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문턱이다. 가을이 싫다. 싱글, 특히 남자라면 옆구리가 서서히 시려올 때가 아닌가. 혼자인 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삶이란 원래 고독한 거야’ 하고 씁쓸한 미소를 날리며 스스로를 위로해보지만 마음 한구석에 뻥 하고 뚫린 주먹만한 크기의 구멍은 좀처럼 아물지 않는다. 왜 옥정호가 그토록 보고 싶었을까.
날씨가 선선해졌다는 말로 시작된 술자리의 대화는 늘 그렇듯 여자와 연애 이야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누군가 “옥정호에 가보라”고 했다. 물안개가 좋다는 것이 이유였지만 대체 가을과 호수와 물안개와 연애가 어떤 상관이 있다는 말인가. ‘호수에 뭐 볼 게 있다고’ 하면서도 꾸역꾸역 짐을 챙겨 임실로 떠나온 것은 참 아이러니했다.
옥정호는 임실과 정읍의 경계에 걸쳐 있다. 섬진강의 물을 막아 생겼기에 섬진저수지, 임실 운암면, 정읍 산내면에 걸쳐 있기에 운암저수지, 산내저수지로도 불린다. 붕어 모양의 섬(외안날)을 안고 있고, 호수를 뒤덮은 새벽 운무가 운치가 있어 사진작가들의 단골 출사지로 꼽힌다.
“새벽에 국사봉에 올라가야 옥정호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그 사람의 충고(?)를 따르기로 한다. 전주와 임실 읍내에서 옥정호까지의 거리는 비슷하다. 하지만 숙소는 임실 읍내로 택한다. 만약 전주에서 묵게 되면 일찍 잠자리에 들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전주 최대의 슈퍼돔나이트 클럽이나 중화산동 유흥가 어디쯤에서 소주 한잔 걸치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했을 테니까. 옥정호 운암교 근처에도 몇몇 모텔이 있지만 굳이 차로 30분 거리의 읍내까지 간 것은 편의점이라든지 식당이라든지 편의시설이 있을 것 같아서였다. 이런 생각은 적중했다. 하지만 읍내의 규모는 작다.
여관은 경찰서 옆‘귀빈모텔’이 유일하다. 방에서 묵은 냄새가 조금 나는 작고 허름한 여관, 느릿하게 열쇠를 건네주는 게으른 주인장이 있다. 선잠을 자고 새벽 4시에 일어났다. 옥정호로 향하는, 어둠이 가시지 않은 도로에는 새벽안개가 지천이다. 오랜만에 맡아보는 새벽 냄새다. 해마다 이맘때 볼 수 있는 순수한 풍경이다. 상쾌하다.
강진면을 지나고 운암교를 건너 전주 방향으로 2~3분 달리다 첫 번째 삼거리에서 우회전, 약 10여분 가면 국사봉 주차장에 닿는다. 해발 475m의 국사봉은 옥정호를 제대로 볼 수 있는 뷰포인트 중 한 곳이다. 옥정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버린 붕어섬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주차장에서 국사봉 정상까지는 걸어서 약 50분 거리, 전망대까지는 약 30분이면 닿는다.
높지 않지만 계단이 많고 경사가 제법 가파르다. 등에 땀이 고이고 ‘담배 끊어야지’ 하는 생각도 든다. 해가 뜨기 전이라 헤드램프나 손전등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정상 직전, 나무로 만들어놓은 전망 데크가 나온다. 전주와 순천에서 왔다는 사진작가 4명이 트라이포드를 펼쳐놓고 있다.
“10월 중순부터 11월까지가 가장 좋을 때여. 그때는 이 데크에 발디딜 틈이 없당께. 사진 찍는 사람들 때문에. 오늘은 셔터를 몇 번이나 눌러볼랑가.”
발을 구르며 아침을 기다리는 사람들. 그리고 여명이다. 어디서부터 밀려왔는지 알 수 없는 운무가 옥정호를 하얗게 뒤덮는다. 1000미터 이상의 준봉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풍경을 고작 30분 고생하고 감상하려니 길 가다 돈 주운 기분이다. 붕어섬을 가운데 두고 호수와 낮은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에둘러 섰고, 그 안에 하얀 운무가 담겨 있다.
땅에 안긴, 그래서 땅과 들과 산과 잘 어우러지는, 그러므로 바라보기에 편안한 호수의 이미지는 어쩌면‘아날로그’라는 생각이 든다. 꼭 싱글 남자뿐 아니라 빅뱅의 ‘거짓말’보다 이문세의 ‘광화문연가’가 귀에 편한 세대, 마음 한구석에 공허를느끼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위로받을 수 있겠다. 여자라도 말이다.
한낮에 옥정호 호반을 둘러보는 것은 밋밋할 수 있다. 그렇다고 주변에 특별한 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다. 정읍 쪽에 있는 구절초테마공원을 둘러보는 것이 그나마 ‘할 것’이다. 서정적이고 세련된 카페나 술집도 없기 때문에 혈기왕성한 빅뱅의 ‘광팬’이나 ‘현지 조달 성공’이라는 판타지를 품은 사람이라면 “이게 뭐야”라고 말할 수 있겠다. 하지만 떨어지는 낙엽에 눈물을 글썽이는, 문학적 감수성을 가졌거나, 오지가 좋다고 자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볼 것을 권한다.
가을 만큼 애잔한 호수 지도를 펼치고 옥정호를 모두 둘러 볼 수 있는 루트를 짠다. 기준점은 운암교. 강진면을 지나 태인 방향으로 가다 산내삼거리에서 산외 방향으로, 종산삼거리에서 운암 방향으로 가면 다시 운암교에 닿는다. 쉬엄쉬엄 달리면 약 2시간 걸린다. 힘들더라도 옥정호 주변의 마을로 들어가야 한다. 그래야 호수의 참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국사봉전망대 근처 용운리, 입석리, 운암교 아래의 마암리, 범어리 등은 소담한 호숫가 마을이다. 붕어섬에는 팔순의 노인이 아직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용운리 마을 이장님에게 잘 부탁하면 배로 데려다주기도 하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범어리는 여덟 가구가 농사와 양봉을 하며 살아가는 작은 마을이다.
운암교 근처에서 험한 차도를 따라 약 4km 들어가야 하는데, 길이 불편해 이곳 주민들은 주로 작은 모터보트를 이용해 이동한다. SUV 차량이라면 육로 진입이 가능하다. 주름 깊은 얼굴의 촌부들과 이야기를 섞다 보면 진솔한 그들의 삶의 모습에 마음이 넉넉해짐을 경험한다. 이들의 얼굴과 이야기를 가슴에 담고 서울로 향한다. 떠나올 때는 혼자였지만 돌아가는 길은 그래서결코 혼자가 아니다. 옥정호에서는 가을이 참 멋진 계절이다.
첫댓글 옥정호에서 새벽을 맞으며 물안개를 카메라에 담아보는게 오래전부터 꿈꾸어오던 계획인데...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하네요. 지금이 딱 좋을때라카든데요... 시래기를 듬뿍넣은 참붕어찜두 기가 맥히다던데...꼴깍~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