭澈), 월천 조목(月川 趙穆)과 교유하였다. 임란 때의 구만동 고산성에서 왜적과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첨정(僉正) 주호(朱皥)는 주세창의 아들이다. 정절을 지키고자 왜적에게 유방을 잘라 땅에 던져 항거했던 주호의 부인 울진장씨. 효도하고 우애하는 행실은 하늘이 심어 놓은 듯하였으며, 타고난 바탕이 바르고 어질어서 ‘관동부자(關東夫子)’라 칭했던 한재(寒齋) 주필대(朱必大). 효도와 청렴으로 칭찬을 받았으며,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이 한 번 보고 칭찬하기를 “옥과 같이 깨끗한 군자”라고 했던 주형(朱炯). 그는 이우당(二友堂) 주개신(朱介臣)의 맏이였는데, 부친상을 당하여 애통함이 과도하여 3개월이 채 못되어 빈소에서 죽는다. 이처럼 정려를 받거나 충과 효에서 남다른 모범을 보이는 기록이 곳곳에 보이고 있다. 이것은 한 문중의 특별한 가풍으로 오랜 기간에 걸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주경안의 경우 그 행적이 탁월하게 드러나고 있다. “양부모가 돌아가자 슬픔으로 3년 동안 죽을 먹으며 제도(制度)를 마쳤으나, 부모를 사모하는 마음이 더욱더 간절하여 아침저녁으로 배묘(拜墓)하였으며 제사를 모실 때는 반드시 목욕재계하고 제물을 남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장만하였다.” 그 외 실기(實記)에서 자주 보이는 효행의 기록들과 ‘축천대’의 행적은 당시 원근의 선비와 관료들에게 귀감이 되어 회자되었다. 이야기의 진위를 떠나 당시의 관료가 약간은 과장된 듯한 이야기를 그대로 조정에 보고할 정도였다. 충효당의 부인은 울진장씨(蔚珍張氏)로 강계부사(江界府使) 백손(伯孫)의 증손녀다. 성품이 어질고 내조를 잘하여, 종족들 모두 칭찬하고 아름답게 여겼다. |
학문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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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유인물 | ||||||||||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한강(寒岡) 정구(鄭逑),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 난재(懶齋) 신열도(申悅道) | ||||||||||
학문이야기 | ||||||||||
『충효당실기(忠孝堂實記)』에 “격암(格菴) 남사고(南師古, 1509~1571)와 창주(滄州) 황응징(黃應澄)선생에게 수업하고 그 후 양선생을 위하여 각각 일 년간 복심(服心)하였다.”고 나온다. 격암은 조선 중기의 학자·도사(道士).역학(易學)·참위(讖緯)·감여(堪輿)·천문(天文)·관상(觀相)·복서(卜筮) 등 모든 학문에 두루 통달하였다. 또한, 일찍이 이인(異人)을 만나 공부하다가 진결(眞訣)을 얻어 비술(祕術)에 정통하게 되었고 앞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격암의 이러한 이행(異行)보다는 그의 진면목이 잘 나타나는 대목이 있다. 격암은 『만휴당집』의 ‘격암선생유전(格菴先生遺傳)’에서 “어릴 적부터 독서하기를 좋아하였고, 행동 또한 건실하였는데, 장성하여서는 수술학(數術學)에 정진 천문과 지리 등에서 막힘이 없었다. 격암의 고제자(高弟子) 임천(臨川) 남세영(南世英)은 “내가 선생님에게서 믿고 배운 것은 선생님의 탁월하신 덕행”이라고 했다. 또 말하길 “격암의 문하에 출입하기를 어언 수십 년인데 선생님은 잠시라도 흐트러진 모습을 보지 못했다. 나의 어머님께서 선생님과 인척인 관계로 가끔 나의 편에 안부를 전하면 반드시 절하고 받으며 혹시 무슨 일을 나의 편으로 묻기라도 하면 꼭 엎드려서 아뢰니 선생님의 자수(自修)하는 행실이 이와 같았다.” 격암이 인간으로서나 스승으로서의 면모가 잘 보이는 대목이다. 충효당은 이러한 격암의 인품을 받았음은 두 말할 나위 없다. 또 황응징은 해월(海月) 황여일(黃汝一)의 아버지다. 고아였던 처남 정담장군과 유명한 황해월과 해월의 아들 동명(東溟) 황중윤(黃中允)을 기른 인물이다. 따라서 충효당은 격암과 창주의 인품과 학문을 전수받은 사람이다. 『충효당실기(忠孝堂實記)』에 효자께서는 어릴 때 학문을 배우지 못하였으며 남격암 선생께서 성산 아래에서 학문을 닦고 있음을 알고 찾아가 배우기를 청하여 ‘대학장구’를 수업할 수 있었으나 어려운 문장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마침 평해, 울진 두 읍의 유생들이 불영사에서 문회를 열었는데 선군을 찾아가 십구사략을 수업하니 지난날의 막혔던 문장들을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효자는 항상 말씀하시기를, 나를 가르친 사람은 ‘남모’요 나의 의혹을 풀어준 사람은 ‘황모’라 하였다. 남모는 격암이요. 황모는 창주다. 또 실기에 “한강 정구선생(寒剛 鄭逑先生)이 본도 감사(監司)가 되어 친히 효자의 집을 방문하여 묻기를, 공이 배운 것이 무엇인데 실천함이 뛰어나고 조신함이 그토록 돈독하고 지극한가? 라고 하니 공이 일어나 절하며 말하기를 저는 지식은 없고 배운 것은 ‘소학’뿐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선생께서는 감탄하시고 즉시로 미포(米布)를 내려 헌수하였다.” 공께서는 평시에도 “소학 절요”를 잠시도 놓지 않으시고 열심히 익힘에 더욱더 노력하였다.”고 나온다. 충효당은 인품과 학식이 뛰어났던 당대의 대가들을 스승으로 두었다. 그는 이론에만 머무른 학자가 아니요, 배움을 실천한 효자요 충신이었다. |
저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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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명돈(朱明暾),『충효당실기(忠孝堂實記)』가 있다.
-수산 김홍길님의 블로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