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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가 고문한 '정마리안나'를 아시나요[5.18 41주년 기획 - 두 여성의 5월 ②] 정양숙이 전한 진실, 테이프와 누런봉투
<오마이뉴스>는 5.18민주화운동 41주년을 맞아 1980년 당시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서 작성한 문건을 분석해 세 편의 기사로 싣는다. 광주의 진실을 알리다 신군부의 표적이 된 두 여성을 중심으로 뜨거웠던 그때를 재구성했다. 이 기사는 그 두번째다.[편집자말] |
▲ 1960년대 정양숙·길자·화숙 세자매가 찍은 사진. (왼쪽부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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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놈들 입에서 쌍욕부터 딱 나오더라고요. 그러더니 손으로 뺨을 치는 소리가 들려요. 아니 그건 그냥 뺨을 치는 소리가 아니었어요. 어찌나 세게 쳤는지 '퍽' 하는 소리가... 아직도 그 소리가 제 기억에 너무도 또렷하고 극적으로 남아 있어요. 이후엔 바로 '끌고 가' 소리가 들렸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양홍 신부는 1980년 7월 '서빙고(국군 보안사령부 분실)'에서 들었던 소리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5.18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리다 악명 높은 서빙고로 끌려갔던 양 신부는 건넛방에서 스며온 '정마리안나'의 고통을 떠올리며 연신 한숨을 내쉬었다.
합수부 문건에 기록된 '정마리안나'
▲ 유럽 유학 시절의 정양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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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마리안나. 본명 정양숙. 1939년생의 그녀를 찾아 나선 이유는 41년 전 생산된 16쪽짜리 문건 때문이었다. 외교사료관으로부터 입수한 이 문건은 1980년 7월 15~23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아래 합수부)가 외무부에 보낸 것이었다.
전두환이 수장으로 있던 합수부는 쿠데타 세력인 신군부를 상징하는 곳이었다. 문건이 생산된 시점에 신군부는 5.18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왜곡하고 이에 맞서 참상을 알리려던 이들을 탄압하면서 권력 찬탈 계획을 하나하나 수행하던 중이었다.
문건에서 합수부는 "프랑스인 콜렛 노어(Colette Noir, 1934년생)를 포고령 위반 혐의로 조사해야 하니 해당 대사관과 협조 후 결과 통보 바란다"고 밝혔다. 외국인 조사가 외교 문제로 이어지지 않도록 외무부가 잘 단속하라는, 사실상의 명령문이었다. 전두환의 직인까지 박힌 이 엄혹한 문건엔 콜렛과 함께 정양숙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콜렛은) 1980년 5월 29일 명동 소재 문방구점에서 노동문제상담소 정 마리안나와 같이 광주사태에 대한 '어느 목격자의 증언'이란 유언비어 원고를 2부 복사하여 그 중 1부를 광주에서 상경한 김성용 신부에게 전달함으로써 1980년 5월 30일 천구교정의구현사제단 모임에서 40여명의 신부에게 동 유언비어 내용을 전파케한 혐의.
(콜렛은) 1980년 6월 3일 명동 소재 전진상교육관에서 정 마리안나로부터 '어느 목격자의 증언' 내용을 녹음한 카세트 테이프 1개를 받아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정의평화협의회의 잘못 - 기자 주) 간부인 송 모에게 송달하여 동 내용을 일본 각 신문에 인용보도하게 함으로써 국제적인 물의를 야기케한 혐의.
▲ 1980년 7월 15일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이 외무부장관을 상대로 보낸 프랑스 여성 콜렛 노어(Colette Noir)에 대한 "수사협조 의뢰" 문서. 문서에 "정마리안나(정양숙)"의 이름도 실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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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런 봉투 전달, 그 후
정양숙과 콜렛은 해외는 물론 광주 밖으로도 나올 수 없었던 진상을 만방에 퍼뜨렸다. 정양숙의 절친이었던 후배 윤순녀 평화의샘 대표의 말이다.
"언니가 누런 봉투에 뭘 넣어서 미아동성당 양홍 신부에게 전해달라는 거예요. 제가 그 지역 출신이거든요. (독재와 싸웠던) 우리끼린 감이 있으니 '이게 뭐냐'고 묻지 않았어요. 혹시나 잡혔을 때 알고 있는 게 많으면 안 되거든요. 그래서 봉투를 뜯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전달했죠. 나중에 신부님들이 끌려가고 사달이 난 뒤에야 그 봉투에 테이프가 들어 있었다는 걸 알았죠."
그러나 폭압에 저항한 대가는 혹독했다. 콜렛은 외국인 신분임에도 결국 합수부 조사를 받아야 했고, 정양숙은 불시에 체포돼 서빙고로 끌려갔다. 그녀의 두 동생인 정길자·화숙씨는 당시를 이렇게 떠올렸다.
"언니가 열심히 활동하느라 평소엔 연락이 잘 안 됐지만 조카 생일엔 꼭 왔었어요. 그런데 그해 ○○이(정화숙씨의 첫째 딸, 1978년 7월 10일생) 생일에 안 온 거예요. 조카들을 끔직히 아꼈던 언니가 안 나타날 리가 없거든요. 이상하다 생각했죠. 그리고 며칠 뒤 뉴스에 정마리안나 이름이 이렇게 (크게) 나오는 거예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면서요. 우리 모두 기절했죠."
1980년 7월 12~13일, 당시 대부분 일간지 1면에 '정마리안나' 다섯 글자와 신부 6명의 이름이 실렸다. 계엄사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였다. 당시 계엄사의 발표문엔 이런 내용이 담겨 있다.
광주사태의 진상을 고의적으로 왜곡해 (중략) 유인물을 대량으로 제작, 이를 교계와 일반시민에게 배포하는 한편 성당 미사를 통해 (중략) 악질적인 유언비어를 유포시킴으로서 계엄 포고령을 위반한 혐의로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서울교구사목국장 오태순 신부를 비롯해 양홍(미아동성당)·김택암(여의도성당)·안충석(이문동성당)·장덕필(봉천동성당)·김성용(광주 남동성당) 신부 등과 서울 명동성당 노동문제상담소 정마리안나(여) 등 주동자들을 연행조사하고 있다. 또한 수사당국은 이들이 (중략) 녹음 테이프를 외국에까지 전파시켜 (중략) 국가위신을 크게 손상케한 혐의도 아울러 조사하고 있다.
▲ 1980년 7월 13일자 <조선일보> 1면에 실린 "유언비어 조작·국내외에 유포, 신부 6명·수녀 1명 연행조사"라는 제목의 기사. 당시 계엄사 발표를 그대로 받아쓴 기사로 정마리안나(정양숙)의 이름이 실려 있다. 기사엔 정양숙이 수녀로 적혀 있지만, 실제로 수녀는 아니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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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엄사는 '연행조사'라 명명했지만, 그것은 참혹한 고문과 같은 이름이었다. 정양숙의 두 여동생에게 언니로부터 당시 이야기를 들었는지 물었지만 "너무 고통스러웠던 일이라 우리가 묻지도 않았고 언니도 말을 꺼내지 않았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얼굴이 물기 하나 없이 말랐었다"는 짧은 한 마디(1993년 12월 <주간 노동자> 기사)가 기록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정양숙의 기억이다. 그나마 함께 서빙고에 있었던 양홍 신부의 경험이 정양숙의 고통을 대변하고 있다.
"처음 서빙고로 딱 끌려갔는데 저만 지하실로 데려가더라고요. 저를 주동자로 생각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그 지하실의 풍경을 목격했죠. 이쪽에 전기고문 시설이 있었고 저쪽에 욕조가 있었어요. 완전히 기가 꺾여 앉아 있는데 갑자기 거기 있던 전화기가 울렸어요. 그러더니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는지 저를 데리고 올라가더라고요.
정양숙은 그 이후에 끌려왔어요. 오자마자 뺨을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고 곧장 '데려 가' 목소리가 이어졌죠. 지하실로 끌려가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거길 봤잖아요. '아이고, 큰일이다' 생각했어요. 하지만 할 수 있는 건 '저 수사관 다리에서 힘 좀 빼달라'고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죠. 얼마나 지났을까, 정양숙이 돌아오는 소리가 들렸어요. 그래도 처음 들어왔을 땐 나름 당당하게 이야기했었는데, 지하실에 갔다오더니 아무 소리가 안 들려요. 너무도 조용해요.
거기가 여자라고 봐주고 그런 데가 아니거든요. 지하실에서 어떻게 당했는지는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느낄 수 있는 최대한의 신체적·정신적 고통을 당했을 거예요. 그래서인지 석방된 뒤 만나도 저나 정양숙이나 그 이야길 안 했어요. 그냥 속으로 '가슴 속에 얼마나 큰 아픔과 모욕이 쌓여 있을까'라고 생각만 했을 뿐이었죠."
▲ 양홍 신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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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성이 전파한 유인물과 녹음테이프의 정체
정양숙과 콜렛이 전파했다는 유인물과 녹음테이프의 정체가 궁금했다. 하지만 '어느 목격자의 증언'이란 제목의 문건의 원 출처를 확인하기 어려웠다.
정양숙의 동생 정길자씨는 "언니로부터 '누군가 노동문제상담소 앞에 문건을 두고 갔다'는 말을 들었다"라고 떠올렸다. 윤순녀 대표는 "테이프 복사를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서 했다는 이야길 전해들었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전남 화순을 빠져나온 청년의 증언",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가 출발하지 못하고 5월 19~24일 광주에 머물렀던 이의 진술" 등의 기록이 있었지만 더 추적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유인물과 녹음테이프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 먼저 <오마이뉴스>가 입수한 1980년 6월 14일 자 외무부 '3급 비밀' 문서(해외 반한단체 동향 및 대책)엔 1980년 6월 5일 진행된 "일본 가톨릭 정의평화협의회 성명 발표 및 기자회견"이 기록돼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기자회견에서 "자필 증언서 및 육성 카세트 3벌이 발표됐다"고 나와 있는데, 그 내용이 '찢어진 깃폭'이란 제목으로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에 실려 있었다. '찢어진 깃폭'이 '어느 목격자의 증언'의 복제본인 셈이다.
▲ 1977년 정양숙(왼쪽)과 김수환 추기경.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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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알 같은 글씨로 종이 8장을 가득 채우고 있는 '찢어진 깃폭'의 내용을 분석해봤다. 우선 해당 유인물에 확인되지 않은 일부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계엄군이 임산부와 여대생을 살해했다면서 잔혹한 장면을 묘사한 내용이나 사망자의 구체적 숫자를 거론한 점 등이 대표적이다.
그렇다고 유인물의 내용 전체가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채워져 있다고 볼 수만은 없다. "시위학생들과 구경하던 무고한 시민들을 벌떼처럼 날아들어온 공수특공대가 단 한 마디의 경고도 없이 포위해버렸다", "시위대의 손에서 '전두환을 때려죽이자, 김대중씨를 석방하라'고 쓴 플래카드와 함께 대한민국 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시민들은 김밥을 만들어 왔고 음료수를 가져왔으며 계란·빵·콜라·우유·주스 등을 시위군중에 주고 싶어 했다", "학생들은 마이크로 헌혈을 호소했고 수많은 남녀가 헌혈을 하겠다고 나섰다" 등의 내용은 실제 상황에 상당히 부합하는 내용이다.
따라서 해당 유인물은 정보가 통제된 극단의 상황에서 광주의 참상을 전하는 '사초'의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계엄사는 이 유인물 중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극단적인 내용만 발췌해 언론에 공개했고 "(신부들과 정양숙이) 종국적으로 기대하는 목표가 무엇이었는지 엄중히 조사·규명해야 한다"고 엄포를 놨다.
▲ 1980년 6월 초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이 내놓은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란 제목의 공개 발표문 중 일부. | |
ⓒ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 관련사진보기 |
실제로 이 유인물을 접한 가톨릭계는 내용을 정비해 6월 초 '광주사태에 대한 진상'이라는 공개 발표문을 정식으로 내놓는다. 나름의 사실 확인 절차를 거친 셈이다. 발표문엔 "군은 한국 근래사상 유래 없는 유혈사태를 유발해놓고 그 책임을 광주시민에게 전가하기 위해 일체의 보도를 통제하고 사실을 은폐했다" 등의 내용이 담겼다. 발표문 전체를 지금 시점에서 살펴보면 엄혹했던 시절 5.18민주화운동의 진상을 담은 몇 안 되는 기록이란 평가가 충분히 가능하다.
하지만 계엄사는 신부 6명과 정양숙을 체포한 이유에 대해 앞서 유인물은 물론 이 발표문까지 포함시켰다. 즉 내용의 사실 여부와 상관없이 계엄사의 관심은 오로지 '광주의 진실'을 통제하는 것에만 집중돼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쓰러졌지만
▲ 정양숙의 두 동생 정길자·화숙씨가 세자매가 함께 나온 사진을 들고 있다. 사진 속 가운데 있는 이가 살아생전의 정양숙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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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법회의(현 군사법원)에 넘겨진 정양숙은 징역 2년을 선고받고 서울구치소(일제강점기 서대문형무소로 쓰였던 곳으로 1987년 의왕으로 이전)에 수감됐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집행정지로 풀려났지만, 고문 후유증이 그녀를 평생 따라다녔다. 동생 정길자씨의 이야기다.
"속이 상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딱 그거였어요. 아파서 병원에 가도 이상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다가 결국 쓸개를 떼어냈죠. 전국의 신부님, 수녀님들이 배려해주셔서 곳곳으로 요양을 다니긴 했는데 계속해서 혈압 조절이 안 됐어요. 그러다 1994년 결국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말았죠."
처음엔 몸의 절반밖에 쓸 수 없었던 정양숙은 점차 남의 도움 없인 움직일 수 없는 처지에 이르렀다. '네', '아니오' 대답이라도 할 수 있었던 의사소통 능력도 점점 상실됐다. 정길자씨는 쓰러진 직후 언니를 본인의 집으로 데려와 다른 동생 정화숙씨과 함께 정성껏 돌봤다. 22년 동안 투병생활을 한 정양숙은 결국 2016년 4월 2일 세상을 떠났다.
▲ 투병하던 시절의 정양숙. 손에 조카가 선물한 인형이 들려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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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숙의 삶은 이 사건 하나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녀는 1963년 가톨릭노동청년회(JOC)에 가입하고 1965부터 3년 동안 JOC의 전국회장을 맡으며 노동운동에 뛰어들었다. 이후 1970년대 중반까지 여러 공장에 취직해 노동자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뿐만 아니라 1968년엔 국제가톨릭여자협조회(AFI, 현 국제가톨릭형제회)에 들어가 명동성당과 전진상교육관을 오가며 민주화운동에도 힘썼다. 역시 AFI 회원으로 1962년부터 한국에 있었던 콜렛과도 이때 인연을 맺었다.
정양숙은 유럽 유학 중엔 벨기에에 머무르면서도 수시로 독일을 찾아 파독 광부·간호사들을 돕기도 했다. 이후 한국에 돌아와선 1979~1983년까진 명동성당에 위치한 노동문제상담소에서 간사로 활동했고, 1980년대 중반부터 쓰러지기 전까진 환경운동에 관심을 두고 한살림생활협동조합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했다. 정양숙과 엄혹했지만 뜨거웠던 한국 현대사를 관통한 콜렛은 이렇게 말했다.
"마리안나가 돌아가셨단 이야길 듣고 많이 슬펐어요. (생전에) 마리안나는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했었어요. 전두환도 그만두고 노태우도 그만두고 그러면서 조금씩 한국이 바뀌었잖아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 희생해야 후배들이 잘 살 수 있어요. 마리안나는 그 모습을 봤으니 평화롭게 떠났을 거예요."
▲ 동생 정길자씨의 집엔 정양숙이 마지막까지 머물던 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양숙이 생전에 자주 껴안고 있었던 조카에게 선물받은 인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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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양숙이 마지막을 보낸 집엔 그녀가 쓰던 방이 그대로 남아 있다. 새하얀 이불 위에 조카가 선물해 자주 끌어안고 있었다는 작은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동생 정화숙씨가 힘주어 말했다.
"어릴 적 어머니·아버지가 다 돌아가셨기 때문에 언니가 직장생활을 하며 두 동생을 다 가르쳤어요. 소녀가장이었죠. 언니의 삶을 되돌아보면 어쩜 그럴 수 있었는지... 산업화 시대를 거쳐 민주화 시대를 치열하게 보냈고 그 이후엔 기후, 환경, 먹거리 문제까지 관심을 이어갔어요. 자연을 사랑했고, 꽃을 사랑했던 언니는 꽃비가 내리던 4월에 그렇게 세상을 떠났어요."
▲ 천주교비봉추모공원에 자연장으로 안장돼 있는 정양숙.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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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 도움]
윤순녀 평화의샘 대표
김성용·양홍·안충석 신부
케르모얼 임마누엘 신부(한국명 임경명,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유혜심 전진상교육관장
정길자·정화숙·신경희씨
[참고 자료]
1980.5.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교황청 반응, 1980-81 (외무부)
1980.5.18 광주사태[민주화운동] 관련 해외 반한단체 동향 및 홍보활동, 1980 (외무부)
5.18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2권 (광주광역시 5.18자료 편찬위원회)
이 사람을 보라 1 (김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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