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길이 멀다
조수현
모임을 같이하는 가족들과 거창 한옥으로 1박2일 여행을 왔다. 짐을 풀기 무섭게 집집마다 준비해온 휴대용 가스레인지에 불판을 올리고 고기를 굽기 시작한다. 자연스럽게 나도 고기 굽는 대열에 합류한다. “삽겹살만 굽지 말고 대패도 조금 올려놓으면 안 돼?” 남편의 요구에 맞춰 종잇장 같은 대패삼겹살을 수고롭게 떼어내고 있는데 어깨너머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어? 고기 굽는 사람이 가장이라던데, 이 집은?”
잠시 집게질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고기 굽기에 여념이 없는 다른 집 가장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반면, 우리집 남자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표정으로 상추쌈을 제 입에 부지런히 넣고 있다. 생각해보니 거창까지 110km 넘는 거리도 내가 운전해서 왔는데, 이젠 고기까지 굽고 있네. 갑자기 가장답지 못한 남편의 행동이 얄밉고, 졸지에 가장이 되어버린 내 신세가 처량해서 화가 난다. 고기 굽던 집게를 내던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최대한 표정을 가다듬고 들려온 목소리를 향해 대꾸한다.
“저흰 워낙 편견 없는 집안이라... 고기는 잘 굽는 사람이 구워요. 하하하.”
딸아이 6살 때 일이다. 어린이집 선생님과 통화하는데 우리 아이가 또래에 비해 성 역할 고정관념이 없어서 기특하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렇다. 애쓰며 키웠다. 아이의 성별을 알게 되면서부터 색깔로 남성 여성을 구분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아이의 자발적 선택 전까지 여성성의 상징인 핑크색 옷을 사 입힌 적 없고, 장난감도 여자 사람 인형보다는 동물이나 블록을 가지고 놀게 했다. 집안일은 아빠엄마가 함께 하는 것임을 말로 행동으로 보여주려 애썼다. 말이 아직 안 트인 아이를 앞에 두고 남자에게 선택받지 못했다며 바닷물에 몸을 던진 인어공주가 왜 어린이 명작일까 생각해 보자 하고, 신데렐라를 보고 첫눈에 반해서 놓고 간 구두 한 짝을 단서로 나라 곳곳을 뒤진 왕자의 외모지상주의를 비판하는 책읽기를 실천해온 결과였다.
배우자를 선택 할 시기에도 ‘가부장적인 면은 없는가? 건강하고 균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인가?’ 보기 위해 애썼다. 평소 자신은 양성평등에 대한 인식이 높고 직장 동료들에 비해 월등히 자상하고 가정적이라고 강조했던 과거 남자친구는 결혼 이후 가부장이 되어버렸다. 그의 낡은 생각에서 비롯된 말과 행동을 지적하며 토닥거리기가 일쑤였고 임경선, 은유 작가의 에세이라도 읽은 날에는 결혼생활 전반의 불평등을 이야기하다가 큰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가정에 분란을 일으키는 책 좀 읽지 말라!’ 는 말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사명감을 가지고 치열하게 읽고 이야기하고 싸우다 보니 남편도 어느 정도의 경지에 올랐다. 여전히 집안일은 당연히 여자인 내 몫이고 본인은 도와주었으니 칭찬받아야 한다는 뉘앙스를 풍겨서 갈등을 빚지만 말이다.
다시 ‘고기 굽는 사람이 가장이다.’는 말에 분노했던 시점으로 돌아가 본다. 나는 왜 이렇게 화가 나고 억울했던 것일까?
#남자는 가장이다. 불판 앞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고기를 굽고 있다. 지글지글 먹기 좋게 익은 고기를 잘라 접시에 담는다. 아이들은 바삐 젓가락질을 하고, 여자는 쌈을 싸서 남편의 입에 넣어주며 환하게 웃는다.
뻔한 드라마 속 장면 같은 이미지가 내 머릿속에도 너무나 선명하게 자리 잡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기 굽기에서 시작된 생각은 남자라면 운전에 능숙하고(특히 주차), 형광등 따위를 손쉽게 교체하고, 집안에 발생한 하자를 업자 부르지 않고 해결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우리 집 사람은 그것이 전혀 되지 않는다.' 까지 뻗어나갔다. 남자의 기본값을 전혀 하지 못하는 사람과 살며, 그가 못하는 것을 대신하는 나는 참 딱한 여자라는 결론이 났고….
오랫동안 가져온 신념과의 불일치를 깨닫는 순간이었다. 여성, 아내, 엄마에게 씌우는 프레임에 저항하며 절대 지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믿었다. 외부에서 불쑥불쑥 치고 들어오는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편견에 맞서 싸우며 목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겪으며 가장 큰 적은 내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책을 아무리 읽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 고정관념이 있음을, 예민한 감각과 비판적인 잣대를 들이대며 싸워야 할 대상은 외부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일차적으로 바로 나 자신임을 말이다.
속은 시끄러웠지만 1박2일의 여행은 어찌어찌 잘 마쳤다. 거창에 갈 때, 1시간 40분 걸렸는데 돌아오는 길은 2시간이 넘게 걸렸다. 다른 때 같으면 운전하느라 피곤하다 힘들다. 당신은 좋겠다 옆에 앉아서 입만 움직였으니 피곤 같은 것은 모르겠네 라며 한창 생색을 냈을 텐데 이번엔 입을 꾹 닫았더니 남편이 알아서 여행 가방 정리부터 아이 씻기기까지 알아서 척척 한다. 내가 바라보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크지만 계속 배우며 성찰하겠다는 의지는 견지하기로 한다. 특히 남편에게 능력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무리하게 요구하지 않고 수고에 대해 감사하고 인정하는 자세를 갖기로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