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히브리서 11 : 13 - 16
제목: 본향 찾는 자
일시: 2014. 1. 26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북한이 무슨 꿍꿍이 속이 있는지 화해의 제스처로 이산가족상봉을 제안했다. 남한과 북한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서 63년 전에 있었던 전쟁의 아픔을 아직도 겪고 있는 나라이다. 그 가운데 가장 슬픈 것은 바로 이산가족의 애환이다.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가! 철새들은 때가 되면 이곳 저곳 갈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인간들은 스스로의 탐욕으로 그 슬픔을 창조해 내었다. 끝나지 않은 전쟁으로 우리 나라의 경계선은 휴전선이지 국경선이 아니다. 그래서 북에 있는 고향을 가보지 못하는 슬픔이 있다. 유행가를 짓는 자들이 고향과 관련된 노래를 짓는데 원래는 북쪽에 대한 그리움으로 써야 했다. 그러나 고향이 그리워하면서 노랫시를 쓸 때는 언제나 남쪽 나라 내 고향을 이야기 했다. 보안법 검열에 걸려 노래가 허가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이번에 이산가족이 만나면 100명 선이다. 수 만명의 이산가족이 있는데 그 100명은 로또 수준이다. 나아가 만난들 얼마나 오래 만날 수 있는가? 2-3일이 고작일 것이다. 그것이 설 명절을 앞두고 고향을 느낄 수 있는 제한된 시간이다.
II. 왜 그렇게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일까? 고향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 고향은 변함이 없는 곳이다. 도시는 늘 변하고 뜨네기 같은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도 고향은 언제나 변함이 없다. 고향에 가면 어릴 때 내가 놀던 그 나무, 그 바위, 그 시냇가가 있어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하지 않는가? 나이가 들어서 죽음이 가까우면 고향으로 내려간다고들 하지 않는가!
초등학교 때에 화곡동에 살았다. 그때는 인천 가는 기차가 보였고 많은 토목공사를 해 놓아 집을 지을 축대도 많이 쌓아 놓았다. 산도 있어서 그곳으로 놀러갔다가 쫓아오는 걸인을 보고 우리의 간을 빼먹는다는 소문에 축대를 막 뛰던 기억이 있다. 앞집 친구와 물 많이 먹기 시합도 벌이고 앞마당에서 공도 차던 일... 그곳을 보기 위해서 학교를 갔다. 변했다. 더 이상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
둘째, 고향은 평안함이 있는 곳이다. 집은 편하다. 익숙하다. 예의를 차리는 게 없어도 된다. 형용사와 부사가 필요없다. 집 떠나면 고생이라고 하지 않는가! 속된 말로 개고생이다. 독일어로도 Hundmuede! 아무리 밖에서 호의호식을 한다고 해도 어머님의 그 된장국이 더 그립다. 그것은 평안함이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곳에서는 무시를 받아도 집에서는 뉘집 귀한 아들램이요 딸램이인 것이다. 허벌나게 발뻗고 예의없이 방심하고 아무렇게나 입고 있어도 되는 곳이다.
셋째, 나의 근본을 아는 곳이다. 나의 근본이 있는 곳이고 나의 근본을 아는 곳이다.
시골에 가면 “야가 순태아이라 뭐 이키 컸노? 내사 마 몬알보겠네” 라고 말한다. 어릴 때 베트콩처럼 해서 땟꾹물이 찌르르 흐르고 그런 게 이렇게 많이 컸구만. 베를린의 장세균목사님 사모님은 영등포시립병원에서 근무하셨기 때문에 저의 초등학교 시절을 하신다. 그래서 권위 다 떨어진다. 우리는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청소년들의 근본을 알고 있다. 하지만 도회지는 근본을 모르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이 사람이 어떠한 사람인지 믿을만한 사람인지 도무지 알지 못한다. 이곳에 “고향”이 가끔 온다. 부모님이 오신다는 것이다. 그분들을 만나면 숨겨진 비화들을 진솔하게 들을 수 있다. 여기서는 우아한채 하지만, 다 드러난다. 그래서 전전긍긍하는 지체들도 있다. 목사님 만나서 웬 딴소리 하는거 아닌가 해서 말이다.
넷째, 고향은 어른이 있는 곳이다. 고향은 부모님이 계시는 곳이다. 부모님이 계시지 않으면 우리는 고향을 가지 않는다. 가도 별로 아는 사람도 없다. 고향은 그냥 고향이 아니라, 부모님이 계셔야 한다.
어릴 때 큰 집은 집이 커야 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큰 아버지가 있으면 큰 집이었다. 어른이 있으면 그것이 중심이 되는 것이다.
우리 라이프찌히 교회가 이곳에 있은지 20년이 되었다. 25세나 30세쯤 온 사람들은 이제 50이 다 되었다. 그들이 서서히 방문을 하곤 한다. 그때 처음에 계셨던 어르신들이 있을 때 무척 반가워한다. 권목사가 이곳에 오래 있으면 고향과 같을 것이다. 다시 찾아왔을 때 기분이 좋다.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1, 2년 학교를 방문하면 여전히 후배가 반기고 선생님이 반기고 해서 가고 싶다. 하지만, 수년이 더 지나봐라. 가고 싶은 생각이 없어진다.
III. 이스라엘민족을 정의하는 여러 단어 중의 하나는 유리하는 백성으로 언제나 고향을 사모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1)이스라엘이 애굽의 고센땅에 머물 때에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지만(창47:27) 야곱은 죽을 날이 가까워오는 147세 때에 요셉에게 유언을 한다.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창47:29-30)고 한다. 2)이스라엘이 B.C. 586년 바벨론 느브갓네살 왕의 포로로 고향을 떠나야 했을 때 얼마나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갈망했을까? 포로 중의 하나였던 제사장 에스겔은 그발강가에서 고향을 생각했고 다니엘은 기도하지 말라는 다리오왕의 조서에도 굴하지 않고 고향 예루살렘을 향해서 하루 세 번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A.D. 70년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이스라엘백성들이 나라를 잃고 전세계로 유리하는 백성이 되었을 때 얼마나 하나님의 약속의 땅 시온을 찾았을까?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 이후 나라를 잃고 거의 2000년 동안 유리하는 민족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나 194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서 물러나면서 유대인들이 지금의 예루살렘에 국가를 세우게 되었다. 그래서 1948년 5월 14일을 욤 하츠마우트라고 해서 독립기념일로 지킨다. 반면 팔레스타인들을 나크바의 날이라고 즉 재앙의 날로 5월 15일을 지킨다. 그들이 있는 곳이 비록 이제는 안정되고 풍요롭고 인정을 받아 거주할 수 있다고 해도 그들에게는 머물 곳이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 하였다. 애굽의 고센땅이 아무리 비옥하고 기름지다고 해도 그곳은 타지요 정 붙일 곳이 아니었다. 바벨론에서 인정을 받고 이스라엘족속이 고위관직에 오른다 해도 그곳은 여전히 바벨론일 뿐이지 고향땅은 아니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갈 곳은 어디였는가? 믿음의 선조들이 갈 곳이 어디였는가? 오늘 말씀에는 그들이 찾는 것이 고향이 아니요 본향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 돌아갈 만한 익숙한 곳이 고센땅일 수도 있고 가나안 땅일 수도 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는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히11:16)고 한다. 믿음의 조상들이 찾던 본향은 애굽의 고센땅이 아니었다. 만일 나온 곳을 본향으로 생각했더라면 그들은 다시 광야를 거쳐 애굽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사실 종종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계속 애굽을 생각했다. 본전 생각이 난 것이다. 과거로 회귀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들이 가야 할 곳이 이집트였을까? 마늘과 부추를 먹을 수 있고 고기를 먹을 수 있던 그 애굽이었을까? 아니다. 그곳은 그들이 돌아갈 본향이 아니었다. 그러했다면 갔을 것이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15절).
이스라엘이 찾는 곳은 단순히 이전에 머물렀던 곳이 아니요 하나님이 예비하신 “더 나은 본향”이었다.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성이요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으로 계시는 곳이다. 고향이 변함없다고 했는데 바로 변함없으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 본향이다. 고향에는 어른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우리의 아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계신 곳이 바로 본향이다. 고향에는 평안함이 있다고 했는데 우리의 안식이 되는 곳이 바로 본향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안식할 수 있는 곳이다. 고향은 우리의 근본을 다 아는 곳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은 처음과 나중 되시어 우리의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본향이 아닌 나그네의 삶에는 눈물, 사망, 애통, 곡하는 것, 아픈 것... 이러한 것들이 있다. 우리가 기쁨을 누리려고 해도 슬픔이 온다. 성공을 얻으려고 해도 좌절이 온다. 행복을 누리려고 해도 불행이 온다. 우리의 삶은 아이러니 하게도 세우려고 하지만 넘어진다. 그 땅의 것들은 우리가 애쓰고 수고하지만, 남는 것이 없이 다 썩어지고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본향은 눈물이 없는 곳이고 하나님이 임재해 계시는 곳이다.
IV. 그러면 그 본향에 어떻게 갈 수 있는가? 즉 변함이 없고 평안이 있고 나의 모든 근본을 아시는 하나님께로 가는 방법이 무엇인가? 히브리서 11장이 “믿음으로”라는 믿음장인 것처럼 믿음으로 말미암아 가는 것이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우리가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해산의 고통과 생명을 주신 은혜롤 통해서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Born-again 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 명부에 올라가게 되었다. 본향에는 들어가는 자가 있고 들어가지 못하는 자가 있다. 계시록 21장 27절을 보라.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 그러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되지 않은 자는 어떻게 되는가? 계시록 20장 15절을 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져지리라.” 생명책에 기록되어진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품은 자이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11:25)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14: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요한1서5:12).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우리는 천국에 머무는 시민권자로서 새 하늘과 새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의 시민으로 사는 것이다.
이번 주 금요일은 설이다. 고향을 찾는 마음이 있다. 이산가족들은 부디 북한이 맘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이곳 독일에서 우리는 설 기분도 별로 나지 않고 정신없이 시험과 생활에 쫓기면서 살아가고 있지만 부모님을 생각하고 고향을 추억한다. 다음 주는 떡국을 먹어야겠다. 무엇보다도 고향이 생각나는 설을 맞으면서 우리의 궁극적인 본향이 어딘지 다시 한번 깨닫고 살아가기 바란다. 우리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고 우리가 최종적으로 가야할 더 나은 본향을 소망하며 기대하며 살기를 축원한다.