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가 “다종교사회이면서 평화가 유지되는 세계적인 모범 사례”라며 안심하는 이들이 많다. 과연 그럴까. 설사 현재의 상황이 긍정적이라고 할지라도 앞으로 계속 이 평화가 유지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을까?
미국 테니시 주에 있는 하트송 침례교회(Heart-song Baptist Church) 교인들은 교회 옆에 이슬람 센터가 새로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이슬람 센터의 입주를 환영합니다”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공사가 지연되어 라마단 기간에 맞춰 센터가 문을 열기 어려울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 이 교회 스티브 스톤 목사는 교회에서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무슬림들을 초대했다.
2001년 ‘9·11 사건’ 이후 이 소식이 미국 전역에서 화제가 되었고, 인도 카슈미르 주의 무슬림들도 방송을 통해 이 소식을 접하고 스톤 목사의 인터뷰도 들었다. “신(알라)께서 방금 이 사람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셨다”라고 말하는 무슬림 지도자도 있었다. 어떤 주민은 스톤 목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이제 우리도 선한 이웃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트송 교회 회중에게 말해주세요. 우리가 미워하지 않는다고, 사랑한다고, 남은 생애 동안 그 교회를 우리가 돌볼 거라고 말해주세요.”
이슬람 센터가 완공되어 제 역할을 하게 된 뒤, 두 공동체는 지역의 노숙자들을 돕는 일을 함께하고 있다. 두 종교 간의 경계를 희미하게 만들기 위해 사이좋게 땅을 내놓아 친교 공원을 만들기로 하고 진행 중이다.
하트송 교회가 뿌린 ‘이해·사랑과 연민’의 작은 씨앗이, 자칫 적이 될 수도 있었던 이들을 ‘사이좋은 이웃사촌’으로 만들고 멀고먼 인도까지 날아가 ‘희망의 열매’를 맺고 있는 것이다.
몇 해 전 미국 출장 중 들렀던 뉴저지주립대학의 교내 교회를 이슬람학생회와 불교학생회에서도 언제든 편하게 사용할 수 있게 개방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런 아름다운 일들은 빠르고 넓게 퍼지길 바란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이웃이 전해준 ‘사랑’을 ‘사랑’이 아니라 ‘폭력과 약탈’로 되돌려주는 일이 종교 사이에도 숱하게 많아서 미래를 더 어둡게 만든다. 긴 항해에 지치고 먹을 것이 떨어져 아사자가 속출하고 배가 난파되어 선원들은 고기밥이 될 최악의 상황에서, 먹을 물과 식량을 전해준 원주민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고 재물(주로 황금)을 약탈하며 강제 개종을 시켰던 스페인 제국주의자들과 당시 로마 가톨릭의 ‘나쁜 전통’이 수백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조선 후기에 경기도 여주 산북면 앵자봉 기슭에 있던 주어사는 권철신 등 서학(천주교) 공부를 하는 이들에게 위험을 무릅쓰고 공간을 제공했다. 그리고 얼마 뒤에 주어사는 폐사가 되어 터만 남게 되었다. “천주교도들에게 강학 장소를 제공해서 폐사가 되었다”는 증거가 나오지는 않았지만, 당시 상황에 비추어 “주어사 폐사와 천주교 강학이 상관관계가 있으리라”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한국 가톨릭이 이 역사를 제대로 배웠다면, 고난의 시기에 사랑과 연민을 보여준 불교계에 감사해야 당연하겠지만-자신들을 살려준 원주민들을 핍박하고 약탈하며 강제 개종을 시켰던 스페인 선원과 당시 가톨릭교회처럼-한국 가톨릭은 이 주어사에 있던 스님의 비석을 무단으로 가져가고 이곳을 자신들의 성지로 하겠다며 ‘불교의 역사’를 지우려 한다.
이런 일이 멈추지 않고 이어지면 어떻게 될까. “종교 간의 평화 없이는 국가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 간의 대화 없이는 종교 간의 평화도 없다. 종교에 대한 기초 연구 없이는 종교 간의 대화도 없다.” 가톨릭 신학자로 전 세계 종교 간 대화의 선구자 역할을 하고 있는 한스 큉Hans Kung의 명언이다.
큉의 이 말을 바꾸면 “종교 간의 평화 없이 국민화합 없다. 이웃 종교에 대한 배려와 감사 없이 종교 평화는 없다”일 것이다.
이병두 종교평화연구원장 beneditto@hanmail.net
[1398호 / 2017년 7월 5일자 / 법보신문 ‘세상을 바꾸는 불교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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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주어사ㆍ천진암 스님 기억하라” -금강신문 기사
조계종 중앙종회, 교황 방한 맞아 성명 조계종 중앙종회(의장 향적 스님)는 2014년 8월 12일 제199회 임시중앙종회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맞아 한국사회에 종교화합이 이뤄지길 바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중앙종회는 성명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의 천주교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지켜주다가 함께 수난을 당한 스님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종회는 또 “권철신 등 천주학자들은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천주강학을 진행하다가 수난을 당했다. 당시 주어사와 천진암의 스님들은 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을 발휘해 천주강학을 보호했다. 그 결과 스님들은 수난을 당해야 했고 사찰들은 폐사의 길에 접어들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천진암이 천주교 성지로 변하는 과정에서 사찰의 흔적조차 사라지게 됐다. 천주교 성인 5명의 무덤과 성당만 남게 됨으로써 천주강학이 이루어진 장소가 사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잊혀졌다. 이런 과오에 대해 한국의 가톨릭의 책임 있는 사과가 있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 종교간 화합이 이뤄질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프란치스코 교황 방한을 계기로 한국사회에 종교화합이 정착되기를 바랍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중증 장애인에게 사랑의 손길을 펼치고 마피아를 파문시키는 등 프란치스코 교황이 보인 자비행에도 같은 종교인으로서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반도에도 세계일화(世界一花), ‘평화의 꽃’이 발아해 만개하길 발원합니다. 다만,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한국의 천주교가 180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들을 지켜주다가 함께 수난을 당한 스님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권철신 등 천주학자들은 주어사와 천진암을 오가며 천주강학을 진행하다가 수난을 당했습니다. 당시 주어사와 천진암의 스님들은 서구사상의 범람을 염려한 조정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자비심을 발휘해 천주강학을 보호하였습니다. 그 결과 스님들은 수난을 당해야 했고 사찰들은 폐사의 길에 접어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천진암이 천주교 성지로 변하는 과정에서 사찰의 흔적조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천주교 성인 5명의 무덤과 성당만 남게 됨으로써 천주강학이 이루어진 장소가 사찰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조차 잊힌 것입니다. 특히, 천진암을 성지로 조성하는 과정에서 해운당대사의징비가 서울 마포구 합정동 소재의 절두산 천주교 성당으로 옮겨지게 됐고, 부도탑은 여주시청에 옮겨지게 됐습니다. 매우 안타까운 것은 초창기 천주교의 순교자들을 돕느라 수난을 당했음에도 한국의 가톨릭은 주어사와 천진암 스님들의 흔적을 모두 지워버렸다는 것입니다. 이런 과오에 대해 한국의 가톨릭의 책임 있는 사과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을 계기로 다종교 사회인 한국에 종교간 화합이 이뤄질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불기 2558(2014)년 8월 12일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의원 일동
금강신문 이강식 기자 lks9710@nate.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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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인 숨겨주다 폐사된 주어사 '터만 덩그러니'
- 조계종 종평위 ‘종교 간 평화를 위한 역사 순례길’ 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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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지난 9일 경기 여주 주어사지를 찾았다. 주어사지는 한국 천주교학자들이 최초로 강학을 했던 장소이기도 하지만, 불교에서는 이들에게 장소를 제공해줬다는 이유로 폐사를 당한 아픔을 지닌 곳이기도 하다. |
시선 닿는 곳마다 천주교 성지임을 알리는 푯말과 안내판이 가득했다. 200여 년 전 조선시대 박해받던 천주교인을 숨겨주다 폐사된 사찰이 있던 곳임을 알리는 흔적은 좀처럼 찾아 볼 수 없었다. 나무 사이사이 간간히 달린 연등만이 이곳이 불교와 관련된 장소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지난 9일 조계종 종교평화위원회가 경기도 여주 산북면 주어사지(走魚寺址)를 찾았다. 주어사지는 한국 가톨릭, 즉 천주교 발상의 요람과도 같은 곳이지만 불교에서는 천주교인을 보호하다 아픈 대가를 치룬 곳이기도 하다. 18세기, 주어사에 주석하던 스님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숨어든 천주학자들의 은신을 도왔고 천주학자들은 스님과 사찰의 도움을 받아 이곳에서 최초로 강학회를 열었다. 이 때의 강학회는 한국 천주교의 시발점이 됐지만 주어사는 이들의 은신을 도왔단 이유로 폐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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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사지로 오르는 길. 천주교 산북성역화위원회에서 설치한 표지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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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자봉 중턱에 위치한 주어사지에는 천주학자들의 모습을 본 딴 포토존이 설치돼 있다. |
이날 종평위 위원장 만당스님과 총무원 사회국장 지상스님을 비롯해 조계종 종무원 등 40여 명의 순례단은 종교 간 화합과 상생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주어사지를 찾았다. 그러나 천주교 성지화 작업이 한창인 주어사지에는 사찰의 흔적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주어사지로 오르는 길목 곳곳에는 ‘천주교 산북성역화위원회’가 설치한 흰색 나무 푯말이 눈에 띄었다. 여주시 시가 설치한 주어사지 안내판에는 “앵자봉에 있는 절터로 권철산 등이 제자들과 함께 머물며 강학을 했던 천주교 전파의 요람지로서 한국 최초로 천주교가 전파된 곳, 가톨릭 교회 성역 순례길로 지정돼 많은 가톨릭 교인이 방문하고 있음”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었다.
순례단이 40여 분을 걸어 올랐을까. 주어사가 있던 폐사지에 도착한 신도 허만해 씨가 “어머어머 이게 웬일이야”하고 중얼거렸다. 허 씨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천주교 신자들이 설치한 것으로 추정되는 천주학자들의 모습을 딴 포토존이 버젓이 서 있었다. 허 씨는 “어려울 때 스님들이 먹여주고 숨겨주고 했던 은혜도 모르고...”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주어사지를 둘러싼 갈등은 날로 악화되고 있다. 2년 전에는 주어사지를 찾은 두 종교 신도들 간 직접적인 마찰도 있었다. 2014년 당시 주어사지가 천주교 발상지로만 알려지는 것을 안타까워 하던 조계종 제2교구신도회는 주어사지로 오르는 길목에 연등을 달았고, 미사를 보기 위해 이곳을 찾은 산북공소 성당 신도들로부터 연등을 떼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2교구신도회가 “사찰이 있던 곳에 연등을 단 것이 무슨 문제냐”며 연등 떼기를 거절하면서 소란은 일시적으로 마무리 됐지만,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았다. 200여 년 전 두 종교 간 화합의 상징과도 같던 곳이 이제는 갈등의 장소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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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사지 안내판. 주어사 폐사 이유 등은 서술되지 않았다. |
주어사지가 천주교 성지로만 알려지는 것에 대해 문제 제기를 해 온 민학기 제2교구신도회장은 “천주교 신자들이 주어사지를 포함한 앵자봉 전체를 천주교 성지로 만들기 위해 매주 미사를 보고, 40만 평에 이르는 인근 땅을 조금씩 사들이고 있다"며 "불교에서는 주어사지가 스님들이 천주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희생을 치렀던 장소라는 것조차 알고 있지 못하는 신도들이 많다”고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2012년 여주시 시 지정문화재 여주향토유적 제19호로 지정된 주어사지 토지는 현재 산림청 소유로 돼 있다. 여주시가 2009년 주어사터에서 발굴한 부도탑은 여주군청에, ‘해운당대사의징지비(海雲堂大師義澄之碑)’는 가톨릭 성지인 서울 절두산 순교성지로 뿔뿔히 흩어진 상태다.
천주교는 천주교 수원교구를 중심으로 산북성역화위원회를 구성해 천진암에 이어 주어사지를 성지화하기 위한 작업에 한창이다. 주변 토지 매입은 물론 정기적으로 주어사지를 순례하고 미사를 보며 나무 심기 등을 통해 성지화에 공을 들이고 있다.
불교에서는 제2교구신도회가 연등 달기 등을 통해 주어사지 문제를 알리고 있다.
종평위가 주어사지 순례길에 나선 것은 올해가 처음. 이날 순례단과 함께 주어사지를 둘러본 만당스님은 “그동안 종평위에서도 여주시에 공문을 보내 안내판에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도록 하는 등 시정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해왔다"며 "무엇보다 스님과 신도들이 주어사지 문제에 대해 바로 알 수 있도록, 주어사지를 종교 간 화합과 상생의 장소로 가꿔 갈 수 있도록 고심 중에 있다”고 말했다.
한편 종평위는 오는 17일에도 주어사지 문제를 알리기 위해 조계종 포교사단 등이 참여하는 제2차 순례길에 나설 계획이다.
여주=이경민 기자 kylee@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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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기사는 어느 대학생이 절두산을 산책하면서 사진 찍어 올린 것을 옮겨왔습니다.
천주교도들을 도와주었던 주어사의 스님의 부도를 가져가 서울 절두산 카톨릭 성지 한 구석에 갖다놓은 이유는?

절두산 성당에 있는 주어사의 '해운당대사의징지비'
주어사(走魚寺)는 경기도 여주 땅 앵자봉 기슭에 있는 자그만 절집이었다.
지금은 절집은 없고 터의 흔적만 희미하게 남아있다.
이 절집에 한 때 <해운海雲>이라는 호를 쓰는 <義澄의징>이라는 스님이 살다가 1638년에 죽었다.
의징의 제자 수견천심(守堅天心)은 의징스님이 죽고 60년이 지난 뒤(1698)에야 이 비석을 주어사 터에 세웠다.
그리고 백년이 지나 이 주어사에서 권철신, 권일신, 이벽, 정약전 등이 모여 서학(西學, 천주교)을 공부했다.
앵자봉 능선은 경기도 광주(廣州) 땅과 여주(驪州) 땅의 경계가 된다.
천진암은 광주 땅이고 주어사는 여주 땅이다.
훗날 천진암은 조선 천주교의 성지(聖地)가 되었지만 주어사는 폐사되었다.
주어사 터에 있던 '해운당대사의징지비'는 지금 서울시 마포의 절두산성당 터에 서 있다.
천주교는 불교에게 이 비석을 돌려주어야 한다.
이 비석은 절두산에 있을 게 아니라 앵자산 아래 주어사 터에 서 있어야 한다.
<원담이 덧붙인다>
주어사를 서학의 강학 장소로 빌려주었다가 스님은 처형되고 절집은 폐사되었다.
그리고 이런 역사적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건지, 아니면 숨기고 싶은 건지 비석까지 천주교가 가져가버린 모양새가 되었다. 한국 천주교가 시대의 양심을 대변한다는 평판에 걸맞으려면 주어사가 복원되도록 지원해주고 불교계에 공식적으로 감사하다는 의견을 표명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그들이 불교에서 입었던 은혜를 인정한다는 아무런 제스처도 없다. 하기야 불교세는 날로 저물어가고 사회적 정치적 힘이 없어지는 상황에서 자기네 천주교 세력은 점점 불어나 한국사회의 주류를 형성하고 있으니, 불교계의 눈치를 볼 필요가 아예 없을 것이다. 무엇이 아쉬워 손해볼 짓을 할 것인가? 가만히 있으면 주어사를 위시한 천진암 터 전체가 한국 천주교의 성지로 승격되고 심지어 지자체에서 지원까지 받고 있는데, 뭐하러 불교하고 엮이러 들 것인가? 사실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만약 이런 속셈이 천주교권력층의 생각이라면 역사적으로 천주교가 제국주의자들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선교사들의 전철을 밟고 있지 않다고 누가 부정할 수 있으리오!
~~~~~~~~~~~~~~~~~~~~~~~~~~~~~~~~~~~~~~~~~~~~~~~~~~~~~~~~~~~~~~~~아래 기사는 천주교신도가 천주교 전래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그 역사를 이야기한다. 그 과정에서 불교에게 어떤 도움을 받았는지 언급은 없다.
주어사 천진암 강학(走魚寺 天眞菴 講學)

한국 천주교회의 배경이자 기원이 된 강학. 권철신(權哲身, 암브로시오)이 이끄는 성호학파(星湖學派)의 신진 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진 학문 연구 모임으로, 주어사(현 경기도 여주군 산북면 하품리)와 그 너머에 있는 천진암(현 경기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 소재)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렇게 불린다. 그 중에서도 1779년 겨울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이 참석함으로써 천주교 신앙을 포함한 서학(西學)이 본격적으로 연구 토론된 ‘주어사 강학’이 교회 창설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다.
[강학 장소와 참석자] 성호 이익(李瀷)의 제자인 녹암(鹿菴) 권칠신이 이끄는 신진 학자군. 즉 녹암계는 1776년(영조 52)을 전후로 형성되었다. 가장 먼저 기록에 나타나는 김원성(金源星), 이기양(李基讓)의 아들 이총억(李寵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 홍낙민(洪樂敏, 루가), 이승훈(李承薰, 베드로), 정약전(丁若銓)·약용(若鏞, 요한) 형제, 이익의 외손인 이윤하(李潤夏, 마태오), 윤유일(尹有一, 바오로), 이벽, 권철신의 조카 권상학(權相學)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주로 강학을 통해 학문을 배우고 연구하였는데, 이러한 강학은 그 이전부터 성호학파 안에서 널리 애용되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개최되었다.
특히 이벽과 정약용은 일찍이 천진암을 자주 찾아 함께 학문을 연구하곤 하였으며, 이 천진암은 주어사와 함께 녹암계의 강학 장소로도 이용되었다. 두 절이 모두 권철신의 집이 있던 양근의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나 이벽이 살았던 광주, 정약용이 살았던 광주 마재(현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능내리)에서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학 연구’와 관련해서는 이들 강학 중에서도 1779년(乙亥年, 정조 3) 겨울에 열린 주어사 강학을 주목해야 한다. 아마도 이 해의 강학이 천진암이 아니라 주어사에서 개최된 이유는 눈이 많이 내렸던 탓에 권철신이 산 너머에 있는 천진암까지 가기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한편 성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이벽이 강학 소식을 듣고 한 외딴 절을 찾아갔으나, 강학 장소가 아닌 것을 알고는 발길을 옮겨 ‘그 산 뒤쪽의 산허리에 있는 절’을 찾아가야만 했다”라고 기록하였다.
이 기록에 따른다면, 이벽은 자신이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천진암(한 외딴 절)을 찾아갔다가 산(앵자봉)을 넘어 강학 장소인 주어서(산 뒤쪽에 있는 절)를 찾은 것으로 이해된다. 또 정약용은 당시의 강학 장소를 ‘주어사’혹은 ‘천진암·주어사’로 기록하였는데, 이 모두 주어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강학 시기를 다블뤼 주교는 ‘1777년(丁酉年)’으로 기록하였다. 반면에 정약용은 ‘기해년(1779) 겨울’로 기록하였고, 현존하는 《만천유고》(蔓川遺稿) 안의 <십계명가>와 <천주공경가>의 제목 협주에는 ‘기해년 납월(12월)로 기록되어 있다. 지금까지는 정약용의 기록을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다.
정약용의 기록에 따르면, 1779년의 주어서 강학에는 녹암계의 스승인 권철신을 비롯하여 정약전·김원성·권상학·이총억 등 여러 명이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다블뤼 주교나 정약용은 모두 뒤늦게 강학 소문을 듣고 달려온 이벽이 이 강학에 합류한 것으로 기록하였다. 이들 외에 이승훈이나 정약종(丁若鐘, 아우구스티노)·약용 형제가 강학에 참석하였다는 주장도 있으나 기록상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주어사 강학의 성격과 의의] 녹암계의 인물들은 일찍이 사행원들을 통해 중국에서 전래된 서학서(西學書)를 널리 접하고 있었다. 또 권철신을 비롯하여 이기양·정약용 등 일부 학자들은 한때 양명학(陽明學)에도 심취하였다. 따라서 주어사 강학에서는 기존의 성리학을 비롯하여 원시 유학(原始儒學)의 내용, 양명학이나 서학 내용이 함께 연구 토론된 것으로 설명될 수 있다. 다만 이 강학을 성리학·유학으로 보거나 양명학 강학으로 이해하는 경우도 있고 서학 강학을 더 중시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다블뤼 주교와 정약용의 기록으로 본다면, 주어사 강학에서 토론된 문제 가운데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에 대한 내용이 들어 있었음에 틀림없다. 정약용이 이 강학 사실을 두 번이나 거론하여 강조한 이유도 주어서 강학이 이전의 강학과는 분명 다른 성격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블뤼 주교는 주어사 강학에서, 첫째 하늘·세상·인생 등에 대한 문제, 둘째, 기존 학자들의 모든 의견, 셋째 성현들의 윤리서 그리고 끝으로 철학·수학·종교와 관련된 서학서 등이 연구 토론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특히 서양의 과학 서적에 들어 있는 천주 교리의 초보적 이론, 즉 하느님의 존재와 섭리, 영혼의 신령성(神靈性)과 불멸성, 칠죄종(七罪宗)을 극복하는 칠극(七克)의 내용 등이 연구되었으며, 참석자들은 이후 천주 교리의 이치를 어렴풋이 느끼고 기도 행위와 하느님 공경, 묵상 행위와 재(齋)를 실천해 나간 것처럼 설명하였다. 이러한 사실과 관련하여 정약용이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별도로 저술한 것이 분명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아직 확인할 수는 없다.
주어사 강학이 이루어지는 시기는 녹암계의 형성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그에 앞서 권철신을 위시한 녹암계의 인물들은 이미 기존의 성리학에서 벗어나 원시 유학에 관심을 기울여 왔으며, 양명학에 심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이 탈주자학적(脫朱子學的) 성향과 혁신적인 학문 태도를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서학서가 전래되고 이를 접하게 되면서 녹암계의 관심은 원시 유학·양명학을 벗어나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에 기울어지게 된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주어사 강학이 개최된 것이다. 이처럼 녹암계의 형성과 주어사 강학은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 그 결과 녹암계의 신진 학자들은 1782∼1783년 무렵에 이미 서학 내지는 천주 신앙에 심취하게 되었고, 1783년 말 이벽의 권유에 따라 북경 선교사들을 만나고 들어와 이승훈과 동료들에 의해 다음해 겨울 마침내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하기에 이른다. 주어사 강학은 바로 교회 창설의 직접적인 기원이 된 학문 연구 모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