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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는 이양자교수님의 주옥 같은 글들이 실렸습니다. 이 중 역사공부룰 하게된 이야기를 담은 '나의 길, 나의 학문'이란 제목으로 실린 글을 옮깁니다. 이를 허락해주신 이양자 교수님에게 깊고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2023년 소소리출판사 간행, 239쪽)
나의 길 나의 학문을 회고하며
이제 2023년 올해로써 내 나이가 어언 83세, 8월이면 정년 퇴직한지 만 17년이 된다.
십 수 년 전 동양사학회로부터 [나의 길 나의 학문을 회고하며] 라는 제목의 글에 대한 원고 청탁을 받고 나름 작성을 해 보냈지만, 동양사학회 측은 동양사 전공 선생님들의 원고가 많이 들어오지 않아서 결국 책으로는 만들지 못했다는 연락을 받았던 글이다. 그래서 이 글은 동양사학회 측이 요청한 설문 내용에 따라 글을 쓴 것임을 밝혀둔다. 블로그에 올려두었든 글이 이제 쓰임을 받는 셈이다.
나는 퇴직하기 전인 2005년 봄에 대학 신입생들에게 첫 강의 시간에 들어가
“반갑습니다. 여러분! 저에게도 여러분들과 같은 Freshman 시절이 있었습니다. 저는 59학번입니다.” 하고 소개했더니 순간, 수십 명의 학생들의 표정이 이지러지며 아무런 소리 반응이 없었다.
05나 06학번이 어찌 46년여나 선배가 되는 59학번 인생 선배를 감정적으로나 숫자적으로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게 세월은 흘렀고 눈알이 돌아갈 만큼 빠른 숱한 시대적 변화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으니 나름대로 감개가 무량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본론에 들어가서 나는 왜 사학을 그것도 중국사를 전공하게 되었는지를 얘기해 보아야겠다.
원래 내가 좋아한 과목은 영어와 음악이었다. 음악은 피아노부터 시작하여 성악레슨도 받았는데, 작곡과에 가고 싶었으나 작곡이란 능력의 한계를 느낄 때 빠져나갈 길이 없다는 음악선생님의 충고로 포기하였고 영문과는 친정 부친 때문에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대학 들어갈 시절인 1959-60년도는 동ㆍ서간에 미소냉전이 한창 불을 튀기고 있을 때였으며, 우리나라는 지금처럼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었고 중국은 죽의 장막 속에 갇혀 있었다. 그러므로 부친은 어떠한 세상, 설령 공산주의 세상이 되어도 살아남을 수 있는 전공 학과는 역사과나 음악과나 중국어과라고 하시면서 딸자식이 시세를 타는 큰 인물이라도 되리라 생각하셨는지 학과 중 삼자택일을 권하셨던 것이다.
음악은 이미 포기 했고, 중국어과는 부친의 미래 전망적 비전과는 달리, 나의 판단으로는 그 당시 거의 알려지지 않은 미미한 상태의 학과였으므로 당연히 역사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사실 부친 말씀처럼 중어중문학과를 선택했다면 훨씬 수월하게 교수가 되었으리라 생각하면서 부친의 선견지명에 지금도 놀란다. 나는 역사 중에서도 서양사를 전공하리라 마음먹고 사학과에 진학하였다. 그것도 여자가 혼자 살아도 먹고 살 수 있는 길은 교사가 되는 길이라는 부친의 충고에 따라 사범대학을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서울대 문리대(文理大)는 제2외국어 시험이 있었으므로 나는 독일어를 경남고 독어선생님으로부터 개인 교수까지 받아가며 문리대 진학을 준비했으나 결국 사범대로 진학하게 되었다. 대학 4년간 학교 성적도 좋았고 교사자격증도 따고 하여 졸업하자마자 영등포여중에 바로 취직을 하였지만 깊이 있는 학문적 연구에 늘 목말라하고 또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던 사범대생인 필자의 두 번째 목표는 일반대학원 사학과에 진학하여 열심히 공부하는 것이었다.
1963년 봄 졸업과 함께 서울의 영등포 여자중학교에 발령을 받음과 동시에 서울대 일반대학원 사학과 동양사 전공에 합격하였다. 나는 대학원 진학을 위해 근 1년간 안동출신 한학자 분께 한문을 배웠으며 일본어도 학원에 다니면서 익히면서 매우 열성적이었다. 그랬으므로 여중교사로 취직된 지 몇 개월 만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오늘로 보면 참 대담한 짓이었는데, 그러나 그 당시 나의 어린 생각으로는 대학원 공부를 하면서 도저히 교사생활을 양립할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발령 난 학교에 몇 달만 다니고 사표를 제출하였던 것이다. 그때 주월령 영등포여중고 교장선생님은 여자 분이셨는데 “교사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대학원 공부를 할 수 있는데 왜 사표를 내느냐”고 하시며 간곡히 만류하였던 생각이 난다.
내가 대학원에서 서양사가 아닌 동양(중국)사를 택한 이유는 중국과 한문에 대한 새로운 인식 때문이었다. 중국사 전공에 필요한 외국어는 한문과 일본어와 영어면 되지만 서양사 전공에 필요한 외국어로는 영어만으로는 부족했고 독어, 불어 심지어 라틴어 정도는 능숙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있었다. 참으로 꿈은 대단했던 시절이 었다.
동양사 전공을 택하고 보니 교수님도 훌륭한 분이 많이 계셔서 매우 흡족해하며 2년 동안 열심히 대학원엘 다녔다. 동빈 김상기 선생님, 우호 전해종 선생님, 그리고 녹촌 고병익 선생님...대학원시절 은사님에 대한 기억은 너무나 생생하다.
그 때 대학원 동양사 전공은 필자 한사람이었고 한국사 전공학생은 서울대의 최승희씨, 이미 고인이 된 송찬식씨, 그리고 국사편찬위원장직을 역임한 숙대교수가 된 이만열씨 등이었다.
동빈 선생님께서는 언제나 약주를 한잔하시고 들어오셨는데 한문 원전강독을 아주 열정적으로 해주셨다. 옛날 서울대 본부와 문리대 건물이 있던 이화동의 뒷산, 낙산을 배경으로 열심히 강의해주시던 그 짱짱하시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서언하다.
그리고 전해종 선생님께서는 유교(Confucianism)에 대한 강의를 해주셨는데 미국에 다녀오신 바로 이후라서 영어원전을 읽어와 발표하는 학생들에게 일일이 발음까지 체크해주시면서 말과 말 사이가 뜨면서도 또박또박 열강해주시던 그 기억을 잊어버릴 수가 없다.
그리고 고병익 선생님. 당시 독일 뮌헨에서 돌아오신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은 시점이어서인지 아니면 워낙 그러한 모습과 성품 때문인지 독일적인 풍모를 많이 가지고 계시다고 생각했었다. 책의 저자는 잊어버렸는데 『중국의 인구』에 대한 영어원본을 읽어가서 발표하는 강의시간이었다. 그 해 대학원 동양사 전공에는 나 혼자였기 때문에 전공과목은 늘 혼자 들었고 필수 과목은 한국사 전공자들과 함께 들었다. 나는 중국 인구에 대해 발표를 끝냈는데, 고병익 선생님의 반응이 특이하셨다. 양다리를 흔드시고 미소를 지으시며 이빨을 딱딱딱 마주치시면서 본래의 그 시니칼 하신 모습으로 "그래? 그렇게 갑자기 인구가 늘어나 버렸어?" 하시는 것이었다. 아마 영어식 숫자를 필자가 잘 못 해석하고 읽어서 한 단위를 높여서 발표한 모양이었다. 그리고서는 마주보며 서로 한참 웃은 일이 지금도 생생하다.
공부에만 전념하겠다는 생각으로 사표를 던졌지만 서울대학교 일반 대학원 공부는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당시는 서울대 대학원의 합격도 어려웠지만 대학원 공부는 더욱 힘들었다. 사범대학 공부는 넓게 얕게 배우는 경향이라면 대학원 공부는 사료 중심으로 깊게 파고 들어야 했다. 매일 요일 감각 속에 정신없이 공부하며 지낸 시절이었다.
대학원에서의 지도교수는 전해종 선생님이셨기에 한중관계사를 하게 되어 <원세개의 재한 중의 활동>에 대해 석사학위 논문을 썼다. 이런 와중에 같은 동양사 전공자로서 대학원에서 만나게 된 김종원 씨와 결혼을 하게 되었으니 나의 동양사 선택은 전공학문 선택의 길잡이였을 뿐 아니라 인생의 길잡이 노릇을 한 셈이다. 뿐만 아니라 세 명의 자식 중 두 명이 다시 동양사 전공을 하게 되었으니 동양사와의 인연은 나와는 아주 묘하고 큰 것이었다.
대학원 졸업과 함께 결혼을 하였으므로 당분간 공부는 뒷전이 되고 애 셋 낳아서 키우며 가난한 무급 조교, 시간 강사 남편 뒷바라지에 6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 후 남편이 한양대 전임교수가 되고 나는 다시 고등학교 강단에 서서 전임교사를 하면서 틈틈이 대학 강단에 시간강사로도 설 수 있었다. 마음속엔 늘 원세개의 10년간에 걸친 조선에서의 횡포에 잡혀있었다. 정치적 간섭, 외교적 간섭, 경제적 간섭 등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우리 식구 다섯 명은 아빠 김종원 교수의 한양대학에서 부산대학으로의 이동으로 가족 대이동을 하여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당시 전해종 선생님과 최문형 선생님이 직접 집으로 찾아오셔서 서울을 떠나지 말라고 만류하시던 생각이 난다. 우리 애들도 반대했었다. 모두 서울로 올라오려고 하는 그 시대 트랜드와는 정반대인 역주행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당시 사립대학교의 횡포는 남편을 견디어 내지 못하게 했다.
고향 부산에 자리 잡은 것은 여자인 나에겐 유리하였지만 남편 김종원 교수에겐 여러 가지로 불리하였다. 모든 것이 서울 중심적인 환경 속에서 역시 지방은 소외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나는 4년제 대학인 동의대학교에 자리를 잡게 되었으나 학문적으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애들도 중학생, 초등학생이 되었으니 이젠 그나마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밤낮없이 강의 준비에, 논문 준비에 매달렸다. 게다가 지금까지는 석사학위의 소지만으로도 대학 강단에 설 수 있었으나 이제부터는 박사학위 소지자라야만 한다는 추세 속에 박사학위를 취득해야 한다는 심적 부담을 가지고 시험 준비를 하고, 시험을 치루고 하여 40대 후반에 다시 대학원 박사과정에 합격하게 되었다.
대구의 영남대학교 대학원에서 이병주 교수님을 지도 교수로 정하게 되었고 아울러 중국현대사 강의 속에서 만난 손문 부인, 송경령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나의 박사학위 논문은 <송경령 연구>가 되었으며 중국 여성에 관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이와 같이 나는 뒤늦게 박사과정에 들어가면서 중국의 한 여성 송경령과 만나게 되었고 그녀에 관한 관심이 증대되면서 자료를 모으고 논문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나에겐 큰 행운이었다. 송경령이란 여성은 깊이 알아갈수록 존경스럽고 마음이 끌리는 훌륭한 인물이었다. 그녀에 관한 공부를 하고 있으면 필자 자신도 모르게 파란만장한 중국 현대사 속을 함께 걸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 그녀와 함께 노하고 괴로워하고 기뻐하고 열정에 불탔다. 또한 그녀의 용기 있고 진실된 모습에서 진지한 삶의 자세를 배우기도 하였으며, 공부하는 동안 언제나 마음속에 즐거움과 용기가 가득하였다.
인물사를 연구할 경우 역사에 있어서 부정적인 측면이 많은 사람보다 긍정적인 작용을 한 인물이 훨씬 공부하는 데 즐거움과 보람을 안겨준다는 사실도 실감하게 되었다. 나의 석사학위 논문은 원세개의 대조선 간섭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때의 참담한 기분과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논문을 쓰고 있는 동안은 몰아의 경지에 빠질 수 있었다. 흔히 공부하는 자세는 구도자와 같아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마치 사물놀이패처럼 신들린 듯 공부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는 송경령과 함께 중국의 현대사를 넘나들었으며 그녀의 인생역정에 나도 함께 동반자가 되었다. 유복한 기독교 가정의 딸로 태어나 미국에 유학까지 하고, 27세 연상의 남성 손문과 “애정의 이상과 혁명의 이상을 결합시키며” 결혼하여 혁명의 길로 나아간 여성, 송경령! 그리고 민중을 위해, 민주를 위해 싸우고, 여성의 해방을 위해 노력한 지조 있는 여성 혁명 정치가이며 사회 활동가이며 박애주의자였던 송경령. 그녀는 왜 사회주의자로 전변하여 중공에 합류하게 되었을까?
그리고 같은 환경에서 태어나 자란 애령, 경령, 미령의 송씨 세 자매는 왜 그렇게 각기 다른 인생행로를 걸어갔을까? 돈을 사랑했다는 언니 송애령과 권력을 사랑했다는 동생 송미령과 민중을 사랑한 송경령은 어떤 근본적인 차이점을 가지고 있었을까? 이 같은 의문은 언제나 나를 따라다녔고 흥미와 관심을 유발시켰다. 송경령은 “인간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어떤 보편적인 진리를 이성과 양심에 따라 실천해 나간 매우 용기 있고 훌륭한 여성이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송경령과 더불어 하향응에도, 송미령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한 신문에 중국의 저명 여성들에 대한 시리즈 물(왕소군, 측천무후, 서태후, 추근, 하향응, 등영초, 정령, 채창, 강극청, 강청 등)을 연재하기도 하면서 중국여성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켜 나갔다.
그러하던 중에 중국 여성사 연구자들과의 연락과 모임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소홀히 다루어왔던 여성문제를 동양문화의 대표적 국가인 중국의 역사에서 통시대적이며 포괄적으로 고찰하여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여성문제를 새롭게 인식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이 당시 나는 사회단체인 여성문제연구회 부산지회 회장직도 맡고 있었다. 다시 말해 중요한 이슈로 대두되고 있는 여성의 사회적 지위와 역할문제를 공동으로 연구 발표하는 장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우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사 연구는 상당한 궤도에 올라섰고 중국사 전공학자들도 많아졌지만 아직도 중국여성사 관련 연구자들이 얼마나 되는지는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중국, 일본, 대만 등지에서는 이미 연구자가 급속히 증가하여 여성사 연구자들의 모임뿐만 아니라 여성사 관련 잡지, 단행본들을 내고 있는 상황이므로 상당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고 있는 실정임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에서의 상황은 너무도 한산하여 이와 관련된 일의 조직과 활동을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0년 중국사학회 부회장직을 맡으면서 “여성을 통해 본 중국사”라는, 중국사학회가 개최할 국제학술대회 명칭을 우선 정해놓고 1년 반 동안 스무 명 가까운 국내 중국사 관련 여성연구자들을 찾아내었고 또 만날 수 있었다. 그 다음은 중국, 일본, 대만, 미국, 독일, 이태리 등 각국의 중국여성사 관련 학자들의 명단을 조사하여 찾아냈으며 각자에게 연락하여 드디어 2002년 초에는 6개국 40여명의 학자들과 연락이 가능하게 되었다.
결국 이 국제학술대회는 그간 E-mail, 전화, 우편 등을 총동원한 노력의 결과로, 5개국에서 26명의 외국학자가 발표자로 참가하게 되었고 국내에서는 16명의 학자가 발표에 참가하게 되었다. 대질 토론자까지 모두 80여명의 학자들이 참석하여 동의대학에서 큰 학술대회를 개최하였다
사흘간에 걸친 국제학술대회에서 발표된 논문은 선진시대부터 현대중국에 걸쳐 여성의 정치참여, 여성의 법률적 지위, 직업과 물질욕망, 여성의 풍속 및 혼인생활, 여성의 불교사원 공양, 여성해방과 부녀관의 변천, 여권론 및 사회개혁운동, 여성인력개발, 여성운동과 손문의 삼민주의, 여성노동자와 문화대혁명, 모성애 관념과 현모양처론, 중국 측의 일본여성관, 여성 교육제도, 중국여성의 미국유학, 교과서 가운데 보이는 중국여성에 대한 서술 등등.. 실로 다방면에 걸쳐 각양각색의 문제의식에서, 역사적으로 중국여성을 해부하였다.
이러한 연구와 토론을 거침으로써 중국을 비롯한 전 세계 여성들의 현안 문제를 찾아내고 여성의 복지향상과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한 밑거름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뿐만 아니라 이를 계기로 중국 여성사에 관심을 갖는 학자가 많이 배출되고, 우리 학계에서도 여성사 연구의 지평을 높이는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학자들의 알차고 높은 연구 수준을 외국 학계에 알리는 기회도 되었다.
또한 이를 계기로 국내의 중국사 연구 여성학자들은 서로 간에 연락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으며 아직 조직화 하지는 못했어도 같은 주제를 놓고 각자 연구하여 단행본을 내는 일이 가능해졌다. 이미 2005년도에는 김염자 교수를 중심으로 『중국여성, 신화에서 혁명까지』가 출간되었으며, 2006년에는 필자가 중심이 되어 『중국근현대를 이끌어 간 걸출한 여성들』이란 책이 출판되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제 25회 동양사학회 동계 워크샵에서도 <아시아 역사상의 여성>을 주제로 연구 토론회를 갖게 되었는데 이 또한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제 앞으로의 여성학자들의 조직화와 공동연구는 다음세대의 젊은 여성학자들의 몫이지만 그 밑거름을 그려주고 씨앗을 심는 일에 계속적으로 협조해 나가야 할 일이 필자의 작은 몫이라 생각하고 있다. 다행이도 우리나라 여성학자들 간에 우리나라와 동서양의 여성 연구를 아우르는 여성사학회가 생겨나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음은 매우 발전적인 일이다
또 한 가지 필자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중국사의 대중화라는 명제다.
한 학년 100여명의 신입생을 앉혀 놓고 물어보면 고등학교 때 세계사를 배웠다는 학생은 2, 3명에 불과하였다.
신입생은 모택동도, 장개석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 앞에서 나날이 위협적인 존재로 커가는 대국 중국을 전혀 모르는 우리 젊은이들에 대해 절망하게 한다. 지피지기(知彼知己)는 필승지본(必勝之本)인데 우리는 이렇게 중국을 몰라도 되는가?
그래서 대중 강연과 홈페이지, 싸이월드, 네이버블로그, 카페, 페이퍼 등을 통한 중국사 연재 및 대중 상대의 강의와 중국사의 이해 확산을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일이 필자에게는 중요한 과제로 남아있는 바, 퇴직한지 십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 이미 시작하여 계속하고 있으며 이후에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노력하며 더욱 확대해 나갈 생각이다.
우리나라 역사교육의 문제점은 여기서 일일이 나열하지 않아도 우리 사학계의 교사, 학자, 교수들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며 이미 관계 당국에 호소문, 건의문을 낸 바 있다. 결과적으로 인문계 선택자의 경우 한국사를 선택이 아닌 필수로 하는 일은 성사되었으나 세계사의 경우는 미미한 선택의 분야에 머물러 있어서 세계사 교육의 전면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세계사 교육 없이 세계화가 가능할까?!
아울러 나는 계속적으로 중국의 여성 관련 자료들을 번역하여 후학들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고자 한다. 그 중 퇴직 후에 필자가 번역하여 출판한 『사료로 보는 중국여성사 100년 』(한울 아카데미. 2010. 4.)이란 책은 보람을 느끼는 성과 중 하나다
다음으로 연구과정이나 강의 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전공학문에 대한 연구법과 지침을 얘기해 봄으로써 후학들에게 줄 조언으로 삼고 싶다.
다 잘 아는 얘기지만 전공 학문 연구에는 어학이 필수적이다. 이제 글로벌과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이미 지구촌 사람으로 통한다. 자기 연구 분야의 나라에 가서 그 나라의 말도 배우고, 그 나라의 자료를 보고 연구해야 함은 이제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특히 한문공부는 동양사 전공자에게는 모국의 글자와 같아야 한다. 이제 세계 10대 무역국에 속해있는 오늘의 우리나라 형편에서 볼 때 이미 영어는 평상적으로 익히고 있어야 한다.
잘 드는 양 날의 도구만 있다면 학자는 멋진 연구를 해낼 수 있는 자본을 가진 셈이다. 국제학술대회에서 벌써 중국어와 한문은 영어 못지않게 일상 언어, 글이 되고 있다. 어학공부 특히 중국어 공부는 해도 해도 부족함이 없다.
그리고 연구하는 자세는 구도자와 같아야 하지만 자신과 후배 학생들을 격려하기 위해선 사물놀이패처럼 신나게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강단에 선 선생, 교수라는 자리는 학생들을 보다 넓은 시야로서, 열정적으로 애정을 다하여 가르치고 이끌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 빠져서는 안 될 것이 후배와 학생들에 대한 따뜻한 격려와 사랑이다.
이것이야 말로 약화되고 있는 인문학 특히, 동양사학에 있어서 전공자들을 많이 배출할 수 있게 하는 힘인 것이다.
연구 분야에 있어서 필자가 조언하고 싶은 것은 번역도 중요하지만 논문을 더 많이 써야 한다는 사실이다. 나 자신 별 학문적 업적은 많지 않지만 나름대로 번역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였다. 그러나 학자의 생명은 연구논문을 많이 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논문이 모여지면 단행본 책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학자는 논문으로 말한다.”는 언제나 통하는 만고의 진리인 것이다.
아울러 아직 전임이 되지 못하고 시간 강사나 연구원으로 머물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많은 중국사 연구자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국가적으로 많은 연구소를 만들고 교수자리를 넓혀 수많은 연구자들을 구제해야 한다.
그리고 한 가지, 1960~1970년대 암울했던 그 시절 수유리에 자리 잡은 필자와 김종원 교수의 보금자리엔 조동원, 이성규, 최갑순, 조병한 선생님 등등 학문적으로 짱짱한 중국사 전공후배들이 소주와 돼지고기 삼겹살을 사가지고 자주 찾아와 중간 보스 격이었던 남편과 밤새 학문적 토론을 하던 모습은 참으로 잊지 못할 아름답고 가슴 뜨거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참 고마웠습니다~!
첫댓글 이 글은 최근에 중국학회지에도 실린 글입니다. 사회활동에도 적극적인 교수님의 역사창조의 노력이 아주 존경스럽니다.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이양자교수님의 글을 소개해 주셔서 절 보았습나다,
읽는 사람마다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참으로 좋은 글입니다.
시간을 내어 몇번이고 다시 읽고 싶은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청계산(지교헌)
제가 올린 "모차르트에 사과한다."는 이양자교수님의 수필집은 본 카페 '책소개 난의 408호에 실린 윤승원선생의 소개가 있습니다. 목차등을 포함하여 자세한 소개가 있으니 이 글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에 제가 올린 글은 그 책 중 이 교수님이 역사를 연구하게 된 역사를 소개한 내용입니다. 이에 대하여 끝까지 읽어주신 지교수님의 댓글에 대해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책 제목이 '모차르트를 사과한다'.로 되어 있어 원 제목대로 수정했습니다. 조금 난해한 책 제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